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요는 발명의 어머니: 윌리엄 할스테드의 중독과 그것이 북미 의학교육에 미친 영향(Can J Surg, 2020)
Necessity is the mother of invention: William Stewart Halsted’s addiction and its influence on the development of residency training in North America
James R. Wright Jr., MD, PhD
Norman S. Schachar, MD
외과교육자들이 대학원 외과 레지던시 교육의 구조와 내용에 대한 변화를 고려하고 있는 상황에서 고전적인 외과 레지던시 프로그램 원형을 형성하게 된 요인과 영향을 되돌아보는 것이 흥미롭고 중요하다. 현대 북미 전공의 프로그램의 구조는 19세기 마지막 10년 동안 존스 홉킨스 병원에서 비롯되었다. 이 논문은 윌리엄 스튜어트 할스테드(1852–1922)의 지원 하에 개발된 최초의 현대 외과 레지던트 프로그램을 살펴본다.
At a time when surgical educators are considering changes to the structure and content of postgraduate surgical residency education,1–3 it is interesting and important to reflect on the factors and influences that formed the classical surgical residency program prototype. The structure of modern residency programs in North America originated at Johns Hopkins Hospital during the last decade of the 19th century. This article examines the first modern surgical residency program that developed under the aegis and influence of William Stewart Halsted (1852–1922).
Halsted는 20세기에 외과적 실습surgical practice을 크게 형성한 외과적 혁신가였다. 그는 일반적으로 급진적인 유방절제술을 완성하고 전파한 것으로 기억되지만, 그의 직업 내에서는 그의 업적이 무수히 많았다. 아마도 수술 분야에 대한 그의 가장 중요한 공헌은 교육적이었을 것이다. Halsted는 존스 홉킨스 병원에 있는 동안 새로운 레지던트 훈련 프로그램을 개발했고, 약간의 수정으로 북미에서 외과 및 의학 레지던트 훈련의 모델이 되었다. 그러나, Halsted의 전공의 프로그램이 미국에서 처음은 아니었음을 주목해야 한다. 사실, 그것은 심지어 존스 홉킨스 병원에서는 처음도 아니었다. 루드메러는 레지던트 훈련의 역사에 관한 그의 책에서 윌리엄 오슬러(1849-1919)가 최초의 현대적 북아메리카 레지던시를 시작했다고 생각한다. 할스테드의 외과 레지던트는 두 번째였고, 곧 산부인과와 병리학 레지던스가 뒤를 이었다. 존스 홉킨스 병원은 분명히 북미의 현대 레지던트 훈련 개념의 원천이었다.
Halsted was a surgical innovator who greatly shaped surgical practice in the 20th century.4–7 While he is generally remembered for perfecting and disseminating the radical mastectomy,8 within his profession his accomplishments were legion. Perhaps his most important contribution to the field of surgery was educational. Halsted developed a novel residency training program while at Johns Hopkins Hospital that, with some modifications, became the model for surgical and medical residency training in North America.9 However, it should be noted that Halsted’s residency was not the first in America; in fact, it was not even the first at Johns Hopkins Hospital. Ludmerer, in his book on the history of residency training, considers William Osler (1849–1919) to have started the first modern North American residency. Halsted’s surgical residency was second, and this was soon followed by residencies in gynecology and pathology. Johns Hopkins Hospital was clearly the source of the modern residency training concept in North America.10
할스테드의 외과 경력은 보통 뉴욕에서 보낸 초기와 볼티모어에서 보낸 말년으로 나뉜다. 뉴욕에서 젊은 외과의사로서 할스테드는 카리스마와 사교성을 지녔고 의대생들을 가르치는 데 뛰어났던 매우 숙련되고 대담하며, 빠르고 대담한 외과의사였다. 볼티모어에서 그는 느리고 꼼꼼한 외과의사였고 은둔자였고 가능하면 의대생들을 가르치는 것을 피했다. 이 두 시기 사이에, 할스테드와 몇몇 동료들은 우연히 코카인에 중독되었고, 1884년 말에 그들은 코카인이 국소 마취제로 사용될 수 있다는 새로운 보고서를 알고 스스로 실험을 했다. 뉴욕에서 할스테드의 경력은 급격히 악화되었고, 그는 중독 치료 시설을 들락날락했다. 할스테드는 곧 코카인 중독을 치료하기 위해 사용한 모르핀에 중독되었다.
Halsted’s surgical career is usually divided into his early years in New York and his later years in Baltimore. As a young surgeon in New York, Halsted was a highly skilled, bold, fast and daring surgeon who was charismatic and sociable and excelled at teaching medical students. In Baltimore, he was a slow and meticulous surgeon who was a recluse and who avoided teaching medical students when possible. Between these 2 periods, Halsted and some colleagues accidentally became addicted to cocaine, when in late 1884 they, being aware of a new report that cocaine could be used as local anesthesia, experimented upon themselves. Halsted’s career in New York rapidly deteriorated, and he was in and out of addiction treatment facilities. Halsted soon became addicted to morphine, which he used to treat his cocaine addiction.
Halsted는 볼티모어로 이주하여 홉킨스에 있는 William Welch의 실험실에서 개에 대한 외과적 연구를 시작했다. 장내 문합에 대한 뛰어난 동물 연구의 결과로, 할스테드는 외래 환자 부서의 책임자로 임명되었고, 존스 홉킨스 병원의 외과 의사 대행과 외과 부교수로 임명되었다. 지속적인 성공은 1890년 오슬러와 윌리엄 웰치(1850–1934)가 할스테드를 외과 의사로 추천하고 1892년 홉킨스의 첫 외과 교수가 되는 결과를 낳았다. 비록 모든 사람들이 이러한 유망한 시기에 할스테드의 중독이 치료되었다고 믿었지만, 나중에 그것은 사실이 아니며 그가 괴팍함의 베일과 거주민들의 피라미드 아래서 그의 중독을 숨길 수 있었다는 것이 분명해졌다.
Halsted moved to Baltimore and began surgical research on dogs in William Welch’s laboratory at Hopkins. In the wake of some brilliant animal research on intestinal anastomoses, Halsted was appointed head of the outpatient department, acting surgeon to Johns Hopkins Hospital, and associate professor of surgery. Continued success resulted in Osler and William Welch (1850–1934) recommending Halsted to be surgeon-in-chief in 1890 and Hopkins’ first professor of surgery in 1892.6,7 Though everyone believed that Halsted’s addiction was cured at the time of these appointments, it later became clear that wasn’t the case and that he was able to hide his addiction under a veil of eccentricity and a pyramid of residents.
이 논문은 존스 홉킨스 병원에서 그의 외과 레지던트 훈련 프로그램의 개발과 진화에 있어, 그의 중독을 숨기려는 Halsted의 시도의 가능한 역할을 탐구한다. 우리는 또한 그의 훈련생들에 의한 Halsted 학교의 보급과 북미 거주를 위한 표준 모델로 후속 진화를 다룬다. 우리의 에세이는 알려진 사실 및 (Halsted, 그의 이전 훈련생 및 Halsted에 대해 쓴 다른 외과 학자들의) 출판된 인용문 대한 "미묘한 재해석"에 광범위하게 의존하고 있다.
This paper explores the possible role of Halsted’s attempts to hide his addiction in the development and evolution of his surgical residency training program at Johns Hopkins Hospital. We also address the dissemination of the Halsted School by his trainees, and its subsequent evolution into the standard model for residency in North America. Our essay relies extensively upon “nuanced reinterpretation” of known facts and published quotes from Halsted, his former trainees, and other surgical scholars who have written about Halsted.
할스테드 학교
The Halsted School
할스테드가 뉴욕에서 볼티모어 시대로 수술 스타일을 극적으로 바꾼 것은 그의 중독과 동물 연구를 통해 얻은 보수적이고 생리적인 수술의 중요성에 대한 그의 증가하는 인식의 결과였을 것이다. 아이러니컬하게도, [대담하고 뛰어난 외과의가 될 수 없는 그의 신체적, 정신적 무능]은 그가 조직과 피를 보존하는 것이 속도보다 더 중요한 더 사색적이고 생리적인 스타일이 더 나은 결과를 얻도록 도왔다. 이러한 경향은 다른 곳에서는 초기 단계에 있었지만, Halsted의 허약함이 Halsted의 새로운 운영 방식으로의 전환을 더욱 강화시킨 Halsted School, 11, 12에서 완전히 발전했다. 다니엘 B. Nunn은 "Halsted Society의 역사가는 "Halsted는 정확하고 안전하며 철저한 수행에 영특함과 실행 속도가 종속된 학교인 '수술 안전 학교의 아버지'로 적절히 인정받고 있다"고 언급했다.
Halsted’s dramatic change in surgical style from his New York to his Baltimore days was likely a consequence of both his addiction and his increasing appreciation of the importance of conservative, physiologic surgery gained through his animal studies. Ironically, his physical and mental inability to continue to be a bold and brilliant surgeon helped him realize that a more contemplative, physiologic style, in which conserving tissue and blood was more important than speed, achieved better results. This trend was in its infancy elsewhere, but fully developed within the Halsted School at Hopkins,11,12 where Halsted’s frailty further reinforced his transition to this new operative style. Daniel B. Nunn, while Historian of The Halsted Society, noted that “Halsted is properly credited as the ‘father of a school of safety in surgery,’ a school in which brilliance and speed of execution were subordinated to accurate, safe, and thorough performance ...”13
그러나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을 알고 있는 그는, 자신의 반사신경, 속도, 정밀도가 악화됨에 따라 정확성, 안전성 및 철저한 수행을 강조하면서 레지던트에게 일을 위임함으로써 이를 커버할 수 있었기 때문에, 이 새로운 스타일의 수술을 가르치는 데 앞장서는 것은 아마도 자기 잇속을 차리기 위한 것이었다. 그것은 또한 그가 수술대에서 보내는 시간을 줄이고 사적인 생각에 더 많은 시간을 보낼 수 있게 해주었다. 할스테드가 방문 외과 의사들 앞에서 수술을 했을 때, 그는 너무 느려서 관객들이 보기에 고통스러웠다. 윌리엄 메이요(1861–1931)는 할스테드가 자신의 특징적인 근치적 유방절제술을 하는 것을 불안하게 지켜보면서 "나는 바닥이 이미 치유된 동안 위에서 수술된 상처를 본 적이 없다"고 농담을 한 적이 있다.
However, knowing what we know now, it was possibly self-serving to be at the forefront of teaching this new style of surgery because, as his own reflexes, speed, and precision deteriorated, he could cover this by delegating work to his resident while stressing accuracy, safety and thorough performance. It also allowed him to spend less time at the operating table and more time in private contemplation. When Halsted operated in front of visiting surgeons, he was so slow that it was painful for the audience to watch. William Mayo (1861–1931), while restlessly watching Halsted perform his signature radical mastectomy, once quipped “I have never seen a wound operated at the top while the bottom was already healed.”7
Halsted School은 또한 대부분의 임상 교수들이 FFS 요금을 유지하는 것을 선호했음에도 불구하고, Hopkins에서 시행되고 있는 지리적 풀타임(GFT) 지불 모델을 수용했습니다. 전 거주자 사무엘 J. 크로우는 보수에 대한 할스테드의 생각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The Halsted School also embraced the geographic full time (GFT) payment model that was being implemented at Hopkins, even though most clinical faculty preferred to remain fee-for-service.8 Former resident Samuel J. Crowe provides Halsted’s thoughts on remuneration:
[금전적 보상]은 의사가 가족을 돌보고, 새로운 생각을 습득하기 위해 여행을 할 수 있고, 그의 일생 동안 생각하고, 읽고, 의학에 지속적인 가치를 더하기 위해 노력할 수 있는 여가와 마음의 평화를 가질 수 있는 범위에서만 필요하거나 바람직했다. 이것은 1905년의 일입니다. 의심할 여지 없이 [Halsted]는 1913년에 풀타임 계획이 나왔을 때 열정적으로 환영했다.
Monetary rewards were necessary or advisable only to the extent of allowing the doctor to care for his family, to travel in order to acquire new ideas, and to have the leisure and peace of mind to think and read and try to add something during his lifetime of lasting value to medicine. This was in 1905. No doubt it was for these reasons that [Halsted] enthusiastically welcomed the Full Time Plan when it came along in 1913.14
홉킨스의 GFT 시스템 구현에 대한 완전한 역사적 분석은 다른 곳에서 제공된다. GFT 모델에 의해 촉진된 연구는 할스테드 학파의 또 다른 중요한 요소였다.
A complete historical analysis of the implementation of the GFT system at Hopkins is provided elsewhere.15 Research, which was facilitated by the GFT model, was another important element of the Halsted School.
중단된 레지던스의 구조
Structure of the halsted residency
할스테드의 레지던트 프로그램은 외과 수련자들에게 [형식적이고 구조적인 형태의 교육]을 제공했고, 이전에 존재했던 견습 훈련 모델을 대체했다. 할스테드는 독일에서 관찰한 외과적 훈련의 요소들을 바탕으로 훈련 모델을 만들었다. Halsted 모델의 기본 요소 중 하나는 티어가 있다는 것이었다. 단, 초급 및 중간급 직위는 여러 개가 있지만, 시니어 직위는 1개뿐이라는 것이었다. 후배 연수생들은 교수보다는 선배 레지던트들의 지도 아래 실전 환자 관리와 수술 기술을 배웠다. 전공의들이 경험이 많아지면서 책임감과 독립성이 높아졌다. 또한, 전공의들은 외과적 질병의 [과학적 근거]에 대한 이해를 높이고 [연구를 수행]할 것으로 기대되었다. 훈련 기간은 무기한이었고, 다음 단계로 진출하기 위한 경쟁이 치열한 피라미드 구조가 존재했기 때문에 다음 단계로 진출하는 것은 불확실했다. 인턴십이나 레지던트 보조 역할만 마치고 떠나는 연수생이 많았다. Halsted의 훈련 프로그램인 레지던트 포지션에서 정상에 오른 사람들에게 그것은 특별한 학문적, 임상적 훈련이었다. 레지던트는 임상 서비스를 운영했을 뿐만 아니라 훈련 프로그램 전체를 감독하여 현재의 레지던트 프로그램 감독PD처럼 기능했다.
Halsted’s residency program provided a formal and structured form of education for surgical trainees, replacing the apprenticeship training model that had existed before it. Halsted based his training model on elements of surgical training he had observed in Germany. One fundamental element to Halsted’s model was that there were tiers, including multiple entry- and midlevel positions, but only 1 senior position. Junior trainees learned hands-on patient management and operative skills under the supervision of a more senior resident rather than the professor. As residents became more experienced, they were given increased responsibility and independence. Furthermore, residents were expected to develop an understanding of the scientific basis of surgical disease and to perform research. The duration of training was indefinite, and advancement to the next level was uncertain, as there was a pyramidal structure with intense competition for advancement to the next level. Many trainees left after completing only an internship or an assistant resident role. For those making it to the top of Halsted’s training program, the resident position, it was exceptional academic and clinical training. The resident not only ran the clinical services, but also oversaw the entire training program, functioning like a current day residency program director.
그러나 이러한 구조는 할스테드가 요구하는 우수한 수술 결과를 얻기 위해 항상 최선을 다하는 것에 의존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의 중독을 숨기는 외과의사에게는 자기 잇속만 차린 것이라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또한 프로그램의 [피라미드적 성격]은 할스테드가 훈련생, 의료 및 외과 동료, 환자들과 매일 상호작용할 필요성을 최소화하여 그의 장애를 숨길 수 있게 하였다. 활기찬 외과 수련생들 집단은 할스테드에게 그를 기쁘게 하고 싶어했고, [그가 임금을 지불할 필요가 없는 동기부여된 노동력을 제공]했다. 그러한 모델은 대부분의 북미 훈련병원에서 작동할 수 없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렇게 많은 house staff을 두는 것은 비용이 너무 많이 들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다른 저자들이 지적한 바와 같이, 이것은 오로지 존스 홉킨스 병원에서만 가능했을 것이다. 존스 홉킨스 병원은 기부금과 무엇보다 GFT 지불 모델 덕분에 주머니가 두둑했기 때문이다.
It should be noted, however, that this structure was self-serving for a surgeon hiding his addiction, as the clinical service did not depend on Halsted always being at his best in order to achieve the excellent surgical results he demanded. The pyramidal nature of the program also minimized Halsted’s need for day-to-day interaction with trainees, medical and surgical colleagues and patients, thus allowing him to hide his impairment. The energetic cadre of surgical trainees provided Halsted a motivated workforce that was anxious to please him and that he did not need to pay. Such a model could not have worked in most North American training hospitals, as it would have been far too costly to have so many house staff. As noted by other authors,16,17 this was likely only possible in one place — the Johns Hopkins Hospital — which, because of its endowments and eventually its GFT payment model, had deep pockets.
다행히 단단한 피라미드 구조는 다른 곳에서는 구현에 중요하지 않은 것으로 입증되었다. 조지 J 호이어(1882년 ~ 1950년)는 신시내티에서 이것을 증명하였다.
Fortunately, a rigid pyramidal structure proved not to be critical for its implementation elsewhere. George J. Heuer (1882–1950) proved this in Cincinnati.
조지 J 휴에와 제자들
George J. Heuer and the disciples
호이어는 할스테드에 의해 훈련받은 13번째 전공의였다. 그는 1911년부터 1914년까지 이 역할을 맡았다. 그 후 그는 존스 홉킨스의 외과 부교수와 외과 부교수로 임명되었다. 제1차 세계 대전에서 복무한 후, 호이어는 홉킨스로 돌아와 할스테드가 자신의 뒤를 따라 훈련했던 전공의 월터 댄디 (1886년-1946년)를 신경외과 서비스 책임자로 임명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호이어는 다른 할스테드 레지던트였던 하비 쿠싱(1869–1939)이 1912년 보스턴의 피터 벤트 브리검 병원으로 영입된 이후 이 직책에 관심이 있었다. 호이어는 크리스천 R의 첫 수혜자로서 신시내티로 영입되었다. 홈즈는 1922년 외과 의장을 맡았고, 그곳에서 그는 외과 레지던트를 설립했다. 이때 다른 할스테디안 프로그램은 하비 쿠싱이 보스턴에서 운영하는 프로그램이 유일하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호이어는 몽 리드 (1889년–1943년)와 버 놀랜드 (닉) 카터 (1894년–1980년)를 포함한 몇몇의 저명한 홉킨스 훈련 외과 의사들을 데리고 왔다. 호이어는 "일반 환자의 병실을 호이어 교수를 위한 개인 병실로 전환하는 것은 납세자에게 부도덕한 일"이라며 해당지역 외과의들의 즉각적인 저항을 맞았고, 이를 '수수료 분할' 문제로 바꾸려 했다. 이는 미국외과의사대학의 정책에 위배되는 행동이었다. 이 문제는 홈즈 병원이라는 이름의 새로운 개인 전시관을 지음으로써 결국 해결되었다.
Heuer was the 13th resident trained by Halsted. He served in this role from 1911 to 1914. He was then appointed associate professor of surgery and associate surgeon at Johns Hopkins. After serving in the First World War, Heuer returned to Hopkins only to find that Halsted had appointed Walter Dandy (1886–1946), a resident who had trained after him, to the position of chief of the neurosurgical service. Heuer had been interested in this position since Harvey Cushing (1869–1939), another former Halsted resident, had been recruited to the Peter Bent Brigham Hospital in Boston in 1912. Heuer was recruited to Cincinnati as the first recipient of the Christian R. Holmes Chair in Surgery in 1922, where he established a surgical residency.16,18,19 At this time, it should be noted that the only other Halstedian program was the one in Boston run by Harvey Cushing. Heuer brought several prominent Hopkins-trained surgeons with him, including Mont Reid (1889–1943) and Burr Noland (Nick) Carter (1894–1980). Heuer met immediate resistance from the local surgeons, who stated that “the conversion of a ward of the general patients into private rooms for Professor Heuer was an immorality to the tax payer” and tried to turn it into an issue about “dividing fees,” which was against the policies of the American College of Surgeons.16 This problem was eventually resolved by building a new private pavilion named Holmes Hospital.
데이비드 W. 맥패든에 따르면, 호이어의 "Halstedian 레지던트 훈련 프로그램의 채택은 오늘날 모든 좋은 훈련 프로그램이 존재하는 기초로 묘사되었다." 전공의보다 피라미드의 아래에 있는 여러 층의 house staff을 위해 지불할 충분한 돈이 없었기 때문에, 다른 곳에서 홉킨스 모델을 복제하는 것은 불가능했기 때문에 이것은 확실히 사실이다. 호이어가 1932년 뉴욕 병원과 코넬로 채용되었을 때, 그는 신시내티에서와 비슷한 어려움에 직면했다. 최근의 논문은 1930년대와 1950년대 사이에 할스테디안 외과 레지던트 모델이 "엘리트 의사들을 위한 흔치 않은 독특한 경험에서 모든 미국 외과 의사들을 위한 표준화된 의무 교육"으로 어떻게 진화했는지 설명한다.
According to David W. MacFadden, Heuer’s “adaption of the Halstedian residency training program has been described as the basis on which all good training programs exist today.”16 This is certainly true, because it would not have been possible to duplicate the Hopkins model elsewhere as there would have been insufficient money to pay for multiple tiers of house staff at the base of the pyramid below the resident. When Heuer was recruited to New York Hospital and Cornell in 1932, he encountered difficulties similar to those at Cincinnati.19 A recent paper describes how the Halstedian surgical residency model further evolved “from an uncommon, idiosyncratic experience for elite practitioners to a standardized mandatory education for all American surgeons” between the 1930s and the 1950s.20
호이어에 의해 모집되었고 신시내티에서 그의 레지던트를 마친 또다른 홉킨스 출신의 보조 외과의사 닉 카터는 1952년 할스테드의 탄생 100주년을 기념하는 놀라운 조사를 발표했다. 할스테드는 33년 동안 외과 레지던트를 맡았고 17명의 레지던트들과 55명의 보조 레지던트들을 임명했다. 카터는 이 훈련생들 중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최고의 학문적 외과의가 되었고 다음 세대의 학문적 외과의들을 훈련시켰는지를 요약한다. 이들은 할스테드의 광범위한 외과 제자들의 간부가 되었다. 두 번째 연구에서 카터는 또한 신시내티에서 25년 동안 외과 레지던트 프로그램이 운영된 후 높은 수준의 학업 성공을 발견했다. 교육생 중 약 3분의 2가 교수직을 맡아서 더 많은 제자를 배출했다. 할스테드의 많은 제자들의 자손들은 북아메리카의 거의 모든 레지던트 훈련 프로그램에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Another Hopkins-trained assistant surgeon who had been recruited by Heuer and who completed his residency in Cincinnati, Nick Carter, published a remarkable survey in 1952 on the centenary of Halsted’s birth. Halsted had directed his surgical residency for 33 years and appointed 17 residents and 55 assistant residents. Carter summarizes how many of these trainees became top academic surgeons and trained the next generation of academic surgeons. 21 These became Halsted’s extensive cadre of surgical disciples. In a second study, Carter also found a high level of academic success in Cincinnati after its surgery residency program had been in operation there for 25 years.22 Approximately two-thirds of its trainees held faculty positions, thus generating more disciples. Likely, the offspring of Halsted’s many disciples and their disciples have influenced almost all residency training programs in North America.
할스테드 중독의 결과
Consequences of Halsted’s addiction
할스테드의 중독이 그의 경력에 끼친 가장 분명한 영향은 "그는 과학 조사, 외과 레지던트 조직, 개선된 수술 기술의 개발, 그리고 외과적 문제에 대한 집중적인 연구에 그의 삶을 바친 느리고 고된 외과의사가 되었다. 본질적으로, 그는 많은 수술의 수행보다는 사색과 성찰에 집중했습니다."
The most obvious effect of Halsted’s addiction on his career was that “he became a slow, painstaking surgeon who devoted his life to scientific investigation, organization of a surgical residency, development of improved operative techniques, and intense study of surgical problems; in essence, he concentrated on contemplation and reflection rather than the performance of many operations.”23
하워드 마켈은 부정적인 결과에 주목한다.
Howard Markel notes negative consequences:
수술실에서 할스테드의 변덕스러운 행동 외에도, 그의 행방이 묘연할 때 자주 병원에 가지 않는 것에서부터, 병실을 걸을 때 가까운 동료들을 피하는 것까지 (아마도 그가 영향을 받고 있었고, 그가 인지할 수 있는 사람들에 의해 정밀하게 조사 받기를 원하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그는 매일 오후 4시 30분에 집에 가서 저녁 식사 전에 90분 동안 서재에 틀어박혀, 더러운 린넨을 파리의 전용 세탁소에 보내는 그의 이상한 습관(깨끗한 셔츠보다 더 많은 것을 돌려보냈을지도 모른다)이 있었다. 그리고 가장 골치 아픈 것은 수술실에서 사용된 모르핀과 코카인에 쉽게 접근할 수 있다는 것이다. — 엔도르핀과 코카인을 목숨이 다할 때까지 계속 남용한 것 같다.
…in addition to Halsted’s erratic behaviour in the operating room, circumstantial evidence — ranging from his frequent absences from the hospital when his whereabouts were unknown to his avoidance of close colleagues when he was walking the wards (perhaps because he was under the influence and did not wish to be scrutinized by those who might recognize this), his going home daily at 4:30 p.m. and locking himself in his study for 90 minutes before dinner, his curious habit of sending his soiled linen to an exclusive laundry in Paris (which may have sent back more than clean shirts), and, most troubling, his easy access to morphine and to the cocaine that was used in the operating room... — suggests that he continued to abuse morphine and, I suspect, cocaine until the end of his life.24
실제로 할스테드는 1895년 ~ 6월에 5 ~ 6개월의 결석을 포함하여 다수의 설명되지 않은 결석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가 그를 돌아오게 하려는 신탁 위원회의 반복적인 시도를 무시하고 규율을 위하여 의료 위원회에 회부되었다. 1893년 이후 할스테드의 세 번째 전공의인 조지프 콜트 블러드굿(1867-1935)은 하비 쿠싱과 함께 보조 전공의로 지냈다. 이것은 본질적으로 그의 부재를 커버하는 올스타 팀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블러드굿은 할스테드의 첫 조수로 일하면서 외과 의사로 승진했고, 하비 쿠싱은 레지던트로 승진했다. 폴 프리드먼이 정확하게 지적한 바와 같이: "만약 할스테드가 오늘날 의사를 하고 있었다면, 그는 아마도 그의 자리에서 즉결 해고되고 의사 개업 면허를 잃게 될 것입니다." 사실, 이 행동이 잘 알려졌더라면, 그때도 받아들여질 것 같지는 않다. 의심했을 법한 사람들은 그들의 의심을 추구하지 않았다. 오슬러와 웰치도 일단 알게 되더라도 그를 신고하지 않았다. 의심할 여지 없이, 그들은 이것을 정당화할 수 있었다. 당시에 중독에 대한 이해는 불완전했고, 할스테드는 안전하고 세계적인 수준의 외과 서비스를 운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권력 차이를 고려할 때 엽기적인 행동을 관찰한 그의 훈련생들은 그를 자수할 처지가 아니었다. 게다가, 대부분은 그에게 신세를 졌다. Halsted의 중독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canjsurg.ca/003319-a1의 부록 1을 참조하십시오.
In fact, Halsted had multiple unexplained absences, including a 5–6 month absence in 1895–6, when he ignored the Board of Trustees’ repeated attempts to get him to return and was referred to the medical board for discipline.23 Conveniently, Joseph Colt Bloodgood (1867–1935), Halsted’s third resident (since 1893),8 simply stayed on with Harvey Cushing as an assistant resident. This was essentially an all-star team covering his absence. Shortly after this, Bloodgood was promoted to associate in surgery, serving as Halsted’s first assistant, and Harvey Cushing was promoted to resident.8 As Paul Friedman correctly notes: “If Halsted were practising today, he would probably be summarily fired from his position and lose his license to practise medicine.”25 In fact, it is unlikely that this behaviour would have been accepted even then, had it been well known. Those who might have suspected did not pursue their suspicions. Even Osler and Welch did not turn him in once they knew; undoubtedly they could justify this, as addiction was poorly understood and Halsted was running a safe, world-class surgical service. Certainly, considering the power differential, his trainees who observed bizarre behaviours were not in a position to turn him in; furthermore, most were beholden to him. For additional details on Halsted’s addiction, see Appendix 1 at canjsurg.ca/003319-a1.
듀크 대학 외과 레지던트였던 전 할스테드 레지던트인 데릴 하트에 따르면, 할스테드 박사의 레지던트 시스템 개발에 그 어떤 사건보다도 영향을 준 것으로 보이는 두 사건은 그의 유럽 경험이었는데, 특히 [처음 2년간의 연구 경험]과 [코카인에 대한 우연한 중독]이었다. 하트의 논평은 우리의 전제를 지지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는 이 진술의 후반부에 대해 확장하기로 선택하지 않았다.
According to Deryl Hart, a former Halsted resident who went on to start the Duke University surgical residency, “The two events that seem to have influenced Dr. Halsted more than any others in the development of his residency system were his European experiences, particularly the first two years of study, and his accidental addiction to cocaine.”26 While it appears that Hart’s comment supports our premise, he did not choose to expand on the latter part of this statement.
독일의 체제와 그것이 할스테드에 미치는 영향.
The German system and its influence on Halsted
유럽, 특히 독일은 19세기 후반 추가 의학 및 외과 수련의 메카였고, 유학 수단을 갖춘 새로운 의학 졸업생들이 몰려들었다. 의대를 졸업한 후, 할스테드는 1878년부터 1880년까지 유럽으로 가서 기초 과학, 주로 해부학과 외과학을 공부하였다. 뉴욕의 부유한 사업가의 아들로서, 그는 적어도 19명의 다른 유럽의 의학/외과 학자들과 함께 공부할 수 있는 수단을 가지고 있었다. 러트코우가 지적했듯이, 이것은 그가 "나중의 삶에 매우 중요한 지적, 문화적 절충주의"를 획득할 수 있게 해주었다. 외과 교육과 훈련에 대한 할스테드의 생각은 이 여행에 의해 깊은 영향을 받았다. 루트코프는 "할스테드는 많은 자료로부터 이끌어냈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1878년부터 1880년까지 유럽을 처음 방문했을 때의 집단적 교육 경험이었다"고 결론짓는다.
Europe, particularly Germany, was the Mecca for additional medical and surgical training in the latter half of the 19th century, and new medical graduates with the means to study abroad flocked there. After graduating from medical school, Halsted went to Europe from 1878 to 1880 to study both basic sciences, primarily anatomy, and surgery. As the son of a well-to-do businessman in New York, he had the means to study with at least 19 different European medical/surgical scholars. As noted by Rutkow, this allowed him to acquire “an intellectual and cultural eclecticism so important to his work of later life.”27 Halsted’s ideas about surgical education and training were profoundly influenced by this trip. Rutkow concludes that “Halsted drew from many sources, but the most important was the collective educational experience of his first visit to Europe in 1878–1880.”27
Halsted가 홉킨스에서 만든 레지던트 훈련 프로그램은 독일 시스템을 명확하게 모델링했습니다. 특히 기초과학과 실기임상훈련의 통합, 전임교원의 존재감, 그리고 최고의 실력자만이 정상에 오를 수 있었던 선진화 경쟁력에 감탄했다. 러트코프에 따르면
Halsted clearly modelled his residency training program at Hopkins on the German system. In particular, he admired its integration of basic sciences and practical clinical training, the presence of full-time faculty, and the competitiveness for advancement, which allowed only the very best to rise to the top. According to Rutkow,
그러나 그의 외과 레지던스 시스템은 독일인의 접근 방식을 정확히 모방한 것이 아니라 근접한 절충안이었다. 그는 보다 명확하게 정의된 조직과 직무 분담을 주장했다. 전공의가 마음대로 결정할 수 있는 수술 재료가 더 많았고, 실제 임상문제와의 친밀한 접촉이 많았으며, 순수 기초과학에 대한 집착이 적었으며, 교수자보다는 전공의에게 책임과 권위가 집중되어 있었다.
His surgical residency system, though, was not an exact duplicate of the German approach, but instead a close compromise. He insisted on a more clearly defined pattern of organization and division of duties. There was a larger volume of operative material at the disposal of the residents, a more intimate contact with practical clinical problems, less preoccupation with pure basic sciences and a concentration of responsibility and authority in the resident rather than the teacher.27
이 모든 차이는 그의 주위에 높은 수준의 질서를 유지하려고 노력하는 고기능 중독자에게 예측할 수 있을 것이다. 다른 사람들은 그가 중독된 동안 기능했던 방법 중 하나는 직장에서나 집에서나 고도로 질서 있는 생활방식을 유지하는 것이었다고 언급했다. 고도로 숙련되고 동기부여가 된 전공의들에게 많은 수술과 임상 문제의 해결을 맡기고, 그의 전공의들에게 더 많은 책임을 부여한 것은 분명히 전공의 교육을 촉진시켰지만, 이러한 경향은 또한 Halsted가 낮은 일일 업무량을 유지하여 많은 시간을 사색에 보낼 수 있도록 해주었기 때문에 이기적인 것이었다. 심지어 그의 전체 작전의 성공에 결정적인 주민 선발과 승진은 때때로 할스테드보다 할스테드의 노동력과 더 많은 시간을 보낸 상급 전공의에게 위임되었고, 따라서 이러한 중요한 결정을 내리기에 더 좋은 위치에 있었다.
All of these differences might be predictable for a high-functioning addict striving to maintain a high degree of order around him. Others have noted that one of the ways he functioned while addicted was by maintaining a highly ordered lifestyle, both at work and at home.6,24 Leaving much of the operative work and resolution of clinical problems to his highly skilled and motivated cadre of residents and giving his residents increased responsibility clearly promoted resident education, but these tendencies were also self-serving as delegation of these responsibilities allowed Halsted to maintain a lower day-to-day profile and spend much of his time in contemplation. Even selection and promotion of residents, which was critical to the success of his whole operation, was sometimes delegated to the senior resident, who spent more time with Halsted’s workforce than Halsted did and, thus, was in a better position to make these important decisions.
Halsted의 레지던트 프로그램 프로그램은 Hopkins의 다른 프로그램들과 어떻게 비교되었습니까?
How did Halsted’s residency progrgam compare with others at Hopkins?
3개의 다른 현대 홉킨스 레지던트 프로그램과 직접 비교함으로써 할스테드의 외과 레지던트 프로그램 설계에 그의 중독을 숨길 필요가 있었다는 설득력 있는 사례를 구축하는 데 도움이 된다. 앞서 언급했듯이, 오슬러는 최초의 현대적 전공의 훈련 프로그램을 개발했다. 직후에, Halsted, Howard A. 켈리(1958-1943)와 웰치는 각각 외과, 산부인과, 병리학과 프로그램을 개발했다. 10 초기 홉킨스의 모든 전공의 프로그램은 적어도 독일 모델을 기반으로 한 것으로 생각된다. 사실 홉킨스 의과대학의 전반적인 교육 프로그램도 마찬가지였다. 모든 임상 분야가 인턴십을 했지만, 이 다른 3명의 홉킨스 창립 교수들 중 누구도 엄격한 피라미드 레지던트 모델을 개발하지 않은 것으로 보이며, 따라서 그들이 제공한 교육은 더 개인적이고 실제적이었다. 오슬러는 홉킨스에서 15년 동안 5명의 전공의를 훈련시켰다. 몇몇 보조 전공의들이 있었을 가능성이 있지만, 그들에 대해 알려진 것은 거의 없다. 오슬러의 5명의 레지던트들은 병원에서 "house officers"로 생활하면서 오슬러의 생활 욕구를 충족시켜주었고, 오슬러가 여행을 할 수 있게 해주었다. 오슬러의 전공의들은 그의 집에 자주 손님이었고, 그들 중 몇 명은 그가 없을 때 그의 도서관에 있는 책을 접할 수 있도록 그의 집 열쇠를 가지고 있었다.28 이것은 할스테드가 전공의들과의 먼 관계를 유지하고, 비밀스러운 생활 방식을 영유한 것과 극명한 대조를 이루었다. 켈리는 현대 부인과 레지던트 훈련의 아버지로 여겨지지만, 그 구조에 대해서는 거의 기록되어 있지 않다. 컬렌(1868-1953)은 1896년에 레지던트를 시작했고 1897년에 하급 직원으로 고용되었다. 웰치의 병리학 레지던시는 피라미드가 아니었다.31 이러한 프로그램들은 각 멘토들의 필요를 충족시키기 위해 부분적으로 설계되었을 가능성이 높았지만, Halsted의 프로그램의 높은 수준의 중복성을 가지고 있거나 매일의 조사로부터 교수를 보호하는 방식으로 설계된 것은 없었다.
A direct comparison with the 3 other contemporary Hopkins residency programs helps build a compelling case that a need to hide his addiction played a role in the design of Halsted’s surgical residency program. As noted earlier, Osler developed the first modern residency training program; shortly after this, Halsted, Howard A. Kelly (1958–1943) and Welch developed programs in surgery, gynecology and pathology, respectively. 10 All early Hopkins’ residencies are thought to be at least loosely based on German models; in fact, the overall educational program at Hopkins Medical School was as well. While all clinical disciplines had internships, none of these other 3 founding Hopkins professors appear to have developed a rigidly pyramidal residency model and, therefore, the training they offered was more personal and hands-on. Osler trained 5 residents during his 15 years at Hopkins; their tenures ranged from 15 months to 7 years. While there were likely some assistant residents, little is known about them. The lengthy tenure of Osler’s 5 residents, who as “house officers” lived in the hospital, met Osler’s lifestyle needs and allowed him to travel. Osler’s residents were frequently guests at his house, and several of them had keys to his house so that they could access books in his library when he was away.28 This was in stark contrast with Halsted’s distant relationship with his residents and his secretive lifestyle. While Kelly is considered to be the father of modern gynecology residency training,29 little has been written about its structure; however, it was clearly not a rigid pyramid, since it is known that Thomas S. Cullen (1868–1953) began his residency in 1896 and was hired into a junior staff position in 1897.30 Welch’s pathology residency was not a pyramid.31 While each of these programs was likely designed in part to meet the needs of each mentor, none had the high level of redundancy of Halsted’s program or were designed in such a way as to protect its professor from day-to-day scrutiny.
특히 임상적 수입을 얻을 수 있는 다른 두 명의 임상의인 오슬러와 켈리는 GFT 보수 제도에 강하게 반대했다. 사실 켈리는 이 문제로 홉킨스를 사임하고 볼티모어 병원으로 진료소를 옮겼으며 개인 진료도 허용했다. 오슬러는 거의 10년 전에 옥스포드로 이사했지만, 그는 GFT 시스템이 발표되었을 때 홉킨스의 구현에 반대했다. 반면에 할스테드는 GFT를 받아들였고, 그는 독립적으로 부유했고, 그것은 그의 residency을 보조했다. 오슬러와 켈리 둘 다 trainee들은 참여시키지 않으며 운영한, 수익성 높는 개인 진료실이 있었다.
Notably, the 2 other clinicians capable of earning clinical incomes, Osler and Kelly, were strongly opposed to the GFT remuneration system. In fact, Kelly resigned from Hopkins over this issue, moving his practice to Baltimore hospitals allowing fee-for-service private practice.29 Although Osler had moved to Oxford almost 10 years earlier, he vocally opposed the implementation of the GFT system at Hopkins when it was announced.32,33 Halsted, on the other hand, embraced it, as he was independently wealthy and it subsidized his residency. Both Osler and Kelly had lucrative private practices that they managed without involving trainees.
결론
Conclusion
외과 레지던트 모델은 19세기에 Halsted와 함께 시작되었다. 그것은 부분적으로 독일 모델을 기반으로 했지만, Halsted의 프로그램의 많은 측면들은 그가 그의 중독을 숨기는 것을 돕고, 동시에 그의 환자들을 위한 치료를 최적화하기 위해 신중하게 설계되었다. 중요한 요소는 Halsted에게 충분한 사색 시간을 제공하는 것이었는데, 이는 위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다른 현대 홉킨스 레지던트 프로그램에서는 볼 수 없는 독특한 요소였다.
The surgical residency model originated with Halsted in the 19th century; it was partially based on a German model, but many aspects of Halsted’s program were carefully designed to help him hide his addiction and simultaneously optimize care for his patients. A critical element was providing Halsted with ample time for contemplation, which was possible only because of the extreme delegation of clinical and educational work to his trainees, which as noted above, was a unique element not seen in the other contemporary Hopkins residency programs.
Halsted의 모델은 Hoeer에 의해 홉킨스 환경 밖에서 작동하도록 수정되었으며, 이 모델은 본질적으로 북미 표준이 되었다. 현재의 북미 시스템에서 전공의의 진급은 예측 가능하고 "사각형"인 반면, 일부 [피라미드형] 프로그램은 20세기 전반의 4분의 3 동안 지속되었다. 마지막으로, Halsted의 레지던트 개념의 탁월함은 20세기 전반의 외과적 리더십이 되었을 때 그의 초기 레지던트들에 의해 처음부터 인정받았다는affirmed 점에 주목해야 한다. 게다가, 그의 가장 큰 업적은 그의 레지던트 프로그램이라는 것에 동의함으로써, 그의 초기 전공의들은 각각 12-14년 동안 훈련(대부분 무료로 일함)에 투자했고, 동시에 그의 가장 큰 업적 중 하나라는 지위를 스스로에게 주었다. 이것은 어떤 면에서는 이기적이지만, 여러 면에서는 정말로 그랬다.
Halsted’s model was modified by Heuer to work outside of the Hopkins environment, and this model essentially became the North American standard. While resident advancement in the current North American system is predictable and “square-shaped,” some pyramidal programs persisted for the first three-quarters of the 20th century. Finally, it should be noted that the brilliance of Halsted’s residency concept was initially affirmed by his former residents, when they became the surgical leadership of the first half of the 20th century.17 Furthermore, by agreeing that his greatest accomplishment was his residency program, his former residents, who had each invested 12–14 years in training (much of it working for free),34 simultaneously conferred upon themselves the status being one of his greatest accomplishments. While in some ways this is self-serving, in many ways, they really were.5
외과 레지던스가 급진적이고 극적인 변화를 겪고 있는 지금, 우리는 외과 레지던시 프로그램의 역사와 이러한 프로그램을 형성한 영향을 반성해야 한다. 우리의 분석은 Halsted의 중독을 중요한 요소로 식별하고 강조합니다. 우리는 할스테드를 비난하지는 않지만, 할스테드 외과 레지던트의 구조에 대한 동기를 면밀히 분석하고 비판한다면 그의 중독이 주요 영향요인이었음을 시사하고 있다.
At a time when surgical residencies are undergoing radical and dramatic changes, we should reflect on the history of surgical residency programs and the influencing factors that shaped these programs. Our analysis identifies and highlights Halsted’s addiction as an important factor. While we are not condemning Halsted, we are suggesting that if one carefully analyzes and critiques the motivation for the structure of the Halsted surgical residency, his addiction was a major influencing factor.
Necessity is the mother of invention: William Stewart Halsted’s addiction and its influence on the development of residency training in North America
PMID: 31944636
PMCID: PMC7828946
DOI: 10.1503/cjs.003319
Free PMC article
Abstract
William Stewart Halsted developed a novel residency training program at Johns Hopkins Hospital that, with some modifications, became the model for surgical and medical residency training in North America. While performing anesthesia research early in his career, Halsted became addicted to cocaine and morphine. This paper dissects how his innovative multi-tier residency program helped him hide his addiction while simultaneously providing outstanding patient care and academic train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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