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스터의 집 해체하기: HPE에서 형평성과 사회적 정의의 앎의 새로운 방식 (Adv Health Sci Educ Theory Pract. 2020)
Dismantling the master’s house: new ways of knowing for equity and social justice in health professions education
Morag Paton1,2 · Thirusha Naidu3 · Tasha R. Wyatt4 · Oluwasemipe Oni5 · Gianni R. Lorello6,7,8 · Umberin Najeeb9,10 · Zac Feilchenfeld9,10 · Stephanie J. Waterman11 · Cynthia R. Whitehead8,12,13 · Ayelet Kuper8,9,10
주인의 집 해체: 보건 전문직 교육에서 형평성과 사회 정의를 위한 새로운 인식의 전환
Dismantling the master’s house: new ways of knowing for equity and social justice in health professions education
글을 쓰는 시점에서 동상이 쓰러지고 있습니다. 거리에서 시위가 벌어지고 있습니다. 틱톡 동영상, 트위터가 풀리고, 페이스북에서 모임이 확산되면서 자금 지원을 중단하라는 요구가 울려 퍼지고 있습니다. 정부 건물 밖에는 천막이 설치되고 있습니다. 의회 건물에서 인종 차별을 규탄하는 시위가 벌어집니다. 물을 끓여 먹으라는 권고가 내려집니다. 이주 노동자들에게 제공되는 밀집된 주거 캠프에서 코로나19가 발생했습니다. 스포츠 프랜차이즈의 이름이 재검토되고 있습니다. 폭력을 당하는 시신이 있습니다. 사망으로 끝나는 건강 검진도 있습니다. 주차장에서 대치가 벌어지고 있습니다. 소셜 미디어에서 열띤 토론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다른 사람들에게 "네가 왔던 곳으로 돌아가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당신은 잘못했다", "당신은 너무 멀리 갔다", "성난 군중"이 있습니다. 무릎을 꿇은 사람들도 있습니다. 바디 카메라가 있습니다. 약속과 진술, 약속이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임시 프로필 사진이 있습니다. 사임, 이별, 새로운 출발이 있습니다. 인터뷰와 대화가 있습니다. "내가 말했잖아", "왜 이렇게 오래 걸렸어", "우린 몇 년 동안 이 말을 해왔어"가 있습니다. 질문이 오고가고 아이디어가 도전받습니다. 숨을 쉬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At the time of writing, statues are falling. There are protests on the streets. Calls for defunding resound as TikTok videos, Twitter unrolls, and gatherings proliferate on Facebook. There are tents occupying lands outside government buildings. There are declarations of racism in parliament buildings. There are boil water advisories. There are COVID-19 outbreaks in the dense housing camps offered to migrant laborers. There are names of sports franchises being reconsidered. There are bodies being subjected to violence. There are wellness checks that end in death. There are confrontations in parking lots. There are heated discussions on social media. There are some people telling other people to “go back to where you came from”. There are the “you’re wrongs”, “you’ve gone too far” and “angry mobs”. There are people on their knees. There are body cameras. There are commitments and statements and promises being made. There are temporary profile pictures. There are resignations, partings of ways, and new starts. There are interviews and conversations. There are “I told you so’s” and “what took you so longs” and “we’ve been saying this for years”. There are questions being asked and ideas being challenged. There are people just trying to breathe.
관점에 대한 관점
A perspective on perspectives
백인 중심의 북미(유럽 중심) 사회에서 미디어에서 보여지는 것, 메시지가 전달되는 것, 저녁 식탁에서 토론되는 것의 예는 다음과 같습니다. 이것이 바로 보건직업교육(HPE) 분야의 주요 조직, 규제 기관 및 출판사가 소셜 미디어에서 공유하는 내용이며, 변화를 요구하는 목소리가 많은 이유입니다. 이 백인 중심의 북미 프레임워크는 "마스터의 집"(Lorde 2007)의 한 관점입니다. 이러한 관점을 벗어난 일부(즉 오랫동안 소외되어 온 형평성에 합당한 집단)의 관점에서는 이러한 '깨어 있는' 관점이 이기적이고, 형식적이며, 우려스러울 정도로 수사적이고, 절망적으로 늦은 것으로 묘사되었습니다(Gutierrez 2020; Spaulding 2020; Yancy 2020).
In the dominant white North American (Eurocentric) society, these are examples of what is being seen in the media, what is being messaged about, and what is being debated over dinner tables. This is what dominant organizations, regulatory bodies, and publishing houses in Health Professions Education (HPE) are sharing on social media and why there have been so many calls for change. This white North American framing is one perspective from “the Master’s House” (Lorde 2007). For some outside this perspective, that of equity-deserving groups who have long been marginalized, this seemingly ‘woke’ perspective has been described as possibly self-serving, perfunctory, concerningly rhetorical, and hopelessly late (Gutierrez 2020; Spaulding 2020; Yancy 2020).
이 저널의 독자는 위의 텍스트 어딘가에서 자신의 관점이 반영된 것을 알아차릴 수 있습니다. 아마도 당신은 HPE 프로그램의 커리큘럼 디렉터일 수도 있고, 이론가, 학장, 수련생, 교사, 임상의 또는 커뮤니티 구성원일 수도 있습니다. 저널 기고자로서 여기에 표시된 저자 팀인 '우리' 역시 다양한 관점을 포괄합니다: '우리'는 병원 리더, 교육 교수, 대학 교수진, 직원 및 학생, 임상의사 및 이론가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나'와 같지 않으며 '우리'의 관점은 다양합니다(의도적으로 그렇습니다).
- '우리'는 우세한 집단과 공평하게 대우받아야 하는 집단 모두의 관점을 대표합니다.
- '우리'는 흑인, 갈색, 백인으로 명명됩니다.
- '우리'는 캐나다, 무슬림, 스코틀랜드, 나이지리아, 미국, 오논다가, 파키스탄, 유대인, 남아프리카공화국으로 명명됩니다.
- '우리'는 캐나다, 미국, 남아프리카에 거주합니다. '우리'는 기혼, 미혼, 동성 및 이성에 매력을 느끼는 사람으로 구분됩니다.
- '우리'는 정책을 작성하고, 따르고, 관리합니다.
- '우리'는 커리큘럼을 만들고, 운영하고, 이론화하고, 경험합니다.
'우리'는 스승의 집 내부에서 글을 쓰고 그것을 해체하려고 시도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전문성과 경험을 바탕으로 이 학술지의 부편집장인 해당 분야의 선임 저자와 대학원생, 그리고 우리가 공동 저자로 초빙한 이론과 실천의 전문가들이 함께 이 논문을 쓰도록 초대받았습니다. '우리'가 모여 한 팀으로 글을 쓰고 독자 여러분이 이 글을 접할 때, '우리'의 집단적 개별 관점, 정체성, 역할은 모두 긴장 관계에 있습니다. '우리'가 여기에 쓰고 선언적인 것처럼 보이는 진술은 논쟁의 여지가 있습니다. '우리'가 진실이라고 주장하는 진술은 우리 중 한 명에게만 진실일 수 있으며 '우리'는 '우리'의 집단적 경험을 넘어서는 진실을 주장할 수 없습니다. '우리'의 글이나 '우리'가 추구하는 행동에서 '우리'가 주장하는 것은 급진적이고 전투적일 수도 있고, 신중하고 조심스러울 수도 있습니다. 이 백서에서 나오는 아이디어는 다양한 존재론적, 인식론적 전통에서 비롯된 것이므로, '우리'가 글을 쓰고 여러분도 글을 읽으면서 우리가 왜 이 글을 쓰는지, 어떤 관점에서 글을 쓰는지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어떤 변화하는 특권을 제정할 것인가? 우리는 마스터의 집 내부에서 글을 쓰는가, 아니면 외부에서 글을 쓰는가? 우리의 글쓰기는 정체성, 형식, 수행을 통해 총체적으로 집의 모르타르를 느슨하게 할 것인가, 아니면 너무 익숙한 패턴을 연상시키는 벽돌을 추가할 것인가, 아니면 두 가지를 동시에 하고 있을 것인가? 독자로서 이러한 다양한 관점에 대해 질문하고 동시에 스스로에게 질문해 보시기 바랍니다.
Readers of this journal may recognize their own perspective reflected somewhere in the above text; perhaps you are a curriculum director of an HPE program, perhaps you are a theorist, a dean, a trainee, a teacher, a clinician or a community member. As journal contributors, ‘we’, the authorship team displayed here also encompass multiple perspectives: ‘we’ are hospital leaders, education professors, university faculty, staff and students, clinicians and theorists. But ‘we’ is not the same as ‘I’ and ‘our’ perspectives are diverse (and purposefully so).
- ‘We’ represent perspectives of both dominant and equity-deserving groups.
- ‘We’ are named as Black, Brown, and White.
- ‘We’ are named as Canadian, Muslim, Scottish, Nigerian, American, Onondaga, Pakistani, Jewish, and South African.
- ‘We’ live in Canada, the United States, and South Africa.
- ‘We’ are bounded as married, single, and attracted to members of the same-sex and opposite sex.
- ‘We’ write, follow, and administer policy. ‘We’ create, operationalize, theorize, and experience curricula.
‘We’ write from within the Master’s House and are attempting to dismantle it. ‘We’ were invited to write this paper by the journal because of our expertise and experience: a senior author in the field who is a Deputy Editor at this journal, her graduate student, and experts in theory and praxis who we invited to join as co-authors. As ‘we’ come together to write as a team, and as you the reader encounters this piece, all of ‘our’ collective individual perspectives, identities, and roles are in tension. Statements that ‘we’ write here and appear to be declarative are debated. Statements that ‘we’ claim are true might only be true for one of us and ‘we’ cannot make claims to truth beyond ‘our’ collective experience. Claims ‘we’ make in ‘our’ writing or actions ‘we’ seek may be both radical and militant and also cautious and careful. The ideas emerging from this paper stem from multiple ontological and epistemological traditions, so as ‘we’ proceed in our writing, and you proceed in your reading, we invite you to consider why we might write this and from which standpoints we write. What shifting privileges do we enact? Are we writing from within the Master’s House, or from outside of it? Will our writing collectively, through identity, form and performance, loosen the mortar of the house, are we still adding bricks reminiscent of an all too familiar pattern, or are we doing both at the same time? We invite you to question these multiple perspectives as a reader, and at the same time, question your own.
주인의 집
The master’s house
그로스포겔은 서구 대학(그리고 더 나아가 HPE)의 지식 구조가 "서유럽 5개국(이탈리아, 프랑스, 영국, 독일, 미국)의 소수의 사람들이 생산한 지식을 바탕으로"(그로스포겔 2013, 74쪽) 15세기 후반의 영토 정복과 종교적 학살로부터 발전한 구조적 토대 위에 세워졌다고 주장합니다(그로스포겔 2013). 기독교 신을 지식의 기초로 삼기보다는 데카르트의 '나' 철학("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과 그를 따르는 계몽주의 사상가들은 서양 철학을 하나의 근본적인 사물의 범주에서 벗어나 몸과 마음을 분리하는 방향으로 나아갔습니다. 이 이원론은 의식, 의도성, 자아에 대한 의문을 제기합니다(Robinson 2020). 인간을 기독교 신을 넘어 마음을 통제 할 수있는 것으로 구성함으로써, 권력을 가진 서양인에게 인식 론적 특권, 즉 지식이 구조화되는 방식에 대한 특권을 부여했습니다 (Robinson 2020). 이러한 특권은 종교와 영토를 정복하는 데 사용되어 왔으며 식민주의를 통해 계속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의학과 의학교육이 이러한 특권에 의존한다고 주장할 수 있습니다.
Grosfoguel argues that the structure of knowledge upon which the Western University (and, we would argue, by extension HPE) is built on a canon of thought “based on the knowledge produced by a few men from five countries in Western Europe (Italy, France, England, Germany and the USA)” (Grosfoguel 2013, p. 74) and on a structural foundation evolved from late 15th century conquests of territories and religious genocides (Grosfoguel 2013). Rather than a Christian God as the foundation of knowledge, Descartes’s philosophy of “I” (“I think, therefore I am”) and the Enlightenment thinkers that followed him moved Western philosophy away from having one fundamental category of things and towards the separation of the body and the mind. This dualism then raises questions about consciousness, intentionality, and the self (Robinson 2020). Constructing man as having control over the mind, beyond a Christian God, afforded the Western man who held power epistemic privilege: power over how knowledge is structured (Robinson 2020). This privilege has been used in conquests over religion and territories, and continues through colonialism. We would argue that medicine and medical education rely on this privilege.
대부분의 서구 대학과 의학교육에서 지배적인 담론은 지식 생산을 아는 주체의 관점 또는 영점 인식론에 기초한 것으로 자리매김했습니다(Castro-Gómez 2001; de Sousa Santos 2008; Naidu 2020). 영점은 백인 서구 과학이 지식을 생산하는 방식에 대한 명백히 객관적인 입장을 지칭하는 것으로, 과학자들이 추구하는 '진리'는 어디에도 없으면서 어디에나 존재하므로, 단지 영점으로서 '있다'고 주장합니다. 이는 "중립적 객관성을 스스로 주장하는 사람들의 상상적 입장, 즉 모든 것을 볼 수 있다고 가정하는 보이지 않는 입장"입니다(솔다텐코 2015, 140쪽). 이 틀 안에서 과학은 "적절한 방법을 사용하는 것만으로도 물리적, 사회적 세계에 대한 객관적으로 타당한 지식을 얻을 수 있는" 중립적인 객관적 진리를 찾는 것으로 구성됩니다(Castro-Gómez 2001, 149쪽). 이러한 구조는 "서구화된 대학에서 지식 생산의 정경의 특권과 권위를 독점하고 있는 5개국(프랑스, 영국, 독일, 이탈리아, 미국) 출신의 (백인) 남성들"의 전 세계적 물질적, 사회적 이해관계에 크게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Grosfoguel 2013, 87쪽; Cupples와 Grosfoguel 2018).
The dominant discourses at work in most Western universities and medical education have positioned knowledge production as based on the perspective of a knowing subject or zero-point epistemology (Castro-Gómez 2001; de Sousa Santos 2008; Naidu 2020). The zero point is a reference to the avowedly objective stance of how white Western science produced knowledge: the ‘truth’ scientists seek is both nowhere and everywhere; we would claim it just ‘is’, as a zero point. It is an “imaginary position of those who claim neutral objectivity for themselves—an unseen position that presumes to see all” (Soldatenko 2015, p. 140). Within this frame, science is constructed as a search for a neutral objective truth where “it is possible to achieve objectively valid knowledge about the physical and social world by merely using the appropriate method” (Castro-Gómez 2001, p. 149). This construction is heavily rooted in the global material and social interests of (white) “men from five countries (France, England, Germany, Italy and the USA) who are the ones monopolizing the privilege and authority of canons of knowledge production in the Westernized university” (Grosfoguel 2013, p. 87; Cupples and Grosfoguel 2018).
이러한 세계 권력의 역사에 뿌리를 둔 영점 인식론은 인식론적 부정의와 인식론적 폭력의 형태를 낳습니다(Fricker 2007, Ndofirepi and Gwaravanda 2018, Soldatenko 2015, Spivak 1988). Fricker(2017)는 두 가지 유형의 인식적 부정의, 즉 증언적 부정의와 해석학적 부정의를 설명합니다.
- 증언적 부정의는 편견으로 인해 누군가의 말이 잘못 판단되어 다른 사람의 말보다 덜 가치 있는 것으로 간주될 때 발생합니다. 의료 환경의 예를 들면 편견이나 인종차별 때문에 환자의 의료적 불만을 무시하는 의료 전문가를 들 수 있습니다(호프만 외. 2016; 로리 및 말론 2020).
- 해석학적 부정의는 두 사람이 동일한 지식 기반을 충분히 공유하지 않아 상황에 대한 공동의 이해에 도달할 수 없을 때 발생합니다. 의료 서비스를 예로 들면, 특권을 가진 사람이 같은 특권을 갖지 못한 사람이 같은 리소스에 접근할 수 없는 이유를 이해할 수 없을 때 발생할 수 있습니다(Florko 2020).
영점 관점은 이러한 형태의 인식론적 부정의와 결합하여 현대 의료 관행에서 "의료의 일반적인, 아마도 만연한 특징"이 된 방법, 관행, 증거의 형태 및 앎의 방식에 대한 특권으로 더욱 나타납니다(Carel and Kidd 2014, 538쪽).
Rooted in these global histories of power this zero-point epistemology result in forms of epistemic injustice and epistemic violence (Fricker 2007; Ndofirepi and Gwaravanda 2018; Soldatenko 2015; Spivak 1988). Fricker (2017) describes two types of epistemic injustice: testimonial injustice and hermeneutic injustice.
- Testimonial injustice occurs when someone’s words are misjudged and considered to be less worthy than another’s due to prejudice. An example in a healthcare setting would be a health professional who ignores a patient’s medical complaints due to prejudice or racism (Hoffman et al. 2016; Lowrie and Malone 2020).
- Hermeneutic injustice occurs when two people do not sufficiently share the same knowledge base such that a shared understanding of a situation cannot be reached. An example in healthcare may be when those with privilege cannot understand why those without the same privilege are unable to access the same resource (Florko 2020).
The zero-point perspective, combined with these forms of epistemic injustice, further manifest in contemporary healthcare practice as a privileging of methods, practices, forms of evidence, and ways of knowing which have become “a common, possibly pervasive, feature of healthcare” (Carel and Kidd 2014, p. 538).
HPE 프로그램과 이를 구축하는 데 사용하는 증거는 이러한 관점 속에 내재되어 있어 의료 시스템이 구축된 방식이 '자연스러운' 것처럼 보입니다. 우리는 바로 이 시스템을 통해 다음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지 않도록 조건화되었다고 가정합니다.
- 우리가 왜 우리가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지,
- 왜 어떤 아이디어는 커리큘럼의 '핵심'이라고 생각하는 반면 다른 아이디어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하는지,
- 왜 HPE의 마스터 하우스에 구축된 모든 것을 개선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지
유럽과 북미의 전문 학교는 이러한 영점 인식론을 바탕으로 설립되었으며, 이를 전 세계로 확산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성차별, 인종차별, 가부장제, 권위, 자본주의의 영향을 받고 백인 '5개국 출신 남성'의 영점 인식론의 지배에 기반한 HPE의 심기와 확산이 역사를 통해 명백히 드러난다고 주장합니다.
- 1852년 뉴먼은 대학을 신사 양성을 위한 진리 수양과 사색의 장으로 자리매김했습니다(Newman and Turner 1996).
- 1900년대 초에 플렉스너는 이상적인 의학 프로그램을 지식과 사실 추구에 전념하는 프로그램(Flexner 1968, 1972)과 "명예 규범이 있는 질서, 계급"(1968, 30쪽)으로 규정했습니다.
- 1960년대에 커(1963)는 대학을 "지식의 생산자, 도매업자, 소매업자"(114쪽)로 포지셔닝했습니다.
- 그 후에도 슬러터와 로즈(2004)는 대학을 학문적 자본주의 지식/학습 체제로 포지셔닝합니다.
- Saks(2016)는 전문직의 권력과 특권은 국가가 승인한 지식 통제에 기반을 두고 있다고 지적합니다.
HPE programs and the evidence that we use to build them are so embedded within this perspective that how the health system has been constructed appears to be ‘natural’. We posit that it is through this very system that we have been conditioned not to question why we think we know what we know, or why we think some ideas are ‘core’ to curricula while others are not, or why we think we can improve upon anything built within this Master’s House of HPE. Professional schools in Europe and North America have been built from this zero-point epistemology and have gone on to spread this globally. We argue that the planting and proliferation of HPE as founded on the pillars of sexism, racism, patriarchy, authority, buffeted by capitalism, and grounded in the dominance of the zero-point epistemology of white ‘men from five countries’ is evident in history.
- In 1852, Newman positions the university as a place for the cultivation and contemplation of the truth for the formation of gentlemen (Newman and Turner 1996).
- Writing in the early 1900s, Flexner positions the ideal medical program as one devoted to the pursuit of knowledge and facts (Flexner 1968, 1972) and a profession as “an order, a caste [with] a code of honour” (1968, p. 30).
- In the 1960s, Kerr (1963) positions the university as a “producer, wholesaler, and retailer of knowledge” (p. 114).
- Later still, Slaughter and Rhoades (2004) position the university as an academic capitalist knowledge/learning regime.
- Saks (2016) notes that the power and privilege of the professions is based on the state-sanctioned control over knowledge.
HPE 내부에서 마스터스 하우스의 규칙은 어떤 지식이 진리로서 유포되고 언급될 수 있는지, 그리고 의료 전문가가 지역사회에서 어떤 역할을 수행할 수 있는지를 승인합니다. 이러한 교육 프로그램에는 커리큘럼, 표준, 학습 목표, 예상 결과 및 표준화된 시험이 있으며, 이는 지배적인 지식의 방식에 따라 설정됩니다. 이러한 학교를 졸업한 자율 규제 보건 전문직 종사자들은 성문화된 사고 체계를 통해 경계와 지위의 수호자이자 재생산자로 간주됩니다(Freidson 2001). 그러나 "지배의 정치는 종종 교육 환경에서 재생산"됩니다(후크스 2014, 39쪽).
- 예를 들어, 의사들은 제국주의 투쟁의 공헌자로 여겨져 왔습니다 (Aidoo 1987; Fanon 1994). 이러한 인식론적 폭력은 지속되고 있으며, 의학교육을 통한 식민지화에 대한 우려가 계속 제기되고 있습니다(Muzzin and Martimianakis 2016; Naidu and Kumagai 2016; Whitehead 2016) 및 의료 행위(Sharma 2018).
- 지식 생산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HPE는 해방과 같은 교육의 다른 잠재적 목표보다는 실증주의, 보편주의, 합리주의와 같은 계몽주의 이념에 계속 가치를 두고 있습니다(Freire 2000).
- 이를 통해 HPE는 지배, 특권, 지위를 창출, 승인, 재생산하며, 교육은 사회 내 상황을 개선하기 위한 수단이 아니라 개인의 성취로 간주된다고 주장합니다.
- 이러한 지배적인 인식론에 근거하여, 우리는 많은 HPE 교육자들이 실천에서 개인의 직업적 책임을 입증하는 데 주의를 집중하고, 그러한 실천의 사회적 책임에 대해서는 덜 집중한다고 주장합니다.
From within HPE, the rules of the Master’s House authorize what knowledges can be circulated and spoken of as truths and in turn, what role a practicing health professional serves in the community. In these educational programs there are curricula, standards, learning objectives, expected outcomes, and standardized tests set on the dominant ways of knowing. Those who graduate from these schools, members of self-regulated health professions, are seen as guardians and reproducers of boundaries and status through codified systems of thought (Freidson 2001). However, the “politics of domination are often reproduced in the educational setting” (hooks 2014, p. 39).
- Physicians, for example, have been viewed as contributors to imperialist struggles (Aidoo 1987; Fanon 1994). This epistemic violence endures and concerns continue to be raised about colonization through medical education (Muzzin and Martimianakis 2016; Naidu and Kumagai 2016; Whitehead 2016) and medical practice (Sharma 2018).
- In the pursuit of knowledge production, the House of HPE continues to place value on the ideologies of the Enlightenment—on positivism, universalism, and rationalism—rather than other potential goals of education, such as liberation (Freire 2000).
- In so doing, we argue, HPE creates, authorizes, and reproduces domination, privilege, and status and education is seen as an individual achievement and not a means for improving circumstances within society.
- Based on these dominant epistemologies, we argue that many HPE educators focus attention in demonstrating an individual’s professional responsibility in practice, and focus less on the social responsibility of that practice.
형평성과 사회 정의는 그 기원으로 인해 HPE 커리큘럼 내에서 다소 불편하게 자리 잡고 있습니다. 형평성과 사회 정의의 개념은 종종 계몽주의의 합리주의적 입장에 반대하는 입장으로 간주되기 때문에 이는 의외일 수 있습니다. 언뜻 보기에 형평성과 사회 정의의 개념은 합리적이고 보편적인 실증주의 생물학적 모델에 반대되는 것처럼 보일 수 있지만, 우리와 다른 사람들은 현대 (정착민) 북미와 유럽의 형평성과 사회 정의 구성이 영점 인식론의 동일한 시작점인 정복, 계몽주의, 그리고 그에 따른 식민주의와 연결되어 있다고 주장합니다. 그것은 주인의 집 안에서 유지되는 식민지적 권력 모델입니다. 심지어 "근대성 역시 그 출발점부터 식민지적이었다"(퀴자노 2000, 549쪽).
- 불평등과 불공정을 먼저 구축하고 정의하지 않고서는 공평과 사회 정의를 논할 수 없습니다.
- 인종이라는 구조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반인종주의를 논의할 수 없습니다.
마스터의 집이라는 현대의 HPE가 구조적으로 불건전하다면(그리고 우리는 여기서 그렇게 주장합니다), 아무리 암묵적인 편견 교육이나 잘 만들어진 다양성 선언문도 수 세기에 걸친 인식론적 폭력을 지울 수는 없습니다.
Equity and social justice are themselves positioned somewhat uncomfortably within HPE curricula because of their origins. This may be surprising as the idea of equity and social justice is often considered as a stance against the rationalist positioning of the Enlightenment. While at first glance the concepts of equity and social justice may appear to be in opposition to the rational, universal, positivist biomedical model, we and others argue that the modern (settler) North American and European constructions of equity and social justice are tied to the same beginnings of the zero-point epistemology: conquest, the Enlightenment, and subsequent coloniality. It is a colonial model of power that is sustained within the Master’s House. Even “modernity was also colonial from its point of departure” (Quijano 2000, p. 549).
- One cannot discuss equity and social justice without first having built and defined inequity and injustice.
- One cannot discuss anti-racism without the existence of the construct of race.
If the contemporary HPE that is the Master’s House is structurally unsound (and we argue here that this is so), then no amount of implicit bias training or well-crafted diversity statements can erase the centuries of epistemic violence.
반 마일더스는 서구 학계에서 다양성 선언의 문제점을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 "현대 대학은 인종, 성별, 계급적 차이의 문제를 모호하게 하기 위해 정체성 정치와 다양성에 대한 근거 없는 찬사를 적절히 활용함으로써 백인이라는 헤게모니적 비가시성을 그대로 방치하고 있습니다(Cupples and Grosfoguel 2018, 47쪽, van Milders). 그의 설명은 다양성 선언이 권력 구조를 그대로 둔다는 점을 강조합니다. 만약 게이트키퍼 역할을 하는 대학이나 전문직 구조가 형평성과 사회 정의의 개념을 정의하거나 이러한 문제에 대한 가정된 해결책을 실행하는 동일한 기관이라면, 그들은 차이(Cupples and Grosfoguel 2018)를 지우고 식민성을 영속화하는 것 외에 아무것도 하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이죠.
Van Milders explains the problem with diversity statements in Western academia thus: “the contemporary university has managed to appropriate identity politics and the unsubstantiated celebration of diversity in order to obscure issues of raced, gendered, and classed difference and thereby leaves the hegemonic invisibility of whiteness untouched (van Milders in Cupples and Grosfoguel 2018, p. 47). His explanation emphasizes that diversity statements leave power structures untouched: if the university or professional structures that act as gatekeepers are the same institutions that define the concepts of equity and social justice, or that implement supposed solutions to these issues, then they may be doing nothing more than erasing differences (Cupples and Grosfoguel 2018) and perpetuating coloniality.
계몽주의 이후 국민국가의 경제, 정치, 법의 구축과 맞물려 과학은 인종의 구성을 통해 사람들을 분리하는 데 활용되었습니다. 과학과 사람이 누구인지, 어디에서 '태어났는지'에 대한 우리의 생각은 세계 시스템의 일부를 형성합니다(Castro-Gómez 2001). 세계 시스템에서 경제를 건설하고 자원에 접근하기 위해 한 민족 국가는 다른 민족 국가를 식민지화했습니다. 식민지 개척자들은 인종, 동양이라는 개념(Said 1979), 남북 이분법 및 기타 분열 관행을 구축했습니다. 형평성, 반인종주의, 사회 정의의 개념을 포함하여, 지배적인 담론에서 '현대 문화'라고 부르는 것에 대한 이해는 모두 영점 인식론의 구축된 보편주의에 의해 유지되는 이 프레임 안에 있습니다. 식민지성과 과학에 기반한 정체성 및 사회적 가치 구성에서 비롯된 노동의 분배와 착취는 인종에 따라 차별화되는 노동 통제 형태를 가져왔고, 따라서 "지배/착취의 새로운 기술, 이 경우 인종/노동은 두 요소가 자연스럽게 연관된 것처럼 보이는 방식으로 표현되었다"(퀴야노 2000, 537쪽). 이러한 역사적 노동 분배와 학계 및 의학계에서 소외된 집단의 지속적인 노동 분배 사이에 직접적인 연관성을 찾을 수 있습니다(미국 의과대학 협회 2020; Henry 외. 2017; Hodges 2020; Nestel 2004). 우리는 과학과, 과학에서 나온 전문직이 계속해서 사람들을 지배하고 통제하며 분열시키고 있다고 주장합니다.
Intertwined with the building of post-Enlightenment nation-state economics, politics, and law, science was deployed to separate people through the construction of race. Science, and our ideas of who people are or where they ‘come from’ form part of a world-system (Castro-Gómez 2001). To build an economy and gain access to resources in the world-system, one nation state colonized another. Colonizers constructed race, the notion of the Orient (Said 1979), the North/South binary, and other such dividing practices. The understanding of what the dominant discourse calls ‘modern culture’, including notions of equity, antiracism, and social justice, all sit within this frame which is held up by the constructed universalism of zero-point epistemology. The distribution and exploitation of labour stemming from coloniality and science-based constructions of identities and social value brought about forms of labour control that were differentiated by race; thus “a new technology of domination/exploitation, in this case race/labor, was articulated in such a way that the two elements appeared naturally associated” (Quijano 2000, p. 537). One can draw a direct line between this historical distribution of labour and the ongoing distribution of the labour of marginalized groups in academia and medicine (Association of American Medical Colleges 2020; Henry et al. 2017; Hodges 2020; Nestel 2004). We argue that science, and the professions that emerged from it, continue to dominate, control, and divide people.
보건 전문직 교육은 식민주의와 인식론적 폭력에 뿌리를 둔 현재의 모델을 더 이상 지속할 수 없습니다. 형평성과 사회 정의를 재구성하기 위해서는 영점을 넘어 부분적인 관점, 위치 지식, 정체성과 위치의 경계선을 포용하는 인식론적, 존재론적 입장에서 도출된 새로운 HPE 비전이 필요하다고 제안합니다(Anzaldúa 1999; Haraway 1988). 마스터의 집을 해체하는 것은 "새로운 방식의 글로벌 구조화"(카스트로-고메즈 2001, 152쪽)와 새로운 가능성의 교육학(모타 2013)을 제공할 것입니다.
Health professions education can no longer sustain the continuation of our current models rooted in coloniality and epistemic violence. In order to reframe equity and social justice, we suggest that we need a new vision of HPE; one derived from epistemological and ontological positions that move beyond the zero point to embrace partial perspectives, situated knowledges, and the borderlands of identity and position (Anzaldúa 1999; Haraway 1988). Dismantling the Master’s House will give “way to new ways of global structuring” (Castro-Gómez 2001, p. 152) and new pedagogies of possibility (Motta 2013).
우리는 시간의 순간을 묘사하고, 그 순간을 목격하고, 인식론적 불의를 해결하기 위해 다양한 방식으로 직접 참여하면서 이 작품을 시작했습니다. 아마도 캐나다 시인 디온 브랜드(2020)가 이 순간을 가장 잘 묘사한 것 같습니다. "모든 것이 공중에 떠 있고, 그 순간의 모든 내러티브가 날아가고, 동상이 쓰러지고, 모든 지표가 잠시나마 무너지는 순간"이죠.
We began this piece describing moments in time, bearing witness to these moments, and participating ourselves in a multitude of different ways to address epistemic injustices. Perhaps the Canadian poet Dionne Brand (2020) describes this moment the best. A moment when “everything is up in the air, all narratives for the moment have been blown open—the statues are falling—all the metrics are off, if only briefly.”
마스터의 집 해체하기
Dismantling the master’s house
주인의 집을 해체하려면 HPE 내에서 다음에 대한 조사가 필요합니다.
- 차이는 어떻게 구성되는지,
- 이러한 개념화로 인해 누가 혜택을 받았는지,
- 이러한 개념이 교육과 실무에서 어떻게 나타났는지,
- 이러한 패턴이 어떻게 HPE에서 불평등을 지속시키는지
오랫동안 지배적인 영점 인식론에 대한 대안은 무엇일까요? 식민지, 젠더와 섹슈얼리티의 구성, 인종 구성 등 서로 연결된 세 가지 사례를 예로 들어 설명하겠습니다. 그러나 이는 세 가지 가능한 부분적인 관점일 뿐이며, 예를 들어 건강 상태, 능력, 종교적 신념, 토착성 또는 사회경제적 지위도 탐구할 수 있습니다. 식민지성, 성별 및 섹슈얼리티, 인종을 선택한 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 첫째, 이 주제들은 정복과 식민지에서 비롯된 영점 인식론에서 비롯된 것이고,
- 둘째, 글로벌 식민지 권력 매트릭스는 인종주의의 토대 위에서 구성되며 성별과 섹슈얼리티가 권력의 한 영역으로 유지되고 있고,
- 셋째, 보건 전문직 교육의 구성원으로서 집단적으로나 개인적으로 특히 관심이 있는 분야이며,
- 넷째, 이러한 질문을 통해 새로운 가능성을 상상할 수 있다는 희망이 있기 때문입니다.
Dismantling the Master’s House calls for an interrogation of
- how difference is constructed within HPE,
- who has been advantaged by these conceptualizations,
- how these have manifested in education and practice, and
- how these patterns continue to perpetuate inequities in HPE.
What are the alternatives to the long dominant zero-point epistemologies? We will employ three interconnected examples as illustrations: coloniality, the constructs of gender and sexuality, and the construct of race. However, these are just three possible partial perspectives; we could have also, for example, explored health status, ability, religious beliefs, Indigeneity, or socio-economic status. We have selected coloniality, gender and sexuality, and race for a number of reasons.
- First, they emerge out of zero-point epistemologies stemming from conquest and colonization;
- second, the global Colonial Matrix of Power is constructed on the foundation of racism and is held up by gender and sexuality as a sphere of power;
- third, these are areas of particular interest to us collectively and individually as members of health professions education; and
- fourth, there is hope that through their interrogation, we can imagine new possibilities.
식민지성
Coloniality
식민성의 개념은 식민주의와 탈식민주의에 대한 대응으로 개발되었습니다. 식민주의는 한 집단이 다른 집단을 정복하는 지배의 관행을 말합니다(Kohn and Reddy 2017). 식민주의는 세계 역사에서 계속되어 왔지만, 이 백서에서는 주로 16세기에 시작되어 아시아, 아프리카, 호주와 뉴질랜드, 아메리카 대륙의 사람들과 영토를 포괄하는 유럽 열강에 의한 현재의 식민지 시대를 지칭합니다. 식민주의는 흔히 제국주의 열강이 새로운 영토를 정복하고 자원을 약탈하는 행위로만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제국주의 열강은 경제와 사회가 어떻게 기능해야 하는지를 포함한 계몽주의의 이상을 수출하고 있었습니다. 정교한 전통 교육 관행은 혼란에 빠지거나 근절되었습니다. 식민주의는 여러 세대에 걸친 지식의 패권적 파괴를 통해 문화, 언어, 지식 체계를 죽이는 "문화 학살, 언어 학살, 인식 학살"로 이어졌습니다(Hall and Tandon 2017). 다음과 같은 것은 바로 이러한 이유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우리는 주장한다.
- 대부분의 캐나다 학교에서 학생들이 영어와 프랑스어로 교육을 받지만 이누크티투트어나 오지브웨이는 배우지 않는 이유,
- '전통적인' 문학 정전에 셰익스피어는 있지만 소잉카는 포함되지 않는 이유,
- 우리가 '내러티브'라고 부르는 것이 주로 구술이 아니라 글로 된 이유,
- 우리 몸이 어떻게 기능하는지에 대한 이해가 영적인 것이 아니라 생물학적이라는 이유 등
이러한 지식은 식민지 인식론에서 비롯된 것이며, 현대 대학이 현재 합법적이고 '진짜', '진실'로 간주하는 것의 대부분은 이러한 식민지 지배 규범에서 비롯된 것입니다(Hall and Tandon 2017).
The concept of coloniality was developed as a response to both colonialism and postcolonialism. Colonialism refers to the practice of domination where one group of people subjugate another (Kohn and Reddy 2017). While colonialism has been ongoing in world history, for the purposes of this paper we refer primarily to the current period of colonization by European powers that started in the 16th century and encompassed people and territories in Asia, Africa, Australia and New Zealand, and the Americas. Colonialism is often only thought of as the act of imperialist powers conquering new territories and plundering their resources. However, at the same time, imperialist powers were exporting the ideals of the Enlightenment, including how economies and societies should function. Sophisticated traditional education practices were disrupted or eradicated. Through the hegemonic disruption of generations of knowledge, colonialism led to “cultural genocide, linguicide and epistemicide”—the killing of culture, language and Knowledge Systems (Hall and Tandon 2017). It is
- why, we argue, students in most Canadian schools are educated in English and French but not in Inuktitut or Ojibway;
- why the ‘traditional’ literary canon contains Shakespeare but not Soyinka,
- why what we call ‘narrative’ is primarily written and not oral, and
- why our understanding of how our bodies function is biological, not spiritual.
These knowledges stem from colonial epistemologies and much of what the modern university now positions as legitimate, ‘real’ and ‘true’ is positioned from this colonial dominant norm (Hall and Tandon 2017).
탈식민주의는 약 400년에 걸친 유럽 중심의 식민지배에 대한 대응으로 등장했습니다. 그것은 다음과 같이 정의됩니다:
Postcolonialism emerged as a response to approximately 400 years of Eurocentric colonization. It is defined as:
식민주의의 경험과 그 과거와 현재의 영향에 대한 연구로, 식민지 이전 사회의 지역적 수준뿐만 아니라 제국의 후유증으로 여겨지는 보다 일반적인 글로벌 발전의 수준에서 모두 포함됩니다. 탈식민주의는 종종 노예, 이주, 억압, 저항, 차이, 인종, 성별, 장소 등 다양한 종류의 경험에 대한 논의를 포함합니다.... (슈바르츠와 레이 2008, 93쪽)
studied engagement with the experience of colonialism and its past and present effects, both at the local level of ex-colonial societies, as well as at the level of more general global developments thought to be the after-effects of empire. Postcolonialism often involves the discussion of experiences of various kinds such as those of slavery, migration, suppression, and resistance, difference, race, gender, place…. (Schwarz and Ray 2008, p. 93)
탈식민주의는 '자아'가 사회적으로 구성되었으며, 제국주의의 지배 세력이 우리 대 그들, 백인 대 흑인, 서양 대 동양의 이분법을 만들어냈다고 주장합니다(Said 1979). 사회적으로 구성된 정체성은 지배적인 지식 관행에 의해 항상 '타자'와의 관계에서 자신을 바라보도록 조건화되어 다층적으로 구축됩니다(Bhabha 2012). 탈식민주의는 부분적으로는 정치적, 경제적 대응일 뿐만 아니라 인식론적 대응으로서, 계몽주의와 식민지화를 통해 발전한 모든 것을 단적으로 정의할 수 있다는 실증주의적 규범에 도전하는 것입니다. 후기식민주의는 긴밀하게 묶여 있지 않으며 "하나의 분야, 관점 또는 정치적 약속"으로 볼 수 있습니다(Loomba 2015, 4쪽). "탈식민주의"를 정의하는 것은 하나의 합리화되고 환원주의적인 정의로 축소하려는 지식 관행에 대해 (저항하는 것이 아니라) 설명하는 것입니다.
Postcolonialism argues that the ‘self’ has been socially constructed; the dominant powers of imperialism generating the binaries of us versus them, white versus black, and West versus East (Said 1979). Socially constructed identities are built up in layers, conditioned by dominant knowledge practices to always see oneself in relation to an ‘other’ (Bhabha 2012). Postcolonialism is, in part, not only a political and economic response but an epistemological one, challenging the dominant positivist norm developed through the Enlightenment and colonization that everything can be singularly defined. Postcolonialism is not tightly bound and can be viewed as “a field, or a perspective, or a political commitment” (Loomba 2015, p. 4). Defining “postcolonialism” is describing instead a resistance to knowledge practices that attempt to whittle it down to a single rationalized and reductionist definition.
많은 학자들이 탈식민주의라는 개념에 저항하고, 대신 식민성이라는 개념을 통해 연구를 구성합니다. 식민성은 포스트모더니스트 유럽 중심적 사상가(푸코, 그람시, 데리다 등)에 대한 의존에서 벗어나, 소외된 인식론적 철학, 전통, 사유 체계가 내재된 지식으로 나아가는 탈식민지 지식의 가시적인 형태로 자리매김하고 있습니다(Grosfoguel 2011). 예를 들어,
- 글로리아 안잘두자(1999)는 자아를 정복으로부터 해방시키기 위해 국경지대에 대한 새로운 포용적이고 혼합적인 의식을 요구합니다.
- 프란츠 파농(1963, 2008)과 스티브 비코(2015)는 자아의 변증법적 구성으로부터 사회를 해방시키기 위해 혁명, 힘 또는 폭력이 필요할 수 있다는 점을 고려할 것을 권유합니다.
이들의 공통점은 다름을 인정하는 지식 실천에 대한 찬사입니다. 식민성 또는 탈식민화 프레임을 사용하면 [차이를 지우고, 주체의 위치를 은폐하며, 주체가 "지배적 위치에 있는 것과 같은 인식론적 사고"를 하게 만드는 지식]의 형태에서 신중하게 벗어날 수 있습니다(Grosfoguel 2011, 5쪽).
Many scholars resist the idea of postcolonialism and instead frame their work through the concept of coloniality. Coloniality positions itself as a tangible form of decolonizing knowledges—moving away from the reliance on postmodernist Eurocentric thinkers (such as Foucault, Gramsci, and Derrida) to knowledge imbued with marginalized epistemological philosophies, traditions, and systems of thought (Grosfoguel 2011). For example,
- Gloria Anzaldúza (1999) calls for a new inclusive, mixed consciousness of the borderlands to unentangle the self from subjugation.
- Frantz Fanon (1963, 2008) and Steve Biko (2015) invite one to consider that revolution, force, or violence may be needed to emancipate society from dialectic constructions of the self.
What these have in common is their celebration of a knowledge practice that recognizes difference. Using frames of coloniality or decolonization move us thoughtfully away from forms of knowledge that erase differences, conceal subject positions, and makes subjects “think epistemically like the ones on the dominant positions” (Grosfoguel 2011, p. 5).
서구의 "근대적" 인식론이 어떻게 일부 집단에는 유리하지만 다른 집단에는 불리한지 보여주는 데 도움이 되는 도구 중 하나는 식민지 권력 매트릭스입니다. 이 매트릭스(미뇰로 2007; 퀴자노 2000)는 식민주의를 통해 발전한 근대 글로벌 권력의 기초로서 지식, 인종주의, 가부장제, 자본을 중심에 두고 있습니다. 미뇰로와 퀴야노가 주장했듯이, 현대 글로벌 시스템은 지배의 도구로서 권력의 영역(주체성, 성별과 섹슈얼리티, 권위, 토지 및 노동력 착취)을 부과했습니다. 이러한 도구는 상호 의존적이며 서로 관련되어 작동하며 현대의 글로벌 권력 구성을 유지하고 재생산하는 역할을 합니다(Quijano 2000). 이론가들은 식민지 권력 매트릭스가 "서구 문명의 근본 구조"(Mignolo 2011, 16쪽)이며 "상호 연결된 위계를 생성, 재생산, 수정, 유지하는 논리"(Mignolo 2011, 17쪽)라고 주장합니다. (그림 1)
One tool that helps demonstrate how a Western “modern” epistemology advantages some groups but not others is the Colonial Matrix of Power. This matrix (Mignolo 2007; Quijano 2000) centres knowledge, racism, patriarchy and capital as the basis of modern global power developed through colonialism. This modern global system, as Mignolo and Quijano have argued, imposed spheres of power (subjectivity, gender and sexuality, authority, and the exploitation of land and labour) as instruments of domination. These instruments are interdependent, operating in relation to one another, and serve to uphold and reproduce the modern construction of global power (Quijano 2000). Theorists argue that the Colonial Matrix of Power is “the very foundational structure of Western civilization” (Mignolo 2011, p. 16) and is “the logic that generates, reproduces, modifies, and maintains interconnected hierarchies” (Mignolo 2011, p. 17). (Fig. 1)
구조적 인종 차별
Structural racism
뉴잉글랜드 의학 저널에 실린 한 논문은 경찰의 불균형적인 공권력 사용으로 미니애폴리스에서 사망한 흑인 남성이 어떻게 미국 의료계가 구조적 인종주의에 맞서야 한다는 요구를 촉발했는지를 설명합니다. 이 논문은 의료 전문가들이 구조적 인종주의를 해체할 책임이 있으며, 이를 위해 구체적인 행동을 취함으로써 이를 시작할 수 있다고 설명합니다.
- △건강 격차를 초래하는 역사적 인종주의의 뿌리에 대해 배우고
- △암묵적 편견에 도전하며
- △인종주의를 목격했을 때 정의하고 이름을 붙이고
- △우세한 집단의 관점에서 소외된 집단의 관점으로 전환하는 등
이 논문이 조지 플로이드의 사망 이후인 2020년에 발표되었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실제로는 2016년에 필란도 카스틸레라는 남성이 경찰의 손에 의해 사망한 사건에 대해 작성되었습니다(Hardeman 외. 2016). Hardeman은 구조적 인종차별을 "미국에서 생명을 단축시키는 폭력의 공통분모"라고 부릅니다(2113쪽). 그녀는 용기와 변화를 모두 요구하지만, 그 이후 많은 변화가 있었을까요?
A paper in the New England Journal of Medicine describes how a Black man killed in Minneapolis through the disproportionate use of lethal force by the police sparked calls for the medical profession in the United States to confront structural racism. It explains that medical professionals have a responsibility to dismantle structural racism and can begin doing so by taking specific actions:
- learning about historical racist roots which lead to health disparities;
- challenging implicit biases;
- defining and naming racism when it is seen, and
- ‘centering at the margins’—shifting away from the dominant group’s perspective to that of marginalized groups.
One might imagine this paper came out in 2020 following the death of George Floyd, but it was actually written in 2016 about a man named Philando Castile who also died at the hands of the police (Hardeman et al. 2016). Hardeman calls structural racism “the common denominator of the violence that is cutting lives short in the United States” (p. 2113). She calls for both courage and change, but has much changed since?
인종주의는 식민지 권력 매트릭스 구조의 중심에 있습니다. 인종이라는 개념으로 전 세계 사람들을 분류한 것은 식민주의였지만, 식민주의 구조보다 더 오래 지속되어 온 것은 인종주의입니다(퀴야노 2000). 식민주의를 통해 지리적 출신에 따라 개인을 분류하거나 식별하는 방식은 관찰 가능한 특성(또는 표현형)에 따라 개인을 분류하는 방식으로 바뀌었고, 이는 새로 만들어진 인종이라는 범주에 따라 개인을 분류하는 방식으로 바뀌었습니다(Quijano 2000). 인종주의는 제국과 식민지 경제의 확산을 정당화했습니다. 정복당한 사람들은 식민지 개척자보다 인종적으로 열등한 존재로 구성되었습니다.
Racism is at the centre of the structure of the Colonial Matrix of Power. While it was colonialism that classified the world’s people by the idea of race, it is racism that has endured longer than the colonial structure from whence it came (Quijano 2000). Through colonialism, categorizing or identifying an individual by geographic origin gave way to categorizing individuals based on observable characteristics (or phenotypes) which then gave way to categorizing individuals by the newly-created category of race (Quijano 2000). Racism legitimized the spread of empire and colonial economies. The conquered were constructed as racially inferior to the colonizer.
다윈, 스미스, 생시몽, 콩트, 뉴먼, 밀(그리고 다른 많은 학자들)의 유럽 중심적 렌즈를 통해 유럽 사회는 진보와 발전을 개인주의, 효용, 교육, 질서와 동일시했으며, 이러한 조건은 "'관습'에 얽매이지 않고 관용과 합리적인 토론이 허용되는 사회"에서만 실현될 수 있었습니다(Cowen과 Shenton 1996, 41쪽)(말할 필요도 없이 다른 사람의 문화적 표준만 '관습'으로 비하될 수 있습니다). 식민주의와 인종주의는 제국주의와 경제 확장이 성장함에 따라 이와 유사한 영점 사상이 교육, 보건, 정부 및 그 구조와 제도의 시스템을 통해 만들어지고 엮어졌습니다.
Through the Eurocentric lenses of Darwin, Smith, Saint-Simon, Compte, Newman, and Mill (and many others), European society equated progress and development with individualism, utility, education, and order and these conditions could only be realized in societies “not bound by ‘custom’ and in which tolerance and rational discussion were permitted” (Cowen and Shenton 1996, p. 41) (needless to say, only someone else’s cultural norm would be derided as ‘custom’). Colonialism and racism fit right in and as imperialist and economic expansion grew, these and similar zero-point ideas created and wove their way up and through the systems of education, health, government, and their structures and institutions.
그렇다면 인종주의란 무엇이며, 구조적 또는 제도적 인종주의란 무엇일까요? 여기서는 카마라 존스(2002)의 글을 길게 인용할 가치가 있습니다. 그녀는 이렇게 썼습니다:
What is racism then, and what is structural or institutional racism? It is worth quoting Camara Jones (2002) here at length. She writes:
인종주의는 표현형("인종")에 따라 기회를 구조화하고 가치를 부여하는 시스템으로, 일부 개인과 공동체에 부당하게 불이익을 주고, 다른 개인과 공동체에 부당하게 이득을 주며, 인적 자원의 낭비를 통해 사회 전체의 잠재력을 최대한 실현하는 것을 저해합니다. (p. 10)
Racism is a system of structuring opportunity and assigning value based on phenotype (“race”), that: unfairly disadvantages some individuals and communities; unfairly advantages other individuals and communities; [and] undermines realization of the full potential of the whole society through the waste of human resources. (p. 10)
존스는 이어서 제도화된 인종차별을 다음과 같이 정의합니다:
Jones then goes on to define institutionalized racism as:
"인종"에 따라 사회의 재화, 서비스 및 기회에 차별적으로 접근하는 구조, 정책 또는 규범입니다. 제도화된 인종차별은 규범화되어 있고 때로는 합법화되어 있으며 대물림되는 불이익으로 나타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인종차별은 관습, 관행, 법률 제도에 성문화된 구조적 문제이므로 가해자가 특정되지 않아도 ... 물질적 조건과 권력에 대한 접근성에서 모두 나타납니다. (p. 10)
the structures, policies, or norms resulting in differential access to the goods, services, and opportunities of society by “race.” Institutionalized racism is normative, sometimes legalized, and often manifests as inherited disadvantage. It is structural, having been codified in our institutions of custom, practice, and law so there need not be an identifiable perpetrator … [and it] manifests itself both in material conditions and in access to power. (p. 10)
퀴자노가 주장했듯이 인종주의와 식민주의는 불가분의 관계에 있으며, 경제와 제국의 성장에 초점을 맞춘 영점 인식론의 전 세계적 확장은 저임금 노동, 계약직 노동, 노예제 등 인종주의와 이를 뒷받침하는 구조에 의해 지원되는 노동 세대를 낳았다.
As Quijano has argued racism and colonialism are inextricably linked, such that the global expansion of zero-point epistemology which has been centred around and focused on economic and imperial growth has resulted in generations of labour supported by racism and the structures that support it, including underpaid labour, indentured labour, and slavery.
프란츠 파농은 『검은 피부, 하얀 가면』(1994)과 『지구의 비참한 사람들』(1963)에서 이러한 구조에 억압받아온 사람들의 이야기를 썼습니다. 파농은 마르티니크에서 태어나 리옹에서 정신과 전문의 자격을 취득한 후 알제리에서 진료 활동을 했습니다(Khalfa 2015). 알제리의 병동에서 유럽인과 알제리인 환자를 모두 돌보는 다인종 의사로 일하면서 그는 정신 질환의 형태가 문화적으로 결정된다는 것을 확인했습니다. 파농은 식민지 시대의 권력 매트릭스를 비판하며, 이 매트릭스가 억압자와 피억압자의 생각과 마음 모두에 주입된다는 인식을 가지고 있습니다. 파농은 이러한 형태의 억압 아래서 인간의 삶은 "착취, 비참함, 굶주림과의 싸움의 형태"(2008, 174쪽)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하며, 이러한 억압을 해소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으로 폭력을 요구합니다. 그는 "식민주의는 생각하는 기계도 아니고 추론 능력을 부여받은 신체도 아니다. 그것은 그 자체로 폭력이며, 더 큰 폭력에 직면했을 때만 굴복할 것이다"(1963, 61쪽)라고 말합니다. 파농은 그의 작품 전반에 걸쳐 다음을 세심하게 묘사합니다.
- 식민주의가 식민화된 정신에 어떻게 스며드는지,
- 억압적 담론이 어떻게 일상화되는지,
- 불평등이 어떻게 인종화되는지
비록 이 용어가 만들어지기 전에 글을 썼지만, 파농은 식민지적 권력 매트릭스를 묘사하고 있습니다.
Frantz Fanon writes to those who have been oppressed by these structures in his works Black Skin, White Masks (1994) and The Wretched of the Earth (1963). Fanon was born in Martinique, qualified as a psychiatrist in Lyon and went on to practice in Algeria (Khalfa 2015). Through his work on the wards in Algeria as a racialized physician attending to both European and Algerian patients, he identified forms of psychiatric illness as culturally determined. Fanon critiques the Colonial Matrix of Power, with the recognition that this matrix instills itself both in the thoughts and minds of the oppressor and also the oppressed. Fanon writes that a man’s life under these forms of oppression is conceived as nothing other than “the form of a battle against exploitation, misery, and hunger” (2008, p. 174) and calls for violence as the only method by which this oppression can be lifted. He writes: “colonialism is not a thinking machine, nor a body endowed with the reasoning faculties. It is violence in its natural state, and it will only yield when confronted with greater violence” (1963, p. 61). Throughout his work Fanon carefully describes
- how colonialism pervades the colonialized mind;
- how oppressive discourses become normalized, and
- how inequality is racialized.
Although he was writing before this term was created, Fanon is describing the Colonial Matrix of Power.
파농이 1960년대에, 존스가 2000년대에 묘사한 구조적 인종주의는 HPE와 관행을 포함하여 사회에 계속 만연해 있습니다. 과학은 계속해서 인종차별적인 사람들을 약탈하고 있습니다.
- 루하 벤자민은 줄기세포 연구(2013)와 기술 설계(Benjamin 2019a, b)가 흑인을 차별하는 방식에 대해 글을 썼습니다.
- 린다 투히와이 스미스(2008)는 학술 연구와 같은 구조가 원주민에게 어떻게 경쟁의 장이 될 수 있는지 자세히 설명하며, 영점 인식론 내의 연구는 저항해야 할 대상이라고 말합니다. 겉으로는 평등주의적 태도를 보이는 미국의 일부 주치의는 흑인 및 라틴계 인구에 대해 상당한 암묵적 편견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Hostetter and Klein 2018).
- 오드레 로데(2007)는 학술회의의 구조를 "인종차별적 가부장제의 도구"(110쪽)라고 표현하며, 인종차별적이고 소외된 사람들은 토큰으로만 발표에 초대될 수 있다고 말합니다.
- 패트리샤 힐 콜린스(1986)와 벨 후크스(2014)는 위계적 형태의 권위적인 학문 전파 방식에서 벗어나 외부의 목소리를 듣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합니다(학술지에 실린 이 논문도 여기에 포함시킵니다). 후크스는 학계가 "인종주의와 성차별과 같은 지배 체계를 다시 기록하는 교육적 관행"(2014, 10페이지)에서 벗어날 것을 제안합니다.
The structural racism that Fanon describes in the 1960s, and Jones describes in the 2000s, continues to pervade society, including HPE and practice. Science continues to be predatory against racialized people.
- Ruha Benjamin writes about how stem cell research (2013) and technological design (Benjamin 2019a, b) are discriminatory against Black people.
- Linda Tuhiwai Smith (2008) details how structures, such as academic research, can be sites of contestation for Indigenous Peoples, with research within zero-point epistemology as something that needs to be resisted. Some primary care physicians in the United States who outwardly demonstrate egalitarian attitudes have been shown to have significant implicit biases against Black and Latino populations (Hostetter and Klein 2018).
- Audre Lorde (2007) refers to the structure of an academic conference as “the tools of a racist patriarchy” (p. 110) where racialized and marginalized people may only be invited to present as tokens.
- Patricia Hill Collins (1986) and bell hooks (2014) speak of the importance of listening to voices from outside the authoritative diction of hierarchical forms of academic dissemination (we would include this paper here too, written for a scholarly journal). hooks suggests further that academia move away from “pedagogical practices that … reinscribe systems of domination (such as racism and sexism)” (2014, p. 10).
이러한 사례는 구조적 인종주의가 교육과 의료 분야에서 어떻게 형성되고 자리 잡았는지 설명하는 데 사용된 몇 가지 예에 불과합니다. 우리의 구조, 우리 중 많은 사람들이 누리는 특권, 우리가 추구하는 이점은 그 구조가 인종주의의 토대 위에 세워졌기 때문입니다. 미니애폴리스에서 필란도 카스티야가 살해된 지 4년이 지난 지금도 우리는 여전히 같은 이야기를 쓰고 있습니다.
These are just some examples used to illustrate how structural racism has built and takes its place within education and healthcare. Our structures, the privileges many of us hold, and the advantages we seek, are because the structures are built on a foundation of racism. Four years after the murder of Philando Castile in Minneapolis, we still write the same stories.
성별과 섹슈얼리티
Gender and sexuality
식민주의는 또한 소외된 사람들에게 성별 구조를 강요했습니다. 오예우미(1997)는 영국의 북서아프리카 식민지배가 어떻게 요루바 사회에서 '여성'이라는 개념의 구축과 그 후의 사회 종속을 초래했는지 설명합니다(Lugones(2016) 참조). 성별과 젠더에 대한 식민지 사상의 부과를 설명하는 또 다른 예는 '두 영혼'이라는 용어입니다. 북미 원주민 커뮤니티의 맥락에서 '두 영혼'이라는 용어는 원주민 문화에 내재된 다중 성 정체성, 즉 남성뿐만 아니라 여성뿐만 아니라 둘 이상의 성 지향성(성 지향성은 성적으로 끌리는 개인이 아니라 자신이 일치하는 역할을 의미)으로 정체화하는 개인을 지칭합니다. 그러나 식민주의의 역사, 종교적 교리, 문화적 말살, 기숙 학교 교육의 잔인함, 그리고 그에 따른 세대 간 트라우마로 인해 원주민 공동체 내에서 '두 영혼'의 의미에 대한 가르침이 혼란스러워졌습니다(Cameron 2005). 이마저도 식민지 권력 매트릭스에 의해 지워졌지만, 상당한 저항 노력과 행동주의를 통해 원주민 커뮤니티 내 일부에 의해 두 영혼의 정체성이 되찾아지고 있습니다(Depelteau와 Giroux 2015). 또한 식민지배는 '동성애'라는 범주를 만들어냈고(Mignolo 2011), 이전에는 이러한 방식으로 사람들을 분류하지 않았던 여러 문화의 인식론적 신념을 근절했습니다.
Coloniality also imposed structures of gender upon the people it marginalized. Oyěwùmí (1997) explains how the British colonization of northwest Africa resulted in both the construction of the concept of “woman” in Yorùbá society and then their subsequent subordination in society (see also Lugones (2016)). Another example to illustrate the imposition of colonial ideas about sex and gender is the term ‘two-spirited’. Within the context of Indigenous communities in North America, the term ‘two-spirited’ referred to a multiple gender position embedded within Indigenous cultures, an individual who identifies as more than one gender orientation—not just male and not just female (gender orientation meaning the roles that one aligns with rather than the individuals to whom one is sexually attracted). However, the history of colonialism, of religious dogma, cultural eradication, the brutality of residential schooling, and subsequent intergenerational trauma led to a disruption of teachings within Indigenous communities about the meaning of ‘two spirited” (Cameron 2005). Even that was being erased by the Colonial Matrix of Power, but through significant resistance efforts and activism the two-spirited identity is being reclaimed by some within Indigenous communities (Depelteau and Giroux 2015). Further, coloniality created the category of ‘homosexuality’ (Mignolo 2011), eradicating the epistemic beliefs of multiple cultures that had not previously categorized its people in these ways.
다시 말해, 지배 사회에서는 '새롭게 실현된' 것처럼 보이지만 이미 존재했던 성 및 젠더 개념이 식민지 사회에서는 동일한 권력을 갖지 못한 채 소외되어 왔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섹스와 젠더에 대한 이러한 깨달음이 백인 유럽 학계에서 지배적인 영점 인식론에 대한 의문을 제기하는 초기 징후라고 주장합니다. 1949년 출간된 시몬 드 보부아르의 저서 『제2의 성』(2010)과 주디스 버틀러의 저서(1987, 1990, 2004)는 성을 식민주의에 의존한 고정불변의 정체성이 아니라 "문화적 해석"(1987, 36쪽)으로 재구성하고 있습니다. 성별은 생물학적 스펙트럼에 있지만, 젠더는 사회적으로 구성되며 타인과의 관계를 통해 배우는 것입니다.
In other words, there are conceptions of sex and gender that may appear to have been ‘newly realized’ within the dominant society but had already existed and had then been marginalized in the colonized societies that had not been afforded the same power. We argue here that such realizations about sex and gender were early indications of a questioning of the dominant zero-point epistemology from within the white European academy. The 1949 publication of Simone De Beauvoir’s book The Second Sex (2010) and Judith Butler’s works (1987, 1990, 2004) reconstruct gender not as the fixed immutable identity relied upon through coloniality, but as a “cultural interpretation” (1987, p. 36). While sex may be on a biological spectrum, gender is socially constructed; it is something we learn how to do through our relations with others.
식민지 권력 매트릭스는 인종, 성별, 젠더를 별개의 구분 관행으로 구성하여, 인종과 성별, 젠더가 권력을 통해 상호 연결되는 위계를 만들어 백인 남성이 백인 여성에 대한 권력을 갖고 백인 여성이 흑인 남성에 대한 권력을 갖도록 합니다(Mignolo 2011). 따라서 식민지 매트릭스에 맞서기 위해서는 사회 정의를 위해 함께 노력하면서 역사적 차이를 인정하는 통합된 접근 방식이 필요합니다. 오드레 로데, 벨 훅스, 패트리샤 힐 콜린스는 모두 지배적인 인종차별주의와 가부장제 사회에 저항하는 소외된 목소리의 중요성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여기에서 인종과 성별의 교차성(Crenshaw 1989)을 더 쉽게 확인할 수 있습니다. Lorde(2007)는 소외된 사람들의 생존은 성별, 인종, 나이, 사회경제적 지위 등 자신의 차이를 강점으로 만드는 능력에 달려 있다고 말하며, 독자들에게 개인을 정치화하고 사회 변화를 옹호할 것을 촉구합니다. 후크스는 "말하는 것은 단지 창조적 힘의 표현이 아니라 저항의 행위이며, 우리를 이름도 없고 목소리도 없게 만드는 지배의 정치에 도전하는 정치적 제스처"(2015, 8쪽)라며 목소리와 변화를 더욱 옹호하고 있습니다. 목소리, 직위, 직책이 있다고 해도 사람들이 내 말을 들어준다는 보장은 없습니다. 힐 콜린스(1986)는 흑인 여성에 의한 흑인 여성의 자기 정의와 자기 평가에 긍정적인 변화를 일으키기 위해 외부에서 파생된 이미지를 "진정한 흑인 여성 이미지"(517쪽)로 대체하는 아프리카 중심적 페미니즘 인식론을 주장하며 변화를 촉구합니다.
The Colonial Matrix of Power constructs race, sex and gender as separate dividing practices, creating hierarchies where race and sex and gender became interconnected through power, such that white men had power over white women, and white women had power over Black men (Mignolo 2011). Confronting the colonial matrix thus requires a unified approach that names historical differences while working together for social justice. Audre Lorde, bell hooks and Patricia Hill Collins all speak of the importance of marginalized voices resisting the dominant racist and patriarchal society. It is here where one can more easily identify the intersectionality (Crenshaw 1989) of both race and gender. Lorde (2007) suggests that the survival of marginalized people depends on their ability to take their differences, such as gender, race, age or socioeconomic status, and make them strengths, urging readers to make the personal political, and advocate for social change. hooks further advocates for voice and change, writing “[t]rue speaking is not solely an expression of creative power; it is an act of resistance, a political gesture that challenges politics of domination that would render us nameless and voiceless” (2015, p. 8). Even though you may have a voice, or position, or title, there is still no guarantee that people will listen. Hill Collins (1986) calls for change, arguing for an Afrocentric feministic epistemology where externally-derived images are replaced by “authentic Black female images” (p. 517) to produce positive change in the self-definition and self-valuation of Black women by Black women.
식민지성과 저작자
Coloniality and authorship
우리는 저자 집단으로서 '우리'가 누구인지에 대한 설명으로 HPE의 주인의 집을 해체하는 이 이야기를 시작하면서, 우리의 여러 교차, 강요, 주장된 정체성이 독자들에게 주의와 회의로 우리의 관점을 읽고 자신의 입장, 관점, 특권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도록 경각심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는 생각을 암시했습니다. 독자 여러분이나 저자인 저희는 완벽한 반성적 입장에 도달할 수 있을 거라는 환상을 갖고 있지 않습니다. 이 글의 어느 시점에서 누구의 목소리가, 어떤 관점에서, 어떤 위치에서 말하고 있을까요? 저자 순서를 보면 누구의 목소리가 표현되었는지, 누가 이러한 목소리가 어떻게 표현되는지 결정할 수 있는 권한이 있는지에 대한 단서를 얻을 수 있습니다. 지금 누구의 목소리가 나오는가, 제1저자의 목소리인가? 선임 저자의 목소리인가요? 물론 '우리'라고 주장되는 모든 목소리가 동일하게 대표될 수는 없으며, 어떤 사람들은 이러한 목소리 중 일부는 전혀 대표되지 않는다고 주장할 수도 있습니다.
We started this story of dismantling the Master’s House in HPE with a description of who ‘we’ are as a collective of authors, alluding to the idea that our multiple intersecting, imposed, and claimed identities should alert the reader to read our perspective with caution and scepticism and to attempt to interrogate their own positions, perspectives, and privileges in the reading. We are under no illusion that either you, dear reader, or we as authors will attain a perfected reflexive positioning. Whose voice is speaking at any point in this piece, from what vantage point, and what position? The authorship order might offer some clues over whose voices are represented and who might have the power to determine how these voices are represented. Whose voice is speaking right now, is it the voice of the first author? The voice of the senior author? Certainly, all the voices that are claimed as ‘we’ cannot be represented equally, and some might argue that some of these voices are not represented at all.
학계의 관례에 따라 제1저자는 학계에서 특권을 가진 목소리로 간주될 수 있으며, 이 논문을 작성하고 잠재적으로 HPE에서 콘텐츠가 수용되는 방식을 형성할 수 있는 권한을 갖습니다. 이 경우 제1저자는 박사 과정 중에 박사 지도교수인 마지막 저자에게 의뢰한 이 논문의 작업에 초대받아 이러한 아이디어를 작성했기 때문에 특권을 주장할 수도 있습니다. 마지막 저자는 저자 목록에 자신의 이름을 올리고 의뢰를 받았다는 점에서 강력하고 자원이 풍부한 북미 공간에서 정당화되고 승인된 합법적인 목소리를 낼 수 있는 특권을 동등하게 주장합니다. 두 목소리 모두 식민지 권력 매트릭스 내에서 중심을 잡고 있습니다. 출판된 논문의 제1저자 직책은 그 자체로 학계 구조 내에서 가치 있는 화폐입니다. 이는 책임과 인정을 의미합니다. 이 사례의 경우처럼, 박사 과정 학생이 자신의 연구에 활용하고자 하는 아이디어를 전파하는 데 도움이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보조금, 직위 또는 승진을 신청할 때 이력서에 기재하면 도움이 됩니다.
Academic convention might place the first author as a voice of privilege in the academic space, having the latitude to craft this paper and potentially shape how the content is received in HPE. In this case the first author can also lay claim to privileges, having written about these ideas during the process of her doctoral work she was invited to work on this paper originally commissioned to her doctoral supervisor, the last author. The last author, by the positioning of her name on the authorship list and having been commissioned, equally lays claim to the privileges of a legitimized and approved legitimizing voice in a powerful, well-resourced North American space. Both voices are centred from within the Colonial Matrix of Power. The first author position on a published paper is itself a valuable currency within the structure of academia. It connotes responsibility and recognition. It is often, as is the case here, a helpful position to take for a doctoral candidate disseminating ideas that they intend to employ in their research. It is a helpful position to have on one’s CV when applying for grants, positions, or promotions.
다른 저자들도 잘 드러나지는 않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활용되는 특권을 가지고 있습니다. 소외되었던 목소리는 이제 백인 남성이나 백인 여성에 비해 인종이나 성별, 식민지성에 대해 개인적인 자제력, 경계심, 판단에 대한 두려움을 덜 느끼며 글을 쓸 수 있습니다. 이러한 특권을 인식하고 이를 활용하는 저자들도 있습니다. 이 공간에서 인종 차별적 관행을 고발하는 목소리가 침묵하지 않을 것이라는 기대가 점점 커지고 있습니다. 동시에 식민지 출신이거나 조상이 식민지였던 지역 출신이거나 식민지 민족의 후손인 저자들도 식민지배와 그 영향에 대해 정당성을 인정받으며 말하고 글을 쓸 수 있습니다. 이러한 위치는 집단적 저자의 목소리에 진정성을 부여할 수 있습니다. 또 다른 사람들은 보건 전문가로서 일하는 특권을 누리는데, 이 특권은 우리가 전통적인 HPE의 지식 방식과 그로 인한 불평등과 사회적 불의를 직접 목격하고, 드러내고, 궁극적으로 해체할 수 있는 공간에서 이루어집니다. 더 나아가 우리 중 일부(첫 번째 저자를 포함)는 병원에 들어가 의료 서비스 제공자로 활동한 적이 없고 앞으로도 없을 것입니다. 우리의 지향점은 실습보다는 이론에 더 기울어져 있습니다. 이론적 접근 방식을 취하는 사람도 있지만, 특히 이 작업에서 그들의 방향은 이론보다는 실무에 더 기울어져 있습니다.
Other authors too have privileges, less obvious perhaps, but privileges that are leveraged nevertheless. Voices that have been marginalized may now write about race or gender or coloniality with less personal restraint, vigilance, or fear of judgement in one sense than white men or white women could. Some authors here perceive this privilege and leverage that here. There is an increasing expectation that voices that call out racist practices in this space will not be silenced. At the same time, authors who are from or have ancestral origins in colonized territories or who are descendants of colonized peoples can also speak and write with an accepted legitimacy about colonization and its effects. This position may afford authenticity to the collective author voice. Still others have the privilege of working as health professionals in the spaces where we can witness firsthand, reveal, and eventually dismantle traditional HPE ways of knowing and the resulting inequities and social injustices. This goes even further. There are some of us (this first author included) who has never and will never step into a clinic and act as a healthcare provider. Our orientations lean more towards theory rather than praxis. And while some also have a theoretical approach, their orientations in this work in particular will lean more towards praxis than theory.
텍스트의 본문에서 저자의 성찰과 입장으로 관심을 돌리는 것이 이상하게 보일 수 있지만, 권력의 식민성에 대해 글을 쓰고 있는 지금, 이것이 어떻게 제정되는지를 보여줄 수 있는 한 가지 방법임이 분명합니다. 지식, 인종, 자본이 매트릭스의 중심에 있습니다. 그리고 저자 목록의 첫머리에 스코틀랜드계 캐나다인 백인 여성 박사과정 학생이 있는데, 이 학생은 대학에서 관리자로 정규직으로 일하고 있으며 이 책에서 설명하는 문제의 일부임을 인정하고 있습니다. 이 분도 해결책의 일부가 될 수 있을까요? HPE 내에서 마스터스 하우스의 혜택을 받고 이를 유지해온 바로 그 사람들이 자신의 '집'을 해체할 것을 기대할 수 있을까요? 소외의 구조를 해체하는 것은 오로지 소외된 자들의 역할일까요? 지금 우리에게는 답이 없고 질문만 있을 뿐입니다. 개인으로서 그리고 집단적으로 우리는 이러한 생각에 얽혀 있고, 얽혀야만 합니다. 우리는 어떻게 특권을 반성적이고 정중하게 인식하고 활용할 수 있을까요? 작품이 한 방향으로만 흘러가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억압받는 사람들이 억압자를 교육하기 위해 보상도 받지 못하는 일을 하라고 (우리 기관이 반복해서 하는 것처럼) 요구하는 것이 공정한 일인가요? 저희는 불공평하다고 생각합니다. 대신 이 논문에서 우리 중 일부는 '다수세majority tax'(Mensah 2020)을 지불하기 시작해야 할지도 모른다.
- 교육 및 보건 기관에서 서로 다른 역할을 맡은 전문가 그룹을 모으고,
- 찬성하는 목소리와 반대하는 목소리를 겸손하게 경청하고,
- 특권을 활용하여 특권이 적은 사람들의 아이디어를 발전시키고,
- 정직하고 개방적이며 서로에게 반성적으로 사고하고,
- 주인의 집을 해체하는 데 도움이 될 수있는 논쟁을 함께 배치하는 것이다.
It may seem strange to direct attention away from what might appear as the body of the text to the reflections and positions of its authors, but as we are writing about the coloniality of power, this is certainly one way to demonstrate how this is enacted. Knowledge, race, and capital are at the centre of the matrix. And at the beginning of our authorship list is a white, female, Scottish-Canadian PhD candidate who holds a full-time job as an administrator at a university and admittedly part of the problem being described here. Is it possible to also be part of the solution? Can the very people who have benefitted and uphold the Master’s House within HPE be expected to dismantle their ‘home’? Is it solely the role of those who have been marginalized to dismantle the structures of their marginalization? Right now, we do not have answers, only questions. As individuals and collectively as authors we are entangled in and must tangle with these ideas. How do we recognize and leverage privilege reflexively and respectfully? It is unlikely that the work must only fall in one direction. This work is not being compensated, is it fair to ask (as our institutions do time and time again) for the oppressed to take on uncompensated work to educate their oppressors? We think it unfair. Instead in this paper perhaps some of us start to pay a ‘majority tax’ (Mensah 2020),
- bringing together a group of experts who hold different roles in education and health institutions;
- listening to both confirming and dissenting voices with humility,
- leveraging privilege to advance the ideas of those who have less privilege,
- being honest and open and reflexive in our thinking and with each other, and
- positioning an argument together that might help to dismantle the Master’s House.
아직 부족할 수도 있습니다.
Perhaps this is still insufficient.
우리는 지금까지 이러한 논쟁에서 주로 이론적인 측면에 집중해 왔습니다. HPE의 구조에는 이론과 실천이 모두 필요하지만, 마스터의 집을 해체하기 위해서는 이론과 실천이 모두 필요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제 이론에서 생생한 경험으로 옮겨가면서 제1저자와 다른 이론가들의 목소리와 입장으로부터 의도적으로 벗어나고자 합니다. 아마도 우리는 우리 자신의 동상을 무너뜨리기 시작할 것입니다.
We have primarily been focusing on the theoretical side thus far in these arguments. While the structure of HPE needs both theory and praxis, we also need both theory and praxis to dismantle the Master’s House. And so, we move now from theory to lived experience, intentionally away from the voice and positionality of the first author and the other theorists among us. Perhaps we will start toppling some statues of our own.
이론에서 실천으로: 식민지성, 젠더와 섹슈얼리티, 인종주의
From theory to praxis: coloniality, gender and sexuality, and racism
아래 사례 중 일부는 실제 경험에서 직접 도출한 것으로, 식민지 권력 매트릭스가 HPE 내에서 어떻게 제정되는지 보여줍니다. 각 사례와 함께 식민지 권력 매트릭스에 저항할 수 있는 방법도 설명하기 시작합니다. 우리는 마스터의 집을 해체하는 방법을 보여주기 시작합니다.
In the examples below, some drawn directly from lived experience, we begin to show how the Colonial Matrix of Power is enacted within HPE. Together with each example, we also begin to illustrate ways in which the Colonial Matrix of Power can be resisted. We begin to show how to dismantle the Master’s House.
HPE 프로그램에 참여하는 학생들은 종종 학습 환경 내에서 지속되는 불평등의 피해자입니다. 여러 연구에 따르면 이러한 프로그램 내에서 학생에 대한 학대가 매우 흔하게 발생하며, 이는 거의 전문의가 되기 위한 통과의례로 여겨질 정도입니다(Markman 외. 2019).
- 예를 들어, 같은 방에 있는 백인 학생은 의대생으로 인정하면서 흑인 학생은 간호사로 무시하는 백인 환자나 인턴십 면접에서 성이 "너무 아랍어로 들린다"는 이유로 담당 외과의사로부터 탈락한 학생을 생각해 보십시오. 이러한 학생들은 보복에 대한 두려움, 학대가 의료 문화의 일부라는 인식, 더 미묘한 형태의 학대를 신고하기 어렵다는 점 등 여러 가지 이유로 이러한 미세 공격에 대한 신고를 주저합니다(Chung et al. 2018).
- 원주민 학생들도 마찬가지로 인식론적 제국주의에 직면하는 과학, 기술 및 보건 학위에서 불이익을 받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이러한 프로그램에서 원주민의 앎의 방식은 커리큘럼 내에서 위계화되고, 소외되고, 침묵하며, 도전을 받습니다(Cech 외. 2017).
- 교수진은 또한 인종차별, 불평등, 미시적 침략을 경험하는데, 그 중 상당수는 "미묘하고 미묘하지만 해로운"(Joseph 2020) 것입니다. 이러한 식민주의의 표현으로 인해 일부 교수진은 진실을 말하는 것을 두려워하고, 잘못 해석될까 두려워 발언하기를 꺼리며, 문제가 있는 사람으로 분류되거나 토큰으로 사용될 것을 우려합니다. 이러한 억압적인 환경으로 인해 일부 학계 의사들은 학계를 떠나기로 어려운 결정을 내렸고, 대신 권력에 진실을 말할 수 있는 새로운 공간을 만들었습니다(Blackstock 2020).
Students in HPE programs are often victims of inequities perpetuated within their learning environments. Several studies have shown that mistreatment of students is so commonplace within these programs that it is almost regarded as a rite of passage into the profession (Markman et al. 2019).
- Take for example, a white patient who acknowledges the white students in the room as medical students while dismissing the Black student as a nurse, or the student who is dismissed by a staff surgeon from an internship interview because her last name sounded “too Arabic”. These students hesitate to report such microaggressions for many reasons, some of which include fear of reprisal, perception that mistreatment is part of medical culture, or difficulty reporting more subtle forms of mistreatment (Chung et al. 2018).
- Indigenous students have similarly been shown to be disadvantaged in science, technology and health degrees where they encounter epistemic imperialism. In these programs, Indigenous Ways of Knowing are delegitimatized, marginalized, silenced, and challenged within curricula (Cech et al. 2017).
- Faculty members also experience racism, inequities and microaggressions, much of it “subtle and nuanced, yet pernicious” (Joseph 2020). This manifestation of coloniality leaves some faculty members fearful of speaking their truth, reluctant to speak up for fear of being misinterpreted, concerned of being labelled as problematic or used as tokens. These oppressive environments have caused some academic physicians to make the difficult decision to leave academic medicine, creating new spaces instead where they can speak truth to power (Blackstock 2020).
HPE 프로그램을 연구하고, 가르치고, 구축하고, 관리하고, 이끄는 사람들은 불평등과 사회 정의에 대한 가르침을 기존의 지배적 이데올로기의 중립적 객관성에 대항하는 구성주의와 인식론적 다원주의와 같은 비지배적 인식론에 다시 집중할 필요가 있습니다. 아마도 HPE 내에서 권력 역학을 해체하는 것이 좋은 출발점이 될 것입니다.
- 학생들의 불평등에 대한 경험 및 지식이 필요하고 가치 있다고 판단되면, 기꺼이 경청하고 배우려는 교수진이 이러한 지식 중 일부를 불평등과 사회 정의에 대한 교육에 통합할 수 있습니다.
- 마찬가지로, 교육 연구를 추구하거나 지도하거나 출판하는 사람들은 지배적인 이데올로기를 중심으로 한 단일 관점에 의문을 제기하고 이를 가시화해야 합니다.
- 연구 경력의 초기 단계에 있는 사람들은 반성적 사고에 대한 안내를 받을 수 있고, 오랜 시간 동안 믿어온 가정에 의문을 제기하는 방법과 위치에 대한 안내를 받을 수 있습니다.
- 동료 검토자로 참여하는 사람들도 마찬가지로 저자의 가정뿐만 아니라 우리 자신의 가정에 대해서도 반성하도록 요청할 수 있습니다.
- 영점 인식론으로부터의 전환은 형평성, 다양성, 포용성에 중점을 둔 HPE를 만들 수 있는 잠재력을 가지고 있으며, 학생, 교수진, 교직원, 특히 소수자가 학습 환경의 일부로서 불평등에 맞서 싸우거나 불가피한 현실에 굴복하지 않아도 되는 문화를 조성할 수 있습니다.
- 교육할 때 백인이 아닌 피부의 피부과 질환에 대한 예를 포함하거나(Rimmer 2020), 인종에 대한 생물학적 정의를 사용하여 환자를 차별화하는 임상 개입이나 치료법에 대해 더 이상 가르치지 않는 것(Witzig 1996)처럼 간단한 것부터 시작할 수 있습니다.
Those who research, teach, build, administer, and lead HPE programs need to re-centre their teachings of inequity and social justice on non-dominant epistemologies—such as constructivism and epistemic pluralism which counteract the neutral objectivity of the existing dominant ideologies. Perhaps the dismantling of the power dynamic within HPE is a good place to begin.
- If students’ experiences and/or knowledges of inequity are considered necessary and deemed valuable, then some of this knowledge can be incorporated into training on inequity and social justice by faculty who are willing to listen and learn.
- Likewise, for those who pursue, mentor or publish educational research, singular perspectives centred around dominant ideologies should be questioned and made visible.
- Those of us who are early on in our research careers could be guided in reflexivity and guided in how and where to question our long-held assumptions.
- Those of us who participate as peer reviewers could likewise ask to reflect on not only the author’s assumptions, but also our own.
- A shift from zero-point epistemology has the potential to create HPE that is centered on equity, diversity, and inclusion, and could cultivate a culture in which students, faculty and staff, especially those who are minoritized, don’t have to take it upon themselves to fight inequity or succumb to its inevitable reality as part of the learning environment.
예를 들어, 의학계에서 계속 수행되고 있는 실무 중심의 작업의 대부분은 백인 여성을 중심으로 이루어지고 있으며, 여성의 리더십 직위 승진을 늘려야 한다고 요구합니다. 그러나 백인 여성을 중심으로 한 이러한 노력은 임상의사라는 직업이 주는 일상적인 스트레스의 무게뿐만 아니라 여러 형태의 구조적 인종차별과 암묵적 편견으로 인해 더욱 억압받는 흑인, 원주민 또는 유색인종(BIPOC)으로 분류되는 사람들의 경험을 침묵시키고 동질화하며 무력화시키는 역할을 합니다(Cyrus 2017; Moreton-Robinson 2000). 여러 종속의 축으로 인해 차이를 부정하고 억압의 형태를 만들어내는 구조를 해체하기 위해 우리는 변화를 위한 교차적 접근법을 사용할 수 있습니다.
Much of the praxis-oriented work that continues being performed in medicine centres white women, for example, calling for increases in the promotion of women to positions of leadership. But this centring on white women works to silence, homogenize, and negate the experiences of people who identify as Black, Indigenous, or people of colour (BIPOC) who not only carry the weight of the everyday stress of the job of being a clinician, but also carry the burden of multiple forms of structural racism and implicit biases that further oppress them (Cyrus 2017; Moreton-Robinson 2000). To begin to dismantle the structures that negate difference and create forms of oppression due to multiple axes of subordination we can employ an intersectional approach to change.
교차적 관점(콜린스 2015; 크렌쇼 1989, 1991)은 여러 형태의 억압이 누적되어 나타난다는 점을 인식합니다.
- 예를 들어, 캐나다 태생 국제 의대 졸업생(C-IMG)(일반적으로 캐나다에서 태어나고 자랐지만 다른 나라로 가서 의대를 마친 사람)은 이민 국제 의대 졸업생(I-IMG)(일반적으로 캐나다 밖에서 태어나고 자랐으며 의대 교육을 마친 사람)과 임상 교육 프로그램을 다르게 경험하게 됩니다.
- IMG는 캐나다 생활에 적응하고 캐나다 의료 시스템을 배워야 하는 반면, C-IMG는 캐나다에서 기대되는 많은 사회적 '규범'을 이미 알고 있습니다. 나지브 외(2019)의 연구에 따르면, C-IMG와 I-IMG 모두 캐나다 밖에서 의대를 졸업했다는 이유로 편견과 차별을 경험하지만, 인종화된 I-IMG는 더 심한 형태의 차별을 경험한다고 합니다.
Intersectional perspectives (Collins 2015; Crenshaw 1989, 1991) recognize that there are multiple forms of oppression that are cumulative.
- For example, a Canadian-born international medical graduate (C-IMG) (someone who typically was born and grew up in Canada but who went to another country to complete medical school) will experience a clinical training program differently compared to an Immigrant international medical graduate (I-IMG) (someone who typically was born, grew up, and completed medical training outside Canada).
- Whereas IMGs need to adjust to life in Canada and learn the Canadian health system, a C-IMG is already aware of many of the social ‘norms’ expected of them in Canada. In a study by Najeeb et al. (2019), both C-IMGs and I-IMGs experience a form of bias and discrimination from having completed medical school outside Canada but racialized I-IMGs experienced a heightened form.
교차성은 의학이 학습되고, 실행되고, 전달되는 방식에서 사회적 불공정을 완화하기 위한 목적으로 의학을 지배하는 복잡한 권력 관계를 이해하는 수단을 제공합니다. 주치의 제도를 뒷받침하는 헤게모니적 관행을 해체하기 위해, 우리는 자신의 정체성과 관행이 HPE에서 규범적 담론의 공고화와 수출에 어떻게 기여하는지 더 잘 이해하기 위해 비판적 성찰과 반성성을 사용하는 프레이레의 『피억압자의 교육학』(2000) 또는 후크스의 『범법 가르치기』(2014)에서 가져온 것과 같은 다양한 교육학의 사용을 제안합니다(Naidu and Kumagai 2016; Ng et al. 2019).
Intersectionality provides a means of understanding the complex power relations that dominate medicine with the objective of alleviating social injustices in how medicine is learned, practiced, and delivered. In order to dismantle the hegemonic practices that support the Master’s House, we suggest the use of a range of pedagogies, such as those taken from Freire’s Pedagogy of the Oppressed (2000) or hooks’ Teaching to Transgress (2014), which employ critical reflection and reflexivity to better understand how one’s own identity and practices contribute to the solidification and exportation of normative discourses in HPE (Naidu and Kumagai 2016; Ng et al. 2019).
이 글에서 우리는 교차성 프레임 내에서 비판적 성찰과 반성이 오랫동안 '금과옥조'로 여겨져 온 보건 전문직 교육 및 실무 모델을 뒤흔들 수 있는 잠재력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합니다. 젠더 블라인드나 컬러 블라인드로 차이를 지우는 제도적 정책과 관행 또는 연구 관행보다는, 교차성과 이전에는 소외되었던 지역사회 중심의 [교차적 인식론의 도입]이
- 차이를 포용하고,
- 차이의 지저분함과 얽히는 어려운 작업을 수행하고,
- 이러한 얽힘이 만들어내는 불편함으로부터 학습을 통해 앞으로 나아갈 수 있게 해줄 수 있습니다.
We argue here that critical reflection and reflexivity within an intersectional frame have the potential to disrupt models of health professions education and practice that have long been upheld as proverbial ‘gold standards’. Rather than institutional policies and practices or research practices erasing differences by being gender-blind or colour-blind, intersectionality and the introduction of intersectional (Eckstrand et al. 2016), previously marginalized, and community-oriented, epistemologies (Battiste 2013; Brayboy 2005; Collins 2002; Dei 2000; Gordon 1990; Naidu 2020; Rasmus et al. 2020; Smith 1999) would better enable us to
- embrace difference,
- do the difficult work of tangling with the messiness of difference, and
- move us forward through learning from the discomfort these entanglements produce.
기관 스스로가 이러한 작업을 주도하고 지원할 수 있습니다. 여기에는 장기적이고 심층적인 반인종주의(또는 반성소수자) 교육의 형태로 보건 전문가와 멘토를 위한 지속적인 전문성 개발, 눈에 잘 띄지 않고 때로는 고립되는 회복 작업을 지원하고 피해를 입힌 사람들에게 책임을 물을 수 있는 공간을 만들고 구조적 지원(시간 및 급여 포함)을 제공하는 것 등이 포함될 수 있습니다(Richardson 2020c), 동료 검토 과정 내의 체계적인 편견으로 인해 종종 불이익을 받는 소외된 집단을 대상으로 자금을 제공하거나(Doll and Thomas 2020), 채용, 승진 또는 포상 과정에서 교차성이 백인보다 낮은 교수 평가를 받는 경향이 있는 인종화된 교수진(특히 인종화된 여성)에 이중으로 영향을 미치는 방식을 고려합니다. 여기에는 다음이 포함될 수 있습니다.
- 장기적이고 심층적인 반인종주의(또는 반성소수자) 교육의 형태로 보건 전문가와 멘토를 위한 지속적인 전문성 개발
- 눈에 잘 띄지 않고 때로는 고립된 회복 작업을 지원하기 위해 공간을 만들고 구조적 지원(시간 및 급여 포함)을 제공
- 해를 끼친 사람들에게 책임을 묻습니다(리처드슨 2020c),
- 동료 검토 프로세스 내의 체계적인 편견으로 인해 종종 불이익을받는 소외된 그룹을 대상으로 자금을 제공
- 채용, 승진 또는 포상 과정에서 교차성이 백인보다 낮은 교육 평가를받는 경향이있는 인종화 된 교수진 (특히 인종화 된 여성)에게 이중으로 영향을 미치는 방식을 고려
Institutions themselves can drive and support this work. This might include
- continuing professional development for health professionals and mentors in the form of longitudinal and deep antiracist (or antisexist) training,
- creating space and offering structural supports (including time and salary) to aid in the hypervisible and sometimes isolating work of restitution,
- holding people who cause harm to account (Richardson 2020c),
- offering funding targeted towards underrepresented groups where systemic biases within peer review processes have often led to disadvantage (Doll and Thomas 2020), or
- taking into consideration during hiring, promotion, or awards processes how intersectionality doubly affects racialized faculty (and racialized women in particular) who tend to receive lower teaching evaluations than their white counterparts (Chávez and Mitchell 2020; Mohamed and Beagan 2019; Ross and Edwards 2016; Silverberg and Ruzycki 2020).
진정한 구조적 변화를 위한 노력은 토큰주의적이거나 일시적일 수 없으며, 전략적 목표로 나타났다가 곧 사라져서는 안 됩니다.
Commitment to real structural change can neither be tokenistic nor temporary, it cannot appear as a strategic goal and then disappear soon after.
결론
Conclusion
이 백서에서는 마스터스 하우스와 그 유럽 중심적 기원, 영점 인식론에 대한 의존성, 그리고 이 하우스에 현재 보건 전문직 교육과 사회 정의에 대한 이해와 실천이 얼마나 많이 내재되어 있는지에 대해 설명했습니다. 우리는 퀴자노의 식민지 권력 매트릭스(2000)를 활용하여 식민성, 성, 성별, 인종이 하우스 내에서 어떻게 구성되었는지를 설명하고 질문하면서 그 과정에서 인식론적 불공정의 예를 제시했습니다. 우리는 이 글의 두 섹션에서 개인으로서, 그리고 저자로 구성된 팀으로서 우리 자신의 관점에 대해 꽤 긴 글을 썼고, 식민지 권력 매트릭스 내에서 저술에 대한 몇 가지 성찰을 제공했습니다. 후반부에서는 이론에서 실천으로 넘어가 학습 환경과 실천의 맥락에서 식민성, 젠더와 섹슈얼리티, 인종 차별을 탐구했습니다.
Within this paper, we have described the Master’s House, its Eurocentric origins, its dependence on zero point epistemology, and how many current understandings and practices of health professions education and social justice are embedded within this House. We utilized Quijano’s Colonial Matrix of Power (2000) to illustrate and interrogate how coloniality, sex and gender and race has been constructed within the house, giving examples of epistemic injustices along the way. We wrote quite at length in two sections of the narrative about our own perspectives as individuals and as a team of authors and provided some reflections on authorship within the Colonial Matrix of Power. In the latter section, we moved away from theory into praxis, exploring coloniality, gender and sexuality, and racism in the context of the learning environment and practice.
우리는 스승의 집의 해체를 주장했습니다. 이는 우리 중 많은 사람들이 일하고 배우고 수입을 얻는 집의 해체를 의미할 것입니다. 이것이 쉽거나 편안할 것이라고 제안하는 것은 아니지만, 반드시 필요합니다. 개인, 위원회, 기관으로서 취할 수 있는 조치는 많으며, 이 작업에 참여하고자 할 때 다양한 관점과 목소리를 찾아보시기 바랍니다. 이 저널의 독자들을 위해 몇 가지 추가 단계를 제안합니다.
We have argued for the dismantling of the Master’s House. It would mean the dismantling of the house in which many of us work and learn, and from where we draw our incomes. We are not suggesting this will be easy, or comfortable, but it is needed. There are many steps we can take as individuals, as committees, and as institutions and we encourage you to seek out many perspectives and voices as you seek to engage with this work. For the audience of this journal, we suggest a few additional steps.
[개인으로서] 우리는 우리의 작업을 어떻게 포지셔닝하는지에 주의를 기울일 수 있으며, 청중이 비슷한 입장에 있다고 가정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합니다. 글을 쓰거나 말할 때 이러한 관점에 대해 더 명확히 밝히고, 우리 자신과 정체성, 그리고 우리가 말하는 입장을 더 많이 공유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권력이나 목소리 또는 위계질서를 유지하는 데 덜 집중하고, 우리 자신과 다른 인식론적 관점을 가진 사람들과 의미 있는 파트너십을 구축하는 데 더 집중하면서 의미 있는 협업을 구축할 수 있습니다(Richardson 2020a). 강좌의 읽기 목록을 구성할 때 모든 지식이 백인적이고 서구적이라는 믿음을 재현하지 않기 위해 전통적인 정전 밖을 살펴볼 수 있습니다. HPE의 학생으로서, 때로는 교육의 '소비자'로서 다양한 형태의 지식에 특권을 부여하는 프로그램과 과정을 찾을 수 있습니다. 이론의 학생 또는 실무자로서 우리는 연구에 적용하는 이론이 종종 인식론적 불공정성이나 폭력의 과정을 통해 개발된다는 것을 알고 자신과 다른 사람들에게 선택한 이론적 틀에 대한 신중한 고려를 요구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것이 어려운 작업이며 우리 모두가 이 여정의 다른 단계에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친절로 혼란을 일으킬 수 있습니다."(Richardson 2020b). 우리 중 일부는 동맹을 찾아야 할 수도 있고, 일부는 동맹으로 행동해야 할 수도 있으며, 일부는 둘 다 필요할 수도 있습니다.
As individuals we could pay attention to how we position our work, being mindful of not assuming our audience is similarly positioned. We can be more explicit about these perspectives as we write or speak, sharing more of ourselves, our identities, and the positions from which we speak. We can establish meaningful collaborations with less focus on retaining power or voice or hierarchy and more focus on building meaningful partnerships with people from epistemic perspectives not our own (Richardson 2020a). When structuring a reading list for a course, we can look outside the traditional canon so as to not reproduce the belief that all knowledge is white and Western. As a student in HPE, and as a sometimes named ‘consumer’ of education, one can seek out programs and courses that privilege multiple forms of knowledge. As a student or practitioner of theory we can demand of ourselves and others a careful consideration of a chosen theoretical framework, knowing that the theories we apply to our research are often developed through processes of epistemic injustice or violence. We can “disrupt with kindness” (Richardson 2020b) knowing that this is difficult work, and we are all on different stages of this journey. Some of us may need to find allies, some of us may need to act as allies, and some of us may need both.
[위원회로서] 커리큘럼을 구축하든, 학습자를 입학시키든, 직원과 교수진을 채용하든, 정책을 만들든, 우리는 식민지 시대의 권력 매트릭스를 인식하고, 이를 해체하려는 언어와 관점을 사용하여 제로 포인트가 아닌 인식론의 관행이나 독서를 제안할 수 있으며, 주변부에 위치한 사람들을 중심에 놓고 권한을 부여할 수 있습니다. 시스템을 개발할 때, 우리는 교차성을 고려할 수 있으며, 일부 개인은 시스템과 그 안의 사람들이 내리는 선택에 의해 이중 또는 삼중의 영향을 받는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우리는 지배적인 '규범'에 속하지 않는 아이디어에 귀를 기울이고, 이를 통해 배우고, 이를 위한 공간을 만들 수 있습니다.
As committees, whether we are building curriculum, admitting learners, hiring staff and faculty or creating policy, we can suggest practices or readings from non-zero-point epistemologies, using language and perspectives that recognize the Colonial Matrix of Power and seek to dismantle it, and we can center and empower the people who are positioned on the margins. As we develop our systems, we can take into account intersectionality, realizing that some individuals are doubly or triply affected by the choices that the system (and the people within it) may make. We can listen to, learn from, and create space for ideas that are not part of the dominant ‘norm’.
[기관으로서] 우리는 암묵적인 편견, 관점 및 구조를 보다 투명하게 만드는 정책과 관행을 개발하고, 지속적인 전문성 개발 또는 행동 변화로 이어지는 기타 관행을 통해 의미 있고 지속적인 변화를 창출하는 데 자원(시간, 자금, 인력)을 투입할 수 있습니다. 다원적 인식론에 기반하고 이를 환영하는 교육 연구 교육 프로그램에 자원을 투입할 수 있습니다 .
As institutions, we can develop policies and practices that make implicit biases, perspectives and structures more transparent, committing resources (time, funding, people) to creating meaningful and lasting change through continuing professional development or other practices that lead to behaviour change. We can commit to resourcing training programs in education research that are built on and welcome pluralistic epistemologies.
우리는 미세한 공격이나 인종 차별적, 성차별적 관행을 고발하는 사람들을 침묵시키거나 최소화하는 대신, 권력에 반대하는 목소리를 내는 사람들을 정당화하여 스승의 집 내 공격자들과 맞설 수 있습니다. 기관은 이러한 변화를 주도하는 사람들의 업무를 더 잘 지원할 수 있으며, 컨설턴트나 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하는 사람들에게 보호된 시간, 자금, 공간 및 추가 지원을 제공함으로써 이들의 업무에 대한 공정한 보상을 제공할 수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기관은 영점 인식론의 단일한 시연을 고용, 승진 및 보상하는 규범에 뿌리를 둔 기존 관행을 해체하여 보다 공평한 변화 시스템을 구축할 수 있는 새로운 아이디어와 리더를 위한 길을 만들어야 합니다.
We can legitimize those who speak out against power, confronting those who are aggressors within the Master’s House, rather than silencing or minimizing those who call out microaggressions or racist and sexist practices. Institutions can better support the work of the people leading these changes, fairly compensating people for their work as consultants or committee members by providing protected time, funding, space, and/or additional support. Finally, institutions need to dismantle the existing practices, rooted in the norms that hire, promote and reward singular demonstrations of zero point epistemology, making way for new ideas and leaders that can construct a more equitable system for change.
이 논문이 게재된 저널은 그 자체로 우리 분야의 기관입니다. 이 논문은 25년 만에 편집장직에서 물러난 제프리 노먼 박사를 기념하기 위해 특별호로 의뢰된 것입니다(Norman and Ellaway 2020). 그 자신도 인정했듯이, 노먼 박사는 25년 동안 이 저널을 이끌며 우리가 쓰고 읽은 이야기를 형성하고 페이지 사이에 담긴 생각과 관점을 큐레이팅해 왔습니다. AHSE는 항상 새로운 아이디어를 위한 길을 열어주는 저널이었으며, 우리 분야의 발전을 축하하고 고착화된 단일한 단어를 넘어 우리를 움직였습니다. 이에 대해 노먼 박사에게 감사를 표하며 새로운 아이디어와 리더를 AHSE에 환영합니다. 우리는 앞으로 25년 동안 어떤 이야기가 나오든 아직 쓰여지지 않았고, 아직 들리지 않았고, 아직 읽히지 않은 수많은 이야기들도 이 페이지에 포함될 것으로 기대합니다.
The journal in which this paper is published is itself an institution within our field. This paper was commissioned for a special issue in celebration of Dr. Geoffrey Norman who has just stepped down as Editor-in-Chief after 25 years (Norman and Ellaway 2020). As he himself would acknowledge, for a quarter of a century, Dr. Norman has guided this journal, shaped the stories that we have written and read, and curated the thoughts and perspectives bound between its pages. AHSE has always been a journal making way for new ideas; celebrating the advances of our fields, and moving us beyond the staid singular word. And for that, we thank Dr. Norman and also welcome new ideas and leaders to AHSE. We anticipate that whatever comes in the next quarter century will also encompass the plurality of stories that have not yet been written, not yet been heard, and not yet been read within these pages.
우리는 소외되고 억압받고 지워진 수많은 정체성을 어떻게 가장 잘 끌어안고 포용할 수 있을지 잘 안다고 주장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제도와 구조가 그들의 권력에 빚진 역사적 불의를 해결하도록 요구하는 데 항상 성공하지 못했습니다. 지식은 중립적이고 가치관이 없는 것이 아니며, 그렇지 않다고 주장하는 것은 지배 집단의 힘을 강화하는 것일 뿐이라는 사실에 대해 HPE 내부에서도 동의가 이루어졌다고 주장할 수 없습니다. 분명한 것은 우리가 해야 할 일이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개인적으로나 집단적으로 근접성, 자유, 안전에 대한 관점이 바뀐 이 새로운 공간에서 숨을 쉬려고 노력할 때, 우리는 우리 주변에 쓰러져가는 동상을 다시 세우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렇게 하면 과거의 실패를 되풀이할 뿐이며, 불평등과 소외에 대한 똑같은 이야기를 쓰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마스터의 집을 해체하고 더 공평하고 포용적인 새로운 마스터의 집을 지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 새로운 시작을 위해 헌신해야 합니다.
We do not claim to know how best to engage and embrace the many identities that are marginalized, oppressed, and erased. We have not always been successful in our demands that institutions and structures address the historical injustices to which they owe their power. We cannot even claim that there is agreement within the field of HPE that knowledge is not neutral and value-free, and that claiming otherwise just reinforces the power of the dominant group. Clearly, we have work to do. As we all, individually and collectively, try to breathe within this new space, where our perspectives of proximity, freedom, or safety may have shifted, we can choose not to re-erect the statues that are falling around us. Doing so will simply resurrect our past failures, writing the same stories of inequity and marginalization. We can dismantle the Master’s House and build a new one, one that is more equitable and inclusive. We must commit to this new beginning.
Dismantling the master's house: new ways of knowing for equity and social justice in health professions education
PMID: 33136279
PMCID: PMC7605342
DOI: 10.1007/s10459-020-10006-x
Free PMC article
Abstract
Health professions education (HPE) is built on a structural foundation of modernity based on Eurocentric epistemologies. This foundation privileges certain forms of evidence and ways of knowing and is implicated in how dominant models of HPE curricula and healthcare practice position concepts of knowledge, equity, and social justice. This invited perspectives paper frames this contemporary HPE as the "Master's House", utilizing a term referenced from the writings of Audre Lorde. It examines the theoretical underpinnings of the "Master's House" through the frame of Quijano's concept of the Colonial Matrix of Power (employing examples of coloniality, race, and sex/gender). It concludes by exploring possibilities for how these Eurocentric structures may be dismantled, with reflection and discussion on the implications and opportunities of this work in praxis.
Keywords: Coloniality; Critical theory; Curricula; Decolonization; Equity; Health professions education; Medical education; Social justice.
Conflict of interest statement
The author(s) declare that they have no competing interes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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