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인성에 직면하고 국제보건기관을 탈식민지화하기 (Lancet, 2021)
Confronting whiteness and decolonising global health institutions

 

 

수세기 전 볼테르는 1759년 칸디데의 소설에서 백인들의 자애로운 미화를 풍자했다. 독자는 캔디드의 변덕스러운 모험을 따라다니며, 캔디드가 스스로 정한 선의를 관찰하고 그가 보는 잔혹행위에 대한 자신의 공범성을 부인한다. 본문은 구조적 폭력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받지 않고 이를 가능하게 하는 사회 구조와 제도를 만드는 데 공모하는 이들의 순진한 낙관론을 묘사한다. 캔디드는 강력한 경고를 담고 있다. 카를로스 월리스는 "무지는 진보적인 사상가의 적이다. 수용, 인식, 책임과 행동은 지식을 가진 사람들의 도구이다. 변화를 원하고 변화를 이루기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하는 사람들의 도구이다."라고 주장했다.
Centuries ago, Voltaire satirised the glorification of white men's benevolence in his novel of 1759 Candide. The reader follows Candide's erratic adventures, observing his self-defined good intentions and denial of his own complicity in the atrocities he sees. The text describes the naive optimism of those not directly affected by structural violence but complicit in the creation of the social structures and institutions that enable it. Candide contains a powerful warning. As Carlos Wallace has argued: “Ignorance is a progressive thinker's enemy; acceptance, awareness, accountability and action are the tools of the informed; of people who want change and do all they can to achieve it.”

조지 플로이드의 경찰 살해와 전 세계적으로 미국 블랙 라이프 매터 운동의 맥락화 이후, 세계 보건 기관들의 반인종차별적 분출은 오랫동안 대부분 백인, 대부분 남성, 학자들에 의해 지배되어 왔으며, 일부 회의적인 시각을 보장했다. 이와는 반대되는 공개 성명에도 불구하고, 일부 학술 기관이 반인종주의 교육을 의무화하고 공공 및 세계 보건에서 교수 및 연구 관행을 탈식민지화하기 위한 노력에 적절히 자금을 지원하는 것을 꺼리는 것은 실망스럽다. 논쟁의 여지 없이, 그러한 진술은 수세기 동안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은 후 주로 평판 위험을 완화하고 공개적으로 백인 죄책감을 완화시키는 역할을 했다. 이 주제에 대한 인지적 부조화는 놀랍다. 플로이드는 정의를 위해 그의 삶을 희생하지 않았다. 그의 죽음을 초래한 구조적 폭력은 우리 시대의 불평등에 나타나는 역사적 뿌리를 가지고 있다.
After the police murder of George Floyd and the contextualisation of the US Black Lives Matter movement worldwide, anti-racist outpourings from global health institutions, long dominated by mostly white, mostly male, scholars, warranted some scepticism. Despite public statements to the contrary, the reluctance of some academic institutions to mandate anti-racist education and appropriately fund efforts to decolonise teaching and research practices in public and global health is disheartening. Arguably, such statements mainly served to mitigate reputational risks and publicly assuage white guilt after centuries of inaction. The cognitive dissonance on this topic is striking. Floyd did not sacrifice his life for justice. The structural violence that caused his death has historical roots that manifest in the inequities of our time.

벨 훅의 말에 영감을 받아, 나는 왜 우리 인종화된 개인들이 그러한 문제들을 명확하게 보고 비판적으로 명명할 수 있는 반면, 우리의 백인 동료들은 그것들을 대부분 인식하지 못하는 것 같은지 궁금했다. 제임스 볼드윈이 "백인들이 흑인에 대해 모르는 것은 무엇이든 그들 자신에 대해 모르는 것을 드러낸다"고 말한 후, 나의 질문은 나를 백인 연구로 이끌었다. 식민지 담론에 대한 비판적 연구에 관심을 가진 이 분야의 선구자 루스 프랑켄베르크는 인종 관계는 "타인"만을 다르게 볼 때 그것을 가진 사람들이 어떻게 힘을 행사하는가에 의해 형성된다고 이론화했다. 그녀는 그것을 [권력 백인성power whiteness]라고 불렀다. 백인(白人)이라는 용어는 식민주의와 계몽주의 사상가들로부터 물려받은 권력 관계를 반영하여, 성적, 인종적 위계질서의 존재를 주장하였다. 그 계층은 모든 "다른" 집단보다 기독교 유럽 백인 남성이 선천적으로 우월하다고 가정하여 노예 아프리카인과 원주민과의 상호작용을 정당화하였다. 그 결과, 백인성은 (당연한 것으로) 가정되고, 학습되고, 자연화된 규범을 나타낸다. 세계 보건의 탈식민지화를 위해서는 인간이 되는 중립적이고 최선의 방법으로서의 백인의 사회적 구성이 세계 보건 기관의 기능에 어떻게 계속 영향을 미치는지 비판적으로 검토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Inspired by the words of bell hooks, I wondered why, we—racialised individuals—are able to clearly see and critically name those issues, whereas our white peers seem largely unaware of them. Following James Baldwin's observation that “[w]hatever white people do not know about Negroes reveals…what they do not know about themselves”, my quest led me to whiteness studies. Ruth Frankenberg, a pioneer in the field with an interest in critical study of colonial discourse, theorised that race relationships are shaped by how power is exercised by those who have it when they see only “others” as different. She called that power whiteness. The term whiteness reflects the power relationship inherited from colonialism and Enlightenment thinkers who argued for the existence of a sexual and racial hierarchy. That hierarchy supposed the innate superiority of Christian European white males over every “other” group to justify their interactions with enslaved Africans and Indigenous peoples. Whiteness represents the norms assumed, learned, and naturalised as a consequence. To decolonise global health, I believe we must critically examine how the social construction of whiteness as the neutral and best way of being human continues to influence the functioning of global health institutions.

백인에 대해 말하는 것은 백인 학자들의 [인종적 무의식 상태]에 도전한다. 세계 보건 기관의 탈식민화와 관련하여, 일반적으로 기관의 인종화된 기원이 비백인에 대한 기관을 감소시키고 자원의 불평등한 분배를 정당화하는 방법에 대한 해임이 있다. 자원에도 불구하고 기관이 목표 인구의 삶을 개선하지 못하는 이유를 설명할 수 없다.그리고 그 기관이 일반 복지 대신 해악의 원천이 될 수 있다는 부정. 이러한 문제들은 그러한 기관들이 공공재로서 수행하는 비인종적 주관성의 지평을 반영한다. 실제로, 세계 보건 기관들은 인종화된 지역사회에 대항하여 설계되었다. 1900년, 패트릭 맨슨 경은 자신이 설립한 기관의 1급 졸업식에서 "나는 이제 백인에 의한 열대식민지화의 가능성을 굳게 믿는다"고 말했다.
To speak of whiteness challenges white scholars’ state of racial unconsciousness. When it comes to decolonising global health institutions, there is typically a dismissal of how the institution's racialised origin diminishes agency for non-white people and legitimises the unequal distribution of resources; an inability to explain why, despite the resources, the institution largely fails to improve targeted populations’ lives; and a denial that the institution can be a source of harm instead of general welfare. These issues reflect a non-racialised horizon of subjectivity where those institutions perform as public goods. Indeed, global health institutions were designed against racialised communities. In 1900, at the graduation of the first class of the institution he founded, Sir Patrick Manson stated: “I now firmly believe in the possibility of tropical colonization by the white race”.

글로벌 의료기관이 불평등에 근본적으로 맞서지 않고 다르게 기능할 수 있다는 생각은 망상적이며, 수세기 동안 백인이 그 정의에 부합하는 사람들을 위한 권리와 특권이 배어 있는 물질적 개념으로 어떻게 변화했는지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 백인성의 "비가시성invisibility"은 우월주의 이데올로기의 중심이다. 학술 기관 내에서 백인은 다른 집단의 "차이"에 대한 체계적인 표시와 "타인"에 대한 서구 사회의 문화적 우월성에 대한 묘사를 통해 그 정상성을 주장해 왔다. 연구에 따르면 백인성을 "보는" 능력은 구성된 인종적 계층에서 한 사람의 위치position에 의해 영향을 받는다는 것을 보여준다. 인종화된 아이들은 지배적인 인구의 아이들보다 일찍 백인에 대한 인식을 발달시킨다.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아파르트헤이트 동안 보여지듯이, 이러한 지배력은 수치적일 필요가 없다; 대신에, 그것은 정치적, 사회적, 문화적, 경제적으로 다른 그룹을 지배하기 위해 한 그룹에 의한 기관의 성문화codification에 의존한다. 어디에서 태어나든, 인종화된 아이들은 피부색, 체형, 억양, 옷, 심지어 음식 선호가 어떻게 그들이 행동할 것으로 예상되는지에 대한 인식으로 성장한다.

The idea that global health institutions could function differently without confronting the inequities at their roots is delusory and fails to grasp how centuries have transformed whiteness into a material concept imbued with rights and privileges for those who conform to its definition. The “invisibility” of whiteness is central to supremacist ideologies. Within academic institutions, whiteness has asserted its normalcy through the systematic marking of other groups’ “differences” and depictions of cultural superiority of western societies over “others”. Research shows that the ability to “see” whiteness is influenced by one's position in the constructed racial hierarchy. Racialised children develop an awareness of whiteness earlier than children from the dominant population. As shown during apartheid in South Africa, this dominance need not be numerical; instead, it relies on the codification of institutions by one group to dominate another, politically, socially, culturally, and economically. Wherever they are born, racialised children grow into an awareness of how their skin colour, body shape, accent, clothes, and even food preferences condition how they are expected to behave.

리처드 다이어가 쓴 것처럼, 서구의 기관들은 "정상적인 것의 정의를 식민지화했다". 그들은 (비과학적인 명명법(예: "개발도상developing")과 인종이나 민족, 성별, 지리학의 정형화된 개념에 영향을 받는) 연구 우선 순위 기준 뒤에 숨어있는 백인적 규범의 개념을 숨김으로써, 세계 보건 지식의 유일한 합법적인 제공자로 자리매김했다. 역사적으로 백인의 가장 눈에 띄는 도구화는 인종 분류의 사용이다. 의료기관들은 인종 차별의 기원에 도전하지 않고, '구조적 인종차별이 흑인 어머니를 죽인다'라는 표현 대신 '백인 어머니보다 흑인 어머니가 더 많이 죽는다'는 식의 프레임으로 인종 차별 집단의 오명을 심화시켰다. 피해자 비난에 의존하는 새로운 연구 분야를 창조하면서, 그들은 [인종화된 문화와 관행]을 인종 건강 격차의 핵심에 위치시키고, 선거권을 박탈하고 침묵시킴으로써, 흑인들의 행동을 변화시키려 했다.

Western institutions have, as Richard Dyer writes, “colonised the definition of normal”. They established themselves as the only legitimate purveyor of global health knowledge by masking the notion of the white norm behind unscientific nomenclature (eg, “developing”) and research prioritisation criteria that are influenced by stereotyped concepts of race or ethnicity, gender, and geography. Historically, the most visible instrumentalisation of whiteness is the use of racial categorisation. Without challenging the origins of racial differentiation, health institutions have deepened the stigmatisation of racialised groups with framings such as “Black mothers are more likely to die than white mothers” instead of “structural racism is killing Black mothers”. Creating new fields of research reliant on victim-blaming, they sought to change Black people's behaviours by situating racialised cultures and practices at the core of racial health disparities while disenfranchising and silencing them.

(식민주의자들이 백인성을 구성할 때 처음 사용한) 이러한 우월주의적 관점의 재활용은, [연구가 어떻게 이루어지고 소통되는지, 그리고 어떤 행동이 수용 가능하다고 여겨지는지]를 지시하는 일련의 사회문화적 역량의 [검토되지 않은 촉진promotion]에 의존한다. 이러한 역량은 인종화된 학자들에게 그들의 [민족적 유산을 백인의 공간에서 수용하는 것]이 사회적 이동에 대한 장벽이라는 신호를 보내는 반면, 엘리트 또는 고위 인종화된 학자들의 부족은 중립의 주장을 신뢰한다. 일부 흑인 학자들의 상승은 평등, 다양성, 포용(EDI)과 지식 공동 생산의 진보의 증거로 계속 토큰화되지만, 그들의 지위는 일반적으로 [모든 사람이 접근할 수 있는 기회를 만드는 것]보다, 누가 "기회에 접근할 자격"이 있는지를 결정하는 [흑인 예외주의]의 신화에 뿌리를 두고 있다. 그러한 학자들의 발전은 종종 백인에 대한 그들의 인지된 근접성을 반영하는 반면, 코드 전환 기술을 아직 숙달하지 못한 타자화된(other(ed)) 재능 있는 연구자들은 간과된다. 서구 학계에서 "영어를 더 잘 쓰거나 말하는 것이 진보"라는 말을 듣는 것은 "흑인 소녀에게 예쁘다"는 칭찬을 듣는 것과 같다. 이러한 태도는 [공적 공간에서 비백인 정체성과 문화를 제거함으로써 평등을 촉진하려는 동화assimilationist  정책]에 뿌리를 둔 것으로 보인다.
This recycling of the supremacist perspective, first used by colonists when constructing whiteness, relies on the unexamined promotion of a set of sociocultural competencies that command how research is done and communicated and what behaviours are deemed acceptable. Such competencies signal to racialised scholars that embracing their ethnic heritage in white spaces is a barrier to social mobility, while the scarcity of elite or senior racialised scholars belies claims of neutrality. The elevation of some Black scholars continues to be tokenised as evidence of progress on equality, diversity, and inclusion (EDI) and knowledge co-production, yet their status is generally rooted in the myth of Black exceptionalism whose precepts determine who “deserves” access to opportunities rather than making opportunities accessible to all. Such scholars’ advancement often reflects their perceived proximity to whiteness, while other(ed) talented researchers who have yet to master the art of code-switching are overlooked. In western academia, being told that “writing or speaking better English is progress” is the equivalent of being complimented for “being pretty for a Black girl”. This attitude seems rooted in assimilationist policies that promote equality through the erasure of non-white identities and cultures from the public space.

게다가, [백인 규범성]은 [인종화된 연구자들이 제안한 방법이나 유럽 식민주의에서 회복한 국가들에 의해 제안된 방법]보다 [백인 학자들이 지배하는 연구 분야]를 선호한다. 이러한 학자들이 수용된 서구 패러다임에서 벗어나 인종차별, 차별, 식민주의에 비판적으로 관여하는 연구 전통을 활용할 때, 연구 실천의 [패러다임을 전환한다]는 인식보다는, [정교함이나 관련성이 부족하다는 비판]에 직면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들의 연구는 종종 영향력이 큰 학술지에서 제외되어 신뢰도를 구축하려는 저자들의 노력을 방해하고 구조적이고 제도화된, 대인관계적이고 내면화된 인종차별이 견제받지 않도록 한다.
Furthermore, white normativity favours research fields dominated by white scholars over methods proposed by racialised researchers or those from countries recovering from European colonialism. When these scholars deviate from accepted western paradigms and draw on research traditions that critically engage with racism, discrimination, and colonialism, they are typically met with criticism that their work lacks sophistication or relevance rather than recognition that it shifts the paradigm of research practices. Their research is often excluded from high-impact academic journals, hampering authors’ efforts to build credibility and allowing structural, institutionalised, interpersonal, and internalised racism to remain unchecked.

학계 내에서 백인 낙관론자들은 EDI 학과가 백인 우월주의를 "해결"하기에 충분할 것으로 예상한다. 그러나 [사회 정의 원칙]과 단절된 EDI 전략은, 피상적인 해결책만 제공할 수 있다. [백인의 규범적이고 지배적이며 검증되지 않은 힘이 인종 불평등을 어떻게 영속시키는지]는 설명하지 않는 EDI 훈련만 강조하는 것은 [백인 규범에 대한 생각을 강화]하는 경향이 있다. 다른 문화와 관습에 대한 근본적인 열등감에 도전하는 대신, 그러한 EDI 전략은 [백인의 죄책감을 달래고], [선의의 증거]로 [무기화]할 수 있다. 슬프게도, 인종 차별을 언급하는 것이 반성과 인식을 불러일으키는 데 사용되기보다는 두려운 세상에서, 백인과 마주하는 것은 종종 억압적인 행동을 악화시킨다. 세계 보건 기관들이 백인에 대한 중독을 해결하기로 결정할 때까지, 이러한 문제를 둘러싼 백인의 부정과 취약성은 과학적이고 EDI의 발전을 방해할 것이다.
Within academic institutions, white optimists expect EDI departments to be sufficient to “solve” white supremacy. Yet, EDI strategies disconnected from social justice principles can only provide superficial solutions. The emphasis on EDI trainings that refrain from describing how the normative, dominant, and unexamined power of whiteness perpetuates racial inequalities tends to reinforce the idea of a white norm. Instead of challenging assertions of fundamental inferiority of other cultures and practices, such EDI strategies appease white guilt and can be weaponised as proof of good intentions. Sadly, in a world where mentioning racism is feared rather than used to spark reflection and awareness, confronting whiteness often exacerbates oppressive behaviours. Until global health institutions decide to tackle their addiction to whiteness, white denial and fragility surrounding these issues will preclude scientific and EDI progress.

인종화된 학자들에게, 백인에 맞서는 것은 [내면화된 인종차별]을 해결하고, [빈곤, 성별, 흑색성, 불문율, 조상 전통, 지역, 언어에 대한 부정적인 태도]를 해체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단순히 서구 관행에 동화assimilate되기보다는 [글로벌 지식 생산에서 공존co-exist할 수 있는 우리의 권리]를 되찾는 것으로 시작한다. 어떤 서부 백인 남성도 아프리카에서 질병을 "발견discovered"하지 않았다. 백인은 우리 자신의 이야기를 하기 위한 우리의 무능함을 합리화하고 그들의 조상들의 파괴를 자본화하는 식민지 개척자들의 후손들을 정상화한다. [화이트-워시된 커리큘럼]에 의해 [선택적으로 지워진 인종화된 학자들의 기여]를 축하celebrate하지 않고, 우리가 그저 계속 현재 상황을 보상reward한다면 변화를 기대할 수 없다. 

For racialised scholars, confronting whiteness means addressing internalised racism and deconstructing negative attitudes towards poverty, gender, Blackness, unwritten knowledge, ancestral traditions, geographies, and languages. It starts with reclaiming our right to co-exist in global knowledge production rather than simply assimilate into western practices. No western white man “discovered” a disease in Africa. Whiteness rationalises our unworthiness to tell our own stories and normalises descendants of colonists capitalising on the ravages of their ancestors. We can’t expect change if we continue to reward the status quo, instead of celebrating the contributions of racialised scholars selectively erased by white-washed curricula.

베이글 칠리사와 같은 이 학자들의 생각은 우리의 [자기 결정 능력]을 재확인시켜 준다. 그들의 목소리는 식민지 유산에 대한 우리의 저항에 대한 이야기를 말해준다. 글로벌 보건기관이 식민지 연구 관행을 비자발적으로 재현했다고 주장하는 것은 의도적인 무지로 묘사될 수밖에 없다. 첼라 산도발이 설명하듯이, "이 식민주의자 사회는 자신의 '우월성'에 의해 '노예'가 된 백인을 포함한 모든 시민/주체들을 (다양한 형태로) 묶는 자유주의적 형태의 자연화된naturalized 우월주의를 창조한다." 세계 보건의 탈식민지화는 우리의 agency를 수립하고, 우리의 관점에서 과학 발전에 참여할 수 있는 [지울 수 없는 권리indelible right]를 보호하기 위한 운동이며, 우리의 문화를 자랑스럽게 수용한다. 그것은 모든 사람들이, 특히 백인들이, 서구 문화와 연구 패러다임의 선천적인 우월성에 대한 생각으로부터 우리 자신을 "자유롭게" 할 수 있을 때에만 가능할 것이다.

The ideas of these scholars, such as Bagele Chilisa, reaffirm our capacity to self-determine. Their voices tell the story of our resistance to colonial legacies. Arguing that global health institutions involuntarily reproduced colonial research practices can only be described as wilful ignorance. As Chela Sandoval explains: “This colonialist…society creates a liberal form of naturalized supremacism that binds (in varying forms) all citizen/subjects, including the white man, who has become ‘enslaved’ by his own forms of ‘superiority.’” Decolonising global health is a movement to establish our agency and protect our indelible right to participate in scientific advancement on our terms, proudly embracing our cultures. It will only be possible if everyone—especially white people—can “free” ourselves from the idea of the innate superiority of western culture and research paradigms.


 

 

Lancet. 2021 Jun 19;397(10292):2328-2329 doi: 10.1016/S0140-6736(21)01321-0.

 

 

Confronting whiteness and decolonising global health institutions

Affiliations collapse

Affiliation

1Department of Infectious Diseases Epidemiology, London School of Hygiene & Tropical Medicine, London WC1E 7HT, UK. Electronic address: emilie.koum-besson@lshtm.ac.uk.

PMID: 34147146

DOI: 10.1016/S0140-6736(21)013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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