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Chapter 13. State Licensing
    • 넓게 보면 현재 미국의 의학교육은 크게 가지 과정을 밟아왔다. (1)하나는 modern medical school 형성이다. 1850 시작된 과정은 WWI동안 막을 내리며 1920 굳건한 재정적 기반을 마련하면서 academic medicine teaching hospital 갖추게 되었다. 동등하게 중요한 (2)다른 하나는 proprietary school 종말이다. 과정은 1910 이후 모든 주에서 엄격한 면허 제도가 시행되는 15 동안의 기간에 달성되었다.
    • 주립 면허(state licensing) 제도의 도입과 함께 Medical School들은 상당히 서로 비슷한 모습을 갖추게 된다. 정확히 똑같은 교육을 하는 학교는 없어도 공통점은 차이점을 가볍게 넘어섰다. 면허제도는 심지어 최고 수준의 학교에서까지 교육과정을 경직되게 만들었다. 조금 나아지긴 했지만, 얼마나 교육과정을 standardization 시켜야 하는지에 대한 논의는 지금까지도 유효하다.

 

  • State Licensing and the Rise of the AMA
    • 1910 Flexner Report 나왔을 당시 proprietary school 시대는 빠르게 저물고 있었다. 누구보다 학생들이 먼저 멀리하기 시작했다.
    • 그럼에도 불구하고 1910년까지 낮은 수준의 Medical School 여전히 있었는데, 그것은 강력한 면허법이 없었기 때문이다.
      • 1906년까지도 13 주는 졸업하지 않은 사람에게까지 의사 면허를 주고 있었다.
      • 효과적인 면허법이 없는 의사라면 누구나 돈벌이 용도로 MS 운영해볼까 하는 생각을 수밖에 없었다.
    • 1910년까지 주립 면허법은 미국 의학교육에 별로 중요한 요소가 아니었다. FR에서 Flexner "the power to examine is the power to destroy"라고 말하며 ()차원의 시험을 "의학교육의 재구성에 엄청난 영향을 있는 도구(instrument)"라고 하였다.
    • FR 이러한 언급을 하자, 이를 깨달은 대중들은 state boards 중요한 임무로서 요구하기 시작했다.
      • 법안의 요구조건 하나로서, state boards(SB) MS 대한 평가를 도입했고, 이렇게 평가를 통해서 '승인받은' 학교의 졸업생만이 면허시험에 응시할 자격이 주어졌다.
      • 이러한 요구조건은 사기를 치는 학교나, 의도는 좋아도 실제로 부실한 학교들이 없어지는 계기가 되었다.
    • 면허법의 제정은 무난히 이뤄지지 않았다. 많은 사람들이 정부의 통제는 개인의 자유를 억압하는 것이라고 여겼다.
    • 그렇지만 1900년대 초반, 광범위한 역사적 힘은 면허제도의 도입을 요구하고 있었다. 시스템의 형성과정은 힘든 것이었지만 주립 면허법의 광범위한 도입으로 인하여 정부의 역할에 대한 관점이 바뀌었다.
    • 정부가 의학교육을 규제하는 것에 대해 의심이 끊이지 않았지만, Henry Pritchett이나 Abraham Flexner 누구보다도 이러한 의구심에 적극적으로 대응했다. 정부는 이미 어느 정도 개입하고 있는 상황이었고, 모두 이러한 정부의 개입 하나로써 '면허의 발급' 역시 고려대상이라고 생각했다.
      • 그들은 개인의 자유를 조금 잃는 것은 공공이 얻는 이득에 비하여 적다고 생각했다.
    • 주립 면허가 당시에 만연하던 political ethic 문제를 해결하는 정치적 해결책이 것이라는 기대는 정부의 이러한 역할을 받아들이는 것을 수월하게 해줬다.
      • 개혁자들은 의학교육자들이 licensing board 관리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 "State board of health 의과대학의 긴밀한 협조가 필요하다"
      • Licensing movement 사회의 중요한 political value 심어줌으로써 동력을 얻었다. 전문가에 의한 과학적인 management 강조함으로써 움직임은 political behavior 어떠해야 하는가에 대한 모범을 보여준 것이다.
    • 면허법은 스스로 등장한 것은 아니었다. 의학교육자들은 이러한 대중의 정서(sentiment) 이용함으로써 그들이 하는 로비의 효율성을 높였다.
      • 그들은 오랫동안 면허법이 필요하다고 홍보하고 다녔지만, FR 등장하고 나서야 의견은 힘을 얻었다.
      • AAMC Federation of State Medical Board National Board of Medical Examiner licensing board 협력적으로 일했다.
      • 가장 강력한 목소리를 것은 AMA Council of Medical Education이다. State Board 어떤 학교의 학위를 인정할 것인가를 결정할 Council 평가를 중요하게 활용했다.
    • 1900년대 초반의 AMA 19세기의 AMA와는 전혀 다른 조직이었다. 19세기에 AMA 약하고, 비효율적이고, 고루한(provincial) 조직이었다.
      • 이러한 상황은 1920년대까지 계속되었는데, professor practitioner 서로 각자의 길을 가면서 AMA내의 academic influence 거의 대학에서 독점하고 있던 Council on Medical Education밖에 남지 않았다. 후로 AMA 교육이나 연구보다 practitioner 의견(정치적, 경제적) 반영하는 조직이 되었다.
    • AMA 눈부신 성장에 있어 Joseph N McCormack 기여를 빼놓을 없다. 그는 AMA reorganization 이뤄낸 홍보 섭외(public relation) 천재였다.
      • 물론 그의 성공의 배경에는 광범위한 역사적 힘이 작용한 것도 사실이다. AMA 19세기 동안에는 아직 미미한 존재였기에, 누구도 profession 전체의 통합을 이뤄내지 못했다. 그러나 Scientific medicine 성장하면서 의사들이 그들 자신을 비슷한 기술과 방법을 통해 비슷한 결과를 달성해내기 위한 국가적인 공동체로 보기 시작했고 physician들도 특별히 질병의 원인에 대한 것이라든가 치료에 관한 것에 반대하지 않았다.
    • AMA 미국의학교육에서 어떤 일을 했어야 하는가는 이미 한참 전에 고민했어야 문제였다. 일반적 통념상 AMA 이미 개혁이 되어야만 하는 조직이었다. 19세기까지 AMA 어떻게 의학을 가르쳐야 하는가에 대하여 어떠한 새로운 아이디어도 내놓지 못하고 있었다. 오히려 거의 19세기 내내 AMA scientific subject 중요성을 아예 믿지도 않았다.
      • 미국의학교육의 역사에서 1910년까지 AMA 일은 아무것도 없다고 해도 전혀 과언이 아니었다.
    • 게다가 1910 이후에도 AMA 딱히 무슨 일을 했다고 보기도 어렵다. 근대 Medical School 만들어지는 것과 관련하여 최근에 일어난 사건들은 거의 AMA 무관하게 일어난 것들이다.
      • 짧게 말하면, AMA 역할은 Flexner Report 대하여 사람들이 과장되게 평가하는 것보다도 훨씬 과장되게 평가된 면이 있다.
    • 이러한 헛된 믿음의 근본적 원인은 출판된 보고서나 Council on Medical Education chairman이었던 Colwell 이나 Arthur Dean Bevan 등의 연설에 있다.
    • 그러나 둘은 아마도 용서받아야 할지도 모른다. 그들은 단지 그들의 일에는 열성적인데 반해, 역사적 감각이 무뎠을 뿐이다. 그들은 council 생기기 50년동안 의학교육의 모습을 만들어낸 거대한 힘에 대한 인식이 부족했던 것이다.
    • 그러나 AMA 아무런 의미 없는 조직으로만 보는 것도 온당치 못하다. AMA 의학교육을 다양한 방면에서 지원했으며, 가장 기여는 1910 이후 강력한 면허법이 도입되도록 것이다. 1910년과 1930 사이에 분야의 권력싸움은 실로 엄청난 것이었다. 정비된, 지원받는, 높인 인정받는, 홍보에 대단히 능숙한 조직은 state licensing 있어서 가장 강력한 조직이 되었다. 그리고 이것이 의학교육의 개혁에 미친 가장 영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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