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험은 어떻게 맥락적으로 학습되는가* (교육인류학연구, 2017)

조 현 영

인하대학교

손 민 호**

인하대학교




1. 상황주의 패러다임과 실천: 실천공동체? 공동체적 실천!

상황학습론이 교수학습 연구에서 대두된 이래 꽤 세월이 흘렀다. 상황학습론은 70년대 이후 아동발달연구에서 출발하였다. 아동발달연구에서는 사회문화적 맥락이 아이가 무엇을 할 수 있고 무엇을 할 수 없는지에 직접적으로 연관되어 있는 내생적 인 변인이라는 점을 여러 연구들을 통해 밝히고자 하였다. 여기에 당연히 주역은 비 고츠키학자들이었다. 그들은 생태심리학이나 문화심리학을 배경으로 하여 피아제의 연구에 전제되어 있는 구조주의적인 가정들을 정면으로 반박하고자 하였다. 그들은 아이의 반응이나 생각 등으로 표출되는 인지구조는 일관적이지만 상황적이고 역동적 이라는 점을 보여주고자 하였다. 이후 많은 발달 연구들은 정태적이고 선형적으로 변화해가는 인지구조의 특징보다는 아이가 살아가는 상황들 안에서 미시적이고 다양 한 인지 양상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상황학습에 관한 많은 연구들은 1980년대 이후부터 미국 서부지역 대학과 연구소를 중심으로 활발히 논의가 전개되었다. 가장 큰 이유는 비고츠키주의 심리학자들이 이 지 역 대학들을 연고로 해서 서로 교류하였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소위 미시적인 사회이론 들과 융합하여 활동이론(activity theory)을 만들어 내기도 하였다.


특히 미국 서부지역을 중심으로 한 상황인지 또는 상황학습 연구의 커뮤니티의 형성은 소위 미시사회학과 같은 히피 사회학의 영향도 무시할 수 없다. 전통적으로 심리학을 배경으로 하는 교수 학습연구에서는 상황 맥락을 학습이나 발달의 내생 변 인으로 보는 데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었다. 한편 실리콘 밸리를 중심으로 인지과학 등 학제 간 연구들에서는 상호작용과 맥락에 관한 연구가 한창이었고 미시사회학 연 구들이 여기에 가세하였다. 여기서 히피사회학이라 함은 정향성과 규범을 토대로 하 는 기존 사회학과는 거꾸로 ‘일상’을 현실의 토대라고 보았다는 점, 그래서 세상을 뒤집어 보려는 성향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이러한 미시적 접근 특히 상징적 상호작용과 민속방법론은 방법론적 상황주의 그리고 일상생활의 실천의 복원이라는 기치 하에 미시적인 상황 분석을 통해 사회나 조직, 일 등이 어떻게 존속되어 가는지 보여주었다. 그들에 따르면 실천의 맥락은 그 자체로 이미 구조화된 사회고 조직이고 업무의 처리과정이다. 그리고 맥락과 일, 맥 락과 사회적 질서는 서로 분리된 것이 아니라 맥락을 만들어가는 것 자체가 곧 그 일이고 업무고 사회 질서다. 여기서 맥락은 실천에 의해 만들어지고 실천 안에서 일 궈가는 시간과 공간의 엮음새를 말한다. 학습이론에서 상황주의 패러다임은 사회적 상호작용과 맥락의 실제적인 엮음새에 관한 이들 연구의 통찰에 힘입은 바가 크다. 


상황학습과 실천공동체론은 이러한 배경에서 나왔다.1) 체화인지(embodied cognition), 분산인지(distributed cognition) 등 상황인지(situated cognition)에 관한 연 구들이 쏟아져 나왔으나 정작 ‘맥락적 경험은 언제 학습이라는 지위를 얻게 되는가’에 관해서는 여전히 모호하였다. 왜냐하면 우리의 사고나 경험이 상황 맥락에 기반해 있 다는 점에 대해서는 충분히 동의할 수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모든 맥락적 경험이 곧 학습이라고 볼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물론 우리의 경험이 어떻게 맥락적인가 하는 것 또한 명쾌하게 해명된 것은 아니었다. 더욱이 모든 경험을 학습이라고 해석하는 것 또 한 일상어법에도 맞지 않는다. 대부분의 학습관에는 바람직한 변화라고 하는 모종의 규범적인 의미가 함축되어 있기 때문이다.  


1) 실천공동체라는 아이디어는 사실 50년대 이후 상징적 상호작용 부류의 질적 연구들에서 비롯되었다는 점은 언급될 필요가 있다. 웽거(Wenger, 1998)는 이를 실천이론을 중심으로 하나의 학습이론으로 체계화시켰다. 당시 실천공동체론이 새롭게 제기된 배경에는 학습에 있어서 상황성이 왜 중요한지에 관해 설득력있는 논증이 필요했다는 사실을 염두에 둘 필 요가 있다. 웽거를 포함한 여러 사회과학자들은 인공지능 연구자들과 함께 인공지능의 상 황인지기술 문제를 다루어야만 했다. 웽거는 그의 저서에서도 언급하고 있듯이 실천공동 체에 관한 설명이 인공지능은 역량을 가질 수 있는가라는 질문으로 시작하였다는 점을 밝 히고 있는데 이는 그가 몸담고 있었던 연구소의 지적 배경에 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상 황주의 관점에서 보면 규칙따름을 기반으로 하는 인공지능은 정보를 처리하는 용량 (capacity)만 가지고 있을 뿐 규칙따름과는 전혀 상반되는 애매모호한 상황적 경험은 할 수 없으며 바로 이런 연유에서 ‘인격적인’ 의미에서의 역량은 결코 생기지 않으며 역량체 인 아이덴티티 또한 생성되지 않는다.


상황학습 연구자들 사이에서 부각된 과제는 우리의 경험이 어떻게 가변적이고 즉흥적인 상황 맥락을 넘어서서 일관성을 찾아나가는가에 대한 해답을 모색하는 것 이었다. 여기서 우리의 경험은 어떻게 일관성을 찾아나가는가 하는 질문은 거꾸로 뒤집어 보면 우리 경험은 어떻게 변화해가는가 라는 질문이기도 하다. 모든 경험은 상황적인 경험이지만 우리의 경험은 그러한 가운데에서도 항상성을 유지해 나가기 때문이다. 상황주의 관점은 개인과 같은 일관된 항상성이 선행한다는 규범주의적인 관점과 학습을 바라보는 데 있어서 서로 대척점을 이루고 있다. 우리 경험의 맥락적 속성에 관해 살펴보는 가운데 경험의 항상성, 즉 정체성(identity)의 존재가 문제시된 것이다. 그리고 경험의 항상성을 생성, 유지, 복원해가기기 위해 주변과 어떻게 협상 (negotiation, transaction)해 가는가 그리고 그 결과 우리의 경험은 어떻게 변화해가는 가 하는 문제로 다루기 시작했다. 이러한 관점에 따르면 협상된 경험을 기반으로 하 여 참여의 정체성, 즉 역량이 생겨난다. 


오늘날 실천공동체(CoP)는 네트워크 학습이나 조직학습의 모형을 의미하는 것으 로도 알려져 있고 학습의 생태계로 통용되기도 한다. 더욱이 CoP와 같은 상황학습의 ‘이론’화는 교육이론에서는 성공적인 모형으로 자리 잡아 왔다. 오늘날 상황주의 패 러다임 안에서조차도 실천공동체에의 참여과정은 상황학습의 전형으로 받아들여졌으 며, 여기서는 상황학습과 실천공동체론을 동의어로 간주하기도 한다. 상황주의 패러 다임의 관점에서 보면 CoP를 이론적 모형으로 상정하는 이들은 실천(practice)에 관 해 면밀히 살펴보는 것은 배제시킨 채 공동체에서의 학습 또는 지식조직에서의 학습 이라는 전략만을 취하고자 하였다. 


경험과 상호작용의 어떤 양상을 가리켜 공동체라고 한다는 점에서 모든 공동체 는 무형의 공동체(intangible community), 또는 상상의 공동체다. 무형이고 상상의 산물이지만 구성원들로 하여금 공유하는 객체로서 실재한다고 믿게끔 하는 장치이기 도 하다. 이러한 실재감은 참여자들 사이에 경험이 정체성 수준에서 함께 생겨나야 만 가능하다. 예를 들어 어느 학교에서 교사들 사이에 전문학습공동체를 조직했다고 곧바로 학습공동체가 조성되는 것은 아니다. 어떤 집단이 공동체 수준으로 자리 잡 았다면 조직은 별도의 시간 별도의 프로그램을 통해서가 아니라 일상에 널리 편재되 어 당사자들을 옭아맬 수 있는 힘을 발휘해야 한다. 학습공동체의 존재 확인은 쉬는 시간이 될 수도 있고 점심시간에 모여 잡담하는 시간도 될 수 있다. 긴 시간일 수도 있고 찰나의 시간일 수도 있다. 


상황주의 패러다임에서 보면 실천공동체에서의 경험의 형성은 ‘공동체 실천을 통 한 학습’으로 보는 것이 더 적절하다. 실천공동체라는 개념은 모든 개별적인 행위나 경험을 자칫 집단 층위의 활동으로 환원시키는 한계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공 동체로의 환원은 학습행위를 바라보는 스펙도 무척이나 협소하게 만드는 약점을 안 고 있다. 뒷부분에서 살펴보겠지만 모든 실천에는 다른 사람과의 상호작용이 관여되__ 어 있는 만큼 개개의 실천을 면밀히 살펴보는 것으로도 충분히 공동체에 관한 의미 를 함축한다. 그보다 상황주의 패러다임은 그 문제 인식이 실천(practice)을 살펴보는 것으로 시작해서 실천으로 끝난다고 보는 것이 더 적절하다. 


실천공동체론은 상황학습에 관한 한 이론일 뿐 상황주의 학습이론 전체를 대표 하지 않는다. 상황주의 학습이론은 하나의 이론이 아닌 하나의 패러다임이라고 할 정도로 그 스펙트럼이 광범위하고 그 관심은 훨씬 근원적인 질문에서 출발한다. 물 론 상황주의 패러다임에 해당되는 연구 전체 지형도를 정리하기란 그리 어렵지 않 다. 

  • 심리학에서는 비고츠키 발달이론과 생태심리학이 그리고 

  • 사회학에서는 상징적 상호작용과 민속방법론이, 그리고 

  • 실천에 관한 여러 철학적 배경과 사회인류학이 만 나 학습연구에서 상황주의 패러다임을 일궈왔다(Nicolini, 2012). 

최근에는 위에서 언 급한 지적인 뿌리들이 혼종되어 나온 활동이론(activity theory)도 실천공동체론만큼 이나 상황주의 학습이론 패러다임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상황주의 패러다임 은 활동이론은 갈등론의 입장도 취하긴 하지만 기본적으로 협력 또는 조화론의 입장 을 전제로 하고 있다. 


상황주의 패러다임에서 경험과 지식 그리고 학습을 어떻게 보는지 대체로 다음 과 같이 정리해 볼 수 있다. 

  • 첫째, 경험은 그 지식이 다루고 있는 객체뿐만 아니라 맥락으로 분산되어 있다. 따라서 모든 경험은 우선적으로 개념이나 표상으로 매개되지 않은 직접적인 경험이 고 따라서 그 경험들은 즉흥적이고 생성적인 성격을 띤다. 

  • 둘째, 맥락은 우리가 대면하는 대상이면서 또한 그 안에 거주하는 공간이다. 따라 서 직접 경험으로서 지적인 경험은 객체 또는 이를 둘러싼 타자들, 즉 맥락과 직접 적으로 상호작용하는 가운데 비롯된다. 동시에 그것은 맥락의 흐름으로 임베디드되 어(embedded) 있다. 

  • 셋째, 문제해결과정에서 실제로 작동하는 추론은 맥락적인 단서와 자원을 동원하 는 만큼 상황 맥락적이다. 

  • 넷째, 지각과 행위 그리고 정서, 지적 경험은 개념이나 지식에 매개되지 않은 직 접적인 경험인 만큼 학습은 이해나 사고의 문제가 아니라 지각과 행위 더 나아가 정 서나 감성의 문제다. 

  • 다섯째, 모든 경험은 비매개적인 직접 경험이며, 동시에 타자들과의 공유 및 재생 산 가능성을 전제로 하는 만큼 그것의 학습에는 타자와의 조율과 타협, 복종과 모델 링 등이 관여된다.

  • 여섯째, 우리 경험을 이끄는 활동 시스템으로서의 맥락, 즉 즉각적이면서 미시적 인 환경을 구성하기 위해서는 자신을 어떤 맥락에 처하게(positioning)하는 행위 즉 참여 행위가 요구된다. 

  • 일곱째, 학습은 개인 내적인 구조의 변화가 아니라 개인과 맥락 간의 관계 양상 의 흐름이다. 


그리고 이상의 내용보다 더 상위의 전제는 다음과 같다. 즉 모든 행위는 협상과 조율의 맥락적 행위이고, 모든 사고는 협상과 조율의 맥락적 사고이며, 따라서 모든 학습 또한 협상과 조율의 상황학습이다. 바로 이 점이 상황주의 학습이론으로서는 곤혹스러운 지점이다. 교육이론에서 학습은 규범적인 차원에서 그 위상에 걸맞은 어 떤 경험 또는 행위의 양식을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보자. 국문학과 학 생들이 시를 반복해서 외우고 있는 상황을 가정해보자. 암기에 의한 학습인가 아니 면 실천에 기반한 상황학습을 하고 있는 것인가? 


또 하나의 상위 전제는 모든 경험은 실천을 기반으로 한다는 점이다(Gherardi, 2008; Schatzki, 2001). 위에서 제시된 상황주의 속성들은 다름 아닌 실천의 속성이기 도 하다. 맥락과 실천은 동전의 양면과도 같아서 의미가 성립하기 위해서 없어선 안 될 두 축이라고 볼 수 있다. 실천과 맥락은 서로를 구성하는 것으로 볼 수 있기 때 문이다. 독서를 한다는 것은 이야기의 맥락, 즉 행간의 의미를 발견한다는 것을 말하 며 여기에는 독서 행위가 수행되지 않으면 안 된다. 대체로 우리가 어떤 행위를 실 천이라 할 때 그것이 다음과 같은 특징을 함축하고 있다. 


첫째, 실제적인 행위가 관여되어 있고 그 만큼 맥락 변용적이다. 

둘째, 일회적 경험이 아닌 반복되는 만큼 패턴화되어 있으며 일상적(routine)이다. 

셋째, 누군가와 공유가능 한 방식으로 재생산되는 만큼 사적(private)이 아닌 공 적(public)이다. 

넷째, ‘그 일에 관여하는 동안’ 에이전트와 에이전트 에이전트와 사물을 한데 엮 어가는 만큼 구체적이다. 


2. 경험은 어떻게 상황으로 분산되는가?

2.1. 지식의 도구성과 객체의 어포던스


 상황주의에 따르면 모든 지식은 도구의 속성을 지닌다. 여기서 도구라 함은 어떠 어떠한 일을 하기 위해 동원되는 수단이라는 의미다. 지식은 그것이 명시적 지식이 든 암묵적 지식이든 도구로 볼 수 있다. 개념적인 지식조차도 우리가 그 지식을 활 용하는 것은 마치 도구처럼 부리는 것과 다름없다. 우리는 실용주의적 의미에서 지 식은 도구라는 말을 자주 사용한다. 상황주의에서 말하는 도구성은 우리가 어떤 일 을 도모해 나가는 데 있어서 닥치는 상황에 대하여 ‘실제적인’ 방식으로 행위를 가한 다는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지식의 도구성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이해한다면 맥락을 학습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좀 더 쉽게 파악할 수 있다. 지식이 어떻게 도구성을 띠게 되는지에 관 해서 이해하기 위해서는 지식은 일단 익히고 나면 그 지식이 지향하고자 하는 객체 대상과 구분되지 않는 방식으로 우리에게 경험된다는 점에 관해서 되짚어볼 필요가 있다. 


메를로 퐁티(Merleau-Ponty, 1962)는 장님의 지팡이 예를 들어 도구의 비가시 성에 관해 논증한 바 있다. 어느 한 장님에게 지팡이를 주면서 그것이 어떤지 이야 기해 보도록 하자. 무겁다든지, 너무 길다든지, 표면이 매끄럽다는 등 그 지팡이 생 김새에 관해 다양하게 이야기할 것이다. 그러나 그가 그것을 자신의 도구로 전유화 (appropriation), 즉 자신 몸의 연장(extension)처럼 마음대로 사용하기 시작하면서부 터는 그 자체에 대해서는 지각하지 못한다. 이 때 지팡이는 그에게 손으로 전달되는 대상의 느낌, 예컨대 커브 길이나 길 앞의 장애물 등의 대상으로 느껴진다. 이와 마 찬가지로 어떠한 도구도 일단 그 사용법이 터득되기 시작하면 그것의 존재는 마치 없는 것처럼 투명하게 된다. 


우리가 문제를 해결할 때 동원하는 지식이나 기술도 하나의 도구로 볼 수 있다. 지식이나 기술은 우리가 그것들을 익히기 전에는 가시적인 존재이지만 일단 체득하 고 그것들을 자유자재로 사용하기 시작하면 그것들의 존재성을 따로 의식하지 못한 다. 어떤 지식이나 기술을 자유자재로 사용할 만큼 터득한 상황을 보면, 사용자가 그 지식이나 기술을 있는 그대로 적용하기에 급급하거나 얽매이지 않고 상황에 맞게 유 연하게 그것들을 부릴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을 쉽게 떠올릴 수 있다. 아이러니하게도 지식이나 기술을 터득했다는 것은 그것에 의해 규제를 받는다는 의미와 동시에 그로 부터 자유롭게 되었다는 이중적인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아무리 고차원적인 지식 내지는 기술이라도 일단 그것이 행위자에 의해 터득되 면 그것은 당사자에게 상황 안에서 직접 경험되는 대상이 된다. 

    • 예컨대 터득된 상태 에서 바이올린과 연주곡은 연주자에게 즉각적인 반응을 불러일으키는 손끝 느낌의 대상이다. 

    • 익숙해진 말은 상황 즉각적으로 구사된다. 

    • 또한 목판에 못을 박을 때 목수 의 손놀림은 사실상 망치와 하나가 된 듯 현란하다. 

    • 전문의들은 흑백 필름 속에서 폐렴 증상이 얼마나 진척되었는지 본다. 

대상과 머릿속간의 상호작용이 아닌 실제 맥락과 그에로 열려져 있는 지각 또는 행위의 양태로 그 관계 양상이 변화한 것이 다. 여기서 사물은 사유되는 대상이 아니라 보고 듣고 말하고 사용하는 등 행위의 대상이 된다. 


상황주의 패러다임 가운데 한 이론인 활동이론(activity theory)에 따르면 지식을 체득화한다는 것은 그것을 도구로 활용할 수 있도록 전유화(appropriation)하는 것이 면서 동시에 객체, 즉 사물, 말, 문제 상황이 띠고 있는 질(quality) 또는 맥락의 결에 따라 지각과 행위가 이끌려 간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폴라니(Polanyi, 1958)는 객체 에 의해 이끌려지는 내재적 경험을 가리켜 ‘실천 안에의 거주’(dwelling in a practice)라고 보았다. 내부자적 관점에서 보았을 때 그가 참여하고 있는 실천은 지 적일 뿐만 아니라 심미적이고 윤리적인 애착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여기에서 지식 을 체득화한다는 것, 다시 말해서 학습이란 객체의 질을 따라 지각하고 반응할 수 있게 됨, 즉 역량(competence)의 발달을 뜻한다. 


이 때 상호작용은 직접적인 경험과 행위로 전개되는 만큼 그것은 비매개화된 지 각과 실천적, 실제적 행위 그리고 정서의 양태로 표출된다. 여기서 비매개화된 지각 이라 함은 실천적 행위라 함은 객체를 향하는 우리의 지각이 지식이나 표상에 의해 매개되지 않고 즉각적으로 이루어진다는 것을 뜻한다. 그리고 객체든 상황이든 그것 와의 상호작용이 실제적인 행위의 양태를 띤다고 함은 어느 경우에도 우리의 기획과__ 행위는 결코 규칙을 따르지 않다는 것을 의미한다. 규칙을 따르지 않고 객체의 질성 을 따른다는 말이다. 예컨대 문제 상황에 봉착했을 때 우리는 일단 어떤 조치를 취하 고 그 결과로 비롯되는 상황을 봐서 다음의 행위를 선택하고 결정한다. 물론 이러한 과정은 하나, 하나의 분절된 절차가 아닌 순환적이고 총체적인 흐름으로 일어난다. 일상의 실천은 습속이나 전통과도 같이 그 안에 거주하는 사용자에 대해 자동적으로 행위를 이끄는 처방전과도 같은 역할을 한다. 이러한 습속이나 전통으로 인해 우리는 매번 맞닥뜨리는 상황이나 객체에 대해서 새롭게 규정하고 계획세울 필요 없이 안정 된 방식으로 살아갈 수 있다.



2.2. 일의 선후관계 그리고 경험의 흐름으로서의 맥락


상황주의 패러다임에서 말하는 맥락이란 우리 행위와 추론의 국지적 환경을 말 한다. 이 점과 관련해서 상황주의 학습이론에서 상정하는 질문은 맥락적 관심과 태 도가 맥락적인 변수들을 어떻게 시간적으로 구조화해(temporally structured) 가는가 에 관해서다. 상황주의는 기본적으로 초월자의 관점이 아닌 상호주관적이라는 의미 에서의 당사자적 관점을 취한다. 맥락에 몰입되어 있는 당사자라면 맥락초월적이 아 니라 맥락적으로 생각하고 행위를 할 수밖에 없다. 이를 도식으로 표현하면 다음과 같다. 



이 점에서 행위를 통해 의미를 형성해 나간다는 것에는 상황적 추론의 또 다른 작동 방식인 ‘애씀(effort)’이 소요되어야 한다. 앞서 설명한 대로 문제를 해결하고 의 미를 창출하는 데에는 시간성의 전개라는 맥락적 흐름이 필요하며, 이것은 ‘여기 지 금’이라는 현재의 무한한 흐름 속에 끝없이 열린 결론을 가지고 전개되는 행위의 예 측 불가능성을 전제로 한다. 우리가 만나는 매 순간의 상황은 그것이 비록 반복된 일상의 일들이라 할지라도 언제나 긴장과 낯설음을 갖고 있다. 이것은 우리가 만나 는 ‘여기 지금’이라는 순간은 과거의 경험과 미래 반영되어 구현된 고유하고 개별화 된 ‘현재’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문제 맥락에 봉착하고 이를 해결하기 위해 추론이 일어나는 경우, 시간적 흐름 가운데 지난 경험을 반추하고 미래의 기대를 반영하며 끝없이 새로운 선택과 결정을 해야 하는 순간에 놓이게 된다. 


우리는 일상의 맥락에서 그러한 긴장과 새로움을 의식하지 못한 채로 대부분의 일들을 처리해 나간다. 그리고 그 가운데 기존의 인지 구조와 위배되는 문제 상황에 부딪히게 되었을 때에 흔히 반성이나 성찰이 일어난다. 듀이(Dewey, 1931)는 바로 이러한 애씀이 동원되는 경험이 바로 학습이 일어나는 순간이라고 보았다. 


학교수업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는 수업조직방식인 교사와 학생간의 질문-대답- 평가의 순환과정은 맥락의 구성이 어떻게 참여자들의 주의를 한데로 집중시키는지 잘 보여주는 예다. 특정 학생에게 던진 교사의 질문은 그 학생으로 하여금 옴짝달싹 하지 못하게 어떻게 답변을 찾아야 할지 궁리하도록 만드는 등 상황을 돌변시킨다. 질문 이전에 어떤 이야기가 오고 갔는지, 교사가 원하는 대답이 무엇인지, 나의 대답 이 어떻게 하면 전후 맥락에서 벗어나지 않을 수 있는지, 또는 앞에 대답한 학생과 어떻게 차별된 의견의 답변을 할 수 있을지 순간 궁리하게 만든다. 


교사의 질문이 학생의 반응을 맥락적으로 구조화한다는 기능은 개인에 그치지 않는다. 맥락의 돌변이 불러일으키는 영향력은 그 질문을 떠안은 학생에게만 일어난 것에 그치지 않는다. 즉, 영석이에게 한 질문은 그에게만 해당되지 않는다. 나머지 학생들은 자신이 지목당한 것은 아니지만 영석이에게 한 질문은 자신들에게로 온 질 문이기도 하다. 다음 차례가 자신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한 학생에 게 한 교사의 질문은 학생 개개인을 하나의 정체성으로 엮는 효과를 갖는다. 이처럼 학급에서 우리라는 실천공동체는 매 상황 구성된다. 


매 상황이 어떻게 다음을 추론시키는지는 퍼즐풀이에 비유해보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퍼즐맞추기 게임은 전체와 부분간의 연관성을 매 상황 견주어가는 탐색의 과정으로 구성된다. 그것은 마치 우리가 책을 읽을 때에 문장 하나하나에 주목할 뿐 만 아니라 그것이 지금까지의 흐름, 즉 문맥과 어떻게 연관되는지를 동시에 탐색하 는 이치와도 같다. 각각의 조각들이 갖는 연관성들이 하나의 맥락적 조건을 만들고,__ 또 그렇게 만들어진 조건은 또 다른 맥락이 되어 다음 퍼즐 조각이 어떤 것이 선택 되어야 할지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주는 등의 방식으로 퍼즐풀이의 과정 전체를 형성 해나간다. 예컨대, 퍼즐 조각들 사이의 빈 공간의 그 때 그 때의 즉각적인 출현은 우 리에게 ‘무언가 있어야 할 것’이라는 기대감을 바탕으로 소위 현상학적 장 (phenomenal field)을 가시화시켜 다음 행위를 동기화시키도록 하는 조건으로 작용하 여 전체와 부분의 연관성을 추론하도록 한다(Garfinkel, 1967). 


퍼즐을 맞춰나가는 동안 우리는 퍼즐조각간의 전후관계를 찾아나가면서 즐거움 을 만끽한다. 같은 퍼즐풀이라도 사람들은 그것을 반복해서 즐긴다. 매번 경험되는 다음 상황은 당사자적 관점에서 보면 항상 ‘처음처럼’의 정서를 유발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러한 예측 불가능한 긴장감이 다음 행위에 대한 추론을 불러 일으킨다. 


문제를 해결해 나가는 동안 그리고 도모한 일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다양한 맥락 적 추론이 유발된다. 이러한 추론은 다음 상황에 대한 기대감, 이전의 상황에 따른 행위로 인한 매번 낯선 현장성으로 인한 것으로, 상황 맥락을 성립시키는 기반으로서 시간성(temporality)의 속성을 잘 보여준다. 여기서 시간성이란, 우리 행위에 총체 성을 부여하는 구조화의 원천으로서, 우리가 행위를 해나가는 테두리로서 작용하며 행위를 유발해나간다. 이러한 시간성이 행위의 테두리로서 작용할 수 있는 것은 사 고에 선행하여 경험되는 정서적 기대감을 동반하기 때문이다. 여기에는 이전의 경험 이나 맥락에 대한 예견과 같은 개인의 이해의 지평이 행위 전반에 작용하며 우리의 행위의 방향성으로 작동하게 된다. 이것은 행위자의 맥락이 유발한 이전 경험에서에 서 비롯된 막연한 결과에 대한 우려나 기대와 같은 요인들이 고려된 우연적인 상황 의 산물인 것이다(손민호·조현영, 2014). 이처럼 실천이 엮어가는 시간의 흐름은 일이 나 경험, 학습 등의 과정을 결정지우는 맥락의 속성을 잘 보여준다.


3. 경험은 어떻게 맥락적으로 학습되는가?

3.1. 경험의 학습에서 실천공동체는 어떻게 경험되는가


감각적 지식과 같은 경험의 학습은 통상적으로 암묵지의 생성과 공유로 다루어 진다. 커피 바리스타 기술은 바리스타 교육 프로그램에 한동안 참여하는 과정에서 생겨난다. 고수들이 교수자로 참여해서 수련생들에게 그 기법을 전달해 준다. 그러한 기법은 커피를 추출해내는 기술과 맛을 감별하는 능력 등으로 구성된다. 수련과정에 참여하는 수련생의 경험을 재구성할 수 있다면 커피 바리스타의 기술이 어떻게 해서 생겨날 수 있는 것인지, 즉 감각적 지식이 어떻게 학습되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쓰 고 시기만 한 비슷비슷한 맛의 커피들이 어떻게 수십 가지의 커피로 분류될 수 있는 지, 콩이라는 자연의 식물성 자재가 어떻게 커피라는 사회문화적 소비재를 둘러싼 문화적 기호의 대상로 둔갑될 수 있는지 그 과정에 관여되는 수많은 실천들에 관한 우리의 이해를 새롭게 해 줄 것이다. 


일반적으로 암묵지를 습득하기 위한 부단한 연마와 연습은 흔히 무맥락적이고 개인적인 상황으로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모든 연습에는 일정 부분 시연의 성격이 있다. 여기서 시연이라 함은 누군가를 염두에 둔 연습이라는 의미다. 예컨대 다가올 연주회를 준비하면서 연습에 임하는 경우가 그렇다. 도자기 만드는 법을 마스터를 따라 열심히 연습하는 도제는 어떠한가? 도자기 흙을 빚는 연습도 시연에 해당하는 가? 모든 연습에는 타자의 현존(co-presence)이 직접 또는 간접적으로 결부된다는 점에 관해 되짚어볼 필요가 있다(Wenger, 1998). 상징적 상호작용주의자들에 따르면 개인의 머릿속 사고조차 실제 대화의 시뮬레이션이다. 우리 안의 사고의 흐름은 독 백체(monologue)라고 생각되지만 훨씬 대화체(dialogue)의 성격을 갖는다는 것이다. 어떤 사안을 두고 우리가 머릿속으로 어떤 생각을 정리해 나가는 데 말들을 만들면 서 이어나가는 경우를 떠올려 보면 이 지적이 의미하는 바를 충분히 이해할 수 있 다. 비록 혼자 생각을 하는 것이지만 거기에는 주체적 자아(I)와 객체적 자아(Me)간 의 대화체가 스며들어 있다. 이런 점에서 비고츠키주의자들은 우리의 사고는 어떤 개념이나 의미의 내면화가 아니라 상호작용의 내면화로 나타나는 양상이라고 주장하 였다. 


상황학습, 즉 감각적 지식이 맥락적으로 습득된다는 것은 다음과 같은 의미에서 다. 이 모든 감각적 지식은 ‘동료 등 다른 사람들과의 상호작용이 가능한 방식으로’ 구성된다는 점이다. 다소 추상적으로 정리하자면 이 모든 과정에는 실천이 관여되어 야 하고 실천은 상호행위적인(interactive) 속성을 기반으로 하기 때문이다. 상호행위 적인 측면들은 대개 상황적이고 주변적이어서 당연시되어 간과되기 마련이다. 왜냐 하면 커피의 맛과 향에 관해 익힐 때 학습자의 주의는 온통 객체 대상, 즉 커피 자 체에만 집중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커피 맛의 감별이라는 암묵지가 생겨 나는 조건으로 학습자와 객체 대상간의 상호작용만을 생각하기 쉽다. 


한편 여러 연구 결과에 따르면 상호작용은 대상 객체와의 상호작용에 국한되지 않는다. 일례로 시카고 사회학자 베커(Becker)는 ‘마리화나 흡연자 되기’라는 연구를 통해서 마리화나 상용자가 되는 것은 하나의 학습의 과정을 통해서라는 점을 설득력 있게 간파하였다. 마리화나의 소위 ‘뿅가는’ 기분을 맛보게 되는 것은 화학 물질 때 문만은 아니다. 그는 초심자가 노련한 흡연자 등 동료들과 그 경험을 암묵적으로 맞 춰가는 가운데 생겨난다는 점을 발견하였다. 사실상 우리 경험은 사물 객체가 아닌 경험 객체와의 상호작용의 결과다. 


그러한 객체를 마주하는 이 일과 연관되어 있는 사람들과의 상호작용 또한 객체 에 관한 지식이나 그것을 다루는 기술에 스며들어 있다. 우선 ‘누가’ 그렇게 하느냐 의 문제가 암묵적으로 개입된다는 것이다. 

    • 신참의 경우 교수자는 고참으로 이미 공 동체 안에서 상황적으로 설정되어 있다. 덕분에 고참이 하는 말이나 행동양식들은 지식의 전형인 것으로 받아들여 그를 모방하고 따르려고 한다. 이 때 초심자는 어떠 한 의심도 유보한 채 고참의 행태를 따르고자 한다. 고참의 지시나 경험이 설령 당 장 따르기도 그리고 자신의 경험으로 받아들이기 힘든 부분들이 있더라도 신참은 일 단 자신의 판단을 유보한 채 그를 믿고 따르려는 태도를 취한다. 실천공동체가 학습 의 기제로 작동할 수 있는 데에는 집단 정서, 즉 에토스(ethos)가 기반이 되기 때문 이다. 

웽거(Wenger, 1998)가 그의 저서에서 실천공동체론이 네트워크 학습론과는 다 르다고 역설하는 것도 바로 학습의 정서적 토대 때문이다. 이러한 정서는 자신과 자 신이 동일시하고자 하는 공동체의 전형간의 차이를 서로 맞춰 나가고자 하는 태도에 서 시작된다. 참여를 통해 형성하는 아이덴티티는 동일시(identification)의 기제가 작동하면서 비롯되는 산물이다. 


상호작용의 객체, 즉 커피의 맛을 감별해내는 능력에는 혀끝에 체화된 암묵지 뿐 만 아니라 공동체가 공유하는 방식으로 객체화하는 능력도 동시에 요구된다. 물론 그 양자는 분리될 수 없는 하나지만 설명의 편의상 구분하자면 그렇다. 같은 맥락에 서 윈치(Winch)는 기계공이 기계를 수리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은 정확히 말하자면, 기계를 수리할 수 있게 되었다가 아니라 다른 기계공이 기계 수리하는 것을 할 줄 알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말한 바 있다. 학습 경험이 어떻게 생겨나는 것인가 에 시사점을 제시해 준 많은 질적인 사회학 연구들은 학습 경험에서의 당연시된 측 면을 그러한 사회적 상호작용에서 발견하고 있다. 암묵지를 개인적인 지식이 아닌 인격적인 지식이라고 지칭하는 것도 바로 이러한 연유, 개인적(personal)이면서도 공 적인(public) 성격 때문이다. 


정체성의 범주와 그것의 형성 역시 암묵지와 그의 학습의 양상과 유사하다고 한 다면 암묵지 학습의 이중구속에 관한 위와 같은 해석은 이에도 동일하게 적용해 볼 수 있다. 모든 멤버십 범주는 특정한 공동체가 아니라 실천의 성운(constellation)으 로서 성립한다고 말하는 것이 더 정확하다(Wenger, 1998). 익명의 다수로 된 공동체 를 전제로 해서 성립한 것이다. 예컨대 아버지들의 실천공동체는 존재한다고 말하는 것은 어색한 표현이다. 그러나 아버지라는 아이덴티티 범주는 비슷한 처지에 놓은 익명의 다수가 공유한다고 보는 실천의 양상과의 연관성 하에서 성립한다. 마치 밤 에 육안으로 비치는 일곱 개의 서로 인접한 별자리를 하나의 북두칠성으로 보듯이, 실체로서 존재하지는 않지만 의미로서 존재한다는 말이다. 


마찬가지로 암 환자라는 실천공동체는 형식적으로 존재하지 않지만, 물론 암환자 협회 같은 제도화된 조직이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암환자라는 정체성 범주는 실제로 존재한다. 누군가 암환자가 된다는 것은 몸에 암에 걸렸다는 것 이상의 의미를 갖는 다. 자신의 질병이나 세상을 어떻게 바라보고, 암환자로서 자신의 삶을 어떻게 살아 가야 하는지, 자신이 걸린 질병과 관련해서 어떻게 먹고 어떻게 대응해 가야하는지 등 자신이 겪어보지 못한 사람들의 경험들과 함께 서서히 익혀간다. 그들의 전형을 암묵적으로 받아들인 것이고 그런 만큼 암환자라는 범주는 그의 정체성 일부로 자리 잡게 된다. 암환자로서의 정체성은 질병에 대한 대응전략의 일환으로 형성되는 것이 기도 하고 사회적 대응전략으로 생겨나는 것이기도 하다. 이러한 아이덴티티는 실제 적으로 우리가 그 실천에 참여하는 만큼만 상황화되어 나타나는 전형이다. 존재의 임(being)은 되기(doing)에의 참여 결과 나타나는 기투된 양상(being in the world)이 다.


3.2. 연습은 어떻게 맥락의존적인가

대부분의 학습은 지식이나 경험의 숙달과 관련되어 되어 있다. 아이들이 구구셈 을 익히기 위해서 셈법의 숫자들을 무한히 반복해서 읊는다. 시험을 앞두고 교과서 에 나오는 개념을 익히기 위해서 암기도 하고 그 개념이 응용된 문제를 풀어보기도 하는 공부에서도 반복 연습은 필수다. K팝 악보를 보고 이를 피아노를 연주하기 위 해서는 피아노 건반을 두드리는 연습을 수없이 반복해야 한다. 전문 목공이나 전문 연주자의 기량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1만 시간의 연습이 필요하다고 한다(Sennett, 2008). 


연습이 어떻게 맥락적으로 경험되는 것인지 짚어보기에 앞서 전문가들의 실천이 어떻게 맥락의 운영(situated management of knowledge)과 같은 특징을 보이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다음은 실제 진료상황의 시뮬레이션 상황인 가상의 진료상황에 서의 문진 장면이다. 여기에서 의사는 환자의 개별적이고 모호한 신체증상을 환자와 의 상호작용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하나의 의학적 사실로 연관시켜 진단내리고 있다.


<사례 1>

의사(SD): 전혀 없으시구요. 예, 음… 그 검은색 변. 검은색 말고는 뭐… 점액

질이라던지 그런거는 섞여 나온다 그런 건 없었나요?

환자(P)S: 점액질이요?

SD : 네. 뭐 하얗게 뭐 다른 물질이 섞여나온 건 아니에요?

PD : 글쎄요. 그런 건 잘 모르겠네요.

SD : 그런 건 모르시겠구요. 설사 같은 건 하세요?

PD : 아니요

SD : 안하시구요. 예. 배가 혹시 아프세요?

PD : 아. 가끔.

SD : 어디가 아프세요?

PD : 글쎄요. 명치 근처에서 아픈가? 그런 게 좀 있었어요.

SD : 명치 근처요. 어… 언제부터 그러셨어요?

PD : 글쎄요. 정확하게는 잘 모르겠구요. 몇 달 된 거 같아요.

SD : 몇 달 전부터요. 어떻게 아프세요? 쓰린 느낌이에요? 아니면은…

PD : 쓰릴 때도 있어요.

SD : 아. 쓰린 느낌이세요?

PD : 예. 쓰릴 때도 있어요.

SD : 아. 그게 식사랑 연관이 있는거 같나요? 밥을 먹으면 괜찮다던지 뭐 밥 을 먹으면 더 아프다던지…

PD : 예. 쓰린거는… 에… 그런… 밥먹기 전엔 좀 쓰리다가 먹고 나면 좀 괜찮아지는 거 같기도하고… 예…

(중략)

SD : 예. 알겠습니다. 통증이 명치 부위가 아프다고 하셨잖아요. 통증이 뭐.…

다른 쪽으로 뻗친다던지 그런 느낌은 없으세요?

PD : 뻗친다구요?

SD : 예. 뭐… 여기가 아프다가 등이 또 아프다던지…

PD : 아니요. 그런 거 모르겠는데….

SD : 그런 건 모르시겠구요. 예. 메스꺼우세요, 좀?

PD : 가끔 그럴 때가 좀 있었던 거 같아요. (조현영, 2015)


위 상황에서 의사는 환자에게 질문을 하고 이에 대한 환자의 대답을 다시 한번 반복하며 확인한다. 그것은 환자의 대답을 스스로 재확인하는 혼잣말처럼 보이지만, 그 공간 안에 있는 누구든지 들을 수 있다. 그런데 한 가지 흥미로운 사실은 의사가 환자의 애매하고 불확실한 대답을 다시 말하는 과정에서 의미를 한정시키는 방식으 로 재구성하여 말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 예컨대, 통증의 양상을 묻는 질문에 “쓰릴 때도 있어요.”라고 말하는 환자의 대답에 대해서 의사는 “쓰린 느낌이세요.”라고 환 자의 통증이 쓰린 느낌이라고 단정지어 말한다. 환자가 “쓰릴 때도 있다.”라고 말한 것에는 문법상 그렇지 않은 느낌일 때도 있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을 것이다. 그런 데 의사는 이에 대해 더 이상 구체적으로 묻지 않고, 쓰린 느낌이라고 통증의 양상 을 한정지어버린다. 그런데 환자는 의사의 이러한 말에 어떠한 반박도 하지 않는다. 

    • 마찬가지로 통증의 부위도 환자는 “명치 근처에서 아픈가?”라고 대답하며 통증 부위 의 경계를 애매모호하고 불확실하게 대답한다. 그런데 의사는 잠시 뒤 신체 진찰이 이루어지는 상황에서 통증의 부위를 이야기할 때, “통증이 명치 부위가 아프다고 하 셨잖아요.”라고 단정짓고 다음 질문을 이어간다. 마찬가지로 환자는 이에 대해 어떠 한 반박도 하지 않으며, 오히려 환자는 다음의 신체진찰 상황에서는 ‘정확히 명치부 위’에서 강한 통증을 호소한다. <상황>에서 나타난 환자의 애매모호한 설명방식과는 달리 이어지는 상황에서 환자의 복부 통증은 매우 자명한 증상인 것처럼 보인다. 


의사가 환자의 말을 재구성하여 말하는 방식은 단순한 혼잣말로 보이지만, 이것 은 환자의 대답에 대한 의미를 확정짓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 환자가 ‘명치 근처’라 고 통증의 경계 부위를 모호하게 말한 뒤, 다음 대화에서 의사가 ‘명치 부위’라고 경 계를 한정지어 말했을 경우, 위 대화에서는 환자가 어떠한 언급도 없이 다음 대화가 이어진다. 이것은 직접적으로 대답을 하지는 않았지만 의사가 명치 부위로 한정한 것에 큰 이견이 없다는 것을 암묵적으로 인정한 것이 된다. 


의사의 지나가는 듯한 말들에 대한 환자의 인정 혹은 거절의 입장 표명은 다음 대화에서 이 문제에 대한 협상을 계속 할 것인지 다음의 문제로 넘어가도 되는지에 대한 국면의 전환 여부를 결정한다. 또한 이러한 방식의 발화는 환자의 대답을 다시 한번 상기시키면서 다음 발화의 내용을 떠올리기 위한 시간적 여유를 제공하기도 한 다. 자연스러운 진료 상황에서 대화와 대화 사이, 행위와 행위 사이의 공백이 너무 길다면 이것은 매우 어색하거나 혹은 그 또한 어떠한 의미를 갖는 것으로 해석되기 쉽다. 


따라서 공백이 다른 의미를 갖는 것이 아니라면, 다음 행위를 탐색하는 중에도 그 상황을 자연스럽게 이어가는 말이나 행동이 이루어져야만 한다. 특히 임상수행평 가의 가상의 진료 상황에서 학생 의사는 표준화 환자의 말을 재구성하여 되묻는 방 식을 통하여 진단에 필요한 증상들의 의미를 한정시켜 문제해결의 실마리를 찾아낼 뿐만 아니라, 다음 발화 행위를 준비할 수 있는 시간을 확보해 나간다. 이러한 상호 작용의 방식은 전문가와 비전문가 사이의 비대칭적 상호작용 상황에서의 특징을 잘 보여준다. 전문가는 환자의 진료라는 개별적이고 유사한 상황들 가운데서 어떻게든 진단과 처방이라는 방식으로 매우 그럴듯하게 문제를 해결해야하는 처지에 놓인다. 따라서 의사는 어떠한 방식으로든 애매모호한 증상들을 자신이 처리할 수 있고, 설 명가능한 문제로 재상정해야 하며, 이것은 상호간의 상호작용이라는 담화의 과정을 통해 위와 같이 이루어질 수 있다. 


다시 말해서, 전문가는 문제 상황에서 자신을 둘러싼 상황 속에 놓여진 다양한 자원들, 즉 여기서는 환자의 말이나 환자와의 불평등한 파워 관계 등을 적절히 활용 해가면서 상황을 의도에 맞게 이끌어낸다. 즉, 차이의 간극을 좁혀가기 위해 상황적 요인들을 적재적소에 배치하는 전략을 통해 맥락의 유사함을 동일함으로 바꾸어가는 것이다. 


하이데거(Heidegger)는 ‘거리제거’와 ‘방향잡기’라는 두 가지 성격의 존재 양식을 통해 상황 맥락의 운용전략에 관해 설명한 바 있다(박찬국, 2014). 어떤 것을 하기 위해 필요한 도구를 사용하기 편리하게 가까이 두는 것을 ‘거리제거’에 해당한다. 이 는 익숙하고 능숙하다는 것을 뜻한다. 거리가 가까울수록 대상에 대한 의존도가 커 짐에 따라 그 존재 자체를 인식하지 못할 정도로 비가시화되어 편안하고 익숙함을 느끼게 된다. 


여기에서 거리 혹은 가시성은 결코 물리적 사실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이는 도구의 용도에 따라 매우 상황적이고 상대적으로 존재한다. 

    • 예를 들어 우리가 못을 박고 있을 때 망치가 나에게서 2미터밖에 떨어져 있지 않더라도 손을 뻗으면 닿을 수 있는 거리가 아니기 때문에 멀리 있는 것으로 여겨지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뿐 만 아니라, 너무나 가깝고 익숙해서 그것이 가시화되지 않는 대상의 경우, 오히려 가 시화된 다른 대상들의 비해 더욱 원거리로 느껴질 수밖에 없다. 예를 들어, 내가 착 용하고 있는 안경의 존재는 대화중인 눈앞의 누군가보다 더욱 멀리 느껴질 수도 있 다. 


익숙하고 편안한 존재란 거리제거와 동시에 방향을 잡는다는 성격을 지니고 있 다. 도구의 거리를 제거하고 방향을 잡는 행위들은 상황의 흐름 속에서 연속적으로 발생한다. 

    • 벽에 못을 박기 위해서는 망치와 플라이어(일명, 펜치라고 불리는 집게)가 필요하다. 망치와 플라이어는 행위자가 망치질을 하는 방식에 따라 서로 번갈아가며 사용되기도 하고 동시에 사용된다. 따라서 망치와 플라이어는 다음에 이어질 행위에 따라 때론 망치가 더 잡기 쉬운 방식으로, 때론 플라이어가 더 잡기 쉬운 방식으로 거리를 두고 놓일 때, 막힘없이 못 박는 행위가 전개될 수 있다. 여기서 방향잡기란 일의 전후맥락 속에서 도구와 행위자 사이에 거리를 조절하는 행위를 가리킨다. 


익숙하지 않은 길에서 자전거 타는 법을 익히는 과정을 예로 들어보자. 평탄하고 고른 길을 자전거로 달릴 경우, 핸들을 잡는 방식과 페달을 밟는 방식과 같은 자전 거 타기의 기능들은 매우 익숙하고 편안하여 크게 의식하고 애써야 하는 고려대상이 아니다. 그런데 요철을 넘어야 하는 상황처럼 새로운 상황에 놓일 경우, 핸들을 느슨 하게 잡기도 하고 세게 잡기도 하며, 페달을 천천히 혹은 빠르게 밟기도 하면서 적 절하게 조절해가야만 한다. 또한 브레이크를 잡음과 동시에 요철을 넘어가면 펼쳐질 평탄한 길을 예측하고 브레이크를 서서히 풀며 페달을 힘차게 밟는 다음 행위를 도 모하기도 한다. 여기서 자전거를 타는데 필요한 기술이란 상황적 도구들을 때론 어 떤 것은 상황에 가깝게 끌어오고, 때론 조금 멀리 둠으로써 상황에 적절하게 거리를 조절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또한 다음에 펼쳐질 상황과 이전에 일어난 상황들 가운 데서 다음에 필요한 기능들을 활용하기 용이하도록 도구들의 활용 방향을 예측하고 준비시키는 과정이기도 하다. 


한편, 여기서 방향을 잡는다는 것은 잔재주나 잔기술과 같은 변형된 행위를 의미 함과 동시에 도구 자체가 갖는 의미를 확장해나간다는 의미를 함축한다. 좌측과 우 측이라는 방향이 존재한다는 것은 정방향이라는 그것의 기준이 존재할 때에만 가능 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차이를 얼마만큼 알고 있는지는 결국 정방향이 어디인 지를 더 정확히 숙지하게 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그 대상에 변 형된 다양한 행위를 가한다는 것은 대상 자체에 가하는 힘이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사실은 그것을 둘러싼 맥락들을 조율하는 방식을 취한다. 이는 본인이 하고자 하는 일에 걸림돌이 되는 저항하는 요인들을 재배치하는 활동이기도 하다. 이 과정은 끊 임없이 모호함 속에서 해를 찾아가는 과정이기도 하여, 이 과정에서 겪는 실패의 경 험들은 다양한 상황에의 경험이며 맥락적 자원들을 활용해보는 교육적 경험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경험들은 모두 그 객체를 둘러싼 맥락의 정서를 풍부하게 해주는 의미들로 남게 된다. 시행착오의 과정에서 느낀 그 어떤 사소한 경험들도 의미 없는 순간은 없으며, 맥락적인 경험은 또 다른 실용적인 목적에 따라 동원될 수 있는 가 능성을 잠재한 자원으로 남는다. 


이러한 점에서 연습이란 완벽함에의 갈망 그리고 결코 성취될 수 없는 완벽함을 향한 긴장 가운데 수행되는 반복이자 동시에 부단히 쇄신하는 실천을 의미한다. 완 벽하지 못한 상태(imperfection)가 만들어내는 반복 연습과 변주는 그 상태로의 멈춤 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때로는 자기 안에서 새로운 스타일의 창출로 이끌기도 한다. 국 지식이나 기술을 숙달하기 위해 임하는 연습은 맥락 간 차이와 동일성을 반복 적으로 경험하는 상황학습이다.


3.3. 경험의 공유는 어떻게 맥락 참여에 의존하는가: 실천으로서의 시각화 사례


가구뿐만 아니라 직접 조립하여 사용하도록 판매하는 물건들의 경우, 제조사는 소비자들이 조립을 돕기 위한 조립도를 함께 제공하기 마련이다. 특히, 최근 인터넷 을 통한 정보의 공유방식이 대중화되면서 조립도 이외에도 직접 조립하는 과정을 사 진으로 보여주거나 동영상 자료들을 올리는 방식으로 조립의 과정이나 전략들에 대 한 정보를 공유하고 전달할 수 있는 방법이 다양해졌다. 이러한 자료들은 대체로 언 어로 전달하는 것에 어려움이 있는 정보들을 시각화(visualization) 함으로써 사용자 가 보다 용이하게 제작과정을 따라할 수 있도록 한다. 그렇다면 이러한 시각화 자료 들은 전달하고자 하는 지식이나 기술에 대한 정보를 얼마만큼 정확하고 풍부하게 제 공할 수 있을까? 다음은 조립식 가구로 유명한 I회사의 가구조립도이다. 




위와 같은 가구 조립도에서는 순서대로 따라 하기만 하면 완성된 형태의 가구 조립이 가능하다고 설명한다. 조립도와 실제 조립과정은 얼마나 서로 매칭될 수 있 을까? 분명 조립도는 언어의 정보전달력이 갖는 한계를 보완하고 좀 더 구체적인 정 보를 제공하고 있음에는 틀림없다. 각 단계의 그림은 과정상 필요한 조작의 방식을 가급적 시각화하여 전달하는 것에 목적을 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립도의 그림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이를 따라 하고자 하는 사용자에게는 항상 애매모호함이 뒤따른 다. 위 조립도에서 각 그림이 보여주는 화살표의 방향이나 나사의 조립순서는 분명 치 않다. 


실제 조립과정에서 조립도에 나와 있는 그림들은 실제로 대상과 그림을 견주어 보고, 행위를 가하고, 조율하는 방식을 통해서 그 의미를 찾아가는 실천이 동반되어 있을 때에만 비로소 그 의미가 성취된다. 예컨대, 물건을 다루는데 필요한 정교함이 나 힘의 강도, 나사를 조이는 방향이나 각도 등은 사실 그림의 표현된 화살표만으로 는 정보가 부족하다. 그리고 그것을 다루는 개인들의 조작능력의 차이나 신체적 조 건의 차이들도 그 정보를 활용하고 해석하는데 차이를 빚어낸다. 물론 이전 경험이 나 배경지식들 역시 조립도 그림을 파악하는 데 차이를 가져온다. 다시 말해서, 어떤 기술이나 경험을 담는 이러한 시각 자료는 그 자체로 어떠한 정보를 전달해주지는 못한다. 사실상 각 단계의 시각화된 정보는 각 단계에서 필요로 하는 정보의 일부를 보여줄 뿐, 그것이 어떤 의미를 갖는지는 순전히 사용자의 역량에 달려있다. 시각자 료를 통해 정보나 기술이 어떻게 전달되는지 이해하기 위해서는 사용자가 어떻게 실 제 상황에서 무엇을 하는지 면밀히 살펴보아야 한다. 


시각화 자료가 정보를 전달하는 데 제한적일 수밖에 없는 이유는 사람들은 통상 현상이나 대상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보지 않는다는 데에서 찾아볼 수 있다. 누군가가 무엇을 보는지는 그의 관점이나 의도 나아가 맥락에 따라 실용적으로 결정된다. 단 순하게 말하자면 사람들은 대상을 보고 싶은 대로 본다. 이러한 점에서 보면 시각화 자료가 이해나 경험의 변화로서 학습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친다는 것은 제한적인 범위 안에서 가능하다. 새로운 정보를 받아들인 학습의 결과 애초에 자신이 본 것과 는 다른 것을 보게 되기 위해서는 시지각의 작동만으로는 충분치 않다. 여기에는 자 신을 상황지우는 다른 지각행위가 동반되어야만 한다.


다음은 5세 어린아이가 새로운 글자를 배우는 상황에서 관찰한 내용이다.


<사례 2>

엄마 : (알파벳 'P'를 그리며) 이렇게 ‘1’을 쓰고.. 이렇게 ‘⊃’를 그리면 되는거야.

아이 : 알았어. 알았어. (‘1’을 그리고 거기에 ‘○’를 붙인 형태의 그림을 그린다)

엄마 : 아니, (‘1’을 그리고 우측 반원 형태의 모양을 반복적으로 그리면서) 이게 아니고 이거라고.

아이 : 알았다고. (다시 ‘1’을 그리고 거기에 ‘○’를 붙인 형태의 그림을 그린다.

엄마 그림과 비교하며 갸우뚱한 표정을 지으며 몇 개의 그림을 더 그려본다)

엄마 : 아니. 잘 봐. 동그라미까지 그리지 말고 여기서 멈추라고. 엄마 손잡아봐.(손을 잡고 ‘P'를 함께 그려준다.)

아이 : 아... 멈추라고? (다시 혼자서 반원을 주춤거리며 그려 보이며 엄마의 그림과 비교해본다)


위 상황은 본다는 것이 어떻게 대상을 있는 그대로 보기 보다는 자신에게 익숙 한 대로 이루어지는 일인지 잘 보여주는 예다. 위 상황에서 아이의 반응을 보면 아 이에게 알파벳 ‘P’는 기존에 자신에게 익숙한 숫자 ‘1’과 ‘동그라미’와의 조합으로 보 였을 것이라는 점을 유추해 볼 수 있다. ‘아마도’ 반원 형태의 표상을 한 번도 그려 본 적 없는 아이에게 그것은 인지하기조차 쉽지 않은 대상이다. 위 예에서 아이가 원으로 본 것을 반원으로 보기 시작하는 것은 엄마의 손에 안내를 받으며 자신의 손 으로 직접 반원을 그리면서부터다. 아이가 마침내 도달한 ‘P’의 형상은 이해를 바꿈 으로써 도달한 결과가 아니라 누군가와 호흡을 맞추며 직접 자신의 손을 움직여 차 이를 발견하는 실천의 산물이다. 즉, 손을 엄마와 함께 맞춰보면서 아이가 다른 것을 보게 된 것이다. 엄마와의 협력 행위가 어떻게 아이의 시각을 다르게 상황지우고 그 리고 이에 따라 아이가 다른 이해를 성취하게 되는지 잘 보여주는 예다. 이처럼 상 호작용의 행위는 주체와 객체 사이의 매 순간 적절한 이해의 가능성을 열어주는 마 중물을 제공한다. 


어떤 경험의 전달에는 시연뿐만 아니라 말이 관여하기도 한다. 말을 통한 경험의 전달은 일상 어디에서나 목격되는 가장 전형적인 예이다. 이 때 말은 경험의 내용을 전달하는 표상보다는 주의를 어디에 집중시켜야 할지 행위를 지시하거나 촉구하는 등 행위에 가깝다. 여기서 말은 추상적이고 문어체적인 원거리어(distant language) 보다는 구체적이고 대화체적이며 상황적인 근접어(proximal language) 속성을 띤다. 실천으로서 근접어를 사용하고 있다는 점을 잘 보여주는 대표적인 예는 맥락지시어 (indexicality)다. 맥락지시어의 활용은 우리의 사고와 행위가 얼마나 대상 맥락에 몰__ 입(immersion)되어 그와 구분하기 어렵게 전개되는지를 잘 보여주는 예다. 가장 간 단한 상황지시어는 ‘이’, ‘그’, ‘저’와 같은 형용사로 이러한 말들은 발화의 상황을 참 조해서만 그 의미를 알 수 있다. 상황학습의 문제의식 또한 학습에서 맥락지시어 문 제를 다루는 것으로부터 출발하였다. 


일상에서 맥락지시어와 같은 근접어의 사용은 매우 광범위하다. 화학 실험실의 한 상황에서 연구자가 조교에게 “이제 그 물 충분히 끓었어.”라고 말을 한 경우를 생 각해보자. 예컨대 이 말을 객관적인 표현으로 바꾸면 “한국 표준 시각 13시 57분 H2O가 섭씨 97.7도로 가열되었다.”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들의 생활공 간에서 혹은 일을 해 나가는 과정에서 실지로는 그러한 객관적인 표현은 사용하지는 않는다. 사람들은 구체적인 상황 안에 있는 사람들이라면 이미 맥락지시적인 표현으 로 충분히 의미를 통용할 수 있다는 점을 알고 있다. 맥락지시적인 표현들은 실제 상황에서 오히려 정확하고 객관적인 표현의 사용보다 안정성과 실용성을 보장해 준 다. 예컨대, 사람들은 일의 진행을 잠시 멈추고 맥락지시적인 표현들에 대해 객관적 으로 풀어 설명하거나 이것이 상대방에게 전달되었는지 확인하고 다시 진행되던 일 로 돌아오는 방식을 취하지 않는다. 만약 그런 방식으로 사람들이 말을 해야 한다면 매 상황 하고자 하는 일이나 나누고자 하는 대화는 매끄럽게 전개되지 못할 것이다. 또한 참여자들 사이에 맥락을 서로 공유했다고 당연시하고 따라서 근접어를 자유자 재로 사용하게 되면 다루고자 하는 대상에 집중하게 되는 주의의 초점이 좀 더 분명 해질 수 있다. 


구체적인 삶에 더욱 가까운 말이 구사되었을 때 그 말은 활성화된 기능을 갖게 되면서, 즉 더욱 상황에 대한 조작 가능성이 커지면서 하고자 하는 일을 성공적으로 이끈다. 즉, 삶에 더 가까운 언어가 공유된 지식이나 공감을 이끌어낼 수 있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삶에 가까운 언어의 사용은 일의 흐름을 훨씬 더 원활하게 한다. 이 를 두고 세넷(Sennett, 2008)의 말을 빌려 표현하면, “표현 자체가 중요한 게 아니라 그렇게 상상을 동원하는 행위가 어떤 목적에 쓰이느냐 하는 것”이 중요하다(p. 309). 


세넷(Sennett, 2008)은 그의 저서 ‘장인’에서 손재주와 같은 기술의 숙달에 관해 상세히 설명하였다. 경험의 전달에서 근접어의 사용이 학습자로 하여금 어떻게 공감 을 불러일으키는지 세넷의 예를 좀 더 길게 인용해보겠다. 


은유와 같은 근접어, 삶에 가까운 말, 즉 상황지시적인 말들이 유사한 것을 동일 시하게 한다는 힘으로서의 상상력을 어떻게 유발시키는지(Lakoff & Johnson, 1980), 세넷(Sennett)은 자신의 경험을 예로 들어 설명한 바 있다. 고참을 따라 무심코 따라 하면서 배우는 행위에는 자신의 행위와 고참의 행위를 동일시시키는 상상력의 언어 가 동원된다는 것이다. 한 예가 유럽에서 건너온 영어에 서툰 할머니가 그녀의 전통 적인 요리법을 전달하고 그가 따라하는 상황에 관한 자신의 경험 이야기다. 그의 설 명은 조리법에 관한 정확한 서술(예컨대, 들어가는 양념의 양을 나타내는 수치, 몇 도의 불에 그 고기를 익히는 정도를 정확히 표현한 서술)보다 은유적인 표현들로 제 시된 닭요리 레시피가 이를 따라 요리를 배우는 참여자로 하여금 어떻게 상상을 일 으키고 따라서 좀 더 정확히 그 기술을 전달하는지 보여준다. 


“네 아이가 여기 죽어 있다[닭을 가리킴], 그 아이를 새 생명으로 준비시킨다 [뼈를 발라냄], 흙으로 그를 채운다[재료를 채워넣음], 조심하라! 그 아이가 너 무 많이 먹으면 안된다[재료를 가볍게 넣음], 금빛 외투를 입힌다[익히기 전 노 릇하게 그을림], 목욕을 시킨다[삶을 국물을 준비함]. 이제 아이를 데우는데, 주 의해야 한다! 어린아이는 햇볕을 너무 많이 쐬면 죽는다[가열온도는 섭씨 130 도]. 아이에게 보석을 달아준다[조리가 끝나면 부드러운 후추소스를 뿌림]. 이게 내 조리법이다.”(Sennett, 2008, 김홍식 역, p. 308) 


위 인용에서 보면 할머니의 요리 레시피는 비유와 그 비유가 지시하고자 하는 객관적인 표현([ ]안)으로 되어 있다. 세넷은 객관적이고 정확한 전달방식보다 비유 와 같은 근접어가 어떻게 경험을 더 정확히 전달할 수 있는지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공감하는 방식으로 이야기를 구성하다보면 비유가 많이 동원된다. 여기서의 비유는 정확한 비유가 아닌 느슨한 비유다. 비유가 느슨한 데는 이유가 있다. 닭의 힘줄을 자르는 것은 기술적으로 끈을 자르는 것과 비슷한데, 그렇다고 느 낌이 아주 비슷한 것도 아니다. 이렇게 느슨한 비유를 쓰면, 읽는 이들에게 배 움의 순간을 열어준다. ‘똑같다’가 아닌 ‘비슷하다’고 하면, 힘줄을 자르는 바로 그 행위에 신경을 집중하도록 유도한다. 조리할 사람의 손과 뇌가 활발히 교류 할 장이 열린다. 느슨한 비유는 정서적인 작용도 해서, 무슨 동작이나 행동을 처음으로 접하는 사람이 전에 해봤던 것과 비슷하다는 말을 들으면 자신감이 생긴다(Sennett, 2008, 김홍식 역, pp. 299).  


무엇인가를 설명할 때 대상을 추상적인 것으로 두는 것이 아니라 대상을 보고자 하는 것으로 보는 상상의 맥락을 조정한다. 일단 현상학적 장이 ‘만들어지면’ 상상이 가능해지고 결국 그에 따라 과정 전체를 볼 수 있게 된다. 즉 맥락을 공유가능하게 만들어 상상을 돕는다. 이렇게 근접어의 사용은 과정의 전체상을 먼저 상상하고 실 천을 행하는 순서는 참여자가 목표해야하는 것이나 앞으로 나아갈 과정을 미리 알게 하여, 실제로 행하게 되는 과정 속에서 목표지향적인 실천적 참여를 이끌어낼 수 있 다. 


처음 해보는 일에 대해 기존의 방법과 ‘똑같이’ 잘해야 한다고 생각하면 나의 행 위를 바라보고 있는 지시자의 눈치를 보게 되고 알 수 없는 기준에만 신경을 쓰게 된다. 결국 행위자가 처음 해보는 행위 그 자체에 집중하지 못하고 다른 외부적, 내 부적 상황에 신경을 쓰게 되고 일을 망치게 된다. 하지만 느슨한 비유를 통해 행위 자의 이전 경험과 연관을 시켜주면 그에 대해서 동일성을 느끼고 정서적으로 이전에 해봤다는 자신감을 가지고 불확실한 결과보다는 행위 그 자체에 집중을 할 수 있게 된다. 이를 느슨한 비유를 통해 처음 해보는 일에 대해 망설이게 되는 사고를 경험 적 동일성의 사고로 바꾸어주며 동시에 행위 그 자체로 집중을 이끌었다는 점에서 사고와 행위의 극간을 해소했다고 표현했다. 


활동이론(activity theory)에 따르면, 이야기는 하나의 사물과 같이 우리 행위의 대상이 된다. 이야기 또는 말도 하나의 객체이며 사물의 대상이 된다는 것이다. 말이 전유화 되기 이전에는 언어적 기능인 의미에 초점이 맞추어지곤 하는데, 전유화가 되고 난 후부터는 말도 사물처럼 객체화되어 사용된다는 것이다. 여기서 말 자체는 일을 가능하게 해주는 매개물이기도 하며 말 자체가 일이기도 하다. 또한 일을 하는 사람 사이에서 말은 목표에 어떻게 도달할 것인가를 위해서만 쓰이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정체성도 만들어 내며, 행위를 이끌거나 배제시키는 장치도 만들어 낸다. 여 기서 이러한 동의를 이끌어낼 수 있는 사물 장치(affordance)는 말이다. 


다음은 소크라테스와 사동이 서로 문답하는 방식으로 피타고라스 정리의 원리에 관해 가르치고 배우는 상황의 한 장면이다.


b40 소크라테스 : 이제 이 구석과 이 구석을 연결하는 선분을 그어 보자. 이러한 선분은 이들 각 정사각형을 반으로 쪼개겠지?

사동 : 예.

b41 소크라테스 : 이러한 선분을 4개 그으면 사각형이 하나(BEHD)생기겠지?

사동 : 그렇습니다.

b42 소크라테스 : 새로 생긴 이 사각형의 넓이는 얼마이겠니, 생각해 보렴.

사동 : 잘 모르겠습니다.

b43 소크라테스 : 정사각형이 4개 있었지. 각 선분은 각 정사각형을 반으로 쪼갰지?

사동 : 예.

(중략)

b49 소크라테스 : 이 4자 넓이 정사각형의 구석 이쪽에서 저쪽으로 그은 선말이냐?

사동 : 예.

b50 소크라테스 : 이러한 선분을 학자들은 ‘대각선’이라고 부르는데, 이 용어를사용하기로 하면, 이 대각선을 한 변으로 하는 정사각형이 처음 정사각형의 두 배가 된다는 것이 너의 생각이란 말이지?

사동 : 그렇습니다, 소크라테스. (강완, 1996에서 발췌)


위 대화에서 ‘이 구석과 이 구석을’, ‘정사각형을 반으로 쪼개겠지’, ‘이러한 반 조 각들이’, ‘정사각형의 구석 이쪽에서 저쪽으로’, ‘그 한 변은?-이것(DB)입니다’의 말들 은 한편으로 보면 수학적 원리에 관한 설명을 담고 있다. 다른 한편으로 이러한 설 명은 도형을 지시하거나 도형을 분할하는 가운데 병행되며 최소한의 지식에 익숙한 사람이라면 볼 수 있는 매우 상식적인 의미들로 구성된다. 즉, 교수자에 의해 유도된 지각의 구조에 따라 보고 확인하고 듣고 말하는 만큼 그 과정은 일상적이며 비매개 적 행위로 진행된다(조현영·손민호, 2015).


여기서 교수자가 말을 통해 상황을 시지각화하는 실제적인 전략을 참여적 전유 (participatory appropriation)로 개념화해볼 수 있다. 참여적 전유는 맥락에 참여함으 로써만 다루고자 하는 지식이 이해되고 활용되게 된다는 점에서 지식을 내면화함으 로써 그것을 다룰 수 있게 된다는 ‘내면화’(internalization)의 논리와는 상반된 의미를 담고 있다. 그것은 현장에서 다루는 정보들이나 지식들이 그 현장에 임베디드되어 있는 상황적인 말과 표현들(indexicality)들로 드러나기 때문에 그 맥락에의 참여를 통해 그 의미를 이야기할 수밖에 없다는 의미이기도 하다(Hall & Nemirovsky, 2012). 


지식을 전달하기 위해 동원된 이러한 전략들은 대개 말에 의해 구사된다는 점에서 담화적 실천(discursive practice)이라 할 수 있다. 담화적 실천이란 말이 표상의 역할 보다는 어떤 행위를 촉구하거나 지시하고 견제 조정하는 역할을 수행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수행적인 발화(performative utterance)의 기능은 ‘무엇을 중요한 것으로 보 아야 하는지’, ‘다음번에 비슷한 경우가 생겼을 때 무엇을 명심하면서 어떻게 동일시해 야 하는지’ 등의 수행적인 의미를 암묵적으로 전달해 준다. 


실천행위로서 말의 이러한 기능을 염두에 둔다면 위 예에서 지식이 전달되는 기 제는 시각화된 자료의 활용도, 지식을 전달해주는 말도 아닌 교수자와 학습자간에 질문과 대답을 주고받는 과정에서 유발된 지각의 구조화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교 수자의 말 하나 하나는 상황에의 지표 또는 지각행위에의 지시로 작용해 그 의미는 사용자 사이에서 너무도 자명해서 누구라도 접근 가능(learnable)한 일상의 통용어와 크게 다르지 않다. 어느 누구도 위 도형을 있는 그대로의 형상, 즉 객관적으로 볼 리 가 만무하며, 교사의 지시에 따라 돌출되어 지각되는 부분만을 선별적으로 구조화해 볼 것이다. 즉 학습자는 맥락적으로 지각을 이끄는 행위 유도의 상태, 즉 시청각의 상황 안에서 기대되는 것만을 보고 듣는 것이다. 


시각 자료를 통한 경험의 전달이 어떻게 상황학습, 즉 실천에 의한 학습 또는 공 유인지에 관해서 한 가지 예를 더 들어보겠다. 

    • 굿윈(Goodwin, 1994)은 고고학자들이 무에서 유를 어떻게 성립시켜 나가는지 그들의 작업을 미시적으로 분석한 바 있다. 고고학자들은 일반 사람 눈에는 절대 보이기 어렵다는 점에서 '맨땅'에서 뭔가를 발 견하여 선사의 유물과 자취를 찾아낸다. 마치 발견자의 실천이 관여될 여지조차 없 을 정도로 명명백백 취하는 경우 발견의 과정이지만 그 과정을 보면 그냥 발견이라 고 하기가 어려울 정도로 해석과 일 등 전문가들의 실천이 관여되는 작업의 과정이 다. 실제 객체로 놓여져 있는 사물이나 자취에 대한 발견이지만 전문가의 실천에 의 해 재'구성'되는 만큼만 실재화되는 작업이다. 그의 분석은 전문가의 시지각이 실제 적인 전략들을 통해 어떻게 대상을 운용가능 한 상태로 구성해내는가를 보여준다. 특히 그는 맥락을 공유가능하게 시각화하는 다음과 같은 실제적인 전략들에 관해 주 목한다. 


첫째, 코딩행위로서, 현상을 지식의 객체로 변환시키는 전략이다. 

둘째, 하이라이트하는 행위로서, 특정 측면들만을 부각시킴으로써 상황을 의도하 는 현상학적 장으로 전환되도록 하는 전략이다. 

셋째, 사물을 표상화시키는 전략인데, 이는 사물을 그 자체로 지식으로 지각하게 끔 표상화시켜 다루는 것을 말한다.2) 


이러한 전략들은 사물을 그 자체로 지식으로 지각하게끔 표상화시켜 조작할 수 있게 만드는 실천들이다. 이러한 전략들은 어떤 일을 해나가는 데 있어서 어디서나 흔히 사용되는 방법이다. 그것들은 지식을 자유자재로 부리기 위해 객체화하고 객체 화된 대상을 다루는 행위에 대해 작용할 수 있는 조건을 마련해주는 실제적인 전략 이라고 이해해도 무방할 것이다. 이러한 전략들이 지식이나 경험을 전달할 수 있도 록 해주는 것은 그것이 갖는 시각적 기능이 아닌 수행적(performative) 기능으로 인 해서다. 위와 같은 점에서 시각자료가 제 기능을 갖게 되는 것은 사물과 담화적 속 성에 기반해 있을 수밖에 없는 맥락적 실천을 통해서다.


4. 나가는 말


전통적인 학습연구에서는 맥락 변인들을 텍스트를 얻기 위한 주변적인 요인이라 고 간주하고 이를 체계적으로 배제시키고자 하였다. 

  • 행동주의 학습이론으로 잘 알려 진 파블로프 실험실에서 조건적 반사라는 일반화된 원리를 도출해내기 위해 실험을 둘러싼 일상에서 벌어진 것들은 어떻게 상황적인 변수들로 배제되었는지 상상해 볼 수 있다. 종을 울리면 ‘나오도록 되어 있는’ 실험실 개에서 나오는 타액의 양은 실제 연구실의 일상에서는 다양한 예기치 못한 변수로 인해 개의 컨디션, 실험 당시의 상 황 등이 지속적으로 관리될 필요가 있었다. 

  • 인지주의 학습이론으로 잘 알려진 피아 제의 보존실험에서 피실험자인 아이는 실험자의 유도된 질문에 맞춰 ‘적절하게’ 반응 을 보이기도 하였는데 그것은 연구 가설과는 연관 없는 주변적인 상황 변수로 처리 되었다. 


행동주의나 인지주의 패러다임에서 보면 조건적 반사 그리고 보존 개념의 획득 여부는 학습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열쇠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 실험실의 일상 과 그 안에서의 실천이 그들이 자신들이 해야 할 일들을 어떻게 하고 있는지에 어떻 게 작용하고 있는지 또한 학습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열쇠일 수 있다. 유기체 또는 개인의 머릿속을 향해 있던 우리 관찰의 프레임을 그 외부의 맥락으로 돌려보면, 연 구실에서 지식의 생산에는 에이전트와 이에 관여하는 네트워크, 즉 연구실의 장치들 이를 조작하는 연구자의 노하우 그리고 이를 아우르는 일상이 은밀하게 관여하고 있 다는 점을 발견할 수 있다. 상황학습에 관한 관심은 당연시된(taken for granted) 상 황에 대한 이해를 바꾸는 데에서 출발한다. 


교육연구에서 상황주의 패러다임은 교육인류학적인 관심과 문제의식에서 촉발되 었다. 전통적으로 인지심리학을 기반으로 했던 학습 또는 학습자 환경의 디자인 영 역에서도 학습자 맥락에 대한 질적인 이해에 관심을 두기 시작하였다(Abrahamson, 2009; Kirsh, 2013; Nishizaka, 2006; Pea, 1997). 학습자의 경험을 이해하기 위해서 교수자의 관점에서 탈피하여 질적연구에서의 참여자 관점처럼 학습자 당사자의 관점 을 도입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학습자의 실제 경험을 탐색하기 위해 맥락적인 연 구방법을 활용하기 시작하였다. 상황주의 학습에 관한 이해와 설계는 우리 경험의 맥락성 그리고 삶 안에서의 실천에 관한 좀 더 풍부한 이해를 요구한다. 


상황주의 패러다임에서 보면 경험과 학습이 성립되는 포인트는 텍스트에 있지 않고 사태의 전후관계, 즉 맥락에 있다. 우리가 어떤 일을 성취할 수 있는 것은 그 일에 동원되는 지식이 아닌 일의 선후관계 속에서 ‘다음’을 찾아나가는 ‘늘 현재’의 상황적인 추론 때문이다. 그러한 상황은 눈 깜빡할 사이에 지나치는 순간이지만 두 툼한 의미(thick description)로 되어 있다는 말이다. 어떤 일을 함에 있어서 일의 전 개도가 실제 경험의 과정을 잘 보여줄 것이라고 보는 것은 당사자의 관점이 고려되 지 않은 제3자적 관점에서 비롯된 생각이다. 당사자 즉 참여자 관점에서 보면 맥락 이란 현재와 다음이라는 상황의 연속적인 반복이다. 상황학습론은 일상의 실천에 있 어서 디테일한 부분들에 관해서 어떻게 미시적인 이해를 꾀할 것인가 앞으로의 탐구 과제를 제시해주고 있다.





교육인류학연구

2017, 20(1), pp. 25-58


맥락이 우리가 무엇을 어떻게 경험하고 학습하는가에 내재적으로 관여되어 있다는

점은 상황학습론을 통해 꾸준히 이야기되어 왔다. 교육학에서 상황주의 패러다임으

로의 전환은 교육인류학적인 문제의식에서 촉발되어 새로운 학습과학을 비롯한 학습

환경의 디자인 등에 이르기까지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치고 있다. 본고에서는 교육에

서 맥락성의 회복은 경험의 상황에 대한 미시적인 이해가 뒷받침되어야 한다는 점을

짚어보고자 하였다. 즉, 발달과 학습이 일상적으로 편재한 생성적인 경험이라면 여기

에는 실제 경험에 대한 미시적이고 디테일한 분석이 요구된다. 이를 위한 한 가지

방법으로 본고에서는 경험의 과정을 사회적 실천 행위로 관찰, 해석하고자 하였다.

본고에서는 두 가지 전제, 즉 도구가 어떻게 상황으로 분산되어 우리의 참여적 전

유에 의해 비가시화되는지, 그리고 상황은 시간의 흐름에 따라 어떻게 다음 상황을

구조화하여 우리의 실천행위를 이끄는지 살펴보았다. 그리고 이에 터하여 경험 또는

암묵지가 어떻게 맥락적 실천의 일환으로 학습되는지 타자와의 상호작용, 개인의 연

습 그리고 시각자료의 활용 등의 사례를 통해 이해해 보고자 하였다. 경험의 학습

특히 암묵지에 관한 질적인 관찰과 분석을 어떻게 할 것인가 라는 문제의식의 일환

으로 정리하였다.

주요어: 실천, 상황학습, 실천공동체, 도구의 비가시성, 시각화, 암묵지, 경험


【Abstract】

How Experience is to be Situationally Learned?

Cho, Hyun-Young

Assistant professor, Inha University

Shon, Min-Ho

Professor, Inha University

The objective of this study is to outline the situated approach to learning, and to

explain how it contributes to our understanding of learning, and propose and

exemplify how this understanding informs the design of learning environments.

Analysis of how cognition makes use of phenomena distributed in everyday settings

and what theories it has contributed to situated learning.

This article investigates the discursive and material practices used by members of

a profession to shape events in the domain of professional scrutiny they focus their

attention to. The shaping process creates the objects of knowledge that become the

masterfulness of a professional work: knowledge, artifacts and bodies of expertise

that are competency in the communities of practice. Analysis of the methods used by

members of a community to build the work that structure their lifeworld contributes to

the development of a practice-based theory of learning. Demonstration of how

cognition is not located in the mind of a single individual, but instead embedded

within distributed systems including socially differentiated actors, and external

representations embodied in tools.

We argue that all cognition is grounded in bodily experience. Specifically, we

demonstrated case analyses that experience, including conceptual understandings, are

grounded in bodily experience. And if so, learning environments can be made more

effective if they are designed to attune to bodily know-how. Accordingly, instructional

design is committed to the hypothesis that the temporal sequence of situation could

be organized in terms of minimalism.

Key Words: practice, situated learning, communities of practice, visualization, tacit

knowledge, experien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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