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ded.
2013. 8. 8. 17:00
2013. 8. 8. 17:00

- 19세기 중반 누구도 한 세기 후의, 심지어 25년 후의 의학교육 변화를 예측하지 못했다. 의과대학은 커다란 사업(business)가 되었다.
- 한 명의 교수자가 강압적으로 숨이 막힐 듯 하게 진행했던 강의는 사라졌다.
- 16주에서 34주~36주로 늘어났고, 2 term에서 4term으로 늘어났다.
- 새로운 실험실이 만들어졌고, 새로운 도서관과 박물관이 생겼다.
- 이와 유사하게 19세기에는 또한 누구도 국가 교육시스템에서 Medical School의 위치를 인지할 수 없었다. 그러나 MS는 이전의 지위를 벗어나서 university에 포함되었다. 의사가 되기 위한 다양한 방법(apprenticeship,
house pupil system, private summer school)이 모두 사라졌다.
- MS는 국가 교육 체계의 다른 요소들과 밀접한 관련을 맺게 되었는데, 네 층위로 된 시스템(grammar school, high school, college,
graduate and professional school)에서 맨 위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다.
- 높은 유급율은 매우 낮아져서 1970년대에는 사실상 의대에 들어간 모든 학생이 의사가 되었다.
- 20세기의 미국 의학교육은 세계에서 최고 수준을 자랑했고, 한때 유럽보다 낮은 지위에 있던 것이 이제는 전세계적 부러움을 샀다.
- 미국 의학 연구는 의학교육과 마찬가지로 매우 두드러져서, 20세기 미국 MS들은 19세기와는 달리 original investigation을
위한 secure home이 되었다.
- 1934년에는 George Whipple,
George Minot, William Murphy가 미국 의사로서 처음 노벨상을 받았다.
- 의학교육이
성숙하면서 medical profession도 같이 성숙해갔다. 약하고 체계적이지 못했던 시절에서 벗어나 medical profession은 강력하고 더 통합화되었다(unified).
- 하지만 profession이 더 cohesive해짐과 동시에 또한 heterogeneous해지기도 했다. 19세기 중반에 거의 대부분의
"regular" physician은 private practitioner였다. 하지만 20세이게 이르러서 academic
medicine, hospital administration, public health… 등등으로 구분되었다.
- 여러 의사간의 반목과 불화가 많아졌다.
- 이러한 다양해진 직업군을 빼놓고서는 이 시대의 profession의 발달과정을 제대로 설명할 수 없다.
- 의학교육 시스템의 성장에 있어서 모든 직업군들은 나름의 목표를 달성했다. Academic medicine을 지향하던 의사들에게 이제 career
opportunities가 존재했다.
- Practitioner도 그들의
꿈을 이렀는데, profession of medicine은
명예와 권력과 높은 수입을 얻었다.
- 근대
의학교육이 발달하는 과정에서 대중들도 이익을 보았는데, 19세기 중반에는 의학의 효과성에 대한 의문이 많았지만, 이제는 상황이 많이 달라졌고, 추가로 대중들은 평균적인 의사들이 받는 training을 신뢰하기 시작했다.
- 하지만
근대 의학교육의 혜택은 상당한 비용을 수반했다. 그 중 하나는 이 시스템을 만들어낸 academic community에게 부과되었는데, 모든 professor들이 이제 테뉴어 위원회, 연구 재단 등등의 눈치를 봐야 했다. Medical
professor 는 그들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 일하고 있었다.
- Fund를 따는데 있어서 이런 경향은 가장 심했는데, 학계에서 이룬 성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그들의 활동을 지원해주는 사람들에 크게 의존하게 되었다.
- 지난 수십 년 동안 대놓고 통제를 하려는 경우는 적었어도, 어느 정도의 외부 개입은 항상 있었다. 그들은 자율권을 돈을 주는 사람들에게 넘길 수 밖에 없었다.
- 추가로 academic physician은 그들 자신의 성공의 희생양이 되었는데, 그들이 그들의 경쟁자를 키워낸 것이었다. WWII이후 환자들은 더 이상 specialty care를 위해 부속병원에 갈 필요가 없었고, 이에 따라 부속병원들은 공격적인 마케팅을 해야만 했다.
- Practitioner들도 치러야 했던 비용도 상당했는데, 그들은 medical practice를 독점하게 되었지만 의학교육에의 권한은 상실하였다. 리더십은 이제 academic establishment로 옮겨갔고 가장 부유하고 기술이 좋은 의사들조차 그 지역을 벗어나면 장삼이사였다.
- 추가로
practitioner는 다른 직업군과 마찬가지로 그들의 새로운 사회적 위치가 상속가능한 것이 아님을 빠르게 깨우쳤고, 그래서 그들의 자식들은 의대로의 진학을 거부하기도 했다.
- 의대 학생은 상당한 수준의 지적, 육체적 부담을 짊어져야 했다. 병원에서의 "on call", 교수자의 불합리한 지도, 막대한 학습 분량.
- 이러한 상황을 더 나쁘게 만든 것은 4년짜리 프로그램이 의학지식의 기초밖에 가르쳐주지 못하는 현실이었다. 어떤 specialty를 선택했냐에 따라 약간의 차이는 있지만, 대개 30대 중반에 이르러서야 독립적 practice를 하게 된다. 이론적으로는 의학공부라는 것은 평생 할 수도 있는 것이었다.
- 게다가 이 길은 비싼 길이었고, 수업료는 인플레이션 수준을 훨씬 넘어서는 수준으로 상승하였다.
- 수업료를 내기 위해 학생들이 냈던 빚은 쉽게 갚을 수 있는 수준이 아니어서, 의사의 과잉 공급을 감안하면 미래의 기대 수익은 더 낮아지게 되었다.
- 이런 것으로 가장 어려움을 겪은 사람들은 중간 이하의 소득 계층이었다. 또한 소수자에 속하는 학생들이 감당해야 하는 피해도 컸다. 의학은 그 전 어느 때보다 잘 사는 사람들의 전유물이 되었다.
- 대중은 의학교육에 가장 큰 비용을 지불한 사람들이었는데, 의학이란 것이 엄청나게 돈이 들어가는 분야이고 그 비용은 지속적으로 상승한다는 것을 곧 깨닫게 되었다.
- 돈은 점차 부족해졌고, 수업료가 오른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 Medical
School들은 심지어 대학의 다른 학과들에게 손해를 입히는 상황에서조차 어디서 돈을 따 오는지는 신경쓰지 않았다. MS가 확장되면서 대학의 income중에서 전체 학생의 0.5%를 차지하는 MS가 10%의 income을 썼다. Welch, Eliot, Flexner같은 선구자들은 대학과 MS간의 이러한 질투 및 적대감을 미리 예측하지 못했다.
- 대중들은 MS이 점차 비싼 곳이 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modern
health care가 해줄 수 있는 것이 비싸다는 것을 더욱 기분 나빠했다.
- 대중의 우려는 투자 대비 돌아오는 것이 더 적어졌다는 것 때문에 더욱 심각해졌다. 1달러를 투자했을 때 공공 보건에 돌아오는 이익은 20세기 첫 50년에 비해서 훨씬 줄어들어 있었다.
- 하지만 만약 이러한 것을 MS나 Medical
profession의 잘못으로만 돌린다면 그것은 대중들이 잘못한 것이다. 비용에 대해서 불만을 터뜨리면서도 전례없는 의료 수요의 증가가 있었고, 최근 Medicaid와 Medicare의 비용을 줄이려는 시도에 대해서 많은 사람들이 정치 성향을 불문하고 반대하였다.
- "health care cost는 경제나 난립하는 신기술의 문제가 아니라 도덕과 사회적 우선순위의 문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