• The Growth of a National Movement
    • 의학교육의 개혁이 국가적 움직임이 것은 1890년대 이후이다. 같은 현상은 전체적으로 향상된 교수 집단, 그리고 학교간의 경쟁에 기인한 바가 있지만, 다른 요소들도 중요하게 작용했다. 의학 저널, clubs, societies같은 것들은 모두 교육적 아이디어의 토론과 확산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다양한 학교의 의학교육자들은 친분을 쌓고, 같은 학회 활동을 하면서 아이디어를 공유하고 서로 격려해주며 지지해주었다.
    • 교육 이념의 확산에 기여를 국가 기관이 있다. 하나는 AAMC이며, 다른 하나는 AMA이다.
      • 이들은 학교들이 교육과 관련한 목소리를 있게 해줬고, 토론과 논의의 장이었다. 또한 출판물을 통해서 전체 medical community 의학교육과 관련한 주제에 관심을 갖도록 해주었다. 그리고 1907 AAMC Council on Medical Education 학교들에 대한 평가를 시작하였을 , 개혁적 움직임은 가속화되었다.
    • 1910 이전에는 조직 모두 의학교육 개혁에 어떠한 움직임도 취하지 않았다.
      • 사실 1910년이 되어서야 학교의 1/3정도가 가입하였고, 가입을 위한 최저 조건도 낮았다.
      • 그럼에도 조직 모두 점차 의학교육에 규칙화된(regularize), 그리고 조직화된(coordinate) 영향을 미치기 시작하였다.
      • 1891 Western Reserve대학의 대표는 AAMC 3년제 medical course 정의를 분명히 내려달라고 요구했다.
      • AAMC medical school로만 이루어져 있어서 그들의 목소리는 대변했으나 외부 조직의 의견은 반영되지 않았다.
      • 그러나 결정이 내려지고 정책으로 시행되면 member 아닌 학교도 educational issue clarification 이득을 보았다.
    • 다양한 토론의 가지 결과는 커리큘럼의 균질성을 향한 움직임이었다.
      • 이러한 움직임은 AMA AAMC 의해 촉진되었고, 조직 모두 model curricula 출판하였다.
    • 그러나 1900년대 초반에 의학교육은 균일성과는 거리가 멀었다.
      • 해부학은 학교에 따라 126시간부터 1248시간까지 다양했다.
    • Standardization 돌릴 없는 추세였다. 비록 극단의 variation 크긴 했지만, 대부분의 학교는 일정 범위 내에 몰려 있었다.
      • 전반적으로 미국의 교통과 통신 기술이 발달하였고, 의학교육에서도 이러한 변화의 영향을 느낄 있었다.
      • 절대적인 동등성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일정 수준 이상의 유사함이 필요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방향은 1900년대의 의학교육에서 이미 진행되고 있던 변화였다.
      • 학교간 차이를 조율하고, 모든 곳에서 course requirement '동일한 것을 의미하도록' 만들기 위한 논의가 이뤄지고 있었다.
    • 1900년대 초반의 학교에서 medical degree 따는 것은 전보다 훨씬 어려운 일이 되었다.
      • 요구조건이 까다로워졌고, 과목은 어려워졌고, 시험의 난이도도 올라갔다.
    • 그러나 학생들은 별로 신경쓰지 않는 하였다.
      • 쉽게 MD degree 있는 학교들이 여전히 있었음에도, 많은 학생들이 점차 스스로 고된 프로그램에 지원하였다.
      • 학생들은 faculty에게 많은 지원을 해달라는 청원을 하기도 했다.
    • 또한 일부 학교들이 아직 입학 요구조건을 제정하지 않았음에도 학생들은 이전보다 준비된 상태로, 꿈을 가지고 의대에 들어왔다.
      • 1900년대 초반 의대에는 가장 능력있는, 가장 평판좋은 학생들이 들어오고 있었다.
    • 의학교육이 변하며 학생들은 많은 것을 요구받았듯, 교수들에게도 많은 것이 요구되었다.
      • 우선 어떤 것을 가르치고 어떤 것을 가르치지 않을 것인가를 결정해야 했다.
      • 또한 교육 기법도 점차 익히기 어려워졌다. '무엇을 가르칠 것인가' 아니라 '어떻게 가르칠 것인가' 문제였던 것이다.
    • 이에 따라 1890년대의 의학교육자들은 어느 때보다도 교육적 책임을 지게 되었다.
      • 국가적 수준에서, 의사들을 모으고 교육 방법에 대한 토론 기회를 제공하는데 가장 중요한 기관은 AAMC였다. 교육과정을 자세히 보고, 세밀한 부분까지 토의하였다. 의학교육은 자체로 전문 분야가 되었고, 많은 physician들이 그들 스스로를 의학교육자로 보기 시작했다.
    • 가르친다는 것이 개념적으로 어려워졌을 뿐만 아니라, 실제로 많은 시간을 할애해야 했다. 진료를 보면서 교육을 하기 위해서는 이전보다 많은 시간을 들여야 했다.
    • 교수자의 숫자가 늘어나도, 여전히 동일한 문제가 있었다. 점차 교수들이 private practice 하면서 educational duty 손을 놓기 시작했다.
    • 이러한 이유로, 1890년대와 1900년대의 몇몇 의대들은 진료는 하지 않는 full-time instructor 고용하였다.

 

  • Medical Education in 1910
    • 1900년대 초에, 의학교육의 새로운 시스템이 뿌리를 내리기 시작했다. 시스템은, 과학 과목에 강조를 두고, 실험실 방법을 통해 가르치며, full time professor 고용하는, 독일로부터 영감을 받은 방식이었다.
    • 미국인들은 유럽식의 방법을 단순히 미국에 그대로 가져오지 않았다. 미국적 환경에서 도입될 있도록 적용하는 과정에서 변형되었다.
      • 독일의 privatdocenten 도입되지 않았고, 독일의 학교에서 다른 학교로 돌아다니는 것도 미국에 도입되지 않았다.
      • 그리고 무엇보다도, 모두에게 동일한 기회를 제공하는 미국의 평등주의적인 교육이, 일부 엘리트에게 최고의 교육을 제공하는 유럽과 가장 다른 점이었다.
    • 이러한 것들을 특징으로 하는 새로운 시스템이 적용되었고, 1890년대에 많은 주에서 면허시험을 도입하면서, leading school 졸업생들은 개혁이 느린 학교의 졸업생들보다 나은 performance 보였다.
    • 대중들도 의학교육에 중대한 변화가 생겼다는 것을 인지하기 시작했다.
      • 예로서 Homeopathy 점차 유명세를 잃어가기 시작했다.
      • 또한 1890년대에 여러 주에서 licensing law 제정되었으며, 훗날의 1930년대 만큼은 아니더라도 의사는 대중으로부터 인정받는 직업이 되었고, 이런 변화는 의사가 키워지는 방법에 대한 차이의 인식에서 근원한 것이었다.
    • 의학교육의 진보는 부드럽고, 평등하게 이뤄지지 않았다.
      • 교육과정은 과목마다 질적으로 서로 달랐고, 어떤 course 너무 붐볐다. 어떤 학교는 변변찮은 도서관 하나 없었다.
      • 기금이 부족한 것이라든가, 실험실/병원 시설이 후진 것은 상위권 학교에서도 흔한 현상이었다.
    • 가장 문제는 proprietary school 여전히 성행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1870년과 1900 사이에 미국의 medical school 숫자는 배가 되었고, 1906 162개로 최고를 찍었다. 1910년까지 생기고 사라진 학교를 모두 포함하면 457개의 학교가 미국 또는 캐나다에서 운영되었다. 최악의 학교에서는 돈을 있는 사람은 누구든 입학이 가능했다.
    • 1910년의 미국 의학교육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상당한 수준의 학교별 격차를 있다.
      • Table 4.4 : 6 급으로 분류한 1910년의 미국 의대.
    • 최고 수준의 학교는 JH, Harvard, Columbia등이 있었다.
    • 3급과 4급에는 어느 정도의 수준에는 도달했지만, 매우 우수한 수준은 아닌 학교들 있다. 학교들의 대부분은 Post-Flexner period에도 살아남았다.
    • 아래 급에 해당하는 학교들은 상당히 고전중이었다.
      • 중에서도 Tier 5 Tier 6 차이가 있었는데, Tier 5 단순히 흉내내기보다는 나은 수준의 실제 실험실과 clinical work 이뤄지고 있었다. Tier 5 실제로 교육 개혁을 하고자 하는 학교들이었다.
      • Tier 6 학교는 Post-Flexner period 살아남지 못했다.
    • 같은 질적으로 엄청난 격차는 현대의 관점에서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다.
    • Proprietary school 내에서도 엄청난 차이가 있었다.
    • Georgetown, College of Physicians and Surgeons, Baltimore Medical College 같은 proprietary school 그래도 돈만 버는데 급급한 다른 학교들과는 달랐다.
    • 이러한 학교들을 전체적으로 평가함에 있어서, 1910년의 개념적 혁명(Conceptual Revolution) 확실했다. 최하위 학교를 포함한 모든 학교가 새로운 교육적 이념이 무엇인지는 알고 있었다. Catalog 가지고는 학교간 차이를 수가 없을 정도였다. 가장 좋지 않은 학교도 같은 교육적 언어를 구사하고 있다는 것은, 이러한 새로운 개념이 얼마나 퍼져 있었는지를 보여주는 것이다.
    • Tier 1~Tier 5 내에서도 새로운 교육 목표를 도입하는데 있어서 성공한 정도는 학교마다 달랐을지라도 그렇게 하고자 하는 의지만은 비슷했다.
      • Tier 6만이 medical school 여전히 사업으로 보고 있었다.
    • 1910, 아직 풀리지 않은 많은 문제에도 불구하고, 그리고 학교간 차이에도 불구하고 의학교육에 있어서 엄청난 걸음을 것은 분명했다. 많은 지표들이 새로운 시대가 도래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었다.
      • 유럽으로 공부하러 가는 미국인들의 수는 크게 줄었다.
      • 때는 의학교육에서 가장 거부하는 하나였던 Science 공고한 위치를 확보하였다.
      • 많은 사람들이 의학교육의 새로운 시대가 1910년의 Flexner Report만을 기다려왔다고 생각하나, 1910 이전의 의학교육자들의 성장하는 모습이나 성과를 본다면, 시대는 이미 시작된 것과 같았다.
    • 모든 성공한 운동에는 운동이 목표를 달성했다는 것을 보여주는 특정한 시점이 있다. 의학교육에서 시점은 1905 즈음이다.
    • 당시 이미 Modern Medical Education 시작되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가지 지표는, Flexner report 나오기 전에 보여준 진전된 정도(degree of progress)이다.
      • 학교마다 차이는 있었을지 몰라도 모든 학교에서 개선이 이뤄지고 있었다.
    • 번째 지표는 학생들이 쉬운 길을 있었음에도 점차 나은, 어려운 학교로 모여들었다는 사실이다. 순간적으로 enrollment 감소했다가도 다시 증가하였고, 학교들은 나은 개별적 교습 환경을 위해서 입학 정원의 숫자를 제한하였다.
    • 반대로 1910 proprietary school 이미 상당히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었다. 그러한 학교들은 이미 사업으로서는 불안정한 모험이었다. 1900 이후, 미국 의학교육의 수준이 높아지면서 이러한 학교들은 점차 자리를 잃어갔다.
    • 번째 신호는 faculty 당사자들로부터 나왔다. 그들이 이룬 성과에 만족하는 교수들은 어느 곳에도 없었다(Tier 6 제외). 그들은 꾸준히 '아직 해야 하는 것이 무엇인가' 초점을 맞추고 있었다.
      • Faculty들은 학교는 그들이 지금까지 얼마나 발전하였는가 보다, 앞으로 어떤 것이 이뤄질 있을 것인가를 기준으로 평가받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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