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야로서 HPE: 강력한 지식 생산을 위한 함의(Teach Learn Med, 2017)
HPE as a Field: Implications for the Production of Compelling Knowledge
Anneke van Enk and Glenn Regehr
Centre for Health Education Scholarship, University of British Columbia, Vancouver, British Columbia, Canada
교육에서의 연구는 오랫동안 [학문적 이해 관계자]와 [실무에 기반을 둔 이해 관계자]들의 상충하는 우려와 씨름해 왔다.
Research in education, has long struggled with the competing concerns of academic and practice-based stakeholders.
[학계에서는] 많은 교육 연구가 방법론적으로나 이론적으로 열등하고, 효용(또는 실제적인 결과)에 지나치게 신경을 쓴다는 인식이 있다. 그리고 (교육연구가) '진정한' 학문으로서의 정당성이 있는지 문제 삼는다.
Among academics, there is a perception that much education research is methodologically and theoretically inferior and too concerned with utility (or practical outcomes), throwing its legitimacy as a “real” scholarly enterprise into question.
[동시에, 교육 실무자들과 정책 입안자들 사이에는] 교육연구가 특별히 유용하지 않고, 경직된 처방이나 불가사의한 추상화 중 하나를 제공하는 경우가 너무 많은데, 둘 다 "현실 세계"의 복잡성이나 일상적이고 구체적인 요구를 고려하지 못한다는 의식이 있다.
At the same time, there is a sense among educational practitioners and policymakers that it is not especially useful, that too often it offers either rigid prescriptions or arcane abstractions that, respectively, fail to take the complexities or the everyday, concrete needs of the “real world” into account.
라바레 1,2는 사실 교육연구의 바로 이러한 학술적 기여와 현실적 기여 사이의 긴장관계가 다른 기존의 많은 학문들에 비해 이 분야의 낮은 위신을 설명하는 것이라고 주장해 왔다.
Labaree 1,2 has argued that it is, in fact, this very tension between the intellectual and practical commitments in education research that accounts for its low prestige compared to many established disciplines in the academy.
[이론과 방법에 관한 중요한 우려]와 [교육자, 관리자 및 정책 입안자의 현실적 요구]를 모두 해결하는 새로운 지식을 생산해야 한다면, 학계와 실무자의 HPE 커뮤니티가 이러한 긴장에 효과적으로 대응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인가?
how might the HPE community of academics and practitioners respond effectively to this tension in order to produce new knowledge that addresses both important concerns about method and theory and the practical needs of educators, administrators, and policymakers?
그러나, 하나의 분야로서, HPE 연구는 학문적으로도 실무적적으로도 둘 중 하나의 이해관계에 대한 특권을 부여하지도 않을 것이며, 긴장감을 해소하기 위한 어떤 결정적인 청사진을 시도하지도 않을 것이다. 오히려 HPE에서 학문과 실무적 이해관계는 본질적으로 상호 연관되어 있으며, 따라서 얼마가 되었든 일정정도의 긴장상태에 있다고 간주할 것이다.
As a field, however, HPE research would not privilege either disciplinary or practical interests, nor would it attempt any sort of definitive blueprint for resolution to the tension. Rather it would regard disciplinary and practical interests as inherently interconnected and, therefore, always in tension to varying degrees.
하나의 분야로서 HPE가 갖는 과제는 그 긴장을 해소하는 것이 아니라, 협업을 통해, 끊임없이 변화하는 협상과 타협을 통해, 그 긴장을 생산적인 방법으로 활용하는 것이다. 그것은 반드시 편안할 필요는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역사회의 모든 부분에 울려 퍼지는 지식을 육성할 것이다.
The challenge for a field is not to resolve that tension but to harness it in productive ways through collaboration, through ever-shifting negotiation, and compromise, engagements that will not necessarily be comfortable but will nonetheless foster knowledge that resonates with all parts of the community.
학문분야로서 교육
Education as discipline
하나의 학문분야란 (반드시 조화롭지는 않더라도) [지식의 축적과 검증을 위한 [지적 이익과 표준에 의해 결합된 집단]이 상대적으로 밀접하게 결속되는 경향이 있다. 한 학문분야의 구성원은 문제의 전문적 지식, 언어, 구성 등을 공유하며, 구성원은 문화화 과정을 포함한 광범위한 훈련 과정을 통해 (멤버십을) 획득한다.
Academic disciplines tend to be relatively close-knit, if not necessarily harmonious, groups united by intellectual interests and standards for accumulating and validating knowledge. Members of a discipline share specialized knowledge, language, and constructions of problems, and membership is acquired through an extensive process of training that is heavily laden with processes of enculturation.
Becher3는 '학문'이란 명확하게 구분된 "영토"를 보호하는 응집력 있는 "종족"라고 은유적으로 묘사했다. 비록 이 은유에 대한 많은 비평이 있지만, 사실 학문은 (적어도 겉으로는) 단결unity의 보존하고자 하며, 특히, 다른 학문분야 또는 비-학문분야와의 구별을 유지하기 위해 노력을 기울인다.
Becher3 offered a metaphorical description of disciplines as cohesive “tribes” protecting clearly demarcated “territories.” Although this metaphor has met with a good deal of critique,4,5 disciplines do, in fact, expend effort on the preservation of (at least the outward semblance of) unity and, in particular, on maintaining distinctions both from other disciplines and from nondisciplines.
여기서 우리의 목적을 위해 중요한 것은, 일반적으로 학술분야들은 이론의 진보를 그들의 주된 목표로 삼는다. 이론에 대한 이러한 일차적 초점은 종종 학문이 "실무real world practice" 으로부터 분명히 분리되게 한다. 이러한 분리에 대한 근거는 지적 탐구의 여력 측면에서 표현되어 왔다.
Important for our purposes here, academic disciplines generally take, as their primary goal, the advancement of theory. This primary focus on theory often leads disciplines to explicitly separate themselves from“real-world” practices. The rationale for this separation has been expressed in terms of its affordances for intellectual inquiry.
예를 들어, 파커는 학문이란 본질적으로 속세에 관심이 없으며unworldly, 학문이 반드시 효용성을 갖춰야 하는 것도 아니기에, 아이디어의 탐구에 대한 뿌리 깊은 헌신을 가능하게 한다고 말했다.
Parker,6 for instance, wrote that a discipline is by its very nature unworldly and that this allows for a deep-rooted commitment to the exploration of ideas not necessarily in the service of utility.
교육의 맥락에서, Hammersley7은 "두 세계"라는 관점을 사용하여 이 분리separation의 가치를 주장했다. 그는 "연구자와 실무자는 근본적으로 다른 두 가지 활동을 하고 있으며 이는 서로 다른 방향으로 나아가게 한다"고 제안했다. …두 가지 서로 다른 활동을 효과적으로 추진하려면 서로 다른 방향의 차이는 불가피하다."7(p62)
In the context of education, Hammersley7 asserted the value of this separation using a “two-worlds” perspective. He suggested that “researchers and practitioners are engaged in two fundamentally different activities, and … this gives rise to divergent orientations on their part. … This difference in orientation is essential if these different activities are to be pursued effectively.”7(p62)
[학술연구]와 [실천]의 분리도 HPE 문헌에 반영되어 있는데, 이는 '생산자를 위한 생산'과 '사용자를 위한 생산'이라는 양극단으로 구분하기 때문이다.9 학문 기반의 관점을 촉진하면서, 'influential figures'들은 HPE 연구는 "연구자 커뮤니티를 목표로 하는 작업 개발과 이론적 지식의 향상을 우선시"하고, 반대로 (HPE연구는) "현장에서의 연구 질문의 방향을 잡는데 있어서 의과대학 교수들의 요청에 의해 생기는 영향력"를 줄여야만 더 발전할 것이다라고 말한다.
The separation between academic research and practice is also mirrored in the HPE literature as the distinction between the poles of “production for producers” and “production for users.”9 Promoting a discipline-based perspective, “influential figures” have suggested that HPE research would improve if it gave “priority to the development of work aimed at the community of researchers and at the advancement of theoretical knowledge” and reduced “the sphere of influence exerted by the needs of faculties of medicine in orienting research questions in the field.”
[학문기반 지식 생산]과 [실무practice]적 우선순위를 별개의 것으로 나누게 되면, 필연적으로 이 두 가지 세계 사이에서 "gap"을 "bridge" 하기 위하여 지식 번역이 필요하게 된다. 이 또한 쉬운 일은 아니다.
The outcome of prioritizing disciplinary-based knowledge production as distinct from practice is that knowledge translation becomes necessary if we are to “bridge the gap” between these worlds. This entails challenges.
'지식 번역'에 대한 비평
Critiques of knowledge translation
[좁은 형태의 증거]와 [자연에 대한 단순한 가정]에 특권을 부여하는 것
privileging of narrow forms of evidence and simplistic assumptions about the nature
번역이 실무자의 책임이라고 주장될 때, 그것은 실무자가 학문적으로 이론가들이 배타적 영역으로 주장해온 언어, 개념, 특권적 지식을 이해해야 한다는 부담을 준다. 그것은 실무자들이 학문적 대화에 참여할 권한을 부여받지 않고 실무에 대한 가치를 확인하는 범위 내에서 이를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한다고 제안한다.
when translation is asserted to be the responsibility of the practitioner, it places a burden on the practitioner to understand the language, concepts, and privileged knowledge that the discipline has claimed as its exclusive domain. It suggests that practitioners ought not be authorized to participate in the disciplinary conversation but ought to be able to understand and appreciate it to the extent of identifying its value for practice.
반대로, 그러한 번역이 학술 연구자들에 의해 수행되었을 때, 적어도 역사적으로, (방법론적으로 엄격하지만 종종 좁은) 발견에 기초하여 하향식 처방의 과정이 되어 왔으며, 실무에 도움이 되는 만큼 많은 피해를 입히기도 했다. 이는 대부분, 연구자들 자신이 국지화된 실무적 복잡성에 대한 이해에 있어 세련되지 못했으며, 따라서 번역을 위한 노력은 단지 (논리적이지만 종종 난해한) 이론의 "dumbing down"으로 본다.
Conversely, when such translation has been undertaken by academic researchers, it has, at least historically, been a top-down process of prescription on the basis of (methodologically rigorous but often narrow) findings that might cause as much damage as help in practical settings.13 In large part, this is because the researchers themselves are often unsophisticated in their understanding of the localized complexities of practice and thus see translational efforts merely as the “dumbing down” of (elegant but often esoteric) theories.
이러한 지식번역은 학계 연구자들에게 별로 호소력이 없어 보일 뿐만 아니라, "(지식번역에 힘쓰는 것은) 실제로 연구자로서의 과학적 명성과 위신을 떨어뜨릴 수도 있다"는 인식이 있다.14(p3)
Not only does such translation seem to hold little appeal for academic researchers, but there is a perception that engaging in it “may actually decrease a researcher’s scientific reputation and prestige.”14(p3)
지식 번역에 관한 문헌은 이러한 문제들을 다루기 위해 노력해왔다. 구체적으로, 통합 지식 번역의 개념은 "잠재적 지식 사용자들은 연구 과정의 시작부터 적절하고 의미 있는 방법에 종사해야 한다."는 것을 인정한다. 이러한 변화는 지식번역을 개념화할 때, (지식 전달보다는) [지식 생산의 문제]로서 개념화하는 전환이 중요하다.
The literature on knowledge translation has made efforts to address these issues. Specifically, the concept of integrated knowledge translation acknowledges that “potential knowledge users must be engaged in appropriate and meaningful ways from the beginning of the research process.”15(p14) This shift to conceptualizing knowledge translation as a matter of knowledge production rather than knowledge transfer is significant.
실천으로서 교육
Education as practice
이론-실무의 이분법에 대처하기 위한 대안적 접근방식은 학문지식이 아닌 실무에 더 우선순위를 두는 것이다. 이처럼 실무를 우선하고자 하는 노력의 두 가지 버전은 일반적으로 교육에서 설명된다: [실무자 조사]와 [증거 기반 교육].
An alternative approach to addressing the theory-practice divide privileges practice rather than disciplinary knowledge as the focus of the research enterprise. Two versions of this effort to foreground practice are commonly articulated in education: practitioner inquiry and evidence-based education.
[실무자 조사 운동]은 실무자 주도의 연구가 그들의 실제 지식 및 상황별 특수성과 더 잘 관련된 연구 결과를 만들어 낼 것이라고 주장한다. 실무자 질의에는 연구자로서의 교사, 16개의 비판적 해방 연구, 17, 성찰적 실천 등 수많은 접근방식이 있다.18
The practitioner inquiry movement posits that practitioner-led research will generate findings that relate better to their real-world knowledge and contextual particularities. There are numerous approaches to practitioner inquiry, including teacher as researcher,16 critical emancipatory research,17 and reflective practice.18
코크란-스미스와 리틀에 따르면
according to Cochrane-Smith and Lytle,
다음을 인정해야 한다.
실무자를 합법적 지식인으로
전문적 맥락을 실무에서 발생하는 문제의 연구를 위한 조사 장소로
탐구와 실무 사이의 모호한 경계를
타당성과 일반성의 개념은 전통적인 연구의 관례와는 다름을
the acknowledgement of
the practitioner as a legitimate knower;
the professional context as inquiry site for the study of problems that arise from practice;
blurred boundaries between inquiry and practice; [and]
notions of validity and generalizability different from the conventions of traditional research.
그러나, 이 접근법에 의해 생성된 지식의 형태에 대한 우려가 제기되었다. 예를 들어, 20세의 펜스터마허는 실무자 조사가 영장 및 정당성의 요건을 충분히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다고 제안했고, 휴버먼21(p132)은 교사의 "emic" 관점을 옹호하는 것이 "망상과 왜곡에 대한 안전장치를 약화시키는 결과"로 이어졌다고 우려를 표명했다. 따라서, 많은 학자들은 [여러 교육실무적 맥락에 대한 결정을 기반으로 하는 하는 지식의 "공유 가능한" 형태로서의 실무자 조사의 가치]를 의심한다.2
However, concerns have been raised about the forms of knowledge generated by this approach. Fenstermacher,20 for instance, suggested that practitioner inquiry has not taken seriously enough the requirements of warrant and justification, and Huberman21(p132) expressed concern that the championing of teachers’“emic” perspectives has led to “minimal safeguards against delusion and distortion.” Thus, the value of practitioner inquiry as a “shareable” form of knowledge upon which to base decisions about educational practice across contexts is questionable, at least to many academics.2
[증거 기반 교육]은 실무를 우선시하는 접근방식 측면에서 실무자 조사와 현저하게 다르다. [검증 가능한 실효성 입증에 근거해 일반화할 수 있는 실천적 처방이 자신 있게 구현될 수 있다]는 기대와 함께 실무에 대한 '강건한' 연구 방법의 활용을 촉진한다. 여기서 증거는 실무자 질의에서처럼 경험에 대한 반성을 통해서가 아니라, "실용적이고 복제가능한 교육 프로그램에 대한 연구의 과학적으로 타당하고 쉽게 해석할 수 있는 종합synthesis"이 가능하도록 (학문기반의, 대개 실험적인) 방법론의 엄격한 적용을 통해서 생산된다.
Evidence-based education differs sharply from practitioner inquiry in its approach to foregrounding practice. It promotes the use of “rigorous” research methods in service of practice, with the expectation that its generalizable prescriptions for practice can be implemented with confidence based on verifiable proof of effectiveness.22,23 Evidence here is not produced through reflection on experience, as it is in practitioner inquiry, but through rigorous application of (discipline-based and usually experimental) methodologies that allow for “scientifically valid and readily interpretable syntheses of research on practical, replicable education programmes.”24(p5)
그러나, [증거 기반 교육]을 위하여 창출되는 지식의 가치에도 의문이 있는데, 왜냐한 연구마다 ground가 서로 다르기 때문이다. 특히, 비평가들은 [단순화된, 일반화과능한 원칙]을 강조하는 것을 지적하며, 지식이 관련성을 갖기 위해서는 복잡하고 국지화된 상황에서 효과적으로 작동할 필요가 있음을 지적한다. 실무를 위한 servant로서 (이론보다) 방법에 초점을 둠으로써 이론-실무 분열을 바로잡으려는 이러한 노력은 수행자가 지역적 맥락에 "translation"할 필요가 있는 상황에서, 아는 학술적 knowing의 방법의 reassertion으로 볼 수 있다.
However, the value of the knowledge generated through this too, questioned approach, has been on various grounds. In particular, critics challenge its prosimplified, motion of generalizable principles over relevant knowledge be contextually that would required to act effectively in complex, localized situations. This effort to redress the theory-practice divide by focusing on method (rather than theory) as servant to practice can, then, be seen as a reassertion of disciplinary ways of knowing, with the attendant need for “translation” to local contexts.
흥미롭게도, 지금까지 HPE 문헌에서 실무 중심의 연구에 대한 우려가 나타난 양상은 조금 다르다. 그 결과 국지적으로 이루어진 개입의 설명description이나 정당성justification에 초점을 맞춘 연구가 지나치게 많이 나온 것으로 보인다.29 이러한 연구에서 답하고 있는 질문은 '왜' 또는 '어떻게' 질문과는 거의 또는 전혀 관련이 없는 "does it work?"만을 확인해온 것이다. Cook et al.29는 다음과 같이 제안했다.
Of interest, in the HPE literature, concern about practice-driven research has manifested slightly differently insofar it is seen to have led to an overly large number of articles focused on description or justification of local interventions.29 It is argued that the question being answered in these articles is “Does it work?” with little or no attempt to address “why” or “how” questions. Cook et al.29 suggested that
(이러한 연구는) "교육 및 학습 과정에 대한 이해에 영향을 미치는 영향이 제한적이고, 향후 실무와 연구에 미치는 영향도 마찬가지로 제한적이다"29(p132)
it has “a limited impact on our understanding of the teaching and learning process and in turn influence [has] limited on future practice and research”29(p132)
이와 유사하게, 다른 이들은 이론적 프레임워크에 질문과 데이터를 적절히 고정anchor하지 않는다면, HPE 연구는 지식의 통합체를 형성할 수 없을 것이며, 교육 맥락의 복잡성을 다루는 데 거의 진전이 없을 것이라고 언급했다.
Others have commented, similarly, that without properly anchoring questions and data in theoretical frameworks, HPE research cannot form an integrated body of knowledge and will make little progress in addressing the complexities of educational contexts.30,31
지식-생상 분야로서 교육
Education as knowledge-producing field3
우리는 지식 생산 분야가 전문가, 관리자, 정책 입안자와 같이 [학문 기반 지식 생산에 관여하지 않는 이해관계자]뿐만 아니라 [다양한 분야의 학문을 포함하는 조사 영역]으로 이해될 수 있다고 제안한다.
We suggest that a knowledge-producing field can be understood as a domain of inquiry that includes academics from a range of disciplines as well as stakeholders not engaged in discipline-based knowledge production, such as professionals, administrators, and policymakers
잘 작동하는 분야에 대한 우리의 개념은 Stokes가 개념화한 use-inspired basic research와 관련된다. 스톡스는 실무적 진전(적용을 위한 연구)과 이론의 진보(이해를 위한 연구)의 목표가 상호 배타적일 필요는 없다고 주장했다. 대신 그는 연구 결과를 판단할 수 있는 두 가지 직교 차원이라고 제안했다. 따라서, 그의 모델은 두 개의 교차 축으로 구성되었는데, 하나는 "사용의 고려"를 나타내고 다른 하나는 "기본적인 이해를 위한 질문"을 나타낸다. 이것은 4개의 사분면을 낳게 되는데, 이 사분면은 연구가 '실무use'와 '이론undersatnding'에 둘 다 기여하는 사분면에는 "Paster의 사분면"이라는 딱지가 붙는다. 우리는 이러한 이중적 기여가 한 분야가 달성하고자 하는 목표라고 제안한다.
Our conception of a well-functioning field is informed by Stokes’s32 notion of use-inspired basic research. Stokes argued that the goals of advancing practice (research for application) and advancing theory (research for understanding) need not be mutually exclusive (two poles on a single dimension). He instead proposed that they are two orthogonal dimensions on which research can be judged. Thus, his model comprised two intersecting axes, one representing “considerations of use” and the other the “quest for fundamental understanding.” This results in four quadrants, with the quadrant in which research contributes to both use and understanding (with no compromise in either value) labeled “Pasteur’s quadrant.” We propose that this dual contribution is what a field aims to achieve
분명히, 우리는 다음에 가치가 없다고 말하려는 것이 전혀 아니다.
"Bohr의 사분면"(학문의 추구와 연계하여, (이론적) 이해는 그 자체가 목적이 되어 추구되고 "최상의 관행"을 결정하는 효용이 기껏해야 부차적인 관심사에서 이뤄진다.)
"에디슨의 사분면"(대략적으로 실무자 커뮤니티의 노력과 관련되며, 반대로 "최상의 관행"을 결정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고, 혁신의 유용성 뒤에 있는 원칙을 이해하는 데는 관심이 적다).
To be clear, we are not arguing that there is no value in work produced in what Stokes termed
“Bohr’s quadrant” (correlating with the pursuits of academic disciplines, where understanding is pursued for its own sake and its utility for determining “best practice” is, at best, a secondary concern) or in
“Edison’s quadrant” (correlating roughly with the efforts of communities of practitioners, where, conversely, determining “best practice” is paramount and there is less immediate interest in understanding principles behind an innovation’s usefulness).
파스퇴르의 사분면을 차지하기 위한 연구에 대한 권고는 일반적으로 교육에서 새로운 것은 아니지만, HPE.34-36에서는 매력적으로 보이지만, 그것이 실제로 무엇을 의미하는지 확장하는 것은 아직 거의 없다.
Exhortations for research to occupy Pasteur’s quadrant are not new in education generally33 or in HPE.34–36 However, although the idea appears attractive, there is little as yet that expands on what it might actually mean.
여기서 우리는 한 분야가 만들어내는 것, 즉 "유용한 이론"을 스케치하는 것으로 시작하려고 한다. 우리는 [유용한 이론]과 [학문에서 전통적으로, 제도적으로 보상을 받는 경향이 있는 종류의 이론]을 대조하고자 한다. 후자의 이론은 매우 추상화된 이론이다 (링가드가 "T"heory, 또는 "grand explanations"이라고 부르는 것). 이러한 "T"heory는 기존의 이론에 기초하며, [데이터를 수집하고 해석하기 위한 명시적(계층화된) 방법론] 또는 [증거, 추론, 논쟁에 대한 보다 암묵적인 기준]에 의해 형성된다.
Here, we begin more generally by sketching out what it is a field produces, namely, “useful theory.” We contrast useful theory with the sort of theory the production of which tends to be institutionally rewarded in traditional disciplines, the highly abstracted theory (what Lingard37 called “T”heory, or “grand explanations”) that is built upon prior theory and shaped either by explicit (often hierarchicalized) methodologies for collecting and interpreting data or by more tacit standards for evidence, reasoning, and argumentation.
분야에 따라, 좋은 "T"heory는 예측 정확도 및/또는 개념적 우아함을 제공한다. 그러나 학문분야의 산물로서, "T"heory는 실제로 특별히 유용성이 높지 않을 수도 있고, 외부인이 접근하기 어려운 경향이 있다. 단순화된 (즉, 번역된) 형태에서도, 그것의 기원과 순환은 단순히 어떤 실무적인 맥락에서 너무 멀리 떨어져 있기 때문에, 그것은 실무자들을 "흥분시킬" 것 같지 않다.
Depending on the discipline, good “T”heory offers predictive accuracy and/or conceptual elegance. As a product of disciplinarity, however, “T”heory is not especially useable in practice and tends to be difficult for outsiders to access. Even in simplified (i.e., translated) form, it is unlikely to “hook” practitioners—its origins and circulation are simply too far removed from any practical context.
한 분야에서 '용도'에 관한 고려사항은 방법론적 근거 또는 개념적 정교함에 대한 학문적 정통성과 동등한 지위footing를 갖는다. 이것은 방법론의 중요성을 과소평가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엄격한 지식 생산에 대한 소위 gold standard의 적용이 그 지식의 실용적 효용을 보장하거나 실무자들이 그것을 받아들이도록 설득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인식하기 위한 것이다.
방법의 일관성 있는 구현은 중요하고,
체계성과 명시성도 중요하고,
클레임을 제기하기 위한 절차와 사고 과정에 대한 비판적인 정밀 조사도 중요하다.
In a field, considerations of use have (at least) equal footing with disciplinary orthodoxies regarding methodological grounding or conceptual sophistication. This is not to undercut the importance of methodology, but rather to recognize that the application of a so-called gold standard for rigorous knowledge production is not what will ensure the practical utility of that knowledge or convince practitioners to take it up.4
considered and consistent implementation of methods matters,
systematicity and explicitness matter,
critical scrutiny of procedures and thought processes that go into making a claim matters–
3 이 용어를 사용함에 있어서, 부르디유가 상세히 기술한 「필드」의 건설을 발동하는 것은 우리의 의도가 아니다. 부르디유의 '필드' 건설이 우리의 사례를 어느 정도 정교하게(또는 훼손)할 것인가를 탐구하는 것이 흥미로울 수도 있겠지만, 본 기사의 맥락에서 우리는 '특정 활동이나 관심의 영역'이라는 사전 정의를 빌려서 '필드'를 덜 기술적인 방법으로 사용하고 있다.
3 In using this term, it is not our intent to invoke the construct of “field” as elaborated by Bourdieu. Although it may be interesting to explore the extent to which Bourdieu’s construction of “field” would elaborate (or undermine) our case, in the context of this article, we are using “field” in a less technical way, borrowing the dictionary definition of “a particular sphere of activity or interest.”
4 실제로 방법론적 순수의 계층구조 의존은 실제로 실무에 대한 우리의 이해를 왜곡할 수 있다. RCT가 제공하는 좁게 초점을 맞춘 정보가 그림의 일부만을 제공한다는 것을 인식하지 못하고, 그 이후에 부분적인 이해에 따라 행동할 때, 우리는 복잡한 실무 체계를 혼란스럽게 할 수 있다.얼음, 새로운 문제 발생13
4 Indeed, a reliance on hierarchies of methodological purity may actually distort our understanding of practice—when we fail to recognize that the narrowly focused information supplied by an RCT provides only part of the picture and when we subsequently act on that partial understanding, we may upset and send into disarray a complex system of practice, creating new problems.13
따라서, 우리는 한 분야에서 이론의 가치는 [다양하고 복잡한 실제 상황에서 다양한 이해관계자들이 얼마나 잘 이해하고 행동할 수 있도록 하는가]에 의해 가장 먼저 결정되어야 한다고 주장할 수 있다.
We might posit, therefore, that in a field, considerations of use require that a theory’s value be determined first and foremost by how well it allows various stakeholders to understand and act in varied and complex practical situations.
파스퇴르의 사분면에 대한 연구는 베레이터38이 "개념적 인공물"이라고 부르는 것을 발굴하려고 할 것이다. 즉, 실무에 내재되어 있는 지식과 신념을 고찰하고 개선할 수 있는 '논의해볼만한 아이디어'으로 바꾸려고 할 것이다. 그것은 어떻게 '개념적 인공물'이 (우리의 교육적 실무 뒤에서) 목표의 달성을 지지하거나 방해하는지를 이해하기 위해 우리가 개념적 인공물을 비판적으로 생각해보게끔 해줄 것이다.
Research in Pasteur’s quadrant would seek to excavate what Bereiter38 called “conceptual artifacts.” That is, it would seek to turn the knowledge and beliefs that are embedded in practices into “discussable ideas” that can be examined and improved upon. It would allow us to critically consider conceptual artifacts in order to understand how they support and hinder accomplishment of the goals behind our educational practices.
여기서 핵심은 work의 invitational nature이다. 실무적 문제를 이론화하여 평가함에 있어서, 주어진 맥락 안에서 해결책을 개발하는 데 유용하고 유용한 방법들에 대한 통찰력을 공유하고, 대응할 수 있는 연습의 여지가 있다. 개념적 인공물을 발굴하여 비판적 분석에 노출시키는 과정은 이러한 개념적 인공물(이론/이해)를 고도화 시킬 수 있으며, 그 과정에서 이러한 인공물에 의존하는 실무(용도)를 진전시킬 수 있다.
Key here is the invitational nature of the work; in assessing the theorizing of a practical problem, there is room for practice to respond, to share insights into the ways in which it is and is not useful in developing a solution within a given context. The process of excavating conceptual artifacts and exposing them to critical analysis can advance the sophistication of these conceptual artifacts (understanding) and, in the process, advance the practices that rely on these artifacts (use).
함의: HPE가 분야였라면
Implications: If HPE were a field
한 분야의 중심적 이해는 [실무적 관련성]의 문제가 [지식 생산의 과정]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따라서 한 분야의 지식의 효과적인 생산은 자사노프의 공동 제작 개념을 통해 더욱 정교해질 수 있다. 공동제작이란 "사회와 과학 양쪽의 구성 요소들에 대한 대칭적 조사"를 허용하는 해석적 틀로 묘사했다.
Because the central understanding in a field is that questions of practical relevance are inextricably bound up with processes of knowledge production, effective production of knowledge in a field can be helpfully elaborated through Jasanoff’s39(p19) concept of coproduction, which she described as an interpretive framework that allows for “symmetrical probing of the constitutive elements of both society and science.”
학계와 실무자들 사이의 차이를 제거하려고 하지 말고, 이러한 차이를 인식하는 것이 여전히 중요하다. 오히려, 이러한 구별을 본질적으로 하는 것을 피해야 한다. Wehrens 40(p547)이 지적했듯이, 학계와 실무자들의 세계를 정적이고 일반화할 수 있는 것으로 취급하게 되면, "영역간의 이질성과 도메인 내의 동질성을 모두 지나치게 강조한다."
It is not that a field attempts to elide differences between academics and practitioners—recognizing these differences remains important. Rather, an effective field would avoid essentializing these distinctions. As Wehrens 40(p547) pointed out, treating the differences between the worlds of academics and practitioners as static and generalizable “overemphasizes both the heterogeneity between domains and the homogeneity within the domains.”
이와는 대조적으로, 다양한 이해관계자 집단을 [서로 다르지만 본질적으로 분리할 수 없는 것]으로 접근한다면, 학자들과 실무자들이 서로 무관해보였던,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보어와 에디슨의 사분면으로부터, 파스퇴르의 사분면으로 서로를 끌어낼 수 있는 기회를 만든다.
In contrast, approaching the various stakeholder groups as different but intrinsically inseparable creates opportunities for academics and practitioners to draw each other out of the irrespective, uni-perspectival quadrants of Bohr and Edison into Pasteur’s quadrant.
많은 교육 영역에서, 연구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학자 그 자신이 스스로를 "교육disciplined"했고, 그렇게 함으로써, 다양한 분야에서, 실무자들로부터 멀어지게 되었다.
In many educational domains, those engaged in research have “disciplined” themselves and, in doing so, have, to varying extents, withdrawn from engaging with practitioners and into the academy.
흥미로운 점은, HPE가 이러한 종류의 [두 공동체 모델]에 적합하지 않다는 것이다. 학술지든, 컨퍼런스든, 실무자들과 학술훈련을 받은 연구자들은 모두 여기에 의미 있는 수준으로 참여하고 있다. 더욱이, 그것은 학술 및 실무공동체에서 인정받을 수 있는 역할을 담당하고 있는 수많은 "경계를 넘나드는 사람"들(예: 교육에 초점을 맞춘 임상의 과학자와 의과대학의 교육실무 지원에 공식적인 역할을 하는 박사-교육자)들 사이에서 중요하다.
Of interest, HPE has not settled into this kind of two-communities model. There seems to be a greater degree of meaningful engagement by practitioners and discipline-trained researchers in the same journals and at the same conferences. Moreover, it counts among its members numerous “boundary spanners”41,42 who occupy roles that would be recognized by both disciplinary and practice communities (e.g., clinician-scientists whose research focuses on education, and Ph.D.-educators who play formal roles in supporting the educational practices of the medical school).
이러한 과정이 HPE 커뮤니티에서 이미 일반적이라고 가정할 만한 충분한 이유가 있다.
의사-의사가 담당하는 여러 역할,
HPE 연구에 대한 실무자들의 광범위한 참여,
의료진 내 HPE 연구단위의 특이한 기관 위치 및
점점 더 다양해지는 구성원(멤버십)
지식 생산 공동체로서는 상대적으로 신생분야인 HPE
There is good reason to suppose that such processes are already common in the HPE community, as suggested by the multiple roles physician-educators occupy, the extensive participation of practitioners in HPE research, the unusual institutional location of HPE research units within faculties of medicine, and HPE’s relative newness as a knowledge producing community, as well as its increasingly eclectic membership.
분명히, 파스퇴르의 사분면에서 추구된 use-inspired basic research를 수행하게 된다면, 학술적훈련을 받은 연구자들과 실무자들은 서로 협력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가 찾아야 할 성공적인 협업을 보장하기 위한 처방전이 아니다. Wehrens40(p550)은 다음과 같이 표현한다: "합리적으로, 공동 제작 관점을 통해 행위자들이 협력적 형식 내에서 보다 유연하고 자의적인 방식으로 운영될 수 있으며, 때로는 조정과 경계의 연화를 강조하기도 하며, 그 밖의 지점에서는 경계를 유지하거나 강화할 수 있다."
Clearly, the enactment of use-inspired basic research pursued in Pasteur’s quadrant will involve collaboration between discipline-trained researchers and practitioners. But it is not so much a set of prescriptions for ensuring successful collaboration that we should be looking for. Wehrens40(p550) put it this way: “The co-production perspective, in sum, enables actors to operate in a more flexible and self-conscious way within collaborative formats, sometimes emphasizing coordination and softening boundaries, and at other points maintaining or strengthening boundaries.”
한 분야에서 연구와 실무 사이의 관계를 규정하는 것은 [사전에 정해진 경계]가 아니라, [맥락적으로 협상된 유연하고 자의적인 협력]이다.
It is precisely this flexible, self-conscious collaboration, with contextually negotiated rather than predetermined boundaries, that will define the relationship between research and practice in a field.
중요한 것은, 협업이 학문적 특권으로도, 실무적 특권으로도 이어져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어느 그룹도 자신만 편안한 조건terms을 정할 수 없으며, 두 그룹 모두 양보를 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다시 말하지만, 그러한 양보의 잠재적 범위를 과소평가해서는 안 된다. 한 분야에서 이루어지는 협력의 종류는 부분적으로 긴장을 수반하고 있다. 왜냐하면 그것은 학자들과 실무자들 모두가 그들이 소중히 여기는 가치와 가정을 스스로 정의해야 하기 때문이다.
Important to note, the collaboration cannot proceed with the privileging of either academic or practical expertise—neither group can set such comfortable terms for itself, and both must be prepared to make concessions. Again, the potential extent of those concessions must not be underestimated. The kind of collaboration that takes place in a field is tension ridden partly because it requires both academics and practitioners to yield values and assumptions they hold dear, even self-defining.
한 분야에서 이론의 형태로 갖춰진 이해는 반드시 용도가 있어야 한다useable. 이것은 [이론이 항상 그리고 정확하게 학문의 방법론적 기준에 부합하지는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반대로, 실무자들에게 유용한 지식이 반드시 준비된 해결책과 빠른 대답의 형태를 취하지는 않을 것이며, 단지 내부자의 시각에만 의존하거나 "참호로부터" 경험에 특권을 부여해서는 안 될 것이다.
Understanding, in the form of theory, must be useable in a field, and that requirement means theory will not always and exactly fall in line with academics’ methodological (or other, more tacit) standards for scholarship.
Conversely, knowledge useful to practitioners will not necessarily take the form of ready solutions and quick answers, nor can it rely merely on insider perspectives or privilege the experiences “from the trenches.”
게다가, 두 집단 모두 경계를 넘나들어야 하며, "보호주의" 경향을 피해야 한다. 다른 사람의 전문 분야에서 어느 정도 숙련도를 배양하는 것은 자신을 위한 전문지식을 주장할 필요 없이 그 전문가 관점을 공감적으로 이해할 수 있게 할 수 있다.
Moreover, both groups must eschew “protectionist” tendencies in favor of (respectful) boundary crossing. Cultivating some degree of proficiency in another’s area of expertise may enable a sympathetic understanding of that expert perspective without having to claim that expertise for oneself.
반대로 학술적 기준을 충족하지 못하거나, 충분한 실무경험을 가지고 있다는 이유로 자신의 전문분야에 대한 타인의 참여를 제한하거나 폄하하려는 충동은 그러한 공감적 이해를 위한 기회를 감소시킨다.
Conversely, the impulse to limit or disparage others’ participation in one’s own area of expertise on the grounds that they don’t meet disciplinary standards or have enough practical experience reduces opportunities for such sympathetic understanding
[문제의 공동구성]은 그 문제에 대한 다른 사람들의 관심을 어느 정도 상호인정함으로써 이뤄지지만, 모든 집단으로부터 동일한 공식화formulation를 요구하지는 않는다. 이러한 의미에서, 한 분야가 다루는 문제는 "boundary objects"라고 부르는 것과 거의 같은 방식으로 작용하게 될 것이다.
The co-construction of a problem is supported by a certain mutual appreciation of others’ interest in it, but it does not call for an identical formulation from all groups. In this sense, the problems with which a field deals will act in much the same way as what Star and Griesemer43(p393) termed “boundary objects”:
Boundary objects는 [국지적 필요와 이를 사용하는 여러 당사자의 제약조건에 적응할 수 있을 만큼 유연]하지만, [현장 전체에 걸쳐 공통된 정체성을 유지할 수 있을 정도로 견고한] 물체다. 그것들은 공통된 용도를 위하여 약하게 구조화되었지만, 개별 현장에서 사용될 때에는 강하게 구조화된다. 이러한 물체는 추상적일 수도, 구체적일 수도 있다. 그들은 서로 다른 사회세계마다 서로 다른 의미를 가지고 있지만, 그들의 구조는 그들을 알아볼 수 있도록, 번역의 수단인, 두 개 이상의 세계에게 충분히 공통적이다.
Boundary objects are objects which are both plastic enough to adapt to local needs and the constraints of the several parties employing them, yet robust enough to maintain a common identity across sites. They are weakly structured in common use, and become strongly structured in individual-site use. These objects may be abstract or concrete. They have different meanings in different social worlds but their structure is common enough to more than one world to make them recognizable, a means of translation.
마지막
Final thoughts
HPE가 한 분야로서 지위를 획들하려면, 이론적, 실제적 이해관계에 동일한 가중치를 부여함으로써 내포된 불가피한 긴장을 생산적으로 수용하고 이용해야 할 것이다. 스토크스의 모델은 use-inspired basic research가 생산되어야 하는 경제적, 정치적, 사회문화적 조건에 대해 말하지 않는다. 따라서, 많은 다른 측면들 중에서, 프로젝트 자금, 기관 고용 및 촉진 정책, 보급 창구를 포함하여, 지식 생산 분야의 물질과 조직 요건에 대해서는 여전히 알아야 할 것들이 많다.
If HPE is to embrace the status of a field, it will have to embrace and harness productively the inevitable tensions implied by granting equal weight to theoretical and practical interests. Stokes’s model does not speak to the economic, political, and sociocultural conditions under which use-inspired basic research is to be produced. Hence, there is much to be learned about the material and organizational requirements of a knowledge-producing field, including, among many other aspects, project funding,5 institutional employment and promotion policies, and dissemination channels.
또한, 긴장 상태에서 생산적으로 작동하는 것이 어려운 만큼, 그 긴장 상태를 유지하는 것도 어렵다.
한 분야의 구성원은 낡은 습관에 이끌려, 같은 생각을 가진 다른 사람들을 찾고, 징계나 실천 공동체를 모방한 하위 분야로 수렴하여 새로운 내부 경계를 확립할 수 있다.
반대로, 구성원들이 서로를 너무 잘 알게 되면, 서로의 관점을 효과적으로 '식민지화'하고 분야의 활력을 떨어뜨릴 수도 있다.
Moreover, if operating productively in tension is challenging, so is maintaining that tension.
A field’s members can be drawn into old habits, seeking like-minded others and converging into subfields that mimic disciplinary or practice communities and establish new internal boundaries.
Alternately, members might get to know each other too well, effectively “colonizing” each others’ perspectives and reducing the vitality of the field.
후자는 먼 위협처럼 보일 수도 있다. 인정하건대, 화해할 수 없는 상황에서 긴장이 무너질 가능성이 더 높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을 수정하지 않고 차이를 유지하는 것은 한 분야의 사인 qua non이며 우리가 파스퇴르의 사분면에서 우리 자신을 발견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The latter may seem a distant threat—admittedly, tensions may be more likely to collapse in the face of irreconcilability—but maintaining difference without reifying it is the sine qua non of a field and the only way we will find ourselves in Pasteur’s quadrant.
34. Yardley S. Lost in translation: Why medical education research must embrace “real-world” complexities. Medical Education 2014;48(3):225–7.
HPE as a Field: Implications for the Production of Compelling Knowledge
- PMID: 29240451
- DOI: 10.1080/10401334.2017.1392864
Abstract
Issue: Research in education, including health professions education, has long struggled with the competing concerns of academic and practice-based stakeholders. Inspired partially by the work of Stokes and other theorists in science and technology studies, we propose that discussions about compelling research in health professions education might be usefully advanced by considering what it would mean if the community framed itself as a knowledge-producing field instead of aligning itself with either disciplinary or practical interests.
Evidence: Efforts to foreground disciplinary or practical interests in education research have been unproductive, leading to the privileging of one group's expertise at the expense of the other. Currently proposed principles and practices for responding to the divergence between these interests, such as knowledge translation or practitioner inquiry, have yielded comparatively little in the way of mutual satisfaction.
Implications: As a field, health professions education research would not privilege either disciplinary or practical interests, nor would it attempt any sort of definitive blueprint for resolution to the tension. Rather it would regard these interests as inherently interconnected and, therefore, always in tension to varying degrees. The challenge for a field is not to resolve that tension but to harness it in productive ways through collaboration, negotiation, and compromise, through ever-shifting engagements that will not necessarily be comfortable but will nonetheless foster knowledge that resonates with all parts of the community.
Keywords: Pasteur's quadrant; disciplinarity; educational practice; knowledge production; research and practice relationship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