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양근대의학의 의학론
권복규* (* 가천의대 인문사회의학교실)
1 들어가는 말
서양의 근대의학(Western Modern MedicineWMM)은 우리 시대를 지배하고 있는 주류(orthodox) 의학체계이다 필자는 여기서 서양 을 유럽과 북아메리카 대륙을 주로 의미하는 용어로 근대(modern) 를 18세기 이후부터오늘날까지를 포괄적으로 지칭하는 용어로 사용한다 하필 왜 18세기인가? 다시 언급되겠지만 이 글에서는 모르가니(Morgani G B1682-1781)의 질병의 자리와 원인에 대하여(De Sedibus et Causis Morborum) 를 기준으로삼는다 1761년에 발간된 이 책은 갈레노스 의학이 지배했던 이전 시대1)와 새로운 병리학에 기초한 실증의학이 지배하는 이후 시대의 경계선상에 가로놓여 있다 철학자 푸코는 이를 다음과 같이 표현하였다
해부-임상적 방법론이라 알려진 이것은 실증성(Positive)이 부여되고 그렇게 받아들여진 의학의 역사적 조건을 구성하였다 여기서 실증성은 매우 강한 의미로 받아들여져야 한다 질병은 오랫동안 그와 결부되었던 악(evil)이라는형이상학적 존재로부터 벗어났다 그리고 죽음이라는 가시성 안에서 실증적인 용어로 그 내용이 완전히 드러날 수 있는 완전한 형태를 발견하였다 2)
서양근대의학은 실증적(positive)인 의학이며과학적이고 분석적인 의학이다 이 의학은 인간을 신체(body) 로 국한시키고 모든 질병을신체화(somatization)시키는 의학이다 물론 18세기 이후의 서양의학사는 많은 다양한 모습을보여준다 특히나 신체에 변화를 가져오는 질병의 원인과 관련해서 다양한 이론이 제기되었고 생명의 근본 원리에 대해서 형이상학적인사고가 여전히 남아있기도 하였다 예컨대 질병의 원인으로서의 장기설(miasma theory)는 세균설이 확립된 19세기 후반까지 명맥을 유지하였고 무생물과 생물을 구별하는 근본 원리로서의 생기론(vitalism)은 유전정보 이론이 등장한 20세기 중엽까지도 생명력을 잃지 않았다어떤 면에서는 21세기에 접어든 오늘날에도 생명과 질병에 대한 비분석적 종합적 형이상학적 신비적 사고들은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고오히려 대체·보완의학(alternative complimentarymedicine) 등의 이름으로 의학의 영역 안에파고 들어오는 경향 역시 있음을 부정할 수는없다 그러나 우리가 서양근대의학이라는 이름으로 지칭하는 일단의 의학체계(a medical system)은 과학적 분석적 사고에 기반을 둔 실증적 의학으로 앞으로도 당분간은 그 본질적인성격에 변화가 없을 것이다
근대의학의 이러한 과학적 성격은 소위 <실험의학(laboratory medicine)>에서 잘 드러난다이것은 의학의 중심이 환자를 만나는 진료실로부터 환자로부터 얻은 각종 정보를 분석하고이를 이미 알려진 과학 지식의 틀에서 해석하는 실험실로 옮겨갔음을 의미한다 즉 의학은더 이상 환자의 몸 생활 환경 정신 행동등을 파악하고 해석하는 지식 혹은 기예가 아니라 해부학 생리학 생화학과 같은 기초과학의 응용 혹은 확장으로 여겨지게 되었다 이를 여실히 보여주는 것이 베르나르(Bernard C1813-1878)의 실험 의학 연구방법론 서설(Introductione l'étude de la medécine expérimentale1865) 이다 그는 이 책에서 의학은실험생리학(experimental physiology)위에 정초하여야 하며 물리학과 화학이 이 실험생리학의기초가 되어야 한다고 썼다 아울러 생기(vital force) 개념을 부정하고 생물학에 있어서의 과학적 결정론을 옹호하였으며 실험생리학을 위해서는 동물의 생체해부가 필수적이라고 주장하였다 3) 당시 주류 의학이 이러한 사상을 쉽게 받아들인 것은 아니었지만 의학에서기초과학의 중요성은 피할 수 없는 대세가 되어 20세기 초까지는 확실하게 자리를 잡게 되었다
다만 근대 정신의학은 이러한 흐름에서 약간벗어나 발전하였다 특히 프로이드(Freud S1856-1936)는 정신병은 객관적 이론만으로 치료되는 것이 아니고 경험을 통한 주관적 직관으로 더 잘 이해될 수 있으며 의식의 심층에자리잡은 무의식이 정신장애를 일으킬 수 있다는 주장을 하여 객관적인 정신병리의 기술에치중했던 당시의 정신의학계에 커다란 반향을불러일으켰다 4) 프로이드의 이론은 호나이(Horney K 1885-1952) 설리반(Sullivan HS1892-1949)등에 의해 계승되었으며 융(Jung CG 1875-1962)과 아들러(Adler A 1870-1937)등은 프로이드와는 구별되는 고유한 이론을 제시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제2차 세계대전 이후정신약물학이 발전하고 컴퓨터와 뇌과학 뇌생리학 등의 발전으로 정신 심리현상을 이해하는 데 이를 응용하고자 하는 압력이 커지면서 정신의학 역시 분석적이고 환원론적인 방향으로 나아가는 경향이 있다 만약 정신의학까지도 유물론적이고 실증적 분석적 논의가 지배하게 된다면 모든 신체 질병-건강 현상을 육체의 기능으로 환원하고자 하는 서양근대의학의 기도가 정점에 도달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의학이 과연 바람직한 의학인지에 대해서는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다음 장에서는 서양근대의학의 구체적인 양상을질병 진단과 치유 의사로 나누어 설명하도록할 것이다
2 질병
서양근대의학은 질병 을 인간이라는 유기체가 겪는 특정한 구조·기능적인 이상(abnormality) 으로 인식한다 이 이상 은 그질병을 가진 환자의 속성과는 무관하게 자기들의 고유한 존재양식(mode of existence)을 가진 실체(entity)로 여겨진다 이는 동양의학의전통 혹은 근대 이전의 서양의 질병관과는판이하게 다른 것이다 이 질병의 실체성을잘 보여주는 것이 국제질병분류표(InternationalClassification of Diseases)이다 현재 10판까지출간된 이 질병분류표는 인간의 질병을 대략 6만여 개 정도로 분류해 놓고 있다 5)
이상(異常) 의 질병관은 언제나 정상(定常) 을 그 전제로 한다 정상을 규정하기 위해서는 표준 모델이 있어야 한다 서양근대의학에서의 표준 모델은 <정상 인체>이며 해부학도보에 등장하는 혹은 생리학 교과서에 등장하는 인체의 구조와 기능이 이 표준 모델이 된다 사실 인체와 같은 수시로 변화하는 유기체에서 무엇이 <정상>인가를 규정하기란 쉬운일이 아니다 서양근대의학에서는 건강한 성인남성의 육체를 표준 모델로 인식한다 여성어린이 노인은 모두 이 표준 모델의 변형(variation)으로 간주된다 그러나 이러한 <정상>에 대한 인식이 타당한가에 대해서는 의문의여지가 남는다
어쨌든 환자가 호소하는 모든 종류의 증상(symptom)과 증후(sign)는 그의 육체의 구조적기능적인 이상과 연결되어야만 한다 역으로구조적 기능적 이상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그의 증상이나 증후는 가상적인 것 혹은 심리적인 것으로 경시된다 증상이나 증후가 존재하지 않더라도 어떠한 구조적 기능적 이상이 발견된다면 질병 그 자체 혹은 잠재적 질병으로서 의사의 주목을 받게 된다 이는 통상환자가 이해하는 질병 경험 즉 아픔이나 고통과는 거리가 먼 경험이다 이를 그림으로 표시하면 <그림 1>과 같다
<그림 1>의 A영역은 구조 기능적 이상의영역이다 정상 과 어긋나지만 아무런 문제가 없는 변이들 즉 우심증(dextro-cardia)등의선천성 기형은 질병 영역(B영역)에는 들어가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C영역은 환자가 호소하는 증상이나 증후의 영역인 바 여기서도 구조 기능적 이상과 겹치지 않는 부분은 원인불명의 증상이나 기능적 증상 혹은 심리적인 원인으로 간주되는 것이다 이 영역의 경계는 매우 유동적이다 즉 이상 의 인식은 무엇을 이상으로 인식하며 또 인식할 수 있는가 하는질병인식론과 진단 및 치료 기술에 달려있다이전에 심리적 문제로만 여겨졌던 질병이 새로운 진단법이 발견되면서 구조적 문제로 여겨질수도 있고 질병으로 간주되지 않았던 이상 이교정할 수 있는 치료법이 등장하면서 질병의영역으로 들어오게 될 수도 있다
정상과 이상을 판정하는 데 흔히 사용되는방법은 정규분포표에 따라 어떠한 현상을 배치하고 그 90% 혹은 95% 내에 드는 것을 정상으로 그 나머지를 비정상으로 보는 것이다이런 접근 방법은 생물 통계학 이론(BiostatisticalTheory BST) 이라 불리며 다음과같이 정의된다
- 1) 모집단은 단일 기능하는유기체의 자연적인 집단이다 특히 종의 특정성별 연령 그룹이다
- 2) 정상기능(normalfunction)은 개체의 생존과 번식을 위해 모집단 내에서 통계적으로 일어나는 전형적인 과정이다
- 3) 질병은 전형적인 효율성 이하로정상 기능이 떨어지든지 외부 인자로 인해 기능할 수 있는 능력에 제한을 받은 것이다
- 4)건강은 질병이 없는 상태이다 7)
이러한 시각이 원칙적으로 서양근대의학질병관의 기초이지만 질병원인 에 따라 그리고 진단과 치료상의 편의 등으로 말미암아질병의 종류는 다르게 된다 질병 원인(etiologic agent)은 그 종류와 수가 매우 많은데 방사선 열 외력(外力)과 같은 물리적 원인 산이나 약물 등 각종 화학물질에 의한 화학적 원인 그리고 바이러스 세균 기생충등과 같은 생물학적 원인이 여기에 해당된다염색체 혹은 유전자의 이상 역시 중요한 원인이다 중증 근무력증(myasthenia gravis)처럼아직 원인이 완전히 밝혀지지 않은 경우에는외견상의 특징적인 증상으로 명명할 수도 있으나 분자생물학과 유전학의 발달로 원인이 알려진다면 달리 명명·분류될 가능성이 있다
실제로 질병의 명명과 분류는 매우 역동적이고 복합적인 현상이다 예컨대 B형간염바이러스(HBV)의 급성감염에 의한 간염과 그에 대한 몸의 반응의 결과인 간경화는 원인은 동일 하나 전혀 다른 병으로 취급되며 진단과 치료가 모두 다르다 따라서 질병의 명명과 분류는 다음 요소들의 상호작용에 의해 결정된다1)원인 2)병리소견 3)증상 및 자연사 4)치료 5)예후가 그것이다 그 대표적인 예가 백혈병(leukemia)의 분류이다 급성림프성백혈병의 표준 분류는 1976년 FAB분류에 의해 L1 L2L3로 형태학적으로 분류되지만 예후 및 치료법에 관계되어서는 B pre-B T null 등의 분류가 최근에 많이 사용되고 있다 염색체검사결과에 따른 분류 역시 시도되고 있다 즉 형태학적으로 서로 구분된다고 해도 치료 및 예후인자가 다르게 되면 서로 다른 유형으로 분류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렇지만 백혈병 역시 정상백혈구와는 다른종양세포들이 혈액 속에 나타난다는 점에서는일종의 이상으로 간주될 수 있다 물론 이러한현상이 백혈병의 흔한 증상 즉 발열 피곤쇠약 체중감소 출혈 그리고 중추신경계침범증상과 어떻게 연계되는가는 백혈병의 병태생리학(pathophysiology)에 의한 여러 단계의 복잡한 해석을 통해 설명된다 서양근대의학은정교한 인체의 구조와 기능에 대한 지식체계속에서 이러한 병태 해석을 할 수 있다는 독보적인 장점을 가지고 있다
3 진단과 치유
서양근대의학에서 진단의 목적은 <이상>의여부를 파악하고 그런 것이 있다면 이미 알려진 질병의 체계 속에 이를 끼워 맞추는 것이다 환자가 호소하는 증상이나 증후는 몸의특정 부위 혹은 특정 기능의 이상과 결부되어야 한다 대부분의 내과적인 문제들은 몸 안의장기와 관련이 있다고 여겨진다 따라서 환자의 몸 속 상태를 들여다보는 것이 중요한 의미를 가지며 의사들은 가급적 환자의 내부 장기의 상태를 파악하고자 애쓴다
서양근대의학의 진단 체계에서 장기별 접근은 여전히 선호된다 순환기학 호흡기학 소화기학 신장학과 같은 기관 혹은 기관계별교육 그리고 분과전문의의 전문과목 구분에서도 그러한 시각은 그대로 드러난다 환자는온 몸으로 고통을 겪지만 의사는 그 고통을 계량하고 분절화해서 특정 장기에 배치하려 노력한다 이 과정에서 인간의 고통은 신체화되고육체의 이상으로 환원된다
이 체계에서 의사가 가장 의지하는 감각은시각 이다 환자의 호소(complain)와 병력(disease history)는 매우 의미가 있기는 해도 오류와 거짓의 가능성이 항상 있는 불확실한 영역이다 의사는 환자를 만져보고 두드려보고주물러보아 어떤 정보를 얻을 수는 있지만 가장 확실한 방법은 눈으로 보는 것이다 시각정보는 오류가 가장 적고 또 객관화 시켜서다른 동료들과 공유할 수 있다
19세기 말 뢴트겐이 X선이 의학적 용도로쓰일 수 있음을 발견하면서 의학에는 새로운시대가 열렸다 만약 의사들이 몸 속을 정확하게 눈으로 볼 수 있다면 타진법이나 촉진 청진과 같은 진단법은 부차적인 것으로 취급될것이다 초음파장비와 CT MRI PET가 등장한 21세기 초반 이는 현실로 드러났다 하지만시각적으로 판별되는 이상(병변)을 병인과 연결시키기 위해서는 다음 몇 가지 사항을 고려해야 한다
- 1) 많은 증상은 가시적인 병변이생기기 전에도 일어나며 어떤 증상은 가시적인병변과 무관하다
- 2) 진단 기계의 신뢰성과 오차 가능성으로 인해 가시적인 병변이 있는데도보이지 않을 가능성이 있다
- 3) 우연히 발견된병변은 환자가 호소하는 증상과 실제로는 관련이 없을 수도 있다 이는 시각적인 이상을 발견하기 위한 검사뿐만 아니라 다른 검사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또 하나 의사들이 신뢰하는 것은 객관화된수치이다 각종 검사 기록은 특정한 숫자로 표시된다 그 장점은 계량과 통계가 가능하고 역시 다른 사람과 공유할 수 있다는 것이다 얻어진 수치는 마땅히 기대되는 정상 수치와 비교되며 환자가 보이는 여러 증상과 상태의 맥락 속에서 해석된다 때로는 검사 결과 자체가진단이 되는 경우도 있는데 다른 원인이 없는원발성 고혈압과 같은 경우이다 이 질환의 진단은 다른 알려진 원인이 없는 것을 전제로하는데 따라서 진단 행위의 목적은 그러한 가능한 원인들의 가능성을 제거하는 것이다 그러나 검사 결과 얻은 수치가 정상 임을 혹은정상이 아님 을 확신하기란 역시 쉽지 않은일이다 결국 이러한 결론은 통계적인 해석을통해 얻을 수밖에 없다 특정한 검사 결과의수치는 기껏해야 90-95% 정도의 확실성만을보여줄 뿐이다
결국 서양근대의학의 진단은 오진 가능성을필연적으로 또 내재적으로 안고 있다 오진이발생하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 1) 신체의 구조·기능적 이상으로 환원시킬 수 없는 증상들이 존재한다
- 2) 특정 증상의 묶음을 이미 알려져 있는 질병의 분류 체계에 끼워 넣을 수없는 경우가 존재한다
- 3) 각종 검사를 통해어떠한 이상을 발견하였다 해도 그 역시 통계적인 해석을 통해 얻어진 이상 이기 때문에그 환자에게는 해당되지 않을 수 있다
- 4) 환자의 증상이 질병의 자연적인 진행 과정에서이상이 나타나기 이전 단계일 수 있다
- 5) 여러 증상이 중첩되고 신체의 이상들이 복수로존재하여 그 중 일부를 파악하지 못할 수 있다
- 6) 필요한 진단검사장비가 갖추어지지 않은 데 기인하는 오진이 있을 수 있다
- 7) 의사의 무능력 실수로 인한 진정한 의미의 오진이있다
서양근대의학에서 진단은 다른 의학체계와마찬가지로 치료와 예후 판정의 출발점이다일단 진단이 내려지면 의사는 치료 계획을 세우고 이를 수행한다 서양근대의학의 치료의목적은 1) 증상의 제거 혹은 경감 2) 생존의기회 보장 3) 삶의 질 향상이다 이 세 가지의목적은 때로 상충될 수 있다 예컨대 생존 기회의 보장 목적으로 유방암에 걸린 환자로부터근치적유방절제술을 시행한다면 삶의 질은 상당히 떨어진다 또 말기 암환자에서 통증 조절을 위해 모르핀을 사용할 경우 때로는 잔여 수명이 짧아질 수도 있다 그러므로 이 세 가지목적들 사이에서 적절한 균형을 취하는 전략을수립하는 것이 의사의 임무가 된다 최근에는치료 과정에서 생기는 부작용들을 예측하고 이를 예방하거나 경감시키는 대책을 세우는 것도치료의 중요한 요인으로 부상하고 있다
전통적으로 서양근대의학의 관점은 원인을없애면 치료가 된다는 것이다 이는 증상의 경감과 생존 기회 연장에서 더욱 그러한데 예컨대 장티푸스의 경우 티푸스균을 없애면 증상이사라지고 치료가 된다 특정 질병-특정 원인-특정 치료법의 연결은 감염성질병을 대상으로한 근대 치료의학의 중요한 독트린이며 이러한진단-치료 모델은 20세기 중엽 항생제의 개발을 통해 정점에 달하였다 원인이 불확실하거나 질병 현상이 몸의 구조적 이상에서 온다면이는 이상을 정상으로 돌려놓음으로써 치료가가능하다 즉 인슐린 분비가 원활하지 못한당뇨병의 경우에는 인슐린을 외부에서 주입하며 관상동맥이 막힌 심근경색증의 경우에는스텐트(stent)를 삽입하거나 다른 혈관을 이식해서 혈액의 관류를 보장한다 심지어 심장이완전히 못쓰게 되었다면 다른 건강한 심장으로대치하면 치료가 된다
문제는 진단과 마찬가지로 치료에 있어서도불확실성이 상존한다는 데 있다 증상의 제거또는 경감의 경우 환자가 호소하는 증상은 대개 통증이나 불편함 기능의 제한으로 나타나는 데 이것이 언제나 약물이나 외과적 시술로제거되는 것은 아니다 통증이나 불편함은 단지 신체뿐 아니라 환자의 심리 외부 환경 행동 양식 등에 의해 많은 영향을 받게 되는데의학이 이 모든 요소들을 통제하기란 불가능하다 아울러 일반적으로 입증된 치료법이 개별환자에게 모두 효과가 있는 것도 아니다 실제로는 많은 치료들이 뚜렷한 근거가 없는 채 관행적으로 행해진다 이런 현상을 개선하기 위해 증거에 기반을 둔 소위 증거기반의학(Evidence Based Medicine) 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8) 그러나 환자 진료 과정에서 묻게되는 모든 질문들에 대한 증거가 존재하는 것도 아니며 많은 답들이 통계 결과로서 주어지기 때문에 불확실한 영역은 언제나 남게 된다마지막으로 대부분의 치료들이 부작용을 수반하며 때로는 그 부작용이 원래의 질병보다 더큰 문제가 될 수도 있다 항생제를 비롯한 모든 약물 치료는 부작용의 가능성이 있고 외과시술은 작은 흉터로부터 신체 부위의 심각한결손에 이르는 후유증을 남긴다 결국 치료적의사결정 시에는 위험(risk)와 이득(benefit)을잘 판정하여 결정을 내려야 하며 그 환자에게무엇이 위험이고 이득일 지는 그의 처지와 상황에 따라 다를 수 있기 때문에 환자의 의사(意思)가 그 과정에서 의미 있게 반영될 필요가 있다
서양근대의학의 치료는 그 공격적 근치적성격으로 인해 돌봄(care)에는 상대적으로 소홀하였다 환자의 치유와 회복에 중요한 역할을차지하는 돌봄은 의학의 영역에서 간호학의 영역으로 넘어갔다 또한 식이요법 운동 마사지 명상 자기암시 등과 같은 전통적인 치료행위들은 주변부로 밀려나 부수적인 치료가 되거나 일종의 사기 행위로 간주되었다 물론 이러한 요법들의 특징은 그 기전이 불확실하고치료 효과와 치료 과정을 객관화하기 어렵다는단점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요법들이정말 불필요하거나 해로운 것인가에 대해서는다시 한번 되돌아 볼 필요가 있다 9) 즉 서양근대의학은 치료와 치유의 개념을 너무나 제한적으로 이해하고 있으며 그 결과 치유 과정에비객관적 요소-믿음 희망 사랑 돌봄 신뢰등-이 미치는 영향을 과소평가하고 있음이 사실이다
4 의사
서양근대의학의 관점에서 바라본 의사는 인체에 대한 깊은 지식을 소유하고 질병을 진단하고 처리할 수 있는 수기(skill)에 익숙하며전문가답게 행동할 줄 아는 사람이다 이런지식-수기-태도(knowledge-skill-attitude)에 대한강조는 정도는 다르지만 대부분의 의과대학의교육목표에 반영되어 있다 진단과 치료 과정이 근본적인 불확실성을 띠고 있는 가운데서도의사는 전략을 수립하고 결정을 내려야 할 책임이 있다 서양근대의학은 어쨌든 어느 정도의 확실성을 가지고 환자의 질병을 진단하고예측할 수 있는 최초의 의학체계이지만 의사들은 언제나 질병 현상의 불확실성이라는 한계와맞설 수밖에 없다
이러한 불확실성은 의사에게 이중의 구속을부여한다
- 즉 의사는 환자에게 희망을 주고자신에 대한 신뢰를 심어야함과 동시에 이것이원천적으로 불가능한 요구임을 깨닫는다 불확실한 상황을 극복하는 가장 손쉬운 방법은그 결정과 책임을 환자에게 떠미는 것이지만모든 환자가 그럴 수 있는 것도 아니다
- 아울러 의사에게 요구되는 <전문가다운 행동>역시상호 모순적인 것이 태반이다 의사는 냉정하면서 따뜻해야 하고 간결하면서 모든 설명을잘해주어야 하며 거짓을 말해서는 안 되지만진실만을 말해도 안 된다
- 무엇보다 의사는 일종의 과학자이자 기술자로서 수련을 받고 객관적이고 합리적인 과학적인 언어와 시각으로상황을 이해하기를 스스로 기대하는데 이는 많은 환자들의 기대와는 어느 정도 거리가 있는것이다
즉 환자들은 의사가 따뜻하고 참을성이 많으며 믿음을 주고 자신을 주로 배려하기를 기대하기 마련이다
근대 이전 <지식>에는 언제나 일종의 신적인 아우라(aura)가 따라다녔으며 당시 사회에서어떤 지식을 소유했다는 것은 그럴 만한 능력과 지위를 가졌다는 것을 의미하였다 따라서근대 이전에 제대로 의학교육을 받았다는 사실은 그 의학교육의 내용이나 효과와는 무관하게 그 사람에게 의사 로서의 지위를 부여하였고 여기서 파생된 일종의 신적인 권능은 치료행위에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즉 의사는 성직자와 더불어 삶과 질병 죽음이라는 인생의 매우 중요한 사건들에 대해 권위가 담긴 발언을할 수 있었다
그러나 세속화된 근대의 의사들은 스스로가그런 권위를 발휘할 수 있다고 여기지 않는다그러면서 불구가 되거나 사망이 예상될 때처럼환자가 삶에 중대한 위기를 겪게 될 때 본질적으로 애매한 입장을 취한다 그런 위기 상황에대한 대화는 일상적인 의사소통과는 매우 다를수밖에 없지만 의사들은 "과학자답게" 사실적인 정보만을 전달하고자 하며 그래서 삶의 본질적인 불확실성과 위험에 대한 자신의 실존적인 불안을 감추고자 애쓴다 서양근대의학이과학적이고 합리적인 사고에 의존하는 한 이러한 한계는 피할 수 없다 왜냐하면 죽음이나불구처럼 중대한 실존적 사태에 처했을 때 인간은 갖가지의 상징적 행위를 통해 이를 대처하고 극복하려 하지만 그러한 상징적인 행위는과학과는 양립 불가능한 것이기 때문이다
의사가 인간의 문제를 오로지 과학적인 시각에서만 바라볼 때 어떠한 일이 일어날 수 있는지는 이미 뉘른베르크 전범 재판과 일본 731부대의 경험을 통해 충분히 드러났다 그 일에종사한 의사들은 서양근대의학이 만들어낸 의사의 정점이라고도 볼 수 있다 근대의 의사는이전 시대의 어떤 의사들도 갖지 못한 인간의신체를 통제할 수 있는 능력을 부여받았다 그러한 능력을 어떻게 적절하게 통제할 수 있는가는 서양근대의학이 끊임없이 고민해야 할 과제이다
의사들에게 과학자 혹은 기술자로서의 능력과 지식을 요구하면 요구할수록 의사들은 점점 더 기계적·관료적이 되고 경쟁적인 성격을띠게 되며 타인을 돕는 데서 얻을 수 있는 보람을 잃어버린다 서양근대의학의 의사에 대한 평가는 그가 얼마나 지식에 정통해 있고 <전문가>인가에 달려 있지 환자와 얼마나 잘 교감하느냐에 달려있지는 않다 의사들은 이전시대에 가졌던 삶의 성찰자 지도자 안내자로서의 성격을 잃어버리고 전투 임무를 수행하는장교와 같이 되어버렸다 여기서는 병원은 전쟁터이며 환자는 전장이고 질병은 싸워 극복해야 할 적이며 죽음은 궁극적인 패배이다 건강은 선이고 질병은 악이며 죽음은 대표적인악이다 이와 같은 태도는 사실상 삶에 대한매우 왜곡된 편견일 수 있다 건강은 우리가추구해야 하는 가치이지만 절대적 가치는 될수 없으며 죽음은 피할 수 없는 존재의 숙명이다 서양근대의학은 스스로 질병이라는 절대악과 싸우는 십자군으로서의 소명을 자임하였으며 그 결과 당사자인 의사들 역시 과중한 정신적 육체적인 부담에 시달리게 되었다
5 맺는 말
서양근대의학의 의학관은 지극히 이성중심적이며 인간의 몸을 통제하려는 욕망에 사로잡혀 있다 이 의학은 정상 다수 남성젊은이 를 위한 의학이다 사람의 몸과 질병이라는 어찌 보면 불가해한 현상은 이성과 과학이라는 프로크루테스의 침대에 눕혀져 일방적으로 재단된다 질병은 인간의 육체와 마음이 사회문화적 맥락 속에서 한데 어우러져 일어나는 복잡다단한 현상인데도 서양근대의학은 이를 오로지 생물학적 관점에서만 바라보고자 한다 때문에 이를 일컬어 생의학(biomedicine)이라고도 부른다 치유 현상 역시 매우 복잡한 일련의 과정이다 치유 과정에서 환자 자신은 무기력할 수밖에 없으며 대부분 타인의 도움을 필요로 한다질병의 치유 과정은 삶의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는 과정이며 타인과의 관계를 새롭게 하고만약 그 전으로 돌아가지 못한다 해도 그 질병으로 인한 새로운 삶의 조건을 받아들여 적응해 나가야 하는 중요한 시간이다 그 과정에서의사를 비롯한 의료인의 의미 있는 역할이 있다 의료는 기본적으로 타인을 돕고자 하는 이타적인 자발성에서 비롯되어야 하며 언제나 그대상인 인간에 대한 배려를 잊지 말아야 한다그러나 서양 근대의학은 인간을 사상(捨象)시켜버리고 질병만을 남기며 그 질병을 제거하는 것을 목표로 삼는다 정상성 에 사로잡힌 의학은 어떻게 하면 근본적으로 비정상적인 인간들이 자신들의 삶의 조건하에서 자기신체를 돌보며 살아가도록 해줄 수 있는지 에는 관심이 별로 없다
그러나 과학과 이성의 그늘 아래 있는 것은언제나 거대한 불확실성이다 서양근대의학의질병관을 밀고 나가면 나갈수록 그 불확실성의 그늘은 더 커지기 마련이다 이 근원적인한계를 받아들여야만 이 체계가 안고 있는 장점-정밀한 진단과 치료 인체의 현상에 대한합리적이고 과학적인 이해 사회적 차원에서의 유효한 질병예방대책의 수립 등-이 더욱 두드러질 수 있을 것이며 우리가 안고 있는 많은문제들의 돌파구가 열릴 것이다
醫史學제13권 제1호(통권 제24호) 2004년 6월
Korean J Med Hist 13∶146–154 June 2004
大韓醫史學會ISSN 1225–505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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