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The Death of the Proprietary School
    • AMA Council on Medical Education(CME) 통하여 medical licensing 관여하였다. CME leading school에서 다섯 명의 저명한 의학교육자로 구성된 조직이었다.
      • Council에서 학교들에 대한 rating 했고(A, B, C) AMA 승인을 얻지 못한 학교는 강제로 소멸될 밖에 없었다.
    • MS 평가하는데 있어서 CME 기준을 세우는 역할을 했고, "Essentials of an Acceptable Medical College" 기준이 나와있다. Council 학교의 모든 면에 대해 자세히 조사했으며 가지 측면에서 합당한 기준에 도달할 경우에만 Class A 주어졌다.
      • Enough Endowment,
      • Adequate facilities,
      • Presence of at least six full-time professor in the basic science department
    • 가지 주요 criteria 중에서 번째 요건이 가장 많은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 아직도 일부 사람들은 과연 모든 학교에 Center of research 있어야 하는가에 대한 의문을 제기했다.
    • CME 구성하고 있던 University teacher "practical" school 존재할 자리가 남아있는 시대는 이미 지났다고 여겼다. Council 통하여 academic elite들이 이미 궁극적인 승리를 거머쥐었고, 국가적인 기준이 되었다.
    • Council 강력한 압박 속에서 Medical School들은 이에 순응하는 외에 다른 방도가 없었다.
      • "Council had the power to destroy us"
      • 약한 학교들은 Council 집중적인 공격을 받게 되었고, medical diploma 진료를 있는 면허가 없다면 사실상 쓸모없는 것이었다.
    • 하지만 모든 학교들이 순순히 사라진 것은 아니다.. 몇몇 삼류 대학(diploma mills) 제외하고 대부분의 학교는 그들에게 부족한 부분을 보완하고자 노력했다.
      • 도시에 있는 학교들은 강력한 대학에 붙어서 많은 지원과 병원 시설을 이용할 있는 면에서 유리했다.
      • 궁극적으로 살아남은 학교와 사라진 학교 사이에 바람직한 의학교육에 대한 이해나 갈망은 별로 차이가 없었다.
    • 대부분의 학교는 별다른 원한 없이 문을 닫았다. Faculty 그들이 남아 있을 자격이 충분하다고 생각하지 않았고, 적절한 시설이 갖춰지지 않은 상태에서는 꾸역꾸역 남아 있는 것보다는 그냥 분야를 뜨는 것이 낫다고 판단하였다.
      • 일부 약한 MS 협력하고 있던 college university 의학교육에서 손을 떼게 것을 오히려 기뻐하기도 했다.
    • 일부 학교는 합병을 통하여 생존방법을 모색했다. 혹은 이상의 약한 학교들이 그들의 자원을 합해서 하나의 강력한 학교로 거듭나게 것이다.
    • 하나의 도시에 개의 고만고만한 학교가 있을 때에도 합병은 좋은 수단이었다. 그리고 강력한 학교들은 약한 경쟁자들을 없애는 수단으로서 합병을 하기도 했다.
      • 강한 학교가 약한 학교를 합병하는 일은 흔히 일어났지만, 개의 강력한 학교들 사이의 합병은 거의 없었다. 학문적 라이벌관계에서 그런 일은 일어나기 쉽지 않았던 것이다.
    • 겉으로는 합병이 된것 같아도, 속으로는 인정사정 봐주지 않는 일도 많았다. 강한 자부심을 가지고 있는, 이전까지는 서로 아무 관계가 없는 faculty 합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던 것이다.
    • 1910 이후, proprietary school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사라져갔다. 1920년에는 6 정도의 삼류학교만이 겨우 살아남을 있었고 1930년에는 일정 이상의 수준을 갖춘 76개의 MS만이 남아있었다.
    • 비록 MS 수는 1910년의 MS 수의 절반을 조금 넘는 정도였음에도, Flexner 생각했던 MS 수의 감축 목표에는 겨우 절반정도 도달했을 뿐이었다.
      • Flexner 미국과 캐나다에 31개의 MS이면 충분하다고 주장했다.
    • 엄격한 면허법을 도입하기 위해서 AMA 혼자 고군분투 했던 것은 아니다. 물론 가장 영향력있는 기관이긴 했지만 많은 다른 기관도 나름의 역할을 했다. 예가 AAMC이다.
      • 1912 faculty "AMA, AAMC, Carnegie Foundation 서로서로 돕고 있다" 라고 했다.
    • 그럼에도 불구하고 개혁 연합군(Reform coalition) 내부는 상당히 다양했다. 멤버들 사이에 항상 건강한 긴장이 흐르고 있었으며 이러한 분위기는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 " 다섯 개의 조직(CME, AAME, CF, NBRPS, FoSMB) 의학교육의 발전에 가장 역할을 기구이다"
    • 한때 개혁 연합군은 거의 갈라설 적도 있다. 이것은 1914 일어난 일인데, 남부의 입학요건에 대해서 조직별로 첨예한 입장 대립을 보였던 것이다.
      • CME 같은 입학 기준, CF 일시적으로라도 낮은 입학 기준 주장.
    • 개혁가들의 슬로건은 "소수 정예의 의사(fewer and better doctors)"였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이러한 일은 결코 일어나지 않았다. 1930, MS 숫자는 줄었지만, 의사 수는 줄지 않았다. (Table 13.1)
      • 단위인구당 의사 수는 1958년이나 1938년이다 별반 차이가 없었다.
    • Proprietary school 사라져갔음에도 불구하고 의사 수는 줄지 않았고, 이주민이나 흑인이나 소수인종 등과 같이 사회적 약자들의 기회만 확연히 줄었다.
      • 준비가 학생들의 유급이(attrition rate) 매우 높아서, 사실상 이미 낮은 계층이 의사가 되는 것은 어려워진 상태였는데 Proprietary school 사라짐으로써 그러한 현상이 확실해진 뿐이었다.
    • 모든 취약계층 중에서도 여성이 받는 차별이 가장 심했는데, 이러한 현상은 1970 초반 페미니스트 운동이 일어날 때까지 계속 유지되었다.
    • Proprietary school 의학교육 개혁자들에 의해서 엄청난 비난을 받곤 하지만, 한편으로는 훌륭한 전통을 가지고 있기도 했다. 비록 정직하지 못한 학교라는 점에 대해서는 동정의 여지가 없으나, 1910년에 가장 질적으로 낮은 proprietary school조차 1870년에 가장 좋은 MS보다 훨씬 나았다. 또한 학교의 졸업생들의 상당수가 (마치 요즘의 foreign medical graduate처럼) 경쟁이 훨씬 덜한 시골 지방으로 내려가서 의사 생활을 했다.
      • 다른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했던 것처럼 Flexner 좋은 학교를 나온 학생들도 자연스럽게 지방으로 내려가 의사 역할을 것이라 생각하였다. 하지만 완전히 틀린 예측이었다. 그들은 점차 도시로 모여들었지, 작은 마을로 가지 않았다.
      • Proprietary school 종말과 함께 나은 수준의 의사들이 배출됨으로써 공공이 이익을 보았지만, 의사의 불균형적 분포라는 측면에서는 전혀 그렇지 않았다. 오늘날 의사 분포의 문제가 바로 여기서부터 시작된 것이다.
    • 비록 1930년대의 의학교육자들이 이러한 의사의 불균등한 분포에 대해 걱정하긴 했지만, 그들은 modern university medical school 비롯한 그들이 이뤄낸 성과를 자랑스러워했다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