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Chapter 12. The Rise of the Teaching Hostpital
- 1910년 이후 20년 동안, Medical School은 적절한 funding을 받았을 뿐 아니라, 임상교육에 대한 문제도 어느 정도 해결되었다. 이러한 변화는 teaching hospital의 등장과 함께 가능해진 것이었다. 20세기에 많은 좋은 병원들은 이 같은 활동(교육, 연구)의 후원자(patron)이 된다. Teaching hospital의 등장으로 modern clinical training의 필요가 드디어 충족될 수 있었던 것이다.
- A New Era Begins
- 19세기, 미국의 병원들 중 교육이나 연구에 호의적인 병원은 거의 없었다. 그러나 그 후 병원이 달라졌다. 20세기로 넘어가면서 그들이 원래 가지고 있던 가부장적인, 도덕주의자적(paternalistic, moralistic)인 태도는 버리고 advanced technology, specialized medicine 등에 집중하게 되었다. MS도 변하였는데, 그 자체가 예전보다 훨씬 더 강해졌던 것이다.
- 다른 중요한 요소들도 있었다. 그 중 하나는 [1] 의학교육자들의 뛰어난 entrepreneurship이었다. 이제 대중들은 어떻게 의사가 키워지는지를 알게 되었고, 그리고 의학교육자의 요구가 이전보다 훨씬 더 권위 있어졌다.
- 이러한 정서는 1910년 폭발하였는데 Columbia는 Presbyterian과, Harvard는 Peter Bent Brigham과 union을 맺었다.
- 점차 대학들이 affiliated hospital의 medical staff를 임명할 권리나 병원의 시설을 교육과 연구에 사용하는 것에 대한 권리를 가지게 되었다. 이와 같은 동맹은 JH의 설립 이후 임상교육이 업그레이드 되는 데 있어서 첫 번째의 breakthrough라고 할 수 있었다.
- 비록 Flexner Report가 teaching hospital의 전국적 확대를 주장한 것은 사실이나, 앞의 두 쌍의 병원-학교 결합이 일어난 시기가 FR가 발간된 때가 같은 해였다는 것은 그저 우연이다.
- Washington 대학은 두 개의 병원과 협력관계를 맺게 되었는데, 세 개 조직이 합병(merger)되는 것은 거의 동시에 진행되었고, 이 당시에 teaching hospital에 대한 전국적인 움직임이 있었다는 것을 고려하면 그다지 놀라운 일은 아니다.
- [2] Affiliation은 이사진 사이에 공통점이 있을 때 가속화되기도 했다.
- 어느 학교의 졸업생이 다른 조직의 이사라든가, 혼인 관계에 있는 가족이라든가, 매우 가까운 친구 사이 등등의 예가 있다.
- John Shaw Billings는 이러한 합병을 이뤄내기 위해 가장 열심히 로비를 한 사람 중 하나다. 그 옛날 JHMS를 설립하는 데 큰 기여를 했던 Billings와 같은 가문의 사람이다.
- 여러 Billing가(家) 사람들은 1870년 JHMS에 제안한 의학교육에 대한 바로 그 생각을 전파하는데 그들 인생의 황혼기를 쏟고 있었다.
- MS representative의 공격적인 자세는 앞의 세 가지 경우에 대해서만 어느 정도 해당되는 이야기일 뿐, 대개의 경우 병원의 이사진은 만만한 협상 대상이 아니었다. MS과의 새로운 affiliation을 체결하는 것에 있어서 그 어느 하나도 수월하게 이뤄진 경우는 거의 없다. Presbyterian official은 Columbia대학과의 alliance를 맺는 과정에서 "independent corporate existence and individuality"를 보장해달라고 주장했다고 한다.
- 이사진이 union에 동의를 했던 것은 그것이 그들에게 이득이 될 때였다. Presbyterian도 마찬가지.
- 네 병원의 대표는 MS와 동맹을 맺음으로써 그들이 얻게 된 이익을 확실히 알 수 있었다. (1) 그 중 하나는 더 나은 patient care가 가능해진 것이다.
- 실제로 더 나은 patient care를 했는지는 증명할 길은 없지만 적어도 그들은 그렇게 믿고 있었다.
- 이러한 믿음의 한 근거는 teaching hospital이 됨으로써 주치의, 인턴, 학생 등으로 조직된 팀이 지속적으로 환자 상태를 검토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 (2) 또한 병원 이사진은 teaching hospital은 가장 훌륭한 medial staff를 보유하고 있다고 믿었다. 그들이 보기에 가장 기술적으로, 지식적으로 뛰어난 clinician은 모든 시간을 질병의 연구에 쏟는 academic physician이지 local practitioner들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 Academic doctor에 대한 병원 official의 존경은 19세기 후반부터 20세기 초반에 이뤄진 의과학의 발전과도 연관이 있었다. 더 많은 과학 논문이 발표됨에 따라 더 나은 환자 관리가 가능해졌던 것이다.
- 네 병원의 official은 MS와 affiliation을 또 다른 측면에서 맺는 것의 장점을 확인할 수 있었는데, (3) 바로 affiliation을 맺음으로써 의학연구에 기여할 수 있는 수준이 더욱 높아진 것이다. 그들은 병원이 그 지역에서 뿐만 아니라 세계적으로도 인정받는 기관이 되기를 바랐다.
-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병원 이사진은 MS와의 affiliation을 상당히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병원과 학교는 서로서로 협동해가며 의학 지식을 확장시켜가기 시작했다.
- [3] 병원 official들 입장에서 affiliation을 선택한 세 번째 이유는 병원으로서 해야 할 일을 하려면, 경제적으로 그렇게 하는 것 외에 다른 여지가 없었기 때문이다.
- 근데 의학기술은, 최선의 medical care를 수행하려면 대단히 많은 비용이 필요하다. 실험실 뿐만 아니라 임상연구도 마찬가지였다.
- MS과 alliance를 맺는 것은 '노동력의 분산'을 가져왔고 모두에게 경제적으로도 이로운 일이었다.
- 병원은 학교에 더 나은 교육 시설을 제공했고, 반대로 학교는 병원에 scientifically 뛰어난 medical staff를 제공했다.
- 그 당시 기업들이 합병을 통해서 더 크고 더 효율적인 조직으로 발전하고 있었는데, 병원이라고 그렇게 하지 말라는 법은 없었던 것이다.
- Presbyterian, Peter Bent Brigham, Barnes, St.Louis Children's 와 같은 병원들은 사실 이미 teaching hospital이 될 운명에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들은 필요한 것들 - 크기, 시설, 환자, 재정 - 을 모두 갖추고 있었다. 이 병원들에게 교육적, 과학적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노력은 지역사회와 전 세계에 기여하기 위한 하나의 방법이었다. 수십년간 반대에 이러한 생각에 대한 반대의 물결이 드디어 뒤집어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