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8. The Plight of Clinical Teaching

  • 1910년의 의학교육은 다른 심각한 문제를 안고 있었다. 임상 교육(Clinical teaching) 위한 환경이 열악했던 것이다. 매우 극소수의 학생만이 환자를 보는 경험을 있었다.
  • 임상교육에서의 이러한 문제는 MS들이 크고 시설이 되어있는 병원에 대한 권한을 갖지 못하는 데에서 기인했다. 그들은 clinical clerkship 도입할 없었고 clinical research 없었다. 병원이 없다는 것은 가장 중요한 제한 요인이었다. MS 병원의 관계가 재정립되기 전에는 이상의 발전은 불가능해보였다.

 

The Clinical Clerkship Struggles

  • 1910 이전에 미국의 의학교육은 균등하게 발전하지 않았다. 2년의 기초의학 교육은 어느 정도 자리잡았지만, 임상과목의 발전은 그에 미치지 못했다. 강의는 대부분 didactic 하였고, 실습의 기회가 적었다.
  • 가장 뛰어난 학교의 의학교육자들도 이러한 문제를 가지고 있었다.
  • 물론 Civil War 이후 상당한 발전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임상 과목을 배우는 시간이 늘어났고, Curriculum 바뀌었으며, 병원에 머물면서 환자를 보는 시간도 있었고, section teaching 통해서 학생들은 어느 때보다 환자들과 가까이 있었다.
  • 그러나 section method 자체로 심각한 결함이 있었는데, 바로 "learning by doing"이라는 원칙에 위배된다는 점이었다. Section teaching에서 환자들은 '학생이 보는 앞에서' care 받는 것이지 '학생에 의해서' care 받는 것이 아니었다. Section teaching 심하게 말하면 lecture보다 조금 나은 정도였다.
  • 이런 교육적 약점은 clerkship 통해서만이 극복될 있었다. Clerkship 하면 학생은 그냥 병동을 방문하는 대신, 학생들은 4명에서 6명의 환자를 배정받아서 환자 care 많은 시간을 쏟을 있었다.
  • 미국 임상교육의 이러한 문제는 clerkship 생존 여부였다. 몇몇 학교를 제외하고 clerkship 점차 소멸되어가고 있었다.
  • 1900 이후 약간의 희망의 빛이 비쳤는데, 많은 학교들이 학생들을 clinical clerk로서 일할 있게 기회를 주었던 것이다. 그러나 매우 일부 학생들만이 기회를 가질 있었고 affiliated hospital 선의에 기댈 밖에 없었기에 미래가 불투명했다.
  • 1900년대 초반, 일부 MS 외래환자 clinic에서 practical training 받을 있게 하였다. 그러나 진료소(dispensary) teaching 그저 임시방편일 뿐이었다. 교육에 필요한 기구조차 갖추어져 있지 않았다.
  • 따라서 Civil War 이후로 많은 개선이 이뤄졌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남아있는 불만족스러운 상황들을 숨길 수는 없었다. Flexner report에서 종종 잊혀지는 것은 report 미국 의학교육에서 특히 임상교육을 상당히 비판적으로 언급하고 있다는 것이다.

 

The Rift between Medical Schools and Hospitals

  • Clerkship 많은 이유로 고전중이었다. 극소수의 MS만이 teaching hospital 대한 권한을 가지고 있었고, MS 학생들이 clinical clerk으로 일할 있는지 없는지에 대한 결정권한이 없었다. 또한 MS affiliated hospital 어떤 의사를 고용할 것인지에 대한 권한도 없었다. 극소수의 MS만이 teaching hospital 대한 권한을 가지고 있었다(대표적으로 JHMS).
  • 1900년대 초반에, 뛰어난 teaching hospital 확보하는 것이 뛰어난 임상교육을 제공하는 것에 있어서 가장 관건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 역설적으로, 이러한 어려움은 병원을 의학 교육기관으로 오랫동안 사용해왔던 전통에도 불구하고 생긴 것이었다.
  • 원래 병원에서 담당하던 의학교육이 1890년대에 이상 modern medical education 적합하지 않다는 것이 확실해진 것이다. 19세기를 거치면서 병원들은 억지로 교육을 담당했고, 이사진(trustee)들은 그들이 의학교육에 참여하고자 하는 열정이 있다고 했지만, 이것은 굉장히 한정적인 의미였다. 적어도 clerkship 포함한 의미는 아니었다.
    • 산과(obstetrics)에서만 교육이 환자 관리와 연계되어 있었는데, 그것은 아직 까지만 해도 집에서 아이를 낳는 것이 흔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 어떻게 상황이 이렇게 되었는가를 알기 위해서는 미국 MS hospital 역사를 알아야 필요가 있다. 기관은 서로 분리되어 발전해왔다. 의학교육이 superficial하고 didactic 때에는 이러한 구도가 문제가 되지 않았다.
  • 그러나 Civil War 이후에, 균형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병원들은 이상 의학교육의 부속품으로 존재할 없었고, 병원은 clinical year 동안에는 Medical School이어야만 했다. 그러나 병원들은 이러한 변화를 완강히 거부했다.
  • 19세기 후반, 많은 MS 나은 임상시설을 확보하기 위하여 상당한 노력을 했다. 가지 방법은 병원을 짓는 것이었다. 일부 우수한 학교에서는 이러한 방법이 가능했다.
  • 그러나 WWI 이전에 성공적인 대학병원이라고 만한 곳은 많지 않았다. 대부분의 "university hospital" 자금의 부족으로 너무 작고, 시설도 부족했다.
  • 일부 university hospital 정도가 심각했다. Flexner 따르면 병원을 upgrade하는데는 너무나 거액의 돈을 필요로 했기 때문에 여전히 가르치기에도 부적합했고, faculty 고작 40에서 60개의 병상만을 관리할 뿐이었다.
  • University of Michigan Hospital 상황은 가장 역설적이었다. 곳에서의 임상 교육은 가장 조직화되었음에도 (특히 내과) Michigan 병원의 작은 규모와 지리적 불리함 때문에 운영할 기금이 적어서 모든 것이 좋게 돌아가고 있었다.
  • 비용의 문제로 인하여 많은 학교들은 아예 병원을 지으려는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재정 문제가 scientific teaching뿐만 아니라 임상교육의 발전에도 가장 장애물이었던 것이다.
  • 이러한 어려움 때문에 많은 학교들은 다른 접근법을 시도했다. 이미 존재하는 지역 병원과 교육적으로 적절한 수준의 affiliation 맺으려고 했던 것이다. 하지만 병원 official들은 새로운 교육법에 대해서 적대적이었고, 그들의 시설을 제공하고자 하지 않았다.
  • 이에 굴하지 않고 일부 최고의 MS들은 꾸준히 affiliated hospital 찾아 나섰다. 하지만 그들의 노력은 그다지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
  • Tulane Medial School New Orleans에서 비슷한 어려움을 겪었다.
  • 따라서 이런 격렬한 시도에도 불구하고 많은 MS들은 1910 이전에는 거의 실망스러운 결과 뿐이었다. 병원들은 전혀 교육이나 연구를 그들의 책임이라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것은 마치 귀머거리에게 호소하는 것과 같은 모양새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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