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 표현의 자유? (Med Educ, 2022)
Teaching: The expression of freedom?
Zareen Zaidi

 

필자는 Freire의 영향을 받은 학자로서, 이전에 식민지화된 국가에서 교육을 받고, 전 세계 북부에서 의료 교육 도구와 관행의 구현에 대해 교육을 받았으며, 그 후 전 세계 남부에서 이러한 접근 방식을 활용했다. Du et al의 문제 기반 학습(PBL) 촉진자 역할을 협상하는 보건 교육자의 전문 기관에 대한 기사는 나의 관심을 끌었다. 파울로 프레이레는 교육학을 매우 정치적인 관행이기도 한 자유의 실천으로 보았다. 이러한 비판적이고 탈식민지적인 관점에서, 나는 외부 신자유주의/서구적 모델이 카타르에 있는 Du et al의 PBL 촉진자들의 기관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 궁금해하고 이 논평에서 몇 가지 관점을 논의하였다.
As a Freirean-inspired scholar who has been educated in a previously colonised country, trained in implementation of medical education tools and practices in the global North, and has then utilised these approaches in the global South, Du et al.'s1 article on health educators' professional agency in negotiating their Problem-Based Learning (PBL) facilitator roles captured my attention. Paulo Freire viewed pedagogy as a practice of freedom that is also an eminently political practice. From this critical and decolonial point of view,2-4 I wondered about the impact of external neoliberal/western models on the agency of Du et al.'s PBL facilitators in Qatar and discuss some perspectives in this commentary.

세계적으로 의학교육의 기초는 '신자유주의'라는 이념에 점점 더 기반을 두고 있다. 신자유주의란 모든 경제활동에서 [민간부문의 역할]을 높이기 위해 노력하면서, [국가의 간섭을 제한함]으로써 자본주의를 통한 진보를 이룰 수 있다는 이념이다.5 교육 기관은 시장 주도형이며, 경쟁력을 강조한다. 신자유주의는 교육이 더 많은 표준화와 교수진의 더 많은 관리 통제와 함께 비즈니스 세계를 모델로 삼을 것을 요구한다. 신자유주의적 관점에서 교직원은 (Freire에 따라) 부차적인 계급으로 간주되거나, 학생들이 고객으로 보는 관점과 별합하여 army of labour로 간주된다. 
Globally, the foundations of the pedagogical system in medical education are increasingly based upon the ideology of ‘neoliberalism’. This is the ideology that progress can be achieved through capitalism and by limiting state interference while working to increase the role of the private sector in all economic activities.5 Education institutions are market driven, placing emphasis on competitiveness. Neoliberalism calls for education to be modelled after the business world with more standardisation and more managerial control of faculty. From a neoliberal perspective, faculty are viewed as a subaltern class (per Freire) or as an army of labour with students viewed as customers.6-8

[의학 교육에서 신자유주의의 증거]는, 주로 경제적 측면과 실습 확대에 초점을 맞춘 제도적 목표를 위해 교수들에게 [서비스 수익 창출에 대한 압력]을 증가시키는 학문적 비즈니스 모델에서 찾을 수 있다. 교육 및 연구 참여에 대한 보상이 거의 없는 상태에서 임상 생산성에 대한 집중도가 높아짐에 따라 환자 치료, 교육 및 연구 등 학술적 의료academic medicine의 임무가 위협받고 있습니다.
Evidence of neoliberalism in medical education can be found in the academic business models putting increased pressure on faculty to generate revenue in service to institutional goals that primarily focus on economics and practice expansion. The increased focus on clinical productivity with little compensation for engagement in education and research threatens the very mission of academic medicine—patient care, education and research.9

신자유주의는 개인과 기관이 '컨설턴트'나 파트너로 급여를 받는 등 역량기반 의료교육(CBME), 위탁가능 전문활동(EPA), PBL 등 하향식 교육과정에 초점을 맞춰 교육을 감염시킨다. MCQ와 OSCE를 포함한 평가도 관행을 표준화하는 데 사용되는 핵심 도구이다. 이러한 평가의 문제 중 하나는 '학습이 일련의 측정 가능한 기술과 행동으로 축소될 위험성'이지만, 이 관행은 또한 의료 교육을 영리 공급업체가 시험 준비 서적 및 인증을 판매하는 시장으로 변화시킨다(MCAT, Step 1-2, NBME).  
Neoliberalism infects education through a focus on top-down curricula such as competency-based medical education (CBME), Entrustable Professional Activities (EPAs) and PBL, with individuals and institutions being paid as ‘consultants’ or partners. Assessments including MCQ's and OSCEs are also key tools used to standardise practice. Although one of the problems with such assessments is the ‘risk of reducing learning to a series of measurable skills and behaviours’,10 the practice also turns medical education into a marketplace where for-profit vendors sell test prep and certification (MCAT, Step 1–2, NBME).11

신자유주의는 표준화된 무언가가 이익과 축적을 위해 거래되는 모델로 나타난다. 이와 관련하여 도그라 등은 많은 교육적 접근법이 '소수자에 대한 백인 지배의 역사적 맥락에 뿌리를 두고 있다'고 언급하고 있다. 겉보기에는 온화해 보이지만, 전문성 문화의 지배는 궁극적으로 파트너 기관의 전통 문화를 압도한다. 요점은, 이러한 교류가 반드시 양방향일 필요는 없고, 한 문화가 다른 문화에 대해 비대칭적인 문화적 강요가 된다는 것이다.
Neoliberalism, that is, manifests as models that become standardised and traded for profit and accumulation.12, 13 In this regard, Dogra et al. note that many educational approaches are ‘rooted in the historical context of white domination of disadvantaged minorities’.14 The dominance of the culture of expertise, although seemingly benign, ultimately overwhelms the traditional cultures of partnering institutions.15 The point being, these exchanges are not necessarily bidirectional, but are asymmetric cultural impositions of one culture upon another.

PBL은 고전적인 신자유주의 교육학적 사례로 작용한다. PBL은 또한 인적 자원에 대한 비용과 수요로 인해 비판받았지만, 여전히 전 세계적으로 널리 채택되어 왔으며, 이 분야의 서양 전문가들이 비서구적, 종종 비민주적, 맥락적, 또는 지역 교수진이 교육 프로그램에 등록하기 위해 개발도상국 기관의 지원을 받고 있다. 이런 의미에서, PBL은 위계에 도전하지 않으며, 전문가(주로 서구 출신의 부유한 전문가)가 비서구민에 대한 권한을 부여하는 전문화된 권위의 기존 구조를 유지한다. 또한, 교육자들은 교육의 목표를 더 폭넓게 성찰할 필요가 있다. 만약 목표가 [해방과 형평성]을 포함한다면, 교육자의 전문성을 인정하고 그들이 처한 상황에서 학습자의 요구를 충족시키기 위해 그들의 전문성을 사용할 수 있도록 권한을 부여하는 교육학의 필요성이 있다. PBL의 일부 지지자들은 PBL이 비판적 사고를 촉진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Freire는 비판적 사고가 시험으로 확인할 목표나 성과가 아니라고 설명함으로써 이 주장에 이의를 제기할 가능성이 높다. 오히려, 비판적 사고는 자기 결정과 시민 참여를 위한 도구이다.

PBL serves as a classic neoliberal pedagogical example. Although PBL has also been critiqued for its cost and demand on human resources, there has still been broad adoption worldwide, with western experts in the field being invited to implement PBL in non-western, often non-democratic, contexts or local faculty being supported by institutions in developing countries to enrol in training programmes.13, 16 In this sense, PBL does not challenge hierarchy but sustains the existing structure of professionalised authority wherein experts (primarily wealthy professionals from the west) are afforded power over non-westerners.17, 18 Additionally, educators need to reflect on the goals of education more broadly. If the goals include emancipation and equity, then there is a need for pedagogies that recognise the expertise of educators and empower them to use their expertise to meet the needs of the learners in the context they are situated. Some proponents of PBL contend that PBL can promote critical thinking; Freire would likely contest this claim by explaining that critical thinking is not an objective or outcome to be tested. Rather, it is a tool for self-determination and civic engagement.8

점점 더 [비서구권 맥락에 초대받는 서양 교육자들]과 [비서구권 기관] 간의 양방향 협업 교류가 요구되고 있다. 이러한 요구를 고려할 때, 나는 [국제적으로 협력하도록 초청된 의학 교육 학자들과 서양 훈련 맥락의 연구자들]이 프로젝트의 실행 과정 동안 그들의 reflexivity(즉, 그들의 판단, 관행 및 신념)을 설명할 것을 권고한이다. 그래서 그들의 가정과 관점이 독자들에게 명확하게 드러나야 한다. [반사성의 과정]은 권력 역학에 대한 논의와 그러한 우려를 잠재적으로 해결하기 위한 노력이 어떻게 이루어졌는지를 입증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Increasingly, there have been several calls for bidirectional collaborative exchanges between western educators and their institutions, who are invited to non-western contexts.4, 19-21 Given these calls, I would encourage medical education scholars and researchers from western training contexts who are invited to collaborate internationally to describe their reflexivity (i.e. their judgements, practices and beliefs) throughout the process of implementation of a project so their assumptions and perspectives are evident to readers. The process of reflexivity would help demonstrate discussions about power dynamics and how efforts were made to potentially address such concerns.

카타르 보건 전문 교육 프로그램에서 PBL 촉진자 역할을 협상하는 촉진자의 professional agency에 초점을 맞춘 Du 등의 논문은 이러한 인식론적 관점과 맥락으로 읽을 수 있다. 카타르는 주로 이슬람교도이며, 1868년부터 군주제에 의해 통치되어 1971년 영국의 지배로부터 독립했습니다. 세계 자본주의 시장에서 상당한 자원과 부를 가진 지역 강국으로 부상했다.
It is with this epistemological lens22 and context that I read Du et al.'s1 article, which focuses on the professional agency of facilitators in negotiating their PBL facilitator roles in a health professions education programme in Qatar. Qatar is predominantly Muslim and has been ruled by a monarchy since 1868, gaining independence from British rule in 1971. It has emerged in the global capitalistic market as a regional powerhouse with significant resources and wealth.

Du et al.의 연구는 카타르 의과대학의 교수진의 agency를 조사한다. 간단한 말로 설명하면, 대리인은 그들의 일을 구체화하는데 있어 교사들의 적극적인 기여이다(즉, 개인과 직업 생활에서 통제력을 행사할 수 있는 정도). 저자들은 Q-방법론을 사용하여 촉진자의 전문 기관의 출처에 대한 5가지 다른 '관점'을 확인했는데, 그 중 4개는 긍정적이고 1개는 부정적이었다. 부정적인 시각(PBL 퍼실리테이터 agency의 출처로서의 정책지침)을 표명한 참가자들은 PBL 역할에 대한 agency가 떨어지는 것으로 나타났으며, 퍼실리테이션 업무에 대한 인식이 좋지 않고, 관심이 부족한 것으로 나타났다. 저자들은 이것이 [교수와 학습에 대한 관심이 부족]하다거나, [PBL 및 학생 중심 학습과 일치하지 않는 교육학적 신념]을 유지하는 것과 같은 [개인 내 특성]과 관련이 있을 수 있다고 가정한다.
Du et al.'s study examines the agency of faculty at Qatar University College of Medicine. Described in simple words, agency is the active contribution of teachers in shaping their work (i.e. the extent to which they are able to exert control in their personal and professional lives).23 Using Q-methodology, the authors identified five different ‘viewpoints’ on the sources of facilitators' professional agency, four of which were positive and one of which was negative. Participants expressing the negative viewpoint (policy guidelines as a source of PBL facilitator agency) appeared to be less agentic regarding their PBL roles and reported poor perceptions and lack of interest in facilitation work. The authors postulate that this may be connected to their intrapersonal traits such as lacking interest in teaching and learning and holding pedagogical beliefs that were not aligned with PBL and student-centred learning.

신자유주의 교육 모델의 역사를 고려할 때, 이러한 결과는 흥미롭지만 확실히 놀랍지는 않다. 하나의 교육 모델을 외국의 맥락에 적용하는 것을 전제로 하는 한, [가치 불일치]에 직면한다는 점에서 [촉진 과정에 대한 관심 부족]은 타당하다. 경험이 적거나 대학에 처음 온 교수진이 가치 불협화음을 더 많이 경험했다는 사실은 더 많은 탐구를 할 만하다. 비록 이 기관의 교수진이 일반적으로 PBL을 지지했지만, 그 결과는 기관/지역에 더 유기적일 수 있는 대안적인 교육학적 모델에 대한 의문을 제기한다. 신자유주의적 관점에서, 교수진의 agency는 (서부로부터) PBL 전문가들이 규정한 교육학을 집행enact할 수 있는 능력에 기초한다. 그러나 프리어의 해방적 관점에서는 다른 의미를 가질 것이다. 교수진은, 저자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교육에 대한 agency가 부족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신이 설계의 이해당사자가 아닌 커리큘럼에 환멸을 느꼈을 수도 있다. 이 틀을 통해, 교수진은 [설계의 행위자성design agency]가 부족했고, 서구 교육학적 틀을 전달하는 [수동적인 군대passive army]가 되었다.
Given the history of neoliberal education models, these results are interesting but certainly not surprising. Insofar as education is premised upon the imposition of one model onto a foreign context, the lack of interest in facilitation processes makes sense in the face of value dissonance. The fact that faculty with less experience or who are new to the university experienced more value dissonance warrants more exploration. Although faculty at this institution were generally supportive of PBL, the results beg the question of alternative pedagogical models that may be more organic to the institution/region. From a neoliberal perspective, the faculty's agency is based on their ability to enact the pedagogy as prescribed by the experts in PBL (from the west). But from a Freirean emancipatory perspective agency would have a different meaning. The faculty may not have less agency about teaching, as the authors claim, but may rather have been disillusioned by a curriculum they were not stakeholders in designing. Through this frame, the faculty lacked design agency and became a passive army for the delivery of western pedagogical frameworks.

비록 저자들은 촉진자들 사이에 agency의 차이가 있었다고 결론지었고, 일부는 그들의 역할에 대해 더 'agentic'하였다. 하지만 그런 높은 agency는 외부 신자유주의/서구적 모델에 의해 어떻게 중재되었는가? 기관이 행동한다는 것은 PBL 채택에 반대하는 목소리를 낼 수 있는 능력을 의미하는가? PBL 모델은 의견 공유를 허용하고 교수진이 오프스크립트(즉, 진행자 가이드에서 드리프트)로 갈 수 있도록 허용합니까? [agency]와 [위계질서] 사이의 역설은 비서구적 기관에만 내재된 것이 아니라 서양의 맥락에서도 존재하며, 교수진의 기관은 종종 기관과 통치 기관의 위계질서와 권력 역학에 의해 억압된다. 
Although the authors conclude that there was a variation of agency amongst the facilitators, with some being more ‘agentic’ about their role, how was that agency mediated by external neoliberal/western models? Does agency to act imply the capacity to voice disagreement with adopting PBL? Does the model of PBL permit sharing of opinions and allow faculty to go off-script (i.e. drift from the facilitator guide)? The paradox between agency and hierarchy is not intrinsic to only non-western institutions, rather is present in the western context as well, where the agency of faculty is often suppressed by hierarchy and power dynamics of the institution and governing bodies.24

따라서 신자유주의는 [단순한 행동 능력이 아니라, 의사소통 교환의 표준화된 모델에 저항하는 능력]으로 정의되는, pure agency의 표현을 억제하는 위계구조의 접지선grounding wire 역할을 한다. 의학교육이 측정과 기준 설정을 통해 지속된 교육의 상품화라는 족쇄를 없앨 수 있을 때까지, 이 시스템은 교직원들을 계속 억압할 것이다. 그 결과 평등주의를 악용한 교육모델을 양성하고, 그 과정에 관여한 교사를 무시할 것이다. [유기적 촉진자로서의 교사의 역할]은 [특정한 방식으로 전달되는 특정한 종류의 스크립트 콘텐츠]를 학생들의 의식 속에 '기탁deposit'하려는 기계적인 욕구에 의해 억제된다. 그렇다면 교육은 [agency of teachers]라는 주장에도 불구하고 자유의 대척점이 된다.

Neoliberalism thus serves as a grounding wire for a hierarchy that suppresses the expression of pure agency, defined not simply as the ability to act, but also as the capacity to resist standardised models of communicative exchange. Until medical education can get rid of the shackles of commodification of education perpetuated through measurement and standard setting, the system will continue to suppress faculty. The result is the cultivation of educational models under the ruse of egalitarianism with a disregard for the teachers involved in the process. The role of teacher as an organic facilitator becomes sub-tended by a mechanistic desire to ‘deposit’25 a particular kind of scripted content delivered in a particular way into the consciousness of students. Education, then, becomes the antithesis of freedom despite an insistence on the supposed agency of teachers.

Du 등은 'agentic action의 시행을 강조하는 대안적 접근법' 개발, 공유된 'PBL 촉진 작업에 대한 이해', 나아가 PBL 촉진에 대한 전문적인 학습을 지원하기 위한 '제도적 노력'을 개발할 것을 권고한다. 그러나 나는 다음과 같은 질문이 필요하다고 주장하고 싶다. 우리는 정말로 교수진에게 권한을 주고 싶은가, 아니면 순응을 원하는가? 우리는 그들이 PBL 진행자 가이드를 고수하기를 원합니까, 아니면 그들이 그들의 경험을 공유하는 주제를 벗어나도록 장려하기를 원합니까? 우리가 교육과정에서 비판적 사고를 열망할 때에도 우리는 단순히 사람들에게 '최고의 답'을 주고 '대본'을 따르는 방법을 훈련시키는 순환을 영속시키고 있는가?
Du et al. recommend working on developing ‘alternate approaches highlighting enforcement of agentic actions’, a shared ‘understanding of PBL facilitation work’ and further ‘institutional efforts’ to support professional learning for PBL facilitation. However, I would contend that the following questions need to be asked: Do we really want to give faculty agency or do we want conformity? Would we like them to stick to PBL facilitator guides or encourage them to go off topic sharing their experiences? Even when we aspire for critical thinking in the curriculum are we simply perpetuating a cycle of training people how to give the ‘best answer’ and follow a ‘script’?

국제적으로 일할 기회를 가졌고 기관이 지역의 필요와 맥락에 거의 관심을 기울이지 않고 서구 교육 도구를 채택하는 방법을 목격한 의학 교육자이자 학자로서, 나는 이 경험을 서구 환경에서 그러한 도구의 활용과 비교할 수 있다. 주목해야 할 공통점 중 하나는 커리큘럼 설계 및 구현에 관한 faculty agency의 부재로, 이들의 역할이 숙련된 기술 조교skilled technical assistants로 축소되었다는 것이다. Paulo Freire는 가르치는 것이 자유의 표현이라고 말했다. 나는 우리 독자들이 이 질문에 수사적으로 대답하도록 남겨둔다: 현재의 신자유주의 시대에, 가르치는 것은 정말로 자유의 표현인가?

As a medical educator and scholar who has had the opportunity to work internationally and has witnessed how institutions adopt western pedagogical tools with little attention to local needs and contexts, I am able to compare this experience with utilisation of such tools in western settings. One of the commonalities to be noted is the lack of faculty agency regarding curriculum design and implementation, with their role being reduced to that of skilled technical assistants. Paulo Freire said teaching is the expression of freedom. I leave our readers to rhetorically answer this as a question: In the current neoliberal times, is teaching truly an expression of freedom?

 


Med Educ. 2022 Aug;56(8):787-790. doi: 10.1111/medu.14849. Epub 2022 Jun 14.

Teaching: The expression of freedom?

Affiliations collapse

Affiliation

1Division of General Internal Medicine, George Washington School of Medicine & Health Sciences, Washington, District of Columbia, USA.

PMID: 35670766

DOI: 10.1111/medu.148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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