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문직 윤리로서의 의료윤리-의사다움이란
권복규
이화여자대학교 의학전문대학원 의학교육학교실
서 론
의사 사회가 위기이다. 교수는 교수대로, 봉직의는 봉직의 대로, 개원의는 개원의대로 팍팍한 의료 환경 속에서 생존을 위해 몸부림치지만 어느 하나 쉬운 일이 없다. 의사가 사회적 인 존경은 물론, 직업적 권위에다가 상당한 소득까지 올릴 수 있었던 과거가 불과 한 세대 이전의 일이지만, 지금은 그 중 어느 것도 바라기 어려운 시대가 되었다. 한 해 3천 5백명 이상의 의사들이 새로이 배출되어 경쟁은 날로 치열해지지만 개별 의사의 소득은 오히려 예전보다 줄고 있으며, 환자들의 갖가지 요구가 늘어나면서 이들의 불만과 분쟁도 함께 증가하 고 있다. 고령화와 더불어 의료비는 매년 큰 폭으로 증가하고 있어서 국민건강보험공단과 정부는 어떻게든 이를 억제하기 위해 의사들의 의료행위를 계속 간섭하고 억압한다. 이렇듯 한국의 의사는 환자, 사회, 정부에 의해 사방으로 포위된 형국 에 있는데, 의사의 입장을 이해하고 편을 들어주는 사람이나 세력은 그 누구도 없다. 의사가 아닌 많은 이들에게, 의사는 병을 앓고 있으므로 약자인 ‘환자’에 대해 어떤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모든 희생을 감수해내야 하는 존재이며, 여전히 ‘사회지도층’에 속하는 기득권층이고, 어느 누구보다도 높은 수 준의 ‘도덕적 삶’을 살아야 하는 사람들이다.
의사가 처해 있는 현실과 일반인의 이런 비현실적인 기대 는 첨예하게 부딪칠 수밖에 없는데, 때문에 이런 갈등 속에서 ‘윤리’는 의사들을 비난하고 옥죄는 하나의 구실에 불과하다 는 주장이 의사 사회 내부에서 힘을 얻고 있기도 하다. 의사 사회 내의 일부 강경 집단은 이제까지 의사들을 구속하기만 했던 ‘윤리’는 집어치우고, 정부와 사회에 대한 강고한 투쟁을 하는 것이 더욱 생산적이라는 주장을 하기도 한다. 이러한 주장에 일리가 없지는 않다. 적어도 한국 사회에서 ‘윤리’는 사 회적 소통을 촉진하고, 바람직한 사회적 선을 증진시키기 보 다는, 마음에 들지 않거나 적대시하는 개인, 혹은 집단들을 비난하고 이들을 몰락시키기 위한 정치적 수단으로 사용되어 왔기 때문이다. 사회적 모순과 정치적 갈등을 개인의 ‘윤리 문제’로 치환시키고, 누구누구는 이런저런 문제가 있으므로 정치적, 사회적 역할을 하지 말아야 한다는 주장은 과거로부 터 오늘날까지 익숙한 풍경이다. 최근에도 어떤 인사가 정치 적인 자리에 임명될라치면 그의 사생활로부터 ‘논문 조작’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윤리적’ 사안들을 검증받아야 하며, 그 과 정에서 그의 윤리적 흠결이 과연 그의 업무 수행과 무슨 관련 이 있는지에 대한 핵심적 쟁점은 아무도 모르는 새에 증발해 버리는 일도 왕왕 있다.
아마도 이러한 현상은 우리 사회의 뿌리 깊은 전통 유가적 생활태도와 깊은 관련이 있는 것 같은데, 유가적 세계관에서 는 예컨대 자기 몸을 잘 닦고 처신하며(修身), 집안을 바르게 운영하는(齊家) 능력이 국가와 사회에서 공직을 맡기에 적합 한 자질이라는 생각이 널리 퍼져있기 때문이다. 한국 사회에 서 ‘윤리’를 논할 때는 무의식적으로 어릴 때부터 몸에 익히고 배운 ‘사람답게 사는 길’의 측면에서 이를 이해하게 된다.
예 컨대 효성이 지극하며, 물질적 이익에 초연하고, 성적 욕망을 잘 통제하며, 인간관계가 좋은(인정이 많은) 사람을 우리는 ‘윤리적 인간’으로 이해한다.
반면, 안팎과 신념이 일치하고, 정직하며, 사적 인간관계를 좀 훼손하더라도(인정머리가 없더 라도) 공적 직무에 충실하며, 합당한 범위 내에서 자신의 이익 을 추구하는 인간형을 우리는 그다지 ‘윤리적’이라고 여기지 않는다.
사실 후자는 서양 계몽주의에서 비롯된 근대인의 윤 리적 이상인데도 불구하고 말이다. 때문에 의사 사회에서 ‘윤 리’를 논하면, 시대에 뒤떨어진 고리타분한 자, 심지어 가뜩이 나 어려움에 처한 의사들의 현실에 무지하며 오히려 의사들을 억압하는 세력과 한 편이 되어 동료를 음해하는 자로 여겨질 수도 있다. 2002년 의약분업 사태 시에 의사들의 ‘파업 투쟁’ 에 반대한 측이 그러한 행동은 “의사의 윤리에 반한다”고 주 장했던 것이 그 한 예이다. 그러나 의사의 전문직 윤리(professional ethics)를 논할 때 우리는 ‘윤리’라는 단어에 덧씌워 진 이러한 전통적인 윤리관에 물든 아우라를 탈피해야만 하 며, 그래야만 전문직 윤리에 대한 합리적인 논의가 가능하다. 앞으로 드러나겠지만 현대적인 의미에서 전문직 윤리는 의사 를 옥죄거나 구속하는 것이 아닌, 의사가 전문직으로서 직업 적 존엄성을 지니고 바로 서기 위해 꼭 필요한 역량이다. 이 글에서는 전문직 윤리의 개념을 살펴보고, 그것이 의사의 의 사다움과 어떤 관련이 있는지를 검토해 보고자 한다. 이는 오 늘날 우리나라의 의사 집단이 겪는 위기를 타개하기 위해서라 도 반드시 필요한 작업이다.
전문직 윤리와 의사의 직업적 존엄
이미 언급한 여러 오해들과는 달리 기본적으로 전문직 윤 리란 특정인 A씨가 삶을 어떻게 영위해야 하는가, 그가 도덕 적인 사람인가 그렇지 않은가 하는 전통적인 윤리와는 별로 관련이 없다. 오히려 그 특정인 A씨가 의사라고 하면 그가 의사로서 지켜야 할 규범은 무엇인가에 관심이 있다. 이 규범 은 그가 의사로서 기능할 때 적용되지만, 가장으로서, 남편/아 내로서, 사회인으로서, 자녀로서 기능할 때는 별로 관련이 없 다. 전문직 윤리는 의사의 의사다움(professional integrity)이 나 전문직업성(professionalism)을 얼마나 잘 준수하고 있는 지를 알려주는 규범이다. 극단적으로 말해서 특정 의사 A씨 가 부모님에게 불효하고 부모님과 의절하고 산다 해도, 성적 파트너를 계속 갈아치우는 난봉꾼이라 해도, 도박에 빠져 가 산을 탕진했다 해도, 혹은 부동산 투기를 해서 엄청난 재산을 모았다 해도 그가 의사로서 환자에게 적절하게 행위하고 있는 한 전문직 윤리의 입장에서는 그를 비난할 어떠한 이유도 찾 을 수 없다. 여전히 전근대적 문화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한국 사회에서는 개인윤리(personal ethics)와 직무윤리를 혼 동하고 있기 때문에 이것이 문제가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새삼스럽게 왜 지금 전문직 윤리가 문제가 되는 가? 그것은 위기에 처한 한국 의료 상황에서 의사 집단의 전 문직 존엄(professional dignity)의 회복을 위해 전문직 윤리 가 그 어느 때보다도 필요한 상황이 되었기 때문이다. 돌이켜 보면 1970-1990년의 대략 20년 동안 한국의 의사들은 역사상 가장 큰 호황기를 맞았었다.
일제 강점기 이래 서양의학을 공 부한 의사 집단은 한국 사회에서 가장 공부를 많이 하고 첨단 과학지식을 습득하였으며, 인명을 구한다는 직업의 속성에 대 한 인정도 받았고, 사회적 지위 또한 높았다. 때문에 이들은 크게 무리하지 않아도 전문가로서의 자존심을 지키며 자신의 직무에 종사할 수 있었다.
특히 경제 성장이 어느 정도 제 궤 도에 오른 1970년대 이후로는 인구의 증가와 함께 의료 구매 력이 있는 인구도 크게 늘어난 반면 의사의 숫자는 그리 많이 늘지 않아서 의사들은 조금만 열심히 노력하면 매우 여유있는 생활을 할 수 있었다. 오히려 이때는 전문직 윤리에 대한 요청 도 그리 높지 않았는데, 전통적인 윤리규범 만으로도 의사의 행위에 대한 통제가 가능했고, 생존을 위해 무리할 필요가 없 었으며, 좁은 의료계 사회 내에서 선후배로 이어지는 무형의 질서가 그럭저럭 작동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모두에 서 언급한 오늘날의 의료 상황, 즉 1988년 이후 전국민 건강 보험제도의 수립과 만성화된 저수가 정책, 그리고 의과대학 신증설에 따른 신규 배출 의사의 증가로 인해 생존 경쟁이 치열해지면서 정통 의료가 아닌 의료 상품의 영역으로 수많은 의사들이 몰려갔으며, 의료가 일종의 서비스 상품으로 여겨지_게 되었고, 이에 따라 의사 집단 내의 직역 간, 혹은 의사 간 갈등도 심화되었다. 의료 서비스에 대한 환자들의 기대가 커 짐에 따라서 불만도 커졌고, 의사의 사회적 지위가 추락함에 따라 존경심도 더불어 떨어지고 있으며, 근본적으로 모순적인 보건의료 정책에서 기인한 각종 부정적 사례들-허위/부당 청 구, 리베이트, 보험 사기 등등-이 전체 의사의 위상을 흔들고 있는 것이다. 때문에 오늘날의 의사들은 과거보다 더욱 심한 윤리적 갈등 및 스트레스 상황에 처하게 되었고 의사 집단 전체로서도 깊은 위기의식을 안게 되었다. 전문직 윤리는 이 러한 상황을 타개하고자 하는 필사적인 노력이다.
전문직 윤리와 의사의 정체성
한국 의사들이 겪고 있는 이 위기를 극복하려면 우선 한국 의사의 정체성을 찾는 데서 출발해야 할 것이다. 의사의 정체 성이란 결국 의사의 ‘의사다움’을 의미한다. 의사다움이란 허 구적인 ‘허준’, 또는 장기려 선생이나 이태석 신부와 같은 ‘이 상적인 의사(ideal doctor)’가 아니라, 현실적으로 존재하고 기능하는 바람직한 의사의 모델을 말한다. 한국 사회에서는 ‘이상(ideal)’과 모델(model)을 늘 혼동하는데, 장기려 선생이 나 이태석 신부는 도덕적 이상 내지 도덕적 영웅은 될 수 있겠 지만, 모든 의사가 그렇게 살 수도 없고, 또 그럴 필요도 없는 것이다. 모든 의사에게 이렇게 살아야 한다고 주장하면 그것 은 비현실적일 뿐 아니라 결과적으로 수많은 위선자(hypocrite) 만을 낳을 뿐이다. 조선시대는 성리학의 도덕적 이상을 국가적으로 추구한 사회였지만, 그 결과는 소수의 진실한 영 웅을 제외하고 선비를 자처한 수많은 무위도식하는 위선자를 낳았을 뿐이었다. 어쨌든 21세기라는 글로벌화된 현대 사회 에서 우리는 적어도 현실에 적합한 의사의 모델을 구성할 수 있으며, 또 그렇게 해야 한다. 이 모델을 구성하는 것은 의사 집단, 특히 의사 단체의 역할이다. 그리고 이 의사의 모델이 추구하는 규범이 바로 의사의 전문직 윤리가 된다.
히포크라테스 선서는 의사의 전문직 윤리의 고전적인 모델 이다. 이 규범 안에는 스승과 동료에 대한 예의, 특정 시술(낙 태약, 방광결석 제거술)에 대한 금지, 환자에 대한 태도(환자 의 바람과 이득을 우선시하고, 성적 접촉을 피하는 것)이 들어 있다. 그 어디에도 “선한” 혹은 “이상적인” 의사가 되어야 한 다는 주장은 없다.1
이 고전적인 규범은 18세기 이후 근대 의 료가 성립하면서 다시 태어나는데, 수많은 돌팔이들과 각종 의료분파와의 격렬한 투쟁 과정을 통해 자연과학에 입각한 근 대의학이 절대적인 우위를 점하게 되면서 이를 담당한 잘 교 육받은 의사들이 사회에 대해 이러저러한 규범을 지키겠다고 선언하였고, 그 반대급부로 직업적 독립성과 자율성, 그리고 직업적 존엄성을 획득하게 되었다.2 이것이 선진국 의사들이 겪어 온 역사적 경험이다.
우리는 이런 역사적인 체험 없이 그저 외세에 의해 기존의 서양근대의학을 받아들였고, 또 일 제 강점기와 군사정권을 거치면서 전문가 집단으로서의 자율 적인 성장을 도모할 수 없었다는 아쉬움을 가지고 있다.3 그 결과 정부의 보건의료정책에 종속되거나 심지어 부역해야 하 는 ‘의료 공급자’로서의 위상 밖에 가지고 있지 못한 것이 오 늘날 의료계가 처한 위기의 근본인 것이다.
즉, 우리가 이상적 으로 생각하는 선진국 의사들의 높은 위상은 그저 주어진 것 이 아니다. 그들은 자체적인 규범을 준수하지 않는 동료들을 계속 솎아내고, 후속 세대들을 규범에 맞도록 교육하면서 자 기들의 위상을 정립한 것이다. 최근 자본과 각종 의료산업의 팽창, 보험회사와 건강관리기관(health maintenance organization) 등의 성장으로 인해 의사의 전문적 자율성과 독립성 이 크게 위협을 받고 있는 것은 이들도 마찬가지지만, 적어도 선진국의 의사 사회는 그러한 흐름에 대해 자신의 독립성과 존엄성을 지키기 위해 능동적인 노력을 하고 있다.4 그러나 애초에 프로페셔널리즘이 발달하지 못했던 우리 의사들은 이 흐름에서 살아남기 위해 개별적으로는 온갖 애를 쓰고 있지 만, 전체적인 조망에 입각한 집단적인 노력은 크게 부족하다.
전문직 윤리의 개요
의사의 전문직 윤리는 의사가 단순한 ‘자영업자’가 아니라 는 인식으로부터 출발한다. 의업은 ‘도덕적 전문직(moral profession)’ 인데, 사람의 생명과 건강을 구하고 보호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의사에게는 특정한 도덕적 의무가 부여된 다. 그러나 이 의무는 사회가 그에 합당한 처우를 보장할 때 정당화될 수 있다. 즉, 사회는 의사들이 품위있게 생활할 수 있도록 적절한 처우를 해야 하며, 의사의 독립성과 자율성을 보장해야 한다. 의사에 대한 적절한 처우의 보장은, 그것이 보장되지 않을 경우에 개별 의사가 의료로 보기 어려운 의료 상품 판매에 종사하거나 의료자원을 낭비하는 일을 막을 수 없기 때문이다. 덧붙여 의사는 한 사람의 양성에 매우 큰 비용 이 들어가는 사회적 자원이기 때문에 이런 식으로 의사의 역 량을 소비하는 것은 사회 전체적으로 보아 큰 손해가 된다. 어떤 의료제도를 택하였든 간에 이런 인식을 가지고 개별 의사-의사 단체-사회(또는 정부)가 유기적으로 피드백을 주고받 는 것이 선진국의 모습이다. 반면, 이러한 경험이 부재한 개발 도상국 등에서는 질 낮은 의학교육을 통해 의사를 마구잡이로 양산하고, 이들은 개별적으로 마치 일반 자영업자처럼 행동하 며, 결과적으로 의사에 대한 사회적 평판이나 처우도 낮아진 다. 사회적 평판이 형편없는 질 낮은 의사는 결국은 그 사회에 이득이 아닌 해악이 될 뿐이다.
또한 독립성과 자율성 역시 의사만을 위한 것이 아니다. 의업은 고도의 전문직이기 때문에 의사 아닌 누구도 이 영역을 정확히 이해하고 평가하기 어려우므로, 사회(환자)의 최선의 이득을 위해 그러한 독립성 과 자율성을 보장하는 것이다. 그러한 독립성과 자율성은 개 별 의사의 수준은 물론 의사 집단의 수준에서 드러난다. 즉 의사 단체(의사협회 또는 각종 학회)는 개별 의사의 진료의 질을 보장하고, 증진시켜야 하며, 상급 의사, 또는 적절한 권 한을 가진 동료 의사들을 통해 개별 의사의 진료를 판단, 평가 할 수 있다. 예컨대 어떤 진료가 ‘비과학적 진료’ 혹은 ‘과잉 진료’인지, 혹은 어떤 상황에서 해당 진료가 ‘성추행’의 소지 를 안고 있는지 등의 문제는 일반인이 상식적으로 판단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동료 의사들만이 판정할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진료 행위에 필연적으로 따르는 ‘도덕적 규범 성’역시 의학지식과 술기뿐 아니라 의료를 형성하는 핵심 요 소로서 의사들 모두가 알아야만 하는 것이다.5
그러나 전문직업성, 또는 전문직 윤리에 대해 우리나라에 서 가장 빈번하게 일어나는 오류 중 하나가 이를 의사의 ‘인성 (人性)’과 혼동하는 것이다. 개별 의사의 ‘인성’은 좋을 수도 있고, 나쁠 수도 있다. 실제로 ‘인성’이 전통적인 의미의 어떤 ‘도덕성’을 의미한다면 대다수 의사들의 인성은 일반적인 수 준과 같거나 약간 높은 정도일 것이다. 그리고 인성은 어릴 때부터 타고난 성품 및 여러 개인적 체험과 가정교육 등에 의해 형성되는 것이기 때문에 어른이 되어 새삼스럽게 바뀔 것도 아니다. 그러나 의사의 전문직 윤리는 진료(practice)의 핵심 요소로서 개별 의사의 인성이 어떻든 간에 모든 의사가 습득하고 알아야 할 것이다.
수술을 하기 전에 환자에게 ‘동의 (informed consent)’를 받을 때 어떤 요소들을 반드시 설명해 야 하는가, 어떤 방식으로 설명해야 환자가 겁먹거나 위축되 지 않으면서 올바른 판단을 하게 될 것인가 등의 문제는 의사 의 인성과 무관하게 모든 의사가 배워야 할 내용들이다.
이런 무형의 요소는 의료의 소프트웨어를 형성한다. 이제까지 우리 의료는 첨단 의료기기, 첨단 시술법 등 유형적인 하드웨어에 만 집중하였고, 상대적으로 이러한 무형의 소프트웨어에는 소 홀했으며, 그 결과 환자 및 사회의 의료와 의료인에 대한 불 신, 자율적/윤리적으로 해결해야 할 사안들에 대한 행정기관 과 법률의 개입 등이 생겨났다. 의료와 같이 복잡한 영역을 의사 자신들이 아닌 법률의 형태로 해결하고자 하면 필연적으 로 무리와 부작용이 생겨난다. 그런데, 의사들 자신이 이러한 소프트웨어에 별 관심이 없으니 정부와 입법부가 자꾸 끼어들 려고 하는 것이다. 하지만 의료 현장을 모르는 이들이 오로지 상식적인 법의 잣대만을 가지고 들이댈 때 현실에서는 오히려 심각한 부작용이 생긴다는 것을 우리는 이미 1997년의 소위 ‘보라매병원 사건’에서 목격한 바 있다. 이는 작년의 ‘아동 및 청소년의 성보호에 관한 법률 일부 개정안’에서도 그대로 이 어져 수많은 의사들을 잠재적 성범죄자의 목록에 올려놓은 바 있다.
최근에는 의학이 급속도로 발달하면서 의사의 바른 판단과 결정을 요하는 어려운 윤리적 문제가 자꾸만 증가하고 있다. 낙태와 배아줄기세포 연구와 같은 생명의 시작과 관련된 문 제, 유전자검사와 같이 인간에 대한 차별과 우생학적 태도를 초래할 수 있는 기술, 희소한 인간 장기의 배분, 가망 없는 환자에 대한 연명치료 중단과 같은 문제들이다. 이러한 문제 들은 그 자체로 매우 흥미롭고 전 세계의 수많은 철학자, 법학 자, 의사들이 도전하고 있는 쟁점들이지만 그보다는 먼저 의 사 집단이 이러한 문제들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현재 시점에 서 적절하고 타당한 실용적인 규범들을 만들어 내는 것이 필 요하다. 최근의 의료윤리는 의사의 전문직 윤리와 함께 이러 한 생명윤리(bioethics)적 쟁점들을 함께 다루고 있다. 그러나 의사들의 입장에서는 어디까지나 전문직 윤리가 그 근간이 된 다.
결 론
우리나라 의사들의 의학지식과 술기는 세계 최고 수준이지 만, 전문직으로서 자신의 위상을 정립하고 자율성과 존엄성을 지키는 전문직업성과 그 기반이 되는 전문직 윤리에서는 아직 초보적인 수준에 머물러 있다. 우리가 살아온 역사적 배경이 그러한 역량의 성장을 허용하지 않았던 탓이다. 게다가 지식 과 술기는 선진국에서 배워 오면 되지만, 전문직업성과 전문 직 윤리는 우리나라의 문화와 사회에 맞게끔 자체적으로 정립 해 나갈 수 밖에 없다. 전근대와 근대, 탈근대가 마구 혼합된 현대 한국 사회에서 이는 무척이나 어려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의사가 의사답게 살아가기 위해서, 치열한 경쟁 속에 서 일개 자영업자처럼 악다구니를 쓰며 살지 않기 위해서, 정 부나 국가의 거칠고 미숙한 개입을 막고 보건의료의 주체로 떳떳하게 서기 위해서 이는 어렵다고 피해가서는 안 될 일이 다.
전문직업성과 전문직 정신의 핵심에는 ‘조직화된 의료 (organized medicine)’가 있다. 어떤 의사도 개인으로서는 전 문직업성의 규정과 실천을 감당하기 어렵다. 조직화된, 책임 감을 가진 의사 단체만이 전체로서 지켜야 할 규범을 제시하 고, 이를 회원들에게 교육하며, 문제가 있는 회원들은 교정을 하고, 사회에 대해서 떳떳하게 요구사항을 제시할 수 있다. 때로는 그러한 요구가 받아들여지게끔 사회를 설득, 또는 압 박할 수 있다. 1877년 미국 최초의 주 면허법은 주 정부가 원해서 만든 것이 아니라, 당시 미국 앨러배마 주의 주 의사회 에서 정부를 설득하여 돌팔이들을 의료에서 배제하기 위해 만 든 것이다.6 그러한 단체를 조직하고, 규칙(rule)을 만들며, 이 를 준수하는 것이 책임있는 전문직의 태도이며, 또 그러한 태 도가 바로 성숙한 민주주의를 실현하는 길이기도 하다. 의사가 전문직임은 그저 많이 배웠고, 많은 지식을 알고 있다는 사실에 기인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만큼 책임있는 태도 로 행위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었다고 인정받기 때문인 것이 다. 그러므로 각 전문 학회들은 단지 회원들의 친목을 도모하 고 최신 의학지식을 전파하는 기구를 넘어서서, 해당 전문분 야에서 책임있는 전문의의 모습을 규정하고, 수시로 이를 교 육하며, 기대에 미치지 못하는 회원들에게는 책임을 묻는 성 숙한 단체로 거듭나야 한다. 회원들 역시 회비 납부, 임원의 선거권과 피선거권 등을 포함한 학회의 활동에 적극적으로 동 참해야 한다. 의사의 전문적 자율성은 무엇보다 소중한 덕목 이지만, 이는 하고 싶은 것은 무엇이든 마음대로 할 수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며 동료들과 함께 만든 전문직 표준 (professional standard)과 전문직 윤리의 틀 내에서 이루어 진다는 전제가 있음을 알아야만 한다. 그러지 못할 때 정부나 사회가 들이대는 의사들에 대한 통제와 억압은 더욱 심해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Korean J Gastroenterol Vol. 60 No. 3, 135-139
http://dx.doi.org/10.4166/kjg.2012.60.3.135
Medical Ethics as Professional Ethics
Ivo Kwon
Department of Medical Education, Ewha Womans University School of Medicine, Seoul, Korea
Contemporary medical ethics is far from the traditional concept of "In-Sul (仁術, benevolent art)" or "Yul-Li (倫理, ethics), which emphasizes so much the personality or the character of a doctor. Nowadays, medical ethics should be considered as "professional ethics" which regulates the acts and medical practices of ordinary doctors in their daily practice. The key concepts of the professional ethics are "autonomy", "integrity", and "professional standard" established by medical organizations such as medical societies or associations. Most of Korean doctors have not been familiar with the concept of professional ethics or professionalism, which is due to the modern history of Korea. However, the concept of professional ethics is really critical to Korean doctors from the perspective of professional dignity and social respect to this profession. The current healthcare system of Korea is suffering from many problems of both private and public sector. Nonetheless, the professional ethics is urgently demanded for that very reason. (Korean J Gastroenterol 2012;60:135-139)
Key Words: Medical ethics; Professional ethics; Professionalism; Korean docto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