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11. The Maturation of Academic Medicine
- 1910년과 1930년 사이에, 현재를 포함하여 그 이후의 모든 시기가 그러했듯, MS에서 모아진 돈 중에 많은 부분이 교육보다는 연구에 쓰였다. 의학교육에의 funding은 두 가지 의미를 지녔는데, 하나는 높은 수준의 의학교육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었으며, 다른 하나는 experimental medicine을 가능하게 함으로써 academic medicine을 위한 새로운 자리들을 만들어낸 것이었다.
The Full-Time System
- 대중들이 의학교육을 좀 더 자유롭게 지원하게 됨에 따라서, 마침내 의학교육 뿐만 아니라 의학 연구가 성장하게 되었다.
- 1910년과 1930년 사이의 20년동안, academic medicine은 마침내 확실한 교수직(secure profession)을 유지할 만큼의 충분한 지원을 받게 되었다. 그 결과로 미국 의학교육 뿐만 아니라 미국 의학 연구가 국제적인 선두에 서게 되었다.
- 1910년 이전의 academic medicine의 성장통을 떠올려보면, 기초과학 department는 상대적으로 조용하고 쉽게 성장하였다. 의학이 실험적인 것을 기반으로 하여 발전함에 따라서 private practitioner는 기초과학을 가르친다는 것이 대단히 어려운 것임을 알게 되었다. 그 분야가 대단히 세분화 된 것이다. 그리고 해당 학문만을 전적으로 전공하는 사람이 그것을 가르치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게 되었다
- 임상 분과의 학문적 지위(academic stature)의 성장은 조금 더 드라마틱하였으며, 애초에 사람들은 그것에 대한 기대가 크지 않았다.
- Practicing physician들은 기초과학을 늘상 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환자는 꾸준히 보고 있었다. 임상 분과의 full-time instructor의 필요성은 기초과학 분과만큼 급하지는 않았다.
- 그러나 1900년대 초에 임상과학도 급격한 과학적 혁명(scientific revolution)을 겪고 있었다.
- 점차 laboratory based 되었으며, observational 한 전통이 사라지지는 않았지만 1920년에는 laboratory가 임상연구의 주요한 형태였던 case report를 대신하기 시작했다.
- 임상과학의 발전에 따라 임상분과의 faculty가 되고자 하는 사람들도 상당히 새로운 것을 요구받게 되었다.
- 심지어 스스로의 scientific preparation을 ‘애들 장난(farce)’이라고 여기며 dean을 사퇴한 사람도 있었다.
- 임상과학이 성장하자 MS의 임상분과에 점차 다른 type의 사람들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 “new clinical men”이라 불린 이 사람들은 과학적 background를 가지고 질병의 근본적 기전을 연구한 사람들이었다
- 한 세대 전까지만 해도 이런 사람들은 기초분과로 갔을 테지만 이제는 임상분과에 들어오게 된 것이다.
- 임상과학자들은 기초과학 분과의 동료들과 같은 학문적 가치를 추구했다. 두 그룹 모두 private practice보다 연구와 교육으로서의 career를 택했다. 임상과학이 발전하면서 마치 예전의 기초분과에 그랬던 것처럼, 임상분과에도 university value라고 할 수 있는 것이 널리 퍼졌다.
- 임상과학이 발전함에 따라 clinical discipline은 점차 진정한 대학 과목으로서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환자에 대한 업무는 감소하면서 1954년에는 15개 학교를 제외한 모든 학교에 full-time instructor가 있었다.
- 임상 분과의 Full-time system은 누군가가 독단적으로 도입한 것이 아니라 임상과학이 진정한 ‘과학적’ activity를 함에 따라서 자연스럽게 생겨나게 되었다. 그러나 어떻게 full-time clinical position을 도입하는 것이 가장 좋은 것이냐에 대한 문제는 여전히 논쟁이 있었다.
- 특히 가장 논란이 많았던 문제는 clinical scientist가 어느 수준 정도로 clinical skill을 유지해야 하는가에 대한 문제였다. 흔한 오해와는 달리 full-time professor가 환자를 보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 “clinical prig(도덕군자연 하는 사람)”
- Academic medicine 내에서 full-time appointment는 뜨거운 감자였다. Strict full-time system을 가장 강력하게 주장한 것은 GEB였다.
- 이에 반대하는 사람들은 대개 금전적인 이유를 댔는데, 왜냐하면 임상 faculty의 full-time salaries는 기초보다 약 2배쯤 많았기 때문이다.
- 또한 Rockefeller philanthropies의 영향을 두려워하는 이유도 있었다. (GEB는 Rockefeller가 설립)
- 그러나 이렇게 격렬한 논쟁이 벌어졌다는 사실이 대부분의 academic physician은 clinical full time이 타당하다고 생각했다는 사실 자체를 부정하지는 못한다. 대부분이 어떤 형태로든 full-time plan이 필요하다는 것에는 동의했다. Full-time의 핵심적 개념은 가장 중요한 업무가 교육과 연구로 대표되는 university duty 라는 것이다.
- 결국 여러 Medical School의 임상분과는 엄청난 다양성을 갖게 된다. 1920년 GEB조차 strict full time을 포기하고 더 유연한 형태를 지원하기 시작한다.
- 그럼에도 불구하고 1920년대 후반까지는 임상분과에 상당한 변화가 있게 된다. 임상 분과의 Professor들은 연구와 교육가 주된 임무라는 점에서 laboratory department의 교수들과 비슷해졌다.
- 임상분과는 이제 비가역적인 변화를 한 것과 같았다. 임상분과에 있어서 Medical scholarship은 preclinical branch와 같이 하나의 독립적인 professional activity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