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문직 윤리의 규명과 교육에서 덕윤리의 역할: 의료 전문직 윤리를 중심으로

유호종*

 



I. 서론


어떤 직종이 전문직(profession)으로 분류되 려면 적어도 다음의 특징을 갖추고 있어야 한다

  • 첫째, 복잡한 지식을 습득하고 체계적인 훈련 과정을 거쳐야 그 직종의 종사자가 될 수 있다

  • , 그 직종이 제공하는 서비스가 사회적으로 중 요한 것이다. 전통적으로는 의료직, 법률직, 성 직, 교육직 정도를 전문직으로 분류하는데 특히 의료직을 전문직의 가장 전형적인 형태로 보고 있다.


전문직은 생명건강, ‘정의, ‘구원, ‘지식등 인간에게 매우 중요한 가치들에 대한 서비스 를 제공할 뿐만 아니라 대개의 경우 이 서비스 제공을 독점하고 있다. 그만큼 전문인(profes­sional)이라고도 불리는 전문직 종사자들이 어 떻게 행동하는가에 따라 사회 구성원들은 큰 영 향을 받게 된다. 그래서 전문인의 윤리성 여부는 전 사회 구성원이 주의 깊게 살펴보아야 할 문제 가 된다.


우리나라의 경우 전문직 윤리가 제대로 정립 되어 있다고 보기 힘들다. 한국의 전문인들의 활동은 불합리한 기존제도의 틀 속에서 전문독 점에 의한 집단 이기주의적 경향을 띠고 있음[1]을 부인하기 어렵다고 평하는 사람도 있다. 그래서 전문직 윤리가 바로서야 한다는 요구가 계속 있어왔다. 다행인 것은 이런 요구가 예전에 는 주로 전문직 밖의 사람들로부터 나왔던 데 비 해 지금은 전문직 내부에서 스스로의 전문직 윤 리에 대해 문제 제기를 하고, 이를 바로 세우려 는 노력을 시작하였다는 점이다. 의료 전문직의 경우 1980년 가톨릭대학교 의과대학을 필두로 1990년에는 31개 의과대학 중 7개 대학, 1996년 에는 37개 의과대학 중 20개 대학, 2003년에는 41개 전 의과대학에서 의료윤리나 관련 교과목 을 개설운영하고 있으며[2] 그에 발맞추어 의료 윤리와 그 교육에 대한 학문적 논의도 활발히 일 어나고 있다.


중요한 것은 이런 노력들이 실제 전문인들의 윤리적 행동으로 결실을 맺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되려면 전문직 윤리에 대한 교육 내용이 윤리 지식이나 지침을 단순히 전달해 주는 정도 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 이런 차원에 머무는 윤 리 교육은 피교육자의 내면적 변화를 불러일으 키기 힘들다. 한 사람에 있어 윤리에 대한 태도 는 그 인격의 근저에 자리잡고 있다. 따라서 윤 리에 대한 논의와 교육 역시 근본적인 차원에서 철저하게 이루어져야 성과를 거둘 수 있다.


이 논문에서는 의료 전문직을 중심으로 전문 직 윤리 교육의 두 과제를 밝힌 다음(II), 윤리 학에서 제시된 대표적인 윤리설인 의무윤리와 덕윤리가 전문직 윤리 교육에서 왜 모두 필요한 지 밝힐 것이다(III). 다음으로 논의를 덕윤리 로 좁혀서, 전문직의 도덕적 의무는 막중하다는 것과(IV) 이런 점이 초래할 수 있는 부정적인 면과 살핀 다음(V) 이런 부정적인 면을 극복 하게 해 주는 교육의 길을 덕윤리가 제시해 준다 는 점을 밝힐 것이다(VI).

 

II. 전문직 윤리 교육의 두 과제


전문직 종사자가 윤리적으로 올바르게 업무를 수행하려면 크게 두 가지를 갖추고 있어야 한다. 그 중 하나는 높은 수준의 도덕적 판단능력이다. 왜냐하면 전문인은 업무수행 과정에서 어떤 행 동이 도덕적으로 옳고 그른지 쉽게 판단할 수 없 는 복잡한 상황에 처할 때가 많기 때문이다.


<사례 1> K(52, 남자)는 약물에 반응 이 없는 중증 근무력증으로 5년째 중환자실에 서 인공호흡기 치료를 받고 있다. 병든 후에 부인도 떠나버리고 결혼한 아들은 미국으로 이민을 가서 연락도 되질 않는다. 환자는 전신 의 욕창 등으로 고통이 심하고 더 이상 삶의 의미를 찾을 수 없다며 인공호흡기 치료를 중 단하고 편하게 죽게 도와달라고 지속적으로 요구하고 있다……. 환자 치료 중 검사결과에 서 혈중 칼륨이 8.5 mEg/L로 나타나고 심전 도에서도 이상을 보여 치료하지 않으면 심장 마비가 초래될 가능성이 크다는 것을 알게 되 었다[3].  

 

이 사례에서 환자는 혈중 칼륨이 정상치보다 많아 심장마비의 위험이 큰 상태다. 따라서 의사 가 환자의 이 상태를 치료하지 않으면 환자는 그 의 소원대로 빨리 죽음에 이를 수 있다. 이때 과 연 의사는 치료를 하는 것이 옳은 일인가 치료를 하지 않는 것이 옳은 일인가.


이 환자를 치료하면 환자가 원하지 않은 고통 스러운 삶을 늘리게 되고 치료하지 않으면 환자 의 생명이 단축된다. 어느 쪽으로 선택하든 도덕 적으로 바람직하지 않은 점이 남는다. 이런 도덕 적 딜레마 상황에서 의사는 빠른 시간 내에 올바 른 판단을 내려야 한다. 그러려면 의사는 상당히 높은 수준의 윤리적 판단능력을 갖추고 있어야 한다. 따라서 의료윤리 교육은 이런 판단능력을 의사가 갖출 수 있게 해 주어야 한다[4].


하지만 의사 등의 전문인이 이런 높은 수준의 윤리적 판단능력을 갖추었다 해도 이것만으로 는 그가 윤리적으로 옳은 행위를 할 것이라고 확 신할 수 없다. 때로 전문인들은 누가 보아도 잘 못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는 행동을 하기도 하기 때문이다.


<사례 2> 당신은 의과대학의 내분비 내과 교수이다. 내과학회에서도 중요한 직책을 맡 고 있다. 외국에서 개최되는 국제학술대회에 참석할 계획을 가지고 있으며 더욱이 그 학회 에서 논문도 한 편 발표할 계획이다. 그런데 당뇨병 치료제를 생산 판매하는 한 제약회사 로부터 이 학회 참가에 드는 항공료 및 숙박비 를 제공받았다. 학회참가 기간 중에는 이 회사 의 영업담당 이사와 저녁식사 및 골프의 접대 를 받았다[5].


위의 사례는 가공된 것이지만 이와 유사한 경 우들이 현실에서 실제로 발생하곤 한다. 이 사례 에서 의사가 제약회사로부터 항공료와 숙박비, 식사와 골프 접대를 제안받았을 때 어떻게 행동 했어야 올바른지는 분명하다. 제약회사가 제시 한 것들은 의사가 진료 시 자기 회사 약을 처방 해 달라고 부탁하는 리베이트이다. 이 리베이트 를 받게 되면 의사는 환자에게 가장 도움이 되는 약 대신 이 회사의 약을 처방하게 되기 쉽다. 그 래서 결국 환자가 피해를 입게 된다.

이런 리베이트를 받지 말아야 한다는 것은 누 구나 쉽게 알 수 있다. 그럼에도 그 의사가 자신 의 앎과는 다르게 이 리베이트를 받은 것은 자기 에게 돌아오는 이익 때문이다. 이렇게 자기 이익 과 도덕적 행위가 충돌할 때 자기 이익을 포기하 고 도덕적 행위를 하게 해 주는 것을 도덕적 의 지라고 한다. 이 의사에게는 이런 도덕적 의지가 없었기 때문에 옳지 않은 행동인 줄 알면서도 그 행동을 한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전문직 종사자에 대한 윤리 교 육은 그들이 높은 수준의 도덕적 판단능력과 함 께 강한 도덕적 의지를 갖추도록 해야 한다는 것 을 알 수 있다. 그런 전문인만이 올바른 행동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올바른 행동을 위해 도덕적 판단능력과 도덕적 태도가 필요하다는 것은 어느 직종에서든 마찬가지이다. 하지만 전 문직의 경우 그것이 요구되는 수준이 훨씬 높다. 먼저, 앞에서 본대로 전문직에서 발생하는 윤리 적 문제는 아주 복잡하고 근본적인 것이 많기 때 문에 그만큼 윤리적 판단능력이 고도로 요구된 다. 예를 들어 종합병원의 의사는 다른 사람들이 일생에 한두 차례 맞닥트릴 정도의 심각한 딜레 마 상황을 하루에도 몇 번씩 겪는 경우가 있다.


다음으로 전문직은 비도덕적 행위의 유혹을 더 강하게 받는 직종이므로 이것을 이겨내려면 더 강한 도덕적 의지가 필요하다. 예를 들어 의 료 상황에 대해 의사가 아는 정도는 환자가 아는 정도보다 훨씬 많기 때문에 의사는 마음만 먹으 면 쉽게 과잉진료 등을 받도록 환자를 속여 이득 을 취할 수 있다.


그렇다면 전문직 윤리 교육은 어떻게 피교육 자가 고도의 윤리적 판단능력과 강한 도덕적 의 지를 갖도록 할 수 있는가? 이 과제 해결에 기존 의 윤리이론에서 어떤 도움을 받을 수 있는지 살 펴 보자.



III. 의무윤리와 덕윤리의 필요성


지금까지 윤리학에서 나온 여러 이론들을 크게 의무윤리(ethics of duty)와 덕윤리(virtue eth­ics)라는 두 종류로 묶어 볼 수 있다

  • 의무윤리여러 행위나 행위 규범 중에서 어떤 것이 도덕적 으로 옳은가에 대해 주로 논의한다. 이렇게 행위자의 행위에 초점을 맞추어서 윤리를 규명하려 하였으므로 의무윤리는 행위 중심 도덕이라고 할 수 있다. 근대 이후 윤리학의 두 축이었던 칸트 윤리학이나 공리주의로 대표되는 결과주의 윤리설이 모두 여기에 속한다.

  • 이에 대해 동서양을 막론하고 전통사회의 윤리설이었던[6] 덕윤리행위자가 도덕적으로 올바른 행동을 하려면 갖추어야 할 태도나 덕목 을 밝히고자 하였다. 이렇게 덕윤리는 행위자의 행위보다 행위자 자체에 우선 초점을 맞추었다. 그래서 덕윤리는 행위자 중심 도덕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 두 윤리설은 각자를 완결적인 윤리 이론으로 간주하는 경향이 있다

  • 먼저 의무윤리 는 행위의 도덕성을 규명함으로써 행위자의 도 덕성도 밝힐 수 있다고 있다고 본다. 반대로 

  • 윤리는 행위자의 도덕성을 규명하면 행위의 도 덕성도 알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이 두 윤 리설은 서로 상대편을 자신과 보완적 위치에 있 는 것이 아니라 자신에 의해 극복되는 불완전한 이론으로 간주한다.


이런 경향은 전문직 윤리에 대한 논의에서도 그대로 나타나고 있다

  • 많은 의무윤리론자들은 전문직 행위의 도덕성 규명으로부터 전문인이 갖 추어야 할 자질이나 태도, 덕목 등을 도출할 수 있다고 본다. 가령 칸트주의자와 결과주의자들은 자신들의 이론적 체계에서 우정이란 덕목을 형 성할 수 있으며 이 덕목이 전문직 역할을 해명할 수 있는 이론적 토대를 제공할 것[7]이라고 주장 한다

  • 반면 덕윤리학자들은 전문인이 갖추어야 할 역할과 덕목이 분명해지면 그로부터 전문직 의 어떤 행위가 옳고 그른지는 어렵지 않게 판단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이론적으로 잘 전개된 덕윤리는 전문직의 역할을 이해하고 평가 하는 데 있어서 공리주의와 칸트의 접근에 대한 차이나고 설득력 있는 대안을 제공[8]한다고 본 다.


하지만 윤리 일반에서도 그렇듯이 전문직 윤리 에서도 의무윤리나 덕윤리는 그 자체만으로 완결 적이기 힘들다. 물론 두 윤리설의 관심은 포괄적 일 수 있다. “아리스토텔레스나 공맹의 덕윤리에 도 지성적인 도덕적 추론의 문제가 결코 소홀히 되지 않고 있으며 칸트주의나 공리주의적 의무의 윤리가 행위의 동기 문제에 관해서도 깊이 고심하고 있음 또한 사실[6]일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각 윤리설의 출발점이 된 행위와 행위자는 그 존재론적 특성 자체가 다르다. 따라서 그 하나에 초점이 맞추어진 윤리이론이 다른 하나도 똑같이 잘 해명해 주기는 어렵다. 이 점은 전문직에서 전문인의 행위와 전문인 그 자신의 도덕성 규명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이 점을 앞에서 본 사례 1과 사례 2의 경우를 통해 살펴보자.


사례 1에서 의사가 죽음을 바라는 환자의 고칼륨 증상을 치료하는 것과 치료하지 않는 것 중 어떤 행동이 옳은가라는 문제에 대해 의무윤리에서는 일정한 규범과 도덕적 추리 과정을 거쳐 결론을 내릴 수 있다. 물론 사례 1과 같은 딜레마 상황이라면 이 판단의 과정이 쉬운 것만은 아니며 또한 같은 의무윤리 내에서도 이론에 따라 결론이 달라질 수 있다. 하지만 적어도 그 결론에 이르는 과정이 논리적이고 엄밀한 추론의 과정을 거치므로 어떻게 해서 그런 결론에 이르렀는지 명확히 이해할 수 있다가령 행위 공리주의자라면 이 환자를 치료했을 때의 전체적인 결과와 치료하지 않았을 때의 전체적인 결과를 모두 계산하여 비교했을 것이므로 이 계산 과정이 올바른지 살펴볼 수 있다.


반면 덕윤리의 경우 의사가 갖추어야 할 덕목에 근거해서 사례 1에서 올바른 의사의 행동이 무엇인지 판단하려고 한다. 덕스러운 성품의 행위자가 그 상황에서 할 행동이, 그리고 그 행동만이 옳다[9]고 보는 것이다. 하지만 의사가 갖추어야 할 덕목을 가령 이타주의, 존중, 성실, 정직, 연민[10]이라고 밝혔다고 해도 이런 덕목으로부터 사례 1에서 의사가 어떻게 행동해야 올바른지 논리적으로 추론해 낼 수는 없다. 그래서 덕윤리에서는 결국 직관에 의존해 이 문제를 해결한다. 즉 덕목을 잘 갖춘 의사가 직관에 의해 도달한 판단이 옳다는 것이다. 하지만 아무리 덕목을 잘 갖춘 의사라고 하더라도 사례 1과 같은 딜레마 상황에서는 직관에 의존해서 쉽게 결론을 내리지 못한다. 오히려 덕을 잘 갖춘 의사일수록 이런 딜레마 상황에서는 당황하고 주저할 수도 있다. 그리고 판단을 내렸다고 하더라도 그 과정이 논리적인 추론의 과정이 아니어서 다른 사람들이 이성에 근거해서 그 과정에 대해 검토하거나 그 과정을 반복해 볼 수 없다.


이상을 볼 때 사례 1과 같이 전문인의 행위 중에서 도덕적으로 올바른 것은 무엇인가를 판단해야 하는 경우에는 의무윤리가 덕윤리보다 더 적합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의무윤리를 배제한 채 덕윤리만으로 전문직의 윤리를 규명하려는 태도는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사례 2에서는 의사가 제약회사의 리베이트를 거부해야 도덕적으로 옳은 줄 알면서도 그렇게 행동하지 않는 것이 문제되었다. 이렇게 도덕과 자기 이익이 충돌하는 상황에서 의사가 도덕적으로 올바른 행위를 선택하도록 해 주는 도덕적 의지에 대해 덕윤리에서는 행위자가 어떤 덕목을 갖추어야 그런 의지를 갖게 되는지 구체적으로 제시해 줄 수 있다. 그리고 그런 덕목이 의사의 전 인격 속에서 어떤 위상을 차지하고, 다른 덕목들과는 어떤 관계에 있는지도 알게 해 준다. 더 나아가 그런 덕목이 어떻게 자기 이익이라는 인간의 강력한 본능적 욕구를 통제할 수 있는지와 그런 덕목을 어떻게 갖출 수 있는지에 대해서도 알려 준다.


반면 의무윤리에서는 도덕적 의지에 대해서 별 해명을 못하거나, 칸트가 선의지에 대해 말한 것처럼 추상적이고 형식인 설명만 제시하는 경향이 있다. 가령 도덕적 의지가 어떻게 자기 이익에의 강력한 욕구를 극복할 수 있게 해 주는가에 대해서 도덕적 의지는 자기 이익을 넘어서서 올바른 행위를 하려는 의지이므로와 같은 동어반복적인 설명만을 한다. 그리고 이런 도덕적 의지를 어떻게 갖출 수 있는지에 대해서도 충분한 설명을 해 주지 않는다.


이상을 볼 때 사례 2에서 제기되는 전문인이 자기 이익을 넘어서서 올바른 행위를 하려면 어떤 마음이나 태도를 갖추어야 하고 그것을 어떻게 갖출 수 있는가라는 문제 해결에는 의무윤리보다 덕윤리가 낫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따라서 덕윤리를 배제한 채 의무윤리만으로 전문직의 윤리를 규명하려는 태도 역시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의무윤리와 덕윤리는 모두 오랜 시간 동안 수많은 탐구와 논쟁을 거듭하며 축적되고 발전되어 왔다. 이런 역사적 사실만 보아도 이 중 하나로 충분하고 다른 하나는 불필요하다는 관점이 타당하지 않을 것이라는 점을 짐작할 수 있다. 실제로 오늘날 많은 윤리학자들은 의무윤리나 덕윤리는 어느 하나도 자립적이거나 자족적인 것일 수 없고 양자가 상보적인 지지를 통해 온전한 윤리체계를 구성할 수 있다는 결론에 이른다[6].


전문직 윤리의 교육에서도 이 점은 마찬가지이다. 사례 1에 대한 논의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 전문직 윤리 교육 중 높은 수준의 도덕적 판단능력을 키우는 데는 의무윤리가 더 도움이 된다

  • 반면 강한 도덕적 의지를 갖게 만드는 데에는 덕윤리로부터 더 큰 도움을 받을 수 있다.



IV. 의료 전문직의 높은 도덕적 의무


전문직 윤리는 고도의 도덕적 판단능력과 강한 도덕적 의지를 요구하는데 이중 전자의 규명과 교육에는 의무윤리가, 후자의 규명과 교육에는 덕윤리가 도움이 된다는 것을 앞에서 밝혔다. 이제부터는 이 중 후자로 논의의 범위를 좁혀 덕윤리가 구체적으로 어떻게 전문인이 강한 도덕적 의지를 갖도록 하는 데 도움을 줄 수 있는지 살펴보고자 한다.

도덕적 의지는 도덕적 의무와 자기 이익이 갈등할 때 자기 이익을 포기하고 도덕적 의무를 수행하려는 마음자세이다. 전문직 종사자에게는 이 도덕적 의지가 더 확고해야 한다. 그 이유는 앞에서도 말했지만 전문직의 경우 도덕적 의무를 지키지 않고도 이것을 감추기 쉽기 때문이다. 다른 직종에서는 도덕적 의무 위반 시 이것이 다른 사람들에게 발각되어 비난과 불이익을 받기 쉬운데 전문직은 그렇지 않다. 전문직이 이렇게 외부의 시선을 피할 수 있는데도 의무를 위반하지 않으려면 도덕적 의지가 더 강해야 하는 것이다.


여기에 더해 전문인의 도덕적 의지가 더 확고해야 하는 또 다른 이유가 있다. 이것은 전문직에 요구되는 도덕적 의무의 수준이 상대적으로 더 높기 때문이다. 왜 그런지 의료 전문직의 경우를 들어 살펴보자


첫째, 의료 전문직은 인간의 생명과 건강이라는 아주 중요한 가치를 취급하는 직종이기 때문이다. 중요한 가치를 취급하는 만큼 그 행동이 다른 사람에게 미치는 영향도 크다. 그리고 영향을 크게 미칠수록 그에 따라 의무도 더 크게 된다. 비유한다면 같은 경비원이라고 해도 건축 자재를 지키는 경비원과 보물 상자를 지키는 경비원에게 요구되는 주의 정도는 같을 수 없는 것과 같다. 뒤의 경비원에게 훨씬 더 철저하게 경비 업무를 수행할 의무가 생긴다.


시간 지키기는 대부분의 직종에서 중요하다. 하지만 업무 시간에 늦었을 때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줄 수 있는 정도는 의사의 경우와 비교하면 대체로 작다.

 

다한증 환자에게 교감신경 절제수술을 하기로 하였다. 집도의의 사전 요청에 의해 다른 의사들이 먼저 환자의 피부 및 근육을 절개해 놓았다. 집도의는 예정 시간보다 늦게 수술실에 도착하였다. 환자는 수술 도중 뇌경색을 일으켜 사망하였다[11].


이 사례에서 보듯이 의사가 시간에 늦는 것은 다른 사람에게 생명 박탈이라는 치명적인 해악까지 미칠 수 있다. 그만큼 의사에게는 시간을 지켜야 할 의무가 강해진다. 이런 점은 다른 도덕적 의무들에서도 대개 마찬가지이다.


둘째, 의료 전문직은 사회로부터 상대적으로 많은 자율성과 권한을 보장받기 때문이다. 대표적인 것이 면허 제도이다. 이 제도로, 의사 면허를 가진 전문인은 환자 진료와 그에 대한 대가를 독점하게 된다. 여기서 더 나아가 의료 전문직은 의료시술 방법, 다음 세대 교육, 지침 위반자 처벌, 가격 책정 등의 면에서도 자율성을 부여받을 수 있다. 이런 큰 자율성과 권한은 의료 전문직에게 대신 높은 도덕적 의무를 부과하는 것을 정당화시킬 수 있다.



그런데 의료 전문직의 도덕적 의무를 크게 만드는 이 두 가지 조건은 최근에는 상대적으로 약화되었다고 볼 수 있다

  • 첫째, 의사는 여전히 환자의 생명과 건강을 다루지만 그것들에 미치는 영향력은 과거보다 줄어들었다. 과거에는 환자가 의사에 전적으로 의지하고 의사가 지시하고 결정하는 대로 따랐다. 그만큼 의사는 마치 부모가 그 자식에 대해 큰 책임을 갖듯이 환자에 대해 무거운 책임을 갖게 되었다. 하지만 오늘날에는 의사가 아니라 환자가 자기에게 가해질 의료행위에 대한 최종 결정권자로 간주된다. 즉 환자는 더 이상 의사의 지시를 수동적으로 따르는 존재가 아니라 의사로부터 충분한 설명을 들은 다음, 자신의 가치관이나 관심, 목표들에 비추어 무엇이 자기에게 최선인지 스스로 판단하여 최종적으로 선택을 행한다[12]. 그래서 이제 의사와 환자는 대등한 입장에서 함께 환자의 병을 치료해 나가는 동료의 관계로 묘사된다. 동료에 대해 갖는 책임의 정도는 부모가 자식에게 지는 책임보다는 작다. 그만큼 오늘날 의사의 환자에 대한 책임도 줄어들게 된다.

  • 둘째, 의사의 자율성과 권한 역시 예전에 비해 축소되는 경향이 있다. 물론 의사가 면허 제도를 통해 진료를 독점하고 있다는 점은 변함이 없다. 하지만 다른 자율성이나 권한에서는 그렇지 않다. 의료에서 소비자주의, 그리고 정부와 기업의 통제 강화로 의사의 전문적 권위가 쇠퇴하고 의료 문제에 대한 의사의 절대 권리가 줄어들고 있는 것이다[13]. 예를 들어 미국의 경우 1950년대 즈음을 의사의 황금기로 보고 있는데 황금기에 의사는 사실상 자신들의 노동에 대한 요금, 조건, 내용을 거의 완전하게 통제했다. 그들은 환자가 감당할 수 있을 만큼 자유롭게 청구했고, 얼마만큼 자선을 베풀지 혹은 누구에게 무료혜택을 줄지를 결정했다고 한다[14]. 하지만 지금은 민간 보험사 등과의 협상을 통해 가격이 정해지는 등 제약이 커졌다. 그리고 우리나라에서도 비슷한 변화가 있었다. 국민건강보험 제도 시행 이전에는 의사끼리 정한 관행 수가에 따라 환자에게 치료비로 받아왔으나 지금은 건강보험공단과의 협상을 통해 수가가 정해진다. 그런데 의사들의 주장대로라면 이 수가는 원가의 70%대에 머무르는 낮은 수준이다.


이렇게 최근 들어 의사와 환자 관계가 환자의 자율성 강화 쪽으로 변화하고 의사의 자율성과 권한은 축소되고 있다는 점은 의사의 도덕적 의무를 약화시킬 수 있다. 하지만 동시에 최근의 의료상황에서는 의사의 도덕적 의무를 강화시키 는 변화들도 나타나고 있다.

  • 첫째, 환자 치료에 필요한 지식과 기술의 양이 예전보다 방대해졌으며 그 증가 속도 역시 빠르다. 따라서 의사가 자기 환자에게 현재의 의학 수준에 뒤떨어진 치료를 하지 않으려면 과거보다 훨씬 많은 지식과 기술을 수련 과정 중에 습득해야 하며 수련 과정이 끝난 후에도 새로 등장하는 의학 지식과 기술을 뒤쫓아 배우는 것을 계속해야 한다.

  • 둘째, 의료를 둘러싼 환경이 예전보다 훨씬 복잡해졌다. 과거에는 의료 환경이 단순하여 의사는 주로 환자에게만 주의를 집중하면 되었다. 하지만 지금은 환자와의 관계 외에 환자 가족, 간호사, 의료기사, 병원관리자 등과의 관계도 적절하게 이끌어 나갈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질병의 양상에서도 가령 만성병의 급증 등으로 무엇이 환자에게 이득인지 판단하기 어려운 상황이 늘어났다. 이렇게 복잡해진 의료 상황은 의사의 합리적 의사결정 능력을 크게 요구하고 있다.

의사가 최선의 진료를 할 수 있는 지식과 기술을 습득하고, 의료 상황에서 만나는 문제들에 대처하는 합리적 의사결정 능력을 갖추는 것은 당연히 감당해야 할 의무이다. 이런 점에서 보면 의사의 의무는 오늘날 더 커져야 하며 그 정도는 의사의 권한 및 자율성 축소에 따른 의무 축소를 충분히 상쇄시키는 것으로 보인다. 다시 말해, 최근 들어 의사의 자율성과 권한은 약화되었지만 도덕적 의무의 크기는 그대로이거나 오히려 더 커졌다고 볼 수 있다.



V. 높은 도덕성 요구에 대한 전문직의 반발


의료 전문직이 가져야 할 도덕적 의무의 수준이 높은 만큼 의료계 밖의 사람들은 의사에게 이 높은 도덕적 의무를 감당할 것을 요구한다. 그런데 의사의 도덕적 의무가 크다는 것은 의사 사회 내부에서도 인정해 온 것이다. 이것은 의사단체들에서 공표한 각종 선언이나 강령, 지침 등에서 확인할 수 있다.


역사적으로 의사 단체들은 그들이 지고 있는 도덕적 의무를 스스로 분명하게 인식하고, 사회의 다른 구성원들에게 이를 준수하겠다는 점을 약속하기 위해 선언이나 강령, 지침 등을 공표해 왔다. 그런데 그 지침 등에 담긴 도덕적 의무의 수준은 대체로 상당히 높다. 가령 히포크라테스 선서를 변형한 제네바 선언에서는 나의 생애를 인류봉사에 바칠 것을 엄숙히 서약하고 있다. 또한 미국의학회에서는 의사가 갖추어야 할 요건을 이타주의, 신의, 성실, 돌봄과 연민, 존중, 책임감, 책무감, 수월성과 학문, 리더십으로 들고 있다. 우리나라의 경우 2006년에 의사윤리강령이 개정되었는데 그 개정 전 강령의 일부를 보면 다음과 같다.


의사는 세상에서 가장 고귀한 사람의 생명과 건강을 보전하고 증진하는 숭고한 사명 수행을 삶의 본분으로 삼는다.

의사는 그러한 숭고하고 명예로운 사명을 인류와 국민으로부터 부여 받았음을 명심하여 모든 의학 지식과 기술을 오직 인류와 국민의 복리 증진을 위하여 사용한다…….


하지만 선언 등에 표명된 이런 높은 수준의 도덕적 의무에 대해 현재 우리나라 의사들의 상당수는 냉소적 태도를 보이거나 반발하고 있다. 가령 수련의나 의대 학생들은 나의 이익을 남의 이익에 종속시키는 것을 이해하기 어렵다. 민주주의 사회에서 개인의 자기보호 권리를 박탈하는 것, 자기희생적 봉사(selfless service)라는 것은 결국 의사만 지쳐 빠지게 만드는 것, 교묘한 환자로부터 의사만 착취당할 빌미를 제공하는 것이라는 등 반발하고 있다고 한다[15].


도덕적 의무가 높다는 것은 그만큼 도덕적 완성을 향한 도덕적 추구를 많이 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도덕적 추구를 많이 한다는 것은 그 자체만 보면 바람직한 일이다. 그런데도 왜 의사들은 높은 도덕적 의무에 대해 반발하는 것일까? 이 점을 알기 위해서는 자기 이익 추구와 도덕적 추구의 관계에 대해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행동을 할 때 자기 이익도 추구하고 도덕적 추구도 한다. 예를 들어 음식점 주인이 음식을 팔면서 들어간 비용보다 더 많은 금액을 손님에게서 받는 것은 자기 이익을 추구하기 때문이다. 그러면서도 손님이 모를 때라도 가급적 손님 몸에 안 좋은 재료는 쓰려 하지 않은 것은 도덕적 추구도 하기 때문이다.


인간의 이 두 가지 추구는 모두 인정되어야 한다. 자기 이익 추구는 인간 본능 속에 자리 잡은 근본 동기이기 때문이고, 도덕적 추구는 행위를 정당화시켜주는 원천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도덕적 추구와 자기 이익 추구는 상반되는 경우가 적지 않으므로 다음과 같은 방식으로 통합시켜야 한다. 즉 자기 이익을 추구할 때는 도덕적 의무를 위반하지 않는 내에서 해야 하고, 도덕적 추구를 할 때는 도덕적 의무까지는 반드시 해야 하지만 그 이상은 각자의 선택에 맡기는 것이다[16]. 따라서 어떤 사람이 자기 이익을 희생해 가면서 도덕적 추구를 하는 경우 이것은 우러러볼 만한 일이지만 그렇게 하지 않는다고 비난해서는 안 된다.


물론 오직 도덕적 추구만을 해야 하는 사람들이 없는 것은 아니다. 자기를 버리고 평생 봉사하기로 서약한 특정한 수도회 같은 집단의 성원이 그러하다. 하지만 의사 집단을 그렇게 볼 수는 없다. 의사는 다른 대부분의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도덕적 추구와 자기 이익 추구를 모두 할 수 있는 직업인으로 보아야 한다.


그 이유는 

  • 첫째, 의사의 업무가 도덕적 추구만을 하는 사람만이 아니라 도덕적 추구와 자기 이익 추구를 통합적으로 하는 사람도 잘 수행할 수 있는 일이기 때문이다

  • 둘째, 도덕적 추구만을 행하는 사람이 의사를 해야 한다는 합의나 약속 같은 것이 의사 단체나 사회에서 이루어져 있다고 보기 힘들기 때문이다

  • 셋째, 도덕적 추구만을 하는 사람을 의사로서 자격이 있는 것으로 간주할 때 사회에서 필요한 의사보다 훨씬 적은 수의 의사만을 확보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기존의 의사 선언이나 강령 중에는 마치 의사가 도덕적 추구만을 해야 하는 것처럼 표현된 것들이 있다. 제네바 선언의 나의 생애를 인류봉사에 바칠 것이라는 표현이나 개정되기 전 우리나라 의사 강령의 모든 의학 지식과 기술을 오직 인류와 국민의 복리 증진을 위하여 사용한다와 같은 표현들이다.


의사들이 의사선언이나 강령 등에 나타난 높은 도덕적 의무에 반발하는 것은 우선 이런 표현들 때문이다. 이런 표현은 의사의 도덕적 의무는 자기 이익 추구를 불가능하게 할 만큼 높아야 한다는 뜻으로 읽힐 수 있다. 이런 뜻일 때 그것은 도덕적 추구와 함께 자기 이익도 추구할 수 있는 의사의 권리를 부정하게 된다. 그리고 이런 권리 부정에 대해 의사들이 반발하는 것은 정당하다. 하지만 실제로는 의사의 도덕적 의무가 크긴 하지만 자기 이익을 포기하고 도덕적 추구만 하기를 요구하는 정도는 아니므로, 의사 선언이나 강령, 지침 등도 이런 점에 맞게 엄밀하게 표현되도록 할 필요가 있다.


그런데 의사 윤리 지침 등에 반발하는 의사 중에는 의사의 도덕적 의무가 상당히 크다는 그 점 자체를 인정하지 않는 사람도 있다. 그들이 보기에 의사는 여러 직업 중의 하나이다. 따라서 의사의 도덕적 의무 역시 다른 직업들의 도덕적 의무와 다를 바가 없어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앞에서 설명했듯이 의사직의 본질 등을 따져 볼 때 의사의 도덕적 의무가 보통의 다른 직업들보다 크다는 점은 부정하기 힘들다. 의사 역시 다른 직업과 마찬가지로 자기 이익 추구와 도덕적 추구를 모두 해나갈 수 있는 직업이지만 이때의 도덕적 추구의 정도는 다른 평균적인 직업들에 비해 커야 한다. 의사가 이 점까지 부정하려는 것은 정당화될 수 없다.



VI. 의료 전문직의 행복과 덕이론


의사의 도덕적 의무는 크다. 최근 들어 의사의 자율성과 권한은 약화되는 경향이 있는 반면 그 도덕적 의무의 크기는 줄지 않았다. 이런 오늘날의 상황은 의료 전문직이 도덕적 추구는 많이 요구받고 자기 이익 추구는 하기 힘든 직종으로 보이게 한다. 그래서 자기 행복을 중시하는 의사들 중에서는 의사직이 더 이상 그들이 원하는 만큼의 행복을 줄 수 없는 직업이 아닌지 회의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실제로 오늘날 우리나라 의사들의 직업 만족도는 크지 않다. 통계에 따라 차이가 크기는 하지만 의사의 직업 만족도가 170개 직업 중 뒤에서 두 번째로 낮게 조사된 통계도 있다. 교육인적자원부와 한국직업능력개발원이 발간한미래의 직업세계 2007이란 책자에 따르면 의사는 조사 직업 170개 중 모델에 이어 직업 만족도가 두 번째로 낮은 직업으로 조사되었다. 다른 나라 의사들과 비교해도 우리나라 의사들의 직업 만족도는 뚝 떨어진다. 지난 2008년 다국적 제약회사가 북미유럽아시아 등 13개국 의사 1,741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우리나라 의사들의 직업 만족도는 최하위인 12위를 기록했다. 그리고 의료정책연구소에 따르면 2011내 직업에 만족한다는 개원의들의 34.1%에 불과했다.


이런 상황에서 의사들이 자기 이익을 증진시키는 방안으로 생각할 수 있는 한 가지는 정부와 사회를 설득시키거나 때로는 저항해서 그들의 직업적 자율성과 권한을 예전처럼 회복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시대의 흐름상 쉬운 일이 아니다. 앞으로 의료에서 의료 기기나 제약 산업이 차지하는 비중이 계속 늘어나고, 환자의 자율성은 더 커질 것이다. 또한 의료비 상승 등에 대처하려고 정부의 의료에 대한 개입은 강화될 것이다. 그에 따라 의료가 의사에 의해 좌우되는 정도는 늘기보다는 줄어들 것이다.


그렇다면 이제 의료 전문직은 도덕적 의무는 크고 자기 행복의 여지는 작은 그런 직업일 수밖에 없는가? 그래서 의사는 큰 도덕적 의무를 감당하기 위해 자기 행복을 희생할 각오가 되어 있어야 하는가? 이에 대해 덕윤리는 꼭 그럴 필요가 없다는 것을 보여준다. 덕윤리는 오늘날의 의사들이 높은 도덕적 추구를 감당하면서도 자기 행복도 잘 추구할 수 있는 길을 제시해 준다. 덕윤리에 따르면 덕은 도덕적으로 바람직한 것이면서 동시에 행복을 느끼게 해 주는 상태이기 때문이다. 유덕한 사람은…… 고귀한 것들을 행하면서 즐거움을 느끼고 그것을 하지 못할 때 고통을 느낀다.”[17] 고통이나 상실감을 느끼거나 주저하는 등 감정의 갈등을 겪으며 옳은 행동을 하는 사람이 있는 반면 흔쾌히 그리고 기쁜 마음으로 올바른 행동을 하는 사람이 있다. 이 중 후자가 덕을 갖춘 사람이다. “유덕한 인격이 된다는 것은 올바른 행위가 무엇인지 파악할 뿐 아니라 그 행위로 즐거움을 누리는 방식으로 성품이 발달한 것을 의미한다.”[6]

 

이렇게 덕윤리는 높은 도덕적 추구와 큰 행복이 통합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따라서 의사의 경우도 의사에게 요구되는 큰 도덕적 의무가 자기 행복 추구의 여지를 줄이기보다 오히려 늘릴 가능성이 없는지 따져 보아야 한다. 먼저 아픈 환자를 정성껏 잘 보살피고 치료해 줄 의무에 대해 생각해 보자. 이런 의무를 수행하는 것은 정신적, 육체적으로 큰 노력을 요하는 어려운 일이다. 하지만 환자와의 상호작용에서 기쁨을 얻고 환자의 회복에서 보람을 느낀다면 이런 의무 수행은 동시에 큰 행복이 될 수 있다. 특히 질병 치료는 어떤 다른 일보다 크게 다른 사람을 도울 수 있는 일이므로 다른 사람을 돕는 데서 행복을 느끼려 한다면 이런 행복을 가장 잘 느낄 수 있는 곳이 의료현장이다.


오늘날의 의사에게 특히 중요해진 새로운 의학지식과 기술을 평생 습득해야 할 의무에 대해서도 생각해 보자. 이런 의무는 지적 탐구를 싫어하는 사람에게는 엄청난 고역으로 다가올 것이다. 하지만 계속해서 새로운 것을 배워 나가는 것에서 깊은 만족을 느끼는 사람들도 있다. 학자들이 대개 그러하다. 따라서 의사 역시 학자와 같은 태도를 갖추게 된다면 이제 평생 학습은 무거운 도덕적 의무인 동시에 자기 행복의 원천이 될 것이다. 더군다나 의사는 이렇게 되기에 좋은 조건에 있다. 의사가 맞닥뜨리는 질병은 일종의 문제로서 의사의 탐구 정신을 자극할 수 있다. 또한 의사는 자신이 배운 것이나 생각한 낸 것을 바로 환자에게 적용시켜 봄으로써 그 타당성을 검증할 수 있다. 그리고 주로 정신만을 사용하는 이론적 학문에 비해 의사는 정신과 육체를 모두 사용함으로써 지치지 않고 활기차게 탐구를 해 나갈 수 있다.


물론 높은 도덕적 추구와 행복 추구를 이렇게 동시에 하는 것이 쉽게 되는 일은 아니다. 가치 중에는 재화나 지위 등과 같이 그로부터 쉽게 행복을 느낄 수 있는 것이 있다. 반면 처음에는 행복을 느끼기 쉽지 않지만 일단 느낄 수만 있다면 훨씬 깊은 행복을 느끼게 해 주는 질 높은 가치도 있다. 남을 돕는 데서 느끼는 행복이나 지적 탐구에서 느끼는 행복이 바로 여기에 속한다.


사람들은 질 높은 가치를 처음 접할 때는 힘듦이나 따분함만을 느끼기 쉽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은 질 높은 가치를 외면하고 손쉽게 행복을 느낄 수 있는 가치에만 주력하게 된다. 이것은 왜 많은 의사가 어떤 직종보다 질 높은 가치를 쉽게 획득할 수 있는 조건이면서도 이런 가치에서 행복을 느끼지 못하고 있는지의 이유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질 높은 가치들에서 행복을 느낄 수 있을까? 여기서 다시 덕윤리의 도움을 받을 수 있다. 덕윤리는 질 높은 가치 추구인 덕이 행복도 느끼게 해 준다는 사실을 알려줄 뿐 아니라 이 덕을 습득할 수 있는 조건이나 방법도 제시해 준다. 예를 들어 아리스토텔레스는 덕은 실행해 봄으로써 배울 수 있는데 가장 좋은 실행은 덕스러운 사람을 모델로 삼아 따라하는 것이라고 제시한다[18]. 덕을 배우는 이런 조건과 방법은 바로 질 높은 가치로부터 행복을 이끌어 낼 수 있는 조건과 방법이기도 한 것이다.


의사가 질 높은 가치로부터 행복을 이끌어 낼 수 있게 되었을 때 의사는 막중한 도덕적 의무를 기꺼이 수행하려고 할 것이다. 왜냐하면 의사의 도덕적 의무에 해당하는 일들은 그 본질상 높은 가치를 추구할 수 있는 일들이어서, 질 높은 가치로부터 행복을 이끌어 낼 수 있는 의사는 도덕적 의무 수행에서 행복을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질 높은 가치로부터 행복을 이끌어내는 조건과 방법에 대한 덕윤리의 해명에서 의사가 높은 도덕적 의무를 감당하려는 의지를 갖게 되는 조건과 방법이 무엇인지 알 수 있다.

 


VII. 결론


의료 전문직의 경우에서 알 수 있었듯이 전문직 윤리 교육은 전문인에게 고도의 도덕적 판단능력과 강한 도덕적 의지를 모두 갖게 해야 한다. 이 중 도덕적 판단능력을 키우는 데는 의무윤리가, 강한 도덕적 의지를 갖게 하는 데는 덕윤리가 도움을 줄 수 있다. 그리고 전문직의 도덕적 의무가 크다는 점이 전문인의 자기행복추구를 위축시키는 것 아닌가라는 우려는 덕윤리가 해소시켜 줄 수 있다.


이렇게 이 논문에서는 전문직 윤리의 규명과 교육에서 의무윤리와 덕윤리가 어떤 역할을 할 수 있는지를 의료 전문직을 중심으로 개괄하였다. 의무윤리나 덕윤리에 속하는 수많은 이론들 중에서 가장 타당한 이론을 찾아내고, 그 이론을 이용하여 실제로 엄밀하게 전문직 윤리를 구축해 나가는 작업은 앞으로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그런 과정 중에 높은 도덕적 판단력강한 도덕적 의지라는 전문직 윤리의 두 과제를 모두 잘 해결할 수 있는 완결된 이론이 의무윤리나 덕윤리의 한 진영에서 발견될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다. 하지만 이 논문은 그럴 가능성보다는 의무윤리와 덕윤리를 통합해야 비로소 전문직 윤리가 완성될 가능성이 더 크다는 것과, 그러므로 이 둘 모두에서 지혜를 빌리려 하는 것이 현명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비유하자면 이 논문의 의의는 전문직 윤리의 정립을 위해 어떤 보물창고부터 뒤져야 할지 그 문 앞까지 연구자를 데려다 놓는 데 있다.



한국의료윤리학회지 제17권제1호(통권 제39호) : 72-84 ⓒ한국의료윤리학회, 2014년 4월

Korean J Med Ethics 17(1) : 72-84 ⓒ The Korean Society for Medical Ethics, April 2014


The Role of Virtue Ethics in the Study and

Teaching of Medical Professional Ethics

YOU Ho-Jong*


Abstract

This article examines the ethics of duty and virtue ethics in the teaching and study of professional ethics, with a focus on medical professional ethics. Because of the nature of the profession, medical practitioners should have expertise in moral decision-making and a strong moral will. This article argues that the former concept can be investigated and taught effectively in terms of the ethics of duty, whereas the latter concept is better understood in terms of virtue ethics. Additionally, this article describes in more detail the role of virtue ethics in professional ethics, claiming that medical practitioners should strive, not only to meet their moral duties, but also to flourish in their profession. Virtue ethics shows the method for achieving this.

Keywords

ethics of duty, virtue ethics, professional ethics, doctors, ethical judgment, moral wil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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