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Chapter 18. A Second Revolutionary Period
    • 20세기가 끝날 무렵 미국 의학교육의 번째 개혁의 시기가 다가오고 있었다. 임상 교육의 환경이 쇠퇴하고 faculty scholarship 사라지고 proprietary system 다시 등장했다. 의과대학들은 대학에서 점차 멀어지고 있었다.
    • 혁명에 관한 연구들을 보면, 1990년대는 "혁명전시대(prerevolutionary age)"라고 불려야 것이다. Prerevolution 급진적인 변화가 바로 앞에 있지만 아직 어떤 변화가 실제로 나타날지 까지는 불확실하다. (이와 비교하여, "Flexnerian revolution" advanced revolutionary stage라고 불릴 하다)
    • 직업군 내부에서 일어난 번째 혁명과 달리 번째 혁명 직후에 벌어진 일들은 의학교육 외부적인 것들이 많다. 비용 절감을 위한 전략이 도입되었고, 시장(market) 가격을 낮출 것을 요구했다. AHC 이러한 환경에 제대로 준비되어있지 않았다.
    • 그러나 번째 혁명도 academic medicine 내부의 환경에서 시작된 것이기도 했다. 세대동안 진료 수입에 과도하게 의지해왔고, 이러한 풍요로운 환경을 잔뜩 즐기고 있었다. 그러나 자원 통제의 시대가 도래하면서 이상 그들이 원하는 것을 가질 없게 되었다.
    • 1990년대의 의학교육과 진료에 생긴 변화는 전부터 오랫동안 지속되어 문제들에 대해 이제야 대응한 것이라고 있고, 많은 의학교육자들과 의사들은 이러한 모습을 반길 것이다. 그렇지만 현재의 미국 의학교육의 변화는 세기를 지켜온 가지 원칙만 지켜지면 된다. 바로 좋은 의사를 만들어내는 것은 사회와 medical faculty 공동의 책임이라는 것이다. 21세기에 대한 희망은, 양측이 각자의 책임을 다시 한번 확인하는 것으로부터 출발한다.

 

  • The Reemergence of a Proprietary System
    • 1990년대 후반, 병원과 의과 대학에 대한 비용 절감 정책이 어떠한 결과를 야기할 것인가는 아직 불분명했다. 하지만 어찌되었든 여러 걱정은 현실화되지 않았고, 대부분의 academic institution들은 살아남았다.
    • 21세기가 도래하면서 미국 의과대학들은 급속히 전혀 다른 종류의 기관이 되어갔다. 가장 눈에 띄는 변화는 clinical enterprise 팽창이었다.
      • 1990년대 후반, full-time faculty 의한 private practice 10년이나 15 전에는 상상도 못할 만큼 작아져 있었다.
    • Faculty practice 지속적인 증가로 인해 좋은 점도 많았다. 진료 수입이 지속적으로 늘었고, 환자의 priority medical center priority 되었다. 보험 회사들은 각각의 또는 division 상대로 협상을 하는 대신, 학교 병원 전체를 커다란 하나의 기관으로 해서 협상을 하게 되었다.
    • 반면 faculty practice 증가하는 것은 managed care 하에서 대부분의 의과대학의 악화된 재정 상황을 반영하는 것이기도 했다. Profit margin 감소하면서 점차 academic mission 위해 투자할 돈이 없어져갔다. 의과대학은 마치 끝없이 빨라지는 treadmill위에 있는 것과 같았다
    • 결과로 의과대학 내의 academic 분위기는 거의 사라졌다. 대부분의 clinical faculty 이제 주로 환자 진료만을 했으며, 연구를 하거나 교육을 하는 일은 거의 없었다.
    • (1)학문적 분위기가 사라지는 것을 보여주는 가지 징표는 research level 감소한 것이다. 연구를 cross-subsidy 해주던 임상 수입의 감소가 직접적 원인이었는데, 모든 종류의 연구가 약화되는 가운데서도 특히 clinical research (basic knowledge practical application으로 translation시키는 연구) 약화되었다.
    • 1990년대 후반, 의학 연구 분야의 커리어는 점차 어려워졌으며, 이미 자리를 잡은 연구자들마저도 좌절과 불확실함과 불안정성을 걱정해야 했다.
      • 1985년부터 1993년까지 NIH grant application 하는 36 이하 연구자들은 3040에서 1389 감소했다.
    • (2) 번째 징조는 scholarly faculty clinical faculty 전환하는 것이었다. 대부분의 의과대학에서는 investigator-teacher clinician teacher track 있었다. 이제 많은 학교에서 진료만을 하는 의사를 고용하기 시작했고, 기존의 faculty "hired hands rather than true faculty"라며 평가절하했다.
      • medical scholar 대다수였던 Clinical department 점차 연구나 교육의 의무가 없는 practitioner 대체되고 있었다.
    • 새로운 faculty뿐만 아니라 기존의 faculty scholarly activity에서 clinical activity 중심을 옮겨가고 있었다.
      • AAMC 1996 모든 학교에 적용가능한 clinical productivity 지표를 개발하려는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 급여 산출 방식(pay plan) 구체적인 사항들(salary level, base pay …) 학교마다 달랐다.
      • 그러나 구체적 산출 공식에 교육적 "productivity" 넣는 학교는 매우 소수에 불과했다.
      • 얼마나 수입을 벌어들였느냐가 가장 중요했고, 진료의 질도 별로 고려하지 않았다.
      • 도시의 부속병원에 GS NS 의사들이 설령 죽어가는 가난한 사람을 훌륭한 수술로서 살려냈다고 해도 그다지 국가적 인정을 받거나 분야의 리더가 되지는 않았다.
    • Academic medicine 그들의 business consultant들에게 이러한 방법은 합리적인 것이었다. 교육이나 연구는 비용만 늘릴 뿐이었다. 아무도 그것이 productivity 적절한 기준인가에 의문을 갖는 사람은 없었다. 미래를 고려하지 않는 회사나 다른 기관들과 마찬가지로 그들은 "지속가능한 설계(built to last)" 하지 않았다.
    • 새로운 시스템이 미친 영향을 종합적으로 보면 clinical faculty 기존의 university work보다는 patient care 하는 쪽으로 많은 노력을 쏟았다.
      • "우리는 도무지 교육을 하면서 동시에 진료를 통해 봉급을 있는 방법을 모르겠다"
      • 일부 학교들은 예전의 proprietary school 닮아가고 있었는데, faculty 기본적으로 환자를 보면서 교육은 그때 그때 되는대로 했다.
    • 어떤 의과대학도 "proprietarization" process 버텨내지 못했다.
      • 매우 소수의 scholarly faculty만이 교육을 하면서 예전의 medical professor 같은 모습을 지켜냈다.
    • Washington University에서…
      • Radiology department 받는 판독료가 줄어들자, 과에서는 교수들이 다른 학생들을 교육하도록 배정된 시간을 줄여주었다.
      • 안과에서는 명의 유명한 senior 교수들에게 보드 시험 문제 출제를 하는데 사용된 10% 시간에 대한 월급을 지불하지 않았다.
      • Radiology에서 senior professor national oncology commission 참석하는데 필요한 25% salary 지급하지 않았다.
      • 일부 임상 과들은 "productive"하게 보일 것을 우려하는 faculty들로 하여금 교육 업무를 하도록 만드는 것이 어렵다는 것을 깨달았다.
    • (3) 번째 sign 의과대학 학생들과 HO들에게 주어진 학습 환경이 악화되는 것이었다. 질문과 발견(inquiry and discovery) 원칙이 침범당했다.
      • 대부분의 의과대학 행정가들은 진료의 1원칙이 "속도" 되어버린 당시의 상황이 얼마나 위험한지를 무시했다.
      • 일부 학교에서는 학생이나 레지던트가 faculty ambulatory facility에서 일하는 것을 금지했는데, 이유는 교육적 비효율이 결과적으로 진료의 경쟁력을 떨어뜨리기 때문이었다.
    • 교육 환경이 손상되고 있었지만, 다른 곳에서 좋은 교육 환경이 조성되는 것도 아니었다. 의과대학들은 공공연하게 IDS 의학교육으로 사용하고자 했지만, 이것이 가능해지려면 엄청난 노력을 쏟아서 community setting에서의 교육이 비슷하게 높은 수준의 교육을 제공할 있게 만들어야만 했다.
    • 1990년대 후반까지도, 이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의과대학이 community teaching 확장시키면서 school official들은 교육의 관리에 점점 신경을 쓰지 않았다.
      • Southern medical school에서 있었던 가지 예를 살펴보면, 새롭게 physician private office에서 이뤄지는 새로운 primary care rotation 도입한 것을 자랑스러워 하였지만, 가르치는(supervising) 사람이 하루에 60명의 환자를 일어날 있는 문제에 대해서는 신경쓰지 않았다.
      • 이런 상황이 아무런 관리 없이 계속되면, "clinical apprenticeship"보다 그저 매우 조금 나은 정도의 교육만을 하는 것과 다를 없었다.
    • 실제로 apprenticeship 많은 ambulatory setting에서 실제로 일어나고 있는 일이었는데, private doctor's office에서의 교육은 "실전에서 진료가 어떻게 벌어지는가를 보여준다" 이유로 합리화되곤 했다. 이것은 기존의 '의학이 어떻게 교육되어야만 하는가' 대한 기존의 고민에 정면으로 반대되는 것이었다.
      • 다른 흔한 합리화는 "the day-to-day managing of a doctor's office" 같은 이유였다 (staffing, billing, telephone call)
      • 이전의 20세기 동안 private faculty 학문적 성취를 바탕으로 임용되었는데, 이제는 어떤 community practitioner 대학의 medical teacher 있다는 것에 암묵적으로 동의하는 상황이었다.
      • 줄이자면, 임상 교육이 community site 옮겨감에 따라서, 교육의 질을 대변하고자 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그리고 역설적이지만 community site에서의 교육을 확장시키려는 것에 대한 이유는 아무도 가져다 쓰지 않았다.(not the ones cited)
    • 교육적 성과를 측정하는 좋은 양적 지표가 없었기 때문에, 교육 환경이 악화된 것이 어느 정도 까지 영향을 주었는가를 알기는 쉽지 않다. 그러나 비용 통제의 시대는 학습자의 요구로부터 점차 벗어나고 있었다는 것만은 확실했다.
      • 또한 AHC 상업화가 얼마나 학생의 자세나 행동에 영향을 줬는가도 불분명하다.
    • (4) 번째 특징은 의학교육자들이 이상 의학은 <나름의 내적 standard 가진 'university- based profession'>이라는 것을 지켜내지 않았다는 것이다.
      • Professional school 다른 분야와 달리 실제 field 나가서 일을 하고 있는 professional들의 요구에도 예민해야 하며, 동시에 내적인 기준을 가지고 practitioner들이 활용하는 정보를 그들 나름의 지적인 도구를 사용해서 비판적으로 접근할 있어야 했다. 이러한 측면에서 20세기의 의과대학들은 항상 대학 다른 professional school과는 다른 위치를 점하고 있었다.
    • 하지만 1990년대에 이러한 경향이 달라지기 시작해서, 의과대학들은 managed care setting에서 일을 준비가 의사를 이상 키워내지 못하고 있었다. 이러한 좌절감 속에 일무 managed care organization 그들 나름의 "graduate school" 만들었다.
      • 많은 비판이 일자 의과대학은 managed care 맞춘 training program 만들고자 하였다. "to ensure that they are relevant to managed-care practice"
    • 의학교육의 변화가 반드시 필요한 것이었다는 것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20세기 동안 교육의 가장 문제는 학습자들이 의학적 불확실성에 대해서 적절히 훈련받지 못한 것이었고, 결국 검사, 시술, 치료의 과다한 활용으로 이어졌다.
      • 미국 의과대학의 vision 대학에서의 위치에서 물러나는 했다.

 

  • 의과대학이 어느 정도 까지나 managed care organization으로 변화할 있을까? 이것은 1990년대에 중요한 질문 하나였다.
    • 일무 managed care organization 의사들이 환자 뿐만 아니라 보험회사를 대변하는 역할도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비평가들에게 이러한 주장은 의사들을 "이중 간첩"으로 만드는 것과 같았다.
  • 20세기가 끝나갈 무렵, 의과대학들이 이러한 압박에 굴복하고 있다는 징조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일부 observer들은 의과대학이 이상 professionalism 적절히 가르치지 못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 (5) 마지막 특징은 부속병원과 community hospital간의 구분이 모호해진 것이다.
    • Academic work 점차 감소하고 있었다.
  • 어느 정도의 재정적 지원이 교육과 연구를 위해 필요한지가 불분명했다. Third party payer 추가적인 비용을 지불하기 거절하는 , 이전만큼의 수준을 유지하는 것은 어려웠다.
    • 의학교육에의 지원이 부실해지자, 의학교육은 "가장 팔기가 어려운 (the hardest thing to sell)"이라고 불렸다.
  • 특히나 병원이 상당한 주도권을 쥐고 있는 상황에서 얼마나 지원이 필요한가도 미지수였다. BJC Health System 예를 보면, 개의 병원이 합해짐으로써 BJC 과도한 지출을 줄이고 운영의 효율성을 살림으로서 규모의 경제를 실현했다. 그리고 추가적으로 Washington University와의 협조를 통해서 BJC 진정한 academic health care system 기회를 갖게 되었다.
  • 그러나 그런 일은 발생하지 않았다. BJC mission statement health care 질을 높이고 가격을 저렴하게 하는 것에 대한 언급은 있었지만 교육이나 연구에 대한 내용은 없었다. 새로 지어진 ambulatory care facility에는 교육을 위한 시설은 없었다. Physical 외장 개조(face lift) 하면서도 clinical investigator들이 사용하던 연구 공간을 없애버렸다.
  • 이러한 AHC 달라진 분위기는 의학교육자들이 managed care 환경에 적응한 결과라고 있다.
    • Scholarship 대한 지원은 점차 어려워졌고, 일부 학교들과 부속병원이 여전히 경제적 여려움에 있었지만, 많은 학교들은 재정적 균형을 맞춰 나갔다. 하지만 과정에서 그들이 치뤄야만 했던 비용은 무엇보다 그들의 연구와 교육이라는 '존재 이유'였다. 역사적으로 교육을 가장 많이 가로막았던 것은 연구에 대한 강조였는데, 이제는 환자 진료에 대한 강조가 되었다.
  • 결과로 21세기가 가까워지면서 번째 혁명이 시작되었다. 미국 의학교육은 corporate form으로 전환되기 시작했다. 의학교육자들은 의과대학이 대학을 떠나 IDS 들어가야 하는 것은 아닌지에 대해 의문을 제기했다.
    • 1990년대에 의학교육자들은 연구에 대해 유감을 표시하면서도 clinical faculty들은 점차 생존을 위해서 private practice 의존할 밖에 없었다.
    • 1990년대에 매위 소수의 총장만이 의과대학의 목표로서 교육과 진료를 주장했고, 지난 1900년대 이후로 AHC 그들의 목표를 생존을 넘어서서 전체 국가적 보건을 건강하게 것을 주장해왔지만 이제 그러한 목소리는 거의 들리지 않았다.
  • 얼마나 이러한 분위기가 지속될 것인가를 알기는 어렵다. 가지 극단적인 가정을 해보는 것만이 가능할 뿐이다.
  • 그러나 세기 전의 proprietary system 지금의 미국 의학교육을 단순히 비슷하다고 하는 것은 적절하지 못하다. 무엇보다 시작점이 너무나도 다르다.
  • 그렇지만 사이의 유사점을 무시하는 역시 옳다고 없다. Managed era 돈은 university standard 대체하기 시작했다.

 

  • The Declining Relevance of Medical Education
    • 20세기동안 의과대학과 부속병원은 미국 의료의 가장 중요한 결정인자였다.
    • 번째 혁명의 시기에, 의학교육은 점차 medical practice 멀어졌다. 보험회사나 HMO 다른 managed care organization 학교나 교수들이 이상적이라 생각하고 가르쳤던 종류의 medical care에는 관심이 없었다. 학교에서 가르치는 진료과 현실에서 이뤄지는 진료의 차이가 너무나도 컸다.
    • 부분을 설명하기 위해서 의사가 환자와 충분한 시간을 갖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가에 대해서 다시 한번 상기할 필요가 있다. 좋은 교육 또는 좋은 연구와 마찬가지로, 좋은 진료도 대충 그때그때 해서는 수가 없었다.
    • 아마도 시기 진료의 가장 문제는 효율성이란 미명아래 시간의 부족이 의사-환자 관계를 쥐어짰던 것이다.
    • Managed care에서는 환자를 짧게 보는 것이 경제적으로 바람직한 행동이었고, "productivity" 있는 의사로 인정받는 것이었다.
      • 그러나 환자를 보는 시간이 짧아지면서 직무 만족도가 떨어지고, burnout되며, 의사들의 정신건강이 악화되었다.
    • 또한 의사를 보는 시간이 너무 짧을 경우에 환자도 역시 불만족하다는 증거들이 있다. 환자들의 만족은 대화나, 돌봄, 의사의 관심에 크게 의존했다.
    • Managed care 확산되면서 대중들의 논쟁은 HMO 의료전달체계를 향하기 시작했다. 1990년대 후반까지 논쟁은 주로 진료의 '' 집중되어 있었다. 당시에는 undertreatment 대한 걱정이 많았다.
      • 그리고 Undertreatment 대한 우려는 가장 많은 진료를 받아야 하는 사람들 (나이가 많거나, 만성 질환을 가진 등등의 vulnerable population)에서 가장 심했다.
    • '시간' 문제는 서서히 퍼져 나갔지만, 근본적인 문제였다. HMO 구조상 "throughput" 강조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의료의 질이나 돌봄, 환자와의 관계등은 달성되기가 어려웠다.
      • "동정심이 많거나, 만성 질환을 관리해주는 의사가 치르는 비용이 있다. 바로 아픈 환자를 많이 보는 것이다"
    • Managed care 의료의 질에 미친 영향에 대해서는 공부해볼 필요가 있다. 하지만 일화는 많지만 실제로 managed care fee-for-service 비해서 갖는 장점이나 단점에 대한 명확한 근거는 없다.
      • 주된 문제는 overutilize보다 underutilize 판별하는 것이 어렵다는 것이다.
    • 책에서 가장 강조하는 것은, 의료의 질이 악화되었느냐 향상되었느냐 하는 문제가 아니라, managed care organization medical professionalism 근간을 흔드는 상황에서조차 국가의 medical faculty내의 리더십이 사라졌다는 것이다.
      • 20세기가 마무리될 무렵, 대중들은 managed care아래에서 의료의 질에 대해서 점차 걱정하기 시작했지만, medical school leader 사이에서 문제는 잠잠했다. "strained silence"
    • Medical school official들은 뭐라고 했을까? 주로 그들은 그들 자신의 이익에 대해 목소리를 높였다. HMO 의한 진료에 의문을 제기하기보다, 대부분의 AHC managed care 기정 사실로 받아들이면서 새로운 환경에서 살아남는 것에 집중했다.
    • 비슷하게, medical profession 의료의 질에 대한 문제에 대해서도 잠잠했다. 대신 generalist physician specialist physician사이의 줄다리기만 팽팽했다.
      • Academic medicine뿐만 아니라 profession 전체적으로도 professional 전체적인 문제 또는 공공의 이익보다 개인의 이익과 내부적 문제를 우선해서 다뤘다.
    • 궁극적으로 academic medicine 목소리를 높이기를 거부한 것은 결국 자신들을 위태롭게 뿐이었다. 가장 좋은 교육과, 적절한 의료 서비스에 대해서 medical profession 결정권을 상실했다.
      • "physician (state) 아니라 HMO에게 면허를 받게 것이다"
      • 리더십이 없이는 국가 전체의 건강 뿐만 아니라 AHC 미국의 medical care 멀어질 밖에 없었다.

 

  • Restoring the Social Contract
    • 1990년대 후반, 번째 개혁의 시기가 시작되었다. AHC educational product 대한 시장을 상실해가고 있었다.
    • WWII 이후로 AHC 외부 환경에 가지 주요한 변화들이 있었는데, 우선 NIH 성장이 있었고, Medicare & Medicaid 입법이 있었다.
      • 처음에 이러한 변화는 AHC에게 주요한 수입원으로 이득이 되었으나 managed care 에서는 반대였다. 20세기 이후 처음으로, 외부적 환경이 적대적으로 변했다.
    • 과거에는 AHC 외부 변화에 매우 민첩하게 반응했다. 1990년대에도 역시 그렇게 하려고 했다. 하지만 실제로 성공한 것은 되지 않았고, 대부분은 institutional mission 핵심을 상실했다.
    • AHC 문제를 단순히 managed care 때문이라고 보는 것은 옳지 않다. 번째 혁명의 보다 근본적인 이유는 medicine 대한 사회적 기대에 적응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 WWII 이후의 health paradigm AHC 빠르게 성장할 만큼 풍요로웠는데, 궁극적으로는 주변 환경이 악화되었을 vulnerable하게 결과를 낳았다.
    • 이에 따라 AHC 21세기가 다가오는 상황에서 자신감을 상실했으며, 통제권을 잃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 휩싸였다.
      • 하지만, 앞으로 어떤 원칙을 따라야 것인가는 과거를 이해함으로써 있다.
    • 일반 대중에게 있어서 대단히 중요한 메시지는 이것이다. <AHC vision, power, means 가진 사람들이 상당한 nurturing 지속적인 protection 확고한 지원을 해야만 하는 기관이다.>. 가장 중요한 사회적 기능은 지출 통로(revenue-draining)이지 수입원(income-generating) 아니다.
    • 진료 수입을 줄이면 그것의 보충분은 어디서 가져와야 할까?
      • Federal trust, general tax revenue
      • "all payer" system : 모든 보험료(health insurance premium) 교육에 대한 세금을 붙이는
    • AHC 재정적 지원 방안으로 제안된 것은 산업과 긴밀한 관계를 꾸준히 유지하면서 university-based medical research 상업화 하는 것이다.
      • 이러한 방안은 장기적 관점에서 academic medicine 가치를 손상시키지 않도록 신경을 쓴다면 고려해 하다.
      • NIH budget 늘리는 것도 좋은 아이디어일 것이다.
    • 1990년대에 많은 학교들이 '시간' 대한 payment 받는 것에 가장 어려움을 겪었다. 시간은 AHC 하고자 했던 교육 환경에 있어서 가장 근본적인 요소였다.
    • AHC 입장에서 자원 통제를 통해 health care 대한 지출을 줄인 것은 환영할만한 일이었다. 당시 이미 충분히 많은 ($1 trillion) 돈을 쓰고 있었다. 특히나 중복해서 나가는 돈이나 불필요한 행정 비용이 너무 많았다.
    • 국가적으로 얼마나 많은 돈을 의학교육에 써야 하는가는 사회적 가치나 우선순위의 문제이지 비용의 문제가 아니다.
      • 만약 대중들이 의학적 진보를 이뤄가는 인큐베이터의 보존을 원한다면 안정적인 지원이 필요했다. 사회적으로 AHC 국가적 자원으로 인식하고, 현명하고 충분히 지원하는 것이 필요했다.
    • 의학교육자들에게 중요한 메시지는 이것이다. 외부적 지원은 AHC 공공의 이익을 위해 일한다는 것을 보여주지 않는 불가능하다.
      • 번째 혁명 시기의 AHC 고난은 새로운 것을 발견하지 못하는 것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사회를 serve하고 lead하는 능력이 부족했던 것에서 것이다.
      • Charles Eliot : "기부를 받는 기본은 먼저 대접하는 것이다"
    • AHC 공공의 지원을 받고 싶다면 가지 해야 것들이 있다.
      (1) 번째로 '자원 통제' 환경에 적응해야 했다. AHC 이상 모든 사람들에게 모든 것을 제공하는 곳이 수는 없었다. 그보다 어떤 영역을 추구하고, 어떤 것을 다른 사람들의 몫으로 남겨둘 것인가에 대한 어려운 결정을 해야 했다.
    • AHC 규모를 줄여야 하는가에 대해서는 논란의 여지가 있지만, 의과대학이 번창하기 위해서는 기업문화를 바꿔서 학문에 근거한(based on principles) 기관이 되어야 했다. Clinical faculty clinical productivity 아니라 학문을 기준으로 보상해야 하며, 의과대학과 부속병원은 그들의 이익이 서로 분리불가능한 것임을 알아야 했다.
    • 의과대학이 대학의 임무에 얼마나 헌신하고 있는지를 알아볼 있는 가지 시험은 faculty administrator 교육 프로그램을 지키기 위해서 얼마나 개인적 희생을 하는가를 보는 것이다. (시간, )
    • (2) 번째로, 그들의 대중의 지원을 받을 자격이 충분함을 보여주기 위해서 AHC 국가가 필요로 하는 의사를 많이 만들어 필요가 있다.
      • Cost-consciousness, 예방의학, 건강 증진, ambulatory medicine.
      • 의학 교육에 '인구집단' 측면을 도입해야 한다.
    • 과학과 의료전달체계의 복잡성이 빠르게 증가함에 따라서 medical faculty들이 의학교육에 대한 높은 기준을 고취하는 것은 어느 때보다도 중요해졌다.
      • Learning environment, learning by doing, graded responsibility, comfortable with medical uncertainty
    • (3) 번째로 medical faculty들은 의료의 질을 관리함으로써 그들이 대중의 이익을 대변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줘야 했다.
      • 어떻게 제한된 자원을 현명하게 사용할 것인가.
    • (4) 번째로 AHC 그들의 연구에 대한 관심이 대중의 건강에 대한 관심 영역과 일치한다는 것을 보여줘야 한다. 이것은 organization, financing, 의료전달체계 등과 같은 이슈를 기존의 연구와 통합해야 함을 의미한다.
    • (5) 마지막으로 AHC 그들의 기본 가치에 대해서 생각해 봐야 한다. 그들은 그들이 받는 지원에 대한 책임이 있는 public trust이다.
      • 대중들은 규모 확장과 같은 AHC 최근 관심사에는 무관심할지 몰라도, academic work 질은 어떠한지, 얼마나 공공의 보건에 헌신하는지에 대해서는 높은 관심을 보인다.
      • AHC '' 필요가 있으며, ''한다는 것은 발전된 수준을 이루기 위한 수단이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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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역사적 관점에서, AHC 앞에 나열된 적응(adjustment) 해냈다는 것은 충분히 생각 가능한 일이다. Flexner 지적했던 것처럼, 의학교육은 세대가 바뀔 때마다 극도로 적응해왔다.
  • 21세기에는 의학교육을 이끌어갈 사람은 누구일까? AHC wartime leader 필요로 것이지, peacetime manager 필요로 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담대한 비전과 결단성 있는 행동이 필요했다.
    • "think outside the box"
    • 가장 중요한 것은 medical leader 변하지 말아야 것이 무엇인지에 대한 통찰력이 있어야 했다.
  • 1990년대에 일부 사람들은 Charles Eliot이나 William Welch 같은 사람을 기대하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이해는 있지만, 이런 관점은 과거를 미화하고 잘못된 생각만을 하게 만들 뿐이다
    • "리더십은 일부 카리스마 있는 사람들에게 있는 것이 아니다. 리더십이란 평범한 사람들이 그들 자신으로부터 최고의 것을 만들어내는 과정이다"
  • 진정한 리더는 대개 그들의 카리스마보다는 신념이 두드러진다. 그들은 조직이나 기관이 어떻게 차이를 만들 있는지, 중요한 가치와 목표를 보여주고 달성한다.
    • 의학교육에 대해서 이것이 의미하는 것은 다음과 같다. 의학교육의 리더는 조직의 핵심 미션과 가치가 달성되지 않는 이상 조직의 생존이나 재정적인 성공은 무의미하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 21세기를 향해 미국 의학교육을 이끌어갈 사람들에게 주어진 몇몇 환경적 이점이 있다. 우선 국가는 trillion dollar 투자할 의의가 있다는 것이며, 대중은 국가가 의학 연구에 많은 돈을 써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고, AHC 임상적으로 뛰어나다.
  • 또한 국가적 목표를 달성하고 의료 지출을 통제하기 위한 목적으로 AHC 이뤄지는 지원도 굳건하다.
    • 새롭게 이루어지는 연구 분야는 더욱 잠재력을 지니고 있다.
  • 다른 강점은 medical professor들의 높은 수준의 이타주의와 대중에의 헌신이다.
    • 수천명의 medical faculty 행동에서 있으며, HMO 보험회사에 맞서서 싸운 수만명의 individual physician 있다. 심지어 순교자들도 있다.
  • 실제로 최근의 좋은 이미지에도 불구하고 medical profession 대중으로부터 상당한 수준의 신뢰를 얻고 있다.
    • 반대로 HMO 가장 신뢰가 가지 않는 것으로 꼽혔다.
  • 다른 강점은 의학 교육의 질을 위협하는 경제적인 문제들로부터 대중을 보호하고자 하는 기존의 infrastructure들이다. 다양한 accrediting agency, licensing bodies, specialty certifying organization 등이 있다.
    • 20세기 막판에 이들 기관은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었다.
    • 이러한 agency들이 지속적으로 역할을 해나갈지는 두고봐야 것이지만, 그럴 만한 충분한 권한이 있다.
  • 또한, 의학교육자들 사이에서도 quality 유지하고자 하는 움직임이 있다.
    • 1990년대에 있었던 많은 교육과정의 변화는 불가피하게 이뤄진 것들이지만 90년대 말에 많은 것들이 계획되고 있었다. Ambulatory site에서 교육의 질을 높이거나, community physician 교육 스킬을 발달시키는 .
    • MSOP professionalism 기준(altruism, dutifulness등을 포함하는) 제시했다.
  • 1990년대 말에 HMO 정치적 영향력을 점차 잃어가고 있었고, 미국 health care system 모든 문제를 해결해 것이라는 managed care 대한 환상은 점차 옅어졌다. 국가 전반에 걸쳐서 소비자들이 주도하는 역풍(backlash) 몰아쳤다.
    • 1997년에 전국적으로 이뤄진 조사에서 보험 회사들과 managed care organization consumer 얼마나 섬기느냐(serve) 기준에서 꼴찌에서 2등을 했다. (1등은 담배회사)
  • Consumer backlash 긍정적인 면도 있었는데, 모든 HMO 가리지 않고 분노가 심해져서 managed care movement 아니었다면 개선되지 않았을 의료전달체계의 문제라든가, health plan들간의 차이가 무시당했다.
  • Quality 대한 다른 목소리는 health care 구매자(purchaser) employer government로부터 튀어나왔는데, 그들은 그들이 책임지고 있는 인구집단의 건강과 경제적 생산성 모두에 관심을 두고 있었다.
    • Xerox "우리는 저질의 health plan들이 사라지는 것은 개의치 않는다"
  • 장기적 관점에서 봤을 많은 변화들은 의료 비용을 통제하는데 도움이 되었을 분만 아니라, health care marketplace에서 profession 위치를 강화시키는 역할을 했다.
    • 보험회사들의 힘은 1980년대와 1990년대를 거치며 강해졌는데 강력한 힘이 줄어든 것이다.
    • Insurer이면서 동시에 provider 되려는 IDS 노력은, 이를 통해 보험회사를 bypass함으로써 provider 권한을 강화시키고자 하는 것이었다. Professional에게 다시 권력이 옮겨간다면, 나은 시스템을 만들어갈 기회가 생긴다고 수도 있는 것이다.
  • 곤경에 빠졌을 미래를 비관적으로 보기가 쉽다. 이러한 현상에 대해 David Roger "미래를 예측할 종종 인간의 창의성이나 기본적 decency 너무 평가절하 하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 그는 인간은 언제나 인간의 환경을 개선시키려고 하는 사람들에게 보상을 주고자 하는 경향이 있다. 라고 주장한다.
  • 이러한 맥락에서 미국 의학교육의 딜레마는 얼핏 보이는 것처럼 암울하지는 않다. 강력한 시스템을 유지해야만 하는 시대의 도전은 새롭게 시스템을 만들어야만 했던 세기 전의 상황보다는 훨씬 낫다. Medical care 역량, medical research 잠재력, 그리고 대중의 믿음이 있다.
    • 이런 것들은 의학교육의 선구자들에게 주어졌던 환경에 비해서 훨씬 나아진 환경을 보여준다.
  • 실제로, 상황의 이면을 본다면 의학교육에 대해 엄청난 기회가 존재한다고 있다. 20세기 후반의 turbulence academic medicine에게 전례 없는 기회를 주었다. Academic medicine 처한 문제는 외부적이라기보다는 내부적이다.
    • Developing the willingness, making the commitment, having the strength to protect the quality….
    • 전쟁 시기의 리더들은 이렇게 말한다. "turbulence 상황은 위기라기보다는 기회이다"
  • 현재 의학교육 의료 상황이 마주친 turbulence 결과로 나타나는 상황은 health care 넘어서까지 함축적인 의의를 준다. 바로 다음 세기에 미국의 위치에 대한 것이다. 미국이 여전히 강력하게 남아있을 것인가 아니면 사회 경제적으로 쇠퇴할 것인가?
    • 미국의 health care system 이러한 문제를 비춰주는 프리즘과 같다.
    • 의학에 닥친 문제는 다른 분야에서의 번영을 위기에 빠뜨린 문제들과 동일하다.
    • 미국 의학이 평범한 수준에 머무르게 된다면, 이것은 다른 나라와의 경쟁에서 것이 아니라 내부적인 실패 때문이다. 반대도 마찬가지다.
  • 서구 의학의 지난 2500년을 돌아보면, 1990년대의 미국 의학은 그저 하나의 짧은 챕터일 뿐일 것이다. Medical profession 언젠가 대중의 기대와 호의를 다시 사로잡을 날이 분명히 것이다. 다만 그것이 언제, 어디서, 어떻게 것인지를 모를 뿐이다.
  • 미국이 의학에서의 리더십을 되찾고 싶다면, 미국 의학교육의 역사에서 원리를 찾아볼 필요가 있다. 핵심은 의학과 사회 간에 조각난 사회적 계약 관계를 회복하는 것이다. Medical profession 그들이 사회를 serve하기 위해서 존재하는 것임을 상기해야 하고, 사회는 좋은 health care 적절한 물적 심적 지원 없이는 얻을 없는 것임을 알아야 한다. 세계에서 제일 우수한 의학교육, 연구, 진료 시스템의 위치를 되찾을 기회는 아직 열려있다.



  • Chapter 17. Medical Education in an Era of Cost Containment and Managed Care
    • 20세기 의학교육 환경의 두드러지는 특징을 하나 꼽자면 대중들에 의해 제공된 풍요로운 자원이었다. NIH, Medicare, Medicaid. 같은 환경에서 의과대학들은 끊임없이 성장했고, 진료는 방탕하게 이뤄졌으며, 비용-효과성에 대해서는 교육하지 않았고, 국가의 의료전달체계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리더십을 발휘하지 않았다.
    • 1980년대 중반, 상황은 빠르게 바뀌었다. 새로운 패러다임이 도입되었는데, Medical Service 대한 요구가 줄어들 줄을 모르는 상황에서 자원은 제한되어 있었기 때문에, 국가가 사용할 있는 자원이 제한되었다는 것이 강조되었다. 21세기는 자원통제(resource constraint) 시대였다.
    • 새로운 변화는 AHC 휘청거리게 만들었다. 비용을 줄이고 운영의 효율성을 추구하고자 했음에도 상황은 의과대학과 부속병원 모두에게 위협적이다. 의과대학은 주된 수입원으로서 진료 수입에 의존중하고 있었다. '자율성'이라는 환상은 산산조각이 났다.
    • 항상 기업가적인 태도를 가졌던 의과대학과 부속병원의 리더들은 현명하게 대응했다. 1990 합병, 인수, 제휴 등이 늘어났고 "integrated delivery system"이라 불렸다.
    • 그러나 AHC 생존을 위해 경쟁하는 와중에 교육과 연구는 자주 무시당하곤 했다. 세기의 끝이 다가오면서 AHC academic quality 상실하고 있었다.

 

  • Vassals of the Marketplace (시장의 봉신)
    • 1960년대 이후로, 연방 정부와 private third party payer(TPP) AHC supportive environment 유지해왔다. 그러나 이러한 의존은 결국 불안정화를 야기했다.
      • Medicare & Medicaid 도입되고 20년이 지난 , 수백만의 사람들이 보험을 잃을까 두려워 직업을 바꾸지 못했고, 수백만의 사람들은 보험이 없거나 거의 혜택을 보고(underinsured) 있었다.
    • Health care cost 높아지는 것에 대한 전통적인 설명은 '질이 좋아졌기 때문'이었다. 싸고 좋은 진료라는 것은 형용모순이었다. 그러나 1980년대에 상황이 바뀌었다.
      • 지역에 따라 outcome 차이는 없는데 진료 스타일이 완전 달랐다.
      • 어떤 procedure 유난히 자주 행해졌다.
      • 추가적으로 개인적 이익과 탐욕의 시대에 병원과 의사들은 fee-for-service 시스템 하에서 "개별 가격 매기기(unbundling)"이나 "upcoding" 통해서 돈을 벌고 있음이 드러났다.
    • 1980년대에 health care cost 높아지고 있었지만, 전문직으로서의 권위는 약화되고 있었고 Third Party Payer health care system 근본적으로 바뀌는 것을 싫어했다.
      • TPP 가격을 낮춤으로써 저항했는데, 당시에 의사라는 전문가의 권위에 대한 상당한 의구심(skepticism) 있었다. 의학적 의사결정에 상당한 수준의 외부적 감시가 개입되었고, 의사와 병원간 가격을 기준으로 경쟁이 심화되었다.
      • 통제의 주체는 의료공급자(Provider, 의사)에서 가격지불자(Payer, 정부 보험사) 옮겨갔다.
    • 통제의 시대는 정부가 "prospective payment" 대한 법안을 통과시켰던 1983 시작되었다.
      • 포괄수가제 (Diagnosis Related Group (DRG))
    • Prospective payment 병원 경제의 법칙을 바꾸어놓았다. 병원은 지출이 얼마든 고정된 비용만을 지불받았다. 병원의 새로운 목표는 빠른 "throughput"이었다.
    • 부속병원에 있어서 DRG system 등장은 이미 심각한 경쟁을 심화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지난 십년간 community hospital 이미 상당한 경쟁을 감당해야 했는데, prospective payment 등장과 함께 환자에 대한 경쟁이 더욱 심해졌다. 환자를 유치하기 위해서 부속병원들은 공격적으로 marketing하고 광고를 했다.
    • 부속병원의 상황을 더욱 악화시켰던 것은 모집하지 않아도 부속병원을 찾아온 환자들(가난하고 보험이 없는 환자) 때문이었다. For-profit hospital chain 등장했고, 이들의 목표는 의학적인 필요를 요하는 사람들을 위하는 것이 아니라 이익을 내는 것이었다. 경제적 필요에 따라서 nonprofit community hospital들은 charity care 줄였다.
      • 이런 환자들은 결국 부속병원으로 가게 되었다. "economic transfer" "dumping" "우리는 마치 '엄마' 같다"
    • Prospective payment 시작되면서 많은 사람들은 부속병원의 미래를 걱정하기 시작했다. DRG 시스템은 질병의 중한 정도를 따지지 않았다.
      •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부속 병원들은 1980년대에 버텨낼 있었는데, 이것은 비용을 상당 부분 절감했기 때문이며, 거대한 referral network 형성했기 때문이고, 무엇보다 환자 "throughput" 높였기 때문이다.
      • "outlier" 위하여 Medicare DRG 시스템은 추가적인 비용을 지불해줬다.
    • AHC prospective medicine 무사히 해쳐 나가긴 했지만, 1980년대, 1990년대에 급격히 퍼진 managed care는 더욱 적대적으로(hostile) 진화해갔다. Managed care organization 다양한 전략을 통해 병원과 의사에 대해 상대적인 우위를 점했으며, 입원 수와, specialist 수를 줄임으로써 비용을 절감했다.
      • 가장 극단적인 형태의 managed care health maintenance organizations(HMOs)였다.
      • 1995년까지 5천만명의 미국인들이 HMO 통해서 health care 받았고, 천만명은 조금 '느슨한' 형태의 managed care preferred provider organization(PPO) 통해 받았다.
      • 1996 FFS 통한 보험을 적용받는 사람은 employee 26% 그쳤다. (1988년에는 71%)
    • 1990 엄청난 대중적 논란이 벌어졌다. 과연 managed care organization 환자를 우선시하고 있는가? 과연 의료의 질은 유지되고 있는가? 그러나 하나의 사실만은 분명해보였다. Managed care 의학교육과 AHC 해로운 영향(adverse impact) 끼치고 있었다.
      • 예를 들어 1990년대에 HMO special-physician에서 general medical care 전환을 시도했다.
      • 의과대학 학생들은 이러한 사실을 목격했고, 마침내 primary care 하고자 하는 학생들이 늘어났다.
    • HMO 성장은 국가의 의과대학/residency program 키워내는 적정한 의사 수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하게끔 했다.
      • 대공황 이후 처음으로 의사들은 다른 분야에서는 이미 겪었던 일을 겪었다. 바로 직업 안정성이 떨어진 것이다.
      • Pew Health Professions Commission 미국 의대생을 20~25% 감축하고, 의과대학 수는 20% 줄일 것을 권고했다.
    • 가장 눈에 띄는 것은, managed care AHC 재정적 안정성을 위협한 것이다. 놀라울지 모르겠지만, AHC DRG 속에서도 환자 수를 늘리는 방법으로 제법 버티고 있었다. 그러나 managed care plan price 제한을 뿐만 아니라 환자 수에 대한 제한도 걸었다. HMO ambulatory care 늘리고, hospitalization 줄이고 specialist 대용으로 primary care physician 고용하고자 했다.
      • 특히 1993 이후 managed care 가속화되면서 부속병원에의 입원이 감소했고 많은 부속병원은 병상을 줄이기 시작했다.
    • 환자를 유치하기 위해서 AHC 부속병원들과 가격으로 경쟁해야 했다. 부속병원의 비용은 보통 community hospital보다 30% 정도 높았다. 그러나 이제 보험회사들은 이러한 비용을 감당하고자 하지 않았고, 교육과 연구에 사용할 돈이 남질 않았다.
      • 일부 academic hospital 원가에도 미치는 금액을 받는다며 claim했다.
    • AHC 다른 수입원은 private insurer에서 야기된 부족분을 채우지 못했다. 1990년대에 연방 정부, 주정부, 의회, Medicare and Medicaid budget에서 오는 지원은 점차 줄었고, 이러한 부족분을 수업료나, philanthropy endowment income으로 보충하기도 부족했다.
    • 가격경쟁의 시대에 국가의 hospital system 감당할 있는 범위를 넘어선 병원들은 병원의 합병이나 폐원의 길을 걸었다. 특히 부수적인 비용이 많이 들었던 부속병원들의 위기가 심각했다. 부속병원들은 비용을 줄이고자 노력했지만, payment 너무 낮았다.
    • Managed care 부속병원 뿐만 아니라 의과대학의 경제적 viability 흔들리게 했다.
      • 1989년에서 1995년까지 HMO movement 퍼지면서, 많은 faculty 고용해서 많이 진료를 보고,   patient care 집중하면서 여기서 얻는 수입이 상승했지만 payment 자체가 워낙 줄었기 때문에 순익은 크게 감소했다. Faculty 잘렸고, 봉급은 동결되었다.
    • 1990년대 중반에, managed care 퍼지면서 부속병원과 의과대학의 인수, 합병, 분할이 많이 이뤄졌다. Post-Flexner 직후를 제외하면 번째 restructuring이었다.
      • "이러한 통합이 이타적인 행위라고 말하고 싶지만, 사실 이것은 공포와 생존의 문제다"
    • HMO AHC public activity 지원하지 않았던 행위는 쉽게 이해 가능하다. 영리 목적의 조직이었기 때문에, 유일한 법적 책임은 주주들의 이익을 증대시키는 것이었다. 1995년에는 경쟁자들의 압박에 이기고 Harvard Community Health Plan마저 의학교육에 투자하는 비용을 1%에서 0.45% 줄였다.
    • HMO 운이 좋았다. 그들은 AHC에서 발전시킨 지식과 기술을 활용할 있었고, 부속병원에서 키워낸 의사와 health care professional 고용할 있었다. 무엇보다 그들은 AHC 진료에서 얻은 수익을 연구나 교육에 활용해도 괜찮은 것인가에 대한 질문을 있었다.
    • AHC 문제는 1990년대에 누구도 교육이나 연구를 지원하는 것에 대한 열정이 없었다.
      • "지금 일어나는 일은 악몽이다."
      • 다른 미국의 산업처럼 health care industry 또한 단기적인 사고밖에 하지 못했고, 비용을 줄이고 이익을 최대화시키기 위한 전략 뿐이었다.

 

  • The Loss of Time and the Erosion of the Learning Environment
    • 20세기동안 부속병원이 갖춘 우수한 교육 기회는 임상 교육의 강점이었다.
      • 시간은 교수자에게도, 학습자에게도 선물이었고, 당시의 faculty 교육에 유능했을 아니라 일을 시간도 충분했다.
    • 1960년대에 부속병원은 지속적으로 이전의 교육적 가치를 상실해가고 있었다.
      • 일부 그들이 제공하는 care 복잡함에 원인이 있었지만, 무엇보다 inpatient medical teaching acute disease 대한 수요가 높을 당시의 교육적 needs 반영하고 있었다. Inpatient instruction 만성 질환에는 별로 적합하지 않았다.
    • 그러나 1980년대에는 입원 환자 병동의 교육 환경이 급속도로 악화되었다. Medicare DRG 도입하면서 평균 재원 일수가 감소하였다. 점차 부속병원의 inpatient unit 타입의 환자로 갈렸는데 하나는 정말 심각하게 아픈 사람들이었고, 다른 하나는 elective procedure 위해서 잠깐 입원한 환자들이었다.
    • 이러한 재원 일수의 급격한 감소와 수많은 procedure 병원의 밖으로 옮긴 (moving so many procedures out of the hospital) 논란의 대상이었다. 어쨌거나 가지 결과만은 명백했는데, 병동의 학습 환경이 악화된 것이다.
      • 환자의 "throughput" 높아지면서 업무량이 많아졌다.
    • 교육적 관점에서 보았을 무엇보다 가장 좋았던 것은 House Officer(레지던트)들이 work-up machine 또는 disposition-arranger 되어 버린 것이다.
      • 환자를 입원시키고, 퇴원 일정을 잡는 일을 하느라 검사를 하고 주치의와 함께 상의할 시간은 짧아졌다. 또한 질병의 코스를 관찰할 기회를 상실했다.
      • 이러한 변화가 medical 뿐만 아니라 nonmedical group 까지도 학부 교육과 GME 교육을 강조하던 시기에 나타났다는 것은 상당히 역설적이다.
    • 짧아진 입원 기간의 결과는 통합적으로 분석될 필요가 있긴 하지만, 여러 일화들을 종합해보면 영향이 그다지 긍정적이지는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 "House officer 그저 쌍의 손이며, 학생은 그저 관찰자일 뿐이다"
    • 병동의 교육적 가치가 사라지면서 일부 faculty ambulatory education 더욱 강조하고 나섰다.
    • 교육 이론 측면에서 보면, 이러한 주장은 설득력이 있다. 좋은 학습 환경의 필수 요소는 장소와 무관하다. 중요한 것은 환자를 중심으로 하여, faculty 능숙하고 accessible하게 가르치는 것이고, 학문적인 것을 추구하는 분위기이다.
    • 임상 교육을 ambulatory site 옮기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환자들은 교육적 목적으로 활용되는 것을 꺼렸고, Medicare reimbursement formula hospital clinic에서 이뤄지는 교육에는 지원을 해줬지만 community health center private doctor's office에서 이뤄지는 교육은 지원해주지 않았다. 1990년대에 소수의 분야만이 ambulatory work training 주된 장소로서 활용했다.
    • 그러나 Managed care ambulatory setting에까지 압박을 가했는데, 곳에서도 '속도와 '이라는 원칙이 요구되었고 이는 교육의 질을 손상시켰다.
    • 1990년대까지 대부분의 AHC 학생들과 HO들에게 많은 outpatient care 경험하게 해주었다. 그러나 "productive"해야 한다는 managed care 원칙 아래에서 교육의 질을 담보하는 길을 찾아낸 학교는 거의 없었다. 수많은 보고서들에서 환자를 너무 빨리 봐야 하는 상황이 교육의 질을 떨어뜨렸다고 언급되고 있다.
      • 게다가 이러한 환경은 "hidden curriculum" 까지 영향을 미쳤다. Teacher role model로서의 의사를 수가 없었던 것이다.
    • 일부 의학교육자들이 보기에 HMO ambulatory teaching 기르기에 좋은 곳이었다. HMO 규모가 크고, centralize group practice 이뤄졌기 때문이다.
      • 이제 워낙 많은 진료가 ambulatory setting에서 이뤄지고 있었고 HMO 점차 많은 member 모으고 있었기 때문에 HMO 교육과 연구에 적절한 장소로서의 잠재력을 갖춰가고 있었다는 것을 부정할 수는 없다. "teaching HMO"
    • 문제는, HMO에서 교육을 하는 것을 지원할 충분한 fund 찾지 못했다는 것이다. AHC 재정적으로 묶여 있는 상태였고 대부분의 HMO 의학교육에 비용을 지불할 의지가 없었다.
    • 1980년대 후반과 1990년대에 학습 환경의 질을 유지하는 것은 어느 분야와 동일하게 의학교육에서도 좋은 교육에는 돈이 많이 들기 때문에 어려웠다. 많은 경우 '비용' 시간이었다.
    • Health care financing 국가의 의학교육 시스템을 위협한 것은 이것이 처음은 아니었다. WWII이후 private medical insurance 도입, 1965년의 M&M 등등..
    • 비용 통제는 정말 필요한 것이었고 오랫동안 필요성이 있어 것이었다. 하지만 managed care 시대의 비용 통제에 의학교육을 고려할 공간은 없었다.

 

  • Proactive Word; Reactive Behavior
    • 비용 통제의 시대가 도래하면서 AHC 새로운 도전을 마주했다. 이제 문제는 의과대학과 부속병원간의 반목이 아니라 열악한 시장 상황에서 살아남는 자체였다. 공포와 떨어진 사기, 그리고 통제권 상실에 대한 우려가 팽배했다.
    • 가지 대응책은 새로운 수입원을 찾기 위한 노력이었다. 이러한 노력은 1980년대에 시작되었는데, 일부 의과대학과 부속병원은 영리 기업을 운영하기도 하였는데, 대표적인 것이 Johns Hopkins's Dome Corporation이다.
    • 번째 대응책은 효율적인 운영 하는 것이었다. 많은 의과대학들은 faculty practice plan 재구성하여 전체 학교에 적용될 있는 하나의 plan 만들고자 하였다. 또한 개개 연구자나 학과가 협동하여 비싼 기계를 공동으로 구입하기도 하였다.
    • 부속병원들 역시 경영 기술을 다시 검토하였다. 후향적 reimbursement 세기 시대가 지나면서 기술적 경영이 강조되었다.
      • 교육과 연구와 진료에 상호 보완이 이루어졌다.
    • 비용 절감이 AHC 문제가 되면서, 모든 중요한 프로그램과 가정(assumption)들도 검토 대상이 되엇다. 일부 기관들은 residency size 줄였고, 일부 도시에서는 GME 위한 hospital "consortia" 만들었다. 테뉴어 position 숫자를 제한했다.
    •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중한 경영과 비용 통제도 완벽한 해답은 없었다. HMO 보험사들은 훨씬 적은 비용을 지불해줬을 뿐만 아니라 환자들을 AHC 아닌 다른 쪽으로 돌리고 있었다.
      • 부속병원은 다른 모든 병원처럼 고정 비용이 높았는데, 아무리 운영을 효율적으로 한다고 해도, 병상이 2/3이나 비었을 때에는 도저히 방법이 없었다.
      • "우리는 생존을 위해서 가장 높은 가격을 제시한 사람에게 우리를 팔아야 한다"
    • 앞서 언급된 Networking arrangement 같은 Referral base 늘리기 위한 AHC 노력 1980년대 초반부터 시작되었다. 경쟁은 HMO 함께 더욱 심해져서 HMO로부터의 referral 특정 환자나 의사의 뜻이 아니라 조직 정책에 따라 정해졌다. 따라서 AHC 점차 managed care initiative 참여할 밖에 없었고, 이는 한때는 academic leader 일부는 절대 하지 않을 것이라고 하나였다.
      • "너만의 affiliation 만들든지, 기존에 있는 것에 들어오든지"
    • 1990년대에 이런 patient care network tight하게 구성된 Integrated delivery system(IDS) 발전하였다. IDS 모든 수준의 서비스를 제공하는 아래부터 위까지 연결된 health care system 연속체였다.
      • "vertical integration"
    • IDS 생긴 것은 Clinton 대통령의 임기 시절에 health care reform 제기되던 때였다. IDS 하나의 운영 구조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IDS 대형 구입자(large purchaser)로서 협상을 있었다.
      • AHC사이에 차이가 있었던 것처럼 IDS사이에도 차이가 있었는데, 주로 larger system에서 의과대학이 주요한 역할을 하는지 보조적 역할을 하는지의 차이였다.
    • 의과대학이 health care system formal part 되었는지와는 별개로, managed care 시대에 모든 학교는 전보다 많은 personal patient care 하고 있었다.
      • Faculty 보는 환자가 많을수록 "productive"하다고 인정받았다.
    • AHC managed care 적응해가면서 수많은 작지만 작지 않은 변화들이 일어났다. 병원은 일반적으로 의과대학보다 조금 민첩하고 기업가적이었다.
      • 병원 행정의 영역은 기업 행정과 가까워졌고, 병원 행정가들 MBA 가진 사람들이 늘어났다.
      • 기업식의 접근법은 AHC 조직 문화를 지배하고 있었다. 어떤 사람들은 AHC 영리병원 체인이나 HMO 다를 바가 없다며 비판했다.
    • 시장의 힘이 점차 커지고 점차 적대적으로 변함에 따라, AHC 기업적 전략을 도입하고 기업체처럼 변해간 것은 이해가 간다. 그들은 그들 자신의 mission 존재 이유를 잃어가기 시작했다. AHC 역할을 하기 위해서는 언제나처럼 돈이 필요했다.
      • 병원 행정가들은 재정적 문제 인수합병 전략에 집중했다. 심지어 최고 수준의 병원들까지 시장 점유나 수익성을 따졌다.
    • 20세기 내내 의과대학 faculty academic duty clinical duty사이의 갈등을 겪어 왔다. 그래도 1980 이전에는 사이에 어느 정도 적절한 균형을 맞출 있었다.
    • 그러나 비용 절감의 시대에 AHC 결정적인 움직임이 있었다. Clinical faculty patient care 대한 부담이 커졌으며 JHMS 같이 최고 수준의 research institution이었던 까지도 patient care 학교의 mission 첫째로 놓았다. 20세기동안 의과대학의 역할은 부속병원을 최대한 '대학' 가까이 두는 것이었는데, 이제는 그러한 대학과의 연결고리를 포기하였으며 점차 부속병원은 새로운 의료전달체계 안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 이러한 변화의 정도는 center마다 서로 달랐으나 전반적으로는 academic보다 clinical mission 중요시되는 방향으로 움직였다.
      • "AMC 형용모순이다. 특히 A MC사이의 결합이 끊어지기 일보 직전이다"
    • 또한 여겨 보아야 것은 1990년대 후반 일부 AHC 중환(seriously ill patient) 받지 않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건강한 사람들만을 대상으로 하여 "cherry picked"하던 경쟁 병원이나 HMO 행태를 따라했다.
    • Managed care 대한 AHC 모습은 기업적 vision (corporate vision) 의해 만들어져갔다.
      • 다른 산업과 비슷한 경영 전략이 도입되어서 "restructuring" "reengineering" "downsizing" "right sizing" 등의 용어가 유행했다.
    • Medical school official이나 병원 간부들 AHC 다른 사업들은 성격이 다르기 때문에 Business strategy 도입에 있어서 진중해야 한다는 것을 기억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 자동차 회사는 소비자들에게 그들이 필요해하든 필요해하지 않든 자동차를 팔지만, 제대로 AHC라면 환자에게 복잡한 심장 수술을 "팔지" 않는다.
      • 게다가 AHC 많은 중요한 기능은 기본적으로 cost-generating하지 income-producing하지 않다.
    • 역설적인 것은 AHC restructuring 오래 전부터 필요성이 제기되어 왔다는 것이다.
      • 특히 가르치고 배우는 방법에 있어서 교육의 중요성을 다시금 강조하는 것이라든가, training 받는 사람이 임상적 불확실성을 다루는 방법을 배운다든지, outpatient medicine 대해 강조한다든지 하는 것들.
    • 하지만 역사에서 배워야 것이 하나 있다. AHC에게 self-sufficient 것을 기대하면 된다는 것이다. 무엇보다 외부의 도움이 반드시 필요하다. 사회가 얼마나 지원을 해야 하는지, 지원이 어디에서 와야 하는지에 대한 논쟁은 있을 있다. 그러나 교육과 연구는 외부의 지원이 필요하다는 것은 변하지 않았다.
    • 초기 시스템을 만들었던 사람들로부터 있는 것과 같이, 상황을 주도하는 행동(proactive behavoir) 외부의 지원을 이끌어내는 , 의과대학의 인도주의적 mission등을 수반한다. 그렇게 해야만 자기 자신의 생존 뿐만 아니라 보건과 관련된 정책에까지 영향을 있다.
      • 20세기가 끝날 무렵 주된 강조점은 AHC 지어진 핵심 원칙을 파괴하는 상황에서조차 clinical mission 확장하는 것에 있었다. 외부적 도움이 없이 교육, 연구, charity care 약화될 밖에 없었으며, AHC 도덕적 정치적 합리성은 사라질 밖에 없었다





  • Chapter 16. Internal Malaise
    • 1970년대와 1980년대 의과대학에는 어떤 특정한 고질병 있었다. Patient care를 점차 더 많이 하면서, 그리고 점차 규모가 커지면서 기관적 응집성(institutional cohesiveness) 유지하는 것이 어려워졌고, academic work 집중하는 것도 어려워졌다. 게다가 때는 공익의 대변인이었던 의과대학들이 이제는 자기의 이익을 챙기기 시작했다.

 

  • Rudderless Ships
    • Medicare & Medicaid 통과 이후로 의과대학들은 엄청난 속도로 성장하기 시작했다. 대부분 학교의 캠퍼스는 사방팔방으로 커졌고, full time faculty 숫자가 많아졌고, annual budget 늘었다.
    • 이와 같은 성장의 주된 원동력은 임상 진료였다. 1965년에, 진료는 전체 수입의 6% 이하만을 차지하는 정도였는데, M&M이후로 주요한 수입원이 되었다. 1990년대에 진료는 거의 절반을 차지하였다.
    • 임상 과의 성장이 의과대학 전체의 성장세와는 전혀 다른 정도였다는 것도 놀라울 것이 없다. 기초의학 교수(faculty) 5671에서 15432 증가할 동안, 임상의학 교수(faculty) 11447에서 59189 증가하였다. 일부 과에서 clinical track 만들어져서 academic activity 전혀 하지 않는 faculty도 생겼다.
    • 의과대학이 성장하면서 WWII이후의 경상이 더 빨라졌다. 학교가 커지면서 인간미가 없어졌다. Institution 전체에 걸쳐 친분을 유지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고, 심지어 내에서도 별로 없었다. Faculty 사이의 feeling of unity 유지해보고자 하는 학교의 노력을 있었지만 그것을 즐길 수 있는 faculty 거의 없었고 각자 자기 일을 하느라 바빴다. department division 통합되지 못하고 각각의 부분으로서 역할을 했다.
    • 예전의 gentility 그저 추억일 뿐이었다. 새로운 경향의 생물 연구의 압박 컸고, personal medical care 대한 요구 커졌으며 각종 conference 참가한다고 바빴고, 특히 academic track 있는 교수들은 연구비의 압박이 심했다. Academic life에서 오는 보상은 많았지만, genteel collegiality, security 아니었다.
    • 의과대학이 성장하면서 내부의 경쟁도 심해졌는데, 각 과는 서로서로 심한 경쟁을 벌였다. 임상 과들 사이에서 physician-scientist들은 clinician 높은 봉급에 분개했고, 또한 수업 시간과 승진 기준에 대해서도 치열하게 싸웠다. collegiality 너무 없어서, 일부 과에서는 능력있는 faculty 학교를 떠나버리기도 했다.
    • Post-Medicare era에는 학문간의 분절화도 심했다. 수술 분야를 보면, 마취과나 정형외과나 이비인후과가 하나의 과로 독립해서 나왔다. cardiology 분과들도 하나의 과로서의 지위를 요구하고 나섰다.
    • 의과대학이 커지면서 학과와 faculty 사이의 갈등도 빚어졌다.
      • Funding agency 총액은 그대로 채로 연구비 지원을 늘이기 위해서는 간접비를 줄여야 했는데, faculty 이에 대해 찬성했지만, dean 반대했다.
    • 의과대학 내부의 원심력이 증가하면서, 학장의 역할은 점차 약화되었다. 학장이 의과대학의 대표이긴 했지만, 실제적으로 의과대학을 운영하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많은 학장들이 효율적으로 운영하기 위한 노력을 했지만, 직접적인 의사결정에 대한 권한보다 얼마나 설득할 있는지, 개인의 성격이 어떠한지 이런 것들에 그 성공이 달려 있었다.
    • 대부분의 행정적 권한은 자기 과의 교수들이 벌어오는 연구 및 진료 수입에 대한 권한을 가지고 있는 주임교수들에게 옮겨갔다. 하지만 megamedicine의 시대에, 주임교수들이 연구나 진료나 교육에 쓰던 시간은 practice plan 같은 행정처리 시간에 밀려났고, 주임교수들 중에서 자신이 professionally successful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거의 없었다.
    • 1970년대와 1980년대에 곳곳에서 의과대학의 운영은 점차 복잡한 일이 되어서, 재정적 행정적 문제들(예산, faculty규모, 교육, 연구, 진료 등등과 관계된)이 엄청나게 많아졌다.
      • 의과대학들은 이제 complex medical center 일부였다. 각종 정부 규제에 대응하는 일들은 짜증나는(exasperating) 일이 되었다.
    • Post-Medicare 시대에, 모든 학교들은 늘어만 가는 행정 문제를 처리하기 위해 새로운 전략을 시도했는데, 많은 학장과 주임교수들이 보건 정책, 교육 행정 등등을 공부하기 시작했다(주로 Harvard School of Public Health 또는 AAMC에서).
      • Administrative staff수가 늘었고 full-time business manager 고용되었고, 학교들은 건설 계약이나 법정 분쟁에 더 능숙하게 대응하였다.
    • 그렇지만, 운영 방식의 혁명으로 충분하지 않았다. 의과대학들은 대학의 나머지 다른 학과들과 마찬가지로 합의에 의한 통치(governance by consensus) 익숙해져 있었다. 대부분의 결정사항들은 장기적인 관점이 아니라 무계획적으로 이뤄졌고, 힘이 있는 일부 사람들이 주요한 사항에 대한 합의에 도달하는 데에는 무척 오랜 시간이 걸리기도 했다. 종종 누가 책임을 지는지(in charge)가 불확실했다.
    • 이 같은 운영 스타일은 academic matter에 한정지어 보면 쓸모가 있긴 했다. 하지만 빠르고 복잡하게 변하는 시대에 대학 차원에서 이러한 방법은 적절치 못했다.
    • 1980년대 후반까지 이러한 대학 운영 스타일은 별다른 문제를 야기하지 않았다. 임상 수입은 정말 많았고, 어려운 논의들은 그냥 무시되었다. 당시까지만 해도 주변 환경이 friendly 했다.
    • 그러나 의과대학이 거추장스러울 정도로 규모가 커지면서 academic medicine 역시 그렇게 되었다. 봄에 열리는 “clinical meetings” Atlantic City 시설에 맞지 않을 정도로 커졌다. Community based medical school 생겨나면서 의과대학간의 다양성은 그 어느 때보다도 커졌고, 의학교육에 관여하는 병원의 종류나 숫자도 다양해졌다. 다양성은 강점이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academic medicine 규모가 커지고 질적으로 다양해지면서 어느 그룹도 그것을 대표하지 못했다.
    • 규모가 커지고 복잡해지면서 academic medicine 이상 family 같은 비유는 적절하지 않게 되었다. 또한 너무도 커지고 분절화된 Academic medicine“heroes” 나타나기에는 어려운 환경이었다.
    • Faculty 진료가 늘어나는 것은 의과대학에 좋은 측면이 많았다. 특히 진료 수입을 활용하여 연방 지원이 적은 상황에서도 연구나 교육이 이뤄질 수 있었다. 시절 연방 정부의 연구에 대한 지원이 감소하는 추세에서 다른 과들이 이미 겪고 있던 운명을 조금 미뤄두었던 것이다.
    • 그렇지만 faculty 진료에 아무 문제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Faculty 진료가 중요해지면서 점차 의과대학은 여기에 의존하기 시작했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만약 임상 수입이 줄어들면 연구와 교육이 곧바로 영향을 받게 된다는 것이었다.
    • 게다가 이러한 현상은 의과대학의 대학으로서의 정체성 잃게 만들었다. Clinical faculty는 교육 시간을 줄여가며 환자 진료에 더 많은 시간을 쏟았다.
      • Senior faculty들은 진료 수입에서 오는 압박 우려했고, AAMC president진료가 의과대학을 지배하고 있다라고 했다.
    • Academic pursuit 진료 사이의 긴장은 어제오늘의 일은 아니었다. 그러나 M&M이전에는 의과대학은 이러한 긴장 상태를 진료의 총량을 제한함으로써 해결하려고 했었다. 그러나 점차 진료에 경제적으로 의존하게 되면서 의과대학들은 점차 더 많은 환자를 보아야 한다는 압박에 시달렸다.
    • WWII 이후로 엄청난 돈이 의과대학에 집중되었고, faculty들은 점차 경제적인 인센티브에 적응해갔다. multiversity 시대에 연구가 성장한 것처럼, clinical era faculty 진료가 성장했다. 유능한 academic manager들이 의과대학을 운영하는 했지만, 학문적 리더나 교육적 선구자는 없었다.
      • Clinical practice 시대에 부속병원의 모습은 nonteaching hospital 유사해져 갔고, 그나마 위안거리는 여기서 오는 보상 덕에 academic work 있었다는 사실이었다.
    • 의과대학이 지나치게 진료를 강조했다는 것을 과도하게 비난만 할 것은 아니다. M&M 이후에 그냥 진료 수입과 관련한 상황이 그랬던 뿐이다. 연구비를 따는 것이 점점 더 어려워지고 있던 당시 상황속에서 의과대학이 임상 진료를 늘리지 않는 것은 어리석은 행동일 뿐이었다.
      • Faculty practice plan 원래는 1960년대와 1970년대의 경제적 사회적 상황에 맞추어 도입된 것이었는데, 이제는 마치 만병통치약처럼 여겨졌다. 의과대학은 부자가 되었지만, 뿌리를 잃었다고 할 수 있었다.
    • 미국 의학교육 시스템이 처음 만들어졌던 때부터, 의과대학은 그들의 본질의 근원을 (1)대학 (2)의료전달체계, 가지로 보았다. 중에 대학부분이 지금까지는 강력했지만, 이제는 이것이 약해지고 있었고 의학교육의 운명은 점차 의료전달체계와 얼마나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느냐에 달려 있었다.

 

  • The Decline of Academic Health Centers as Public Trusts
    • 흔히 과거는 미화되곤 한다. 미국 의학교육의 역사도 예외는 아니다. 1950년대까지 full-time position 무척 적었다. 수십년간 의과대학과 병원들은 인종, 종교, 성별에 따른 차별을 일삼았고 charity patient에게는 차가웠다. 세기 내내 의과대학은 faculty 중심으로 발전해왔고 학생이나 house officer에 대한 교육적 의무는 소홀히 다뤄졌다.
    • 그럼에도 AHC 성취는 이러한 흠결을 덮고도 남았다. 좋은 의사를 양성하는 것을 강조하고 1960년대와 1970년대 사회적 요구에 부응하고자 하는 노력, 의학 연구의 성과 등등.
      • 무엇보다 첫 2/3동안은 공익의 대변인(Public trust)로서의 역할을 잘 해왔다.
    • 1970년대 이후로 1990년대까지 medical faculty 행태는 이상 공익을 위하는 것이 아니었다. Post-Medicare era 의과대학은 대학이라는 지적 뿌리(intellectual root) 점차 멀어졌고, 동시에 공익과도 멀어졌다.
    • Medical faculty 그들의 이익에 집착하는 모습은 salary 강조하는 것에서도 쉽게 있다. 1970년대, 80년대, 90년대에 가파르게 상승했고, 많은 faculty들이 academic life 뿐만 아니라 개인적인 또한 추구하고자 했다.
    • 적절한 academic pay 어느 정도일까? 아무도 정확히 말할 수는 없겠지만, clinical era salary 오르지 않을 것이라 기대하는 것은 비현실적인 기대임이 분명하다. Faculty salaries market force 반영한다. 특히 일부 surgery과에서는 상승이 어마어마 했다
      • “Mammoth personal incomes”
    • Salaries 상승은 의과대학 내에 새로운 분위기를 반영하는 것이었는데, 진료 수입이 교육과 연구 목적으로 많이 사용되긴 했지만 진료가 늘어난 가장 큰 이유를 딱 하나만 꼽으라면 바로 고수입에 대한 열망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 수술 과에서는 최대한 많은 수술을 하고자 했다. “수술 건으로도 돈을 많이 있다. 그리고 수술을 많이 하면, 훨씬 많이 있다
    • Faculty 같은 변화된 태도가 점차 상업화된 의과대학의 정신을 보여준다면, 특허나 새로운 산업 벤처에 대한 태도 역시 마찬가지였다.
      • Harvard Medical School 항상 특허를 공공에 풀어버림으로써 제약산업계를 화나게 해왔었는데, 1974 Monsanto Company 협약을 맺고 $23M 지원받았다.
      • 그 이듬해에 Harvard 오랫동안 지켜왔던 특허에 대한 정책을 포기하고 일정 보상을 받고 산업체에 넘기는 새로운 정책을 도입했다.
      • 대중의 눈에는 이러한 모습은 academic scientist 기업가로, 대학은 commercial institution으로 보였다.
    • 의과대학들이 기업과의 새로운 liaison을 찾아나선 데에는 이유가 있었는데, 연방 정부의 연구에 대한 지원이 줄어들면서 기업에서 스폰서를 받는 것이 점차 더 끌렸던 것이다.
      • 추가로 연방 정부는 “technology transfer” 장려했다.
      • The Patent And Trademarks Amendments Act of 1980으로 대학과 비영리기관들이 연방정부의 지원금을 받은 연구에서 만든 새로운 발명이나 특허를 직접 소유할 수 있게 되었다. 1990년에 100 이상의 의과대학이 기업으로부터 자금을 조달하고 있었다.
    • 이러한 변화에 대한 최종적 결론을 내리기에는 이르지만, 적어도 한 가지 목표는 이루었다. Technology transfer 촉진하고, 의과대학에게 추가적인 수입원을 제공하는 것이다.
    • 그렇지만 biomedical research의 상업화는 많은 딜레마를 낳았다. Faculty practice plan 마찬가지로 대부분의 수입이 faculty 손에서 머물면서 교육이나 연구를 지원하고자 하는 의과대학의 소유로 넘어오지 않게 것이다.
      • 일부는 스스로 biotechnology company 설립하여 돈을 벌었고, 일부는 기업에 자문을 해주고 자문료를 받았으며, 일부는 특허를 통해 돈을 벌었다.
    • 게다가 사익을 추구하는 이러한 유혹은 잠재적인 conflict of interest 야기했다. 거대한 재정적 보상이 investigator 하여금 연구 주제를 선택하는 것에 영향을 줄지도 모른다는 우려가 있었고, institutional responsibility 다하지 못할 것이라는 우려도 있었다. 무엇보다도 실제로 심한 대중적 비난을 받은 사건들이 터졌다.
    • COI 관련된 이러한 문제의 정도나 심각성이 어느 정도였는지 분명하게 말할 수는 없다. 정서적(emotion)으로는 엄청난데, 증거는 거의 없었다.
    • 1990년대에 biomedical research 상업화는 의과대학에 있어 가장 난감한 문제 하나였다. 딱히 만한 물건 없던 시절에는 기업과 얽히는 것을 비난하는 것이 쉬웠다. 실제로 이미 당시에 대학의 다른 과들은 이미 기업과 관계를 맺은 오래 되었다. Academic value 항상 진화하는 것이고, commercial age 상업적으로 변하는 것은 이상할 것이 없었다.
    • 그렇지만 많은 사람들은 biomedical research 상업화에 대한 우려가 컸다. 학교가 수익을 추구하면서 점차 charitable institution으로서 진리를 추구하고 학생을 serving하는 모습은 잃어가고 있다라고 했다.
    • 1970 이후 상업주의가 팽배했다면, academic integrity 낮아졌다.
      • 학생들이 cheating했다는 보고가 자주 있었고, internship matching program 규칙을 어기기도 했다.
      • 중에서 가장 대중의 비난을 것은 scientific fraud였다. (표절, 결과의 잘못된 해석, 데이터 조작)
      • 대중들은 biomedical research 부정적인 방향으로 변해가고 있는 것을 우려했다.
      • "The Science Mob"
    • Biomedical 연구에서 사기(fraud) 정도는 확실히 얼마라고 하기는 어려웠고, 과학의 역사에서 다양한 형태의 사기는 어떤 형태로든 있어왔다. 하지만 이렇게 많은 documented episode 있는 것은 지식에 대한 탐구가 학문적 성공보다는 생존의 문제가 되었다는 것을 뜻한다고 있다.
      • "publish or perish"
      • "salami slicing", redundant publication, authorship 문제(senior junior 논문에 무임승차)
    • 많은 사람들에게 authorship 남용은 biomedical research integrity 떨어지는 것에 대한 중요한 신호였다. 명백하게 드러난 사기행위는 일탈(aberration)이라고 있었다. 하지만, authorship 대한 남용은 academic medicine 문화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 "a murder gets more attention than a mugging"
      • 이제 과학은 질병이나 고통의 싸움이 아니라 과학자들끼리의 싸움이 되었다.
    • 1965 이후 사회의 health care need medical faculty사이의 차이가 커졌다. Acute disease 줄고, chronic disease 시대가 왔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질병을 걱정하는 것보다 의료 접근성에 대해 걱정했다.
    • 대중들이 의료전달체계에 관심을 갖기 시작하는 동안, faculty 관심은 생물학적인 것에 집중되어 있었다. Medical scientist들은 질병과 치료의 생물학적 이슈들을 쫓고 있었고, 상대적으로 소수의 faculty만이 사회 경제적 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 의과대학은 WWI이후 처음으로 사회의 요구에 반응하지 않는 배타적인 존재가 되었다.
    • 대부분의 Medical faculty들의 관심은 좁은 곳에 머물러 있었지만, 그렇다고 AHC 이뤄낸 것들이 격하되는 것은 아니다. Private patient들의 care 대한 요구, 의과대학의 임상 수입에의 의존, 많은 urban community AHC에의 의존과 같은 '강력한 ' 맞추어 나가며 AHC 나름의 사회적 요구에 대한 반응을 보였다.
    • 그럼에도 특정 인구집단에 대하여 clinical service 하는 것은 비효율적이고 돈이 많이 드는 사회적/정치적/경제적 health care system 문제를 해결하는 것과는 다른 일이었다.
      • 그렇다면 사회 변화의 도구로서 의과대학의 역할은 무엇인가?
    • 역사적으로 대학은 사회적 변화를 만들어나간다기 보다는, 외부적 힘에 맞춰서 대응하는 역할을 했다. 서구 대학에 영향을 주요한 사건들은 프랑스의 Revolution, 러시아의 Communist Party, 영국의 various royal commissions 등이 있다.
      • 국가의 health care system 단순히 기술적인 지식 뿐만 아니라 당시 사회의 가치나 희망, 열망 등등을 같이 보여준다.
    • 그렇지만 의과대학은 의료전달체계와 관련된 논의를 이끌어갈 의무가 있다. 의과대학이 점차 환자 진료에 경제적으로 의존해 감에 따라, 대학의 다른 어떤 과도 사회 문제에 대해서 가지지 못했던 '지분' 가지게 되었다. 사회는 의과대학이 증가하는 비용에 관한 문제를 풀어나가기 위한 리더십을 발휘하길 기대하고 있었다.
    • 일부 academic medicine 리더들은 이에 동의했다. AAMC 1968 "의과대학은 교육과 연구와 진료에 대해 책임 있는 자세를 가져야 한다"
      • 아무도 질병에 대한 연구를 그만 해야 한다고 생각하지는 않았지만, 더불어 많은 사람들이 의료전달체계에 대한 연구 역시 같이 동반되기를 바랐다.
    • 그러나 이러한 기대는 이뤄지지 않았다. 많은 학교들이 health service 연구를 했지만, 1970년대, 1980년대, 1990년대 동안 대체로 분야의 연구는 그저 '부가적인 '으로 여겨졌다.
      • 분야 연구자들은 승진이나 학문적 인정을 받는 것이 느렸고, 관련 연구를 있는 환경이 조성된 학교도 거의 없었다.
    • 물론, 의료전달체계를 다시 만들어 나가는데 의과대학이 어떠한 역할을 해야 하는가에 대한 논의의 공간은 충분했다. 그러나 의과대학은 다양한 방법 어떤 것도 택하지 않았고, 오히려 아무 일도 없다는 것처럼 행동했다.
    • 상업주의가 점차 퍼져가고 authorship 남용하고, 미국의 의료 시스템 개선에 대한 논의는 거의 없는 와중에 medical faculty 그들 자신의 안위와 이익에 집착했고, 넓은 사회라든가 그들이 serve해야 하는 사람들에 대한 관심은 갖지 않았다.
      • 1970년대와 1980년대는 "Me generation"이라 불릴 있고, community 흔히 무시되기 일쑤였다.
      • 1977년의 베스트셀러 제목은 Looking out for number One 이었고, 1980년대에 월가에는 "greed is good" 태도가 퍼져 있었다.
      • 이러한 문제는 의과대학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 전반의 분위기였던 것이다.
    • 그러나 academic medicine에는 뭔가 다른 것이 있었다. 20세기 시작부터 medical faculty 공공의 이익을 대변했고, 학부와 졸업생 교육에 신경을 썼고, public health 뿐만 아니라 progressive era 다른 많은 것들의 발전을 위해 리더십을 발휘했고, WWII동안에는 많은 사람이 희생했다.
      • 그러나 1980년대에 academic physician들은 기업 운영진, 증권 중계인 등으로 인식되기 시작했다. 당시 미국 사회에서 Academic medicine만이 개인의 이익을 공익보다 우선시했던 것은 아니지만, 다른 사람들과 달랐던 것이 있다면, academic medicine 전통적으로 다른 기준을 따라서 행동해왔다는 것이었다.
    • 수십년간 academic medicine 특권층으로 인식하게끔 했던 것은 AHC 자기 자신이 아니라 아픈 자를 위한다는 믿음 때문이었다. 아이러니하게 1970년대와 1980년대의 academic medicine 스스로의 이익을 우선하는 동안에도 자국민의 건강을 중시하는 모습은 사라지지 않았다. 의과대학 학생들을 교육하는 곳이었고, 연구가 주로 이뤄지는 곳이었으며, 진료가 이뤄지는 곳이기도 했다.
      • 평균적인 환자들은 높은 수준의 진료가 필요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그것이 가능하다는 믿음만으로도 위안을 가질 있었다.
    • 짧게 줄이면, AHC 여전히 핵심적 mission 추구하고 있었다. AHC 뛰어난 진료와 성공의 기록을 보유한 국가 기관이었다. 그러나 소유욕(acquisitive) 시대에 academic medicine 비전을 상실했다.
      • 의학교육자 그들 자신이 이러한 vision 상실했음을 상기하면, 대중들이 국가적 well-being 대한 AHC 중요성을 잠시 망각했다고 해서 이를 비난할 수는 없을 것이다.



  • Chapter 15. Academic Health Centers Under Stress : Internal Dilemmas
    • 역사를 통틀어, 미국의 의과대학은 다른 고등교육과 같이 사회, 경제, 정치적 발전의 안에서 모양을 갖춰왔다. 따라서 외부 사건으로 인한 압박을 받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이미 존재했던 challenge들이 더욱 심해졌지만, 사실 많은 문제는 외부의 적대적 환경에서보다는 주로 의학지식의 발전과 AHC라는 조직의 발전에서 기인한 것이었다.

 

  • Molecular Medicine and the Disappearance of Teachers
    • 1970년대와 1980년대에 biomedical research 바꾸어놓을 분자생물학적 혁명이 힘을 받고 있었다. 연구자들의 시선은 점차 작은 것들을 향했다.
    • 기초 과학 분야에 걸쳐서 깊이 있고, 아름다운 발견들이 이뤄졌다. 가지가 특징적이었는데, (1)우선 하나는 분자생물학과 질병에 대한 분자적 개념이었다.
      • 유전자 재조합의 방법과 기술이 발전했고, 유전자의 손상으로 인한 질병들이 발견되었다.
    • (2) 번째 분야는 세포생물학이었는데, 세포를 구성하는 단위들의 구조가 밝혀졌다. 세포막 수용체, second messenger 등이 발견되었다.
    • (3) 번째는 면역학이었고, 항체, , 이식 거부반응, multiple sclerosis, rheumatic disease 등의 연구가 발전했다.
    • (4) 번째는 신경과학이었다. 다양한 신경전달물질, lithium 같은 약들, 감정을 조절하는 신약들이 발견되었다.
    • Biomedical research 시대를 보여주는 분자생물학의 혁명을 하나 꼽으라면, 바로 "molecular language" 바탕으로 각기 분리되어 있던 preclinical science 통합이다.
      • 기초과학의 합류는 이전부터 일어나고 있었는데, 이제는 거의 완성단계에 이른 것이다.
    • 임상과에서 연구는 여전히 잡다했는데, 우선 관찰적 접근법이 여전히 유효했다. 임상 현상에 대한 Experimental study 같은 임상 연구도 하고 있었고, 역학 연구도 중요했다. Private foundation 지원에 힘입어 일부 의사들은 질병의 비생물학적 요인들을 연구하였다.
    • 그렇지만 가장 앞서나가고 있는 clinical investigation 분자생물학적인 이었고, 기초과학 분야와 동일한 reductionist approach 사용하고 있었다.
      • Inflammation 일으키는 Cell wall 대한 연구가 이뤄졌고, 고콜레스테롤의 미스터리도 분자 수준에서 밝혀졌다.
    • Clinical investigation 다룬 논문들을 살짝만 보아도 얼마나 분야의 과학 연구가 patient에서 laboratory 이동했는지를 잇다.
      • 1980년대와 1990년대에는 JCI 환자 중심의 논문들이 실렸지만, 이제는 분자세포생물학적 테크닉이 포함된 논문이 대부분이다.
    • 임상 연구가 달라졌다는 다른 신호가 있었다. 많은 AHC에서 clinical research center 대개 활용되지 않았었지만, 1980년대와 1990년대에는 임상 연구를 위한 laboratory facility 새롭게 지어졌고, 1980년대에는 "physician-scientist"라는 단어가 "clinical investigator"라는 단어를 대체하기 시작했다.
    • 아직 배워야 것이 많았지만, 분자생물학적 접근법이 신체와 질병에 대한 이해를 바꾸어 놓은 것도 사실이다.
      • Health care system 대해서 많은 것을 배운 학생들은 건강을 결정하는 중요한 요인이 환경, 사회적 조건, 그리고 예방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성인들의 가장 흔한 문젯거리인 질병들(알츠하이머병, 종양, 고혈압 ) 환경적 요인과 무관한 것이었고, 조깅이나 식습관이나 금연 등으로 모두 예방이 가능한 것도 아니었다.
    • 그럼에도 불구하고 분자생물학적 혁명은 하나의 딜레마였다. Biomedical 연구는 임상 교육과 진료에서 점점 멀어져 갔고, 의과대학의 지적인 응집성이 위협받고 있었다. "bench-bedside gap" 어느 때보다도 컸다.
    • 기초과학 분야에서 tension 매우 뚜렷했는데, 왜냐하면 대부분의 faculty들의 연구 주제들이 학생들에게 가르치는 내용과는 크게 상관이 없었기 때문이다. 기초의학 과들은 이름을 바꾸기 시작했다. (Dept of physiology => Dept of physiology and biophysics)
    • 일부 분야에서는 예전에 가르치던 내용을 지금도 가르칠 있는 faculty 찾기가 힘들어졌는데, Gross anatomy 대표적인 예였다. 일부 학교에서 official들은 기초의학 faculty들이 연구 faculty 교육 faculty 나눠질 수도 있는 가능성을 언급하기도 했다.
    • 비슷한 변화가 clinical dept에서 있었는데, 전통적인 교육-연구-진료 사이의 응집성이 소실되었다. 전통적으로 임상연구의 특징을 정의하는 것은 '환자'였는데 molecular era에서 환자는 없었다.
    • 이러한 접근법의 결과는 medical discovery 측면에서는 성공적이었지만, 처음으로 임상 연구가 진료 교육과 분리되는 결과 가져왔다.
    • 이에 따라 대부분의 성공한 clinical investigator 진료와 임상교육에 시간을 쏟았고 "실제로 학생을 가르치는 사람들은 인턴이나 레지던트이고, 교수들은 어디 데에 가있다" 라고 하기도 했다.
    • 1970년대에 시작해서, 1980년대와 1990년대를 거치면서 의과대학의 physician-scientist들은 병동에서 사라졌다. 많은 임상과들은 academic tract(physician-scientist) clinician-teacher(clinical scholar track, 교육과 진료에 관심있는 사람들을 위한 track) 구분해서 만들었다.
    • Clinician-teacher track 멤버들은 어려움에 봉착했는데, 연구만이 강조되는 과에 학교에서 '2 시민'으로 낙인이 찍히게 이다. 하지만 그들을 보통의 practitioner와는 달랐다. 그들의 관심이 환자 진료와 교육에 있었지만 그들 역시 창의적이고, 사려깊고, 연구에도 관심이 있었다. 그들은 교육과 진료를 담당하는 role model 역할을 훌륭히 수행하고 있었고, 과의 교육적 mission 많은 부분을 담당하고 있었다.
    • 그럼에도 불구하고, clinician-teacher track 만들어진 것은 molecular era 의과대학이 마주하게 근본적인 지적 도전이라고 수도 있었다. 그것은 바로 Medical science medical practice 사이에 연관을 짓는 것이다. 하지만 지금까지도 교육은 최첨단 연구 사이에는 여전히 갭이 있으며, 많은 사람들이 research faculty 어떻게 나머지 학교와 동떨어진 research institute 만들지 않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것인가를 고민했다.

 

  • Reform Without Change
    • Medicare 시작된 이후 직업으로서의 의학의 인기는 요동쳤다. 그러나 아무도 그런지는 모르고 있었다.
    • M&M 도입된 시기부터 managed care 시대까지, 학생의 구성도 크게 바뀌어서 여자 비율은 꾸준히 상승중이었고, 백인 남자 감소추세였으며, 아시안 비율도 높아졌다.
    • Medicare 도입된 이후 의학은 점차 사는 사람들만이 갖는 직업처럼 되었다. 이러한 현상은 수업료의 급격한 상승과 scholarship fund 부족과도 관련이 있다.
    • 의과대학들은 늘어만 가는 빚과 높아만 가는 수업료에 대해 우려 표했다. 때문에 점차 졸업생들이 primary care 대신 specialty field 하려고 하지 않을까? 확실한 증거는 없었다. 예컨대, 많은 사람이 빚의 양과 전공 선택의 관계를 찾고자 했으나 실패했다.
    • Medical faculty들은 국가적으로 종교나 인종이나 사회경제적 상태와 무관하게 다양한 계층에 기회를 주려고 노력하는 상황에서조차 의학이 사는 사람들의 전유물이 될까 걱정했다. 그렇지만 개인 또는 연방정부의 장학금 지원은 많지 않았는데, 왜냐하면 의과대학이 가난하다고 생각한 학생들도 Congress 대중의 눈에는 앞으로 돈을 사람들로 보였기 때문이다.
    • 그렇다면 달라진 medical student 어떤 사람들일까? 아무도 정답은 모른다. GPA 부모의 직업이나, 전공 등에 대한 자료는 있어도 질적인 측면(가치관, 태도, 열망) 대해서는 거의 알려진 것이 없다.
    • 의과대학 학생들이 누구인가에 대한 질문은 1970년대에 새로운 의과대학 학생들에 대한 개의 상반되는 시각과 관계가 있다. 하나는 community medicine, 공중보건, family medicine 등등의 socially committed 학생들이 의학에 관심이 있다는 시각이다.
    • 번째는, "새로운" medical student 극도의 경쟁 압박으로부터 "premedical syndrome" 앓고 있는 학생들이라는, 부정적인 시각이다.
      • Licensing exam 문제와 답을 사고 파는 의과대학 학생 사이에 부정직성.
    • 의과대학 학생들이 이러한 특징을 얼마나 가지고 있는지는 모를 일이다. 하지만 이런 stereotype 의학교육자들에게 태도, 가치, 생각의 중요성을 일깨워줬다.
    • 가장 좋은 학생을 선발해야 임무는 admission committee에게 있었다. 그전과 같이 admission committee GPA MCAT 점수와 추천서 등등을 보았지만, 별로 완벽한 것은 아니었다.
      • "만약 MCAT lab test였다면, sensitivity specificity, predictive value 너무 좋기 때문에 이미 버려진 검사가 되었을 것이다"
    • 입학 과정에서 가장 한계점은 낮은 학점과 MCAT점수를 가지고 오는 minority student 평가였는데, 왜냐하면 이들 학생들이 의과대학에서는 했기 때문이다.
      • "no correlation between MCAT, GPA and academic performance"
    • 입학 과정에서 개인적 친분은 영향을 주지 못하였다. Admission committess 대개 정직하고 양심적으로 일을 처리했다. 아주 가끔 그렇지 않은 일들이 있을 때면 바로 기사화되었다.
    • 입학 과정은 학생 뿐만 아니라 의과대학 입장에서도 골치 아픈 것이었는데, 단순히 학생을 고르는 단계가 아니라 학생을 모집할 있는 기회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학교들은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premedical student 종종 그들 스스로 인식하고 있는 것보다 많은 힘을 갖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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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학생의 입장에서, 의과대학에서의 삶은 지난 세기 내내 별로 달라지지 않았다. 엄청난 경쟁 대한 exhilaration thrill 있었고, 그만큼 거기서 살아나가기 위한 coping mechanism 있었다.
    • 1970 이후 학생들은 의견을 내기 위한 목소리를 높였고, protest era동안 faculty administrator 애써 그들을 무시했지만, faculty 만족도가 높은 학생들이 충성스러운( 많은 재정적/정치적 지원을 하는) alumni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 1980년대에 (harassment abuse등과 같은) 극도의 스트레스에 대한 보고서들이 나왔다. 모든 종류의 offense 있어서 HO 주된 offender였다.
    • 그러한 보고서들에도 불구하고 학부 의학교육이 전보다 특별히 스트레스를 준다거나 비인간적이라는 근거는 없었다.
      • 의과대학생들이 겪는 abuse 대한 조사는 주로 설문지를 통해서 이뤄졌기 때문에 조금이라도 무시를 당했다고 느낀 사건들이 모두 반영되었다. 실제로 문제가 심각해 것인지, 아니면 학생들의 역치가 낮아진 것인지는 아무도 없었다
    • 그나마 학생들이 걱정을 했던 것은 유급에 대한 걱정이었다. 유급률이 높고 성적이 좋은 학생들조차 직업을 찾기 힘든 다른 과들과는 달랐다.
    • 반면, 새로운 걱정이 생겼는데 바로 레지던트에 대한 걱정이었다. 최상급 학교에서의 경쟁은 항상 심했다.
    • 새로운 경쟁적 환경의 결과는 특정 분야의 레지던트를 하기 위한 학생들의 열기였고, 의과대학의 4학년는 "preresidency syndrome"이라고 불렸다. 특정 분야에 관심이 있는 senior student 4학년을 연속되는 "audition elective" 하며 보냈다. General professional education 집중하는 대신 병원과 병원을 전전해가며 동일한 elective 하고 다녔다.
    • Program director들의 이와 같은 행동은 이해할 했는데, 왜냐하면 그들의 관심사는 최고의 HO 뽑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Clinical clerkship에서의 performance 인턴/레지던트 동안의 performance 예측할 있게 해주는 가장 좋은 지표였고, 학장이나 faculty 추천서는 신뢰를 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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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M&M 통과되면서 medical faculty 수많은 교육적 이슈들과 씨름해야 했다. Molecular revolution으로 인해서 교육은 어려워졌다. Faculty 항상 교육과정 개혁에 관여했고, 가장 두드러지는 경향은 basic science 투자하는 시간을 줄이는 것이었다.
    • Harvard의 "New Pathway" program 40명으로 구성된 학생을 faculty 맡아서 생활 지도를 하며 faculty 학생간의 interaction 높이자는데 목적이 있었다.
  • 어떤 학교도 이상적인 교육과정을 달성했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그리고 mission, resource, local tradition 차이 때문에 학교에서의 성공적인 실험이 쉽게 다른 학교로 전달되지도 않았다.
  • 학교들은 material 조직하는 방법과 presentation방법 뿐만 아니라 새로운 교육과 평가 방법의 실험 학교도 있었는데, 예를 들어 일부 학교는 SP 사용한 교육을 했고, McMaster University PBL 도입했다.
    • 외에도 computer-assisted literature search, computer-based interactive learning 등등.
  • 돌봄(caring) 연민(compassion) 교육이 가능할까? 형식적인 교육이 도움이 거라는 가정은 그럴 했다. 환자를 전체적으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많은 중요한 사회적인 개념들이 중요했다.
    • Communication skill 향상되어야 했고, 행동과학의 도구들도 사용되어야 했다.
    • 가장 중요한 것은, empathy 다른 사람의 입장에서 생각할 있는 능력이 필요했다.
  • 한편, 교육을 통해서 caring doctor 키우는 것이 가능하다는 것에 대한 근거는 없었다. 1970 이후 대중들은 많은 medical humanities 가르침에도 불구하고 의사를 비인간적이고, 이기적이며, 탐욕스럽다고 생각했다. 실제로 생물을 전공한 사람들이 caring, sensitive, humanitarian하다는 연구결과도 있다. Medical humanities formal instruction으로 가르치는 것에 대한 rationale 확고했다. 그렇다고 해서 아무 학생이나 뽑아도 된다는 오해만 하지 않는다면 말이다.
  • caring 하는 physician 키워내기 위한 노력에 '과함' 있을 있을까? 문자 그대로 보면 그렇다 라고 수도 있겠지만, 실제로는 대답은 아니오 였는데 왜냐하면 그것이야말로 좋은 physicianship 가장 중요한 역량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일부 교육자들은 점차 의학의 'art' 측면을 강조하는 것이 'science'로서의 기반을 약화시킬 것을 걱정하였다.
    • Cornell 내과의사면서 감염 분야 전문가인 McDermott basic science 강조하지 않는 것은 anti-intellectualism이면서 vocationalism 반하는 것이었다.
    • "그냥 적당히 평범한 의학적 문제들을 다룰 있는 의사를 키우는 것은 쉽다"
  • Humanitarian으로서의 그의 위치를 고려하면 McDermott 그토록 걱정을 했던 것도 이해는 된다. 그는 내과 분야의 권위자이면서 clinical investigation에도 뛰어났지만 그는 의학의 사회적 책임을 강조하는 접근법으로도 유명했고 그가 이름을 붙인 [의학의 "Samaritanism"] 강조했다.
  • 아마도 모든 교육과정 개발의 문제 중에서 가장 어려운 것은 새로운 교육 방법을 평가하는 일일 것이다. 미국 교육의 역사를 통틀어서 어떤 intervention 가해졌을 그것의 효과를 평가하는 것은 사실상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다.
  • 누가 의학 교육과정을 조절하는가? 이론적으로는 의과대학들이었지만, 면허를 따기 위해서 학생들은 ( 파트로 ) 시험을 통과해야 했기 때문에 실제로는 NBME라고 생각했다.
  •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의과대학 사이에 항상 일정 정도의 차이는 있었다. 반대로 학교들은 세기 내내 포괄적인 교육의 목표에 있어서는 거의 일치했다.
    • Molecular revolution 생물학을 바꾸고 있었던 만큼이나 질병의 양상도 바뀌고 있었다. AIDS 같은 새로운 질병이 등장했다.
    • 비판적으로 사고하고, 새로운 지식을 흡수하고, 독립적으로 학습할 있는 의사를 만들려는 노력은 모든 의과대학 사이에 퍼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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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역설적으로 의학교육을 지적인 경험으로 충만하게 하려는 수많은 (talk)에도 불구하고 실제로 목적은 거의 달성되지 않았다. 교과과정은 경직되어 있었고, 과밀했고, 너무 많은 강의가 있었고, 단순 암기를 지나치게 강조했다.
  • 의학교육의 이상에서 가장 크게 벗어난 것은 basic science 교육이었다. 1970년대와 1980년대에 laboratory instruction 크게 감소했고, 이러한 변화 과정에서 "핵심(bottom line)" 암기하는 것이 우선적으로 강조되었다. 학생들은 은연중에 이러한 교육 방법의 한계를 깨닫고 있었고 수업을 빠지고 혼자 공부하는 일이 많아졌다. 많은 학교에서 "협동적 필기(note-taking cooperative)" 이러한 상황을 formalize  시켰다.
  • 임상 과목에서도 의학교육의 현실은 rhetoric 달랐다. 여기서 문제는 너무 많은 강의가 아니라 faculty teacher role model 부족이었다. HO 역할은 대학원에서의 TA 역할이 비슷해졌지만 HO 교육에 있어서 아무런 지도도 받지 못했다. 또한 학생과 HO 모두 학습을 위한 경험이 필요한 사람들이었다.
  • 변화 없는 개혁은 의과대학이 주로 학생이 중심이 변화과정이 아니라 faculty 중심이 변화과정을 거쳤다는 것에 원인 있다. Basic science 과목에서 강의가 강조되고 실험실 교육이 줄어들었지만 faculty 많은 시간을 갖게 되었다.
  • 1970년대와 1980년대에 교육에 투자되었던 faculty 시간을 주로 빼앗은 것은 연구였다. 임용, 승진, 봉급 등등은 주로 publication 연구비를 얼마나 따오느냐에 달려 있었다.
  • 연구에 집중 있도록 하는 인센티브는 엄청났고, 특히 junior faculty 그들의 career 쌓고자 했다.
  • 일부 teacher들도 승진하긴 했지만, 그들에게 오는 보상은 느렸다. 예를 들면 Clinical-teacher track 있는 faculty들은 승진을 위해서 오래 기다려야 했다.
  • 교육과 연구 사이의 tension 책에도 앞서 나왔던 것처럼 매우 오래 것이었다. 1970년대와 1980년대에 정도는 심해졌다. 우선 여기에는 경제적 이유(연구에 대한 확고한 인센티브) 있었다. 또한 지적(intellectual) 이유 있었는데 bench-bedside gap 커졌던 것이다. Faculty들은 학생보다 Ph.D. candidate 가르치면서 얻는 즐거움이 컸다.
  • 많은 의과대학들의 leader들은 좋은 교육을 정의하고 측정하는 것이 어렵다는 것을 주장하였고, 그로 인해서 연구보다 낮은 지위를 갖게 되었다고 한다.
  • 그러나 연구를 판정하는 정확한 기준이 있는지도 의심스럽다. 연구자의 업적은 publication 숫자로 평가되었다. 그러나 1981년부터 1985년까지 출판된 논문의 80% 심지어 연구자 본인을 포함해도 번도 인용되지 않았다.
    • "Dr.X에게 절대로 '출판되지 않은 생각'이란 없다"
  • WWII 종말 이후 학생 교육은 AHC 하는 활동(연구, graduate teaching, 진료) 부산물이 되었다. 이런 것들이 의학교육에 해를 끼치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모든 의과대학에서 instructor 모습을 보면 교육은 절대 우선순위에 있지 않았다. 학생들에게 반복적으로 불만이 쏟아졌다.
  • 학생을 알지 못하는 faculty 많다는 보고서도 계속 나왔다. 의대 학생들의 최고의 친구인 AAMC조차 학습자 중심의 outlook 포기했다. 1988 조직의 목적을 "the advancement of academic medicine and the nation's health"라고 바꿨다. 의학교육을 바꿔보겠다고 나선 새로운 community-based medical school들도 있었지만, 대부분 빠르게 기존의 가치 체계에 순응해갔다.
  • 줄여 말하면, 진정한 학생 중심의 교육을 하는 것에 가장 장애물은 교육을 진료보다 하위에 문화가 academic medicine 뿌리깊게 박혀 있었던 것이었다.
    • 진정한 educational reform 근본적으로 의과대학을 재구성하고 재조직해야만 가능한 것이었다.
  • 모든 official and unofficial 요구들이 핵심이 교육 시스템이지, 시스템의 결과물 자체에 있지 않다는 것은 필요가 있다. 다른 어떤 나라에서도 의학교육이 그렇게 많은 비난을 받는데, 시스템의 결과물은 좋다고 평가받는 조직이 없다.
  • 이러한 성공의 힘은 열정과 헌신만으로 학생 교육에 힘쓴 faculty에게 있다. 비록 교육에 대한 보상은 거의 없었지만, 좋은 교육은 여전히 가능하긴 했다. 다만 의도된 것이 아니었을 뿐이다(by chance rather than by design).
  • 미국 의사들의 quality 학생들이 활용할 환경이 되어있기 때문인 덕분이기도 했다.  하지만 궁극적으로 학습의 책임은 교육자 내적인 것이었다. "Self learning" 사람들이 비난하는 시스템에서 예상할 있는 것보다 좋은 결과물이 나오는가를 설명할 있는 좋은 도구였다.

 

  • The Dilemmas of Graduate Medical Education
    • 1970 이후 사회와 의학의 유행이 바뀌면서 학생들 사이에서 수많은 specialties 뜨고 졌다.
      • 훗날 내과 역사상 "Black Tuesday"라고 불리게 되는 1987년의 "match day"에는 내과의 많은 상위 프로그램들이 미달되었는데, 주된 이유는 의과대학을 다니는 동안 내과에서의 경험이 별로였기 때문인 것으로 추측된다.
      • 1990년대 중반, 한참을 비인기과에 머물고 후에야 내과는 드디어 이전의 인기를 되찾을 있었다.
    • 많은 과의 인기가 오르내리는 동안, 유독 과만은 지속적으로 미달이었는데, 바로 primary care 그러했다. 1960년대에 primary care 하나의 전공으로 만들기 위한 목적으로 family medicine이라는 새로운 분야가 도입되었다. 성대한 팡파레에도 불구하고 1989 13.7%만이 과에 지원했다.
    • 미국 의과대학 졸업생들 사이에서 primary care 인기가 떨어지는 것을 우려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당시 Generalist physician이나 primary care 대부분의 의학적 care specialist보다 저렴한 가격에 제공했다. 전문의들이 많아지는 것을 우려한 것은 대중이나 환자가 아니라 정부나 보험회사 같이 돈을 지불하는 쪽이었다.
      • 의학 inflation 심해지면서 third party payer들에게 primary care physician들은 비용을 절감할 있는 중요한 수단이었다.
    • 전문의와 일반의의 가장 적절한 비율은 얼마일까? 아무도 답은 알지 못했다. 전통적으로 대략 50% 정도의 일반의 정도가 충분하다는 생각이 있었는데, 어떤 데이터에 근거한 수치는 아니었다.
      • "너무 얼토당토아니한 정도만 아니면 된다"
    • 적절한 전문의 숫자에 대한 논의에 대해서 가지 문제가 있었다. 하나는 질병의 역학적 변화라든가 치료에 대한 논의가 빠져 있었다. 1970년대에는 전문의의 숫자가 적어도 것이라고 예상했다. 그러나 AIDS MDR TB lyme disease 등이 생겨났다.
      • 또한 specialty mix 대한 논의가 있던 시기에 미래에 telecommunication 혁명 일어날 것을 예상한 사람은 거의 없었다.
    • 이상적인 비율은 정하기 어려웠지만, GME 필요한 전문의보다 많은 수의 전문의를 양산하고 있다는 만은 분명했다. 국가적으로 미국인 다섯명 명은 전문의에 의해서 general medical care 받고 있었다.
    • 전문의와 일반의의 불균형은 전통적으로 미국 의학교육에 존재해왔던 개인주의와도 연관이 있었다. 의학교육은 개개인의 권리를 개개인의 사회에 대한 책임보다 우선시하는 경향이 있었다.
      • 이러한 경향이 낳은 결과가 바로 공익적으로 그다지 바람직하지만은 않은 전문의의 양산이다.
    • 다른 국가들과 다르게 미국에서는 전문의 training position 외부적 기관에 의해 통제되지 않았다. , 국가적으로 전문의가 많이 필요하든 필요하든 아무런 영향을 주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 결과적으로 이러한 불균형은 끊임없이 지속되었다.
    • 의과대학들이 하고자 하는 의지만 있다면 있는 것들은 많았다. 의과대학 학생들이 전공 선택 어려움을 겪었다는 것은 알려져 있다. (1)어떤 과를 선택하는 가장 주된 이유는 intellectual content였는데, 이러한 면에서 부속병원들이 크게 관심을 두지 않는 primary care 상대적으로 불리한 위치에 있었다.
    • 반대로, 진로 선택에 대한 많은 연구에 따르면 (Daniel H Funkenstein 앞서 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주된 결정 요인은 외부에 존재한다고 말한다. (2)학생들은 외부에서의 경험에 의해 자신의 가치나 진로 희망을 결정했다.
      • 의과대학내에서의 경험이 영향을 주지 않은 것은 아니었지만, specialty 것인지, primary care 것인지 정도에 머물렀다.
      • 많은 community-based 의과대학들이 기존의 medical school보다 primary care practitioner 키워내는 데에 뛰어나긴 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학생들은 기존에 primary care 강조해온 학교를 선택했다.
      • "primary care physician 키워내고자 한다면 어떤 학생을 입학시키느냐(admissions decision) 교육 프로그램보다 중요하다."
    • (3)사회가 주는 보상 학생들의 결정에 영향을 미쳤다. 1980년도 당시 보건 정책이 논의될 때에 Primary care physician "gatekeeper" 여겨졌다. , 의사라기보다는 부상자 분류(triage officer) 하는 역할로 것이다.
      • 또한 연방정부와 사보험의 reimbursement 정책도 specialist에게 많은 돈을 주는 것으로 되어있었다.
    • 줄이자면, 의과대학이 약간의 도움이 있을지는 몰라도, 외부에서 specialist 수를 통제하지 않는 학생들의 primary care 대한 관심을 높이는 데에는 한계가 있었다.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의사의 양과 종류는 단순히 미국의 의학교육이 아니라 미국 사회 전체를 보여주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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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70 이후, GME 하나의 산업이 되었다. 국가 전체 health care 지출 0.5% 차지하는 House staff cost $2 billion 달했다. 레지던트나 fellowship program 들어가는 돈은 주로 환자 진료로 버는 돈이었고, 이는 M&M private insurer GME 밀접한 관계를 갖게 됨을 뜻했다.
    • 1970 중반에, house staff salaries 전형적인 부속병원 예산의 3~4% 정도였으며, 20년간 거의 수준을 유지하게 된다.
  • 누가 GME control 것일까? 확실한 것은 절대 대학은 아니라는 것이다. 1960년대 이후 의과대학이 책임을 가져야 한다고 했지만 이미 많이 늦은 때였다. 1920년대와 1930년대의 의과대학은 거기에 대한 책임을 갖고자 하지 않았다. 1970 이후의 GME 병원-based였다.
  • Residency fellowship program 관련된 복잡한 행정 체계는 GME 대한 대학의 미미한 영향력을 더욱 약화시켰다. 상위권 부속병원에서조차 대학의 영향력은 미미했다.
    • 많은 resource들이 강력한 주임교수들에게 갔고
    • 병원 행정 조직이 환자 진료 수당을 관리하고 있었고
    • Specialty subspecialty board들에게도 간접적이지만 적지 않은 수준의 영향력을 발휘했고
    • 정부와 사보험회사도 영향력을 행사했다.
  • 1970 이후 house officer들에게도 WWII이후 지속되어온 경향성은 계속되었다. (1) 번째로, 무엇보다 academic emphasis 사라졌다. R에게 있어서 연구는 사실상 사라졌다. Clinical fellowship "scientific dilettantism"이라 불렸다.
  • (2) 번째로 'family'라는 비유적인 느낌은 완전히 사라졌다. 주된 이유는 R F 숫자가 크게 늘었기 때문이고, 또한 faculty 병동에서 사라졌기 때문이다. Faculty 아침에 회진을 한번 돌고 잠깐 도움이 필요하다고 때만 찾아왔다.
  • (3) 번째로 기술의 발달로 외래 기반으로 환자 관리가 이루어질 있음에도 불구하고 graduate education 기본적으로 병동 환자에 대한 경험을 쌓는 것이었다. Outpatient education 거의 강조되지 않았다.
  • (4)마지막으로, 병동에서 house staff 해야 일이 점차 많아졌다. 위중한 환자들이 들어왔고, 기술은 발전했고, 밤에 오는 콜도 많아졌다. '시간' 사치일 뿐이었다.
  • HO 힘들게 했던 것은 sampling이나 IV같은 자기와 관련 없는(extraneous) duty들이었다. 대부분의 부속병원에서 HO들은 전체 시간의 1/4 이러한 일을 하는데 쓰고 있었다. Phlebotomist technician 고용되었지만 다른 일이 워낙 많아서 크게 도움이 되지는 않았다.
  • 과중한 업무량과 과로로 인해 비정상적인 행태들이 나타났는데, ER 전화를 받지 않기도 했고, 누가 다음 전화를 받을 것인가 또는 업무교대 직후에 환자를 누가 것인가 등을 놓고 서로 싸우기도 했다.
  • HO 업무량이 늘어나면서 GME 오래된 논쟁은 더욱 악화되었다. Education or Service?
  • Residency training 딜레마는 1984, 18 소녀 Libby Zion New York Hospital에서 사망하는 사건을 계기로 대중들의 관심을 끌게 되었다.
    • 그녀의 부모는 딸의 죽음이 과도한 업무와 감시의 소홀 때문에 일어났다고 주장했다. 20세기 시작부터 이어져온 '의학교육이 나은 patient care 이끌고 있다' 라는 진리가 흔들리고 있었다.
  • 수년간에 걸친 많은 의학적 법적 자문 후에도 Zion 사망의 원인은 끝내 밝혀지지 않았다. HO 해야 일을 했으며, 과로한 상태도 아니었다. 대배심(grand jury) 의사를 무죄로 판결했고 state medical board 면허를 박탈하지 않았다.
  • 그렇지만 대배심은 residency training program 기소(indict)했고, 이는 GME 개혁에 있어서 주요 쟁점이 되었다. 대배심 보고서로 인해 Bell 위원장으로 하는 특별 위원회 생겼고, 위원회는 resident 근무 시간과 관리감독에 대한 제안을 했다. Resident Review Committees(RRC) 의해서 비슷한 규제 자발적으로 도입되었다.
    • 세부 규정은 조금씩 서로 달랐지만, 공통적으로 새로운 규제는 근무 시간을 주당 80시간으로 제한하고, 주에 하루 이상의 오프를 의무적으로 제공하며, 응급실 교대 근무 시간을 제한했고, 병원의 nights on call frequency에도 제한을 두었다.
  • 넓게 보았을 이러한 사건은 놀라울 것이 없었다. 사회는 항상 의학교육에 있어서 당사자들에게 자율 재량권을 왔지만, 완벽한 자유를 적은 없었다. Consumerism 시대에 대중의 요구는 HO들이 조금 휴식시간을 갖고, 조금 감시를 받는 것이었다. 대배심과 Bell commission 소비자의 의견을 대변한 뿐이었다.
  • 처음에는 많은 의학교육자들은 근무시간이나 관리감독에 대한 규제를 두는 것에 반대했다. 추가적인 비용이 생길 것이라는 걱정부터, 연속성이 떨어져서 patient care house staff education 문제가 것이라는 걱정도 있었다. 특히 patient care 있어서 graded levels of responsibility 주어져야 한다는 원칙이 깨지는 것을 크게 걱정했다.
  • GME 개혁이 필요하다는 것에 반대를 하는 사람은 없었다. 그러나 residency 환자가 안정적이면서 병원에 오래 머물던 시절에 만들어진 제도였다. 1980년대에, 입원 환자는 중증 환자들이었고, 환자의 turnover 빨랐다.
  • 반대로, 새로운 RRC 규제는 residency training 문제를 관료적(bureaucratic)으로 해결하려는 시도였다. 이로 인해 그들이 실제로 고쳐야 하는 문제를 짚어내는 데에는 실패했다. (1) 가지 문제는, 단순한 시간 제한으로 인해서 house staff 스트레스가 줄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 노동 시간을 줄인 것은 반대로 말하면 넓은 범위의 '근무 조건' 대해서는 아무런 이야기를 하지 않은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 (2) 번째로, 시간을 규제해서 house staff education이나 patient care 목표를 달성했는지가 불분명하다. 많은 사람들은 house officer 교대가 많아지면서 patient care에서 실수가 많아지지는 않을까 염려했다.
    • 예를 들어 내과에서는 근무 시간 제한으로 인해서 검사를 의뢰하는 delay 많이 생기고, complication 늘어났다는 연구가 있다.
  • (3) 번째로 여전히 야간 아르바이트의 문제가 있었다. 1980년대와 1990년대에 HO 과외 활동의 핵심인 야간 아르바이트는 해결되지 않았다.
  • (4)마지막으로, 명의 의사가 처음으로 독립적으로 진료를 보는 순간에 대한 평가를 피해갈 수는 없다. GME 가장 중요한 원리는 부속병원 setting에서 누군가 나보다 senior 사람이 언제나 도움을 있는 환경이다. Graded responsibility라는 원칙은 모든 환자의 궁극적인 안전을 표방했는데, 비록 전체적인 균형 자체는 supervision 가까이 하도록 것이 맞지만 RRC direct supervision 대해서 부드러운 입장을 취했다.
  • 궁극적으로 교육의 질과 GME에서의 patient care 확실히 책임져야 주체는 official regulation 아니었다. 책임의 일부는 medical faculty에게 있었다. Faculty 하고자 하는 뜻만 있다면 얼마든지 resident 여러가지로 도와줄 있었다(adviser program, conseling, retreat…). 이러한 것이 부담이 지는 몰라도, 어쨌거나 이런 것을 있는 사람도 그들이었다.
  • 그러나 아무리 열심히 하려고 해도 혼자서 GME 발전시킬 수는 없었다. 단순히 당직때 콜이 온다거나 faculty 관심을 갖는 수준이 아니라 HO들에게 부과된 노동 강도가 줄어야 했다.
    • 그러나 managed care era third party payments restrictive해졌고, 여러 병원에 긴축을 요구했다. AHC 대중으로부터 HO들을 너무 많이 시킨다며 비난 받아야 했고, 반면 HO 노동강도를 줄이는 것에 대한 보상은 거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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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GME 관련한 많은 딜레마는 내부적 요인과 외부적 요인의 상호작용을 보여준다. 그러나 가지 분야에 있어서 medical faculty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하는데, 바로 검사 의뢰에 대한 것이다. Faculty HO들에게 점점 많은 검사를 것을 요구했다.
  • 검사 의뢰는 사회적 경제적 개인적 요인이 복합되어 나타나는 것이었다. Malpractice suit 대한 공포가 있었고, 개개의 case 너무 복잡해서 어떤 것이 "unnecessary" test인지 구분하기 힘들었다.
  • 그렇지만 많은 연구는 분명히 과도한 검사 의뢰가 있었음을 보여준다. 25% 수입이 실험실 검사 영상 검사에서 오는데, 검사의 5%만이 진단에 실제로 사용된다.
    • 위양성은 돈이 드는 것일 뿐만 아니라 위험하기까지도 했다.
  • 과도한 검사는 새로운 모습은 아니었지만, 당시 새로운 모습이라면 진단 procedure 발달 가격의 상승이다.
    • "physician 하는 검사가 조금만 달라져도 전체 비용에는 상당한 변화가 생긴다"
  • 과도한 검사의 원인은 세기동안 이어온 의학교육의 문제 때문이었다. 의학교육이 불확실(uncertainty) 대응하는 법을 가르치지 못했던 것이다.
    • 극소수의 교육자만이 레지던트의 reasoning process 함께 했다.
  • 확실성에 대한 잘못된 탐구는 방탕한(profligacy) 진단적 검사가 있게 했다. 일부 의사들은 시간은 자기들 편이 아닌 것처럼 행동했다. 이미 진단이 내려진 뒤에 동일한 검사를 오더하는 일도 흔했다. 진단이나 환자 관리에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검사를 시행하기도 했다. 불필요한 검사는 추가적 비용이 뿐만 아니라 환자에게도 위험했다.
  • 세기 내내 medical faculty '불확실성에 대응하는 ' 가르치지 못했다. 그러나 열심히 하면 달성할 있는 목표였다. 일부 비용-효과성이 강조되는 또는 주치의가 HO reasoning process 자세히 들여다 시간이 있는 과에서는 상당 정도 달성되었다.
    • 다른 전략도 가능했는데, 예를 들면 HO에게 의뢰한 검사의 비용이나 어떻게 검사 의뢰 process 개선될 있는가에 대한 정보를 제공한 경우가 그러했다.
    • AHC 있는 잠재력을 스스로 갖추고 있었던 것이다




  • Chapter 14. Academic Health Centers Under Stress : External Pressures
    • VW 끝날 무렵, 미국 국내는 잠잠해졌다. 그렇지만 1970년대와 1980년대에 Academic health center(AHC)에는 새로운 외부적 압박이 있었는데, 그것은 사회나 인구학적 변화라든가, 정부의 새로운 정책이라든가, 대중의 달라진 시선 등이었다. 외부 funding 의존해왔기에 MS들은 번도 온전히 자율권을 가진 적이 없긴 했지만, 이제는 여러 측면에서 그러한 사실이 명백해졌다.

 

  • The Decline of the Cities
    • 대부분의 AHC 도시에 있었던 것은 제법 합리적이었는데, 왜냐면 그래야만 충분히 환자를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1970년대 들어서 많은 AHC들은 새로운 문제를 마주하게 된다. 1950년과 1970 사이에 흑인 인구가 크게 증가하면서, 이들은 대도시로 이동해왔다. 여러 사람이 섞여 있던 inner city 인종적마다 각기 구역(ghetto) 이루고 사는 형태로 바뀌어갔다.
      • 이는 곧바로 이러한 도시들에 위치해있었던 AHC에게도 영향을 주었다.
    • Columbia-Presbyterian Medical Center 주변의 환경 변화는 전형적인 사례다. CPMC 위치하고 있던 북부 맨하튼 지역(Washington Heights section)에는 주로 중산층 백인들이 살고 있었다. 그곳에 살던 Irish, Jews , Greeks 등은 남부 맨하튼에서 이사온 사람들이었다. 곳에는 community hospital 뿐만 아니라 private medical practitioner 많았고, CPMC 병상들은 주로 community needs보다는 교육적 목적으로 지어진 것이었다.
    • 지하철 시스템이 완성되면서 WH 인구는 점차 증가했고, WWII이후 인종 구성이 많이 바뀌어서 많은 흑인과 히스패닉이 곳에 와서 살게 되었다. 점차 많은 사업체들과 의사들과 community hospital 이곳을 떠나갔다.
    • 이러한 악화되는 주변 환경 속에서 AHC 많은 문제를 겪게 된다. 하나는 환자, 학생, 직원들의 안전 문제였다.
    • 학생, 간호사, house staff들이 거주하는 AHC 주변의 범죄율이 상승하고 있었고, local school 역시 나빠졌으나 house staff들은 사립학교에 아이들을 보낼만큼의 여유가 있지는 않았다.
    • AHC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중요한 시도를 하는데, 방범 수단(security measure)들을 강화하고, 지역 경찰에게 부탁하여 patrol 강화했다. 여러 시도를 하였지만, 어떤 inner-city MS들도 달라진 환경에서 오는 부담을 덜어낼 수는 없었다.
    • AHC들은 그들 자신의 안전도 생각해야 했다. AHC 도시 가운데 우뚝 솟아있는 건물이었고, 많은 사람들에게 백인 제국주의와 인종차별의 상징처럼 보였다.
    • 1960년대에 아마 어떤 AHC JHMS만큼의 위협을 느끼진 않았을 것이다. 1960년대의 JHMS 주변의 환경은 국내 최악의 slum이었다. 동네에서 medical center 제국주의적 확장은 분노의 대상이었다.
    • 1970년대부터 1980년대를 지나 1990년대까지 도시의 AHC들은 나은 '이웃' 되기 위한 노력을 기울였다. AHC 다양한 프로젝트들을 시도했다 :
      • Alcohol and drug abuse programs, methadone clinics, neighborhood health center…
      • 일상적인 의료 수요와는 전혀 다른 프로그램들도 있어서 운동이나 문화행사의 표를 제공한다거나, homeless들에게 음식이나 돈을 주기도 했다.
      • 지역 주민들 사이에서 많은 비난이 있었지만 AHC 꾸준히 일을 나갔고, 이타적인 목적에서든 아니면 현실적인 문제 해결을 위해서든 AHC 은행이나 백화점 등의 다른 사업체와 달리 그들의 이웃들을 모른 하지 않았다.
    • 대부분의 도시 위치한 AHC에서 위와 같은 community program 시행하는 것은 쉽지는 않았다. 보통의 MS들은 community program 운영하는 것에는 익숙치 않았고, "community"라는 개념도 단순하지 않았다.
      • "과연 Community라고 하면 누구를 말하는가?"
    • Community 좋은 관계를 유지하려는 차원에서 AHC 종종 딜레마에 빠졌다. 지역사회를 위하는 목적으로 하는 것들이 종종 AHC 직원들에게는 손해를 입히는 일들이었던 것이다.
      • 병원 전용 수영장 개방의 문제
      • 병동에서는 HO들이 가난한 사람들의 입장을 대변하여 계속 입원시켜두고자 했지만, 병원 입장에서는 보험도 가입되어 있지 않은 사람을 계속 입원시켜 수는 없는 일이었다.
    • 위의 문제들만큼 심각했던 것은, 도시의 쇠퇴함에 따라서 charity care 보험에 가입되어 있지 않은 환자들을 보는 것에서 따르는 경제적인 부담이었다.
      • 1980년대 초반에 teaching hospital 5.6% acute care bed만으로 국가 전체 free care 47.2% 감당하고 있었다.
    • 가난한 사람들을 보는 것에 대한 부담을 가중시킨 것은 경제적인 요소들 뿐만이 아니었다. 많은 의사들은 지역을 떠나서 교외로 나가기 시작했다. 1968년과 1988 사이에 북부 맨하튼에서만 6 병원이 문을 닫았다.
    • 많은 오래된 도시들이 경제적인 문제를 호소함에 따라서 municipal hospital system 망가져갔고, 환자 진료에 공백이 생기면서, 부담이 고스란히 AHC에게 옮겨갔다. 수십년간 제대로 대접을 받지 못했던 municipal hospital들은 1960 이후 심한 어려움을 겪었다. 많은 municipal hospital 규모를 축소시키거나 문을 닫았다. 그리고 결국 부담은 AHC 지게 되었다.
    • Inner-city neighborhood 변하면서, 부속병원들은 환자로 넘쳐났다. 없는 환자들이었기 때문에 퇴원시키는 것조차 쉽지 않았다. 무일푼의 가족도 없는 환자들을 어떻게 퇴원시킬 있을까? 이러한 문제는 1981 Medicaid reimbursement 받을 있는 기간을 20일로 제한하면서 심각해졌다.
    • 부속병원에 있어서 community care 제공함에 따르는 경제적 영향은 엄청났다. 비용은 빠르게 상승하고 있었고 많은 환자들은 M&M 같은 보험에조차 가입되어 있지 않았다.
    • 경제적 부담이 커졌다고 해도 1980년대 후반에는 대부분의 부속병원들은 빚을 지지 않을 정도는 되었다. Private patient 봐서 버는 돈으로 무보험 환자로 인한 손실을 벌충할 있었다.
      • 많은 부속병원에서 심각한 급성 질환이 없는, 그리고 교육적으로 효용이 없는 무보험환자들은 municipal or veteran hospital 전원되었다.
    • 1980년대에 AHC 이상 charitable institution 아니었다. 대부분은 그렇게 많은 무료 진료를 하면서도 이익을 남기고 있었고, 예산을 달러였다.
      • 그러나 자기의 이익과 탐욕만 추구하는 시대 문화에서도 AHC 의학의 정신(soul)지켜내고자 했다. 하지만 가난과 인종차별은 만만한 적수가 아니었다.
  • Competition for Patients
    • 1970년대와 1980년대의 AHC 지속적으로 엄청난 규모의 charity care 제공하였지만, 여전히 당시 대다수의 환자는 PP였다. 임상 수익이 전체 수입의 대부분이었고, 사실상 어떤 부속병원도 paying patient 대한 need 포기하지 못하였다.
    • 1970년대와 1980년대에 많은 AHC들은 이상 referral이나 specialty care 환자를 유치하는 것이 어렵게 되었다. 그러한 목적으로 자연스럽게 부속병원을 찾아오던 private patient들이 점차 줄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을 보면 Specialty medicine 발전시켜온 것이 부속병원 자신이었다는 사실은 참으로 역설적이다.
    • 여기에는 가지 원인이 있었는데, 하나는 부속병원에 항상 존재했던 교육과 patient needs 사이의 tension이었다.
      • 1960년대와 1970년대에 residency fellowship 확대되면서 '특정한 환자' 보아야 하는 필요는 높아졌는데, 환자들은 점차 "teaching material" 사용되는 것에 불만을 표했다.
    • 게다가 환자들은 consumer standard 요구하기 시작했는데, 진료의 질을 판별하는 것은 어려운 일일지 몰라도, 얼마나 주차시설이 되어있는지, 얼마나 음식이 좋은지, 얼마나 편의시설이 되어있는지 등과 같은 문제는 누구나 우열을 가릴 있는 것이었다. 예를 들어 JHMS 깨끗하지 못하고, 편안하지 못하고, 사생활이 지켜지지 않는다는 불만을 들었다.
      • 1970년대에 부속병원은 주변 환경을 정비하고 caring attitude 가지기 위한 노력을 기울이게 되었다.
    • 가장 중요한 요인은 환자가 specialized care 받기 위해서 있는 병원의 선택권이 늘어난 것이다. 기술과 3 의료가 부속병원을 중심으로 발전해왔지만, 이제는 많은 community hospital에서도 specialty service 받을 있었다.
    • 1960년대에 AHC 경쟁이 심해졌다는 것을 피부로 느낄 있었다. 1970년대와 1980년대에 이러한 경쟁은 심해졌고 많은 부속병원들에서 다른 병원으로부터 refer해오는 환자 수가 줄었다.
    • 연방 정부와 정부도 3 의료의 확장을 우려의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물론 접근성이 좋아진 면은 장점이었지만, 똑같은 장비와 시설을 여러 곳에 갖춰야 하는 점은 부담이었다.
    • 이들 regulatory agency 의학기술과 specialized care 확장을 막을 수는 없었다. 많은 community hospital 정치적인 수완을 발휘하여 regulator들의 허가를 받아냈고, 그나마도 private office 의사들에게는 이러한 규제조차 통하지 않았다.
      • (New York, Maryland, Massachusetts) 부속병원만이 다른 지역보다 occupancy 높았는데, 주에서 regulatory control 가장 강력했다는 것은 전혀 우연이 아닐 것이다.
    • 1980년대를 지나면서, 대부분의 AHC community hospital practitioner와의 경쟁에서 겨우 살아남을 있었다. 그렇지만 AHC 지위는 분명히 취약해졌고, 대중의 관점에서도 부속병원과 nonteaching hospital 별로 다른 점이 없었다. 그러나 실제로는 AHC들은 언제나처럼 국가의 가장 중요한 자산이었다. 다만 대중이나 정부, 기업들이 이를 구분하기가 어려웠을 뿐이다.
  • The New Adversarial Relationship with Government
    • MS 그들의 parent university처럼 언제가 교육 기관으로서의 권리를 지키려고 했다. 그러나 1970년대에 MS academic freedom 공격을 받았다. 연방 정부가 전례 없던 Medical school 내적 환경에 대한 간섭을 하고자 했던 것이다.
    • 무엇보다 spending power 사용한 것이 우선이었다. 1960년대에 MS 지원되는 연방 정부의 돈은 조건부(strings attached)였다. 특정 요구사항들에 대한 조건이 달려있었다.
    • 번째 공격은 Health Professions Educational Assistance Act였는데, 의사 배출을 늘이기 위한 의도가 있었다. "capitation(인두제)" grant라고 불렸고, enrollment 연계되어 지급되었다.
    • 기존의 MS에게 법안은 상당히 실망스러운 것이었다. 일부 state school 어디서 새로운 학생을 뽑아야 할지 당혹스러워했다. "대학의 academic standard 대한 위협이다."
    • 반대로, 제한 없이 사용할 있는(unrestricted fashion) 돈의 유혹은 엄청났기 때문에, 제안을 거절할 있는 학교는 많지 않았다.
    • 1970년대에 capitation grant 특정 교육적 방침을 위해서 사용하고자 하는 Congress 의지가 분명해졌다. 새로 도입된 health manpower bill 따라 추가적인 조건이 붙어서, 의사의 지역과 전공과의 분포에까지 영향을 미치려고 했다.
    • 1970년대에 state legislature MS 대해 그들 나름의 제약을 두려고 했는데, 의학교육자들이 특히 짜증났던 것은 교육과정에 대한 개입 시도였다. 예를 들어 California에서는 human sexuality 가르쳐야 한다는 법안이 통과되었다.
    • 중에서도 Congress 입법 행위(legislative action) 가장 불쾌했는데, 1976년의 Health Professions Educational Assistance Act 연방 정부의 지원을 받는 조건으로 정부가 설정한 해외에서 의학을 공부한 미국인에 대한 quota 받아야 한다.
    • 문제는 해외에서 공부하는 미국 시민들이 늘어남으로써 생긴 것이다.
    • 역사적으로 외국의 학교에서 의학을 공부하는 미국인들은 주로 서유럽의 학교를 다녔다. 그러나 미국에서 유학가는 학생이 늘어나면서 이들 학교가 overcrowd 되었고, 소위 멕시코나 캐리비안의 "offshore" medical school 다니는 학생들이 생겨났다.
    • 이들 학교의 여건은 매우 열악했다. 입학 기준은 미국의 그것에 한참 미쳤고, 교실 규모도 제한이 없었으며, 일부 학교는 그냥 그대로 사기꾼 집단이었다. 여러 학교에서 학생들을 착취했다.
    • 1970년대 초반에, 이들 학생들의 곤경은 대중의 동정(support) 받았고, 국가로서는 의사 수가 부족하여 심지어 일부 병원에서는 house officer로는 "가운을 입은 백인이면 '어떤' 의사라도 좋다"라고 정도로 심각했다.
      • 이들 학생의 가족들은 "유능한 학생들이 겪어야 했던 가슴 아픈 이야기" 홍보하며 동정심을 사려고 했는데, 의과대학들은 정말 내키지 않았음에도 정치적인 압력 때문에 학생들을 받을 밖에 없었다.
    • "Fifth Pathway"라고 불리는 하나의 route 1971 생겨났는데, 프로그램에서 학생들은 외국에서 full curriculum 마쳤을 경우, Fifth Pathway라는 프로그램 속한 학교의 일년짜리 임상 프로그램에 지원한 , 이것을 마친 다음 면허 시험을 있었다.
      • 1970년에 AAMC 의해 만들어진 Coordinated Transfer Application System(COTRANS)라는 유명한 route 있었다. "Guadalajara school" 좋아했기 때문에 Guadalajara clause라고도 불렸다.
    • MS들은 자신들의 입학 기준을 적용하지 못하게 하는 Guadalajara clause 혐오했고, personal factor 계속 포함시키려고 했지만 법적으로 허용되지 않았다. 어떤 교육자는 극단적인 사례를 들며 범죄를 저지른 학생은 자동으로 탈락되게 하자고 했지만 이마저도 1976 입법된 HPEAA 인해서 무산되었다.
      • COTRANS 학생들은 GPA 낮고 MCAT 점수도 낮았다.
      • 전반적으로 offshore학교에서 학생들의 수행 능력은 상당히 저조했다.
    • 1976년의 이러한 법안 도입은 일부 MS들이 반란을 일으킨 계기가 되었는데 18 학교들은 차라리 연방 정부의 지원을 박탈당하겠다고 선언했다.
    • 교육에 대한 간섭만큼이나 Biomedical 연구에 대한 간섭도 만만치 않은 불만을 야기했는데, 특정 질병에 "targeted" 프로그램을 도입하게 했고, 1971년의 National Cancer Act ("war against canter") 대표적이었다.
      • 국가의 biomedical 연구 정책은 점차 basic applied research 사이의 균형을 무너뜨리는 방향으로 바뀌고 있었다.
    • 1970년대부터 1980년대, 1990년대까지 의과대학들을 짜증나게 것에는 조건부의 연구비 뿐만 아니라 각종 규제들도 있었다.
      • 의과대학들은 연방 정부의 student aid, 직원의 고용과 해고, 차별 철폐 조례, 나이와 성별에 따른 차별 금지 등등의 많은 regulation 받았다.
      • 이러한 규제를 만족시키기 위해서는 새로운 층위(layer) 행정조직이 필요했고, academic mission 아닌 다른 방향으로의 에너지 소모가 컸다.
    • 추가적으로 대부분의 동물 연구와 인간 연구가 이뤄지는 공간이었기 때문에 주어지는 제약도 많았다. 1966 NIH 새로운 규정에 따라 의과대학들은 모든 연구비 지원서를 검토하는 review board 설치해야 했다.
      • Animal right movement
      • 가난한 사람을 매장(burial)하라는 새로운 때문에 해부 실습에 사용할 cadaver 얻기가 힘들어졌다.
    • AHC 대학에 대한 규정과 규제 뿐만 아니라 병원 시스템에 대한 것들 때문에도 힘들었는데, 1970년대 중반, "cost containment" 시대가 시작되었다.
      • M&M 비용을 줄이기 위해서 연방 정부와 정부는 수많은 규제들을 도입했다.
      • 그러나 모든 규제들이 US health care system 들어가는 행정적 비용은 증가시키면서도, 어떠한 규제도 급격히 상승하는 medical cost 억제하지는 못했다.
    • 시기에, M&M 병원에 reimburse하는 서비스 가지수는 줄어들었다. Third party payer들도 엄격해졌고, 무엇보다 reimbursement 받기 위해서 해야 paperwork 많았다. 많은 주치의들은 환자를 보는 것보다 각종 기록을 정리하는 것에 써야 하는 시간이 많아졌다.
    • 연방 정부 뿐만 아니라 주와 local authority 들의 규제도 까다로웠다. New York regulatory review 가장 심했는데, 거의 병원 활동의 모든 측면에 대한 규정이 있었다. 일반적으로 state 의해서 허용되는 reimburse rate 상승분은 늘어난 규제에 따른 비용을 감당하기에도 부족했다.
    • 최근의 분석을 보면 AHC learning environment capitation pressure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강력한 것으로 드러났다. 그렇지만 가장 문제는 변하는 사회적 이슈에 따라서 재빠르게 방향 전환을 하기가 어려웠음에도 불구하고 재정적 지원에 다양한 사회적 요구사항들이 따라붙었다는 것이다.
    • 하지만 의학교육자들이 괴로웠던 만큼, 정치인들도 그랬다. 그들이 보기에 AHC 국가적 요구를 도무지 받아들이지 않는 했다.
      • "그들이 원하는 것은 가지다. 첫째, 돈을 내놔라. 둘째, 건들지 마라"
    • AHC 기본적으로 사회가 필요로 하는 것을 제공하긴 했지만, 의료전달체계가 성장하기 시작하면서  academic medicine 국가 보건과의 관계가 흐릿해졌다. 국가 건강 문제의 해결책이었던 AHC 이제는 문제의 일부가 되어 버렸다.
  • The Dawn of the Age of Limits
    • 20세기의 시작과 더불어서, 보건 정책의 가장 중요한 기본 가정은 국가의 건강은 의사의 양과 질에 달려있다는 것이었다. 의학이나 과학의 한계나 약점에 대한 평가는 거의 이뤄지지 않았다.
    • WWII이후, 앞서 논의된 것처럼, 일부 저명한 critic들이 의학에 대한 비현실적인 기대를 지적하고 나섰다. 하나의 질병을 통제한다 하더라도, 다른 질병이 자리를 차지할 것이다.
      • 그러나 이러한 지적은 별로 인정받지 못했다.
    • 1970년대에, 위의 기본 가정이 공격을 받기 시작했다. 'Medical care 대중의 건강에 영향을 주는 일부일 뿐이다' 라는 생각이 새로운 것은 아니었지만, 아이디어에 대한 인식이 이전보다 널리 퍼졌고 정책에도 반영되기 시작했다. "Great Equation 틀렸다"
      • "아무도 의학이 쓸모 없다고 말하지는 않지만, 의학이 모든 것에 쓸모가 있다고 말하지도 않는다"
    • 1970년대와 1980년대에 의학에 대한 기대를 낮추는 데에 기여한 가지 요인들이 있다. 하나는 급격하게 상승하기 시작한 비용이다. 1970년대 후반에는 심지어 health care 비용이 철강 산업의 비용(cost of the steel)보다 크다는 말까지 나왔다.
    • 추가적으로 시기에는 의사들의 moral authority까지 떨어졌다. 의사와 병원과 요양소(nursing home) 부당한 청구를 하고 있다는 뉴스들이 보도되기 시작했다.
      • 의사가 "환자에게 최선인 " 위한다는 것에 의문을 가지기 시작했고, "right-to-die" 운동과 "patient bill of rights" 메니페스토, 새로운 윤리 지침으로 이어졌다.
    • 다른 중요한 요소는 만성 질병의 incidence 높아지면서 기대가 낮아진 것이다.
      • 암이나 심장마비, 뇌졸중 . 성인 시기의 건강은 정기적인 검진보다 스스로의 건강을 지키기 위한 노력이 중요하다라는 인식이 퍼졌다.
    • 의학의 한계를 인지하면서 국가 역시 스스로의 한계를 인지하기 시작했다. 1950년대와 1960년대의 사기충천한 모습과 낙관적인 모습은 점차 낮아진 기대치와 미래에 대한 신중한 전망으로 대체되어갔다. 또한 모든 사람을 위해서 모든 것을 수도 없는 일이었다.
      • 독성 폐기물과 오존층 파괴 등으로 인해 과학의 이미지는 점차 변색되어갔다.
      • 반면 워터게이트 사건, 베트남 전쟁을 통해서 정치 시스템의 문제해결 능력에 대한 자신감은 커졌다.
    • 국가가 스스로의 한계를 인식하면서 medical care 투자하는 비용의 한계에 대한 의견이 나왔다. 의사 공급 과잉의 문제가 공식적으로 제기되었고, 의과대학에 대한 capitation payment 모두 종료시켰다.
    • 충격은 biomedical research 대한 투자가 감소한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 비용이 감소했다기보다는 비용의 증가추세가 감소한 것이었다. 1990년대 초반 연방 예산의 급격한 부족으로 인해서 NIH 책정액이 실제로 떨어지긴 했다.
    • NIH 예산이 낮은 수준으로 유지되면서, 많은 의학교육자들은 정부의 이러한 바뀐 자세에 우려를 표하고 걱정하였다.
      • 이미 같은 정부가 지출하는 "soft" money 대한 과도한 의존을 지적하던 일부에게는 그다지 놀라운 사건은 아니었지만, 어쨌거나 대부분 의과대학이 순진하게 믿고 있었던 자율권이란 것이 그저 환상에 불과했다는 것이 명백해졌다.
    • 실제를 들여다보면, 연방 정부가 NIH지원을 멈추었다고 보는 것은 옳지 않다. Table 10에서 있는 것처럼 의과대학은 지속적으로 번영(prosper)중이었고, full-time faculty 숫자가 늘어나면서 경쟁이 심화된 뿐이었다. 연방정부의 입장에서 돈을 준다는 것은 그냥 심술을 부리는 것으로 보였다. 그렇지만 의과대학과 개별 연구자들의 입장에서는 연구비를 받는 것이 어려워졌기 때문에, the crisis was very real.
    • 언제나처럼 기업가정신이 충만했던 의과대학들은 1970년대 이후로 NIH외의 지원을 찾아 나서기 시작했다. 중에서도 제약 산업이 상당히 강력하게 성장하는 중이었다.
    • NIH 지원도 늘고, 다른 연구 지원도 늘었지만, 'age of limits'였던 당시 미국 사회는 전만큼 biomedical 연구에 관대하지 않았다.
      • 1960년에 health care비용의 6% 차지하던 연구비는 1990 3% 감소했다. 지원자 중에서 50% 연구비를 받던 것이, 12.3% 떨어졌다.
    • 1990년대에 이르러서 미국 biomedical 연구가 자랑하던 리더십이 불길한 징조를 보인다. 예를 들어 1985 NEJM submit 되는 scientific report 비율이 72%에서 50% 감소했다. 또한 서유럽이나 일본에 비해 뛰어났던 미국 paper들이 점차 감소하였다.
    • Ironical 하게 의학이 많은 것을 있었던 시기에, biomedical 연구의 지원이 줄어들었다. Age of limits 의학은 그것이 이뤄낸 만큼의 대접을 받지 못했다.
    • 심지어 ironic했던 것은 혈관질환, , 신경질환, 관절염 등등의 많은 만성질환에 대해서 시기의 biomedical 연구는 어느 때보다도 진정한 의미의 진전을 이뤄냈다는 것이다.
      • t-PA, insulin, cimetidine, CT scan..
    • Biomedical 연구의 가장 저명한 대변인격인 Lewis Thomas "진정한 기술(true technology), 치료 뿐만 아니라 상당한 비용 절감 효과까지 가진다" 라고 했다.
    • 수년에 걸친 NIH 예산에 대한 격렬한 토론과 로비에도 불구하고, 진짜 필요한 질문에 대한 논의는 별로 없었다.
      • NIH 지원의 적정한 수준은 어느 정도인가?
      • NIH budget 규모를 결정하는 것의 지표는 무엇이 되어야 것인가?
      • 연방 지원과 비연방 지원의 적절한 비율은?
    • 추가적으로 1970, 1980, 1990년대의 법적 규제들은 science policy에서 그랬던 것처럼 health policy 대해서도 합리적인 결과를 내놓지 못했다. M&M 도입과 더불어 연방정부의 관심은 연구나 교육보다는 확실히 진료쪽으로 쏠려 있었다. 진료전달체계를 만성질환에 맞춰나가려는 노력은 거의 이뤄지지 않았다.
    • 조금 다른 방식으로 말하자면 age of limits 의학 연구가 가진 능력에 대해서 비관적이었고, 비용의 상승은 우려하면서도 장기적 비전이나 리더십은 없었다.
      • Good health 많은 결정요인들은 이미 알려져 있었지만, 공공과 개인의 리더십은 그러한 목표를 이루고자 하는 의지가 없어 보였다




  • Chapter 13. Medical Education in an Era of Protest and Civil Rights
    • 의학교육자들이 믿은 하나의 환상이 있다면 그것은 '자율' 대한 환상이었다. 이러한 환상은 AMC , 규모, , 영향력이 커지면서 생겨났다. 하지만 1960년대와 1970년대 미국은 social unrest, antiwar, civil right movements 흔들리고 있었고, 이러한 움직임은 MS에도 영향을 줘서 Student rebellions, house staff unionization, clamor of women and minorities 등이 있었다. '자율' 대한 신화는 거짓이라는 것이 드러났다.
    • 서로 달라 보이는 이들 움직임은 미국 의학교육의 근본적인 특징을 나타내주고 있었다. 시대의 'protest era' 그것의 결과 자체보다 미국 의학교육의 감춰져있던 면들 드러내는 점에서 의의가 있었다.

 

  • Student Activism
    • 미국의학교육 역사 내내 학생은 교육 환경에 영향을 줬다. 그러나 MS라는 자체가 상당한 '점잖음' 공간이었기에 대학의 나머지 다른 학과 만큼은 아니었다.
    • 1960년대에 civil rights movement Vietnam War(VW) 영향에 힘입어 대학과 학생의 불화의 시기(era of student discord) 시작되었다.
      • Free Speech Movement, Students for a Democratic Society(SDS), Martin Luther King Jr.
    • 저항의 수준에 비해서 실제로 급진적인 학생은 소수에 불과했다. 그러나 많은 학생들이 공감하고 청원서에 서명을 했으며 집회에 참여했다. 반체제 문화는 사회적이라기보다는 정치적 활동을 촉진시킨 정치적인 현상이었다.
    • 대학 캠퍼스의 저항이 격렬할 동안 MS에서도 비슷한 학생운동이 일었다. 비록 일반적으로 조금 질서있는(orderly) 형태였지만 MS 제법 충격을 받았다.
    • MS에서의 학생운동은 대학 캠퍼스에서 있었던 것처럼 가지 movement 아니었기에 간단히 정의하기가 쉽지 않았다. Student organization 1960년대의 일반적인 사회적 turbulence 따르는 것이었다.
    • 의대 학생들의 activism 가지 형태 나타났는데, (1)하나는 political protest였다. 여기에는 environment, feminism, homosexual rights 등의 이슈가 있었다.
    • (2) 번째는 MS 지역사회의 건강문제에 반응하게끔 하려는, 특히 가난한 사람의 문제에 관심을 갖게끔 하려는 운동이었다.
    • 많은 경우에 지역사회 건강에 대한 문제는 학생들을 가난하거나 사회적 약자들의 health affair 관심을 갖게 했는데, 여기에 앞장선 조직이 Student Health Organization (SHO)였다.
    • (3) 번째 student activism 교육개혁에 관한 이었다. 학생들은 그들에게 영향을 있는 사실상의 모든 이슈에 대해서 의견을 냈다.
    • 때까지도 학생들은 항상 MS affair 영향을 미쳐왔다. 하지만 이번에 달랐던 것은 그들의 공격적인, 조급한, 그리고 종종 faculty에게까지 대항하는 태도였다. 학생들은 보수적이고 전통을 중시하는 faculty에게 겉으로 무언가를 보여주고자 했고, 일부 faculty 실제로 학생들의 이러한 거친 언사 등에 의해서 충격을 받았다.
    • 또한 protest era 나타난 특징은 학생들이 학교의 공식적 의사결정기구에 참여하게 것이다. 학생들에게 종종 faculty committee에서 표를 던질 있는 기회가 주어졌다.
    • 이런 저항의 학생들의 움직임에 공감을 표하는 사람들도 있었는데, VW 같이 학생들을 움직이게 했던 힘은 house officer faculty에게도 영향을 주었다.
    • 그러나 이러한 shared goal 학생과 faculty 사이의 세대차이를 좁히지는 못했다. 많은 faculty 학생들의 노골적인 표현을 싫어했고, 사이의 갈등은 전례 없던 수준으로 높아졌다.
    • 하지만 이러한 동안에도 의대 학생들이 다른 college university 학생만큼 버릇없거나 파괴적이지는 않았다. 의과대학에서 revolutionist들은 소수였다.
    • 1970 이후, 가장 강력한 학생 저항운동은 사그라졌고, 전쟁이 끝날 무렵 MS 다시 예전의 조용한 공간으로 돌아갔다.
    • 1970년대 Protest era 끝났지만, 그것이 미친 영향까지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학생들의 목소리는 여전히 남아있었고, 도전적이었고, 전에 비해서 권위에 대한 의문을 던졌다. 대부분의 MS에서 학생들은 그들이 이뤄낸 성과를 유지했고, 국가적으로는 Student American Medical Association(SAMA) - 훗날 American Medical Student Association(AMSA) 이름 변경 - 생겨났다.
    • 그렇지만 protest era 끝나고 health care delivery system 문제는 많이 약해졌다. 학생 뿐만 아니라 faculty 걱정을 하였고, 의과대학의 전통적인 보수주의는 견고해보였다.

 

  • House Staff Militancy
    • 학생의 목소리가 높아진 만큼 HO 목소리 또한 그러했다. 이상 부속병원들은 House staff 불만을 묵살하고 있을 만은 없게 되었다. HO 의견을 반영하지 않는 병원은 다음 해의 recruitment에서 경쟁률이 떨어지곤 했다.
    • 그러나 HO 목소리는 Protest era 이르러서야 처음으로 두드러졌고, 레토릭이 급진적이었으며, 방법도 직접적으로 대립하는 식이었다.
    • House staff militancy (HSM) 학생들의 것과는 조금 양상이 달랐는데 학생들의 activism 1960년대 피크를 찍었으나 HSM 1970년대에 그러했다.
    • HO 보수와 근무여건 대해서 말이 많았다. 그들은 언제나 애매한 위치에 있으면서 1960년대와 1970년대에 대형 부속병원들은 많은 인력을 고용하지 않고 아끼는 수단으로 HO 이용했다. 게다가 많은 HO들은 병원 행정직원들을 신뢰하지 않았다.
    • 보수와 근무시간에 대한 문제는 1960년대 후반 주목을 받았다. 사회적 변화를 반영하여 가족, 결혼과 같은 "personal time" 점차 중요한 권리로 인식되었다.
    • 1960년대에 월급을 올려달라는 요구는 대개 informal하게 이뤄졌다. 그러나 시기에 unionization 걸음을 떼었는데, Committee of Interns and Residents(CIR) 선구자적 움직임이었다. CIR 뉴욕의 18 municipal hospital에서 근무하는 1200명의 인턴과 레지던트를 대변하여 7개의 nonprivate hospital과도 계약 조건을 협상하였다.
    • 이제는 HO 많은 activist들로 인해서 1970년대 초반은 여전히 격정적이었고 unionization 확대되어갔다. 1972년에 이르러서 house staff association GME 하는 학교 70% 포함하였다.
      • 각각의 HSA 조금씩 달라서 어떤 Association 종종 병원이 경제적 어려움을 호소할 때면 그냥 잠잠하게 넘어가곤 했다.
    • HSA 다양한 목적을 가지고 있었다. Training social concern 대한 다양한 문제를 제기했다.
    • 비록 많은 HSA들이 health care 사회적 문제를 주장했지만, 결국에는 고용과 봉급의 문제를 가장 우선시하게 되었고 다른 것은 minor 부분이 되었다.
      • "House staff unity 원동력은 사회에 대한 것도 의료전달체계에 대한 것도 아니고 자신들의 이익일 뿐이다. "
      • House staff association 회장은 "대부분의 HO들은 벼락부자라서 병원 여건에 대해서는 별로 신경쓰지 않는다"라고 쓴소리를 했다.
    • House staff union 운동의 기저에는 "Were house officer students or employees?"라는 근본적 질문이 있었다.
    • HSM 1974 여름 보건계열 근로자들의 집단적 협상을 위한 조직 구성을 가능하게 National Labor Relations Act 따라서 새로운 국면을 맞게 되었다. 뉴욕에서 파업을 했던 CIR 이제 전국 단위의 파업을 하게 되었다.
    • CIR 파업기간동안 엄청난 세대차이가 드러났다. CIR 주당 80시간의 근로시간 제한을 요구했다. 그러나 hospital official들은 "내가 너희 때는 말이야…."라며 불만을 드러냈다.
    • 많은 교육자들은 House staff union training system 종말을 가져오지는 않을까 걱정했지만, 실제로는 근무 여건을 조금 인간적으로 만들면서 환자 안전은 충분히 보장할 있는 여유 공간이 있었다. CIR 결과로 많이 공부를 하고 생각하고 있는 시간을 확보할 있었다.
    • 그러나 여전히 house staff 요구에 대한 못마땅한 시선이 있었는데, 이유는 많은 HO들은 여유시간을 쉬거나 공부하는데 쓰지 않고 야간 아르바이트를 하러 나갔기 때문이다.
    • 걷잡을 없는 수준의 야간 아르바이트가 퍼져나갔다. 그리고 HO들은 호화로운 생활을 즐길 있었다.
    • '의학의 소명' 위협하고 있는 것은 house staff union 자체가 아니라, 아래에 깔린 affluence, consumption, self-indulgence 추구하는 문화였다.
      • House staff organizing 역사에 대한 많은 연구가 필요하지만, 매번 이러한 연구가 이뤄질 때마다 항상 시대의 문화적 영향이 빠지지 않는다.
    • 궁극적으로 HSM 잦아들었고 1976 National Labor Relations Board 인턴, 레지던트, 펠로우는 직원이기보다는 학생이며, 그들의 청원을 받아들여 집단적으로 협상에 나설 있다는 것을 인정했다. 많은 상고(appeal) 있었지만, 1980 United States Supreme Court 이상의 review 거부할 때까지 논의는 지속되었다. 대부분의 House Staff Association 사라지거나 활동이 없어졌다.
    • Academic Health Center Official들은 집단적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GME 존재 이유는 교육이지 service 아니라는 것을 법적으로 인정받았다. HO역시 그들의 employee로서의 지위는 잃었지만, 그들의 primary object higher salaries 적은 당직을 보장받는 것에 만족했다.
    • 그럼에도 education service사이의 근본적인 모호성이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았고, 의학교육은 교육이자 서비스였고 둘의 균형이 유지되어야 했다.

 

  • Minorities
    • WWII이후 의학은 점차 많은 사람들에게 개방되었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접근권한을 갖게 것은 아닌데 특히 AA 비롯한 다른 소수인종들이 그러했다.
      • 시기의 인종차별은 MS에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 1960년대 civil rights movement 빠르게 모멘텀을 확보해가면서 인종차별에 대한 저항도 Martin Luther King 의해서 강력해졌다.
    • 1960년대 후반, 차별 철폐 조례(affirmative action) 새로운 프로그램들이 MS 휩쓸었다. 이것은 medical faculty들의 전향을 의미함과 동시에 대중의 비난(public criticism) 받지 않겠다는 의지를 보여준 것이기도 했다. MS들은 community relationship 위해서라도 소수자들의 지원에 더욱 민감하게 반응했다.
    • 입학은 차별 철폐 조례가 영향을 많은 영역들 하나에 불과했다. MS들은 소수자 학생들에게 많은 지원을 해주었다 : dean of minority affairs, student support group, tutoring and counseling…
    • 소수자 학생들을 모집하기 위한 MS들간의 경쟁은 치열해서 학교들마다 온갖 수단을 동원했다. 광고를 하고 college campus를 방문하고 follow up letter를 보내고 등등…
      • 가장 근본적인 문제는 질적으로 충분한 minority 학생의 수가 충분치 않았다는 것이다. 좋은 학교들이 학생들을 데려갔기에 낮은 학교들에서 특히 불만이 심했고, "black brain drain"이라는 말도 생겨났다.
    • 소수자 학생들을 모집하기 위한 경쟁에서 대부분의 학교는 입학요건을 낮추었다.
    • 반면, 어떤 학교도 졸업 요건을 낮추진 않았는데, 차별 철폐 조례가 도입되고 나서도 학교들은 유능한 의사를 양성해야 한다는 사회적 책무를 소홀히 하지 않았다. 당연히 학교들도 일부 학생들에게는 추가적인 도움이 필요하다는 것을 인식하였다.
    • MD degree 따기 위한 기준을 높게 잡음으로써 MS들은 위치가 아주 애매해졌는데, 문제는 "disadvantaged background 가진 학생들을 위해서 얼마나 많은 remedial course 주는 것이 적절한가?" 였다.
      • 전만 해도 학교들은 훨씬 심해서, 거의 모든 곳에서 faculty 학생에게 remediation 해주기 위해 추가적으로 시간을 투자했다. 그러나 구체적으로 어느 정도의 도움을 줘야 하는지, 얼마나 시간을 추가로 투자해야 하는지에 대해 정확히 아는 학교는 거의 없었다.
    • Minority 학생들이 추가적인 도움을 필요로 했지만, 노력은 어느 정도 보상을 받는 했다. 전반적으로 그들은 백인 학생들에 비해서 기초과학 분야에서는 조금 떨어지는 했다. 하지만 clinical year 갈수록 차이는 거의 존재하지 않았다.
    • 차별 철폐 조례가 많은 초기의 성공을 가져왔지만, 문제도 있었다. Minority 학생을 돕는 과정에서 disadvantaged white student들을 망각하기 일쑤였다.
      • "color-blindness가 color-consciousness 되어버리고 있다"
    • 가장 역설적이었던 것은, 의과대학을 다니는 minority 학생이 증가했음에도 minority medical school 사라져 버린 것이다. 75%가까운 AA학생이 다녔던 학교는 1979 흑인 학생 비율이 20% 떨어졌다. 상황을 나쁘게 만든 것은 black teaching hospital 쇠퇴하는 것이었는데, 이들 병원은 적절한 지원을 받지 못한데다 AA physician들이 기회가 닿는 university teaching hospital에서 수련을 받고자 했기 때문이다.
    • Minority recruitment 번째 phase 1974년까지 이어졌다. 1960년대 후반과 1970년대 초반에 minority student 수가 급격하게 늘어났다.
    • 그러나 1974 이후, 정체기가 시작된다.
    • 1970년대와 1980년대 Minority enrollment 감소에는 가지 요인 있다. 등록금은 크게 올랐지만 Scholarship fund 줄었다. 차별 철폐 조례가 크게 패소하는 사건이 있었는데, US Supreme Court 단순히 인종만을 근거로 quota 인정할 없다고 판결했다.
    • 가장 중요한 것은, 어느 정도 이상의 수준을 갖춘 minority 지원자 자체가 그다지 빠르게 늘지 않았다는 이다.
    • 이와 같은 추세에 대한 우려로 AAMC 1990 새로운 "Project 3000 by 2000"이라는 initiative 도입하게 되는데, 목표는 2000년까지 3000명의 minority 학생을 모집하겠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전략은 초등-.고등-College 이르는 긴밀한 협조를 필요로 했다. initiative에서 주목해야 점은, MS 하여금 local school college 교육 질에 직접적으로 관여하도록 했다는 것이다. 1990년대 초반, minority 학생의 비율은 다시 오르기 시작했다.
    • 1960년대에 도입될 때부터 차별 철폐 조례는 분명한 목표가 있었다. 많은 Minority student들이 의과대학에 들어갈 있게 하겠다.
      • 하지만 그들 입장에서는 현직 의사 role model 삼을 만한 의사가 거의 없었고, 심각했던 것은 조직 차원의 인종차별이 심해서 일부 학생과 faculty minority 학생들이 유급하기를 바랐고, 백인 환자들은 minority에게 진료받는 것을 거부했다.
    • 추가로, 차별 철폐 조례의 최종 목표는 minority들을 의과대학이 아닌 "의료계" 들어오게 하는 것이었는데 조례가 도입되고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도 minority physician 매우 일부여서 faculty 2.4%만이 흑인이었다.

 

  • Women
    • 소수 인종과 마찬가지로 여성들도 의학을 업으로 삼기가 쉽지 않았다. 1960년대에는 6~7%뿐이었다. 독일은 30%, 네덜란드는 20%...
    • 여성에 대한 노골적인 차별은 인종차별보다는 덜했다. 당시 성별과 상관 없이 여성 의사에게 진료를 받는 것에 대해서 수용적이었다는 연구 결과도 있다.
    • 그러나 일반적으로 여성이 의학을 전공하는 것은 쉽지 않았다. 어린 시절부터 여자들은 힘든 직종에서 일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고 배워왔고, "여성스러워야 한다"라는 고정관념이 있었다. 특히 여자들은 '가정' '직장' 동시에 열심히 하기가 어려웠다.
    • 1960년대 후반, 여자 의과 대학생의 숫자는 증가하기 시작했는데, 주된 이유는 feminist movement였다.
    • 여자 학생의 숫자의 증가는 소수 인종 학생 숫자가 증가할 때에 비하면 trauma 크지 않았다. 여성 지원자들의 'pipeline' 남성 지원자들 만큼이나 괜찮았다.
    • 그러나 차별적인 시선이 문제였다. 완벽한 동등성(parity) 얻었다고 하기에는 사소한 하지만 심각한 비공식적인 장벽들이 있었다. 소수 인종과 마찬가지로 여자 학생을 교육시키는 것은 입학 분만 아니라 연구, 교육, 진료의 환경에서도 변화를 필요로 했다.
    • 학생 수준에서 성차별은 매우 뚜렷했는데, 입학 위원회는 빈번하게 여성에게만 결혼과 출산 계획을 매우 구체적으로 질문하였다. Counseling이나 Advising service 거의 되어있지 않았고, faculty 여학생들에게 둔감하고(insensitive) 깔보는 태도를 일삼았고, 환자들은 간호사로 오해하기도 하였다. Sexual harassment 흔했다. 여학생들은 간호사의 갱의실을 사용해야 했다.
    • 많은 문제들이 있었다는 것은 분명하지만, 구체적으로 수준을 측정하거나 정량화하는 것은 어려웠다.
      • "microinequities"
    • House staff 교육의 차원에 있어서도 성차별이 있었는데, 여자들은 남자보다 선택할 있는 범위가 좁았다. 대부분의 여자들은 내과나 소아과나 정신과나 가정의학과나 산부인과를 선택했다. 수술 파트에서는 여자들은 결단력이나 체력이나 헌신이 하다고 여겼다.
    • 마지막으로, 여성들은 academic medicine에서 성공한다는 것이 무척 어려움을 깨달았다. 임용이 되어도 거의 junior level이었고, 승진도 남자보다 느렸다.
    • Academic medicine에서 여성의 진전이 느렸다는 사실을 가지고 남자들을 비난하는 것은 옳지 못하다.
      • "has been immeasurably enriched by warn relationships with many fine men"
    • 오히려, 여성의 직업적 진보를 가로막고 있었던 것은 의과대학의 조직적인 측면이었다. 학교는 출산 휴가나 양육 휴가를 거의 주지 않아서, 여자들은 귀가 후에 ' 번째 직장'에서 일하는 것과 같은 상태였다. 그러나 진급이나 테뉴어는 주당 60~70시간 이상 근무한 사람들에게만 주어졌다. Junior women faculty들에 대한 senior mentoring 되어 있지 않았다.
    • 요약하자면 여성 faculty 진보는 얼마나 supportive 환경인가가 중요한 것이었다. "glass ceiling"이라기보다는 "sticky floor" 이었다.
    • 최근, 몇몇 MS들이 조직 수준의 딜레마를 해결하고 microinequities 해결하고자 하고 있다




  • Chapter 12. Medicare, Medicaid, and Medical Education
    • WWII이후 미국 MS 하나의 특징을 꼽자면, 열정적인 학문적 분위기 꼽을 있을 것이다.
    • 1965 M&M 도입과 함께 새로운 시대가 시작된다. 바로 MS clinical activity 확장되면서 다른 의무까지 밀쳐낸 것이다. 과정에서 대학과의 관계는 약해지고, 학문적 가치에 대한 헌신은 줄었으며, 자선의 전통도 줄었다.
    • The Escalation of Faculty Practice
      • WWII이후, private medical insurance 퍼지면서 MS들은 pt care 의무를 점차 확장시키기 시작했다.
        • 1965 이전 faculty practice academic function 비하면 적은 수준이었다.
      • 1960년대 중반에 MS 재정은 점차 빠듯해졌는데, 주된 이유는 연방 정부의 연구비를 따기가 점점 어려워졌기 때문이다. 연구비 총액이 준 것이 아니라 그 증가세가 감소한 것 뿐이었는데도 낙담하는 분위기가 팽배했다.
      • MS재정 측면에서는 M&M 도입한 것이 다행스러운 이었다. AMC 거의 모든 service 제공에 대한 돈을 받을 있었고, 새로운 수입원이 생겼다.
      • M&M 뿌리는 의학 기술의 발전, 의료에 대한 수요 증가, 연방 정부의 개입 증가, 사회적 번영, 의료를 권리로서 인식하는 분위기 등등에 있다.
      • M&M 혜택은 즉각적이면서도 널리 퍼졌는데, 수백만명의 미국인들이 private health care 혜택을 받게 되면서 전보다 훨씬 많은 의료 서비스를 이용할 있게 되었다.
        • Medicare 의사들에게 노다지 같은 것이었는데, private insurer Medicare 결정을 따랐기 때문에 M&M 동시에 도입되긴 하였어도 AMC 영향을 것은 Medicare였다.
      • Medicare 통과 이후 faculty 그들의 clinical work 늘렸다. Faculty 보는 많은 환자들이 교육 목적으로 활용되곤 했지만 faculty 진료에서 학생이나 House staff교육과 관계된 시간은 점점 감소하였다.
      • Faculty practice 대한 행정적 vehicle“faculty practice plans”라고 불리는 이었는데, 이는 MS full-time voluntary faculty organized group practice였다.
      • 교수들마다 특정 institution 필요에 맞춰서 plan 구성했기 때문에 어떤 두 faculty practice plan도 동일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제공하는 서비스가 무엇이든 간에 full-time faculty에게는 practice plan 요구되었고, 모든 practice plan 모든 clinical income 커버하였다.
      • M&M 도입되는 이듬해부터 faculty practice 성장은 놀라울 정도였다. 1980~1981년에 이르러서 진료수입(practice income) MS 수입중 가장 부분을 차지하는 것이 되었다.
      • Full-time faculty에게 faculty practice 증가는, (1)MS들이 여기서 얻은 수익을 '보상'으로 사용했기에, 소위 노다지 같은 것이었다.
        • 급격하게 오르기 시작한 faculty salary 가장 뛰어난 학교들 사이에서도 예외는 아니었다.
      • (2)다른 진료수입의 사용처는 academic activity 지원이었다. 남는 진료 수입을 scientific and professional development 사용하였다. 건물을 지었고 새로운 장비를 구입했다. 진료는 MS 핵심 사업이 것이다.
      • 부속병원은 새로운 '번영의 시대' 들어섰다. M&M 청구했고, GME 쓰이는 직접적인 비용과 house staff 유지하는데 필요한 간접적인 비용을 받았다. 1970년에 이르러서 부속병원은 수천만 달러를 운용하는 기관이 되었다.
      • 진료 수입을 사용하는 것에 대해 많은 문제가 있었는데, 얼마의 돈이 faculty salary 쓰일지, 얼마의 돈이 연구비로 쓰일지 등을 정해야 했다. 많은 기초과학자들은 clinical faculty 자신의 salary 차이가 나는 데에 대해서 기분나빠했다.
      • 진료 수입의 증가로 인해 MS에게도 많은 변화가 요구되었는데, 워낙 돈을 다뤄야 하다 보니 나은 행정적 수단들이 필요했다. 또한 국가적으로 faculty practice plan 관리하는 자체가 하나의 까다로운 관리직이었다.
      • 여기에 추가로 M&M AMC들이 기존에 유지하고 있던 자선 목적(charitable mission) 상실 가져왔다. Charity 대한 요구는 65세는 넘지 않았으면서(Medicare 안되면서) 돈이 그렇게 적지는 않지만(Medicaid 안되지만) 민간 의료보험에 가입할 여력도 되는 사람들이 수백만이었다. 역사적으로 AMC 상당한 무료 진료를 제공해왔지만 이제는 service 판매자가 되었다.
      • Medicare 발전에 따라서 medical faculty 전보다 자신들의 임무가 많아졌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 Own nursing home facilities 짓고, department of community medicine 만들고, prevention health promotion 앞장섰다.
      • Faculty 진료가 늘어나면서 1960년대의 재정적 우려는 사라졌고, 엄청난 진료 수입 덕분에 research funding 갑작스런 변화에도 흔들리지 않을 있었다.
        • 어떤 사람은 "서비스에 대한 지불 권한은 서비스에 대한 통제 권한과 같다"라며 우려했지만, 당시에는 이러한 관점에 크게 신경쓰지 않았고, MS들은 그저 엄청난 수입을 즐기고 있었다. 그러나 언제까지 이런 시스템이 그들에게 웃어줄지는 모르는 일이었다.

 

  • Toward a One-Class System of Care
    • 대부분의 서양 국가와 같이 미국에서도 health care system 개의 층위(class) 있었다. 하나는 사적 영역(Private health care)이고, 하나는 "clinic" mode라고 불리는 charity medical service 였다.
    • 그러나 WWII이후 시민권 증진 운동의 일부로서,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자세가 근본적으로 달라졌다. 그들은 two-class system 대한 의문을 제기하기 시작햇다.
    • 이러한 맥락에서 M&M health care 대한 재정 공급 역할 뿐만 아니라 social revolution 정점 같은 것이었다. 분리된 시스템은 불평등을 뜻했다.
    • M&M 통과는 Academic health center 하여금 모든 환자에게 예의를 갖추고 그들의 존엄성을 존중하는 방향으로 변하게 하였다.
    • 교육적 측면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Medicare pt private pt 동등한 대접을 받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는 , senior physician까지 이들 환자를 담당해야 함을 의미하기도 했다.
    • 의학교육자들은 딜레마에 빠졌다. Medicare 공급하는 fee 좋았지만, Medicare 환자를 Private patient 전환하는 과정에서 ward service 손상될 것을 우려하게 되었다.
    • 변화하는 환경에 따른 Ward service 대한 위협 새로운 일은 아니었다. WP 숫자는 1940년대부터 줄고 있었다.
    • 결국 private medical care 받는 사람도 수혜자가 되면서, graduate training system역시 손상되지 않게 하는 식으로 M&M 당국과 협의하였다. 이렇게 있었던 것은 HO 하여금, 기록상으로는 'private physician' 주치의에 상당하는 수준으로 pt management 대한 책임을 가질 있게 했기 때문이다.
      • 일부 병원에서는 주치의가 R progress note countersign 해야 했다.
    • 이러한 방법은 학부 교육과 house staff training 손해가 없는 것이었기에 의학교육자들은 시스템에 대해 만족할 있었다. 특히 private physician 없는 M&M환자들은 house officer 이전에 ward patient 봤던 것처럼 담당할 있었다. 사실상 가장 변화는 주치의가 병원 chart 그들이 같이 했다는 기록을 남기게 뿐이었다.
    • 의학교육이 상대적으로 상처받지 않았다는 것은 진정한 의미의 one-class system 도입되지는 못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 One-class system 향한 움직임은 의학교육에 있어서 근본적인 윤리적 딜레마를 야기했다. House officer 위해서는 환자에 대한 책임을 쥐어주는 것이 옳겠으나, 개개인들은 가장 훈련받은 의사에게 진료를 받고 싶어하는 것이 당연했다. 여태까지는 '가난한 사람을 진료비 대신 교육에 활용한다'라는 간단한 규칙 있었다. 그러나 이는 평등주의를 실현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가난한 사람들을 이용한 계약에 불과했다.
    • 어떻게 의학을 효과적으로 가르칠 것인가에 대한 문제는 의학교육자들 사이에서 지속되었고 다양한 시도가 이뤄졌다. 어떤 사람들은 Private patient 교육에 활용되는 것을 '특권', '기회' 여겨야 한다고 했고, 어떤 사람들은 PP에게는 윤리적 의무가 있다고 했으며, 일부는 PP 설득해야 한다고 했다.

 

  • The Inversion of University Ideals
    • 20세기 2/3동안 미국 의학교육에 대한 가지 주제가 있다면 바로 MS 진정한 대학의 branch 만드는 것이었다.
      • 훈련받은 clinician 실용적인 지도를 수는 있겠지만 미래의 의학 지식은 "fertile mind scientific preparedness 지닌 사람" 손에 달려있다고 생각했다.
    • 다른 중요한 mission patient care 담당하는 것이었다. 활발한 진료가 없이는 MS들은 가르치지도 연구를 하지도 못할 것이었다.
    • 아무도 관리를 하지 않는다면 pt care faculty 들의 다른 임무에 치일 것이다. 진료는 상당한 시간과 노력을 들여야 하는 일이었다. Medical practice 어느 정도나 academic pursuit 연관이 되는가는 과마다 달라서 외과와 같은 경우는 손쉽게 연관이 되곤 했으나, 내과나 소아과 같은 경우는 clinical work academic productivity 기여하는 것이 적었다.
    • 미국 MS들에게 가장 어려운 임무 하나는 academic mission 유지하면서 동시에 pt care 부담을 줄여나가는 것이었다. WWII이후, AMC에서의 치료를 받기를 원하는 보험환자들이 늘어나면서 medical faculty 부담은 어느 때보다도 늘어나 있었다.
    • 그러나 1965 당시까지 MS들은 그들의 university duty 놓치지 않고 있었다. 이것이 가능했던 것은 많은 학교에서 voluntary staff 도움을 많이 받고 있었기 때문이다. 학교의 운영비용을 충당하기 위한 진료 수입의 압박을 받고 있지 않았다.
    • 그러나 M&M 통과는 academic function service function 균형을 바꾸어 놓았는데, Medicare 인해서 기존에 교육의 목적으로 활용되고 있던 많은 charity pt들이 이제는 private practitioner community hospital 관심을 끌기 시작했다. 이에 따라 faculty practice 높일 것이 의회에 의해 강제되었다(congressionally mandated).
    • 그러나 MS들이 이러한 새로운 의료전달체계에 적응하는 데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Pt care 양이 증가했다.
    • 학교에 따른 차이는 있었지만, Faculty private care 신경을 쓰면서, academic mission 동시에 추구하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님을 깨달았다.
    • Clinical practice 증가로 인한 변화는 JHMS에서도 확연히 관찰되었는데, 1956 presidency 했던 Milton Eisenhower 임상 진료가 학문추구를 갉아먹기 시작했다 말했다.
    • M&M 도입된 이후 MS 성장은 눈부셨다. 그러나 대부분의 성장은 학문적 영역이 아닌 임상진료에 대한 것이었고, 돈을 벌기 위해서는 full-time faculty 필요했다.
    • University ideal 제대로 추구하지 못하는 것은 faculty practice plan 통한 수입이 faculty salary 높여주는 것에 쓰였다는 것에서도 드러난다. Faculty 주된 수입원이 되었고, 그에 맞추어 private practitioner 만큼의 수입을 받는 것이 당연하다고 여겼다.
    • MS health care delivery 밀접한 관계를 맺으며 많은 전통적 관계들이 무너졌다. (1)우선 voluntary faculty 관계 악화되었다.
    • 또한 (2)scientific branch clinical branch 사이의 관계 나빠졌고, (3)MS 대학의 다른 과들과의 관계 나빠졌다. AMC 점차 스스로 유지될 있는 조직이 되었으며, 대학의 나머지 과를 모두 합한 것보다 많은 예산을 운용하게 되었다.
    • Faculty practice 증가하면서 MS 노골적으로 community doctor 경쟁하기 시작했다.
    • Faculty practice 증가로 인한 영향을 평가할 AMC 그들의 학문적 지향을 잃어버렸다고 말하는 것은 옳지 않다. Academic value 분명히 유지되었고, 승진이나 보상 정책에서 뚜렷하게 드러난다.
    • 그럼에도 MS health care delivery system에서 확고한 자리를 잡으면서 대학과의 유대관계는 약해졌다.
      • Abraham Flexner faculty 수입(earning power) 어딘가 의존하기 시작하면 academic medicine 자리는 사라진다. 라고 하였다.
      • M&M 도입되면서 patient care 주인이 되었고, 교육과 연구는 아래 복종하는 구도가 되었다




  • Chapter 11. The Forgotten Medical Student
    • 1960년대의 미국 MS들은 커지고 복잡한 조직이 되었다. WWII이전의 MS 유사한 점이 거의 없을 정도로 크게 달라졌다. 그러나 이렇든 저렇든 MS "school"이었다.
    • 학부 교육에 대한 관심에도 불구하고 1960년대에 일이 벌어졌는데, medical student 교육이 전쟁 이전 MS에서 central mission이었다면, 이제는 AMC 하는 여러가지 일들의 by-product 변해버린 것이다. 그저  지나가는 일일 뿐이었다. MS 다양한 일들을 하게 되면서 학생들은 잊혀진 존재가 되어갔다.
    • The Evolving Curriculum
      • 의대 교육과정의 가지 변하지 않는 것이 있었다면, '변해야만 하는 권한(mandate to change)' 이었다. 교육과정은 새로운 지식 뿐만 아니라 medical practice 영향을 주는 변화들(질병 패턴, 새로운 진단 치료법, 문화적 변화) 수용해야만 했다.
      • WWII이전부터 뚜렷했던 교육과정의 개편은 전쟁 이후에도 변하지 않았다.
        • 예를 들면 Harvard 1957, 1965, 1968 major curricular revision 했다.
        • 과는 언제나 많은 시간을 확보하기 위해서 경쟁했다.
        • 의학교육이 국가적 사업이 되면서 학교에서 일어난 major innovation 다른 학교에도 영향을 주었는데 예를 들면 USC "기본적으로 WR, Harvard, Albert Einstein등등 다른 학교들의 경험을 바탕으로 계획을 한다" 라고 했다.
      • 세부적으로 들어가면 완전히 동일한 교육과정은 없었다. 같은 학교 내에서도 학생들은 서로 다른 경험을 하곤 했다.
        • Elite school : scholar and specialist // State school : practitioner
      • 그렇지만 차이보다는 유사점이 컸다. 하나에서 다른 하나로 이어진 교육 개편은 결국 하나의 standard 이뤘는데, National Board of Medical Examiners (NBME) 이런 현상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이전에는 medical license 받기 위해서 졸업생은 internship 마치고 state medical board 시험을 통과해야 했다. 그리고 대부분의 주는 서로 상호 인정 협약(reciprocity agreement) 맺었다. (비록 나머지 모든 주와 협약을 맺은 주는 없었지만)
        • NBME 시험을 파트로 나눴는데 I 2학년 마치고 보는 기초의학 II 4학년 마치고 보는 임상과목, III internship 마치고 보는 시험이었다.
      • MS 사이의 가장 중요한 차이는 어떤 것을 가르치는가가 아니라 faculty 얼마나 가르치는 것에 대한 열정이 있었는가와 그들이 얼마나 유능했느냐의 차이, 그리고 학생들이 얼마나 배우고자 하는 동기가 있었느냐의 차이였다.
        • "Teachers are more important than courses"
      • Formal curriculum 진화 과정에서 가장 눈에 띄는 발전은 pathophysiology 대한 교육과정이었다.
        • 이것은 clinical scientist(기초의학자가 아니라) 가르쳤고, 이런 것은 학생들에게 기초와 임상을 같이 하는 role model 보여주었다.
      • Medical curriculum에서 가장 부족했던 학생, 교육자, official commissions들의 불만에서 있듯 좁고 기술적인 측면에 집중한 교육이었다. 예방의학이나 직업의학에는 거의 신경을 쓰지 않았다.
      • 과목들은 점차 발전했지만 교육적 측면의 문제들은 세기 전과 비슷했다. 의학교육자들은 지속적으로 '어떻게 단순 암기가 아니라 논리적 사고와 분석능력을 키워줄 있는가' 대한 고민을 하였다.
        • "Training for uncertainty"
      • 어떻게 공정한 평가를 있는가 매우 어려운 문제였다. NMBE ETS 의뢰하여 다지선다 형식의 객관식 문제를 만들었지만 평가하기에 충분하지도 않았고, 문제를 만드는 자체가 "expert and laborious task"였다.
        • 또한 과연 이것이 "학생의 어떤 능력을 평가하는 것인가" 대해서도 논란이 있었고, "NBME 시험과 실제 미래에 의사로서의 performance 어떤 관계에 있는가" 대한 consensus 없었다.
      • 위와 같은 교육적 문제들은 의학교육에서 매우 오래 것들이었지만 WWII이후에는 급박한 문제였다.
        • 정보가 폭발적으로 증가하면서 많은 지식들이 생겨났고, 이는 이미 차있는 교육과정에 구겨넣어져야 했다.
        • 어린 아이와 노인의 수가 증가했고 사회는 도시화되었다. 이러한 의학 내적 외적 변화들은 몇몇 주요한 학과과정에의 실험적 도전의 계기가 되었다.
      • 가지 시도는 대학과 의학교육을 발전된 방향으로 통합하려는 이었다. 당시 의학교육은 융통성 없이 길었는데, 독립적 임상가가 되기 전에 30세를 넘어가는 것이 보통이었다. 이러한 경향은 JH Northwestern 등의 대학으로 하여금 MD 학위를 받기까지의 기간을 줄이고자 하는 시도 이어졌다. 이른 시기에 의과대학에 입학 가능하게 하여 고등학교 졸업 이후 6년만에 마치도록 하는 시도 등이 있었고, 이렇게 키워진 의사들이 기존의 방법으로 키워진 의사들보다 딱히 열등하지 않다고 전해지곤 한다.
      • 다른 방법은 1959 Stanford에서 도입된 것인데, 의과대학을 4년에서 5년으로 늘린 이다. 이것의 목적은 university endeavor로서 의학교육을 실현하고자 하는 것이었다. 예로 Elective 늘렸다.
      • Stanford faculty 처음으로 "box 크기는 content 따라 달라져야 한다"라고 주장한 사람들이었다.
      • 번째 실험적 방법은 환자를 '전체'로서 이해하는 것을 돕고자 하는 시도였다. 전쟁 이후에 Specialization 되고 병원 재원기간이 줄면서 환자와 그들의 가족을 아는 것은 점점 어려워졌다.
        • "comprehensive medicine" : 4학년 학생의 참여를 확장시킴
        • 그러나 1960년대 후반 재정 지원이 중단되고, 학생의 흥미가 떨어지고, 회의적인 시각이 나타나면서 중단되었다.
      • 가장 중요한 실험적 시도라면 Western Reserve University School of Medicine에서 시도된 교육 프로그램의 재조직이었다.
        • 새로운 교육은 기존의 2년의 기초 + 2년의 임상을 버리고 부분으로 나눴다. 1st phase에서는 1년동안 normal 구조 기능 등을 배우고 2nd phase에서는 1년반동안 aberration 구조와 기능을 배우고 3rd phase에서는 1년반동안 clinical clerkship 하였다.
        • 이런 식의 교육은 interdepartmental, interdisciplinary basis 이뤄져서 "organ based teaching"이라 불렸다.
        • Grade 제도를 폐지하고 Preceptorship 등도 도입했다.
      • WR대학은 1952 이러한 교육과정을 도입하였는데, 새롭게 만들어진 200인의 General Faculty 프로그램을 만드는데 엄청난 시간과 노력을 쏟았다. 실제로 교육과정이 바뀐 정도는 크지 않았지만 학습자를 중심에 두는 방향으로 attitudinal shift 바뀌었다.
      • WR 년에 걸쳐서 교육과정을 바꾸는 동안 교육적 철학과 교육방법만은 유지되었고, 이들의 시도는 전국적인 관심을 끌었다. 비록 완전하게 WR 방법을 도입한 학교는 없었지만 이들의 'philosophy of interdisciplinary teaching'만은 널리 퍼졌다.
      • 위의 모든 프로그램들은 충분한 재정적 지원이 있었기에 가능한 이었다.
      • 시기의 교육과정 실험에 대해 몇몇 중요한 있다. 하나는 faculty 열정이 중요하다는 점이다. WR처럼 faculty 적극적일 때는 되었지만, Cornell 처럼 skeptical 때는 되지 못했다.
      • 게다가 교육과정 실험이 이뤄지면서 faculty 교육과 관련된 일들에 열정적으로 참여하면서도 연구도 해야 한다 점이 명백해졌다. WR에서는 그러하였다.
      • 마지막으로 교육과정 실험과정에서 교육과정과 교육법을 평가하는 전략을 수정해야 필요 나타났다. 1950년대에 등장하기 시작하여 1970년에는 거의 절반정도의 MS 의학교육에 대한 연구를 하는 unit 또는 division 만들어졌다.
      • 전쟁 기간의 교육과정 실험이 두드러지긴 했지만, 1960년대 중반까지 변화는 크지 않았다.
        • "의학교육은 수년간 대단히 보수적인 태도를 유지했다"
        • 학생들도 불만족했다.
      • 따라서 1960년대의 미국 의학교육은 오묘한 위치에 있었다. MS들은 분명히 뛰어났지만 무언가 있을 같은 꺼림칙한 느낌을 지울 없었다.

 

  • The Changing Medical Student
    • GME 같이 학부 의학교육 역시 WWII 무렵에는 확고히 자리를 잡았다. 20세기의 50년동안의 모습과 상당 부분 유사한 모습을 가진 것도 이상할 일이 아니었다.
      • 공부할 분량은 많았고, 이러한 시련 와중에도 하나의 위안거리가 있다면 바로 elective였다.
    • 비단 학습량 뿐만 이나리 성적에 대한 스트레스도 심했는데, 한때는 고등학교에서 높은 성적을 받았던 학생들도 자신들만큼이나 뛰어난 다른 학생들과 경쟁해야 했다. Cornell 1등부터 84등까지 성적을 메겼고, Michigan은 소수점 넷째 자리까지 점수를 냈다.
    • 성적에 대해 더 스트레스였던 측면은 그 기준이 제멋대로였기 때문이다. faculty들이 공정하기 위해서 노력했지만 한계가 있었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일부 학교들은 Pass/Fail system 도입하기도 했다.
    • 스트레스의 정도를 측정하기는 어려웠지만, 공부할 분량이 많았다는 것과 압박이 상당했던 만은 확실하다. 1966 Harvard 30%학생이 도움을 받기 위해 정신과를 찾곤 했다.
    • 교육자들은 학생들이 받는 압박이 실제로 증가한 것인지 아니면 학생들의 근성이나 정신력이 약해진 것인지 논란을 벌였다.
    •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학생들도 자신들의 의견을 내곤 했다. 어느 의과대학을 지원하고 어느 곳에서 인턴을 할 것인가를 결정하는 것 자체가 faculty 대한 피드백이었다. MS들은 학생들의 의견을 바탕으로 새로운 변화들을 도입하곤 했다.
    • 비록 학생들의 삶은 별반 달라진 것은 없었지만 한 가지 큰 차이가 있었는데, 전쟁 후의 학생들의 삶은 HO 삶과 비슷하게 되었던 이다. 이상 medical center 그들 삶의 전부가 아니었고 학교에서 떨어져 살면서 그들 나름의 취미를 즐기고 데이트를 하고 결혼을 했다.
    • Internship 찾는 것도 변했는데 전쟁 이전에는 각각의 프로그램마다 합격자 발표날이 달랐고, 학생들은 자신의 모든 합격 여부를 알기 전에 결정을 내려야 했다. 그러나 National Intern Matching Plan(“Match”) 도입되면서 학생들과 학교들은 서로의 선호하는 순위를 매긴 다음, 프로그램에 의해서 matching 되어 같은 날 발표가 이뤄졌다.
    • 학문적 background 있어서 의대생들은 전쟁 이전과 비슷했다. Premedical requirement 거의 변한 것이 없었다. 그러나 학생들의 구성은 달라졌는데, 종교적으로, Gender면에서, 인종면에서 다양해졌다.
    • Quotas 사라지며 MS 점차 민주적(democratic)으로 되었지만, 사회 계층적 측면에서는 전혀 그렇지 못했고, 어느 때보다 medicine well-to-do들의 직업이 되었다.
    • MS들은 이러한 상황에 문제를 느꼈지만, 있는 장학금이 넉넉지 못했기 때문에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은 별로 없었다.
    • 전쟁 이전과 마찬가지로 MS들은 학생 모집을 위해 치열하게 경쟁했다.
    • 뿐만 아니라 전쟁후 시기에 의학은 과학, 법학, 교육학 등등 다른 분야와도 경쟁을 해야 했다.
      • 소련의 Sputnik 발사 직후 medicine 대한 관심은 크게 떨어졌고, 1961~1962년쯤 바닥을 찍은 후에야 다시 회복하기 시작했다.
    • 의학의 인기는 MS 대한 지원 지원자의 특성에 영향을 주었다.
      • Funkenstein 다섯 era 구분한다.
        • 1940~1958 : Specialty era
        • 1959~1968 : Scientific era
        • 1969~1970 : Student activism era
        • 1971~1974 : Doldrums era
        • 1975~ : Primary care and increasing governmental control era
    • 변화하는 의대생들의 가치관과 열망을 보며, 일부 사람들은 중요한 질문을 던졌다. 학생들이란 누구인가? (Who are the students?)
      • 의학교육자들의 눈을 가리고 있었던 것은, 의학교육을 통해서 행동이나 가치관을 바꿀 있다는 믿음이었다.
    • 하지만 문화적 힘을 보지 못하고 있었던 것은 의학교육자들 뿐만이 아니었다. 교육 시스템 안의 교사들과 행정가들도 이러한 믿음을 자주 드러냈다.
      • 이민자들을 “Americanize”한다. 균일한 “Melting pot” 만들어낸다.
      • 그러나 “hidden curriculum” 힘을 보여주는 근거들이 쌓이기 시작했고, 학생들의 특성이나 문화의 영향을 무시하는 것은 의학교육에 대한 과도한 자만심을 갖는 것과 같았다.

 

  • Producing More Doctors
    • MS들은 항상 국가에 대해 가지 임무를 동시에 지녔다. 하나는 의사가 되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최고의 교육을 제공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공공 의료 수요를 충족시키기 위한 만큼의 의사를 양성하는 것이었다.
    • WWI이후 의사 수에 대한 문제는 별다른 관심 사항이 아니었다. Flexner report이후, 기준에 미치지 못하는 MS들은 문을 닫았고, 배출되는 의사의 수는 심각하게 줄어들었다. 지리적 분포도 고르지 못했고, 새로 지어지는 학교들도 이미 충분한 인구가 있었던 그러나 MS만 없었던 지역에 세워졌다.
    • 1940 이후, 대중들은 많은 의사들을 원했고, 시골을 비롯한 의사가 적은 동네에서는 특히 그랬다.
    • 의학교육자들은 진퇴양난에 빠졌다. WWII 경험을 비추어보면 교육과정을 짧게 하는 것은 도저히 받아들일 없었다.
    • 그나마 나은 방법은 class size 키우거나, 새로운 학교를 세우는 것이었는데 여기에는 돈이 필요했다.
    • 적절한 자금을 모금하기 위해 MS들은 정부만 쳐다보았는데, 정부가 지원을 통해서 중앙집권적 통제권을 가져갈 것이라는 우려 때문에 이를 반대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하지만 이 때까지 연방정부는 의학연구에 대한 특별한 간섭을 하지 않았다.
    • WWII 이후 의사 부족에 대한 걱정은 계속 있었지만, 1959 Surgeon General’s Consultant Group on Medical Education에서 보고서(Bane report) 내고 나서야 본격적으로 이슈화되기 시작했다.
      • 1975년까지 국가적으로 40,000명의 의사가 부족할 것이다.
    • Bane report 곧장 Flexner report이후 가장 영향력있는 보고서가 되었다. 결과로 1963 Health Professions Educational Assistance Act 발효되었고 기존의 학교에 대해서 연방 정부가 matching fund 지원했다.
      • 학생 선발 수를 늘리면 지원을 해 주는 것이었기 때문에 “Capitation(인두세) payment”라고도 불렸다.
    • 연방 입법은 학교의 숫자와 학생의 숫자 모두에게 엄청난 영향을 주었다.
    • 더 많은 숫자의 의사를 양성하려는 움직임은 MS Society의 협조아래 이뤄졌는데, 정부의 강한 압박이 없었다면 기존의 MS들은 학생 수를 늘리려 하지 않았을 것이고, 새로 생기는 학교들 역시 적절한 시설이 있어야 승인을 받을 수 있었다.
    • 교육의 질을 유지해야 하는 상황에서 LCME(Liaison Committee on Medical Education)이 등장했다. 1968 United States Office of Education 공식적으로 MS들에 대한 승인을 내리는 조직으로서 LCME 인정하였다.
    • 1940 이후, 연방정부는 의학연구의 중심적 후원자가 되었고, 1965 Medicare Medicaid 도입과 함께 medical care financing 역할 하게 되었다.
      • 힘의 균형이 local-state axis에서 federal axis로 옮겨간 것이다. 1968 AAMC 사무실은 Washington DC 옮겨갔다.
    • 더 많은 의사를 양성하려는 움직임은 의료를 기본권으로 인식하기 시작한 변화와 관련이 있다. “미래의 건강은 유능한 의사를 얼마나 공급할 수 있느냐에 달려있다
    • 1960년대에는 Medical care라는 것이 그것을 행하는 사람의 수준에 달려있다는 것에 대해 아무도 의심하지 않았다. , 좋은 medical care 좋은 doctor 같은 의미였다.
      • 그러나 일부는 더 많은 의사를 양성하는 것에 대한 문제가 있지는 않을까 고민하는 사람들이 생겨났지만, 국가 정책적 차원에서는 여전히 더 많은 의사를 양성하고자 하였다.

 

  • The Devaluation of Teaching
    • 이 장에서 앞서 서술된 것처럼, WWII 이후의 시기는 학부 의학교육이 마비된 시기라고 부르는 것은 적절치 않다. 하지만 MS들이 규모와 복잡성 면에서 성장하면서 학생들에 대한 교육은 점차 더 작은 부분만을 차지하게 되었다.
    • 전쟁 후 시기의 MS 많은 역할들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의학연구(biomedical research)였다.
    • 연구가 강조되는 것이 학부 학생들의 교육에 꼭 나쁜 것만은 아니었다. 연구를 함으로써 의학교육자들은 근본적인 원리보다 실제로 쓸모가 있는 내용들을 가르칠 수 있었고, 학생들도 내용을 다시 생각하고 소화시킬 필요가 있다는 것을 떠올릴 수 있었다.
    • 그렇지만 전쟁 후 MS들에서 연구와 다르게 교육은 조직에서 점차 쇠퇴하는 가치였다. 학생들을 잊혀지게 만든 것은 재정적인 측면에서 감소했다거나, 다른 AMC 역할이 중요해졌기 때문이 아니라 조직의 가치체계(institutional value system)때문이었다.
    • MS 보상 체계를 보면 누구나 교육보다 연구가 우선한다는 것을 있었다. 모든 학교에서 승진의 기준은 연구였다 “Publish or perish”. 일부 학교에서 좋은 선생님이 되는 것은 “obstacle to advancement”라고 여겨졌다.
    • 연구에 높은 가치를 부여했던 것은 elite school 뿐만 아니라 낮은 tier 학교에서도 마찬가지였다.
    • 연구는 학교의 지위를 나타내는 가장 중요한 요소였고, 학교의 평판을 좌우하는 것에 있어서 교육은 가장 중요한요소였다.
    • 여기에 curricular reform 가로막는 가장 장애물이 있었다. 연구가 priority 차지하는 상황에서 교육에 쓰는 시간과 연구에 쓰는 시간의 조화를 찾기란 어려운 일이었다. 가르친다라는 평판은 매우 국소적인 것에 불과했다.
    • 연구를 강조하는 것이 대체로 교육을 소홀하게 만드는 것은 맞지만, 이러한 상황은 MS에서 유달리 심했다. 연구에 대한 외부 지원은 많았지만 교육에 쓰일 수 있는 것은 적었다. 1910 수입의 70% 차지하던 수업료는 1948년에는 28%, 1968년에는 7% 불과했다. 많은 교육자들은 자발적으로그렇게 하기로 사람들이었다. 언제든지 하기 싫다면 수 있는 것이 된 것이다.
    • 연구 funding 많아지면서 교육에 대한 중요성은 줄어들었고, 연구는 강조되는 과정에서 이것은 다시 curricular reform 장애물이 되었다. 좋은 학습환경은 학생을 최우선으로 해야 했지만, 미국 MS 발전 방향은 faculty needs 최우선으로 하고 있었다.
    • 이런 특징들이 좋은 교육이 전혀 없었다는 것을 의미하진 않는다. 그것보다는 당시의 좋은 교육이란 것이 계획적으로 이뤄진 것이 아니라, 그저 우연히 발생한 것임을 뜻하는 것이다.







  • Chapter 10. The Maturation of Graduate Medical Education
    • WWII이후 벌어진 모든 분야를 망라한 지식의 팽창은 학문에 대한 기존의 접근방식을 완전히 파괴했다. 과목들은 파편화(fragmentation)되고, 학문적 전문화 일어났다. Scientific discipline humanities 차이는 특히 크게 벌어졌다.
    • 의학에 있어서 비슷한 지식의 파편현상이 일어났는데, 전문 과목(specialization) 되는 변화가 시작된 것은 오래 되었지만, specialization sub-specialization 빨라졌다. 물론 의학은 다른 분야만큼 파편화되지는 않았는데, 왜냐하면 모든 의료는 동일한 과학적 infrastructure 기반으로 이뤄졌고, 전공자(specialist)라고 해도 다른 분야의 사람들과 협력을 해야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1950년대에 이르러서 의학은 하나의 거대한 영역에서 여러 다양한 영역의 연합체로 변해갔다.
    • WWII이후 general practice 사라지지 않았지만 직업적 측면의 매력은 상당히 떨어졌다. 이전에는 일부만 밟을 있었던 residency program 지금은 거의 원하면 누구나 받을 있게 되었고, 많은 medical center에서 I, R, subspecialty(SS) resident, clinical fellow 수는 의대생의 숫자를 훨씬 초과하였다.
    • 1960년대 중반에 이르러 GME 주요한 목적은 달성하였으나, 등장하기 시작한 새로운 변화가 있었으니 그것은 manpower 측면에서의 '개인의 선택' '국가적 필요' 사이의 조화가 깨지기 시작한 것이다. AMC Specialist(S) SS 많이 키워내고 있었다. AMC S SS 많이 키워냄에 따라서 지역의 private practitioner specialized care 두고 경쟁을 해야 하는 상태가 되었다.
    • The Democratization of Residency
      • WWII 이전에는 매우 일부의 의사만이 S 되었다. 그러나 전쟁은 S 대한 의사들의 태도를 완전히 바꾸어놓았다. General Practitioner(GP) R 마친 의사보다 적은 돈만을 벌었고, 중요한 일을 하게 되었다. S 위신이 올라갔다.
      • 이러한 분위기의 결과로 전쟁기간 복무했던 의사들 사이에 specialty residency position 대한 인기가 전례 없는 정도로 높아졌다. 의사의 2/3정도는 certified S 되기 위한 R트레이닝을 받고 싶어했다. 그리고 전쟁이 끝나갈 무렵, 부속병원들은 residency staff 숫자를 늘려나갔다.
      • R position 대한 요구는 일시적인 현상이 아니었다.'
      • 이런 것에 대한 이유를 찾기는 어렵지 않은데, 의학지식의 급속히 팽창하고 수기 시술이 복잡해지면서 의학의 많은 분야에서 S들이 필요하게 되었다. 여기에 더하여 GP S 사이의 수입이나 사회적 명망 차이가 커지기 시작했다 .
        • 전쟁 이전에는 혼자 이것저것을 하는 generalist 주치의를 하는 경우가 흔했으나, 전쟁 이후 학생들은 '혼자서 광범위한 일을 처리하는' 의사는 거의 보지 못하게 되었다.
      • 의대생들의 S 대한 열망은 부속병원들이 SR(specialty resident) 늘리고자 하는 것과 맞아떨어졌다.
      • HO 숫자가 증가하는 것에는 MS 역할도 컸다. 성숙한, 책임감 있는 R staff 있음으로써 faculty 연구나 private practice, consulting등등에 많은 시간을 있게 되었다.
        • Clinical department에서 병원측에게 HO 수를 늘려달라고 요구했다는 것이 전혀 놀라울 것이 없다.
      • Columbia-Presbyterian에서 R training 성장한 과정 clinical department에게 있어서 R 얼마나 매력적인 존재였는가를 보여준다.
        • R staff 늘어날 있게 것은 (1)하나는 clinical service 작업량이 늘리는 기여했기 때문이며 (2)R 의대생 교육에 많이 관여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 HO AMC 돌아가게 하는데 필수적인 것이 되었다.
      • AMC에게 GME 성장은 변화였다. WWII기간에 R staff 숫자는 의도적으로 제한되었고, 대부분의 position academic career 가려는 사람들에게만 주어졌다. 그러나 전쟁 이후 HO 숫자는 의대생의 그것을 초과했다.
      • 일부 새롭게 만들어진 R program 있지만, 대부분은 기존의 프로그램에서 숫자를 늘리는 방식을 취했다. R training 점차 democratize 되었다. 기존의 엄격한 피라미드 형태의 구조는 parallel system으로 대체되어갔다.
        • 피라미드 구조를 유지한 것은 GS 밖에 없었다. 대부분의 다른 과에서는 R 들어오면 R 마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 GME 성장은 AMC에게 새로운 과제를 안겨 주었는데, 대부분의 faculty member에게 ward teaching 점차 어려운 일이 되었다. 왜냐하면 이제 가르쳐야 하는 대상이 학생부터 레지던트 말년차까지 너무 다양했기 때문에 어디에 중점을 두고 것인가가 상당히 교육적으로 어려운 문제였다. 또한 시기에 MS clinical network 여러 병원으로 확장함에 따라서 Faculty 교육을 담당해야 하는 기관의 수도 크게 늘어났다.
      • GME AMC에서 가장 성장을 이루긴 했으나, AMC들이 전쟁 이전보다 I R training 독점권을 가진 것은 아니었다. 대학에 부속되지 않은 여러 community hospital "Freestanding internship" 제공하였다.(어떤 R program에도 속하지 않은 I program)
      • 그러나 병원간의 HO 모집하기 위한 치열한 경쟁 속에서도 부속병원은 독보적으로 유리한 위치를 선점하고 있었다.
      • HO 대한 수요가 많아지면서, 부족 현상이 생겼고, 특히 인턴의 부족이 심했다. 1958 12325개의 인턴 자리가 있었으나, 미국 MS 졸업생은 6861명에 불과했다. 1960년대 후반, I R 자리의 20% 여전히 채워지지 못했고, 그나마도 시기에 32% I R 외국 의과대학 졸업생이었다.
      • 치열한 GME 내의 경쟁 속에는 HO 모집하기 위한 병원간의 경쟁 뿐만 아니라 좋은 R 모집하기 위한 specialty 사이의 경쟁 있었다. 가장 지적으로 흥미로운 분야가 가장 인기가 많았다. 예를 들면 상대적으로 안과가 인기가 있었고, 이비인후과가 인기가 있었는데 이런 것이 수입이나 삶의 질이나 사회적 명망과 관련이 별로 있지 않았다. 뛰어난 학생들이 가장 많이 가던 과는 내과였는데, 1960년대의 내과는 80% Alpha Omega Alpha 선정된 학생들이었다.
      • I R 대한 통제권은 전쟁 이전과 마찬가지로 여러 조직에 나누어져 있었다. AAMC, AMA, specialty boards, residency review committees 등등.
        • 1960년대에 Millis report라는 보고서는 대학들이 의학교육의 연속체(continuum) 있어서 많은 책임을 것을 권고하였다.
        • 그러나 이러한 권고는 무시당했고, AMC내에서도 R program 과의 문제였지 병원 기관 전체로서의 문제가 아니었다.
      • Residency democratization 미국 의학교육의 윤곽(contour) 바꾸어 놓았다. R position multiplication clinical clerkship 질적 향상과 함께 internship 위와 아래 방향에서 압박해왔다. 2년짜리 internship 사라졌고, 부속병원은 rotating internship 없앴다. 그리고 1970년에 이르러서는 freestanding internship 사라졌다. 1975 7 1일을 기점으로 인턴십은 residency program 1년차에 포합되었고, 독립적인 교육으로서의 존재는 사라졌다.
        • Residency democratization MS CME 대한 역할도 감소시켰다. 많은 학교들이 여전히 CME 제공하고는 있었지만, faculty 별로 이러한 것을 달가워하지 않았다.
      • 전쟁 이후의 I R GME 대한 근본적인 질문을 던졌는데, 바로 이것이 교육이냐 서비스냐(was it education or service)? 하는 것이었다.
        • 특히 이것은 MS 부속관계에 있지 않은 병원에서 두드러졌지만, 부속병원에서도 이러한 문제에 대한 은근한 분위기가 있었다.
      • R democratization free enterprise system 성공과 개개인의 권리의 승리를 의미했다. 각각의 병원 R program 그들의 필요에 따라서 HO 뽑았고, 학생들은 그들의 흥미에 따라 S 선택했다.
      • 전체적으로 보면 1950년대와 1960년대의 '개인의 선택' 결과적으로 Specialization 향해 급속히 가고 있었고 GP 점차 줄고 있었다. 그러나 개개 의사에게 좋은 것이 국가 전체로 좋은 만은 아니었다.
      • GME 가장 당면과제는 개개 의사의 열망과 국가적 목표를 어떻게 조화시키느냐 하는 것이었다.
        • "Surgeon 의해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정부에 의해 결정될 것이다"

 

  • The Rise of Subspecialty Training
    • WWII 이전에 residency 의학 교육의 최고점(culmination) 같았다. 그러나 WWII이후 residency 기존의 목적을 달성하기 어려워졌다. 임상적으로 이상 HO에게 specialty care 대한 최신 지식을 전달하지 못했다.
      • 가장 뛰어난 clinician까지도 특정 분야를 마스터하려면 SS해야 했다.
    • 전쟁 이후 residency academic career 준비과정으로서의 가치는 대부분 상실했다. 일이 바빠져서 Reflection 하거나 임상 연구를 시간은 없었다.
      • 고등교육이 democratization 됨에 따라 residency 많은 사람에게 기회 주어졌다. 학사 학위도 liberally educated individual 나타내주는 역할을 상실했고 specialty certification academic 것보다 vocational(직업적) 보증을 해주는 것이 되었다.
    • WWII이후의 formal SS 훈련과정은 임상적 SS 대한 훈련과 연구자로서의 커리어 훈련을 받을 있는 역할을 했다.
      • SS training 받는 루트는 과에 따라 달랐고 수술과의 경우 하고자 하는 (UR, NS )에서 3~5년을 해야 했고, 내과는 2~3년의 subspecialty "fellow" 해야 했다.
    • Formal medical education으로서의 최종 단계로서 fellowship training 앞의 어느 단계보다 세분화되고 다양했다. 개개인이 하고자 하는 특정한 분야에 맞추어질 있게 유연했다.
    • SS training 임상 경험 쌓는 것이기도 했지만, 그것보다 우선되는 목표는 미래의 clinical investigator로서 준비하는 과정이었다. 이제는 R 아니라 SS training academic leader로서의 준비단계가 되었다.
    • WWII 이후 20년간 SS fellowship training 크게 확장되었다. 많은 부속병원에서 clinical fellow 수는 I R 수를 넘어서고 있었다. Case 맡으려고 하는 R F(Fellow) 사이의 싸움이 치열했다.
    • 많은 F들에게 SS training 기운이 나는 과정이었다. I R동안 환자를 보는 것을 배우느라 정신이 없었지만, 이제는 학문적 사유를 하고 연구를 있는 여유를 가질 있었다.
      • 그러나 SS training scholar만을 위한 것은 아니었고 R 같이 democratize 학문적 목적이 아니라 advance 임상경험을 쌓고자 하는 사람들도 F 했다.
    • 1970년대 초반 academic medicine 리더들은 매우 소수의 SS들만이 academic career 가고자 하는 사실을 걱정했다. 대다수의 SS들은 결국 private practice 종사하였다.
    • 많은 면에서 이렇게 많은 S SS 키워내는 것은 공공적 측면 있었다. 대학에서 훈련받은 SS들은 그들의 community hospital 필요한 시설과 인력의 지원을 받을 있게 도와주는 역할을 있었고, 또한 실제로도 그러한 역할을 했다. 당시까지만 해도 경쟁적 분위기가 덜했고, AMC 지위는 확고했고, SS training program 생긴지 얼마 안된 때였으며, AMC community physician 관계도 좋았다.

 

  • The Changing Life of the House Officer
    • 많은 면에서 전쟁 이후 HO들의 삶은 전쟁 이전과 비슷했다. 기존의 수많은 스트레스 요인(과도한 노동, 수면 부족..)들은 여전히 그대로였다. 물론 이와 마찬가지로 기존의 수많은 지원들도 그대로였다.
    • 어떤 HO 서로 완전히 동일한 경험을 하지는 못했다. 같은 residency 프로그램 내에서도 경험하는 것이 달랐다. 또한 community hospital 부속병원 R 경험도 물론 달랐다.
    • 그렇지만 HO 삶에 있어서 어떠한 뚜렷한 변화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모든 프로그램에서 GME 가족과 같은 분위기가 사라지기 시작한 이다. 이것은 한편으로는 house staff program 커지면서 나타난 것이기도 했다. 모든 사람에게 병원 숙소를 주는 것이 불가능했던 것이다. 이에 따라 faculty와의 관계도 조금 멀어졌다.
    • 다른 요인은 1950년대와 1960년대는 개인적인 유흥이나 여유를 즐기는 사회적 분위기가 확산 것이다. 전쟁 세대에게 있어서 가부장적인 규칙과 행동 규범은 이상 통하지 않았다.
    • 번째 차이는 private patient 많이 보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Private patient(PP) Semiprivate patient(SPP) 증가하기 시작하면서 WP 수는 감소했고 전쟁 이전에 가장 많은 WP 보던 병원에서는 종종 갈등 상황이 벌어졌다.
      • 많은 private physician들은 자신들에게 건방지게 대하거나 심지어 PP WP 훔쳐가버리는 R들을 매우 싫어했다.
    • PP수의 증가가 교육적인 문제를 야기했지만, I R에게 일부 좋은 점도 있었다. 처음으로 그들은 'salaries' 받았다.
    • 1965 통과된 Medicare Medicaid 원래 GME 대해서는 관대하게 reimburse 하였기 때문에, house staff 받는 보상은 빠르게 증가했다.
      • House staff(HS) 봉급은 "꾸준히 상승하며 끝을 모른다" 라고 하였다. 일부 junior faculty house staff들이 자신들보다 많은 돈을 받는 것을 우려했다.
    • PP 존재가 HS 봉급이 올라가는 것에 기여한 것은 맞지만 HO 차지하기 위한 병원간 경쟁도 여기에 했다. 병원은 급여를 무기로 HO들을 모집했다.
    • HO들에게 stipend 등장은 이상 좋을 없었다. 당시에는 봉급만 가지고는 빚을 지는 일이 흔했고, 많은 HO들은 공식적으로 금지되어있음에도 야간 알바를 뛰었다.
    • 번째 차이는 많은 일감이었다. 연구가 F에게 옮겨가면서 scholarly adventure 점점 사라져갔다. 반면 환자에 대해서 해야 일은 많았다. HO들은 학생들을 가르치는 일도 해야 했고 외래환자도 봐야 했다. 일이 너무 많아서 conference 참석률은 떨어졌고, 악필이 너무 많아서 어떤 병원에서는 서법(penmanship) 코스를 열기도 했다. 삐삐가 도입되면서 on duty 때는 도망가지도 못했다.
      • HO들은 불만을 표출(acting out)했고 환자나 간호사에게 무례하게 대하거나 다른 병원 직원에게 막대하거나 주차공간을 쓰고 환자용 음식을 가로채기도 했다.
    • HS life 바쁜 삶은 다시 한번 GME 근본적 모호성에 대한 질문을 떠올리게 했다. Was it service or education?
    • GME 여러 측면이 변했지만 하나만은 바뀌지 않았다. 바로 환자 management 대한 사려깊은 접근법을 가르치고자 하는 의학교육자들의 이상이다.
      • 그러나 faculty 의한 압력은 종종 이것과는 반대로 작용했는데, 많은 검사와 불필요한 검사까지도 하도록 했다.
      • Faculty들은 "검사의 적절한 사용은 가르치지 않으면서 하나만 빼먹으면 무지하게 혼냈다"
    • 전쟁 이후 faculty들이 딱히 전에 비해서 교육에 신경을 것은 아니지만, 결과는 엄청난 차이였다. 과학의 발전으로 많은 비싼 검사 procedure 생겨났다. 1950년대와 1960년대에 이미 medical cost 빠르게 증가하고 있었다.





  • Chapter 9. The Expansion of Clinical Service
    • WWII이후 미국의 성장이 점차 복잡해지는 동안, 대학도 다르지 않았다. Abraham Flexner 이상적으로 바라본 research university WWII 이후 미국의 고등교육의 대명사와도 같았다.
    • Multiversity 여러 학과 중에서도 MS 실용적 요구(practical demand) 가장 맞춰나갔다. 의료를 많은 사람들에게 전파한다는 면에서 이제는 가난한 사람 뿐만 아니라 middle class까지 serve하고 있었다.
    • WWII이후 20년간 확장된 clinical service AMC내에 긴장을 조성했는데, 이는 환자를 정도로 보면서까지 연구와 교육을 병행하기가 어려웠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본연의 임무를 잊은 AMC 극소수에 불과했다. 전쟁 이후 미국 의학을 이끄는 힘은 AMC 쥐고 있었다.
    • Academic Medical Centers  and the Rising Demand for Medical Care
      • 전쟁후 미국에서 medical care 대한 공공의 수요는 빠르게 증가했다. 이는 국가가 경제적으로 풍요로워졌다는 것을 뜻하는 것이기도 했다.
      • 사회적 분위기가 변하면서 의료는 점차 '기본권'으로 인식되기 시작했다. 이런 태도는 의료전달 지원체계에 대한 다양한 실험으로 이어졌다. Sickness insurance, comprehensive care program, neighborhood health center, group practice…
        • 그리고 중간층 사람들은 주로 private insurance(PI) 사용하였다.
      • 환자들이 PI 활용하면서 병원은 점차 바빠졌다. Renovation 하고 확장해야 했다.
      • 5684개의 acute-care general hospital 227개의 "major" teaching hospital 주로 증가한 대중의 수요 따른 영향을 가장 많이 받았다.
        • 전쟁 이후 연방 health policy 철학은 각각의 지역에 적어도 하나 이상의 major teaching hospital 있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 부속병원 대한 수요가 커지는 것은 우연한 것이 아니었는데, 왜냐하면 병원들 중에서도 병원들이 제공하는 의료 수준을 최고로 쳐주고 있었기 때문이다.
        • "최상급" 병원 의료진의 리스트는 점차 거의 독점적으로 '부속병원'만으로 구성되었다.
      • 정확히 어느 정도나 이들 부속병원이 뛰어났는지는 추측만 뿐이다. 많은 연구에서 이를 구체적으로 밝히고자 했으나 대개는 제대로 통제되지(controlled) 않거나, bias 심했다. 그럼에도 확실한 것이 있었는데 MGH outspoken director John H Knowles 부속병원을 "medical excellence 독도(unrivaled islands of medical excellence)" 불렀다.
        • 연방 정부는 Veteran Administration(VA) 통해서 교육과 연구가 진료를 향상시킨다는 아이디어를 승인(imprimatur)하였는데, WWII이후 VA 수십개의 새로운 병원들을 지었고, 대부분은 MS과의 affiliation 맺었다. VA에게 있어서 이러한 affiliation 목적은 단순했다. "Veteran들이 가장 높은 수준의 진료를 받을 있게 해라"
      • 평판이 높아짐에 따라 부속병원은 많은 환자를 유치하게 되었다.
      • 대부분의 부속병원에서 일의 양은 미친듯이 늘었는데, 그다지 응급하지 않은 환자를 포함하여 응급실 환자 수가 엄청나게 늘었다. Laboratory facility 증가하여 혈액검사가 1930년에 비해 1968년에는 10 배가 증가하였다.
      • 전쟁 이후 시기에 부속병원들은 지속적으로 많은 수의 가난한 환자들을 담당하고 있었는데 이러한 charity patient 비율은 점차 감소하였다. 대신 semiprivate patient 주된 고객이 되었다.
      • Private patient 수가 많아지면서 full-time faculty 진료에 많이 관여하였다. 그리고 그에 따른 수입도 많이 증가했다.
      • 부속병원이 paying patient 위한 시장에 발을 담그게 것에는 그들의 평판과 진료에 대한 높은 기준도 역할을 했는데, 이는 medical staff quality 중요함 의미했다. 따라서 부속병원들이 paying patient 통해서 경쟁력을 확보할 있다는 확신을 가지면서 그들은 staff 고용하는데 있어서 점차 성별이나 종교나 인종을 따지지 않았다.
      • 부속병원은 많은 문제점도 해결해야 했는데, 거기에는 종종 간호사가 부족한 문제, 근로자들의 불만, 노동조합이 만들어질 가능성, 교육에의 투자로 인한 환자들의 불편함 등등이 있었다.
      • 전쟁 이전에 대부분의 부속병원은 인간미라고는 찾아볼 없는 곳이었다. 환자들은 의사들이 기술적으로는 훌륭해도 인간적으로는 차갑다고 했다.
      • 부속병원이 성장하면서 행정적 문제도 등장했는데, MS 같이 병원도 대규모의 사업이 되어버린 것이다. 그렇지만 이들은 여전히 '' 최우선으로 생각했다
        • "any saving of money is a secondary gain"
        • 명의 부유한 자선가가 병원의 운영비용을 있는 시대는 지났다.
      • 부속병원은 규모면에서 커졌을 뿐만 아니라 질적으로도 복잡해졌다. 섬세한 수술에는 다양한 직군의 사람들이 필요했다. 부속병원의 행정직은 자체로 하나의 직업이 되었다.
      • 모든 문제들 중에서도 가장 문제는 가난한 환자에 대한 것이었다.
        • 1960년대까지 많은 부속병원들은 환자가 돈이 없다고 돌려보낸 적이 없음을 자랑스러워했다. 그러나 이들이 이렇게 있었던 것은 "Robin Hood" 되어 부자에게 많은 돈을 받아냈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 1960년대 중반, AMC 점차 paying patient 대한 진료를 확장해갔다. 그러나 이는 닥쳐올 불행의 징조였다. 질병은 통제했지만, 의료전달체계가 점차 병들고 있었다. Hospital care 들어가는 높은 비용은 문제였다.
      • 하지만 Academic medicine 하는 일부는 의료전달체계의 문제를 university medical center 대중에게 무언가를 있는 다른 기회로 여기기도 했다.

 

  • The Persistence of Academic Values
    • 20세기 초반부터 의과대학과 부속병원의 공생적 관계가 존재했다.
    • 교육과 연구를 통해서 부속병원은 의학에 있어서 독특한 창의적 기능을 하였다. 사업적 측면에서 그들의 미션은 의학 산업에 있어 연구 발전 부문을 담당하는 것이었다.
    • 전쟁 이후 부속병원은 다양한 그룹으로 구성되어 있었는데, 1950년대와 1960년대에는 VA hospital들이 들어오면서 더욱 다양해진 측면이 있었다. 그러나 전체적으로는 당시 부속병원은 교육과 연구를 강력하게 지원하고 있었다고 있다.
      • "지금과 같은 MGH 되는 것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을 하나만 뽑는다면 무엇이겠습니까?" "Harvard Medical School입니다"
    • 1950년대와 1960년대의 부속병원은 질적으로 끈질긴 노력을 하였다. 그들의 '성공' 기관의 크기라든가, 환자 수라든가, 재정적인 측면으로 정의되는 것이 아니었다. Knowles Peter Bent Brigham 대해서 규모가 작다고 무시했지만, 반대로 MGH 너무 규모가 크기 때문에 환자를 보는 것에 드는 시간이 많아 교육과 연구를 없다는 주장도 합당한 것이었다.
    • 물론, 당시 MGH 가장 뛰어난 부속병원임을 부정할 수는 없다.
    • 의과대학과 부속병원이 공통적으로 중요시하는 것들도 있었지만, 둘이 완전히 동일한 것은 아니었다. Harvard Medical School 어떤 사람들은 Massachusetts General Problem 이라고 불렀다.
      • 의과대학은 그들의 근원이 대학인 것으로부터 짐작할 있듯, 기본적으로 future-directed 였다.
      • 반면 부속병원은 즉각적인 현재의 환자를 돌보는 책임을 가장 중요하게 여겼다.
    • 이러한 맥락에서 AMC에서 clinical service 확장은 중요한 딜레마를 낳았다. MS에서 교육과 연구와 진료의 균형을 잡는 것도 어려운 일이었는데, 이제는 어려운 문제가 되었다.
    • AMC 그들의 진료 역할을 확장시키면서 의과대학의 갈등이 심심찮게 터져 나왔고 private practice 양을 제한하자는 의견도 나왔다.
    • 그러나 의과대학과 부속병원의 학문적 헌신도 여전히 강력했다. "Staff들은 이곳이 교육기관이면서 연구의 보금자리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된다"
      • 해답은 private practice 교육이나 연구의 하위로 두는 것밖에 없어 보였다.
    • 이러한 결과로 private practice 증가하는 가운데에서도 1950년대~1960년대의 AMC university principle 지키게 되었다.
      • Faculty practice 증가하였지만 Washington Univ. 임용을 임상 실적보다 연구 능력 기준으로 하였다.
    • 이러한 현상을 보여주는 다른 지표는 community hospital affiliation 요청을 지속적으로 거절했다는 사실이다. WWII이후 뛰어난 학교에 대해서만 affiliation 맺었다.
    • AMC 학문적 가치를 지키기 위해 노력했다는 사실에 대한 의심이 남아있다면, 아마도 지역의 private practitioner 긴밀한 관계를 유지했다는 사실 때문일 것이다. "Town-gown" 관계는 대체로 유지되고 있었다.
    • 이러한 상황은 AMC 교육과 연구에의 강력한 헌신 덕이라고 있다. 전쟁 이후, 20세기의 50 동안 medical faculty community private patient 두고 과도하게 경쟁을 하는 대신 진료의 일정 수준을 유지하기 위하여 노력하였다.

 

  • The Preservation of the Learning Environment
    • Progressive medical education 학습자가 스스로의 학습에 대한 책임을 가져야 했다. 그러나 학생이나 인턴은 아직은 어느 정도의 도움을 필요로 했기 때문에, 다양한 환자를 있게 한다거나, 능숙한 교수자 집단을 양성하는 등이 필요했다.
    • 전쟁 이후, 풍요로운 학습 환경이 위기에 놓였다. 가장 즉각적인 위협은 많은 수의 charity bed semiprivate bed 전환된 것이다. Private patient보다 많은 책임을 가지고 있었던 ward patient, 병원비가 치솟는 것에 따른 병원측의 부담이 커지면서 점점 수가 줄었다.
    • 병원 administrator paying patient 늘어난 것을 즐거워 했는지 몰라도, Faculty에게 있어서 ward patient 감소한다는 것은 학생과 house officer 교육이 심각하게 침해당하는 것을 의미했다.
      • "가장 심각한 문제는 ward population 감소이다"
    • 학생과 HO private patient 통해 배울 있는 것이 적다는 것은 누구나 동의하는 것이었다.
      • "저소득 계층은 대화가 통하지는 않지만 신체검진(P/E)에는 훨씬 적합하다. 그리고 중산층 이상에서는 반대이다"
    • 그렇지만 private patient 활용하는 것에는 많은 제약사항이 있었는데, private patient - self-paying이든 insured - 학생이나 House Officer 교육에 쓰이는 것에 대한 압박이 거의 없었다.
      • "not to intrude into the area of the private physicians"
    • 항상 가까이 관리를 받고 혼자 무얼 하는 것이 허락되지 않는 학생들에게 있어서는 Private patient 활용이 그다지 중요하지 않았다. PP WP 학생에게는 다른 차이가 없었다. 그러나 인턴이나 레지던트에게 있어서는 이것이 무척 중요한 일이었다.
      • 특히 surgical field 레지던트들에게 일이었다.
    • 이러한 분위기에 따라서 많은 MS들은 trainee들이 충분한 수의 WP 경험할 있도록 보장하겠다는 약속을 하였다.
      • 가지 흔한 방법은 WP 분류되는 기준을 바꾸는 것이었다. Blue Cross 다른 semiprivate pt 교육에 활용할 있게 .
      • 다른 방법은 교육 장소를 municipal hospital, veterans hospital까지 확대하는 것이다.
      • 마지막으로 1960년대에 이르러서는 HO들로 하여금 PP 대해서 많은 책임을 가지도록 했다.
    • 책임감을 가지게 하는 (assume responsibility) 부속병원의 교육환경 하나에 불과한 것이었다. 뿐만 아니라 지도를 하고 감독을 하고 비판적 사고를 키워줄 있는 좋은 선생님이 필요했다. 그러나 이미 많은 faculty 연구에 시간을 쓰기에도 바빴다.
    • 이런 면에 대해서도 MS 임상 교육 환경을 보존할 있었는데, instructor 부족하지 않도록 clinical faculty 숫자는 7배로 늘렸다. Instructor 수가 부족한 부속병원은 존재하지 않았다.
    • 전통적인 ward service 교육적 측면에서 훌륭할 있었던 것은 '시간' 존재였다. 질병의 변화를 시켜보고 진단을 내리고 치료에 대한 반응을 있는 시간이 충분했다.
      • 그러나 전반적인 추세는 재원일수를 줄이는 방향으로 가고 있었다.
    • 이에 더하여 의학 기술이 복잡해지면서 병동에서의 생활도 정신없이 바빠졌다. 새로운 수술법은 전의 수술법보다 훨씬 복잡했다.
      • Mechanical ventilator, extracorporeal circulatory pumps…
    • 재원일수가 줄었지만 여전히 inpatient ward 교육적 수준을 유지할 만큼의 시간은 되었다.
    • 또한 Blue Cross 비롯한 다른 insurer 어느 곳도 의사가 환자에게 하는 진료나, 환자가 병원에 얼마나 오래 머무는지에 대해 제한을 걸지 않았다.
    • 이와 같은 융통성이 있었지만, 학습 환경이 완벽한 것은 아니었다. 가장 문제는 clinical material로서의 inpatient ward였는데, 이상 이들 환자군이 심각한 질병의 스펙트럼을 대변해주지 못했기 때문이다. 건강 증진에 대한 조언은 병원보다 office에서 이뤄졌고 많은 수의 만성질환은 대개 ambulatory setting에서 치료되고 있었다.
    • 그렇지만 대부분의 의학교육자들은 inpatient ward 학생과 HO 교육에 있어서 가장 적합한 곳이라고 생각했다. 학습자가 문제에 대해 자세히 공부하고 병태생리를 배우며 질병의 자연사를 익힐 있는 곳은 병동이라고 생각했다.
    • 1965년에 이르러 미국의 부속병원들은 세대 이전과 비교할 전혀 다른 곳이 되어 있었다. 많은 환자가 있었고 환자의 turnover 빨랐다. 그러나 많은 것이 바뀌는 와중에도 최고의 교육을 위한 의학교육자들의 의지만은 바뀌지 않았다.



  • Chapter 8. The Ascendancy of Research
    • Modern era이후로 medical faculty들이 바라던 것이 하나 있다면 바로 연구에 대한 열망이었다.
      • WWII 이전의 미국 의학연구는 규모가 작았는데, 이는 돈이 부족했기 때문이지 관심이 적었기 때문은 아니다.
    • WWII동안의 연방정부와 AMC 관계는 미국 의학 연구의 규모를 되돌릴 없는 수준으로 바꾸어놓았다.
    • 미국 의학 연구의 성장은, 연방 정부의 지출을 통해서 범위의 일반 교육 고등 교육을 성장시킨 결과에 따른 부분이었다.
      • 일부 학교를 "research university" 지정하였다.
      • "multiversity" 라는 용어는 1963년의 "research university" 지칭하는 용어였다.
      • 당시 상황의 새로운 측면이라면 연방정부의 지원 유무가 아니라, 지원의 규모였다. 여기에는 대학을 국가적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주요한 기관으로 키우기 위한 목적이 있었다.
    • 가지 특징만은 20세기 초반과 동일했는데, 바로 'public good'(공공의 이익) 위해 일한다는 점이었다. AMC 사회적, 공공적 목적에 헌신하기 위한 기관으로 남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 The Age of Federal Beneficence
      • 1940년대에 미국 의학 연구의 규모에 엄청난 변화가 생긴다. WWII이후 시작된 이와 같은 성장은, 학교들이 Office of Scientific Research and Development로부터 계약 연구비를 받으면서 시작된다.
        • 1940년에서 1950 사이에 state school에서 연구비는 900% 증가했고 private school에서는 700% 증가했다.
      • 그럼에도 대중들은 많은 것을 원했다. WWII 시기의 질병과의 전쟁은 강한 인상을 남겼고, '만성질병과의 전쟁' 대한 기대감도 높아졌다.
        • 광고계 거물 Albert Lasker 부인 Mary Lasker 등은 국회에서 의학연구를 주요한 주제로 다루게 하는데 기여했다.
      • 결과는 NIH 발전이었다. NIH 1887 Staten Island 작은 보건연구소로 출발했다. 1937년에는 National Cancer Institute(NCI) independent unit으로 조직되었는데 1944 NCI NIH 통합되었다.
      • 처음에는 많은 academic leader들이 정부가 지속적으로 biomedical research 지원해야 한다는 의견에 반대했다. 가장 우려는 연구비를 지원하는 정부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하여 연구자들이 연구 주제를 그쪽으로 맞출 것이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지적인 자유(intellectual freedom) 유지되었다.
      • 연방정부의 지원 덕분에 1950년대와 1960년대는 미국 의학연구의 황금기가 되었다. 전례없던 규모의 팽창이 이뤄졌고, 연구가 전국가적인 차원의 일이 되었다는 것은 national specialty journal들이 individual institutional journal 앞서나가기 시작했다는 것으로부터도 있다.
      • NIH 생기고 이후 20년간의 연구비 지원은 엄청났다. 1947 $8.3M였던 것이 1966 $800M 되었다. 1972 전체 학생 0.5% 불과한 MS들이 전체 지출의 10% 사용하고 있었다.
      • WWII이후 의학연구에 지원을 것은 연방정부 뿐만이 아니었다. State legislature, Private donor, foundation등등도 지원을 계속 하고 있었다.
      • 연방정부 지원은 infrastructure 짓는 데도 들어왔다. 당시 건물이나 시설이 노후화되었고 공간은 부족했다. 이에 연방정부 NIH 자금을 지원했다.
      • MS faculty 연방정부 연구비로 많은 혜택을 보았다. 예를 들어 1950 NIH 규제는 연구비로 급여 주는 것을 허용했다. NIH 급여에 대해 점차 자율권을 보장했고 1950년에는 8%까지 인정하던 것을 1960년대에는 20%까지 인정했다.
      • 전쟁 이후 연구의 성장은 당시 여러 사회 정치적 환경에 크게 영향을 받지 않았다. 메카시즘이나 한국전쟁도 영향이 없었다.
      • 많은 문화적 힘이 연구에 영향을 미쳤지만, 개개인도 중요했다. 국가적 차원에서 James A Shannon 대단히 중요한 인물이었는데 1955년부터 1968년까지 NIH 확장을 주도한 사람이었다.
        • 외과의 Michael De Bakey, 신장전문의 Donald W Seldin, 내분비전문의 Robert Williams 등등.
      • 연구비 funding 증가는 개개 MS 대대적 변화를 불러왔다. 물리적인 시설 뿐만 아니라 faculty 졸업후 훈련 프로그램 등등도 크게 성장했다.
        • 1954년에는 80 MS 65개가 full-time faculty 고용하였다.
      • 물론, 시기에도 미국의 MS 여러 수준으로 갈렸다. 1963 MS 평균적으로 $5M 연구에 쓰고 있었으나, 범위는 $1.2M 에서 $16.1M까지 천차만별이었다.
        • 뛰어난 주립 학교들은 국가 기관으로서의 연구 책임을 다하면서 동시에 주를 위해서 어떻게 practitioner 키워낼 것인가를 고민하였다.
      • 이런 상황을 고려하더라도, 연방정부의 지출은 MS 상당히 균일하게 만든 사실이다. 1960년대에 가장 지원을 적게 받는 학교조차 상당한 수준의 scientific program 갖추고 있었다.
        • Harvard JH 겨룰 만한 수준의 학교는 없었지만, 가장 낮은 수준의 학교조차 연구를 촉진시키기 위해 노력하고 있었다.
      • 이처럼 확장되어가는 시기에 MS사이의 경쟁은 치열했는데, 특히 뛰어난 faculty 대한 학교간 경쟁 심했다. Job opportunity 빠르게 증가했고, 상승 장세(bull market) 같았다.
      • 출세지향적인 faculty들은 이러한 호황에 상당한 이득을 보았고, 중에서도 반유대주의의 종말과 더불어 유대인 medical scientist들이 제일이었다. 오히려 유대인들에게 많은 자리가 주어짐으로써 Mount Sinai 오려는 유대인이 점차 적어질 정도였다.
      • 자금, faculty, 자원 등에 대한 치열한 경쟁 속에서 어떤 학교도 Harvard 앞서나가지는 못했다. 전국의 full-time medical teacher 15% 어떤 형태로든 Harvard에서 training 받은 적이 있었다.
      • 연구에 대한 MS 지위는 (1)대학의 다른 학과와 미묘한 분위기 불러일으켰다. 한편으로는 이러한 MS 분위기가 'university spirit'으로 대표되어 대학과의 관계를 가깝게 해주었다.
      •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연구의 성장으로 인해 많은 MS들이 self-support 가능해짐으로써 (2)'독립성' 높아졌다. 대학의 다른 학과들의 입장에서는 비슷하게 공부하고 하는 일도 비슷한 (예컨대 생화학) 의대 교수들에 비해 적은 봉급을 받는 것이 매우 불쾌한 일이었다.
      • MS 성장하는 과정은 계획적이었던 것이 아니다. 대부분의 연구비는 개인적 흥미에 따라 연구하는 개별 연구자들에게 돌아갔고, MS 범기관적 목표가 있지 않았다.
        • "얼마만큼의 공간이 있던 결국은 채워질 것이다. 문제는 '뭘로' 채워질 것이냐는 것이다"
        • 대부분의 MS들은 돈을 주는 곳이라면 어디든 좋다고 했다.
      • 억제되지 않은 성장에 대해서 걱정하는 사람도 일부 있었지만, 대부분은 의학 연구의 성과 찬양했다.
        • Molecular biology 탄생, 즉각적 치료적 효용이 있는 연구들.
      • 시기 동안 기초 연구가 실질적인 도움이 되는 결과를 낸다는 실험 의학에 대한 확신이 정당성을 입증한 것과 같았다. Polio vaccine등등.
        • Jonas Salk Albert Sabin polio vaccine 이름이 붙었지만, vaccine John F Enders, Frederick Robbins, Thomas H Weller 개발한 조직 배양 기술에 의해 가능했던 것이었고, 이는 기초 연구의 공이었으며 노벨상을 받은 것도 이들 셋이었다.
      • 이런 성과에도 불구하고 만성 퇴행성 질환은 여전히 강력한 적군이었다. 1960년에 평균 기대수명은 70세를 넘었고, 1900 이후로 23세가 늘어난 것이지만, 45 이상 살던 사람들로 한정시키면 고작 4.5년의 수명이 늘어난 뿐이었다.
        • 암이나 심장 질환, 뇌졸중 등은 곧바로 치료되는 것이 아니었다.
      • 몇몇 소수의 앞서나가는 연구자들은 비현실적인 기대에 대한 경고를 하였다.
        • "9명이 달씩 임신한다고 아이가 나오는 것이 아니다"
      • 1960년대 대부분의 MS official들에게 연방 지원의 증가는 뜻밖에 하늘이 선물이었다. 연방 지원으로 인해서 의학 연구 성장과 MS 발전이 이뤄질 있었다.
      • 그렇지만 세대가 지난 MS ( multiversities) 전보다 그들이 취약해졌음을 깨닫게 되었다. 그들은 부유해졌고, 어떤 사람들은 이러한 지원이 지속될 것이라 보았다. 그러나 명의 지원자에게 의존하여 지원을 받는다는 것은 자율권 잃는다는 뜻과 같았다.

 

  • Changing Intellectual Directions
    • WWII이후 의학연구의 규모가 커진 만큼 intellectual direction 바꾸었다. 원자가 1940 박살났듯, 세포도 마찬가지였다. 전쟁 이후 의학연구는 점차 환원론적으로 되어왔고, subcellular, molecular level 내려갔다. 의학연구는 점차 생물학 연구의 일반적 특성이나 이론적 특성과 합해져 갔는데, 이에 따라 'Biomedical'이라는 새로운 단어가 등장했다.
    • Biomedical 연구의 변화의 밑바닥에는 생물학 전체를 변화시킨 'molecular revolution' 있었다. 모든 생물학적 현상은 기초적인 화학적, 물리학적 법칙에 의해 설명될 있다고 생각했다.
    • MS에서 이러한 변화는 scientific department에서 가장 두드러졌고, 해부학의 초점도 gross anatomy microscopic 조직학에서 subcellular element 형태와 기능으로 옮겨갔다.
      • Molecular genetics, Microbiology..
      • 전쟁 이전에, 이들 department 통틀어 'preclinical'이라고 불렸지만, 1950년대에 이르러서는 clinical medicine 구분하여 'basic science' department 불렸다.
    • NIH fund 지원을 받는 basic science department 점점 science dept 비슷해져갔다. 많은 수가 대학원과정을 확장시켰고, basic science faculty PhD 많아졌다.
    • Clinical dept에도 비슷한 과학적 성장이 있었다. 1950년대에 'observational approach' 유용성이 다했고, analytical / physiological approach 대세를 이루기 시작했다.
      • 임상 연구의 가장 핵심적 저널인 JCI(J of Clinical Investigation) 점차 응용생화학(applied biochemistry) 저널과 비슷해져갔다.
    • 전쟁 이후의 Clinical investigator들은 전에 비해서 bench research training 받았다. 일부는 medical training동안 PhD 같이 받았다.
    • 지식의 성장과 기술의 발전과 함께 clinical science 세분화되었고 subspecialty 늘어났다.
    • 1950년대와 1960년대의 clinical scientist scientifically 정교하였지만, observational era 공통점이 있었다. 환자에게 즉각적으로 관련된 문제에 집중하는 것과 임상가과 교수 모두로서 뛰어나고자 하는 욕심이다.
      • Daughaday 내분비학 연구에 뛰어났지만, 항상 임상 진료를 놓지 않았다.
    • Biomedical 연구의 성공에 문제 없지는 않았다. 기초와 임상 연구가 성숙해감에 따라 이상 기존의 것과 맞지 않게 것이 있는데, 바로 연구과학자가 physician으로서 교육받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키워질 것이라는 생각이었다.
    • 또한 기초 과학을 임상 교육과 연관시키려는 노력은 어느 때보다도 어려워졌다.
    • 이러한 문제에도 불구하고 당시는 biomedical research 이론적 결과와 임상의 결과가 가장 조화를 이룬 시기였. 때까지만 해도 연구와 교육과 진료의 조화는 온전했다. 그러나 각각의 힘이 모두 강해지고 있는 상황에서 균형은 아슬아슬한 것이었다.

 

  • The Decline of Academic Gentility
    • 연방 기금의 증가, 성공적인 Biomedical 연구들과, 대중의 칭찬 WWII이후에 뒤따른 MS '황금기' 보여주는 것들이었다. 그렇지만 시기에 academic life 질은 조금씩 바뀌고 있었는데, 이전 시대의 가족과 같은 분위기, 친밀함, 조직에 대한 충성도는 감소하고 있었다.
    • Faculty에게 있어 전쟁 이후 기간은 이전의 굴레를 벗어던질 있는 (1)기회였는데, 과와 학교에서 recruit 적극적으로 했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과들은 피라미드 구조를 이루고 있었지만 능력있는 faculty 숫자 늘어나면서 senior level faculty 숫자를 늘려나갔다. 이런 호황장(bull market)에서 수입이 증가했으며 그럼에 따라 faculty 퇴직 계획이나 보험 혜택, 대학의 자녀 학자금 지원등도 받을 있게 되었다.
    • Faculty opportunity 학교에 따라, 분야에 따라 달랐는데, 일반적으로 임명 승진은 경쟁이 (마취과 )에서 쉬웠고, 낮은 급의 학교에서 쉬웠다.
    • 비록 faculty 있는 기회의 폭은 늘어났지만, 여기에도 (2)문제 있었다. "soft" money (꾸준히 유지된다는 보장이 없는) 부터 지원을 받음에 따라서 medical scientist들은 스스로의 벌이를 해야 했으며, 마치 쳇바퀴를 구르고 있는 같은 기분을 느꼈다. 연구비 따야 하는 압박이 심했다.
    • 이러한 faculty 걱정에 더하여, application process 무척이나 복잡해져서 시간이 많이 들어갔다.
      • "보고서 준비하고 데이터 챙기느라 힘을 써서 다른 일을 수가 없다"
    • Faculty academic life 점점 정신없이 바쁘게 돌아갔다. 연구비를 따고 연구비에 대한 보고서를 내는 뿐만 아니라, 연구비를 따는 조차 점점 경쟁이 되어갔다.
    • 연구가 성장함에 따라서 조직이나 기관에 대한 충성도 떨어져만 갔다.
      • "점차 많은 faculty 외부 연구비에 의존하고 있다"
      • 대부분의 연구비는 '휴대성이 좋아서(portable)' faculty 다른 학교로 옮겨가기가 쉬웠다. "Cosmopolitan professor" (집을 떠나 지내는 시간이 faculty)라는 말도 생겼다.
    • Multiversity 시대에 dept간의 경쟁 더욱 심해졌는데, dept division들은 많은 공간, 많은 , 많은 기회를 따내기 위해서 경쟁했다. 기초의학 분야에서는 해부학이 지고 생화학이 떠오르고 있었다. 어떤 학과가 강력한지는 학교마다 달랐다.
    • 대부분의 MS에서 faculty size 빠르게 증가하고, 연구비를 쫓아다니고, biomedical research 경쟁이 심해지면서 faculty사이의 가까운 관계는 점차 소멸되어갔다.
      • 공동체의식이나 공동의 목표 따위는 거의 없었다.
    • 이런 MS에서의 'community' 사라짐에 따라 가장 피해를 것은 voluntary(part-time) clinical faculty였다. 한때는 가장 중요한 구성원 하나였던 이들이, 이제는 학교가 점차 자신들에게 신경을 쓰지 않는다고 느끼고 있었다.
    • 연구가 성장하면서 MS 학장들도 점차 자신들의 위치가 부담스러워졌다. WWII이전의 학장도 쉽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대부분 MS에서 part-time job이었다. 그러나 운영비가 커지고 새로운 조직적 행정적 일들이 많아졌다.
    • 추가적인 행정 지원을 받음에도 학장들의 의욕은 떨어졌고, 일부는 연구, 교육, 진료와 학장직을 동시에 수행하지 못하겠다고 했다.
      • "damage to my nervous and vascular system"
    • 학장직이 이렇게 부담스럽게 것은 직책 자체의 권위가 많이 떨어진 것에도 이유가 있었다. 학과들이 금전적으로 self-sufficient 해지면서 힘의 분배가 주임교수(department chairman) 중심으로 '원심성' 갖게 되었다.
    • 연구가 성장하면서 주임교수 역할도 바뀌었는데, 많은 자율권과 권력을 쥐었지만 행정 임무도 엄청나게 증가했다. 그들은 자신의 연구를 수행하기보다 다른 사람을 돕는 facilitator로서의 역할을 해야 했다.
    • 대부분 MS 많이 변했지만 가지만은 그대로였다. 바로 대부분의 faculty 공유하고 있던 "나는 university professor"라는 인식이다.
      • 다른 기관은 돈을 이용해서 faculty 유혹할 있었지만, academic medicine 하기로 사람들은 대개 돈을 보고 하는 것은 아니었다. 연봉은 오히려 가장 높은 학교에서 가장 낮은 수준이었다.
    • 오히려 faculty들에게 가장 중요했던 것은 연구 공간과 시설을 마련해주는 것이었다.
    • Faculty 이런 성향은 별개로, MS들의 commercialism 대한 경시는 다른 문제였다. MS industry 관계는 더욱 가까워졌지만, investigator 그들이 얻은 특허로 돈을 벌어서는 안된다라는 정책을 유지하고 있었다.
    • 간략히 정리하면, WWII 이후 MS 점차 그들 스스로를 공공의 이익을 위해서 일하는 공익 재단(public trust)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 Chapter 7. World War II and Medical Education
    • MS 오랫동안 일반인들에 대한 의료의 질을 담당해왔지만, WWII동안에는 군에서의 의료까지 맡게 되었다. 52개의 general hospital unit 20개의 evacuation hospital unit등에 필요한 인력은 거의 대부분 AMC에서 맡았다. 또한 당시에는 전쟁과 관련한 의학연구도 해야만 했다.
    • MS faculty만이 전쟁 시기에 필요한 인력을 지원했던 것은 아니다. 간호사나, 치과의사나, 수의사, 기술자 등등 많은 인력이 차출당했다. 하지만 중에서도 academic physician 리더십을 발휘했다.
    • WWII 의학교육에 있어서 어떤 커다란 변화를 일으킨 것은 아니다. 오히려, WWII 유산이라고 있는 것은 미국 의학교육의 질을 재확인 시켜 것이고, 의학 연구의 중요성을 증명한 것이며, 많은 의사와 medical care 대한 욕망을 돋운 것이었다.
      • 이후 맞닥뜨린 새로운 과제들을 위해서 답을 찾기 위해 점점 basic medical research 집중하게 되었다.
    • Mobilization for War
      • 진주만 폭격 이전에도 많은 MS 전쟁의 가능성을 대비하고 있었다. 전쟁 시작 이전에 이미 많은 MS들이 군병원(military hospital unit) 조직했다.
      • 전쟁 발발 직후 의학교육도 본격적으로 동원되었다. AAMC 기존의 4년제를 3년제로 전환할 것을 촉구하였다.
      • JHMS 동원이 전형적인 형태였는데, 1942 초반, Hopkins faculty 해외의 군병원을 담당하게 되었다. 학교의 연구 프로그램은 상당히 삭감되었고, 입학 요건은 낮아졌다. 여름 방학이 없어졌고, 주치의 수가 줄었으며 간호사와 paramedic 감소하였다.
      • 일반인들의 요구 역시 충족되어야 했기에, 국가적 의료 동원은 매우 복잡할 수밖에 없었다.
        • 의료의 지휘권(leadership) teaching center 양도되었고, 전쟁 동안의 병원과 medical camp 책임이 주어졌다.
      • MS faculty들에게 동원은 어려운 딜레마였다. 그들에게는 추가적인 일보다 짧아진 프로그램으로 인해 낮아져버린 교육적 수준이 문제였다.
        • 의학교육의 질은 하향세에 있었다.
      • 그러나 전쟁의 압박감은 엄청났기 때문에, 군과 정부의 압박 속에서 MS 많은 의사를 양산하라는 요구에 굴복할 밖에 없었다.
        • 결과로 전쟁시기에는 25000명의 의사(전쟁 이전 시기보다 5000 증가) 졸업시켰고 80% 곧바로 인턴에나 레지던트 후에 군으로 가게 되었다.
      • 의학교육을 하는 사람들이 치러야 하는 비용은 엄청났다. 해외를 담당하게 교수들은 2~3년간 불편하고 위험한 시설을 감내해야 했다.
      • 또한 미국에 남아 있는 교수들도 갑자기 감소한 인력으로 인한 고생을 하고 있었다.
        • 이러한 상황에서 전쟁과 관련한 연구를 제외한 나머지 분야의 의학 연구는 상당히 감소할 수밖에 없었다.
      • 학생들도 지구력을 시험받는 상황이었다. 입학 기준이 낮아지며 어리고 성숙하고 제대로 준비되지 않은 학생들이 들어왔다. 교육은 짧아졌지만, 커리큘럼의 내용은 줄지 않았고, 종종 정규수업시간을 넘어서까지 수업이 진행되었다. 학생들에게 깊게 사고를 하거나, 연구에 참여하거나 관심있는 분야를 심도있게 공부할 시간은 주어지지 않았다.
      • 미칠 듯하게 빨라진 커리큘럼은 학생들에게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는데, 전형적인 프로그램에서 1년간 방학은 대개 6월쯤에 있는 2주에 불과했다. 학교를 다니며 일을 하는 것이 사실상 힘들어져서 경제적 부담도 늘어났고, 미래에 대한 불안감도 상당했다.
      • Graduate medical education 측면의 손실도 컸는데, 우선 인턴이 9개월로 감소했다. 레지던트 기간도 절반으로 줄었고 research fellowship 끊겼으며 젊은 medical teacher / investigator 없었다.
        • "a regrettable wartime necessity"
      • 응급상황에서 벌어진 다른 조정들도 있었는데, 여성들에게 갑자기 많은 교육의 기회가 주어졌다. 또한 전쟁 시기에 인력 부족으로 인해서 "subinternship" 많아졌다.
      • 전쟁이 마무리 , 전쟁 이전의 상태로 돌아가는 것도 만만찮은 일이었는데, 다시 4년제로 돌아가야 했고, 새롭게 졸업하게 사람과 전쟁에서 돌아온 veteran들을 인턴십과 residency에서 조절하는 것도 해야 했다.
      • WWII 결과적으로 의학교육에 특별한 변화를 가져오지는 않았다. 오히려 교수들의 애국심이나 공공심(public-spiritedness) 물론이며, 기존 시스템의 효율성을 증명했다고 있었다.
        • 여성 의사를 많이 선발했던 것은 그냥 순간의 일이 되었다. 여성의 진보는 후에 civil rights feminist movement시기까지 미뤄졌다.
      • 산업과 다르게 전쟁시기 동안 MS 의한 의사의 양산은 그다지 많지 않았다.
        • MS 교과과정을 압축시키려 했던 시도는 "실패" 끝났다.
      • 의학교육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억지로 산업과의 잘못된 연관성만을 찾으려 했다는 비판이 일었다. 의학교육은 labor-intensive 뿐만 아니라, 오랜 시간을 필요로 하는 것이었다.
      • WWII동안에도 training 대한 비판이 많았다. 불만은 내부에서가 아니라 의대 교수들로부터 나왔는데, 그들이 보기에 많은 의사를 만들려고 필연적으로 교육의 질이 낮아질 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 이러한 정서는 의학교육자들 사이에 널리 퍼졌고, Executive Council of the AAMC, Council on Medical Education and Hospitals 등등에서 논의되었다.
        • "학문적 기준이 붕괴되고 있다는 위험신호가 곳곳에 있다"
          "the danger signal of a breakdown in scholastic standards is flying"
      • 이러한 맥락에서 WWII 가장 위대한 유산이라면 '기준' 낮춰보고자 하는 시도를 다시는 못하게 되었다는 사실일 것이다. 의사를 만드는 것은 폭탄을 제조하는 것과 동일할 없었다.
    • The War Against Disease
      • 역사적으로, 군인들의 가장 어려움은 질병이었다. 20세기까지만 해도 전쟁으로 죽는 사람보다 질병으로 죽는 군인이 많았다.
      • WWII 발발하면서 과학은 국가적 방어에서 중요한 요소가 되었다. 이전에도 매번 전쟁이 있을 때마다 과학에 신경을 쓰긴 했지만 이번만큼은 특별했다. 군대가 필요로 하는 가장 급한 것은 기술적인(technological nature) 것들이었다.
        • Medical science 전쟁에 기울이는 총력만큼이나 중요하다는 것이 명백해졌다.
      • Physical science 국가 안보에 중요한 만큼 medical science도 그러했다. Physiology 사례는 전형적이다. 사람의 몸이 환경의 변화에 따라 어떠한 생리적 변화를 겪는지 아는 것이 필수적이었다.
      • 생리학 뿐만 아니라 거의 모든 의학 분야가 전쟁기간의 연구에 기여했다. 많은 노력의 결과로 수많은 논문과 보고서가 나왔다.
      • 대부분의 연구는 군사적으로 가치가 있었을 뿐만 아니라 일반인들에게도 필요한 내용이었다. 인플루엔자에 대한  백신이라든가, Typhus, cholera치료, 말라리아 등등이 그랬다.
      • 질병과의 전쟁은 엄청난 수의 목숨을 살렸고, 고통을 완화해주었고, 상처가 낫게 해주었다.
      • 하지만 질병과의 전쟁에도 문제는 있었다. 즉각적인 군사적 문제들을 해결해야 한다는 부담감이 엄청났다. 기본적으로 호기심에 의한 연구는 거의 없었다. 또한 training program 줄어들면서 젊은 의과학자들이 점차 없어져 갔으므로 전쟁 부족(postwar shortage) 필연적이었다.
      • 그럼에도 WWII동안의 medical science 해야 일을 해냈다는 측면에서는 엄청난 성공이었다. 질병과의 전쟁의 승리는 전쟁 NIH 확장이 있기 전에 의학이 미성숙했다는 오해를 해소하는데 결정적이었다. 이미 미국의 의학 연구는 세계 최고 수준이었다.
    • The Apotheosis of Medical Optimism
      • 시간은 연속적이라 하지만, WWII이후의 미국은 전혀 다른 사회가 되었다.
        • 국내적으로 전쟁은 크고 활발한 연방 정부를 받아들이게 되었다.
      • 의학도 새로운 세계를 맞이하였는데, 전쟁 이후에 financing 새로운 방법, 그리고 의료전달체계에 대한 토론이 이어졌다. 의료에 대한 수요는 점점 늘어났고, Medical Care 대한 권리는 모든 시민의 기본권으로 여겨졌다.
      • 의학이 마주친 과학적 도전 역시 바뀌고 있었다. 미국의 기대수명은 1900년에 47세에서 1945년에 65세로 늘어났고, 사람들은 다른 질병(심혈관 질환, 뇌졸중, 신부전..)으로 사망하고 있었다.
      • 그러나 대중들은 이러한 문제를 그다지 느끼지 못하고 있었고 '질병과의 전쟁'에서 얻은 경험은 의학 연구를 통해 이들 질병도 점령할 있을 것이라는 믿음을 갖게 하였다.
        • 루즈벨트의 science advisor Vannevar Bush 기초 의학 연구에 정부가 많은 지원을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 Bush 이러한 의견은 정부 관료, 과학계, 일반인들 사이에서 공감을 얻었다. 당시 의학 연구의 성과는 눈부셨고, 충분한 돈만 지원되면 만성질환도 극복되지 못할 이유가 무엇인가? 라는 생각이 다수였다.
      • AMC에게는 이러한 낙관주의는 양날의 검이었다. 연방정부의 지원을 받기에는 좋았지만, 이러한 기대가 충족되지 않았을 때의 환멸, 후폭풍도 엄청날 것이었다.
        • 연구에 대해서 어떤 사람은 "2,000,000,000 달러 맨하탄 프로젝트는 그냥 돈을 가져다 버린 것이다"
        • 정책 지침(guiding policy) 필요한 것은 humility(겸손) statemanship(정치가의 능력)이었다. 겸손이란, 건강에 영향을 주는 다양한 사회적, 행동적 요소를 인정하는 것이고, statemanship이란 즉각적 실질적 이득의 가능성을 객관적으로 바라보면서도 적절한 지원을 하는 것이었다.







  • Chapter 6. Academic Medical Centers and the Public
    • 의과대학과 부속병원은 서로 분리된 개체였지만, 둘의 운영은 거의 하나처럼 이루어졌고, 각각의 성공은 둘이 얼마나 협조를 이루고 있느냐에 달려 있었다. WWII이후 이것은 "academic medical centers"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된다.
    • 완전히 동일한 center 없었지만, 일반적으로 의과대학(medical school) 부속병원과(university-owned or controlled hospital), 협력병원(affiliated specialty hospitals or institute)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이들은 무척 가까웠기에 대중들은 종종 의과대학과 부속병원의 구분을 하지 못했고, academic medical center라는 명칭이 medical school이나 teaching hospital보다 자주 사용되게 되었다.
    • AMC 구성은, 대학이 그러했듯, 그곳에서 배우고 공부한 사람들 뿐만 아니라 다른 여러 사람들이 있었다. 거대한 사회의 일부로서 교육이나 연구 외에 항상 넓은 측면의 역할이 기대되었다. Medical faculty 상당한 양의 charity care 하였고, AMC medical care 질을 높이거나 일반 대중(people) 건강을 증진하는 역할도 하였다.
      • 요약하자면, AMC parent university처럼 공리주의적 의무(duty of utility) 받아들이고 사회에 대한 봉사(service to the society) 하게 것이다.
    • Town and Gown
      • WWI이후, medical faculty 진료중인 의사의 전문가적 성장(professional growth of physicians in practice) 높은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의학교육의 정신(ethos) self-learning 강조되었다.
      • Practitioner 대한 교육 필요성에 대한 논의는 학부 졸업생, 그리고 GME 문제가 거셌기 때문이다.
        • 1920 전에는 부적절한 훈련을 받은 의사들에 대한 remedy 주된 문제였다.
        • 1920 이후에는 continuing medical education graduate medical education 종종 혼란을 일으켰다.
        • 1930년대에는 교육받은 physician들에게 최신의 지식을 가르쳐 주는 것이 중요해졌다.
      • Continuing medical education(CME) 학생에 대한 교육이나 house officer 대한 교육만큼 우선순위에 있지 않았는데, 왜냐하면 많은 (state) county medical society에서 그러한 프로그램을 지원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 대부분의 CME 정해진 형식이 없었다.
      • 바쁜 practitioner들이 medical center 오기가 힘든 사정을 고려해서, 일부 학교들은 community hospital 등으로 교육을 나가기도 하였다.
      • Medical faculty 어려운 케이스의 환자를 도와줌으로써 practitioner 지원하기도 하였다. (전화 또는 편지로)
      • 환자의 Referral AMC 역할에 있어서 크진 않았지만 중요한 부분이었다.
        • 교수들은 가장 어려운 케이스들을 보기 위하여 항상 mentally sharp하게 유지될 있었고, community practitioner 혼자 감당하기 어려운 환자를 의뢰함으로써 도움을 받았다.
      • 이러한 관계는 community practitioner(town) full-time faculty(gown) 서로간에 이익이었다.
        • Private practitioner Medical faculty 연구를 직접 보여질 있는 것으로 만들어줌으로써 대중들이 꾸준히 의학교육과 연구에 대한 지원을 하는 동기를 유발해주었다.
      • 그럼에도 practitioner들은 혹여나 AMC 그들의 환자를 뺏어갈 것을 두려워했기 때문에 town gown 관계는 항상 부드러웠던 만은 아니다.
      • 하지만 WWII이전의 AMC practitioner들에게 전혀 위협이 되지 않았다. 부속병원의 수도 작았고 full time faculty 수도 많지 않았다.
      • 의과대학과 부속병원의 기록을 살펴보면 종종 그렇지 않은 경우도 발견되진 하지만 이런 것들은 예외적인 경우였고, private practitioner 업신여기는 faculty 오히려 자기 분야 지식이 일천한 경우가 많았다.
        • 많은 환자를 보는 것은 AMC 교육적 자선적(charitable) mission 과는 거리가 멀었다.
      • 따라서 town gown 관계는 일반적으로 매우 좋았고, 이러한 끈끈한 관계의 힘은 CME medical consultation 제공함으로써, 그리고 환자에 대한 경쟁을 피함으로써 유지될 있었다.
      • 이러한 협동으로 인해 의료전달체계는 어떤 형식적인 coordination이나 planning없이도 매우 효율적으로 돌아갔다. AMC referral source 역할을 함으로써 의료전달체계의 매우 일부분을 담당하면서도 전체적으로 원활하게 작동할 있는 엔진이 되었다.
    • The Care of the Poor
      • WWI이후 부속병원이 의과대학과 협업하기 시작하면서, 그들의 오래된 자선 임무(charitable mission) 앞으로 등장하였다. AMC medical public 뿐만 아니라 general public까지 포함한 모두를 위한 것이었다.
      • Charity care 양은 AMC 따라 달랐다.
      • 국가적 medical care system 측면에서 AMC 담당하는 charity care 상당한 부분이었다. 금전적으로 환산해도 상당한 양이었으며, 점차 AMC들은 국내의 philanthropic institution 가장 부분이 되었다.
      • 그러나 이렇게 많은 양의 charity care 제공하는 것은 쉽지 않았다. 부속병원은 대개 local government로부터 reimburse 받았으나, 양은 원가에도 미치지 못했다. AMC service-maximizer이지, profit-maximizer 아니었다.
      • 병원마다 어떤 병동 환자(ward patient, 무료 진료 환자) 받을 것인가에 대한 세세한 기준은 달랐지만 원칙은 같았다. 부속병원들은 가능한 지역 주민들에게 무료 진료를 제공하였다. 이를 위해 환자에게 수입이 얼마인지, 수입의 출처가 어디인지를 확인하였다. 또한 질병의 종류와 심각성도 반영하였다.
      • Ward patient 괜찮은 수준의 medical care 받았는데, 시기의 AMC 의사 입장의 'quality' 추구하였으며, 그것은 소비자 입장에서의 quality와는 달랐다.
      • 모든 환자들은 약간의 불편함 수치(indignity) 감수해야 했는데, 대부분은 치료되는데 있어서 크게 관련이 있는 것들은 아니었다. 그러나 문제는 Ward patient 감당해야 하는 indignity private patient 그것보다 훨씬 컸다는 것이다.
        • 예컨대 ward patient 시끄럽고 복잡한 곳에서 대기해야 한다던가, 프라이버시 보장이 안되거나, 소란스럽거나, 냄새가 나는 곳에 둔다거나, 가끔은 무례하게 대하는 직원들도 있었다.
        • 심지어 Charity private patient 공간에 섞어 놓는 것조차 부적절하다고 판단했다.
      • 노골적인 인종차별도 드물지 않았는데, 특히 남쪽, 국경 지방에서 African-American이나 흑인에 대한 차별이 심했다.
      • Charity care 제공은 많은 교육 리더에게 대학에서 medical school 역할이 무엇인지 다시 한번 생각해 있는 기회가 되었다. 가지(교육-연구-공익사업(Utility)) 역할 항상 가장 논쟁이 것은 공익사업이었다.
      • Abraham Flexner 문제에 대해서 가장 많이 고민한 사람 하나였다. Flexner 공익사업의 딜레마에 대해서 "대학은, 적어도 조금은, 사람들의 삶이나 생각의 변화에 영향을 주기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다" 라고 하였으며 medical professor 환자를 보는 것은 그러한 일이 교육과 연구에 도움이 되는 범위 내에서 이뤄져야 하며, 환자를 보기 위해 환자를 보는 professor들은 대학의 책임을 다하는 것이 아니라고 하였다.
      • 이러한 맥락에서 charity care 제공은 AMC 복잡한 문제를 던져주었다. 교육과 연구에 도움이 되는 만큼만 환자를 본다...라는 이러한 말은 말은 쉬워도 실행하기는 어려웠다. Charity care 대한 요구는 상당했고, private patient 수도 지속적으로 증가하고 있엇다.
      • 그렇지만 대부분의 AMC 대학의 역할을 수행하고 있었다. 하나는 경제적인 것이었고(의과대학은 이상 진료에서 얻는 수입에 의존하지 않았다), 다른 하나는 학문적 이상을 추구하는 가치였고, 마지막으로 service 비젼은 전체 인구가 아니라 개개인에 맞춰져 있었다.
    • Medical Education and the Nation's Health
      • 미국인들이 WWI이전에 가졌던 불안감 적어도 하나만은 WWII 발발 당시에는 없었다. 바로 '의사의 ' 문제이다. 미국 의과대학들은 이미 세계 최고 수준이었다.
      • Medical science 지속적으로 진보를 이루고 있었다. 감염병의 원인과 관리법을 알게 것이다.
      • 미국 의사들은 새로운 의학지식을 환자 관리에 적용시키기 시작했고, 의사들은 공공의 이익을 위하여 일하는 것으로 인식되었다.
      • Medical care 국가의 재정적 건강(fiscal health) 위해서도 중요하다는 공감대가 생겼고, 질병의 경제적 영향에 대한 연구가 많이 이뤄졌다.
      • 이러한 국가의 medical care 중심에는 AMC 있었다. "ultimately determines the standards of medical care"
      • Medical care 질은 그것을 수행하는 사람의 능력을 넘을 없다는 것도 사실로 받아들여졌다. medical practice 있어서 의학교육의 질의 중요성이 강조된 것이다. 그러나 당시 미국 문화의 technocratic ideal 측면으로서, medical practice 국가의 건강을 지키는 핵심으로 간주되었다.
        • 질병의 발생률이 높았지만, 이것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많은 의사와 많은 진료가 필요하다고 생각했지 영양이나, 주거시설이나, 위생 등의 수준을 높여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앗다.
      • 이러한 생각의 전형적인 모습이 Final Report of the Commission on Medical Education(1932) 나오는데,
        "The greatest health problem of the country is that of making modern medical services available to the entire population"
        이라고 하였다. 미국은 많은 medicine 필요로 했고, 거기에 드는 재정적 부담은 당연히 부담해야 비용이라 여겼다.
      • 건강 뿐만 아니라 경제적 생산성에도 필수적인 것으로 여겨짐에 따라 의학교육에 대한 기대는 높아져갔다(heady).
        • 그러나 이러한 기대는 실현 가능성이 있는 것일까? 정말로 Medical care 질이 높아지면 국가의 경제적 경쟁력이 높아질까? 당시에는 이러한 질문을 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고, 대다수가 많은 medicine 원하고 있었다.






  • Chapter 5. Teaching Hospitals
    • Modern hospital 성장하면서, 모든 종류의 교육이 거의 모든 기관에서 이뤄졌다. 심지어는 가장 작은 병원에서도 컨퍼런스, 회진, staff meeting 등등이 이뤄졌다. 많은 작은 병원들도 internship 제공하였지만, "부속병원(teaching hospital)이라는 명칭은 일부 선택된 기관에만 주어지는 것이었다.
    • 부속 병원이 균일하진 않았다. 다수는 private(voluntary)였고, 일부는 publicly owned였다. 일부 MS(주로 state school) 그들이 따로 부속병원을 소유하고 있었다. 일부 leading medical educator들은 medical school 각각 하나의 병원을 가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 WWI이후, 부속병원은 그들의 의과대학과 동일한 학문적 이상을 공유했으며, 기관이 교육, 연구, 진료에서 협동적으로 일했다. MS에서 병원의 ward 반드시 필요한 것이었고, 부속병원은 그들이 21세기에 이룬 진료의 성과는 의학교육에의 참여로부터 나온 것이라는 것을 이해했다.
    • 시기의 부속병원은 거의 이상적인 laboratory 갖추고 있었지만, 이에 따르는 비용도 있었다. 부속병원이 nonteaching hospital만큼 효율적이지 않다는 것이 드러났고, 가난한 환자들이 주로 교육에 활용된다는 사실은 의학교육이 나은 진료에 다다르게 한다는 일반적인 믿음에 반하는 것이었다. 사회적 필요는 가장 경험 많은 의사에게 진료받고자 하는 개개 환자의 필요와 상반되었다.

 

  • Joining the University
    • 전쟁 사이의 기간에 미국 의학교육을 구성하고 있던 여러 힘들이 합해지고 있었다. MS medical care delivery system 속으로 들어간 것처럼, 부속병원은 대학 속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 WWI이후, 부속병원은 전쟁 전에는 강력히 거부했던 교육과 연구를 오히려 강력히 받아들이고 있었다. 부속병원이 되면 학생과 house staff 교육에 많은 기회를 얻을 있었던 것이다. 말뿐이 아니라 실제로 부속병원은 그들의 학문적 역할을 진지하게 수용했다.
    • 교육과 연구의 이러한 노력을 통해 부속병원은 이득을 보았다. 우선 인턴과 레지던트 모집이 수월했다.
    • WWI동안 부속병원과 의과대학간의 연합을 지원해준 많은 세력들이 있었는데, WWI이후에는 임상연구의 특징 - patient-centered nature - 가장 강력한 힘이었다.
    • 대학의 확장된 부분으로서 부속병원은 affiliated medical school 모습에도 영향을 주었다. 가장 중요한 역할은 faculty recruitment retention이었다.
    • 부속병원은 MS 포함한 대학의 다른 부분에서는 경험하지 못했던 문제에 마주쳣다. 부속병원은 medical professor student이외에도 무수한 다른 구성원들이 있었다. Patient, private physician, nurses, administrators, trustees…
    • 이러한 도전에도 불구하고 부속병원의 운영은 상대적으로 간단했다. 부속병원은 19세기보다는 크고 복잡한 조직이었지만 여전히 소수의 행정직원과 관료로 운영가능했다.
      • 후원자에게 얼마나 모금할 있느냐에 따라 부속병원의 확장 여부가 결정되었다.
    • 시기동안 많은 부속병원과 의대는 사실상 하나의 몸으로 운영되었다.
      • 1938 병원이 상당한 빚을 지게 되었을 MS 병원의 일부 비용을 지불했으며, 반대로 병원도 학교의 교육 연구 비용을 지원했다.
    • MS 부속병원이 동일한 교육, 연구, 진료의 목적으로 움직이면서 점차 지리적으로 가까이 위치하도록 설립되었고 하나의 통합된 조직이 되어갔다.
    • 그러나 의과대학과 부속병원의 완벽한 통합은 결코 이뤄지지 않았다. 조직 사이의 긴장은 지속되었다. 의과대학은 환자 관리보다는 교육이나 연구를 지향했다.
    • 그렇지만 시기의 부속병원이 교육 했던 헌신을 과소평가할 수는 없다.
      • Prebyterian Hospital "진료는 academic activity 같이 가야 하며, 결코 단독으로서 목적일 없다" 라고 하였다.
    • 그럼에도 부속병원이 과연 학문적 가치를 추구한 것인가에 대한 의구심이 여전히 남는다면, 그들이 '성공' 어떻게 정의했는가를 보면 의심을 씻을 있을 것이다. 그들이 말하는 성공은 많은 환자를 보는 것도 아니고, 많은 돈을 버는 것은 더더욱 아니고 clinical service 질을 높이고 연구와 교육에 크게 기여하는 것이었다.
  • The Presence of Time
    • 일견 임상 교육이 병동에서 이뤄지는 것은 당연해 보인다. 의학교육은 환자를 따라야 하고, 병원은 acute care 중심이었다.
    • 입원환자에 대한 교육은 부속병원이 제공할 있는 '규모의 효율성' 기인한 면도 있다. 중요한 임상 소견을 가진 환자가 있을 많은 학생과 house officer들이 있었다.
    • 입원 환자만이 의학교육이 추구하는 목적에 맞는 충분한 시간을 제공할 있다는 역시 가장 중요한 사실이다. 문제를 해결하는 능력이나 불확실성 속에서 사려깊게 사고하는 능력은 환자를 자세히 있는 충분한 시간이 있을 때만 가능한 것이었다.
    • 의학교육자들은 teaching ward 교육적 환경을 조성하기 위하여 노력했다. 일부 병원은 입원환자의 수를 제한하여 학생, house officer, faculty 환자를 있는 충분한 시간을 제공하고자 했다.
    • 재원 기간이 길었던 것은 입원 병동에서 교육적 환경의 풍요로움(richness) 뜻했고, WWI에서 WWII 가면서 평균 재원기간이 감소하긴 하였지만 여전히 충분히 시간이었다.
    • 입원한 환자들의 상태는 종종 무척 심각했고, 일부는 거의 생명의 위태로울 정도였지만 의학교육자들은 오히려 이것을 좋은 교육적 이점으로 보았다.
      • 예컨대 ketoacidosis 보지 못했다면 사람은 diabetes 제대로 배운 것이 아니라고 여겼다.
    • 입원은 대개 무계획적으로 이뤄졌기 때문에, 학생이나 house officer 어떤 환자를 보게 것인지는 순전히 운에 맡겨진 것이었다.
    • 학생과 house officer 상당히 바쁘긴 했지만, 보통 생각하는 것처럼 정도로 바쁘진 않았다. 실제로, 후와 비교했을 당시의 생활은 상당히 여유롭다고 수도 있었다.
      • 8시에 일어나 9시에 밥을 먹는다거나, 수술이 830~9 정도에 잡힌다거나. 일부 house officer들은 6 하면 집에 가기 바쁘다거나.
    • 부속병원의 입원 병동이 훌륭한 educational laboratory임은 분명했지만, 의학교육의 모든 목적을 여기서 달성할 수는 없었다. 입원 환자는 office practice 대부분을 차지하는 외래 환자와는 달랐다.
    • 입원 환자를 이용한 교육은 하나의 제한점이 있었는데, 환자의 모든 측면에 대한 관리를 배우기에 부족했던 것이다. 병원에서 환자는 집이나 가족, 친구와 떨어져서 상당히 무기력한 상태였고 이는 매우 특이한 상태라고 수도 있다.
      • 환자를 어떠한 사물(object) 봄으로서 'depersonalizing' 대한 우려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 교육적 한계점을 깨달으면서 의학교육자들은 다른 임상 상황에서의 교육을 시도했다.
      • Preceptorship program, Ambulatory clinics of the teaching hospital..
    • 외래환자 기반 교육의 가능성은 많이 인정되었지만, 실제로 행해진 경우는 거의 없었다. 외래에는 너무 환자가 많았고, facility 너무 붐볐다.
      • "thoroughly unsatisfactory"
    • 하지만 당시 의과대학들은 inpatient service 확고한 ambulatory work 부실하다고 해서 그다지 걱정하지 않았다.
      • 외래는 입원 환자가 지속적으로 채워질 있도록 공급해주는 것이 주된 목적이었다.
    • 외래 진료 상황에서 교육이 불만을 없애는 것이 불가능한 만은 아니었다. 일부 실험적 연구에서 clinic teaching 잘만 이뤄지면 상당한 가치를 가질 있음이 밝혀졌다.
      • 예를 들면 appointment system 갖춰서 학생이나 house officer 환자에 대해 충분한 시간을 가지고 있게 만든다든가.
    • 이와 같은 실험이 성공할 있었던 것은 '충분한 시간' 제공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은 대부분의 외래 상황에 맞지 않는 것이었다. 항상 북새통이었던 외래는 관리감독이 거의 불가능했고, 교육도 거의 불가능했다.
    • 따라서 좋은 교육을 위해서는 외래 환자 뿐만 아니라 입원 환자의 수도 줄여야 했다.
    • 성공의 기준이 ''보다 ''이었던 당시에는 적은 숫자의 환자를 보는 것은 병원이나 의과대학에게 감당할 만한 tradeoff 였다. 의학교육은 특성상 병원이 최다 환자를 최소 시간에 보는 식의 효율성을 갖출 것을 기대하지 않았다.
  • The Ward Service
    • Clinical learning 있어서 충분한 시간이 필수적인 만큼, 다양한 환자를 보는 것도 중요했다. 그러나 모든 환자가 교육에 활용되었던 것은 아니다.
    • WWI이후 부속병원은 가난하지 않은 환자, private(스스로 비용을 지불하는) 환자, semiprivate(보험에 가입된, insured) 환자들도 치료하게 되었다. Private pt private physician 전적으로 보는(belonging) 것으로 간주되었고, 학생이나 house officer 끼어들 없엇다.
    • 의학교육을 위해서는 병동이 필수적이었다.
      • "The MGH's soul lies in its teaching wards"
    • 교육 프로그램으로서 활용되는 것은 병동 환자에 대한 관리 측면에 있어서도 도움이 되는 일이었다.
    • 그렇지만 선택권을 가진 private pt 부속병원의 교육 목적으로 활용되기를 거부하였다. 환자 개인의 이익과 사회적 이익이 충돌한 것이다.





  • Chapter 4. The Rise of Graduate Medical Education
    • 20세기 초반에, 대부분의 MS 의학교육의 질을 높이는 것에 있었다. 당시에는 MS의 4년 과정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으며 심지어 AF 1910 보고서에도 인턴이나 이를 비롯한 다른 hospital training 대한 내용은 없었다.
    • 이러한 관점은 WWI이후 빠르게 변했는데, 의학지식, 기술, 진료가 급격히 변하였기 때문이다.
      • "internship" "residency"
      • "미국의 의료는 졸업 후에 의사로서 길러진 mental habit 의해 영향을 받는다"
    • Graduate medical education(GME) 시스템이 만들어질 당시 JHMS 다시 핵심적 역할을 하게 된다.
      • GME 병원 중심, 그리고 professionally regulated(전문직에 의하여 관리되는) 되었고 GME에서 MS 그들의 독점적 지위를 잃게 된다.
    • The Creation of Internship and Residency
      • 1870 이후로, 미국 MS들은 의학지식의 증가에 맞춘 수업시간의 증가라는 압박을 받게 된다.
      • WWI 무렵의 지식은 4 과정으로도 가르치지 못할 만큼의 양이었다.
      • 그렇다면 의사로서의 교육을 완성하기 위한 최선의 방법은 무엇일까? 일부 의학교육자들은 MS 5학년이 도입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대부분은 병원에서의 졸업후교육(graduate training) 필요하다는 것에 의견을 모았다.
      • 졸업후교육의 기회는 여태껏 오래간 있어왔다. 그러나 position 많지 않았고, 서로 다른 기관에서 서로 다른 이름으로 불렸다(intern, extern, house pupil, house physician, resident, resident physician..)
      • WWI이전 병원은 교육적 관점에서 부족한 점이 많았다. House officer 하는 일은 교육적인 가치는 거의 없는 것들 뿐이었다.
      • WWI동인 병원의 이러한 시스템은 인턴제로 바뀌었는데, 당시 인턴십은 MS에서 졸업한 이후 의사로서의 general education 마무리 짓기 위한 병원 기반의 과정으로서 표준화되었다.
      • 인턴십은 병원과 대학의 전통을 모두 반영하였다. 병원 기반의 프로그램으로서 19세기의 것과 닮아있긴 했지만, 결과적으로는 기존의 교육 프로그램 안에 들어간 것이다.
      • 가지 19세기와 달라진 점이 있었는데 다음과 같아.
        • 첫째로, conference, seminar, 회진, 강의 등의 교육적 시간들이 있었다.
        • 둘째로, 병원이 학교와 연계(affiliate)됨에 따라 배울 기회 뿐만 아니라 가르칠 기회가 생겼다.
        • 셋째로, 대학부속병원(teaching hospital) 인턴십은 임상 연구에 참여할 있는 기회이기도 했다.
        • 넷째로, 일부 우수한 프로그램에서는 인턴들이 환자를 자세히 있었다.
      • 의과대학(Medical school) 병원은 함께 인턴십을 발전시켰다.
        • 인턴십 자리도 빠르게 늘어났으며, 부속병원의 프로그램이 가장 좋긴 했지만, community hospital까지 퍼졌기 때문에 모두가 인턴십의 기회를 가질 있었다.
      • 당시 인턴십은 가지 종류가 있었다.
        • "rotating" "straight" "mixed"
      • 인턴십 프로그램은 길이가 다양해서 대부분은 1년이었지만 3년까지 하는 곳도 있었다.
      • WWI이후 수년간 의학교육자들은 인턴십이 학부교육의 마지막 단계인지, 졸업후교육의 단계인지를 놓고 논쟁을 벌였다.
      • 인턴십의 교육적 이상은 실현되지 않았는데, 부속병원에서도 환자에 대한 service 기능이 교육기능을 압도하고는 했다. 뉴욕의 Mount Sinai Hospital에서는 인턴들이 적절한 교육을 받고 있지 못하다며 불평했다. 인턴십 중에서도 최악은 100 병상도 되지 않는 small community hospital이었다.
      • 비록 인턴십이 질적으로 차이는 컸지만, GP 키워내는데 있어서는 제법 효과적이었다. 그러나 specialty 하기 위해서는 다른 과정이 필요했고 1920 이에 대한 표준화된 시스템이 존재하지 않았다.
      • 일부는 부속병원의 전공과 외래 진료실에서 일하면서 specialist 되기도 했고, 일부는 이미 specialist 사람 밑에서 일하기도 하였다. 외국으로 유학을 가는 경우도 있었고, formal course work specialist 되는흔한 방법이었다.
      • 이렇게 온갖 것이 혼합된 상황에서 혼란이 있었던 것은 당연했다. 수많은 pathway 서로 구분짓는 것도 어려웠고 Graduate medical education, Continuing medical education, Postgraduate medical education 사이에도 혼란이 많았다.
      • WWI이후 의학교육자들이 맞닥뜨린 도전과제는 specialty training 있어서 균일성이 없고, 기준도 낮다는 것이었다. 많은 specialist '자칭' specialist였다.
      • Graduate MS 무척 여러 종류였다. 일부는 매우 뛰어난 academic institution이었으나 대부분의 graduate MS 상당히 상업적이고, 돈을 벌기 위한 목적으로 설립된 기관이었다. 1920년대의 GME 20세기 시작 무렵의 학부교육과 비슷한 상태였다.
      • 의학교육자들이 specialization 관심을 갖기 시작하며, 단기간의 상업적 코스를 없애고 specialty training 진정한 교육 프로그램으로 만들기 위해 노력했다. 그러나 이것을 이루기 위한 방법에 대해 의견이 갈렸는데 , 일부는 MS 구성된 프로그램을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 그러나 1900년대에 다른 모델이 등장했는데, 바로 residency이다.
      • JHMS 1889 문을 열면서 Modern residency 미국에 처음 등장했다. Resident라는 이름은 인턴십을 마치고 병원에서 특정 분야 training 받기 위한 의사를 칭하는 말이었다.
      • 독일식 모델터럼, JHMS Residency mature scholar 위한 학문적 경험을 위해 만들어진 것이었다. "who wishes to do scientific hospital work"
      • WWI동안, JHMS 학부 교육이 그랬던 것처럼, Hopkins R 시스템은 다른 학교에도 퍼지기 시작했다.
      • R 시스템이 퍼지면서, JH scholarship(학문) inquiry(연구) 대한 원래의 명성을 되찾게 되었다.
      • 임상을 연구의 결합이 강조되면서, WWII이전의 R 가지 역할을 해야 했다. 우선 임상 specialty 대한 훈련을 받아야 했지만, 더불어서 clinical investigator로서의 커리어를 쌓아가는 과정이기도 했다.
        • Clinical science clinical full time system residency 서로서로 hand-in-hand 발전해나갔다.
      • 금방 대부분의 의대 졸업생들이 있게 인턴십과 다르게, R 일부 elite들만 있었다. Pyramid 같았고, 연차가 올라가면서 유급하는 비율도 늘어났다.
      • 1920년대에 R 프로그램은 점차 널리 퍼졌다. 1925 Council on Medical Education and Hospitals (of AMA) R 프로그램이 있는 29 학교의 리스트를 발표했다.
      • 1930년대에 R specialization 위한 코스로서 점점 선호되기 시작했다. 또한 대학과 부속병원에게도 이익이 있었는데 우선 병원은 양질의 medical worker 구할 있었고 의대는 적은 비용으로 advanced clinical training 관여할 있었다.
      • R 점차 늘어나며 기존의 clinical specialty 지원하던 사람은 줄어갔다.
      • 1930년대에 미국의 specialty training 표준화되었고 체계화되었다. 대부분의 일이 Council on Medical Education and Hospitals specialty board 의해서 이뤄졌으며 여러 specialty society 생겼다.
      • 1930년대에 specialty board 법령(decree) 의해서, 허가받은 병원의 "long residency" specialization 유일한 합법적 루트가 되었다. R 기간은 분야에 따라 달랐지만, 3 이하는 허용되지 않았다.
      • 학문적 직업적 리더들이 높아진 기준을 찾으면서, 가장 중요한 목표는 specialization 되는 짧은 과정들을 없애는 것이 되었다.
        • GME 개혁은 많은 분야의 도덕개혁운동(moral crusade) 동반했다.
      • MS에게 GME 등장은 변화였다. WWII 무렵 MS 교육 명성은 학부교육만큼이나 GME 교육에 달려 있었다.
      • MS GME intellectual guidance 하였지만, GME 통제(control)했던 것은 아니다. 일부 R 대부분의 인턴십은 부속병원이 아닌 병원에서 이뤄졌다. 게다가 가르치는 장소도 학교가 아니라 병원이었다.
      • WWII 무렵 GME control regulation profession 의해서, 복잡한 regulatory agency 통하여 이뤄졌고 대학이나 AAMC 같은 대리 조직(MS faculty 엄청난 영향력을 가지고 있는) 의해서 이뤄지지 않았다.
      • GME 권한이 대학에서 profession으로 옮겨간 것은 억지로 그렇게 것이라기보다는 자연스럽게 이뤄진 것이다. WWI이후 profession 대부분은(CME American Hospital Association 포함) 인턴십을 대학이 관리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 비슷하게, 많은 조직에서 R 대학의 책임이라고 생각했다.
      • 그러나 대부분의 Medical school leader 이의를 제기했다. 그들은 부속병원을 위해 양질의 I 또는 R 프로그램을 만들고자 했지만, 나중에 다루기 까다로워질 것을 걱정하여 그들의 프로그램을 모든 MS graduate에게까지 확장시킬 것은 반대했다. 또한 community hospital 프로그램을 책임지기도 꺼려했다. 자연스럽게 GME 권한은 병원에서 profession으로 옮겨갔다.
    • From Supervision to Responsibility
      • Clinical clerkship동안 겪게 되는 대부분의 임상 경험동안 의대 학생들은 가까이에서 감독을 받게 된다.
        • 기간은 "opportunity to develop independence"이며 책임이 간주(assumption of responsibility)된다.
      • 환자 관리에 대한 책임의식은 자동으로 축적되는 것이 아니다. 힘든 과정을 거치는 동안 길러지고 얻어지는 것이다.
      • 인턴(house officer)에게 책임감이 간주된다고 하여 관리 감독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주치의와 주기적으로 만나야 했고, 책임의 정도는 점차 커진다.
        • 레지던트-인턴, 시니어R-주니어R, 치프R-시니어R 등과 같이 항상 자신을 봐주는 자기보다 단계 사람이 있었다.
      • 인턴이 관리감독을 받은 것은 맞지만, 학생에 비하면 책임감은 훨씬 것이었다.
      • 설명할 있는 근거는 단편적이지만, 이러한 시스템은 physician education 측면에서나 patient safety 측면에서나 어쨌거나 돌아가는 하였다.
        • 종종 실수가 있긴 했지만, 교육을 받고 마친 physician 하는 실수 정도였다.
      • 책임감(assumption of responsibility) internship residency 교육의 가장 중요한 측면이었다.
        • 책임감이 없다는 것은 훈련받지 못했다는 것과 같았다.
      • 부속병원에서 야망이 있는 I R patient care 대한 기회를 마음껏 즐길 있었다.
      • 책임감은 그러나 GME 관한 의학교육의 근본적인 딜레마가 있었다. '환자에 대한 책임감 있는 인턴' '값싼 노동력으로서의 인턴' 경계는 어디인가?' 하는 것이다.
        • 배우는 과정이기도 하면서 service 하는 입장이기도 하다는 사실, 그리고 인턴은 학생이면서 동시에 병원에 고용된 직원이라는 사실 등에 GME 근본적인 모호성이 있다.
    • Selecting House Officers
      • GME 의학교육에서 중요하게 되면서, 의대생들이 그들의 미래에 대한 고민을 하게 것은 당연하다. 좋은 인턴십은 모든 의사에게 필수적이 되었고 좋은 Residency specialist clinical scientist 꿈꾼다면 필수적인 것이었다
      • 1930년대에 인턴십 자리를 찾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그러나 부속병원에서 인턴십 자리를 차지하는 것은 쉽지 않았다. 8 선발에 145명이 지원하곤 했다.
      • 병원은 어떻게 가장 좋은 인턴을 선발할 것인가를 고민했다.
        • 많은 학교들은 자기 대학 출신 학생들에게 일부 자리를 할당해두었다.
      • 학생들에게 어려웠던 것은 합격 날짜에 대한 병원간 조정이 전혀 없었다는 것인데, 그래서 합격 가능성이 높은 조금 낮은 병원에 지원할 것인지, 합격가능성은 낮더라도 좋은 병원이 지원할 것인가가 가장 고민이었다.
      • 인턴십과 비교했을 residency 선발 방식이나 숫자도 적었고, informal했다.
        • '개인적으로 아는 사람' 또는 '아는 사람의 추천을 받아서' 선발하는 경우도 많았다.
      • Residency 선발되었다고 해서 프로그램을 마칠 것을 보장하는 것은 아니었다. 피라미드 구조였고, 층에 도달하는 사람은 매우 소수의 사람이었다. 그래서 피라미드의 윗자리까지 가지 않더라도 웬만큼 상층에 도달한 사람은 전문성을 인정받을 있었다.
      • 학부교육과같이 GME에서도 AA, 여성, 인종/종교적 소수자들은 차별받고 있었다.
        • 흑인을 위한 residency 자리는 극소수였다.
      • 비슷하게, 여성 또한 의대에 입학하는 보다 인턴이나 R 들어가는 것이 어려웠다.
      • 유대인들도 심한 반유대주의 때문에 I R 되는 것이 어려웠다.
        • 그렇지만 유대인들은 'excellent Jewish hospital' 있었기에 흑인이나 여성보다는 조금 나은 상황에 있었다. 대표적으로 NY Mount Sinai 병원.
      • I R 학생에게 상당한 스트레스였던 것처럼, 병원에도 엄청난 스트레스였는데 왜냐하면 다른 병원과 학생 모집을 놓고 경쟁해야 했기 때문이다. 학생들은 월급이 아니라 교육이 갖춰진 곳을 찾아갔다.
      • 부속병원들은 community hospital보다는 걱정이 했지만, 서로서로 상당한 경쟁을 했다.
      • 이러한 상황은 병원이 다른 병원과 비교하여 다른 종류의 교육이나 서비스를 하는 것에 대한 근본적인 제한점이었다. 서비스나 교육의 질이 나쁘면 학생들은 곧바로 다른 병원이 지원했다.
    • Stresses and Support
      • I R에게 24시간 내내 책임을 져야 한다는 것은, 24시간 내내 일을 해야 한다는 것과 같은 뜻이었다.
      • 인턴이 하는 일의 대부분은 교육적 목적이 있었다. 인턴은 배우기 위해서 (컨퍼런스, 회진, 세미나, 강의 등등) 있는 것이었다. 하지만 routine work 양은 어마어마했다.
      • GME 위해서는 '병원 문화' 완전히 익숙해져야 했다. 인턴은 병원에서 살아야 했고, 대부분의 시간을 그곳에서 보냈으며, 병원은 적극적으로 결혼을 하지 못하게 했다.
      • I R 병원 밖에서 살며 출퇴근하는 학생보다 수도승적인 삶을 살고 있었다.
        • Nights off call, 방학도 없다.
      • 대부분의 부속병원에서 부실한 음식과 노후한 주거시설, 부족한 복지 시설에 대한 불만이 있었다.
      • House staff 임상경험이란 상당부분 운에 의존할 밖에 없는 것이었다. 학생의 열정이나 돕고자 하는 의지, 기술적, 행정적 지원, 배정받은 층의 간호 지원 정도, 날씨(날씨에 따라 환자가 달라짐) 같은 것들이 중요했다.
      • 또한 인턴이 어떤 주치의와 일을 하게 되느냐도 중요한 요소였다.
      • 녹초가 되어버리는 업무시간과 열악한 근무조건을 생각하면  인턴의 삶을 WWI이후의 노동자의 삶과 비교하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 하지만 그들은 자신을 '전문직'으로 보았으며, 저항을 하더라도 공손했고, 무엇보다 노동자들과는 다르게 그들은 그들의 선택에 의해 그곳에 있는 것이었다.
      • 이렇게 일이 고되긴 했지만, 다양한 지원도 있었다. 우선 의식주가 해결되었다.
      • 또한 faculty 개인적인 친분을 쌓을 있는 것도 장점이었다.
      • 종합적으로 이와 같은 house staff 경험은 인턴으로 하여금 힘든 일을 버텨내고 책임의식을 기를 있는 무수한 메커니즘을 가지고 있었다.
    • Graduate Medical Education and the Public Interest
      • 20세기 초반, specialization 진료에서 중요한 부분이 되었다.
      • WWI동안 의학교육자들은 GP specialist 의해서 사라지지 않을까 걱정했다. 훈련받은 전문의가 필요하다는 것에 대해 반대하는 이는 없었다. 다만, 구체적으로 명이나 필요한가를 몰랐던 것이다.
      • Specialization 관한 논의는 미국에서의 오래 논쟁거리 하나인 '개인의 자유 vs 사회적 필요' 논쟁에 따라 점점 복잡해져갔다.
        • 시스템의 통제 없이는 많은 의사들이 postgraduate course 밟고 specialist 것이었다.
      • Specialization되는 하나의 route로서의 Residency system 만들어진 것의 가장 중요한 의의는 GME 국가적 specialist 필요와 균형을 맞추게 것이다.
      • Specialist 제한은 일부분 market force와도 관계가 있다. 'position' 수가 적었던 것이다.
      • 또한 specialist 제한은 사회적 목표를 위한 개인적 열망과도 관련이 있다. Residency 권한이 아니라 특권으로 간주되었다. Residency specialization 엘리트나 일부 좋은 계층을 위한 것이었다.
      • Specialization 의대 졸업생들 사이에서 유명세를 얻는 길이긴 했지만 WWII 이전 MS에서는 generalism 명예롭게 여겼다. (general specialty practice 사이의 균형을 설명하는데 도움이 되는 사실이다.)
        • 저명한 specialist academic leader 그들을 일차적으로는 Generalist, Specialist 다음(generalists first, specialists second) 이라고 생각했다.
      • Medical faculty 이러한 상황을 진지하게 받아들였다.
        • Peter Bent Brigham Hospital : 최선의 임상교육의 기반을 위해 specialty ward 대신 general medical ward 만들겠다.
      • 따라서 국가적 차원에서 보았을 WWII이전의 GME generalist specialist 사이의 적절한 균형을 잡아가고 있었다.
        • 그러나 가장 문제는 검사를 의뢰하는 것에 있어서의 신중함(discretion) 거의 교육되고 있지 않다는 것이었다.
      • 부속병원에서의 과도한 검사 의뢰는 불가피하면서 또한 허용되는 것이었다.
        • "환자 care보다 의사의 교육을 위해서 검사가 이뤄진다"
      • 이러한 것을 고려해도, 교육, 연구, 진료에 필요한 것보다도 많은 검사가 이뤄지고 있었다.
        • 이것은 주로 주치의가 인턴을 가르치는 방식과 관련이 있다. 인턴에게 ' 검사를 해야 하는가' 가르치기보다는 단순히 잘못했다고 꾸짖는 일이 많았다.
      • 이와 같은 Faculty 실수는 진료가 이뤄지고 있었던 환경의 풍요로움(environment of abundance)에서 기인한 것이기도 했다.
        • 예를 들어 가끔 resource 부족한 상황에서는 인턴들은 적은 , 하지만 적절한 검사를 의뢰하였다.
      • 대공황의 시기에도 인턴들은 거의 무제한의 자원을 활용할 있었다. GME 이미 당시부터 - 후에 엄청난 경제적 영향을 불러오게 - 낭비가 심한 진료 스타일을 촉진시키고 있었다.




  • Chapter 3. Undergraduate Medical Education
    • Physician들이 동의한 가지 원칙이 있다면, 바로 의학교육은 평생에 걸친 과정이라는 것이다.
      • 모든 진료를 하는 physician들은, GP specialist 최신의 정보를 알고 있어야 한다.
    • 의학교육이 완성되었다고 수는 없지만, 전쟁 사이 기간의 MS들은 거의 완성 상태에 도달하고 있었다.
    • 전통적으로 undergraduate medical education 주로 course curriculum 중심으로 분석되긴 하지만, 가지 중요한 것이 있고, 바로 "hidden curriculum"이다.
    • 당시 의학교육자들은 - 비단 의학교육만의 문제는 아닌 - 많은 교육에 있어서 일어날 있는 일반적인 문제들을 마주하게 된다. 가지 딜레마는 attitude behavior 영향을 있는 교육의 역할이 무엇인가 하는 것이었다.
    • Admission
      • 전문가가 아니라도, 의학교육이 국가적 교육시스템과의 공시성(synchrony) 없이 나아갈 없다는 것은 누구에게나 명백하다.
        • 입학은 고등학교 졸업자 이상이라면 누구에게나 열려있었고, 낙제율은 매우 높았다.
      • FR이후에 MS 입학 기준은 빠르게 높아지기 시작했다. 이것은 학문적으로 준비된 지원자들이 늘어나면서 가능해진 것이다.
      • WWI무렵, MS 처음으로 신입생을 제대로 준비된 학생들로 채울 있었다. 1915 대략 절반정도의 학교가 college 1 이상을 요구했고 나머지 절반은 2 이상을 요구했다.
      • 1920년대 동안 거의 대부분의 qualified 지원자들은 합격했다. 하지만 그러한 지원자들의 수가 전체 선발학생의 수보다 많아지게 1920년대 후반부터 MS 경쟁률은 급격히 치솟았다.
      • 비록 아무도 premed 학생들이 다른 전공의 학생들과 어떻게 다른지 정확히 설명하지는 못했지만, 당시 의학교육자들은 의학을 전공하겠다는 결정이 개인적 성격이나, 문화나, 의학을 업으로 한다는 것의 매력 등과 관련이 되어 있다고 믿었다.
        • 그럼에도 MS 사실 이것에 대한 걱정은 거의 하지 않았으며, 그저 학생들의 수준이 한층 높은 수준에 다다랐다는 사실만을 즐기고 있었다. 유급율은 15%까지 떨어졌다.
      • 의학을 전공하고자 하는 학생들은 어떤 과목을 미리 준비해야 했을까? 고민은 MS university official에게 공통된 고민거리였다.
      • 요구조건 외에, 어떤 것이 '가장 준비된' 학생인지에 대한 혼란이 있었다. 공식적으로 MS official들은 broad general education 강조했다. 하지만 faculty 의견은 반대였다. 그리하여 거의 대부분의 지원자는 scientific subject 전공한 사람들로 채워졌다.
      • MS qualified 학생들을 찾고 있었지만, 대부분은 입학 정원을 늘리려고 하지는 않았다. 교육의 질을 강조한다는 측면에서 사실성 1920년대와 1930년대에는 medical profession들이든 아니든 키워내고 있는 의사 수가  적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 의학교육자들과 입학관리자(admission official)들은 끊임없이 가장 좋은 학생을 어떻게 선발할 것인가에 대한 고민을 했다. 성적인지, 수강한 과목인지, 추천서인지, 개인 인터뷰인지…
        • Medical Aptitude Test 어떤 학생이 성적을 받을지를 예측하는 데에는 좋았지만, 의학을 행하는 것에 있어서의 성공의 지표는 아니었다.
      • Admission committee 사이에 서로 다른 패턴이 나타났다. 일부 특정 학교의 학부생들을 선호하기도 했고, 나이가 많은 지원자에 대해서는 불편감을 드러냈으며, 누가 학비를 있는지, 어느 지역 출신인지를 따지기 시작했다.
      • 일부 학생들은 특히 불이익을 보았는데, 대표적을 African-American (AA)들이 그랬다. 많은 학교에서 흑인 지원자는 전혀 선발하지 않았으며, 아주 명백한 인종차별이 벌어지고 있었다.
      • AA만큼 심각하지는 않았더라도, 여성들도 불이익을 보았다. 여학생들을 선발하는 학교 조차 numerus clausus (각종 제한 조건) 들이 달려 있었다. 예컨데, 여성은 전체 학생의 10% 이하만 선발한다던가 하는 것과 같은 내용이었다.
        • 여자들이 국가적 건강에 역할을 하고 있다고 하면서도, 여성들이 남자들보다 일에 시간을 쓴다고 비난했다.
      • 1920년대의 상당한 이민배척주의 분위기는 immigration restriction legislation에서 나타났고, Catholics, Italians, Jews 등의 입학에 대해서 독설에 편견이 있었다.
        • 그러다가 1920년대에 반발이 일었는데, elite private college 대한 쿼터가 생긴 것이 징후였다.
      • Jews 대한 차별은 뉴욕에서 가장 심했는데, 곳은 유대인 지원자가 가장 많은 곳이었다.
      • MS official들은 공식적으로는 유대인 쿼터나 반유대인 편견에 대해서 부인했지만, 기록을 살펴보면 반대이다.
        • 개인의 인종, 종교, 고향, 심지어 이름을 바꾼 적이 있는가에 대한 질문까지 하고 있었다.
      • 불이익을 받는 사람들 중에는 가난한 학생들도 있었는데, 직접적으로 입학을 거절당했다기보다는 장학금이 적고, 그래서 높은 수업료를 감당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다.
      • MS 장학금 부족에 시달렸다. Faculty들이 개인적으로 돈을 내서 장학 기금을 만들었다고도 알려져 있으며, 대부분의 학교는 모금을 하기 위해서 상당히 노력했다. 그러나 이러한 노력은 그다지 성공적이지 않았다. 의학교육이 개인적인 사업인지, 공공을 위한 서비스인지에 대한 혼동은 20세기 내내 fund 모금하는 것에 계속 문제가 되었다.
      • 궁극적으로 사회적 구성은 매우 재산을 가진 학생들 중심으로 옮겨갔다. 이러한 문제는 미국 교육 시스템 전체의 딜레마이기도 했다.
    • Training for Uncertainty
      • MS에서는 의사가 되기 위한 과정으로서 많은 일들이 일어난다. MS 목표는 의과학의 기초를 다지고, medical practice 있도록 학생들을 준비시키는 것에 있다. 1870년대부터 등장하기 시작한 Progressive medical education 전쟁 사이 기간의 의학교육의 주된 화두였다.
      • 의학 curriculum 논리적으로 배열되어 있었는데, 각각의 과목이 다음 배울 과목의 기본이 되는 식이었다. Laboratory에서 배우고, clerkship 하고, 소그룹으로 토의하는 것을 강조하여 학생들이 문제를 푸는 방법을 익히도록 했다.
      • Medical curriculum 구조는 19세기에 설립되었는데, 내용은 상당히 질병의 패턴이나 의과학의 진화 때문에 상당히 dynamic 것이었다.
      • Curriculum 모든 MS에서 비슷하긴 했지만 세부적으로는 상당히 달랐다. 또한 clinical clerkship 학교에 따라 무척 달랐다.
      • Curriculum 짜는데 있어서 의학교육자들은 풍요로운 교육 환경을 만드는 것을 중시했다. 그들은 끊임없이 어떤 과목을 넣을 것인지, 시간의 적절한 분배 어떠해야 하는지, 학생 수는 얼마가 적당한지, 교수-학생간 비율은 어느 정도가 적당한지에 대해 논의했다.
        • 개혁을 하고자 하는 학교들은 모두 다른 학교가 어떻게 하는가를 면밀히 조사했다.
      • 의학교육에서 'proper content' 무엇인가에 대한 문제는 가장 중요한 이슈였다.
        • 어떤 것이 핵심 지식인지, 어느 정도로 scientific principle 강조해야 하는지, 이론적 목표와 실제적 목표는 어떻게 다른지, 이러한 토의들은 남은 20세기 기간동안 의학교육자들과 university 논의에는 이러한 내용들이 모두 담겨있다.
      • 의학교육의 가장 문제 하나는 수업이 늘기만 하고 줄지 않는다는 (no excretory system) 이었다.
        • 의학 지식이 증가하면서 curriculum 어떻게 거기에 맞출 것인가에 대한 반응이 있었지만, curriculum 금방 다시 찼다. 4 과정동안 들어야 하는 수업 시간이 크게 증가했다.
      • 의학교육자들은 그들이 좋은(good) product 가지고 있다는 것은 알았으면서 동시에 이를 낫게(better) 만들기 위해 노력했다. 건강한 self-criticism 있었다.
        • Yale 대표적.
      • 교육의 질을 높인다는 명목으로 MS들은 state licensing board 규정에 의한 제약을 받았다. "State Boards of Examiners 규정이 MS발전의 발목을 잡고 있다"
        • 그러나 여전히 curricular innovation 모든 중요한 과목을 가르치려는 사이의 갈등은 지속되고 있다.
      • 가장 흔한 미신 하나는 벌어질 있는 모든 상황에 대해 확신을 가지고 의술을 행할 있도록 하기 위한 것이 MS 학생들이 교육받는 이유라는 것이다.
        • 하지만 사실은 physician들은 종종 딜레마 상황에 마주한다. 대부분의 경우에 개개인은 같은 병에 대해서도 다르게 반응한다.
        • 따라서 의학교육의 1 목표는 학생들로 하여금 수많은 '불확실성' 대하여 효과적으로 대처할 있도록 하는 것이었다.
      • 가장 좋은 방법은 환자에 대한 접근에 있어서 scientific way 가르치는 것이다. problem-solver 키우는 것이었다.
      • 불확실성에 대한 번째 접근법은 clinical clerkship 통해서 소수의 환자를 깊게 보도록 하는 것이엇다.
        • "Sound method habit 친숙하지 못한 환경에서도 활용할 있다"
      • 마지막으로, 불확실성에 대한 훈련은 어떤 정형화된 생각이 아니라 개개인의 환자에 관심을 두도록 함으로써 이뤄졌다.
        • "근본적인 착오는 인간을 획일적인(uniform) 개체로 보는 것에 있다"
      • 불확실성에 대한 훈련을 한다는 것은 학생들로 하여금 intellectual freedom 가짐으로써 의학을 행할 편안함을 느끼게 하는 것을 뜻했다.
      • 따라서 대부분의 상황에서 실제로는 환자들을 보는 것이 비슷비슷할지라도 medicine by protocol '어떤 진료가 환자와 사회에 최선인가' 대한 일반적 생각과는 정반대의 것이었다.
    • The Hidden Curriculum
      • 많은 관심을 받긴 하지만 formal curriculum MS에서의 교육적 경험의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동등하게 중요한 것은 physician 태도, 가치, 성격, 직업적 정체성이다.
        • 이러한 학습은 잠재적, 암시적이며 이와 같은 광범위한 문화적 환경을 "hidden curriculum(HC)"이라 부른다.
      • 이러한 HC 의학교육에서 특히 중요한 이유는 학생들은 co-option 아니라 자신들의 선택에 의해 곳에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학생들은 항상 faculty 보게 되며, 그들은 role model 된다.
      • HC 다양한 분야에서 작동하는데 하나는 의사의 bedside manner이다. 환자의 말에 기울이기, 집중하기, 자신감을 심어주기, 안정을 주기 등과 같은 좋은 의사로서의 자질이 보여지고, 강화된다.
      • 번째로 HC 학생들이 환자를 보는 시야에 영향을 준다. 학생들이 그들의 환자를 '사람'으로 것인지 'abstract disease entity' 것인지.
      • 번째로 HC 전문가적 태도, 가치, 기질에 영향을 준다. 일련의 결정적 경험(critical incident)들이 의사로서의 사회화 과정에 영향을 준다.
      • 마지막으로, MS 어떤 것을 curriculum에서 제외하느냐를 통해서 암시적으로 그들의 가치가 무엇인지를 설명한다. 가장 확실한 예는 시기의 '예방의학'인데, 대부분의 학교에서 최소한의 관심만을 받았으며 예방의학을 가르치는 교수는 이를 한탄했다.
      • Formal curriculum 대비되게, HC 거의 논의되지 않았다. 그러나 1950 사회과학 연구를 통해 HC 막대한 영향이 밝혀지기도 했다.
    • Student Life
      • MS로서의 경험을 단어로 요약하면 "consuming"이라 있다.
        • 대학생이 보통 학기에 15학점 정도 듣는 것에 비해 의대생은 족히 20시간은 수강해야 한다.
      • 의대생들은 지적인 적응 뿐만 아니라 그들의 태도도 적응해야 했다. 의학교육은 사실상 신체적 정신적 인내력을 한계까지 시험하는 것과 같았다.
      • 이는 수도승과도 같은 경험이었고, clinical year동안 아침 8시부터 오후 5시까지 일하고, 뒤에 밤에도 on-call 상태로 잠들지 못하는 밤을 보내야 햇다.
      • 의대생들의 삶은 항상 건강하지 못했다. 매우 소수의 학교만이 기숙사나 레크리에이션 시설이 있었고 대부분의 학생은 거무죽죽한 지역에 살았다. 결핵은 가장 무서운 병이었다.
      • 날부터 학생들은 그들이 medical school family 일원임을 자각했다.
        • 그러나 그들은 totem pole 가장 밑바닥에 있었다.
      • 학생들은 그들의 통제 밖의 힘에 대해 나약함을 느꼈다. 병원에서 그들은 'free labor' 여겨졌다. 소위 'teacher'라고 부를 만한 사람의 도움은 거의 없었다.
      • 짜증의 근원(bane of existence) 평가와 성적이었다. 당시 학생들은 시기에 비해서 낙제하는 일은 적었지만, 새로운 압박이 있었으니 바로 인턴 합격에 대한 걱정이었다.
        • 성적에 대한 압박은 4학년 인턴 발표가 이후에나 완화되었다.
      • 학생들에게 좋았던 사실은, 성적이 '과학에 기반하여' 메겨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성적 평가 과정의 모순이 곳곳에서 드러났다. 또한 학교마다 성적을 주는 것이 달라서 점수를 짜게 주는 Cornell 졸업생은 종종 피해를 보곤 했다.
      • WW사이이 시기에는 학생과 교수의 관계도 많이 변했다. WWI 이전에는 faculty 자기 학생에 대하여 거의 모든 책임을 졌다. 그러나 WWI이후 연구와 진료와 레지던트 교육에 대한 중요성이 높아지며 faculty 변했고, 학생과 faculty 친밀한 관계도 점차 사라졌다.
      • 이러한 faculty 저하된 관심은 임상 과에서 가장 두드러졌는데, 대부분의 학생 교육은 인턴이 책임지고 했다.
        • 학생에 둔감하고 학생을 경멸하는 레지던트를 만나는 것은 학생에게 악몽과도 같았다.
      • 비록 MS 모두에게 열려 있는 같았지만 일부 학생들에게만 특수한 장애물이 있었는데, 특히 AA 여학생들이 차별을 받았다. AA nonblack 환자를 진료하지 못하는 것이 컸다.
      • 학생 생활은 스트레스가 심했지만 많은 지원도 있었다. MS 커지는 학교의 크기에 비해서 학생에게 많은 신경을 썼다. Advising counselling system 하나였다.
      • 대부분의 지원은 학생들이 그들 스스로에게 하는 것이었는데, 종종 이런 과정은 자발적이거나 informal하게 이뤄졌다. 또한 지역사회에서도 지원이 있기도 했고, 나이 많은 학생이 아래 학생들에게 조언을 주기도 했다.
        • 대처해나가기 위한 노력(effort to cope) 있어서 의대생보다 울분을 토해내는 사람도 없었다.
      • 학생들이 대처해나가기 시작하면서, 그들은 faculty 의해서 강요되는 규칙이 아니라 그들 스스로 만들어낸 학생 문화를 주장했다.
        • 의대생들은 절망적이거나 무력하지 않았다. 그들은 오히려 환경에 영향을 끼쳤다.
      • 학생들의 파워는 수업을 시작하기 전에도 뚜렷했다. Premedical student 어디에 지원할지에 대해서 스스로 정했고, 하나 이상의 학교에 합격하면 학교를 골라서 갔다.
      • 학생들이 입학하고 나면 그들의 의견은 curriculum 곳곳에 영향을 주었다. 부족한 것이 무엇이고 무엇이 추가되어야 하나?
      • 학생 파워의 궁극적 표현은 faculty evaluation이었다. Faculty 학생을 평가하는 것처럼, 학생은 faculty 평가했고, 이는 승진에 반영되었다.
      • 아마 class play 학생들이 cope하는데 가장 유용한 하나였을 것이다. "Pithotomy" ("to tap a keg")에서 교수들의 약점이나 거드름피우는 것을 기이한 이야기와 외설적인 노래, 유머로 풍자하곤 햇다.
      • 저녁 내내 Pithotomy 비롯한 class play에서 학생들과 교수들은 웃고 마시고 즐겼다.
    • The Limits of Education
      • Physician 마음이나 태도를 만들어나가는 의학교육의 힘은 논쟁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행동에 영향을 준다는 면에 있어서 교육의 역할은 무엇인가?
      • 이러한 논쟁은 가지 중요한 이슈와 관련되어 있었다.
        • 하나는 caring doctor 키워내는 것에 관한 사항이다. 일부 의학교육자들은 공감, 연민, 사회적 책임 등은 가르칠 있는 것이라 보았고, 다른 사람은 이를 HC 보았다. HC라고 보는 입장에서 MS 있는 것은 그저 괜찮아 보이는 학생을 뽑는 뿐이었다.
      • 비슷한 논쟁이 physician 어디서 일을 해야 하는가와 관련해서도 벌어졌다. 당시 의학교육자들은 physician들이 점차 시골보다 도시에서 일하고자 하는 문제로 골머리를 앓고 있었다. 일부는 시골에서 많은 학생을 받자고 했지만 이렇게 해서 효과가 있을지는 아무도 모를 일이었다. 그리고 후에 나온 연구는 입학 기준을 낮추거나 입학 정원을 늘리거나 하는 것은 의사의 분포는 바꾸지 못하고 낮은 수준의 의사만 키워낼 뿐이라는 것을 보여주었다.
      • 의학교육에 관한 이런 논쟁은 미국 전체적으로 벌어졌던 '교육이 행동에 영향을 있는가' 논쟁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전통적인 통설은 행동이나 성격을 바꿀 있다는 것이었지만, 뒤로도 완전히 풀리지 않았으며 이것이 nature-nurture controversy 된다.






  • Chapter 2. The American Medical School Between the World Wars
    • 적어도 표면적으로는 미국 교육의 다른 분야에 비해서 MS 교육은 목적이 학교마다 그다지 다르지 않았다.
      • 사실상 모든 physician 사회적 특권층이었기에, 공공 교육의 존재의 이유라 있는 심지어 사회의 진보 조차 의학교육에 있어서는 그다지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 또한 학생과 faculty 유대관계도 undergraduate branch에서보다 훨씬 끈끈했다.
      • 대부분의 college에서 대학은 그냥 놀러 오는 곳이었다.
      • 하지만 MS에서 학생들은 매우 진지했다.
    • 이러한 이유로, WWI이후의 MS들은 그들의 1 목적이 academic 것이라는 것에 반대하지 않았다. 시기에 외부의 요구(대규모 인구에 대한 clinical service 대한 요구 또는 health care system 문제를 해결하자는 요구) 매우 적었다.
      • WWII 이전 교육과 연구와 진료는 다리가 개인 의자와 같이 상호 보완적인 것이었다.
    • 미국 의학교육에서 '조용한' 시기로 여겨지는 interwar period 기간은 실제로는 상당히 역동적인 시기였다. 의학연구가 진보했고, Flexnerian revolution 관련된 가치들이 퍼져나갔다.
    • 누가 비대한 조직의 초창기 운전대를 잡았을까(drove this incipient juggernaut)? 굳이 누군가가 있다면 그것은 연구에 대한 medical scholar들의 열정이었다.
      • Investigator 당시의 긴급한 의학적 문제들(acute disease) 해결했다는 것은 대중들 뿐만 아니라 medical scientist사이에서도 공히 인정하는 사실이었다.
      • 그러나 여전히 대답하기 어려운 문제는, 분야가 아니라 intellectual and social circumstance 있어서는 도대체 언제 faculty laboratory 중심인 MS 대중들에게 기여를 했느냐는 것이다. 문제는 chronic disease medical care system으로 인한 문제들이 생겨나는 20세기의 후반 50년동안 시험대에 오르게 된다.
    • Education
      • WWI이후 MS들이 가장 중시한 가지 기능이 있다면 교육이었다. Medical student House officer들이 physician 되는 .
      • MS 의사를 키워내는 사업이었다. 19세기에는 가르치는 것에만 신경을 썼다. 그러나 이후에는 교육과 연구와 진료에 신경을 써야 했다.
      • Medical faculty 교육에 헌신하는 정도는 상당했다. Faculty 자체가 적어서 교육에 많은 시간을 써야 했고, Cornell 경우에는 전체 지출 연구의 5, 밖의 다른 모든 소비의 4 정도의 돈이 교육에 사용되었다.
      • 모든 사람들이 교육에 신경을 썼다. 가장 senior faculty student laboratory clinic 자주 방문했고 학생을 알았다.
        • George Corner 같은 premier anatomist
      • 임상학과에서도 다수 faculty 교육에 투입되었다. Departmental chairmen 매일 회진을 돌았고 과거력 문진을 했고, 신체검진을 하고, 진단과 치료 지침을 내리고, 케이스 회의를 했다.
        • Soma Weiss : Peter Bent Brigham Hospital physician in chief.
      • Corner Weiss 그들의 헌신이나, 일에 대한 태도나 가치에 대해서 여러 사람들의 귀감이 되었다.
      • 비록 이름이 전해져 내려오는 레전드로 남은 교육자들은 없지만, 전국적으로 faculty 조용히, 열심히 일했고 의학에 전념했으며 학생들에게 헌신했다.
        • 교수들과 닿지(touched) 않은 학생은 거의 없었다.
      • Educating physician에게 MS는 public trust 같았다. 그들의 임무는 훈련된 practitioner 양성하는 것이었고, 국가의 건강은 그들이 키우는 physician 질와 양에 달려 있다고 생각했다.
      • WWII이전에도 국가적 health 단순히 의사를 키워내는 것보다 중요시했던 사람들이 있다.  그렇지만 시기에는 의사를 키워내는 것이 nation's health 지키는 것의 핵심이라는 인식이 일반적이었다.
    • Research
      • Modern MS 선두주자는 교육에 대한 확실한 임무를 정했다. 그들의 즉각적인 구성요소는 학생이었고, 목적은 교육이었다.
      • 미국 의학 연구에서 "professionalization" 역사학자들이나 사회학자들의 말을 빌려 쓰자면 WWI 이전부터 이미 시작되고 있었다.
        • Biomedical 이란 단어조차 존재하지 않던 시기에 대부분의 의학 연구는 일부 엘리트 MS에서만 이뤄졌다. 그러나 질과 양은 엄청난 속도로 성장했다.
      • 특히 인상적인 것은 standard 확립해가고 있는 10~15 학교의 성과였다.
      • 전쟁 사이의 기간동안 modern 의학연구의 많은 특성들이 분명해졌다.
        • Outpouring of scholarship 임상과 기초의학 모두에서 엄청났다.
      • 기간에 있었던 다른 중요한 지표는 미국 의학연구의 성숙도가 확연해졌다는 것이다. 신호 하나는  preclinical dept faculty WWI 이전의 physician-scientist 아닌 점차 Ph.D. 연구자들로 채워지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 전쟁 사이의 기간은 medical scholarship 번영한 시기였다. Preclinical 영역에서 새로운 지식이 모든 분야에 걸쳐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생화학, 생리학, 약리학..
      • 질병의 원인과 기전에 관해서도 비슷한 진보가 이뤄졌다. 질병을 일으키는 미생물들이 새롭게 발견되었다. Clinician 의한 환자 중심의 연구가 활성화되었고, 결과로 질병의 "pathophysiology" 점차 밝혀졌다.
      • 의사들에게 가장 중요했던 것은 치료법의 현저한 발전이었다.
        • Surgery, sulfonamide drugs…(table 1)
      • 비록 이러한 발전을 나중의 high-technology 시대의 발전에 비하면 사소한 것이라 할지도 모르지만, 새로운 제약 분야의 발전이나 정교한 분자 수준의 발견은 경외심을 불러일으킬 했다.
        • Pestilential(역병을 일으키는) 질환들은 통제가 가능해졌고, 이후로는 만성, 퇴행성 질환이 주된 mortality morbidity 원인이 된다.
      • 미국이 의학연구에서 국제적 리더십을 갖춰가는 과정은 다른 모든 분야의 발전이 동반되어 일어난 것이었다. 1930년대 중반 미국은 의학연구 뿐만 아니라 유전학, 물리학, 천문학 등에서도 국제적 리더십을 갖추고 있었다. WWII 무렵에 미국은 세계에서 가장 앞서나가는 과학 연구가 이뤄지는 곳이었다.
      •  
      • Interwar period 미국 의학연구는 20세기 미국의학교육을 이해하기 위해 중요한 가지 특징을 갖추고 있었다. 번째는 preclinical department 연구이다.
        • 전임상 분야 faculty 의학의 발전이 practical science 되기 위한 문제들을 연구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연구는 나중에 training과의 연관성이 분명해 수도 있지만 우선은 그저 "relevant" 정도의 것들이었기 때문에 clinical discipline 하녀(handmaiden)이라 불렸다.
      • 과학지식은 항상 과도기(in transition) 있으며, 전쟁 사이의 기간동안 전임상 과학의 발전이 눈부셨다. (생화학 ..)
      • 그럼에도 WWII 이전 전임상 과학자들은, 특히 미국에서는, 직접적으로 의학적 중요성을 가지는 문제에 주로 집중하고 있었다.
        • 저명한 생화학자인 Otto Folin 혈액, 소변, 조직의 화학적 구성을 분석하는 방법을 만듦으로써 유명해졌다.
        • 전임상 과학자들과 clinician 사이의 공동연구는 매우 흔했다.
      • 전임상과학이 의학 중심의 연구를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으나, 중에서도 연구의 가장 작은 단위가 "세포"라는 것이 하나였다. 결과 과목간의 경계는 불가침한 것이 되었다. 생화학은 생화학이었고 생리학은 생리학이었다.
      • 번째 특징은 임상 분과의 연구 또는 임상 연구의 목적에 관한 것이다. 시기 임상연구의 중요한 특징은 환자에 대한 연구를 한다는 것이었다.
      • 당시 남겨진 철저한 진료 기록을 보면 임상 연구에서 환자를 얼마나 중요하게 여겼는지를 있다.
        • Henry A Christian 모든 환자에 대해서 기록된 병원 기록물을 "greatest single achievement"라고 하였다. 사람은 나중에 Hand-Schuler-Christian disease 발견하게 된다.
      • WWI이후 임상 연구는 성숙한 다음 단계로 들어서게 되는데, 연구의 실험적 방법이 질병이나 치료에도 도입된 것이다.
      • 그러나 냉정하게 살펴보면 physiologically oriented clinical investigator 했던 연구는 전통적인 clinical researcher 했던 것과 별반 다른 것은 없었다. 당시의 새로운 것은 "과학을 bedside 가져왔다" 것이다. 환자를 면밀히 살펴보고 질문을 떠올린 다음, 실험실로 가서 답을 찾기 위한 연구를 했고, 답을 통해 병태생리를 이해하고, 종종 진단이나 치료에까지 연결되기도 했다.
      • 번째 특징은 학생들이 일반적으로 배우는 내용과 최신 의학연구에 그다지 차이가 나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것은 학생 교육에 대한 끊임없는 열정을 설명하는 것에 도움이 된다. 이것은 faculty 매우 가까이에서 접할 있다는 점에서 학생들에게 있어서도 매우 좋은 점이었다.
      • 번째 특징은 "통계적 유의미" 없이도 행세했던 그들의 높은 권위(high authority)이다. 의학연구에서 numerical method 오래 전부터 사용되어오긴 했지만, 수학적으로 무척 단순한 수준의 것이었다.
        • Koch's postulates (미생물이 질병의 원인이라는 것의 criteria) 조차 '통제군' 개념이 없다는 사실이나, 최초의 randomized controlled trial WWII 직후에나 행해졌다는 사실이 이러한 것을 보여준다.
      • 의학 연구자들이 아닌 통계를 가지고도 권위있게 말할 있었던 것은 그들이 다뤘던 문제의 특징이 그러했기 때문이다. 바로 acute disease이다. 급성 질환에 대해서는 timeframe 상당히 압축되어 있기 때문에 결과가 단순하게 죽느냐/사느냐로 곧바로 확인되었고, 복잡한 통계는 그다지 필요하지 않았다.
      •  
      • 성공적으로 많은 급성 질환을 통제하게 이후, 대중들은 의학연구를 매우 높은 무언가로 보았다.
      • 대중의 이러한 과찬을 강화시킨 것은 researcher 자신들의 태도였다.
        • 그들은 개인적 금전적 보상에는 그다지 관심이 없었다. Academic medicine 통화(通貨) 돈이 아니라 publication이었다.
      • 환자를 대하는 태도만큼 MS commercialism 대한 태도를 보여주는 것은 없다. 그들은 의학연구의 목적은 공공의 복지를 향상시키는 것이지 개인이나 기관의 재정적 이득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 물론 모든 사람이 이렇게 생각하는 것은 아니었겠지만, 이러한 태도는 가장 중요한 학교(JHMS, Harvard) 정책이기도 했다.
    • Patient Care
      • Modern medical school 번째 임무는 patient care였다. Faculty private practitioner에게 자문을 해주었고, 인턴이나 레지던트를 관리했다.
      • Clinical teacher로서 뛰어난 사람은 누가 있었을까? 임상연구가 WWI이후 성숙하기 시작하면서 이러한 질문은 쉽게 대답할 있는 것이 아니었다. 임상연구는 다른 연구와 마찬가지로 집중할 있는 시간이 충분히 필요했고 분야 연구를 위해서 투자해야 것들은 점차 많아졌다.
      • 그렇지만 clinical investigator들은 환자를 보는 것을 줄이려 하지 않았다. "Triple threats" (교육, 연구, 진료를 모두 하는 ) 가능했고, 존재했다.
      • Nontechnological era 환자 care 주로 bedside skill  임상적 감각(acumen) 의지했다. 이들 master clinician보다 환자에 대해서 많은 정보를 얻고, 정보를 활용할 있는 사람은 없었다.
        • Authur L. Bloomfield, David P. Barr .
      • 임상적으로 뛰어난 사람들이 full-time clinical faculty 뿐만은 아니었다. 수많은 private practitioner들도 강력한 임상적 교육적 기술을 갖추고 있었고, '자발적으로' MS 귀중한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었다.
      • Clinical faculty 환자 보는 것을 진지하게 하기 했지만, 거기에 드는 시간을 특별히 늘리려고 하지도 않았다. Blalock faculty 만약 너무 많은 진료를 하면 오히려 하루 수술해서는 제대로 연구를 없다고 꾸짖었다.
      • 임상 교수들에게 있어서 university identity 우선이었다. 그들은 스스로는 students of problems, trainers of future generation 이라고 생각했다.
      • 비록 많은 faculty 보는 환자의 수는 상대적으로 적었지만, 미국 medical service에서 MS teaching hospital 하는 역할이 적었다고 보는 것은 옳지 않다.
    • Faculty Culture
      • Pre-Flexnerian period 비교할 1920년대의 MS들은 크고 복잡한 조직이었다.
      • 하지만 와중에도 MS 형식에 얽매이지 않고(informal), 마음이 맞는(congenial) 장소였다. 학교들이 faculty scholarly leisure 또는 동료와의 밀접한 관계나 토론에 개입할만큼 과도하게 크다거나 관료주의적이지는 않았다.
        • 시기는 미국 의학 역사에서 유일하게 WWII이후에 심해진 size, 경쟁, 재정의 문제로부터 자유로웠던  시기이다.
      • 이시기의 faculty life "threadbare gentility(낡아서 올이 드러난 고상함)"라고 불렸다. Threadbare 당시 박한 월급을 의미했다.
        • 상당히 좋아진 것은 맞지만 여전히 academic income 성공한 practitioner 버는 사이의 차이는 컸다.
      • 경제적인 박탈감은 낮은 rank 학교에서 심했다.
        • "소박한 수준의 편안함을 누리고 싶지만, 빚을 갚아나갈 돈도 없다"
      • Academic medicine에서 경제적인 보상이 상대적으로 적은 시기였다면, 정서적인 보상이나 삶의 질적인 측면에서는 가장 좋은 시기였다. 당시 medical researcher들은 satisfying하고 즐거웠다고 언급하고 있다.
        • 시기의 research grant 연구를 하기 때문에 그만큼 주어지는 돈이었지, faculty 시간을 담보로 주는 돈이 아니었다.
      • MS 작은 사이즈, scientific department 임상 지향, 그리고 임상연구의 학문적 확립에의 헌신은 대부분의 WWII이전 MS에서 전례없는 조화와 협동을 가능하게 했다.
        • 'MS 가족이다' 인식이 있었고, 임상 분과들은 전임상 분과를 지원해주기 위해 환자를 보아서 얻은 수입을 떼어주곤 했다.
      • WWII 이전의 MS social life scientific life 혼합되어 있었다.
        • Journal club 금요일 저녁 Harmonie club에서 했고, Cosmopolitan Club, Peripateric Club 등이 유명했다.
      • MS에서의 삶에 개인의 삶이란 없었다. '직장의 생활 끝나는 지점' '개인의 삶이 시작되는 지점' 어디인지 모호했다. Faculty wives 주기적으로 항생들을 초대해서 차를 대접했고, 그룹 토읜느 주로 저녁에 이뤄졌다. House officer(인턴) 병원에 살면서 결혼도 못하고 항상 일만 했다.
      • WWII이전의 학교를 주름잡고 있던 사람들은 senior faculty, 특히 주임교수(department chairman) 였다. 그들의 지위는 의심의 여지가 없었고, 임상 분과에서 주임교수의 힘이란 행정권 뿐만 아니라 임상가로서의 권위에서 나오는 것이기도 했다.
      • Junior faculty 능숙하게 MS 운영을 도왔으나 그들의 삶은 불안정했다. 임금은 낮고, 승진의 기회는 적었다.
      • MS라는 '가족'의 일부는 voluntary faculty였고 주로 private practitioner였던 이들은 teaching hospital에서 일한다는 title이나 특권을 위해 기꺼이 자신의 시간을 들였다.
        • 대부분의 학교에서 part-time full-time 간의 단결심은 매우 강력했다.
      • WWII 이전 MS에서 이와 같은 조화로움은 그들의 목적에 응집성이 강했기 때문이다. 연구, 교육, 진료가 서로 얽혀 있었다.
        • "자신의 관심분야가 무엇이든 의사는 꾸준히 환자를 보아야 한다"
      • 시기 MS들의 다른 특징은 intellectual honesty 대한 높은 기준이었다.
        • 당시 모든 과의 주임교수가 자기 과에서 나온 모든 논문을 읽는 것이 당연한 일이었고, 이런 분위기에서 '사기를 친다' 것은 있을 없는 일이었다.
        • Harvard 생리학자 Walter Cannon 자신의 실험실에서 일한 학생들의 논문에 (자신이 열심히 도와줬음에도 불구하고) 자기의 이름을 뺐다. 이렇게 해야 학생들의 연구 열정을 높일 있다고 믿었다.
      • WWII이전 MS 궁극적인 특징은 그들의 실수를 기꺼이 드러내고자 하는 의지였다. 가장 중요한 conference mortality conference였다. 또한 case report 내서 실수나 실패 사례를 토론하고자 했다.
      • 매년 medical faculty 연례학술대회(annual scientific meeting) 통해서 새로운 지식을 습득했다. 어느 분야나 이러한 것은 마찬가지였으나 매년 Atlantic City에서 열리는 가장 중요한 meeting clinical scientist에게 특별히 중요한 것이었다.
        • "Atlantic City"라는 이름은 도시 이름이 아니라 academic medicine 대한 개인적, 지적 끈끈함을 보여주는 단어였다.
      • '가족'이라는 은유적인 비유는 거기서 '왕따' 당하는 사람이 있다는 뜻이기도 했다. Medical faculty 대부분의 대학 faculty처럼 대부분이 기독교 백인 남자였다.
        • 아마 African-American medical scientist 가장 뛰어난 예는 Vivien Thomas 것이다. Blalock 아래에서 배운 Thomas, 비록 Blalock Taussig "blue baby" operation 이라는 수술의 이름에 영원히 세겨진건 Blalock 이름일지 몰라도 실험실에서 수술 기술을 완성하고, 번째 수술에서 Blalock guide 것은 Thomas였다.
      • 여자 faculty 비슷한 - 비록 심했지만 - 어려움이 있었다. 여자 faculty 봉급은 대개 낮았고, 20세기의 절반동안 여자 학장을 임명한 학교는 Woman's Medical College of Penn. 뿐이었다.
      • 유대인들도 academic medicine에서 조직적인 차별을 당했다. WWI이후에는 자질있는 유대인들의 professorship 대한 열망은 상당했던 반면 이민 배척주의(nativist) 분위기도 만연한 상태였다. Medical faculty 대해서 공식적이든 비공식적이든 유대인들의 쿼터가 배정되어 있었다. 하지만 '유대인'이라는 딱지는 항상 따라다니곤 했다.
      • 많은 유대인들이 academic medicine에서 뛰어난 커리어를 쌓기도 했지만, 편견은 사라지지 않았다.
        • Flexner형제는 반유대주의에 발끈했다. Yale 유대인 faculty들은 그들이 다른 사람들보다 뛰어나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 이러한 WWII이전 MS 모습은, 마치 어느 가족에서나 그렇듯이, 좋은 감정만 가지고 있었던 것은 아니라는 것을 보여준다.
        • 종종 갈등이 표면화될 때가 있었는데, 특히 새로운 주임교수니 clinical chief 임명할 그랬다.
      • 그러나 어떤 faculty 마냥 해나갈 것이라는 보장은 없었고, junior faculty 아무 이유 없이 질책을 당하곤 했다.
      • 갈등이 있었던 부분은 salary 관한 것이었다. Preclinical faculty clinical faculty 높은 salary 기분 나빠했다.
      • 심지어 같거나 비슷한 내에서도 봉급에 관한 불화는 종종 있었는데, 'salary range' 달랐기 때문에 associate professor full professor보다 높은 연봉을 받기도 했다.
      • MS governance 대한 갈등도 상당했다. 다양한 사이의 권력관계가 생겨났다.
      • 시기 MS 가장 갈등은 - 20세기 내내 MS내에 존재하는 - 연구와 교육 사이의 tension이다.
      • WWII이전의 MS 눈에 띄는 하나는 거의 모든 학교가 연구에 중점을 두었다는 것이다. 그에 따라 Academic medicine에서 대부분 학교는 얼마나 논문을 냈느냐를 승진 기준으로 삼았고, 연구에의 강조는 class size 제한시키려는 주장의 주요한 근거이기도 했다.
      • 연구에의 강조는 elite 학교 뿐만 아니라 대부분 모든 학교에서 일어나는 일이었다.
      • 아마 이를 가장 보여주는 하나는 자신의 연구를 널리 퍼뜨리고자 하는 faculty 내재적 동기(primal drive) 것이다.
        • Faculty 가진 가장 야망 하나는, 미래의 연구자로서 자기와 같은 사람을 키워내는 것이었다.
      • 하지만 이런 연구에의 강조가 교육이 소외되었음을 뜻하는 것은 아닌데, 왜냐하면 WWII이전의 MS 연구에 집중했던 것은 의도적으로 그랬다기보다는 우연히 일어난 것이기 때문이다. senior 교수는 "교육은 이제 전반적으로 좋아졌다" 라고 했다.
    • Diversity and Development
      • 미국의 MS 상당히 편차가 컸다.
      • Philadelphia보다 이러한 모습을 보여주는 곳은 없을 것이다. (Pennsylvania, Hahnemann, Temple ..)
      • MS 평가는 스펙트럼을 따라 분포한다. 12~15개의 우수한 학교가 있었고, 가장 좋은 평가를 받는 20개의 학교가 있었다.
      • 학교는 평판만큼이나 그들의 mission 다양했다.
        • 나가는 학교는 전국적인 지지기반을 가지고 있었다.
        • 일부 소수 학교는 학교의 목표가 무엇인가에 대해서 갈등이 있기도 하였는데, 예를 들어 Michigan public school로서 state 대한 책임감도 느꼈지만, 상위권 학교로서 교육과 연구에 대한 욕심도 있었다.
        • 목적은 숭고했으나, 지갑은 얇았던 학교도 있다. Woman's Medical College 또는 African-American 많이 받은 Meharry and Howard.
      • WWI이전보다 전반적으로 학교가 많이 발전했지만, 하위권 학교들은 여전히 골치거리였다.
        • 학생들은 수업 외에 읽을거리를 찾아서 공부해야 했고, 예전의 틀린 답을 기준으로 새롭게 밝혀진 (실제로 옳은) 답을 쓰면 틀렸다고 채점 받기도 했다.
      • 그럼에도 미국 MS 전체적 질은 분명히 뛰어났다.
        • 인증기관들은 weaker school 대해서 자격을 박탈하는 대신 probation기간을 있었다.
      • WW사이의 기간은 미국 MS 상당히 성장한 기간이었다. Academic profession 연봉이 상승했고 연구의 양이 늘었다. 임상 과들도 생겨났다.
      • 1930년대는 대공황으로 인해서 MS 긴축을 해야 했던 기간이었다.
        • 하지만 와중에도 1930년대의 의학은 가장 많은 지원을 받는 분야였다.
      • 중요한 것은, 많은 지원금들이 연구에 투자되었다는 점이다.
      • WWI이전과 마찬가지로 state local government, foundation, 개인 기부자 등등에서 많은 자금이 지원되었다. 제약회사나 다른 기업들이 새로운 후원자로서 등장했다.
      • MS 그들이 속한 대학으로부터 지원도 꾸준히 받고 있었다.
      • MS 성장하면서 서로서로 경쟁하기 시작했다. 다른 학교 faculty 고액의 연봉과 승진과 좋은 연구기회를 주겠다며 뺏어오는 일은 흔한 일이었다.
        • "striking offer" "to hold our men"
      • MS 커지고 복잡해짐에 따라서 행정구조도 그만큼 복잡해졌다.
      • 행정이 단순하던 WWI이전의 학장직은 part-time 직위였는데, 1939년에는 full-time dean 일반적이었다.
      • 이러한 모든 성장에도 불구하고 당시의 MS 훗날의 거대한 조직체에 비하면 자그마한 것이었다. 그러나 WW사이의 기간은 MS 그들 자신의 운명에 대해 뚜렷한 주도권을 쥐게 기간이라 있다.
    • The Rise of Harvard Medical School
      • WWI 시작되자 MS내에서는 JHMS 전국적인 주도권을 잡을 것처럼 보였다.
      • 그러나 WWI 끝날 무렵 JHMS 그다지 압도적이지 못했다. 다른 학교들이 빠르게 따라잡고 있었다.
      • 1900년대 초반, Harvard 여전히 지역에서만 유명한 학교였고, 학생의 93% New England에서 학생들이었다.
        • 그러나 Flexner report 이후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발전한다. 여기에는 총장 Lowell 학장 Edsall 역할이 컸다.
      • 둘은 서로 긴밀히 협조하며 Harvard 발전시켜나갔다.
      • Upenn MGH에서 선구가적 임상 연구자였던 Edsall 학장에 오르자마자 학교의 revitalization 착수했다. 그는 연구 분위기를 구축하는 것을 가장 중요한 학장의 임무로 정했다.
      • Edsall 1935 퇴임할 무렵, Harvard laboratory , clinical resource 뿐만 아니라 연구 성과 면에서도 미국에서 가장 뛰어난 학교로 자리잡았다.
      • Harvard 국가적인 인지도를 얻는 과정에서 가지 질문이 던져졌다. "MS mission 연구인가 교육인가?" Lowell 학교가 너무 소수의 의사만을 키워내는 것이 문제라고 생각했다. 125명으로 제한된 학생 수는 1900 이후로 그대로였다.
      • Lowell Edsall 문제에 대해 토론하는 것에 두려움이 없었다. Eliot Lowell 의견에 동의했다.
      • Edsall 비롯한 medical faculty 이러한 president 의견에 동의하지 않았다. 그들에게 이미 학생 수는 충분히 많았다.
      • Lowell 남은 총장의 임기 동안 class size mission 대해 Edsall 설득하고자 했지만, 결국 성공하지는 못했다.
      • Edsall Lowell 전쟁에서 20세기 의학교육의 주요한 흐름과 아이러니를 읽을 있다. Edsall 여기서 '승리'하였다는 것은 MS 모대학(parent university)으로부터의 자율권이 높아졌다는 것을 뜻한다. 많은 MS 여전히 경제적 지원을 받고는 있었지만, 대학 내에서만 보면 전반적으로는 가장 self-sufficient 학과였다.
      • Lowell Edsall에서 있듯 Harvard mission 무엇인가에 대한 날카로운 의견 대립이 있었다. Lowell 많은 의사를 양성해야 한다고 주장했고, Edsall 연구가 중심이 되어야 된다고 했다.
        • Harvard에서 이뤄진 것들이 후에 leading school에서 전국적으로 일어나게 된다.
      • 앞의 내용들이 연구가 질병을 설명하고, 완화하고 치료하는 측면에 있어서 공공서비스적 성격이 없다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WW사이 기간에 있었던 의학연구들이 일반 대중에게 갖는 중요성은 분명하다. 하지만 이렇게 의학연구가 공공보건에 중요한 역할을 것은 그저 우연일 수도 있다. 만일 의학연구의 결과가 그렇게 즉각적이고 드라마틱하지 않았다면 정도의 대중적 인기를 얻을 있었을까? 여기에 미국 MS 근본적인 모호성이 있다. Public trust로서 사회적 역할이 중요한가 아니면 과학적 호기심을 채우기 위한 faculty 열망이 중요할까?

 





  • Chapter 1. Creating the System




  • 1920년대의 미국의학교육자들이 의기양양하다고 해서 비난할 있는 사람은 아마 거의 없을 것이다. 시기의 변혁은 "the marvel of the educational world"라고 불릴 했다.
  • 당시의 미국 의학교육을 위풍당당하게 조사한 사람은 Abraham Flexner였다.
    • 그는 보고서에서, 미국 Medical School 크게 비판하였으며 John D Rockefeller의 거대한 foundation General Education Board에서 secretary 맡게 된다.
    • "긍정적인 방향으로 엄청난 진보가 이뤄졌다" 이전에 의학교육이 어떠한 상태였는지를 아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이렇게 말했을 것이다.
  • 미국의학교육의 변화는 실로 대단한 것이었기에 이렇게 열광하는 것도 이해할 했다.
    • Civil War 무렵의 미국에는 의사가 되는 것이 별로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 Proprietary school 2층의 길목에는 약국을 운영하고 있었다.
    • 이러한 교육에 불만을 가진 미국 학생들은 유럽으로 유학을 떠나기도 했다.
  • 그러다가 1920년에 엄청난 혁명이 일어나는데, 일부 사람들은 Flexner revolution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 입학기준, laboratory and clinical clerkship등이 도입되었다.
    • 미국의학교육의 질은 유럽의 그것을 넘어서고 있었는데, 이는 NY state licensing 시험의 합격률에서도 나타난다(유럽 < 미국)
  • 미국 의학교육시스템 만들어진 것은 길고 고된 과정이었는데, 19세기 중반에 시작된 실험의학, 최신 지식을 위하여 프랑스나 독일로 유학간 학생들, 그리고 무엇보다 과학적 방법론 기술의 이해가 중요하게 작용했다.
    • 1870년대 초반 Harvard, Penn 대학 등이 생겼고, 1870년대 후반에 계획이 시작된 Johns Hopkins Medical School 1893년이 되어서야 문을 열었다. 1880년대와 1890년대 학교들은 Pioneering school 따라하기 시작했고, 미국 의학교육의 개혁이 시작되었다. 20세기로 넘어가면서부터 University Medical School 거의 이상적인 것으로써 인식되었다.
  •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 해야 일이 많았는데, 학교들이 여전히 재정적으로 부족했고 교육에 필요한 임상 시설이 많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 Flexner 대중화시킨 보고서의 아이디어는 1870년대와 1880년대에 등장한 것들이었다. 보고서는 미국의학교육의 개혁을 당연히 이뤄져야 것으로 인식되게 하였고, Proprietary School 대한 신랄한 비판에 화가 있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state licensing law 도입은 Proprietary School 종말을 한층 앞당겼다.
  • Flexner Report 그러한 도덕적 분노(indignation and moral outrage) 유발했을까? 대답은 20세기 초반 의사의 training 바라보는 대중의 시각 연관되어 있다. Civil War이후로 medical practice 엄청나게 발전하였다. 1900년에 의사를 찾아갔을 환자가 그로부터 이득을 (benefiting) 가능성은 반반이라고 정도였다.
    • 그러던 의학이 과학적 의학의 모습을 갖추면서 실제로 효과를 내기 시작했던 것이다.
  • 의학지식과 진료의 관계는 매우 복잡했고, 시간과 장소에 따라 상당히 달랐다. 그렇지만 20세기 초반의 미국에서 진료는 여전히 지식에 한참 뒤떨어져 있었고 차이는 엄청났다.
    • 의학교육의 진보가 마침내 진료의 현장에 적용되었다. 사람들은 면허 받은 의사만 찾아가면 누구나 확신을 가질 있었다. 이러한 것이 바로 Flexnerian revolution 의미인 것이다.
  • 위에서 언급된 것에서 알 수 있듯, 미국의 의학교육 시스템은 두 중첩되는 기간동안 만들어졌다. 의학교육의 방법이나 목적에 관한 혁명적인 생각으로부터 시작해서, Civil War이후 의학교육자들은 의학교육이 암기를 통해서 지식을 심어주는 것이라는 전통적인 생각을 거부하기 시작했다.
    • 존 듀이보다 한 세대 앞서서 이미 의학교육자들은 후에 "progressive education"이라 불리는 아이디어를 지지하고 있었다.
  • 새로운 방식의 교육을 도입하는데에는 엄청난 비용이 들었기 때문에 learning by doing으로 인하여 의학교육에 많은 자본이 투입되게 되었다.
    • Proprietary era에는 독립적으로 존재했던 Medical School들은 이제 대학이나 teaching hospital과 매우 가까이 affiliated 되었다.
  • 미국의 새로운 의학교육 시스템이 등장함에 따라서 개혁가들의 관심은 undergraduate로부터 graduate medical education으로 옮겨가기 시작했다.
    • 이러한 이유로 modern medical school residency specialty  training의 필요에도 맞춰가야 했다.
  • 의학교육의 개혁이 medical profession 내에서 이뤄졌다는 점을 유의깊게 볼 필요가 있다.
    • William Welch를 비롯한 academic medicine leader.
    • 그 과정에서 이들은 상당한 기업가적 자질 뿐만 아니라 장기적 목표를 달성하는 데 있어서 묘한(uncanny) 능력을 보여준다.
  • 새로운 시스템이 상당한 성공을 거두긴 했으나 비용이나 문제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 Working class, rural communities에 미친 영향.
    • 하지만 의학교육이 그간 이룬 성과가 워낙 대단했기 때문에, 이러한 문제들은 별로 관심을 끌지 못했다. 그렇지만 수십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이러한 딜레마는 여전히 유효하다.

 

 

  • Progressive Medical Education
    • 미국 의학교육 시스템의 복잡한 사연에는 다양한 요소들이 등장한다. 과학적 진보, 기술적 성과, Professional들의 개인적 / 집단적 야망 등.
    • 그럼에도 미국 의학교육 변화의 핵심에는 (1)의학이 어떻게 교육되어야 하는가에 대한 혁명적 생각이 자리잡고 있었다.
    • (1-1)교육 철학의 혁명 19세기에 의학적 지식이 빠르게 성장하면서 일어났다.
      • 프랑스의 clinical school - 질병은 신체 내의 "humor"의 불균형이 원인이다.
      • 실험 의학, Germ theory, 신약, 수술법 등등..
    • 이러한 발견과 더불어 중요한 (2)인식론상의(epistemological) 전환이 일어났다. 실험적 방법은 질병과 그 치료에도 적용될 수 있다는 것이 점차 분명해졌다
      • 과학적 지식은 임상 practice reshape하기 시작했다.
    • 어떻게 Medical School들은 새롭게 쏟아지는 (3)정보의 맹공 속에서 살아남을 있었을까?
      • 이것은 의학교육자들이 의학교육자들이 끊임없는 발견의 파도와 무수한 책과 저널의 등장속에서 항상 고민하던 문제였다.
      • 누구도 자신의 지식에 안심하고 있을 수 없었다
    • 의학교육자들에게 (4)정보 폭발에 대응할 수 있는 방법은 한 가지 뿐이었다. 바로 의학교육을 새롭게 디자인하여 실질적인 내용에 대한 강조를 하기보다 과정에 대한 강조를 하는 것이었다.
      • 의사들은 항상 최신 지식을 갖추고 있어야 했으며 self-education은 여기에 필수적이었다.
    • 20세기 초반에 학생들이 learn by doing해야 한다는 아이디어는 의학교육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었다. 전반적인 교육 시스템에 있어서 교육자들은 active leaning을 강조했다.
      • 이에 따라 모든 교육 수준에서 핵심 목표는 문제해결능력을 기르고, self-learning을 촉진시키며, 비판적 사고를 길러주는 것이었다. 이러한 개념은 "progressive education"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졌다.
    • 의학교육에의 이러한 개념의 도입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강력하며, 1870년대 이후 의학교육자들은 그 세대에 무관하게 이를 강력하게 믿었다.
      • 이러한 개념은 progressive education common school education에서 사라져간 이후에도, 의학교육의 목표로서 지속되고 있다.
      • 교육에의 democratic spirit에서 시작된 Progressive education은 역설적으로, 가장 엘리트 교육에서만 살아남은 것이다.

 

  • Fund-Raising
    • Progressive Medical Education에서 학생들은 그들은 선생님들이 가르쳐주는 것보다 더 많은 것을 배워야 했다.(learn more than they were taught)
      • 훨씬 더 많은 돈이 필요했다. 연구는 그 자체로 돈이었다.
    • 1910년 이전에 의학교육에 필요한 만큼 충분한 자금이 지원되지 않았다. 이러한 자금의 부족은 의학교육을 개선시키기 위한 대부분의 노력의 기반을 약화시켰다.
    • 하지만 Flexner Report 직후, 경제적 문제들은 마침내 해소되기 시작했다. GEB Carnegie Corporation .
      • 1920년대에 의학교육은 탄탄한 재정적 지원을 받게 되었다. state legislature philanthropic foundation은 의학교육에 지속적 관심을 갖는 기관이었으며 이런 것들로부터 의학교육과 의학연구에 대한 지속적인 지원이 갖춰진 것이다.
    • WWI 무렵, 지난 세대에 이뤄진 medical science의 발달 덕분에 의학교육과 의학연구에 지원이 필요하다는 것은 확실해졌다.
      • Germ theory, immunology, 새로운 진단법(EKG, X ray), chemical. "the golden age of medical progress"
    • 게다가 'experimental laboratory research' 갖춤으로써 의학이 정말로 질병을 정복할 있을 같은 열광에 휩싸였다.
      • Progressive era 시기에 Scientific method 숭배한다고 있을 정도의 믿음이 있었다.
    • Scientific method에 대한 흥분은 학교들이 fund-raising을 성공시키는데 중요했다.
      • Scientific philanthropy : 이타적 마음, 가족의 죽음, 상속인의 부재, 자기중심적 열망 등등이 원인.
      • 돈이 권력이었고, 의학교육에의 기부자들은 이를 알고 있었다.
    • 그렇지만 모금은 쉽지 않았다.
    • 의학교육자들은 이러한 도전에 열심히 대응했다. 점차 그들의 노력은 성과를 냈고, 의학은 "cultural authority"로서 빠르게 성장했다.
      • 그들(리더들)은 지식의 성장 뿐만 아니라 그들 각각이 속한 medical school의 발전에도 큰 기여를 했다.
    • William Welch보다 더 유명한 사람은 없었다. 병리학 교수였고 Johns Hopkins Medical School dean이었다. 그는 academic medicine 전반에 대하여 큰 기여를 했다.
    • 만약 의학교육자들이 열심히 활동했다면, 그것은 당장 그들의 이익이 달려있기 때문이기도 했다. 개혁의 초반에의 미국에는 full-time medical school position이란 존재하지 않았다. Medical school leader들은 즉 두 가지 목표가 있었다. 하나는 교육의 질을 높이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academic medicine을 미국에서 확실한 career로서 발전시키는 것이었다.
    • Academic medicine을 확고한 직업으로서 만들려는 움직임은 19세기 미국의 다른 학문분야와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그들의 분야를 "professionalize"시키기 위해 노력했다.
    • 의학에의 기부는 기부자와 medical entrepreneur의 긴밀한 협조를 필요로 했고, 각각의 그룹이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한 것이기는 했지만, 각각의 그룹이 미국 의학교육이 궁극적으로 갖추고자 하는 모습에 확실한 족적을 남긴 것도 사실이다.
      • 이것은 축복이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저주이기도 했다. 기대가 더 높을 수록, 잠재적 실망도 더 컸던 것이다.

 

  • Medicine and the University
    • 19세기 중반, 대학은 의학교육의 중심처럼 보이지 않았는데, 왜냐하면 그 당시 college란 사실상 higher learning이 추구되는 장소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 선견지명이 있는(Visionary) university president들은 그들이 법학과 신학과 공학과에 대해 했던 것처럼 medical school 대한 개발의 주도권을 잡았다.
    • 아마 어떤 대학총장도 Charles Eliot만큼 modern medical school을 만들기 위해 열정을 쏟진 않았을 것이다.
      • Eliot은 의학을 rigorous, scientific fashion으로 교육시키고자 했다.
    • 처음에는 의학교육을 대학에서 흡수하려는 움직임은 physician들 사이에서 상당한 저항을 일으켰는데, 특히 physician이 소유한 Proprietary School에서 심했다.
      • 하지만 독일의 대학 모델에서 영향을 받고 온 교수들이 늘어날수록, 대학에 속하는 것으로부터 얻을 것이 많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 당연하지만, medical school 대학 내로 들어오면서 변화가 일어났다. 이제 (1)medical school 목적은 교육이었고, 돈을 버는 것이 아니었다
      • Medical school들이 돈을 벌기 위해서 무자비한 경쟁을 벌이던 시대는 지나간 것이다.
    • 또한 대학 내로 들어오면서 (2)academic medicine medical practice와 구분되는 독립적인 직업으로서 자리잡았다.
      • Academic physician은 연구와 교육에만 힘쓸 수 있는 대학의 교수가 되기를 바랐다.
    • 의학교육자들에게 또 하나 좋았던 것은, 대학 학과가 되면서 (3)모금하는 것이 훨씬 더 쉬워졌다는 것이다
      • "대중들로부터 지원을 받을 수 있는 유일한 형태는 university medical school이 되는 것이었다"
    • 그 시작부터 미국의 대학은 다양성의 공간이었다. 다양한 기능을 가지고 있었으며 다양한 사람들을 serve하였다. 그러나 이상적인 연구나 진보된 교육은 core에만 한정된 것이었다
    • Medical school 대학 내로 들어온 것은, (3)국가적 교육시스템의 내부로 들어온 것이기도 했다.
      • "의학교육은 의사들만의 문제라기보다는 일반적인 교육의 부분이다"
      • General education을 빼고서 의학교육을 논할 수는 없게 되었다.
    • Modern universitymedical school 생기면서, 광범위한 교육시스템의 테두리 안으로 들어온 것을 돌릴 수는 없었다. Medical school 국가의 교육  피라미드의 맨 상층에 위치하게 되었다.

 

  • The Emergence of the Teaching Hospital
    • 의학교육은 고등교육에서 독특한(unusual) 지위를 차지하게 되었다.
      • 환자를 보는 과정은 university 뿐만이 아니라 의료전달체계와 연관이 되어 있었다.
      • Medical School에게는 병원시설이 필요했지만 병원을 설득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
    • 병원이 필요한 것은 (1)Progressive medical education에서 intellectual requirement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였다. 학생들은 active learner 되어야 했고, 대충대충 여러 명의 환자를 보는 것보다 집중적으로 적은 수의 환자를 있어야 했다.
      • Clinical clerk으로서 적절한 책임을 주는 것은 학생을 의사로 만드는데 있어서 상당히 중요했다.
    • 19세기 후반, medical school hospital affiliation 가져야 하는 확실한 교육적 근거가 생겼다.
      • 20세기로 들어서면서 medical school (2)연구 대한 의무도 커졌다. 특히 clinical science 과목으로 자리잡으면서 과의 faculty들도 연구를 해야 했고, 따라서 teaching hospital 대한 control 반드시 필요했다.
    • 미국 병원들은 항상 의학교육에 협조적이었고, Civil War이후에는 그러한 활동이 활발해졌다.
      • 의학교육에 대한 요구가 커지면서 병원들은 scientific medical care 제공하는 공간으로 변하였고, 병원의 강당은 강의실로, 외래환자 진료실은 진료과정을 보여주는 공간으로 변하였다.
      • 하지만 그들은 여기까지였다. 이사진(Trustee) 행정조직(administrator) 그들이 가진 특권(prerogatives) 지키는데 힘을 다했다. 그들은 그들의 mission 환자 care이지 교육이나 연구가 아니라고 보았다. 점차 병원, 병원 도움주기를 거부했고, 결과로 1900년대 초반 Medical School에게 가장 심각한 하나의 결핍을 뽑으라면 바로 clinical department 관한 일이었다.
    • Johns Hopkins Medical School 모든 학교가 동경하던 임상교육의 모델이었다.
      • 매우 소수의 학교만이 그들 소유의 병원을 갖고 있었다.
    • 1900년대 초반, 많은 병원들은 연구와 교육에 적극적인 파트너십을 갖추기 시작했고, Johns Hopkins hospital 성공은 이런 과정에 영감을 주었다. 최신의 scientific care 강조하는 Modern hospital 등장하기 시작했다.
      • Medical practice 매우 빠른 속도로 변하고 있었기 때문에, 병원은 점차 academic physician 같은 의학 연구의 선두주자들과 가까운 관계를 맺고자 하였다.
    • (3)의학교육자들과 hospital official 사이의 가장 중요한 공감대 있다면, 그것은 교육과 연구가 환자 care 질을 향상시킨다는 것이었다.
      • Bedside clinical investigation 환자에 대한 섬세한 조사로 이어졌고, 바로 당장은 아니더라도 나중에 다른 환자가 이것의 혜택을 누릴 있었다.
    • Francis W Peabody 과연 병원의 교육적 역할과 과학적 역할이 활발해져야 하는가에 대한 문제에 마지막 남은 의심까지 사라지게 하였다.
      • 가장 뛰어난 clinical investigator 하나로서, 그가 말할 때면 hospital official들이 귀를 기울였다. Caring 자체인 그런 사람이 말을 하는 것은 단순히 건방지거나 자신만만하기만 것은 아닌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 같은 다양한 발전에 따라서 1910 이후에 임상 교육의 상황은 빠르게 달라졌다. 이후 15년간 전국에 걸쳐 병원들이 자신의 연구과 교육에 대한 역할을 다시금 바라보게 되었고 Johns Hopkins Medical School 모델로 modern teaching hospital 생겨났다.
      • Private medical schools : nonprofit or municipal hospital 연합
      • State medical school : modern teaching hospital 건립
      • 1920년대에는 오래된 역사의 병원과 의학교육간의 적대감이 무너졌다.
    • 모든 medical school teaching hospital 찾을 있었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러지 못한 학교는 충분한 자금을 모으지 못하게 되면서 존립 자체에 위협을 받았다.
      • 상대적으로 유명한 지역의 학교들에 대한 불이익이 특히 심했다.
    • Teaching hospital 등장하고도, medical school과의 긴장감이나 의견충돌이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결국에는 medical school teaching hospital 바람직한 교육과 연구와 patient care 있어서 서로가 서로에게 필요하다는 것을 인정하게 되었다.
    • 그러나 미국 의학교육역사상 가장 커다란 역설 하나는, 이와 같은 교육과, 연구와, 진료의 조화에 대해서 차례도 '증명' 적이 없다는 것이다. 그저 모두가 '그럴 것이다'라고 생각했다(assume).

 

  • Establishing the Social Contract
    • 1920년대에 미국의학교육의 혁명은 거의 마무리되었다. 1870년대부터 의과대학 대학의 리더들은 이상적인 모습을 설정하고 모습을 만들어나갔다. , 이러한 변화는 계획된 것이었고(not by accident, by design) 대중들은 기꺼이 개혁을 지지했다.
    • 이렇게 개관만 봐서는 사이에 벌어진 좌절과, 실패와, 실수를 간과할지도 모른다. Institution-building 쉬웠다면 이렇게 50년이 넘는 기간이 걸리지도 않았을 것이고, 그렇게 많은 의학교육자들이 매번 새로운 시스템을 도입하려 때마다 좌절하지 않아도 되었을 것이다.
    • 이러한 성공은 Academic physician public 필요를 모두 충족시켰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이로 인해 대중들이 의학교육에 선뜻 투자할 있었다.
    • 결국 의학교육 시스템은 사회의 필요에 기여한 것이다. 직접적으로는 (1)대중들이 '평균적인 의사' 대한 신뢰 가질 있게 되었다. "licensing 의사가 아니라 일반인(people) 보호하기 위한 것이다"
    • Scientific medical education and research (2)국가적 산업 경쟁력에도 도움이 되었다.
      • 20세기 대부분 동안 의학교육과 의학연구와 진료에의 투자는 국가적 경제에 도움이 된다는 인식이 널리 퍼져있었다.
    • Academic physician, 넓게 medical profession 다른 방식으로도 사회적 책무를 다했다. (3)의학교육자들은 public health movement 지원 뿐만 아니라 앞장서서 이끌었고, Medical School 애국적 태도를 인정받았다. 사리사욕만 챙기는 의사에 대한 불만이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통계적으로 WWI이후의 평균적인 의사는 평균적인 노동자보다 1.5~2 정도 수입이 있었을 뿐이며, 시기가 바로 fee-splitting(소개 수수료) 사라진 때였다.
      • Physician 활동은 대중들로 하여금 의학이 social contract로서의 목적을 달성하고 있다는 자신감을 가지게 했다.
    • 의학교육의 새로운 시스템은 20세기 초반의 사회상황과 매우 맞아 떨어졌다. 감염성 질환과 영양으로 인한 질환이 가장 흔했던 시기에 (4)scientific medicine 이룬 성과 엄청난 것이었다. 그것도 상대적으로 적은 비용으로 말이다.
      • 또한 병원 재원기간은 긴데 비해 생명유지장치는 거의 없었기 때문에, bedside에서 관찰하는 것이 중요했고, 이는 학생들에게 엄청난 기회를 뜻했다.
    • 새로운 시스템이 성공적이었다고 모든 사람이 행복한 것은 아니었다.
      • Proprietary school 소유주들과 private practitioner, 여성 인종적 종교적 소수자들. 시골 지방, 고르지 못한 분포.
      • 새로운 시스템의 경직성.
    • 또한 새로운 시스템은 Medical school 관심을 기술적인 것으로만 한정시켰다. Modern Medical school 초창기부터 그들의 관심은 기질적으로 정의된(organically defined) 질병에 있었지, health care 시스템이라든가 사회적 보건 문제가 아니었다.
      • 이런 문제는 school of medicine 아니라 school of public health에서 다룰 것이라고 보았다.
    • 그렇지만 이러한 염려에도 즉각적으로 보이는 성과가 엄청났기에 반대의 목소리는 거의 없었다



질적연구 또는 양적연구를 평가할 때 해야 할 질문들

Questlons to Ask When Evaluatlng a Report of a Quantitatlve or Qualltatlve Research Study 



즉, 반대로 말하면, 논문을 작성할 때 아래와 같은 것을 고려해야 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Introduction

1. 연구 문제, 방법, 관찰결과(findings)가 연구자가 소속된 기관, 신념, 가치, 이론적 지향을 적절하게 반영하고 있는가?

2. 연구자가 연구대상(교육 방법, 프로그램, 교육과정, 사람 등)에 대해서 긍정적 또는 부정적 편향을 드러내고 있는가?

3. 문헌고찰 부분이 충분히 포괄적인가? 해당 문제와 관련된 연구를 포함하고 있는가?

4. 가설, 질문, 목적이 명확하게 기술되었는가?

5. 연구자들이 연구 가설, 질문, 목적의 중요성에 대해서 설득력있게 제시하고 있는가?

6. (양적연구) 각 변수들이 명확히 정의되었는가?

7. (질적연구) 각 변수의 측정방법이 그 변수가 정의된 방식과 일치하는가?

1. Are the research problem, methods, and findings appropriate given the researchers’ institutional affiliation, beliefs, values, and theoretical orientation?

2. Do the researchers express a positive or negative bias in describing the subject of the study (e.g., an instructional method, program, curriculum, person)?

3. Is the literature review section of the report sufficiently comprehensive? Does it include studies that you know to be relevant to the problem?

4. Are hypotheses, questions, or objectives explicitly stated, and if so, are they clear?

5. Do the researchers make a convincing case that each research hypothesis, question, or objective was important to study?

6. (Quantitative) Is each variable in the study clearly defined?

7. (Qualitative) Is the measure of each variable consistent with how the variable was defined?


Research Procedures

8. (양적연구) 표집 과정은 표본의 대표성을 잘 나타내주는가?

9. (양적연구) 관찰된 현상의 이해를 높이기 위해서 세부그룹을 설정하였는가? 

10. (질적연구) 표집 과정을 통해 연구자가 관심을 가지는 사례 또는 관심을 가지는 현상에 대해서 잘 보여줄 수 있는 사례가 선택되었는가?

11. (질적연구) 데이터 수집은 충분이 열심히 진행되었는가? (sufficient intensity)

12. 연구의 목적에 비추어 각 측정방법의 타당도는?

13. 연구의 목적에 비추어 각 측정방법의 신뢰도는?

14. 각 측정방법은 표본에 적합한가?

15. 연구 과정이 적절하고 명확하게 기술되어서 다른 사람이 재현할 수 있는가?


8. (Quantitative) Did the sampling procedures produce a sample that is representative of an identifiable population or of your local population?

9. (Quantitative) Did the researchers form subgroups that would increase understanding of the phenomena being studied?

10. (Qualitative) Did the sampling procedure result in a case or cases that were particularly interesting and from whom much could be learned about the phenomena of interest?

11. (Qualitative) Was there sufficient intensity of data collection?

12. Is each measure in the study sufficiently valid for its intended purpose?

13. Is each measure in the study sufficiently reliable for its intended purpose?

14. Is each measure appropriate for the sample?

15. Are the research procedures appropriate and clearly described so that others could replicate them if they wished?


Research Results

16. 적절한 통계적 기법이 사용되었는가? 만약 그렇다면 옳게 사용되었는가?

17. (질적연구) 면담 질문에 응한 개개인들이 어떻게 응답하였고 어떻게 행동하였는지가 생생히 묘사될 만큼 충분한가?

18. (질적연구) 연구자들은 연구 관찰결과(findings)의 타당성(soundness)을 검증하기 위해 데이터원과 데이터 수집 방법을 삼각측량(triangulate)하였는가?

19. (질적연구) 앞서 기술된 가설 또는 개념이 수집된 자료로부터 드러나는가(emerge)?


16. Were appropriate statistical techniques used, and were they used correctly?

17. (Qualitative) Did the report include a thick description that brought to life how the individuals responded to interview questions or how they behaved?

18. (Qualitative) Did the researchers triangulate their data sources and data-collection methods to test the soundness of their findings?

19. (Qualitative) Did clearly stated hypotheses or concepts emerge from the data that were collected?


Discusslon of Results

20. 수집된 자료를 분석한 결과가 연구를 통해서 연구자들이 내린 결론을 지지하는가?

21. 연구자들은 관찰결과에 대한 논리적 설명을 하고 있는가?

22. 연구자들은 관찰결과를 기존의 이론이나 이전 연구와 연결지어 설명하고 있는가?

23. 연구자들은 관찰결과의 일반화가능성을 적절히 보여주고 있는가?

24. 연구자들은 연구 결과에 영향을 줄 수도 있는 그들의 가치와 관점에 대해서 성찰(reflect on)하고, 그 영향을 최소화하고자 노력하였는가?

25. 연구자들은 관찰결과를 기반으로 하는, 또는 관찰결과에 의해서 제기된 질문에 대해 답하기 위한 추가적 연구를 제안하고 있는가?

26. 연구자들은 관찰결과로부터 현실(practice)에 대한 논리적 함의를 이끌어내었는가?


20. Do the results of the data analyses support what the researchers conclude are the findings of the study?

21. Do the researchers provide reasonable explanations of the findings?

22. Do the researchers relate their findings to relevant theory and previous research?

23. Do the researchers appropriately qualify the generalizability of their findings?

24. Do the researchers reflect on their values and perspectives and how these might have influenced

the study outcomes or steps that were taken to minimize their effect?

25. Do the researchers suggest further research to build on their findings or to answer questions that

were raised by their findings?

26. Do the researchers draw reasonable implications for practice from the findings?








Gall, Meredith D & Gall, Joyce P., (author.) & Borg, Walter R, (author.) (2007). Educational research : an introduction (Eighth Edition). Boston Pearson/Allyn & Bacon







A practical guide for medical teachers 
Chapter 16. Rural and remote locations (J. Rourke, L. Rourke)



o Introduction

¡ Rural medical education 농촌 의료인력의 훈련과 모집에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음.

¡ 이러한 효과는 이제 의학에 입문한 의과대학생부터 레지던트 수련중인 의사에게까지 광범위하게 작용함.

¡ 여러 학습 단계에 걸쳐서 Rural medical learner Urban learner보다 비슷하게 또는 이상 한다는 연구 결과들이 있음.

¡ Rural medical education 통해서 방면의 진로를 고려하게 수도 있으며, 의과대학은 이러한 의사를 키워내야 사회적 책무를 가짐.

¡ 농촌 지역의 의사는 다양한 임상 술기 역량을 가진 열성적인 교사가 있으며, 다양한 환자를 진료하고 있고, 지역사회-환자-의사 관계에 대해서도 있음.

¡ 농촌 지역에서의 교육은 상당히 다양할 있기 때문에, 교육에 앞서서 학생들은 무엇을 학습할 것인가를 알아야 하고, 농촌 의사들의 역할을 분명히 해야 하며, 농촌 지역의 교육이 전체 교육과정 어떤 역할을 하는지도 고려할 필요가 있음.

¡ 다음과 같은 단계로 생각해볼 있음.

- Before the learner arrives

- The first day

- During the rotation

- Assessment and wrap-up


o 학습자가 해당 지역에 도착하기에 앞서서(Before the learner arrives)

¡ 교수자 준비(Preceptor preparation)

- Rural medical teacher 다음과 같은 자세를 가져야

Ÿ 1. Welcoming learners as legitimate participants in a community of practice

Ÿ 2. Creating a central role for learners in patient care and teaching

Ÿ 3. Regularly engaging learners in self-reflection to monitor their progress

Ÿ 4. Helping learners discover learning opportunities in routine patient encounters

Ÿ 5. Using feedback to shape rather than evaluate learner performance

Ÿ 6. Creating an environment where learners felt comfortable practicing new skills with patients


¡ 프로그램 지원(Program support)

- 프로그램 차원에서 상당한 수준의 지원과 의견교환(의사소통) 필요함.

- 프로그램 관리자는 해당 지역을 방문하여 건설적이고 협력적인 자세로 해당 지역의 주요 이슈와 우려사항을 확인해야 .

- 농촌 지역 의사들에게 교수개발 프로그램을 제공하고, 프로그램 계획에 참여할 있게 해야 .

- 프로그램에 참여하는 학습자의 수준과 범위가 다양할 있기 때문에, 프로그램의 학습 목표와 이뤄져야 평가를 명확히 해야 .

- 교수자, 학습자, 프로그램의 기대와 요구, 역할과 책임을 명확히 해야

- 학생이 해당 지역에 가기 전에 학생과 관련한 주요 정보와 이슈를 미리 지역의 의사에게 제공할 필요가 있음.

- 교수자와 학습자 모두에게 원거리 학습 등을 활용한 지원을 제공해야 .

- 학습자가 이동, 숙박 등에 필요로 하는 재정적 지원을 해야 .


¡ 진료실 기타 직원(A well prepared physicians office and staff)

- 관련 직원들을 계획 단계에 포함시켜서 공간을 어떻게 사용하고, 스케줄을 관리하고, 환자와의 의사소통을 조정하는 것에 도움을 받을 있음.

- 효과적인 스케줄 조정을 위해서 직원(physicians office staff) 학생이 언제 와서 언제까지 머무는지 알고 있을 필요가 있고 학생의 술기 수준, 역할과 책임 등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함.

- 직원은 학생에게 가장 적절한 환자를 선택해주고 환자와 학습자의 질문에 적절히 응대함으로서 프로그램에 기여할 있음.

- 학습자가 해당 지역에 도착하기에 앞서서 필요한 자원을 파악하고 있어야 (날씨, 여행 정보, Social/Recreational opportunities, 숙박 정보 예약, 진료 스케줄 )


¡ 동료들의 참여(Engaged colleagues)

- 최근에는 시골에서도 공동으로 팀을 이뤄서 진료를 하는 의사들이 늘어나고 있음. Rural medical education에서 다양한 의사를 만나고 서로 다른 지식, 술기, 태도를 경험하는 것이 좋음.


¡ 병원과 관련 조직의 도움(Helpful hospital and healthcare organizations)

- Rural medical education 다학제간 팀의 협력적 진료를 경험할 있는 기회

- 실습이 시작되기 병원의 medical advisory committee 학생의 활동 수준과 감독 수준을 협의하여 적절한 프로토콜을 수립할 필요가 있음.


¡ 지역사회와의 파트너십(Community partnership)

- 지역사회는 지역에 실습을 나온 학습자를 반겨주고, 지역사회의 여러 사회적 활동에 참여시킴으로서 해당 지역 또는 농촌 지역에 대한 관심을 높이고 향후 진로 선택에 영향을 있음.


o 교육 (The first day)

¡ 교육 날은 긍정적인 인상을 심어주고, 역할과 기대를 분명히 하기 위해서 가장 중요한 시기라고 있음.

¡ 상호간의 기대, 역할, 책임을 분명히 하기 위한 어떤 형태의 계약서를 작성할 있음. 뿐만 아니라 잠재적인 문제, 우려, 학습자가 부재시에 어떻게 것인가 등에 대한 논의도 필요함.

¡ 해당 지역의 의사가 환자들에게 보내는 편지 또는 공지를 위해서 붙여놓은 안내문 등이 학습자와 환자를 연결시켜주는 역할을 수도 있음.

¡ 환자에 대한 학습자의 역할은 낮은 수준에서 출발하여 점차 높여가게 되며, 너무 많은 정보와 책임을 줘서 시작하자마자 어쩔 모르게(overwhelmed) 만들어서는 .


o 교육 기간 동안(During the rotation)

¡ 효과적인 교육을 위해서는 다음과 같이 따라야 .

1. Actively involves the student, providing adequate supervision and appropriate independence

2. Develops and fosters a supportive interpersonal relationship with the student to facilitate learning

3. Emphasizes problem solving and the understanding of general principles

4. Balances clinical ans teaching responsibilities

5. Demonstrates clinical and professional competence

6. Uses an organized approach, including goal setting and summation

7. Provides the student with ongoing feedback, assessments and evaluations


¡ 효과적인 scheduling 모두를 위해서 중요하며, 계획된, 유연성 있는 스케줄이 중요함. 매일 마지막에는 하루를 정리하고 토론할 있는 시간이 필요함.

¡ 학습자가 환자에 대해서 맡을 있는 역할은 학습자의 수준에 따라 다른데, medical teacher 학습자의 역량에 대해서 좀더 알아갈수록 학습자의 책임도 높아질 있음. 이상적으로는 학습자는 본인이 assess 환자의 follow-up care 맡는 것이 좋음.

¡ Clinical teaching 위해서 효과적으로 시간을 활용하는 것이 중요함.

¡ 의사-환자 관계라든지, 작은 지역사회 내에서의 사회적 관계와 같은 폭넓은 논의를 위한 시간을 따로 배정해주는 것이 좋으며, 학습자는 prefossionalism 대해서 배울 있고, 사회적으로 밀접하게 연결되어있는 상황에서 어떻게 의사가 개인과 직무의 경계를 조정해나가는지에 대해서도 배울 있음.

¡ 많은 medical teacher들은 지역의 리더십 역할도 하게 되는데, 의사들은 환자에 대해서 뿐만 아니라, 해당 지역사회와 지역의 보건의료시스템에 대해서도 차이를 만드는(make a difference)역할을 있음.

¡ 또한 Rural teacher 학습자에게 모델이면서 멘토의 역할도 있음. 학습자는 농촌 지역의 의사들이 자신들의 삶에 얼마나 만족하고 있는가를 쉽게 느낄 있으며, 해당 지역의 여러 직종간의 협력 정도도 쉽게 드러나기 마련임.

¡ 학습자도 마찬가지로 토론을 주도해나감으로서 상당한 기여를 있음.


¡ Observation/Demonstration/Feedback

- 학습자가 직접 관찰을 하고, 교수자가 직접 하는 것을 보여주고, 효과적인 프드백을 제공하는 가지 과정을 대체할 있는 것은 없음. 농촌 진료 상황에서의 일대일 교수-학습 방법은 학습자에 대한 빠른 평가 피드백의 이상적인 환경임.

- RIME 학습자의 발전 단계를 평가해나가는 데에 유용한 Framework.

Ÿ 1. Reporter : Consistently good in interpersonal skills; reliably obtains and communicates clinical findings

Ÿ 2. Interpreter : Able to prioritize and analyze patient problems

Ÿ 3. Manager : Consistently proposes reasonable options incorporating patient preferences

Ÿ 4. Educator : Consistent level of knowledge of current medical evidence; can critically apply knowledge to specific patients

- 학습자에 대한 직접 관찰(direct observation) 학습자와 교수자 모두에게 있어서 어떤 부분이 향상될 필요가 있는지 파악하는데 유용하며, 과소/과대 평가를 방지할 있음. 일부 프로그램의 경우 비디오 장비를 이용하기도 .

- 음악, 체육 등과 같은 영역과 마찬가지로 교수자가 우선 특정 술기를 시연(demonstration) 후에 학습자가 그것을 따라하는 방법은 의학교육에서도 술기 연마에 도움이 .

- 효과적인 피드백은 frequent, timely, specific, constructive 해야 .

Ÿ 1. Clarify : Ask for clarification of information and feelings as necessary

Ÿ 2. Good points first : Ask learner what he/she did well, Tell the learner what you observed that was done well

Ÿ 3. Areas to improve : Ask the learner to identify what he or she had difficulty with and what could be improved, Provide specific suggestions for improvement

Ÿ 4. Constructive summary : Mutually develop a constructive summary


o 평가 정리(Assessment and wrap-up)

¡ 의학교육에서 평가는 핵심 요소임.

¡ 매일 매일 이루어지는 비공식적 토론, 격력, 조언 등이 평가의 부분이며, rotation기간 내에, 그리고 rotation 마지막에는 공식적인 평가가 있어야 . 또한 마지막에 이루어지는 평가가 예고 없이(come as a surprise) 이루어지는 것은 적절하지 않음.

¡ 평가는 rotation 목적이 무엇이었느냐에 따라 달라지며 CanMeds roles 활용해볼 있음.

¡ 환자, 직원, 다른 의사들도 다면적인 피드백을 제공해줄 있고, 총괄 평가는 rotation 마치고 떠나기 전에 수행해서 평가 결과를 program 관리자 측에 제공하여 향후 학습자의 발달에 도움을 있어야 .

¡ 추가적으로 medical teacher 역시 학습자에 의해서 평가받을 필요가 있는데, 익명화 한다거나 이상의 학습자로부터 평가를 받는 방법 등이 효과적일 있음. 유사한 측면에서 숙박, 지역사회, 프로그램의 지원 등에 대해서도 학습자의 평가를 받는 것이 좋음.

¡ Rural medical education에서 학습자에 대한 평가에는 가지 특징이 있는데, 번째로 이러한 세팅에서는 학습자와 교수자의 관계가 가깝고 학습자의 수가 매우 적기 때문에 강점, 약점의 심도 있는 파악이 가능함. 그러나 Rural setting 특징으로 인해서 부정적인 평가를 주는 것을 어려워하는 경우가 많음.

 

o 문제 상황에 대한 대처(Troubled and troubling learners)

¡ 학습 기간동안 아프거나 정서적 스트레스를 받을 있음. 가족 친한 동료와 떨어져서 오는 스트레스, 교수자와 학습자가 지나치게 가깝기 때문에 생기는 갈등 등이 있을 있음.

¡ 학습자의 고립(isolation) 문제가 경우에는 이상의 학습자를 짝으로 배치하는 방법을 고려해볼 있음.

¡ 교수자와 프로그램은 학생이 도움을 필요로 적절한 진료 상담을 지원해줄 필요가 있으나, rural medical teacher 의사나 상담자의 역할까지 맡는 것은 지양하는 것이 좋음.

¡ 학습자가 심하게 아플 대에는 잠깐 지역을 벗어나게 해줄 수도 있음. 정신 질환과 같이 환자 진료에 영향을 있는 정도로 문제가 있을 경우에는 자살의 가능성도 배제해서는










Dent, J., & Harden, R. M. (2013). A practical guide for medical teachers. Elsevier Health Sciences.





7. Communication

 

THE IMPORTANCE OF COMMUNICATION

l  다양한 종류의 Communication이 존재함(Secretaries type letters, memoranda, reports…)

l  Communication은 학교조직의 혈액(lifeblood)같은 것이고, 개인과 그룹과 조직을 이어주는 것이다.

l  Chester Barnard “because the structure, extensiveness, and scope of organizations are almost entirely determined by communication techniques”

l  Daniel Katz and Robert Kahn : “essence of organization”

l  일반적으로 조직은 Communication에 거의 70~80%의 시간을 쓰고 있다.

THE COMMUNICATION PROCESS



l  의사소통의 장애요인은 대개 ‘transmission reception 사이’, 그리고 ‘receiving decoding 사이에서 발생함.

Ideating

n  Developing an idea, message or information to transmit to some individual or group

n  누구든 발신자(Sender)가 될 수 있음

Encoding

n  발신자가 자신이 보내고자 하는 idea symbolize하는 것.

n  수신자가 이해할 수 있게 Symbol을 잘 선택하는 것이 중요함.
(Symbol : words, nonverbal cues, pictures, diagram..)

n  Meaning cannot be transmitted

Transmitting

n  전송 : memoranda, telephone, computer, nonverbal cues

Receiving

n  Oral message의 경우 수신자는 ‘good listener’가 되어야 함.

Decoding

n  받은 메시지로부터 meaning을 해석해내는 것.

n  Because meaning cannot be transmitted, it cannot be received.

Acting

n  수신자는 어떤 형태로든 발신자에게 메시지를 받았다 또는 이해했다 와 같은 피드백을 줘야 함.

 


 

NONVERBAL COMMUNICATION

l  네 가지 형태 : Kinesis, Paralanguage, Proxemics, Chronemics

n  Kinesis : 표정, //다리/자세 등 Clothing 포함
(
양복 무늬는 Pinstripe > Solid > Chalk stripe > Plaid(격자) 순으로 권위적인 인상을 줌)

n  Paralanguage : voice quality, volume, speech rate, pitch, nonfluences (ah, um, uh), laughing, 누가 말하는가, 공간은 어디인가(Boss’s office)

n  Proxemics : Intimate zone(0~2fts), Personal zone(2~4fts), Social zone(4~12fts), Public zone(12fts<)

n  Chronemics : 시간의 활용 (미팅 시간에 늦는 것 등)

l  You cannot not communicate.



DIRECTION OF COMMUNICATION

l  네 가지 방향 : 하향, 상향, 수평, 대각

Downward Communication

n  활용 : clarify the goals, provide a sense of mission, assist in indoctrinating new employees

n  문제

u  직원은 듣고 싶은 말만 골라 듣는다(Subordinates select among various directives)

u  전달한 메시지가 잘 수신되었는지에 대한 노력과 시간 투자가 부족할 수 있음

u  상위 위계에 있는 사람이 특정 시기나 특정 주제에 관해서는 Channel 을 닫을 수 있음.

n  개선방안

u  Communication training program 도입

u  Administrator가 오피스에서 나와 직접 직원의 이야기를 듣는다 (Management by wandering around, MBWA)

u  정기적 supervisory-subordinate discussion을 갖는다.

Upward Communication

n  아래에서 위로 올라가는 Communication

n  문제

u  Subordinate는 자신에게 해가 될 정보를 윗사람이 아는 것을 좋아하지 않음.

u  수준 높은(higher-level) 관리자는 직원들을 의사결정 과정에 참여시킴으로서 Upward communication을 촉진함.

n  개선방안

u  Employee meeting (quality circle) : 직원의 수행에 방해가 되는 직무상의 문제, 요구 파악

u  Open Door Policy : 직원이 Administrator의 방에 들어올 수 있게 하는 것. 그러나 MBWA가 더 효과적인 방법임.

u  Employee Letters (신문고) : anonymous, all be answered, reply without delay

u  Participation in Social Group : unplanned upward communication에 효과적. 파티, 야유회, 골프모임 등

Horizontal Communication

n  같은 위계에 있는 사람들끼리의 의사소통. Cross-functional committees, council meeting

n  조직의 socialization process로서의 기능이 있음.

n  조직의 여러 기능이 서로 interdependent할수록 Horizontal communication이 필요함.

 

 

Diagonal Communication

n  다른 채널을 통한 communication이 불가능할 때에 중요함.

n  필요한 정보를 획득하는데 까지 걸리는 시간 지연을 줄여줌

The Grapevine

n  사람들은 나름의 Communication 채널을 만듦.

n  조직도에는 드러나지 않으며, 모든 informal communication을 포괄하는 개념.

n  Formal communication과 공존하고 있음.

n  Flexible하며 대체로 face-to-face communication의 형태, Rapid.

n  장점

u  Keep subordinates informed

u  Administrator subordinate attitude에 대해 알 수 있음.

u  Subordinate들의 감정배출구(safety valve for emotions)

u  공식적 절차에 앞서 새로운 정책에 대한 subordinates의 분위기 파악 가능

u  긍정적 코멘트를 통한 사기 증진

n  단점

u  Rumor : rumor를 줄이기 위해서는 다른 형태의 communication을 강화해야 함.

 

COMMUNICATION NETWORKS

Network Pattern

n  Network pattern

u  Derived from laboratory experiment

u  Centralize : Wheel network > Chain network > Y network > Circle network > Star network

n  Effectiveness of Different Networks

u  상황에 따라 effectiveness는 달라질 수 있음

u  Decentralized network에서 좀 더 morale이 높음.





Network Analysis

n  Survey sociometry 를 활용하여 분석. (rather than controlled laboratory experiments)

 


 



BARRIERS TO COMMUNICATION

Frame of Reference

n  같은 communication이라 하더라도 사람들은 학습/문화/경험에 따라 다르게 해석

n  발신자와 수신자가 동일한 Frame of Reference를 가지고 있다면 의사소통이 좀 더 효과적일 것.

Filtering

n  한 레벨에서 다른 레벨로 transmitting 되는 과정에서 일어남.

n  Downward, Upward 모두 일어날 수 있음.

u  Unintentional filtering: encoding, decoding 과정, 학습/문화/경험의 차이

u  Downward-Intentional filtering: 발신자가 결정

u  Upward-Intentional: reward, promotion 등이 관련되었을 때 등

Structure

n  Communication efficiency는 정보가 수신자에게 도달할 때까지 거쳐야 하는 단계가 많을수록 낮아짐.

n  Tall structure : horizontal communication flow에 효과적

n  Flat structure : bottom에 사람이 많음. Gate keeping이 적고 vertical communication 활발. Administrator information overload에 걸릴 수 있음.

Information overload

n  원인

u  외부 환경의 변화가 심해지면서 불확실성이 높아짐

u  Role specialization & Task complexity

u  Communication technology의 발달

Semantics

n  같은 단어도 다른 의미를 가질 수 있음. “understanding”을 전달할 수는 없음.

n  Concrete word(paper, book) – Abstract word(emotional responses)

n  자기만의 용어(own professional jargon) : outsider들은 이해하지 못함.

Status Differences

n  상급자-하급자의 지위의 차이가 free flow of information을 저해함.

n  지위가 높을수록 일부 level이 사라지면 효과적인 의사소통이 불가능함.

n  Network analysis에서 볼 수 있듯 고위직과 하위직의 의사소통은 제한되기 마련임.

 

OVERCOMING BARRIERS TO COMMUNICATION

Repetition

n  다양한 채널로 같은 메시지를 여러 번 보냄. (Written and Oral )

Empathy

n  수신자는 발신자가 어떻게 반응할 것인지를 예측하여야 함.

n  수신자의 frame of reference를 생각함.

Understanding

n  수신자가 understandable words/symbol을 보내야 함. (Readability 포함)

n  Understanding cannot be communicated; only messages can

Feedback

n  Two-way communication이 필요.

n  Written message Face-to-face보다 피드백의 기회가 적음.

n  직접 물어볼 수 있음 : “내 의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요?”

n  Guidelines

u  피드백을 장려하되 강요하지 않기

u  피드백을 준 사람에게 보상하고 받은 피드백을 활용하기

u  필요할 경우 피드백을 기다리지 말고 직접 찾아 들어가기(go straight to the source)

u  받은 피드백에 대한 결과를 피드백해주기

Listening

n  듣는 데 쓰는 시간은 30%도 안됨.

n  Guidelines

u  Stop talking

u  Put the talker at ease

u  Show the talker you want to listen.

u  Remove distractions

u  Empathize with the talker

u  Be patient

u  Hold your temper

u  Go easy on argument and criticism

u  Ask questions

u  Stop talking

 

 

 






Lunenburg, F., & Ornstein, A. (2011). Educational administration: Concepts and practices. Cengage Learning.








System 4 Organization


n  Renis Likert, 관료제 모델 식의 조직에 반대하였음. 조직을 지지하는 세 개의 핵심 요소를 주장

n  System1 System4의 차이

u  System1 : 착취적, 권위적, 관료적, 전통적

u  System4 : 참여적, 팀 중심.

Organizational Characteristics

System 1 organization

System 4 organization

Leadership

Little confidence and trust between administrators and subordinates

Subordinate ideas are solicited and used by administrators

Motivation

Taps fear, status, and economic motives exclusively

Taps all major motives except fear

Communication

One-way, downward communication

Communication flows freely in all directions

Interaction-influence

Little upward influence; downward influence overestimated

Substantial influence upward, downward, and horizontally

Decision making

Centralized; decisions made at the top

Decentralized; decisions made throughout the organization

Goal setting

Established by top-level administrators and communicated downward

Established by group participation

Control

Close over-the-shoulder supervision

Emphasis on self-control

Performance goals

Low and passively sought by administrators; little commitment to developing human resources

High and actively sought by administrators; full commitment to developing human resources

 

n  System2 System1보다 덜 classical하고, System3 System4보다 덜 Supportive하다.


n  Key Elements of System4

u  (1) Manager’s use of the principle of supportive relationship,

u  (2) the use of group decision making in an overlapping group structure,

u  (3) manager’s high-performance goals for the organization

 

u  조직은 구성원들이 개개인으로서가 아니라 높은 수행목표를 가지고 고도로 효과적인 업무그룹(work groups)으로서 작동해야 최상의 기능을 발휘할 수 있다

u  “linking pin” : 리더는 linking-pin으로서, 한 그룹의 대표이면서 다른 더 높은 그룹의 일원이어야 한다.


n  System4 variables 

u  Causal Variables : 독립변수, intervening variable end-result variable에 영향을 줌

u  Intervening Variable :

u  End-result Variable : 의존변수, 조직의 성취를 나타냄


n  조직을 System4까지 끌어올리기 위해서 Likert survey-feedback method leadership training을 추천함.

u  Survey : 조직시스템의 8가지 특징을 측정하는 것. 문항별로 주어진 continuum에 대해서 조직이 어떤 상태에 있는가를 응답함

l  System1 : exploitative authoritative

l  System2 : benevolent authoritative

l  System3 : consultative

l  System4 : participative


n  Likert에게 있어서 효과성은 System4와 같이 가는 것이었으므로, 조직을 개선한다는 것은 system4로 경영스타일을 바꾸고 그것을 유지하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서 모든 관리자들을 훈련하는 것이 필요하다.









Lunenburg, F., & Ornstein, A. (2011). Educational administration: Concepts and practices. Cengage Learning.





Step 5. Implementation

- making the curriculum a reality

 

IMPORTANCE

l  성공적으로 교육과정을 도입하기 위해서는 충분한 자원, 정치적/재정적 지원, 행정구조가 뒷받침되는지 확실하게 해야 함.

l  네 단계

n  (1) 변화에 대한 요구를 확고하게 : 리더십을 개발하고, 지원을 끌어냄

n  (2) 변화에 대한 계획 : 교육과정, 임상교육장소 등을 깊이 생각하여, 교육과정의 목적이 이해관계자들에게 분명하게 전달될 수 있도록 함.

n  (3) 운영상의 문제가 나타날 때마다 신속하게 대응 : 우려가 즉각적으로 해소되지 않으면 교수들이나 직원들이 환멸(disillusion)을 느낌.

n  (4) 지속적인 재정지원과 평가절차를 통해 교육과정의 생명력을 유지하는 것

 

IDENTIFICATION OF RESOURCES

l  Personnel

n  Curriculum directors : 교육과정의 도입을 감독할 충분한 시간이 필요

n  Curriculum faculty, Instructors : 교육기술이 뛰어나고, 교육내용을 알고 있어야 함.

n  Curriculum administrator (Support staff, administrative assistants) : 예산, 교육자료, 평가보고서 등을 준비해야 함.

n  Additional personnel (SP, patients)

l  Time

n  Curriculum director는 교육과정 운영을 조율해야 함.

n  교수들은 교육을 준비할 시간과 강의에 투자할 시간이 필요하며, 학습자에게 피드백을 줄 시간 필요

n  Implementation plan은 교수에 대한 보상(compensate, reward), 수용(accommodate)등을 포함해야 함.

n  학습자는 계획된 수업에 참석하는 것 외에도 읽고, 성찰하고, 스스로 공부할 시간이 필요

n  Support staff member도 일을 할 시간이 필요하며, 그들의 임무를 명확히 규정해주는(clearly delineating their responsibilities)것이 교육과정 도입에 필요한 시간을 예상하는데 도움이 된다.

n  교육적 연구를 하기 위해서는 targeted needs assessment 의 한 부분으로 수행된다. 연구에 대한 IRB의 리뷰와 승인이 필요하다.

l  Facilities

n  가장 단순한 교육과정은 모임을 갖고, 강의를 할 공간만 있으면 되나, 임상 교육과정은 관련된 장비를 제공해줘야 한다.

n  Audio or video equipment, computer등과 같은 특별한 교육 장비가 필요할 수 있다

n  임상 지식 습득을 위한 교육과정의 경우 학습자가 임상경험을 할 수 있는 장소가 필요하다.

l  Funding/Costs

n  어떤 교육과정은 기존의 자원을 재배치하는 것으로 충분할 수 있다. 만약 이러한 경우라면 재배치로 인해서 포기해야 하는 것이 무엇인지 생각해봐야 한다(hidden cost/opportunity cost)

n  추가적인 funding이 필요하든 그렇지 않든, 어떻게 fund를 받아야 하며, 실제 비용이 얼마인지 계산해보는 작업은 필요하다.

 

OBTAINING SUPPORT FOR THE CURRICULUM

l  Internal Support

n  교육과정개발자와 코디네이터는 교육과정의 이해관계자가 누구이고, 지원분위기를 조성할 수 있는 사람이 누군지를 알아야 한다. 대부분의 경우 학습자, 교수, 행정력을 가진 사람들이 주로 포함된다.

n  학습자의 지원을 받을 수 있는지 여부에 따라 교육과정은 완성될 수도, 부서질 수도(make or break)있다. 성인학습자는 교육의 목적과 목표가 그들에게 중요하다는 것에 대한 확인이 필요하며 교육과정은 그들의 개인적인 목표 달성의 수단이 될 수 있어야 한다.

n  교수들은 교수마다 투자할 수 있는 시간, 열정, 에너지가 다르다. 행정적 영향력을 미칠 수 있는 교수라든가, 제한된 교육과정 공간(space)을 가지고 경쟁하는 입장에 있는 교수들은 교육과정을 촉진할 수도, 벽이 될 수도 있다.

n  집행부(administrative authority)는 재정, 공간, 교수 시간, 시수, 정치적 지원을 줄 수도, 주지 않을 수도 있다.

n  교육과정이 중요하고, 효율적이고, 인기가 있다고 믿는 사람이라든가, 교육과정이 조직에 긍정적 영향을 준다고 믿는 사람, 교육과정에 투입된 사람이 교육과정을 더욱 지지할 가능성이 높다. 따라서 이해관계자들에게 적절한 논리적 근거(rationale), 평가 데이터를 제공하는 것 뿐만 아니라 계획에 따른 투입을 장려(encourage input)하는 것이 중요하다

n  교육과정 개발자들은 핵심 이해관계자들로부터 정치적 지원과 자원을 얻어내기 위한 협상을 해야 한다.

u  Collaborative or principled negotiation : 자리가 아니라 이해관계(interest)에 집중하고, 공통되는 기반(common grounds)를 찾아서 상대방의 필요를 이해하고, 상호 이익에 초점을 맞춘다.

u  Compromise solution

u  Compete for resources and support

u  Avoidance or accommodation

 

l  External Support

n  정부기관, 전문학회, 자선단체, 기업, 개인기부자 등이 있음.

n  정부나 전문학회와 같이 영향력을 가진 집단이 있고, 이 집단은 내적 지지(internal support)의 수준에 영향을 줄 수 있다. 교육과정 개발자들은 이러한 기관의 가이드라인이나 요구사항을 가져올 수 있다.

n  전문학회나 다른 기관은 교육과정개발자들이 사용할 수 있는 교육과정개발자원 또는 교수개발자원(curricular or faculty development resource)을 가지고 있을 수 있다.

 

ADMINISTRATION OF THE CURRICULUM

l  Administrative Structure : 교육과정은 자동적으로 돌아가지 않으며 행정체제(administrative structure)가 갖춰져야 한다. (교육과정의 문제는 누구와 논의해야 하는가? Syllabus는 언제 배부되는가? 평가 데이터는 언제 수집되는가? ) 주요한 정책의 변화는 Core faculty group의 지원을 받거나 광범위한 투입(broad input)이 이루어진 후에 시행되어야 한다.

l  Communication : 논리적 근거, 목표, 평가결과, 변화 등은 모든 관련 이해관계자들과 논의되어야 한다. 이해관계자들로의, 이해관계자들로부터의 의사소통 체계(line of communication)이 열려있어야 한다. Communication mechanism을 확립해두어야 한다.

l  Operation : 교육과정을 지원하는 중요한 기능들이 작동하기 위해서는 적절한 mechanism이 있어야 하며, 수업을 계획하고, 수업계획을 배부하고, 평가자료를 수집하고 분석하고, 의사소통을 지원해야 한다.

l  Scholarship : 교육과정개발자들은 논문이나 보고서를 통해서 결과를 발표하려고 하는데, 추가적인 자원이나 행정지원이 필요하다. 윤리적 문제를 해소하기 위하여 IRB의 가이드라인을 따라야 한다.

 

ANTICIPATING BARRIERS

l  새로운 교육과정을 시작하거나 이전 교육과정를 변화시키기 전에 행정, 기타 자원, 인력 등의 장애물을 미리 예상해보는 것이 좋다.

 

INTRODUCING THE CURRICULUM

l  Piloting : 새 교육과정을 공식적으로 도입하기에 앞서서 핵심적인 부분을 친분이 있거나 도입이 용이한 대상에게 시행해볼 필요가 있다. 핵심적 피드백을 받아서 중요한 교정을 할 수 있다.

l  Phasing in : 단계적 도입은 교육과정의 한 부분씩 이루어질 수도 있고, 전체 부분을 특정 학습자를 대상으로 할 수도 있다. 초기에 교수와 스텝들이 새로운 것을 학습하려면 노력이 필요하다. 교육과정의 도입이 문화적 변화를 동반하는 경우 단계별로 도입하는 것이 한번에 도입하는 것보다 저항을 줄일 수 있다.

l  Full implementation : piloting phasing-in 이후에는 교육과정 전체의 도입이 뒤따라야 한다. Pilot cycle의 교육성과 및 과정에 대한 평가자료를 그 이후 사이클 진행시에 개선하는데 사용할 수 있다.

 

INTERACTION WITH OTHER STEPS

l  교육과정을 처음 구상했을 때 필요할 것으로 생각했던 것이 실제 필요한 것보다 부족하다고 느껴질 수 있다. 교육과정개발자들은 낙담해서는 안되며 더 우선순위를 가다듬고 교육과정 목표, 전략, 평가에 집중할 필요가 있다.

l  교육과정을 도입하는 것은 지적훈련(mental exercise)를 현실로 바꾸는 것이다.






Step 4. Educational Strategies

- accomplishing educational objectives

 

Education is not the filling of a pail, but the lighting of a fire – William Butler Yeats

True teaching is not an accumulation of knowledge; it is an awakening of consciousness which goes through successive stages. – from a temple wall inside an Egyptian pyramid

Education is what survives when what has been learned has been forgotten – B.F. Skinner

 

DEFINITION

l  Goal Specific measurable objectives가 결정되면, 그 다음 단계는 교육전략을 개발하는 것이다.

l  교육전략에는 Content Method가 모두 포함된다.

n  Content : 교육과정에 포함되는 구체적인 material

n  Method : Content가 제시되는 방법

 

IMPORTANCE

l  교육전략은 교육과정의 objective를 달성하는 수단이다.

l  교육전략은 교육과정의 심장(heart)이며, 교육적 개입 그 자체다.

 

LEARNING THEORY

l  교육과정 개발자들은 학습, 특히 성인학습과 관련된 원칙과 이슈를 알아야 한다.

l  가르치는 것은 교육자가 하는 것이고, 배우는 것은 학습자 안에서 일어나는 일이다.

l  따라서 교육과정 개발자들의 일은 대체로 학습을 촉진하는 일이다.

n  Self-directed learning : 스스로의 학습에 책임을 갖고 계획하고 평가함

n  Experiences and culture : 학습을 촉진하고, 학습에 대한 접근을 돕는 다양한 경험

n  Reflection : 지난 경험을 성찰하는 것은 experiential learning의 주요 요소

n  Transformative learning : 학습자가 기존에 가지고 있던 신념, 가치관의 유의미한 변화

n  Learning environment : 기존의 가치관은 잘 변하지 않으므로, safe & supportive한 환경이 필요

 

DETERMINATION OF CONTENT

l  교육과정의 content는 학습목표로부터 나온다(flow from)

l  Step 3에서 학습목표에 사용된 명사(nouns)을 나열하면, 교육과정 content의 개요를 잡을 수 있다.

l  Syllabus를 만드는 것은 도움이 된다.

n  1) 학습자가 어디에 초점을 두어야 하는지를 알려주는 분명한 학습목표와 학습방법의 기술

n  2) 교육과정의 스케쥴

n  3) 교육과정에서 사용할 자료(읽기자료, 케이스 등)

n  4) 추가적인 학습자료

 

CHOICE OF EDUCTIONAL METHODS

l  General Guidelines

n  Objectives Methods사이의 일관성을 유지하라

u  학습목표를 Cognitive, Affective, Psychomotor로 나눈 뒤 교육방법을 선택할 수 있음.

n  다양한 교육 Methods를 사용하라

u  학습자의 학습유형(learning style)은 개개인에 따라 다르기 때문에, 학습자 중심적 교육과정에서 학습자의 선호도에 맞는 방법을 선택하는 것이 중요하다. 다양한 교육방법을 활용하는 것은 이러한 서로 다른 학습유형의 문제를 해결하는데 도움이 된다.

u  다양한 교육방법은 학습자가 흥미를 잃지 않게 하여 학습을 강화시킬 수 있는 기회가 된다.

u  높은 수준이나 복잡한 목표를 달성하고자 하는 교육과정은 보통 여러 영역을 다루기 마련이다.

n  가용자원을 바탕으로 실행 가능한(feasible)한 방법을 고르라.

u  교수자의 시간, 공간, 임상자료, 경험, 비용

u  Faculty development가 필요할 수 있음.

u  제한된 자원에서 달성할 수 있는 최대한의 수준은 어느 정도인가?


Methods for Achieving Cognitive Objectives

- Readings

- Lecture

- Audiovisual materials

- Programmed learning

- Discussion

- Problem-based learning

 

Methods for Achieving Affective Objectives

- Exposure (reading, discussions, experiences)

- Facilitation of openness, introspection, and reflection

- Role models

- 측정하기 어려울 뿐만 아니라 바꾸기도 쉽지 않다.

- 바람직하지 못한 태도는 지식의 부족으로 인해 나타날 수도 있지만, 기술이나 자신감이 부족해서 나타날 수도 있다.

Methods for Achieving Psychomotor Objectives

Skill or Competency Objs

- Supervised clinical experience

- Simulations (Artificial models, Role-plays, Standardized patients)

- Audio or visual review of skills

Behavioral or Performance Objs

- Removal of barriers to performance

- Provision of resources that facilitate performance

- Provision of reinforcements for performance

- 기술의 습득 과정 : 기술에 대한 안내à실제로 수행해볼 기회à자신의 수행을 성찰하는 과정à수행에 대한 피드백à사이클 반복

 

- 학습자의 행동을 변화시키는 것은 교육과정에서 가장 어려운 단계 중 하나이며, 새로운 기술이나 태도를 개발하였다고 하더라도 실제 임상상황에서 발휘한다는 보장은 없다.


Methods for Promoting Learner-Centeredness

- Formal or informal assessment of learner needs

- Tailoring of Educational content and methods to meet learners’ needs

1) 특정 학습유형이나 선호에 따른 교육방법 적용하는 것

2) 교육과정 목적에 맞는 특정한 요구를 충족시켜주는 것

3) 교육방법 사용시기와 목표를 달성시기를 유연하게 하는 것

4) 교육과정에 포함되지 않는 특정 학습목표를 포함시켜주는 것

Methods for Promoting New Competencies

Practice-Based Learning and Improvement

- Training in skills relevant to self-directed learning

- Independent learning projects

- Personal learning plans or contracts

- Use of learning portfolios

- Encouraging learners to formulate and answer their own questions

- Role modeling

- Training in teaching skills

System-Based Practice and Teamwork

- System-Based Practice

 * 팀에 다른 보건의료직을 포함시키기

 * 비용에 대한 피드백 제공

 * 비용효과성에 대한 케이스컨퍼런스

 * 질병관리프로그램을 경험할 기회

 * QI, Safety 팀에서 일할 기회

- Teamwork

 * 팀기능과 관련 기술에 대한 교육

 * 협동적 접근법과 경쟁적 접근법

 * 다학제간 팀에 참여할 수 있는 기회

 * 효과적인 팀워크의 모델을 경험

 * 자신이 속한 팀에 대한 평가

효과적인 자기주도적 학습자는

- 스스로의 학습에 대한 일차적 책임을 가진다

- 스스로의 학습목표를 명확히 할 줄 안다

- 자원과 교육전략을 성공적으로 활용할 줄 안다.

- 자신의 성취도를 정확히 평가한다.

- 필요에 따라 학습사이클을 반복한다.

 

시스템 기반 진료와 팀워크

“an awareness of and responsiveness to the larger context and system of health care and the ability to effectively call on system resources to provide care that is of optimal value

Methods for Promoting Professionalism

- Faculty role modeling

- Facilitated reflection on and discussion of experiences embodying professionalism

- Participation in writing professionalism goals

- Ethics consultation rounds

- Peer evaluations

- Participation in Honor Boards

- Participation in patient advocacy groups

- Service learning and volunteerism

- Attention of institutional and program leaders to the policies and culture of the training institution, as well as to the hidden and informal curricula that influence trainees

- Respect for others

- Compassion

- Cross-cultural sensitivity

- Effective communication

- Shared decision making

- Honesty and integrity

- Self-awareness

- Responsiveness to the needs of patients and society that supersedes self-interest

- Accountability

- Sense of duty

- A commitment to ethical principles

- Confidentiality

- Appropriate management of conflicts of interest

- A commitment to excellence

- Scientific knowledge

- Ongoing professional development






Step 3. Goals and Objectives

- focusing the curriculum

 

DEFINITION

l  요구가 결정되면, 그 요구를 충족시키기 위한 Goals and Objectives를 설정해야 한다.

l  A goal or objective is defined as an end toward which an effort is directed.

l  Goal : broad educational objective, Objective : specific measurable objective.

 

IMPORTANCE

l  Help direct the choice of curricular content and the assignment of relative priorities to various components of the curriculum

l  Suggest what learning methods will be most effective

l  Enable evaluation of learners and the curriculum, thus permitting demonstration of the effectiveness of a curriculum.

l  Suggest what evaluation methods are appropriate

l  Clearly communicate to others, such as learners, faculty, program directors, department chairs, and individuals from other institutions, what the curriculum addresses and hopes to achieve

 

l  Broad educational goal : 교육과정의 전체적인 목표 안에서 다양한 교육과정의 요소들 중 어떤 것을 선택해야 하는지에 대한 기준(criteria)이 될 수 있다.

l  Specific measurable objective : 교육과정의 내용을 다듬고, 적절한 교육법과 평가법 선택에 도움을 준다.

 

WRITING OBJECTIVES

l  교육목표를 서술하는 것의 중요성은 흔히 과소평가되곤 한다.

l  교육목표를 허술하게 서술하면 교육과정의 초점이 흐려지거나 비효율적이 되어, 원래의 목표를 벗어나 이리저리 떠다니게 된다.

Who

Will do

How much(how well)

Of what

By when?

1)

2) verb

3) criterion
condition of performance

4) noun

5) condition of performance

l  교육목표가 정확히 의도했던 대로 쓰여졌는가를 확인하기 위해서, 교육과정 개발에 참여하지 않았던 사람으로 하여금 교육목표를 리뷰하게 하는 것이 중요하다.

 


 

Table 4.1





 

TYPES OF OBJECTIVE (Learner, Process, Outcome의 목표)

l  Learner Objectives (Cognitive, Affective, Psychomotor domain)

n  Cognitive domain

u  “knowledge”라고 하면 지나치게 사실적 지식(factual knowledge)만을 강조하는 측면이 있다. Cognitive domain spectrum of mental skills를 모두 포함하는 개념.

u  Bloom’s taxonomy à Revised by Anderson et al.

l  1. Remember : To recall or recognize relevant knowledge

l  2. Understand : To construct meaning from information; to interpret, explain, compare, or summarize communications

l  3. Apply : To execute or implement a procedure in a given situation

l  4. Analyze : To break material into its constituents and determine how parts relate to each other to organize, differentiate, or assign an attribution

l  5. Evaluate : To make judgment based on criteria and standards

l  6. Create : To put elements together; reorganize; generate hypothesis; plan a project

n  Affective domain :

u  주로 “attitudinal” objective : specific attitudes, values, beliefs…

u  Cognitive domain에 비해서 겉으로 잘 표현하거나 측정하기 어렵다.

u  조직 내에서 실제 경험하는 것에 의해서 강화될 수 있어서(informal, hidden curriculum) 형식적으로 가르치는 것과 반대로 나타날 수도 있다.

u  성취 정도를 객관적으로 평가하기 어렵다고 하더라도, 교육과정 개발자들은 이 domain objective를 포함시켜야 한다.

n  Psychomotor domain

u  skill”, “behavioral” objectives라고 함. : 문진, 환자교육, 의사소통, 신체검진 등

u  Psychomotor objective를 작성할 때 학습자들이 그 skill을 할 수만 있으면 되는지, 아니면 그 skill을 지속적 행동(continuing behavior)으로 incorporate할 수 있어야 하는지를 지정해야 함.

 

n  Miller’s assessment pyramid : knows – knows how – shows how – does

u  Learning objective가 피라미드의 가장 높은 objective를 나타내긴 하지만, 이것을 달성하기 위한 여러 개의 enabling objective가 있다는 것이 중요하다.

u  Skill objective (knowledge) à Performance objective (knowledge, attitudes, skills)

n  Objectives가 여러 개의 domain으로 구성되어 있을 경우, 각각을 따로 쓰는 것보다 Highest order objective를 서술하는 것이 효율적일 수 있다.

 

l  Process Objectives

n  교육과정의 implementation과 관련.

n  학습자에게 기대하는 참여의 수준, 만족도, 반응의 정도 등이 포함될 수 있음

n  Logic model (visual representation of causal links) 에서는 “output”이라고도 함.

l  Outcome Objectives

n  Health, health care, patient outcome과 관련된 objective

n  Quality of care patient outcome에 손쉽게 측정가능한 효과가 나타나기를 기대하는 것은 비현실적이지만, 대부분의 교육과정은 이것들에 긍정적인 영향을 주도록 설계되어야 한다.

 

ADDITIONAL CONSIDERATIONS

l  대부분의 교육적 경험은 미리 인지된(preconceived) 목표보다 훨씬 더 넓은 범위를 포괄한다. 예를 들어, 학생은 임상 실습을 돌며 환자들과 기대하지 않았던 경험들을 하게 된다.

l  Exhaustive list of objective도 좋지 않지만, goal/objective가 정확히 기술되지 않는 것도 문제이다.

l  Manageable number of specific measurable objectives

n  Interpret the goals

n  Focus and prioritize curricular components that are critical to the realization of the goals

n  Encourage creativity, flexibility, and nonspecified learning relevant to the curriculum’s goals.

l  목표대상의 요구를 만족시키는 Manageable number of specific measurable objectives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교육목표를 작성하는 단계가 몇 차례 반복되어야 한다.

 







Step 2. Targeted Needs Assessment

- refining the foundation

 

DEFINITION

l  GNA에서 얻은 지식을 특정 학습자와 특정 학습환경에 적용하는 과정이다.

l  Ideal characteristics Actual characteristics의 차이를 평가함으로써 구체적인 요구(Specific needs)를 알 수 있다.

 

IMPORTANCE

l  It allows the problem to be framed properly and for stakeholders to be involved in the process of finding solutions

l  “a needs assessment can align resources with strategy, build relationships among those who have a stake in the situation, motivate learners, clarify problems or opportunities, set goals for future action, and provide data for decision making

l  두 단계로 이뤄짐 : 1) the targeted learners, 2) the targeted environment

l  목표 대상과 목표 환경의 요구는 일반적인 요구와 다를 수 있기 때문에 TNA를 제대로 하지 않으면 이미 잘 이뤄지고 있는 교육과정에 불필요한 자원을 투자한다거나, 요구와 전혀 다른 부분에 자원을 투자하게 될 수도 있다.

 

IDENTIFICATION OF TARGETED LEARNERS

l  목표대상(Targeted learners)은 학습을 통해서 문제 해결을 하는데 가장 기여할 것 같은 그룹이 되어야 하나, 현실적으로는 교육과정 개발자들에게 이미 목표대상이 주어진 경우가 많다.

 

CONTENT

l  Content about Targeted Learners

l  Content about the Targeted Learning Environment

 


 

Table 3.1











 

METHODS

l  General Considerations

n  기존 자료가 있거나, 만약 없다면 어떻게 얻을 수 있을지를 생각해서 얼만큼의 시간, 노력, 자원을 투자할 것인가를 결정해야 한다. 자원은 언제나 제한적이기 때문에 필요한 정보의 우선순위를 정해야 한다.

n  정보 수집에 가장 좋은 방법은 무엇일지 결정해야 한다.

u  1. What standards of representativeness and accuracy will be required?

u  2. Will subjective or objective, quantitative or qualitative data be preferable?

n  만일 교육과정 개발을 맡은 그룹 내에 의견의 불일치가 심하다면 학습자 요구도에 대한 좀 더 rigorous, representative, objective, quantitative assessment가 필요할 수 있다.

l  Specific Methods

 

 

Table 3.2



 

 

l  Surveys

n  면접(Interview), 포커스 그룹(focus groups), 설문조사(questionnaires) 등의 방법을 사용할 수 있다.

n  Survey시에 유의사항 : 표본집단과 그 선택방법, 문항이 분명하게 기술되고, survey에 포함된 근거가 있어야 함. Survey의 길이와 질문의 민감도, 응답률. 응답자에게 survey에 대해 알려주어야 함.

 

Table 3.3



RELATION TO OTHER STEPS

l  TNA에서 모을 정보는 goal or objective로 기대하는 것이 무엇인가에 따라 달라질 수도 있고, educational and implementation strategies에 따라 달라질 수도 있다. 교육과정 개발의 다른 과정들이 TNA에 영향을 줄 것이다.

l  요구조사의 과정은 교육과정의 publicity를 높여주고(advance publicity), 이해관계자들의 참여를 높여주며, 교육과정의 implementation을 쉽게 해준다. 따라서 TNA가 진행되는 동안 다른 과정에 대해서 미리 고려해보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SCHOLARSHIP

l  잘 이루어진 TNA는 다른 학교/기관의 교육과정 개발자들에게도 도움이 될 수 있다.

 

CONCLUSION

l  목표대상과 목표환경의 특징을 분명하게 함으로써 교육과정이 general needs를 반영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학습자와 학습환경의 specific needs에도 적절히 부응할 수 있다.

 


 

Table 3.4

 

 









Step 1. Problem Identification and General Needs Assessment
- building the foundation for meaningful objectives

 

Medical instruction does not exist to provide individuals with an opportunity of learning how to make a living, but in order to make possible the protection of the health of the public – Rudolf Virchow

 

DEFINITION

l  to identify and characterize the health care problem that will be addressed by the curriculum, how it is currently being addressed, and how it should be addressed

l  General needs assessment = Problem identification = How it should be addressed – How it is currently being addressed

 

IMPORTANCE

l  문제를 잘 정의할수록, 문제 해결을 위한 교육과정을 만들기도 수월해진다.

l  Step 1이 특히 중요한 것은, 이 단계를 통해서 교육과정의 일반화가능성(generalizability)를 확보하여 교육과정이 성공적으로 보급될 수 있도록 한다(dissemination of a successful curriculum)

 

IDENTIFICATION OF THE HEALTH CARE PROBLEM

l  의학교육에서 교육과정의 궁극적인 목표는 대중 또는 인구집단의 건강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다.

l  문제가 제대로 정의되지 않으면, 매우 단순한 문제도 어떤 intervention으로도 해결되지 않을 것이다.

l  문제를 포괄적으로(comprehensive) 정의해야 한다.

 

Table 2.1

 

GENERAL NEEDS ASSESSMENT (TABLE 2.2)

l  Current Approach

n  job analysis라고도 하며, 문제 해결을 위해서 현재 어떤 것이 이뤄지고 있는가를 살피는 것.

n  Patient, Health care professionals, Medical educators, Society가 어떻게 문제를 다루는지를 본다.

u  Patient의 행동양식 : 교육과정 content 결정에 중요

u  Health care professionals의 행동양식 : target audience 결정에 중요

u  Medical educators의 행동양식 : 대부분의 중요한 문제들은 이미 많이 다뤄져 있음.

u  Society의 행동양식 : 현재 사용되는 문제접근법의 societal context 이해

 

Table 2.2

 

n  교육과정을 개발하는 사람은 인간 행동의 ecological perspective도 잘 알아야 한다. 또한 human behavior change에 대한 기본 이론을 이해하고 있어야 한다.

u  1) Human behavior is mediated by what people know and think

u  2) Knowledge is necessary, but not sufficient, to cause a change in behavior

u  3) Behavior is influenced by individual beliefs, motivation, and skills as well as the environment

n  해결하고자 하는 문제를 악화시키거나 완화시키는 다양한 종류의 요인들을 이해해야 한다.

u  Predisposing factors : 문제와 관련된 행동을 바꾸거나 바꾸지 않게 하는 사람들의 지식, 태도, 신념.

u  Enabling factors : 문제 행동을 변화시키는 것을 돕거나 또는 막는 개인의 기술(skills)이나 사회/환경적 힘

u  Reinforcing factors : 바람직한/바람직하지 않은 행동을 지속/중단 시키는 보상이나 벌

n  Ideal Approach

u  task analysis”라고도 하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해야 하는 구체적 “task”를 평가하는 것.

u  마찬가지로 Patient, Health care professionals, Medical educators, Society가 어떻게 해야 하는가를 본다. (교육자들이 혼자서 문제를 해결할 수는 없을 것이다.)

u  Ideal approach에 중점을 두어야 하지만, rigid해서는 안되며, 생각하고 있는 ‘ideal approach’가 있다면 그 기저(basis)가 무엇인지 공개해야 한다.

u  강력한 과학적 근거가 있는 이상적접근법보다, 개개인의 의견을 바탕으로 한 이상적접근법이 우선되어야 한다.

n  Differences between Current and Ideal Approaches

u  General needs assessment에서 밝혀진 둘의 차이가 주요한 목표(target)가 된다.

 

OBTAINING INFORMATION ABOUT NEEDS

l  Finding and Synthesizing Available Information

l  Collecting New Information

 

Table 2.3

 


TIME AND EFFORT

l  교육과정 개발에 참여하는 사람들은 시간과 노력을 얼마나 쏟을 것인가를 결정해야 한다. 너무 시간을 적게 쏟으면 문제를 제대로 해결하기 어려울 뿐만 아니라 “reinventing the wheel”이 될 수도 있다. 반대로 여기서 너무 시간을 많이 쏟으면 교육과정 개발의 다른 단계에 사용되어야 할 자원이 너무 적어질 수도 있다.

l  시간의 압박에 의해서, 또는 기존에 존재하는 교육과정의 유산(inheritance)에 의해서 General needs assessment Problem identification이 제대로 되기 전에 교육과정이 개발되어버릴 수도 있다. 이런 경우에는 이 단계로 다시 돌아와서 확인하는 것이 도움이 된다.

 

CONCLUSION

l  교육과정 그 자체로 모든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다. 문제가 복잡할 경우에는 더욱 그렇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단계는 교육과정을 한 곳에 집중시킨다는 의미에서 필수적이며, 문제 해결에 의미 있는 기여를 할 수 있게 될 것이다.

l  이 단계에서 내려진 결론은 특정 그룹의 학습자나 기관에는 적합하지 않을 수도 있다. 따라서 목표집단(targeted learners and institutions)의 구체적인 요구(specific needs)를 사정하는 것이 필요하다.







교육과정 개발의 여섯 단계

Overview : A Six-Step Approach to Curriculum Development







1. Problem Identification and General Needs Assessment

- Health Care Problem

- Current Approach

- Ideal Approach


2. Targeted Needs Assessment

- Learners

- Learning Environment


3. Goals and Objectives

- Broad Goals

- Specific Measurable Objectives


4. Educational Strategies

- Content

- Method


5. Implementation

- Obtaining Political Support

- Securing Resources

- Addressing Barriers

- Introducing the Curriculum

- Administering the Curriculum


6. Evaluation and Feedback

- Individual Learners

- Program




















  • Future Directions

  • Health care cost 대한 논의는 의학교육자들과 대중이 공동으로 생각하는 문제와 연결된다. Medical School 어느 정도의 지원을 받아야 하며, 누가 비용을 지불해야 하는가?
  • 의학교육자들은 지원이 감소하는 이러한 상황을 수동적으로 보고만 있지는 않았다. 종종 William Welch Franklin Mall같은 사람들은 기업과 손을 잡고 대학의 biomedical research 지원하고자 했다.
  • 그러나 이러한 계약은 교육계와 과학계에서 논란이 되었는데, 각각이 나름의 안전장치를 마련해두고 있음에도 많은 사람들은 Conflict of interest 우려했다. 그러나 연방정부의 지원이 미적지근한 대학은 이러한 기업의 지원을 찾을 밖에 없었고, 잠재적으로 WWI 시기의 foundation 발전이나 WWII이후의 NIH 영향을 미친 것도 사실이다.
  • 그러나 기업-대학의 연합은 기존의 funding source 완전히 대체한 것은 아니었고, 보조적 역할을 것이었다. 그리고 지점에서 대중들은 이것이 MS에게 어느 정도의 가치를 갖는가를 생각해봐야 것이다. Health care 얼마를 것인가는 궁극적으로 대중들이 결정하는 것이고, 이는 윤리적, 사회적 우선순위의 문제이지 경제학의 문제가 아니다.
  • 미래에 누가 MS 재정 지원을 것인가와 별개로, 혹은 연구가 academician 원하는 만큼 지원되어야 하는가에 대한 문제와 별개로 현재 미국 의학교육의 시스템은 견고해 보인다. Medical practice 변하지 않았다고 말할 수는 없다. 의사들은 많은 규제와 적은 자율권만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corporate medicine 등장도 변화 하나이다.
    • Investor-owned for-profit hospital chain : Hospital Corporation of America, Humana, American Medical International.
    • 이러한 chain들은 기존의 윤리적 assumption 위반하면서 운영되고 있음에도 점차 커지고 있다. 그리고 또한 이들은 이미 의사 고용을 통해 medical practice 영향을 미치고 있다.
  • 현재 미국 medical practice 대한 insight corporation 등장에 맞추어가는 쪽으로 변화하는 중이다. 그러나 의학교육의 insight 1920 이미 corporate form 갖추었기 때문에 별로 변하지 않았다. Corporation university 실제 형태와 같았다. plant, facilities, staffs, financial resource등등. MS 강력한 executive "chief" 의해 운영되었다. Employees 환자를 보는 것을 통해서 직접적으로 보상을 얻은 것이 아니라, academic promotion 통해서 보상받았다. 이러한 것들은 지난 60년간 MS 일관되게 유지해온 특징들이다.
  • 실제로, 성숙한 미국 MS들은 다양한 medical practice setting 속에서 그들의 임무를 수행해왔다. 20세기 초의 변화는 '장소' 관련된 것이었는데 practice 위치가 환자의 집에서 의사의 진료실로 바뀌었다. 또한 solo practice 감소해왔고, HMO 내에서의 group practice salaried practice 증가했다.
  • 미국 의학을 다른 측면에서 보자면, 우리가 현재 알고 있는 private practice 없는 것은 상상할 있을지 몰라도, well-trained doctor strong medical school 없는 모습은 상상하기 힘들 것이다. 좋은 의사는 계속 필요할 것이고, MS들에게 주어지는 도전은 그러한 의사를 키워내는 것이다. 많은 것들이 앞으로도 이뤄져야 하지만, 대가로 좋은 의사 또는 좋은 MS 포기하는 것에는 아무도 동의하지 않을 것이다.
  • 따라서 좋은 의사를 키워내는 문제는 다시 전통적인 논의로 돌아간다. 학생들이 즉시 알아야 것들은 많은데, 그것을 개념화하고 질병의 정신적 사회적 측면을 배울 시간은 부족하다.
  • 이러한 문제는 전혀 새로운 것이 아니며 1909 AAMC president Eli H Long "현재 미국 의학 교육과정에서 가장 부족한 것은 학생들의 문제를 논리적으로 사고해서 풀어내는 능력이다."
    • 그러나 이런 문제를 해결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너무나 달성하기 어려운 목표이다.
  • 어떻게 이러한 문제가 해결될 있을까? 만약 우리가 '생각하는' 의사를 키워내고자 역사에서 배워야 것은 (1)'curriculum' 바꾸는 것은 별로 효과가 없다는 것이다. 알아야 내용을 적절히 구조화하여 제시하는 것은 중요하지만 핵심은 아니다. 중요한 것은 학생들을 선발할 independence, critical capacity 평가해서 선발해야 한다는 것이다. MCAT 성적은 지원자를 스크리닝 하는데만 사용하고, 최종 선택은 "ability to learn independently", "ability to critical analytical skill" 의해 이뤄져야 한다. 지속적인 노력이 중요하다.
  • '생각하는' 의사를 키워내기 위해서는 또한 (2) Medical School들이 연구나 grant 따는 것이나 환자 진료를 강조하는 만큼 교육을 강조해야 한다는 점이 하나의 역사에서 배울 있는 교훈이다. Critical thinker 되기 위해서 학생들에게는 충분한 관리감독과, 많은 관심을 들여야 하고 교수자는 Socratic dialogue 식의 시간과 노력을 들여야 한다.
    • GPEP report 말한 것처럼, MS 다른 분야에 관심을 쏟는 것이 의학교육에 영향을 미친다.
    • 교육이 번영하기 위해서는 학교들은 좋은 선생님에게 많은 salaries 제공해야 한다.
  • (3) 마지막으로 MS caring doctor 키우기 위해서는 기존의 교수법의 한계점을 인식해야 한다. 최근 많은 학교들이 medical humanities 가르치기 시작했다. 그러나 compassion 지식처럼 학습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도 인지해야 한다.
    • 동시에 반대로 Caring 까지도 교육이 가능하다는 생각도 수는 있다.
    • 아무튼 이것이 GPEP report value attitude 기반한 학생 선발과 교수와 학생간의 mentor relationship 그토록 강조했던 이유이다.
  • 현재 의학교육은 언제보다도 가장 강력한 도전을 맞닥뜨리고 있다. 과학과 기술의 망령이 퍼지고 있다. 정보의 맹공격은 세기 전보다도 심해졌다. 새로운 기술이 자체로 생명력을 가지게 되면서 사회를 위해서 존재하기보다 사회 위에서 군림하려 하고 있다. 어떻게 이러한 기술을 적절히 활용하는 방법을 가르치는 것이 중요하다.
  • 의학기술이 퍼지는 것은 의사들 뿐만 아니라 대중들도 염려하고 있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기술을 이용하는 것은 비인간적이고 비정상적으로 비싼 의료로 귀결되기 때문이다.
    • 결국 의료의 많은 문제들은 의학교육의 문제로 환원된다.
  • 의료가 기술에 의해서 압도(dominated) 당하면서, 세기 이전부터 발전시켜온 의학교육의 이상이 어느 때보다도 중요해졌다.
    • 앞선 선구자들(Charles Eliot ) 강조했던 바와 같이 의학교육은 결과보다는 과정을 중시해야 하며, 단순 암기보다는 생각할 아는 의사를 만들어야 한다.
    • 생각할 아는 의사는 검사는 적게 하며, 결과로 환자의 비용 부담을 줄이고, 위험 또한 줄일 아는 의사라 있다.
    • 비판적인 사고는, 과학과 기술을 활용할 있게 해준다. 비판적인 사고를 달성하는 것은 쉽지는 않지만, 최근들어 어느 때보다도 중요해지고 있다. 의학교육자들은 한때 목적을 달성하는데 실패했지만, 그렇다고 절대로 포기해서는 것이다




  • Success and Failures

  • 19세기 중반 누구도  세기 후의, 심지어 25 후의 의학교육 변화를 예측하지 못했다. 의과대학은 커다란 사업(business) 되었다.
    • 명의 교수자가 강압적으로 숨이 막힐 하게 진행했던 강의는 사라졌다.
    • 16주에서 34~36주로 늘어났고, 2 term에서 4term으로 늘어났다.
    • 새로운 실험실이 만들어졌고, 새로운 도서관과 박물관이 생겼다.
  • 이와 유사하게 19세기에는 또한 누구도 국가 교육시스템에서 Medical School 위치를 인지할 없었다. 그러나 MS 이전의 지위를 벗어나서 university 포함되었다. 의사가 되기 위한 다양한 방법(apprenticeship, house pupil system, private summer school) 모두 사라졌다.
  • MS 국가 교육 체계의 다른 요소들과 밀접한 관련을 맺게 되었는데, 층위로 시스템(grammar school, high school, college, graduate and professional school)에서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다.
    • 높은 유급율은 매우 낮아져서 1970년대에는 사실상 의대에 들어간 모든 학생이 의사가 되었다.
  • 20세기의 미국 의학교육은 세계에서 최고 수준을 자랑했고, 한때 유럽보다 낮은 지위에 있던 것이 이제는 전세계적 부러움을 샀다.
  • 미국 의학 연구는 의학교육과 마찬가지로 매우 두드러져서, 20세기 미국 MS들은 19세기와는 달리 original investigation 위한 secure home 되었다.
    • 1934년에는 George Whipple, George Minot, William Murphy 미국 의사로서 처음 노벨상을 받았다.
  • 의학교육이 성숙하면서 medical profession 같이 성숙해갔다. 약하고 체계적이지 못했던 시절에서 벗어나 medical profession 강력하고 통합화되었다(unified).
    • 하지만 profession cohesive해짐과 동시에 또한 heterogeneous해지기도 했다. 19세기 중반에 거의 대부분의 "regular" physician private practitioner였다. 하지만 20세이게 이르러서 academic medicine, hospital administration, public health… 등등으로 구분되었다.
    • 여러 의사간의 반목과 불화가 많아졌다.
    • 이러한 다양해진 직업군을 빼놓고서는 시대의 profession 발달과정을 제대로 설명할 없다.
  • 의학교육 시스템의 성장에 있어서 모든 직업군들은 나름의 목표를 달성했다. Academic medicine 지향하던 의사들에게 이제 career opportunities 존재했다.
  • Practitioner 그들의 꿈을 이렀는데, profession of medicine 명예와 권력과 높은 수입을 얻었다.
  • 근대 의학교육이 발달하는 과정에서 대중들도 이익을 보았는데, 19세기 중반에는 의학의 효과성에 대한 의문이 많았지만, 이제는 상황이 많이 달라졌고, 추가로 대중들은 평균적인 의사들이 받는 training 신뢰하기 시작했다.
  • 하지만 근대 의학교육의 혜택은 상당한 비용을 수반했다. 하나는 시스템을 만들어낸 academic community에게 부과되었는데, 모든 professor들이 이제 테뉴어 위원회, 연구 재단 등등의 눈치를 봐야 했다. Medical professor 그들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 일하고 있었다.
  • Fund 따는데 있어서 이런 경향은 가장 심했는데, 학계에서 이룬 성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그들의 활동을 지원해주는 사람들에 크게 의존하게 되었다.
    • 지난 수십 동안 대놓고 통제를 하려는 경우는 적었어도, 어느 정도의 외부 개입은 항상 있었다. 그들은 자율권을 돈을 주는 사람들에게 넘길 밖에 없었다.
  • 추가로 academic physician 그들 자신의 성공의 희생양이 되었는데, 그들이 그들의 경쟁자를 키워낸 것이었다. WWII이후 환자들은 이상 specialty care 위해 부속병원에 필요가 없었고, 이에 따라 부속병원들은 공격적인 마케팅을 해야만 했다.
  • Practitioner들도 치러야 했던 비용도 상당했는데, 그들은 medical practice 독점하게 되었지만 의학교육에의 권한은 상실하였다. 리더십은 이제 academic establishment 옮겨갔고 가장 부유하고 기술이 좋은 의사들조차 지역을 벗어나면 장삼이사였다.
  • 추가로 practitioner 다른 직업군과 마찬가지로 그들의 새로운 사회적 위치가 상속가능한 것이 아님을 빠르게 깨우쳤고, 그래서 그들의 자식들은 의대로의 진학을 거부하기도 했다.
  • 의대 학생은 상당한 수준의 지적, 육체적 부담을 짊어져야 했다. 병원에서의 "on call", 교수자의 불합리한 지도, 막대한 학습 분량.
  • 이러한 상황을 나쁘게 만든 것은 4년짜리 프로그램이 의학지식의 기초밖에 가르쳐주지 못하는 현실이었다. 어떤 specialty 선택했냐에 따라 약간의 차이는 있지만, 대개 30 중반에 이르러서야 독립적 practice 하게 된다. 이론적으로는 의학공부라는 것은 평생 수도 있는 것이었다.
  • 게다가 길은 비싼 길이었고, 수업료는 인플레이션 수준을 훨씬 넘어서는 수준으로 상승하였다.
  • 수업료를 내기 위해 학생들이 냈던 빚은 쉽게 갚을 있는 수준이 아니어서, 의사의 과잉 공급을 감안하면 미래의 기대 수익은 낮아지게 되었다.
  • 이런 것으로 가장 어려움을 겪은 사람들은 중간 이하의 소득 계층이었다. 또한 소수자에 속하는 학생들이 감당해야 하는 피해도 컸다. 의학은 어느 때보다 사는 사람들의 전유물이 되었다.
  • 대중은 의학교육에 가장 비용을 지불한 사람들이었는데, 의학이란 것이 엄청나게 돈이 들어가는 분야이고 비용은 지속적으로 상승한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 돈은 점차 부족해졌고, 수업료가 오른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 Medical School들은 심지어 대학의 다른 학과들에게 손해를 입히는 상황에서조차 어디서 돈을 오는지는 신경쓰지 않았다. MS 확장되면서 대학의 income중에서 전체 학생의 0.5% 차지하는 MS 10% income 썼다. Welch, Eliot, Flexner같은 선구자들은 대학과 MS간의 이러한 질투 적대감을 미리 예측하지 못했다.
  • 대중들은 MS 점차 비싼 곳이 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modern health care 해줄 있는 것이 비싸다는 것을 더욱 기분 나빠했다.
  • 대중의 우려는 투자 대비 돌아오는 것이 적어졌다는 때문에 더욱 심각해졌다. 1달러를 투자했을 공공 보건에 돌아오는 이익은 20세기 50년에 비해서 훨씬 줄어들어 있었다.
  • 하지만 만약 이러한 것을 MS Medical profession 잘못으로만 돌린다면 그것은 대중들이 잘못한 것이다. 비용에 대해서 불만을 터뜨리면서도 전례없는 의료 수요의 증가가 있었고, 최근 Medicaid Medicare 비용을 줄이려는 시도에 대해서 많은 사람들이 정치 성향을 불문하고 반대하였다.
    • "health care cost 경제나 난립하는 신기술의 문제가 아니라 도덕과 사회적 우선순위의 문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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