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ded.
2013. 5. 14. 18:03
2013. 5. 14. 18:03
- 미국의 의학교육이 허둥대고 있는 사이에도, medical
training의 혁명을 가져올 사건들은 이미 벌어지고 있었다.
- German
Medical Science and the Emergence of an Academic Elite
- 근대 역사에서 medical mecca가 존재하지 않았던 적은 없었다. 그 처음은 프랑스.
- 질병은
disordered humor의 결과가 아니라, 어떤 특정한 장기에서만 발견되는 국소적 현상이라 보았다.
- 수십년간 프랑스 의학이 가장 앞서나갔다면, 1840년대부터는 상황이 크게 바뀌었다.
- Astute
observation이 오히려 ultimate eclipse의 원인이 되었다.
- 프랑스 의학의 영향력이 사라져가는 동안, 독일 의학이 그 중심으로 이동하고 있었다.
- 1840년대 이전의 독일 의학은 unity
of nature 를 강조하고, 생물학적 현상과 물리적 현상의 근본적 공통점을 찾고자 하였다.
- 그러나 1840년대 이후, 독일 의학은 이같은
Naturphilosophie를 벗어던졌다.
- 슐라이덴, 슈반, 뮐러, 루드비히, 헬름홀츠, 드브로이, 피르호…
- 독일 의학의 강점은 experimental
method를 사용한데 있었다.
- 질병의 궁극적 원인을 밝히기 위한 연구를 하였으며, 'study
of function'이 'study of form and morphology'보다 중요하게 여겨졌다.
- 이러한 새로운 의학지식이 당장의 치료적 혁신에는 큰 도움이 되지는 않았지만, 독일의학의 성공은 상당한 흥분을 불러일으켰다.
- Scientific
information이 현대 의사(modern doctor)가 알아야 하는 중요한 핵심적 내용이 된 것이다.
- 실험의학은 독일의 전유물은 아니었다.
- 그렇지만 독일만의 독특한 장점 - 독일 대학의 특징이라 할 수 있는 - 이 있었다.
- 1850년대 이후 유럽으로의 medical migration은 그 패턴이 변하였다 : 프랑스에서 독일로.
- 1850년대와 1860년대에 독일에서 공부한 미국 의사는 그 수가 적었지만 Civil
War 이후 봇물터지듯 늘어났다.
- Intellectual
migration은 1870년대와 1880년대에 그 정점을 찍었다.
- 이러한
migration은 WWI의 발발과 함께 독일-미국의 관계가 악화될 때까지 지속되었다.
- 독일에서 공부한 미국인은 몇몇 공통점이 있다 - 젊고, 남성이며, 동부 출신이고, 사회 상류층이다.
- 해외 유학을 간 미국인의 대부분은 독일의 임상 분과의 강점에 매력을 느꼈다.
- Dermatology,
Ophthalmology, Laryngology, Obstetrics, Gynecology, Surgery..
- Academic
or Scientific career를 택한 사람의 숫자는 적었지만, 독일의 대학 문화(university spirit)을 충분히 경험한 사람들이었다.
- 이들이 미국에 돌아와 JH,
Harvard, Cornell 등의 faculty가 되었다.
- Medical
specialist와는 다르게 좀 더 과학연구에 관심이 있던 사람들은 독일의 작은 대학으로 갔다.
- Ludwig가 대표적인 스승이었으며, 파리의 Pierre
Louis와 라이벌관계
- 독일에서 과학을 공부한 미국인들은 독일 실험실의 exciting
atmosphere을 흠뻑 즐길 수 있었다.
- 미국인들의 독일 실험실 경험 중 두 가지 측면이 특히 그 후의 미국의학교육에 큰 영향을 주었다.
- 하나는, 미국인들의 독일인들의 medical
knowledge에 대한 자세(attitude)를 배운 것이다. 독일인들과 같이 미국 학생들도 의학적 현상이 화학적/물리적 법칙에 의한 것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 독일의 실험실에서 지낸 사람들은 전혀 새로운 세계관과 함께 미국으로 돌아가게 되었다.
- 두번째로, 독일의 실험실에서 지냈던 미국인들은 새로운 롤 모델에 반하였다 : Full time teacher and investigator.
- 초창기 미국 의사들과 달리, 이 사람들은 금전적 보상보다 지적 탁월함을 추구하였다.
- 미국으로 돌아와서 이 사람들은 상당한 좌절을 겪어야 했다. 미국에서는 어떤 곳에서도
full-time medical teaching and research를 하는 사람이 없었다.
- 이러한 어려움 때문에 1870년대, 1880년대에 미국으로 돌아온 사람들은 academic career를 추구하는 뜻을 펼 수가 없었다.
- 그리고 일부 인정받은 사람들조차 상당한 불만스러움을 표시했다.
- 어쨌거나 몇몇 사람들은 그 수많은 장애를 모두 극복하고 성공하였다.
- T Mitchell Prudden,
Warren Lombard, John Jacob Abel
- 요약하면, 1870년대와 1880년대에는 몇 안되는 수의 헌신적인, 선구자적인 medical scientist만이 겨우겨우 그들의 학문적 위치(academic position)을 유지할 수 있었고, 이는 그들이 스스로 경제적/개인적 희생을 감수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다.
- Civil War
이후, academic physician 이 되고자 했던 사람들의 역경과 고난의 이야기들은 advanced teaching 이나 research의 진로를 가고자 하는 다른 사람들에게도 알려지기 시작하였다.
- Natural
and physical science에 종사하는 사람들도 동일한 고난을 겪고 있었다. : 적은 연봉, 사비로 기자재 구입. 적은 일자리, 사회적으로 인정받지 못하는 것…
- 그럼에도 불구하고 1880년대에 의학계에서의 상황은 조금씩 나아지고 있었다.
- Civil
War 이후 상황이 변했고, 프랑스 의사들이 이뤄낸 것보다 독일의 실험적 의학이 일궈낸 연구가 실제적으로 더 많은 도움이 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