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근대 의료 건축물에 관한 연구

한동관*, 류창욱**, 고상균†, 정재국†, 문종윤‡, 박윤형‡






1. 서론

100년이 넘는 한국 근대 의료사 속에 존재했던 병·의원 건물들은 이 땅의 근대건축의 상당수가 그러하듯 한국전쟁의 참화로 인해 대부분 파손되어 그 원형을 찾기 어려운 실정이다. 그나마 얼마 남아있지 않은 건축물들도 급격한 경제개발과 산업화 과정을 거치면서 상당수의 건물들은 철거되거나 보수과정에서 원형이 훼손되어 당시의 모습을 찾아보기 어렵게 되어가고 있다. 병·의원 등 의료관련 주요건축물들은 의료기관이란 특성상 대부분의 건물 위치가 도심이었다. 지방의 경우에도 지역 내 요지에 자리하고 있어 각종 개발정책의 정비대상에서 우선순위가 되는 곳에 있었기 때문에 대부분 근대사에서 사라졌다. 또한 드물게 아직까지 남아있는 건축물들도 몇 차례 주인과 용도가 바뀌는 동안 심하게 원형이 훼손된 경우가 대부분이며 일부 원형을 유지하고 있는 현존 건물들도 사유재산이란 점에서 언제 철거되고 변형될지 모르는 상황에 놓였다.


건축사적으로 개화기 의료관련 건축물들은 외국공관 및 학교와 더불어 우리나라 근대건축의 효시로 보고 있음에도(서치상, 2006: 76-9) 의료관련 건축물은 사적 4개소를 비롯하여 몇 점의 문화재급 건축물과 2001년 7월부터 시행한 문화재등록제도에 의해 명맥을 유지하고 있는 등록문화재가 10여 점 정도 남아 있을 정도이다.


지금까지 근·현대의료가 도입된 후 근대 의료관련 건축물에 대해 종합적으로 정리된 기록은 찾아보기 어렵다. 다만 문화재청이 발간한 의료기관 관련 단독보고서는 대한의원과 관련하여 『대한의원 본관 근대문화유산기록화조사보고서』(2002)와 『대한의원본관 실측조사보고서』가 있고(그림 2) 『애양교회 및 애양병원 근대문화유산기록화 조사보고서』(2004), 그리고 『대구동산병원 구관 근대문화유산기록화 조사보고서』(2005) 등 세 기관의 보고서가 있을 뿐이다. 문화재청은 2008년 의료분야 유물 유적을 중심으로 『근대문화유산 의료분야 목록화 조사보고서』를 발간하고, 2009년 10월 이중 유물 6건에대해 등록문화재로 지정하였다. 근대 의료건축물에 대해서는 지난 2004년 전국 시도가 실시한 관내 근대건축에 대한 실태조사와 2008년 문화재청이 실시한 ‘비지정 근대건축물에 관한 실태조사’ 및 부산발전연구원 부산학 연구센터등이 보고한 「부산건축의 역사와 미래」(2006) 등에서 일제강점기 부산의 근대건축물 조사 내용에 일부가 포함되어 있는 정도이다.


우리나라 문화재보호법에서는 지난 2001년 7월에 등록문화재제도를 도입하였다. ‘등록문화재’의 등록기준은 건설된 후 50년 이상 경과되고 우리나라근대사에 기념이 되거나 상징적 가치가 큰 것과 그 이후 형성된 것이라도 멸실, 훼손의 위험이 크고 보존할 가치가 있는 건축물 등이다(문화재보호법 시행규칙 제35조의 2). 문화재청의 문화재 분류기준에 의하면 ‘사적(史蹟)’은기념물 중 유적·제사·신앙·정치·국방·산업·교통·토목·교육·사회사업·분묘·비 등으로서 중요한 것으로 수원화성, 경주포석정지 등이 이에 속하는데, 근대 병·의원 관련 건축물 중 구 서울대학교병원본관(대한의원본관, 사적 제248호), 구 경성제국대학 의학부 본관(사적 제278호), 구 대구의학전문학교 본관(사적 제442호), 구 도립 대구병원(사적 제443호) 등 모두4개 건축물이 있다. 의료기관 관련 건축물 중 가장 많은 수를 점하는 ‘등록문화재’에 대해 문화재청은 ‘지정문화재’가 아니면서 근·현대시기에 형성된 건조물 또는 기념물이 될 만한 시설물 형태의 문화재 중에서 보존가치가 큰 것’이라고 밝히면서 예시로 태평로 구 국회의사당 등을 적시하고 있다.


이외에도 문화재청은 ‘근대문화유산’의 개념과 범위에 대해 ‘개화기’를 기점으로 하여 ‘해방 전후’까지의 기간에 축조된 건조물 및 시설물 형태의 문화재가 중심이 되며, 그 이후 형성된 것일지라도 멸실 훼손의 위험이 크고 보존할 가치가 있을 경우 포함될 수 있다고 밝히고 있는데 ‘사적’을 제외한 대부분의 근대 병의원이 이에 해당된다.


근대건축의 시기구분 중에 후반부로 보는, 근대 3기에 지어진 건축물인 서울 중구에 소재한 ‘구 서산부인과’ 건물과 같은 경우는 건축학계의 거목 김중업의 작품이라는 점에서 근대사나 건축학적으로 주목받고 있었는데 이러한건축물도 의료계에서는 아직 논의되지 않고 있다(정인하, 2003: 119-22). 따라서 의료사적으로 중요한 건축물을 사라지기 전에 기록으로 남기는 것이 필요한 시점이라고 생각한다.


2. 연구내용 및 방법


연구대상 건축물은 2003년 이후 지방자치단체와 문화재청이 실시한 전국주요문화재 및 비지정문화재 중에서 현존하는 의료관련건축물을 대상으로하였다. 사적, 시도문화재 또는 등록문화재로 지정된 건축물 중 의료기관 관련 건축물과, 미등재 근대건축물 중 의료관련 시설로 확인된 경우, 학회지에게재된 의료기관 건물과 의사(醫史) 관련 주거 및 부속건물과 기념물 등을 조사대상으로 하였다. 아울러 지방문화재 등으로 지정된 의사출신 인사의 생가및 가옥 등도 본 조사에 포함시키고 기타 기념물 및 의료사적으로 주요한 건축물들은 건축 관련 학술잡지를 기초자료로 하였고 각종 언론매체의 기사 중의료관련 사적지를 포함하였다.


자료로는 전국 시도지방자치단체가 조사한 『근대문화유산자료목록화보고서』(2004) 중 국가와 시도가 지정한 문화재와 등록문화재 그리고 비지정문화재 중 시도가 의료시설로 분류한 건축물(표 1)과 2008년 문화재청이 실시한『비지정 근대건축물 조사보고서』 I·II·III권, ‘의료시설’로 명기한 기관과 기타 건축학회지 및 대학의 건축 관련학과의 논문(석·박사 학위논문 포함)등전문가에 의해 검증된 근대의료관련 시설물을 연구대상으로 하였다.


연구대상 건축물에 대하여 현지조사를 실시하였다. 건축물에 대한 건축학적 조사와 인문학적 조사를 병행하여 해당 의료관련 건축물의 당시 지역사회내에서 역할과 위상에 대한 조사를 포함시키는 것을 원칙으로 하였다(주남철, 2000: 113-5). 의료기관의 명칭은 당시 대부분의 기록이 의원과 병원을 구분하지 않고 혼용하였으므로 이번 조사에서도 당시의 표기에 따라 정리하였고, ‘의료기관’은 의료 및 그와 관련된 사물(부속건물 등)을 포괄하는 의미로,‘병·의원’은 병원이나 의원을 의미하는 용어로 사용하였다.


3. 근대 병·의원의 의료사 및 건축사적 의미


1876년 조선은 개항을 통해 외부세계와 소통을 꾀하게 된다. 그러나 이 소통은 주체적인 것과 거리가 있다. 비록 모양새를 갖추기는 하였지만 주체성을상실한 소통이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개항은 하나의 획기적인 사건임에 틀림없다. 그래서 이 시기를 근대의 출발점으로 보기도 하는 것이다.


건축사에 있어서도 개항은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이 시기에 들어와 소위근대적인 건축물이 들어서기 때문이다. 유럽을 중심으로 유행하던 건축양식이 우리의 땅을 차지하기 시작한 것도 이 때이다. 그러나 서구의 건축양식은전적으로 우리가 동경하여 들여오거나 본받기 위해 수용한 것이 아니다. 건축사는 외세에 의해 불가피하게 진행된 서구화의 영향을 받게 된 것이다. 이같은 사실은 우리나라 근대사에서도 인정하고 있는 것으로 1880년대 이 땅에지어지기 시작한 서양식 건축은 사실상 일본인들의 영사관 건물로 시작되었다고 밝히고 있는데(국사편찬위원회, 2001: 296-302), 이 일본영사관 건물들도 정통적인 서구건축이 아니라 일본인들에 의한 절충적 형태인 의양풍(擬洋風)의 건축물들이다.


하지만, 조선정부를 포함한 민간에서 시대의 새로운 요구를 수용하고자하는 적극적인 노력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근대식 무기를 만들기 위한 번사창(飜沙廠, 1884년), 서양식 주화를 제조하기 위한 전환국(典圜局, 1885년),1897년 대한제국 선포 이후 경운궁 안에 건설한 정관헌, 돈덕전, 구성헌, 중명전, 석조전 등의 서양식 건물, 한성 중심부의 도로 및 하천의 정비, 전차의 운행, 수도시설을 설치하는 등 근대도시로서의 면모를 갖추고자 정부차원의 노력이 있었다. 또한 민간에서도 단체 혹은 개인적으로 서양식 혹은 한양절충적인 건축물들을 상당수 건설하였다.


1905년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제는 강제로 을사보호조약을 체결하여 외교권을 박탈하면서 우리의 역사는 식민화의 길로 접어들게 되고 건축물의 식민화도 진행된다. 1906년 통감부가 설치되면서, 대한제국정부 산하의 건설조직으로서 탁지부 건축소를 신설하여 1910년 한일합방까지 대한제국정부가주도하는 근대건축의 건설을 담당하게 된다. 따라서 우리나라 근대건축사의시기구분에서 근대1기 후반기가 된다. 그러나 건축소의 업무는 일본인에게장악되고 소속기사들도 대부분 일본인으로서 일본식건축에 경험이 없는 조선인들에게 권한이 있을 수 없었다. 일본식건축은 서양식 건물외관에 일본식목조기법을 절충하거나 혼용한 의양풍으로서 정통적인 서구양식은 아니다.


건축은 설립주체(건축주)의 성격(기술력, 경제력, 이념, 시대정신 등)에 따라, 양식이나 형식 등이 달라지는 것이 일반적 양상이다. 하지만, 의료시설과같이 특수한 기능을 수용하는 건축의 경우에는 본연의 기능에 충실할 수밖에없게 된다. 일제의 식민지 침략적 욕심을 드러내는 시기의 대한의원도 소위‘제국의료(帝國醫療)’1)를 펼쳐 제국주의를 정당화하기 위한 시설이라 할 수있지만, 건축적으로는 의료시설로서의 기능에 충실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렇듯, 건축물의 용도 중에서 병원이란 특정한 기능을 수행하는 목적을가진 건축물임에 틀림없으나, 근대초기의 병원건축은 병원기능의 특수성을나타내는 외형적인 특징은 특별히 보이지 않는다. 그렇기에, 서구의 선교사들이 병원을 설립할 때에 일반 민가에서 시작하는 것이 가능했다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해, 일반적인 건축물의 형식에 의료라는 특정기능을 대입시킨 건축물이라는 것이다.



1) 조선의 민가를 이용한 초기 병·의원


광혜원(제중원)은 갑신정변 때 살해된 재동의 홍영식의 폐가를 개조하여개원한 것으로 당시 금액으로 약 1,000불이 들었다. 이 비용은 전액 조선정부에서 제공하였으며 1년 운영경비 300불도 정부에서 지원하기로 하였다. 건물은 건평 약 43평에 40명의 환자를 수용할 수 있는 규모였다. 병원 종사자중 하급관리들이 행정적인 업무를 맡았고 선교의사들은 무보수였다. 극빈자들을무료로 진료하였고 상류층 환자들이 많았다. 재동 제중원의 내부구조와 의료기관으로서의 기능은 각 건물의 용도를 통하여 구체적으로 이해할 수 있다.


알렌이 직접 그린 평면도를 보면, 전면에 진료실과 약국 등이 배치되며, 이와 별도로 후면에 병실들이 배치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배치방식은 이후의 세브란스병원이나 대한의원의 배치방식과 유사한 것으로서, 진료시설과 입원시설을 구분하는 형식이다. 즉, 집의 구조는 8개의 마당을 중심으로‘역ㄴ’자 형태로 한옥이 배열되어 있어 독립적인 공간을 형성하면서도 중앙의건물들이 서로 연결되어 있는 전형적인 고관대작의 저택이다. 행랑채에 전염병실, 바깥채에 대기실, 진찰실, 수술실, 약국, 안과병실과 암실, 사랑채에 일반 병실, 예방접종(종두)실, 안채에 여자병실, 별채에 독방들을 두었으며 규모는 작아도 종합병원 형태를 갖추었다. 1886년 제중원 의학당을 개설하고의학생 16명을 교육시켰다. 1887년에는 환자가 많아져서 구리개(銅峴, 을지로입구 외환은행자리)로 이전하였다(박형우, 2008: 60-6)


.선교의사들에 의해 문을 연 초기 근대 의료기관들은 대부분 선교사가 거주하면서 주택의 일부를 개조하여 시약소, 또는 진료소의 형태로 의술을 펴기시작하였으므로 처음부터 근대 의료기관 건축물의 형태를 갖춘 것은 아니었다(이덕주, 2009: 85-9). 의료선교사들은 처음 내한하여 선교를 위한 의료활동을 펼칠 장소로 당시 조선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초가 등 민가를 개조하여의료기관으로 사용하였는데 그것은 도시와 지방을 막론하고 크게 다를 바 없었다(이규식, 2008: 111-19).





예를 들어 경북지역의 선교를 위해 대구에 온 선교의사 존슨은 1899년 7월8일자 편지에서 진료소로 사용할 초가(흙벽방 두개의 초가집 크기는 7×7피트의 작은 방이지만 도배를 해서 깨끗함)를 준비해 두었다고 썼다. 또 평안도순안에서 의료선교사업의 일환으로 설립되어 현재의 서울위생병원의 전신이된 진료소는 초대원장 노설(Riley Russel)이 1909년 초가 한 채를 40원(20불)에 구입하여 개설한 것이었다(이만열, 2003: 228-31). 메타 하워드의 후임으로 보구여관을 맡은 로제타 셔우드는 1890년 한옥의 구조를 약간 고쳐 병원으로 만든 보구여관을 보고 자신의 예상보다 시설이 좋다고 기록하였다. 전라북도에서 의료선교를 시작한 의사 드류는 1895년 군산에 도착하여 선착장 인근수덕산 기슭 밑 군산진영 터에 조그만 초가집을 매입하여 병원을 개설했다.이러한 예에서 볼 수 있는 바와 같이 초기의 선교병원은 사실상 병원이라기보다는 진료소에 가까웠고, 따라서 일반 주택을 매입하여 활용할 수 있었다.






2) 세브란스 병원


우리나라 근대건축 변천과정에서 커다란 영향을 끼친 일본식 의양풍 건물이 근대건축사에서 양적인 주류를 이루었다. 하지만 구미(歐美) 미션계통의건축 역시 서양건축·근대건축의 본 고장인 구미인이 직접 소개하였다는 점에서 우리나라 근대건축사에 순수 서양식 건축으로 한 계통을 이룬다. 건축사적으로 서양식 건축물의 원형을 비교적 제대로 간직한 프로테스탄트계통의 건축물로 배재학당, 이화학당, 정동교회와 옛 세브란스병원 등이 꼽힌다(99건축문화의 해 조직위원회, 1999: 28).


1900년대 서양식 건축양식을 따라 설립된 의료기관 건물 중 전형은 1904년서울역 건너편에 세워진 옛 세브란스병원을 들 수 있다. 중앙에 페디먼트(박공)의 파빌리온, 좌우양단에 8각형 탑(turret)을 둔 지하 1층 지상 2층의 붉은벽돌건물(윤일주, 1966: 72-3)로 길이가 약 24미터, 폭이 약 12미터였다. 그런데 지하층은 천정이 높고 채광이 좋았기 때문에 실질적으로는 3층 건물이라고 할 수 있다. 40병상 규모로서, 설계는 캐나다인 고든(H. B. Gordon)이, 시공은 중국인 장해리(Harry Chang)가 맡았으나 난방시설, 배기시설과 상하수도시설은 모두 경험이 없어, 설계사 겸 건축감독인 고든과 선교의사들이 직접 하였다. 지하층은 일반외래로 사용되었고, 1층은 의사사무실을 비롯한 각종 공조시설 및 치료시설, 그리고 여자병실이 있었다. 2층에는 수술실이 있었다. 이 건물이 완공된 직후 지하층을 가진 길이 12미터, 폭 10미터의 별도의단층 건물이 완공되었다(박형우, 2006: 123-5).


서양식 건축물은 이밖에도 민족자본이나 기독교계통의 교육시설과 의료시설 등이었는데 이들은 공통적으로 벽돌을 주재료로 사용하고 일부 석재를 정삭재로 사용하면서 비교적 안정되고 소박한 외관을 갖추어서 일본 총독부가주관하여 건축한 관청 및 공공단체 등의 건물이 갖고 있던 권위적 외관과 대조를 이루었다.




3) 대한의원


1905년 을사보호조약으로 대한제국의 실질적인 주권이 상실되고 이듬해 2월 일제가 통감부업무를 개시하면서 관청건물들을 신축할 전문기구로 「건축소관제(建築所官制)」를 공포하고 탁지부 건축소(1906년 9월~1910년 8월)를설치하였다. 이후 우리나라에 건립된 관립의료기관들은 거의 모두가 탁지부건축소의 주도로 건축되었고, 이 업무는 한일합방이 되면서 그대로 총독부 산하 소관기관으로 이관되었다.


탁지부 건축소가 1907년 3월부터 1909년 6월까지 생산한 약 8,000건의 기록물중 건축공사에 관한 기록물은 3,200여 건에 이르렀다. 이는 일제가 식민지 통치를 위한 인프라를 구축하기 위한 건축이 활발하게 전개되었기 때문인데, 이 시기에 대부분의 관영 의료기관 건축도 이루어졌다(행정자치부 국가기록원 수집관리과, 2004; 2010). 이 시기 탁지부 건축소 주관으로 조성된 건물들은 벽돌과 석재, 또는 목재를 건물규모에 따라 적절히 혼용하여 지어졌으며 대개 2층 정도의 작은 규모였으나 그 후 관청건물들은 권위적 외관을 강조하는데 손색이 없었다. 대체로 건물외관은 좌우 대칭을 살리고 창호의 형태나 위치가 건물전체와 조화를 이루도록 하여 안정된 비례를 살린 모습이었다.전반적으로 서양의 르네상스나 바로크 풍의 외관을 모방하는 경향이었다. 그가운데 현존하는 건물은 서울대학교병원 의학박물관(구 대한의원본관, 1907년), 방통대 역사박물관(구 공업전습소, 1909년), 광통관(구 천일은행, 1909년)이다(한국건축역사학회, 2006: 44-8).


통감부시절 탁지부건축소에 의해 건설된 대한의원은 대한제국정부가 건립하고 운영하였지만, 실질적으로는 일본인에 의해 건축되고 운영된 시설이다. 이 시설은 총독부의원, 경성제대의대부속병원 등으로 변화하면서 일본의대학병원 운영 및 병원계획을 가장 먼저 도입 적용하였다. 즉, 본관과 병동을구분하는 평면배치방식이며, 이후에 외래진료부가 별동으로 떨어져 나오는배치방식을 채택하는 등, 일본국내의 변화양상과 맥을 같이 한다. 이후 일제에 의한 공공병원이나 대학부속병원 등을 계획할 때는 일본국내의 유사시설을 견학하여 그것을 바탕으로 계획하였다. 특히, 각 지역별로 도립병원을 식민지 통치수단의 하나로 건립하였는데, 이 병원들은 유사한 건물형태와 내부평면을 갖고 있게 된다. 이러한 의료시설은 일제의 의료시설의 본보기로서민간의료시설에도 영향을 미치며, 해방 후 60년대까지 한국의 의료시설로 계속 사용되었다.


대한의원은 1907년 3월 대한제국칙령 제9호에 따라 종래의 내부소관의 광제원, 학부소관의 관립의학교, 궁내부의 적십자병원을 흡수 통합한 병·의원으로, 본관(사적 248호)은 연건평 1,355.3 m2(410평)의 2층 벽돌구조로 1908년 11월 준공되었다. 일본에서 얻은 차관 중 10만원을 건설비로 우선 지불하였고 총 293,566원이 책정되었다(박형우, 2008: 317-20). 대표적인 관립 병·의원으로 당시에 규모가 가장 컸으며 연차적으로 일반병동 6개와 전염병 격리병동 1개 그리고 조선인의 치료실로 구성된 온돌식 병동까지 모두 8개 병동을 갖추게 되었다.


평면은 현관을 중심으로 좌우 대칭이며 또한 건물의 정면과 후면도 각각대칭을 이루었다. 현관에 아치형 출입구의 포치(porch)를 설치하고 남쪽 정면에 계단을 두어 현관문에 오르게 하였으며 동서 양쪽으로 경사를 두어 자동차가 현관문 앞에 닿게 하였다. 현관 안으로 들어서면 넓은 현관 홀을 중심으로 좌우에 방들을 배치하였는데 동서로 길게 난 중 복도를 중심으로 전면양쪽으로 두개의 방과 끝부분에 돌출된 큰방을 두었다. 현관 계단실에서 2층에 오르면 기본 골격은 1층과 같다. 입면은 중앙에 시계탑을 우뚝 세우고 좌우 대칭되는 2층 벽돌 건물이다. 지붕은 우진각 형에 왕대공 지붕틀로 함석마감 했으나 현재는 동판을 덮었다. 건물 정면 양쪽의 돌출된 방 전면에 박공면(pediment)을 형성하고 2층 창틀은 르네상스말기 이탈리아 동북지방의 파라조(Palazzo)궁에 널리 쓰이던 베니스식이다. 화강암을 곁들인 튜더(Tudor)왕가의 1층 아치창틀, 수평아치의 2층 창문과 화강암 하인방 그리고 벽체의 화강암 돌림띠로 모양을 살렸다. 시계탑 꼭대기는 벌버스 돔(bulbous dome)으로 장식하고 그 아래 네모서리에 쌍원주의 드럼(drum)부 등 화려한 장식으로처리하여 바로크(baroque)풍의 건물로 전체적인 형태는 기념성이 강조되는고전주의적인 특성을 갖고 있다. 탁지부건축소에서 설계와 감독을 맡았고 일인(日人) 기사 야하시(矢橋賢吉), 구니에다(國枝博) 등이 설계하였다(국사편찬위원회, 2000: 302-8).


그 후 경술국치 100년이 되는 2010년 ‘건축답사모임’에서 한국역사문화정책연구원 대표는 여러 건축 양식이 혼합된 잡종교배 건물로서 중간에 세운 시계탑과 우측 부속건물 천장의 돔 형태, 아치형 출입구 등은 일본 제국주의의권위적 지배를 상징하고 있고, 건물 전체적으로 네오바로크 양식이지만 시계탑부분은 비잔틴 풍, 벽면과 장식은 르네상스 풍, 아치형 출입문은 노르만 풍으로 볼 수 있다고 하였다(김란기, 2010. 3. 29).





4) 일제가 세운 근대병원


우리나라 국기기록원에 소장 중인 병·의원 본관건축 계획안을 도면 작성시기를 기준으로 살펴보면 대략 1, 2, 3기로 구분할 수 있다. 

      • 제1기는 자혜의원 설치의 근간이 되는 「자혜의원관제(慈惠醫院官制)」가 공포되는 1909년부터 1910년대 중반까지로, 전국적으로 단층 목조의 자혜의원이 근대의료시설의 초기적 형태로서 설계되었다.
      • 제2기는 외래부와 부속진료부가 체계화되면서 중층 이상의 본관 계획안이 등장하는 1930년대 초까지의 시기이며 
      • 제3기는 진료과의 설계가 세분화되고 철근콘크리트 구조가 사용되면서 4층 건물설계 등이 등장하는 1930~40년대의 시기이다. 이를 건축도면을 중심으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국가기록원이 소장하고 있는 도면을 통해 우리나라 관립의료기관의 규모와 건축사적 의의를 살펴보면, 

    • 제1기에는 자혜의원이 본격적으로 등장한1910년을 전후한 시기로서 대체로 규모가 작은 건축 계획안을 사용하였다.초기에 설립한 청주자혜의원을 비롯하여 공주자혜의원과 제주자혜의원의 본관건축 계획안은 모두 단층 목조건축물로 설계되었고 입면은 비늘판벽으로마감되었으며 내부에는 한두 개의 진찰실만 설계되어 있다. 현관을 중심으로진찰실과 대합실의 진료부를 함께 두었고 사무실, 원장실, 약국 등의 관리시설을 반대쪽에 두었다. 수술실과 병리시험실, 화장실, 소사실(小使室)을 별동으로 구성하여 복도로 연결한 것이 특징이다. 즉, 목조건물로 설계하고 수술실, 화장실 등이 본관과 분리된 것인데, 이는 1910년대 조선총독부의 다른 시설 계획에서도 확인되는 공통적인 현상이라 할 수 있다. 이는 일본의 의료용건물을 한국에 거의 그대로 이식한 것으로 우월하다고 생각하는 일본의료를가져온 것과 같은 의미이다. 1910년에 개원한 평양자혜의원은 대한제국의 궁궐시설인 풍경궁(豐慶宮)을 점용하였기 때문에 전통목조의 전각(殿閣)을 병원시설로 이용하였다.
    • 제2기에는 이전 시기의 본관계획과 달리 구조재료로 벽돌이 주로 사용되었으며, 형태상으로도 2개 층 이상의 계획안들이 설계되기 시작하였다. 입면에서는 벽돌의 미려한 외관을 표현하였고, 내부의 실구성에서도 진료과목별공간들이 세분화하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대구자혜의원, 나남자혜의원, 함흥자혜의원의 본관과 같이 전체의 일부분에만 2층을 구성하는(부분 2층) 과도기적 형태에서, 광주자혜의원, 수원자혜의원, 해주자혜의원의 본관과 같이1층과 동일한 규모를 갖는 2층(동일 2층) 계획안으로 발전해 나갔다. 다만,1930년대 초반에 계획된 원산부립병원 본관과, 강원도립 철원의원 본관은 각각 부분 2층과 동일 2층의 본관으로 계획되었는데, 이러한 점을 볼 때 각 병원에서 필요한 공간에 따라 계획안은 유동적으로 적용되었음을 유추할 수 있다. 층별 구성을 살펴보면, 부분 2층 본관과 동일 2층 본관에서 모두 동일하게 1층에는 각 과별로 구분된 진료실, 수납부 및 대합실이 계획되고, 2층에는원장실, 의관실 등의 관리부가 계획되어 수직적으로 기능을 구분하려는 의도를 확인할 수 있다.
    • 또한, 이 시기에는 군산자혜의원, 진주자혜의원, 춘천자혜의원의 본관과같이 지하층을 갖는 2층 본관 계획안이 나타났다. 1층 진료부에는 각 진료과별로 진찰실과 부속실을 계획하고, 지하층에는 취사장과 식당, X-선실, 세탁장, 창고, 기관실 등의 부속실이 배치되었다. 즉, 지하층이 계획되면서 기존에본관에 설치되지 못했던 식당, 기관실, 세탁장 등의 공간이 추가되게 된 것이다. 반면, 2층에는 병실과 간호사실이 계획되고 있는데, 기존에 본관과 병동을 건물로서 완전하게 구분하던 것과 달리, 병실 일부를 본관 최상층에도 배치한 것이다. 이러한 경향은 의사, 간호사, 환자를 통합적으로 관리하기 위한기능적 계획안이라고 볼 수 있다. 순천자혜의원의 경우에는 본관을 3층으로계획하였는데, 실질적인 구조는 2층이다. 그렇지만 지붕을 높게 들어 올리고지붕 속 공간을 간호사실과 창고로 활용하고 있다. 그러나 성진자혜의원과 혜산진자혜의원은 순천자혜의원과 동일한 본관계획안을 적용하면서도 옥탑공간은 반영하지 않은 2층 본관을 계획하기도 하였다.
    • 이밖에도 이 무렵 진료부 건물의 내부계획은 이전 시기와 명확한 차이를보이고 있는데 기본적으로 진료과목별로 진찰실을 세분화하고 부속실을 첨가하여 전문적인 의료행위가 전개되도록 하였다. 부인과에는 여성환자 전용진료실과 치과에는 기공실(技工室), 내과와 이비인후과에는 암실(暗室), 약국에는 제련실(製鍊室) 등이 조합을 이루도록 하였다. 또한, 수술실을 본관건물 내부로 통합하고 이학 요법실(理學療法室)과 X선실을 덧붙여 당시 의학기술을 진료에 적용하기 위한 흔적을 볼 수 있다. 이 시기 관립 병·의원 본관 계획의 큰 특징으로는 본관의 전체적인 공간이 크게 두 부분으로 나뉘어졌는데 그것은 구료대상 환자 무료시료공간과 유료 환자를 위한 진료공간을원천적으로 분리한 것이다. 시료병실을 별도로 조성하는 사례는 1910년의 함흥자혜의원에서도 나타나는 기본적인 구성법이었지만, 1920년대의 본관설계에서는 출입구, 진찰실, 병실 심지어 변소까지 벽과 동선으로 구분하고 있다.
    • 이 시기의 특징은 진료과별로 분류되기 시작하였고 수술실, 약제실 등이분류되기 시작하여 의료기술의 발전을 반영하였고, 의료를 중요한 강점에 따른 조선사회의 반발을 무마하는 중요한 수단으로 생각하는 일제의 의도가 반영되어 관공서 학교와 함께 그 지역에서 가장 규모가 큰 건물로 건축하였다.건축 기술발달에 따라 벽돌을 사용하고 가장 최신 건축기법을 사용하였다.
    • 제3기에 이르면 본관의 규모가 대형화 · 복합화 현상을 보이고 건축재료로 철근콘크리트를 적극적으로 사용하면서 준방호실(準防護室)과 같은 재해대비책이 나타났다. 이 시기의 대표적인 사례는 경성의학전문학교 부속의원외래진료소(1932~33년), 일본적십자사조선본부병원(1936년 개원)과 일본적십자사 조선본부청진병원(1943년 개원)을 들 수 있다.
    • 경성의학전문학교 부속의원 외래진료소는 3층으로 계획되었는데, 철근콘크리트 기둥을 적극 활용하여 공간의 구성에 따라 유동적으로 구조를 설계하였다. 계단실의 경우 외부 입면을 원호형으로 설계하고, 전체 입면의 창호를 수평방향으로 넓게 설치하는 등 1920년대의 병·의원 계획과는 다른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다. 
    • 일본 적십자사 조선본부병원은 4개 층의 본관을 계획하면서 철근콘크리트를 적극 적용하여 기둥을 균일하게 배치하고 보와 슬라브로 수평구조체를 계획하였다. 관동대지진 이후 내진설계에 대한 관심이 반영된 결과였다. 4개 층의 수직이동 편리성을 고려하여 대형 엘리베이터, 식사운반용 엘리베이터를 설치함으로써 당대의 최신건축기술을 적극 반영하고자 한 의도를 확인할 수 있다. 이와 같은 본관 규모의 확대는 이전 시기보다좀 더 세분화된 진료실 구성을 가능하게 하였다. 진료과목별로 진찰실과 치료실이 조합되도록 하였다. 또한 3개의 수술실이 동시에 운영될 수 있도록 하였으며, 부대진료실로 X선실도 독립적으로 배치되었다. 
    • 일제강점기 병원계획안 중에서 가장 늦은 사례인 일본적십자사 조선본부 청진병원(1943)의 본관은 좌우로 긴 2층의 형태의 중앙에 사각의 시계탑을 높이 세우는 혁신적인외관을 보여주고 있다. 내부에 진료과마다 환자 대합실을 별개의 실로 인접하도록 구성한 점과 과별로 수술실을 별도로 운영하도록 계획한 점은 진료실의 세분화, 계열화 경향이 지속적으로 발전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러한 내부계획은 당시 일본에서 외래부, 진료부 및 병동부까지도 과별로 계열화되는경향이 반영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준방호실을 각 층마다 계획하여 전쟁에 돌입한 일본의 건축 관련 규정을 반영하고 있는 점은 다른 본관 사례와는 다른 점이다.


5) 조선인 의사의 병·의원


1920년대부터 근대 의학교육을 받은 우수하고 진취적인 조선 학생들이 의료일선에 투신하면서 입원실과 수술실 등을 갖춘 오늘날 중소병원 규모의 의료기관의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당시 의사는 교육을 통해 상류계층으로 편입한 계층이었다. 이들이 개설한 병원은 당시에 최고급 건축물로 평가된다. 우리나라에서 1980년대까지 있었던 의원과 원장 살림집이 동일 건물,또는 동일 부지 안에 있는 것은 이때 시작된 것이다. 당시 의사가 모자라던현실을 볼 때 출 퇴근 시간에 구애받지 아니하고 응급환자는 즉시 진료할 수있는 체계를 갖추고 있었다. 건물은 대부분 일본식과 양풍을 따라 건축했다.이는 그 당시 설계자, 건축기술자 등이 모두 일본의 기술을 받았기 때문이라생각된다. 이들 건물은 당시 일본의 의료기관과도 거의 같은 구조라고 할 수있다. 이중 현재까지 의료기관건물이 남아있는 의원급 의료기관들 중 몇 곳을 살펴본다.



(1) 백제병원 (현 부산 천도원, 부산시 동구 초량2동 467, 미지정 문화재)


1922년 일본 오까야마 의전 출신의 최용해가 부산에서 우리나라 민간인 최초로 종합병원인 백제병원을 열었다. 5층 건물로 당시 부산 초량동에서는 가장 규모가 큰 고층건물로 부산 부립병원, 철도병원과 함께 3대 병원으로 불렸다. 이후 최 원장이 일본으로 도피하자 동양척식주식회사가 중국인 양모민에게 팔아 봉래각이란 중국음식점으로 사용하다가 중일전쟁으로 양씨가 중국으로 돌아가고, 1945년 광복직후 부산에 주둔하고 있던 일본군 아까쯔끼 부대와 총격전을 벌여 일본장교들을 쫓아낸 한국 치안대가 그들의 근거지로 삼았다가 민간에 불하되어 예식장으로 사용하기도 했다. 1972년 불이 나서 3,4, 5층 내부가 불탔으나 워낙 견고하여 5층만 철거하고 3, 4층은 개조하여 사용하고 1, 2층은 옛 구조 그대로 벽과 문과 목조 계단도 완전하여 여러 업체가 사용하고 있다. 당시 건물은 일본에서 수입해온 벽돌(연와조)로 지어져 구경 오는 사람이 줄을 이었다고 하며 원래 병원용도로 지어진 건물이라 중 복도에 입원실로 추정되는 방들이 있고, 현재 88년이 되었지만 워낙 견고하여근린시설로 허용되고 있는 것으로 보아 당시의 규모가 상당했을 것으로 추정된다(정이순, 2005: 21-2).


(2) 삼산의원 (전북 익산시 중앙동 3가 114-2 등록문화재 제 180호) (그림 3)


‘삼산의원’은 1922년 의사출신 독립운동가 김병수(1898~1951)원장이 지은건물로 일제 강점기에는 번화가였던 익산시 중앙동에 지어진 큰 규모의 의원건물이다. 1930~31년에 조사된 익산군지에 의하면 당시 익산면 이리에는 6개의 의원이 있었는데 이중 4개가 일본인이 운영한 의원이었으며 두 곳이 조선인 의사가 운영하는 의원이었다. 해방 후 한국무진회사와 국민은행으로 사용되기도 했는데 지금도 지역주민의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건물이다.


일부 변형이 있긴 하였지만 아치형 입구의 포치ㆍ코니스장식 등은 근대 초기건축의 흔적을 엿볼 수 있는 건물이다. 지상 2층, 건축면적 158.02 m2, 연면적 289.26 m2 규모의 이 건물은 벽돌벽체의 외관으로 전체적으로 르네상스팔라죠 양식을 따르고 있으며 세부적인 디테일이 매우 섬세하다. 정면 대칭인 출입구 상부는 바로크 양식의 곡선을 수용하였다.


중앙부의 2층은 3개의 작은 창을 합쳐 중앙상부에 위치시키고 양측에 큰창 1개씩을 낮게 두었다. 1층 중앙에 아치로 된 출입구는 포치형으로 돌출되어 있고 정면 좌측과 우측은 각각 3개의 트레이 서리창을 두었으며 측면에는 각각 4개의 트레이 서리창이 있고 높게 올린 굴뚝이 남아있다. 현관 좌측의 계단을 통해 2층으로 출입하도록 되어 있고 2층은 중 복도형식이다. 지붕은 우진각 지붕이며 슬레이트로 마감하였고 처마 밑 코니스(cornice)는 3단의 몰딩으로 처리하였으며 몰딩 상하부에는 꽃문양이 조각되어 있고 처마에함석으로 된 물받이와 낙수통이 있다. 해방 후 국민은행이 건물을 인수하여33.45 m2의 금고를 중축, 사용하다가 이전하였다. 그 후 ‘오죽헌ʼ이란 음식점이 내부를 개조하고 이용하고 있다(익산시청문화관광과, 2001: 250). 김병수선생은 1990년 독립유공자로 애족장을 추서 받았다(김희곤 등, 2008: 18-21).



(3) 대동의원(충남 예산군 예산읍 예산리 137, 미지정문화재) (그림 4)


1920년대 일본인 의사가 건립하여 운영하던 의원을 1939년 최익열 원장(1914년생·경성제국대학 의학부 14회)이 인수하여 운영하던 의원이다. 이건물은 지상 1층, 목조 일식 건물로, 대지 1,262 m2, 건축면적 167.42 m2 규모이다. 의원과 살림집이 넓은 부지 내에 분리되어 있는 전형적인 옛 의원급의료기관의 형태를 갖추고 있다. 대지 좌측 도로에 접하여 의원건물이 있고넓은 앞뜰을 지나 살림집이 있다. 의원건물의 경우 전면에 대기실, 진료실과수술실을 두고 대기실에서 안쪽으로 통하는 여닫이문에 이어 편 복도를 따라 입원실이 있다. 의원건물의 주 출입구는 원형기둥과 캐노피로 구성되어있으며 원형기둥 상부에 보가 걸쳐있고, 지붕은 스페니쉬 기와로 덮었다. 살림집은 그 구성과 구조가 일본식으로 앞뜰에 면하여 길게 편 복도를 두고 방들과 거실이 있으며 후원과도 쉽게 연결되도록 미서기문(미닫이문)을 달았다. 2000년 최원장이 작고한 후 병원은 닫았지만 대동의원 간판은 그대로여서 지금도 예산 주민들이 예산초등학교 정문 맞은편에 형성된 주택가의 위치를 설명할 때 가장 쉽게 기준점으로 잡는 건물이다. 고령으로 옛 대동의원을 지키고 있는 부인의 뜻에 따라 그 보존여부가 결정될 운명에 처해있다(조



(4) 십자의원 (전남 장흥군 장흥읍 기양리 48, 등록문화재 제131호, 민가)(그림 4)


일제강점기에 신축된 일본식 주택이다. 일본에서 의학공부를 마치고 의사가 되어 귀국한 박예진씨가 향리인 전남 장흥에 개원하면서 건축했다. 이 집은 일반적인 주택의 경우와 달리 의원으로 사용되었던 부속 채가 주택과 결합된 형식이다. 특히 건물을 지은 주인이 조선인이면서 의사였던 관계로 일본식 주택 형식과 우리나라 상류층 주택의 배치가 한데 어울려 있다는 점 등에서 독특한 특성을 보여주고 있다.


처음 개원한 박 원장 다음으로 둘째 아들인 박재이(전남의대 졸) 원장과 둘째 자부 주소희(고려의대 졸) 선생이 2대에 걸쳐 함께 의원을 운영하였으나박 원장이 별세한 후 둘째 자부는 서울로 이사 가고 의원은 폐업했다. 안채에는 큰 자부 이정자 씨와 그의 아들 내외가 살고 있으며 의원 진찰실은 비어 있고 입원실은 주택으로 세를 놓고 있었다. 등록문화재 지정 후 수리비용을 관계당국에서 보조하여 준다고 해서 세입자를 내보냈으나 아직까지 지원을 받지 못해 비어둔 상태이다.



(5) CP제화유통(舊 의원, 의원 名 미상, 대구시 중구 종로 1가 83-2)


1936년 대구시내 중심지에 의원용도로 지어져 한동안 사용되던 이 건물은지상 2층, 연면적 118.8m2, 건축면적 59.4m2 규모의 벽돌벽체에 슬라브 지붕으로 남향 배치되어 있다. 대구지역 근대건축물조사에서도 의원의 이름이 기재되지 않고 일제강점기에 의원으로 사용되었다고만 적혀 있었으며 조사 당시에도 인근주민들 중 이 건물의 내력을 아는 사람을 만나 볼 수 없었다. 건물의 평면은 동서로 긴 장방형이고 외관은 남측 정면에 출입구를 두고 수직창을 비대칭으로 배열하였는데 창문 위에는 수평 돌림띠를 돌렸으며 파라펫(parapet, 胸壁)부에는 치형(齒形)장식을 하였다. 2004년 대구시가 조사한 근대문화 유산현황 조사서에는 유통업체가 창고로 사용하기 위해 창문을 벽돌로 막아 벽면으로 구성된 건물이라고 기재되어 있으나 2009년 1월 현재 철거와 함께 다른 용도로 사용하기 위한 공사가 한창이었다.2)




6) 주택 등 다른 용도의 근대건축물을 현재 병·의원으로 사용하는 사례


일제 강점기 건축당시에는 주거용 주택 및 공공건축물로 지어진 건물 중에 후일 일부를 용도를 변경하여 의료기관으로 전용한 건축물들이 있다. 이러한건축물들은 대부분 당대에 상당히 공 들여 축성한 건물이며 건축당시에도 유명세를 떨친 건물들이란 점에서 우리 근대사가 기억해야 할 건축물들이다.이 중에는 문화재로 지정된 경우와 본인들의 뜻에 따라 비지정 건축물로 남아 있는 경우가 있는데, 비지정의 경우 사유재산으로 언제라도 철거 또는 원형을 변형할 수 있다는 점에서 기록이 시급하다.


(1) 강북삼성병원 (구 서울 경교장, 서울시 종로구 평동 108-1, 사적465호)


신문로 평동 중턱에 자리 잡고 있는 이 건물은 1936년 원래 금광왕 최창학의 사저로 착공되었다. 대지 1,584평, 건축면적 117평, 연면적 264.4평의 철근 콘크리트벽체 지하 1층 지상2층 규모의 이 대저택은 근대건축사에 이름을 올린 김세연이 설계하고 일본의 대림조(大林組)가 시공했다. 해방 후 김구선생이 상해 임시정부에서 귀국하여 이곳에 거처하면서 경교장(京橋莊)으로유명해진 건물이다. 1949년 6월 26일 정오 저격자 안두희에 의해 김구선생이 피살당한 역사적인 장소이기도 하다. 그 후 후손에게 상속되었던 이 건물은 한 때 세들어 있던 미국인에 의해 무허가 모텔로 사용되기도 했는데 이후고려병원이 이 건물을 사들여 김구선생이 최후를 맞은 거실을 보존하며 다른시설은 병원용으로 전용하였다. 현재 이 건물은 강북삼성의료원에서 본관으로 사용하고 있으며 내부는 개조하여 원형을 잃었다. 외부의 캔틸레버 부분이 수리 변형되었지만 그 외 외부벽체는 원형에 가깝다(김정동, 1989: 41-2).


(2) 정 소아과의원 (구 서병직주택, 대구시 중구 남일동 141, 미지정문화재)


일제시대 대구 서부자로 알려진 서병직이 1937년에 건립한 벽돌벽체의일·양 절충식 2층 주택으로 지상 2층, 대지면적 634.7 m2, 연면적 251.6 m2,건축면적 181.98 m2 규모이다. 일제시대 일·양절충식 주거유입 과정과 상류층의 주거문화 이해를 위한 자료적 가치가 인정된다. 정필수 원장(1947년 경북의대 졸)이 인수하여 소아과의원 겸 주택으로 리모델링한 건물이다. 평면은 장방형에 가까운 부정형으로 1층에는 서쪽의 현관 홀을 중심으로 공적 공간을, 2층에는 침실, 서재 등의 사적 공간을 배치하였는데 대체로 공적 공간의 바닥에는 다다미를 깔고 생활공간에는 온돌을 시설한 것으로 보아 공간의성격에 따라 바닥 마감이 달랐던 것으로 보인다. 동측 대문에서 현관에 이르는 진입로는 종석 씻어내기로 시공하여 아름답다. 외관은 벽돌 벽에 시멘트몰탈 뿜칠로 마감하고 창은 목재 미닫이창을 달았으며 지붕은 모임지붕위에슬레이트를 이었다. 일제시대 일·양 절충식 가옥으로 특히 정 원장이 원형보존에 힘을 기울여 원형이 잘 보존되어 있는 집으로 평가되고 있다.


(3) 이해영 정형외과의원 (구 교남YMCA, 대구시 중구 남성로 117, 미지정문화재)


일제강점기인 1917년 미국인 선교사들이 지은 교남YMCA회관으로 지상 3층, 연면적 366.79 m2, 건축면적 180.71 m2의 붉은 벽돌벽체의 한·양 절충식 건물이다. 1965년 경북의대 출신의 이해영 원장이 인수, 내부를 개조하여이해영 정형외과로 사용하고 있다. 건물은 북측은 남성로(일명 약전골목)에면하여 북향 배치되었고 2층 건물로 모임지붕에 함석을 이었다. 평면은 동서로 약간 긴 장방형으로 정면 우측의 출입구와 연결되는 중복도의 양측에 여러 개의 방이 있는데, 현재 그 방들은 입원실로 사용되고 있다. 외관은 콘크리트 줄 기초 위에 붉은 벽돌을 쌓아 벽체를 구성하고 벽면은 궁형 아치창과층간 치형 돌림띠, 기둥처럼 꾸민 버팀벽 등으로 장식하였는데 현재도 상태는 양호하다.


4. 결어


근대의학의 도입이후 한국의학은 이제 세계 어디에 내놓아도 손색이 없을정도로 괄목할만한 발전을 이룩했다. 그러나 우리나라 근대 병·의원의 역사에 대한 기록과 연구는 빈약하기 그지없는 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다행히 문화재청이 지난 2008년 12월 알렌의 청진기 등 근대 의료기기를 중심으로 ‘근대 문화유산 의료분야 목록화 보고서’를 펴내어 우리의 근대의료유산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한 것은 고무적인 현상이다.


근대 병·의원 건축물은 우리나라 근대의료의 역사를 담는 그릇임에도 이를 문화재로 인식하는 시각은 아직 미흡하다. 건축사에서는 근대의 병원을 외국 공관 및 학교와 더불어 우리나라 근대건축의 효시로 보고 있을 정도로 근대병원건물의 역사적 의미는 적지 않다(서치상, 2006: 76-9). 그러나 근대 의료건축물 대부분 주민이 많이 거주하는 도심이나 지역사회 중심부에 위치해있었기 때문에 한국전쟁과 1960년대 이후 한국사회의 급격한 도시화, 산업화과정에서 철거 또는 변형대상 최우선순위에 놓임으로써 다른 건물들에 비해단명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 이유로 문화재로 지정된 근대의료기관 건물은 부속건축물과 의사들의 주택을 포함해도 30여 점을 넘지 못한다.


따라서 이번 연구에서는 지금까지 보고된 각종 공신력 있는 보고서와 연구자료를 근거로 의료기관 관련 근대건축물을 정리해보고 그 의료사 및 건축사적 의미를 살펴보았다. 이러한 종류의 연구로는 처음이라 미흡한 점이 적지않지만 추후 보다 심화된 연구의 계기가 되기를 희망한다.



색인어 : 근대 병의원, 제생의원, 동인의원, 자혜의원, 목조 건축물, 벽돌조 건축물




의사학 제20권 제2호(통권 제39호) 2011년 12월 Korean J Med Hist 20 ː395-424 Dec. 2011

ⓒ대한의사학회 pISSN 1225-505X, eISSN 2093-5609


Research on the Hospital Construction and Structure in Daehan Empire and Colonial Modern Period

HAN Dong Gwan*·RYU Chang Ug**·KO Sang Kyun† JUNG Jae Kook†·MOON Jong Youn‡·PARK Yoon Hyung‡3)


It was the late Chosun Dynasty and Daehan Empire era that Western Medicine has firstly been introduced to Korea, previously operating on a basis of Korean traditional medicine. Western Medicine has been introduced by American missionary and Japanese Imperialism. An introduction of Western Medicine made it feasible to proceed new type medical care including operation, leading to require a new form of medical facilities. In the beginning, new facilities were constructed by Japanese Imperialism. Other hand many of facilities including Severance Hospital were established by missionaries.


First of all, Daehan Empire established and managed a modern type of medical facility named "Jejoongwon" in 1885 as a government institution hospital. The Red Cross Hospital built in 1889. Afterwards, Jejoongwon and the Red Cross Hospital were taken over to missionary hospital and Japanese Imperialism, respectively. Japanese Imperialists firstly have protected their nationals residing in Chosun but have proceeded care a few Chosun people to exploit medical treatment as a mean to advertise superiority of the Empire of Japan. The facility that has firstly been established and managed was Jeseang Hospital in Busan in 1877, leading to establish in Wonju, Wonsan, and Mokpo. Afterwards, Japan has organized "Donginhoi" as a civil invasion organization, leading for "Donginhoi" to established "Dongin Hospital" in Pyeongyang, Daegu, and Seoul. Since 1909, governmental leading medical facility named Jahye Hospital was established according to an imperial order, leading to establish 32 hospitals all over the nation.


American missionaries have established and managed 28 hospitals started from Severance Hospital built in 1904. However, Chosun doctors started to having educated and opening up their own hospital since 1920, leading for many of medical facilities to be established, but most of them have taken different roles followed by 6.25 War and economic development period. However, some of them are currently under protection as cultural assets, and some of them are now preserved.


Buildings have originally been structured of wood as a single story in the beginning, but bricks started to be steadily used, leading to build two story building. Each of clinic department started to be separated since 1920, establishing operation room and treatment room.


Now, a change of perception as to buildings that need to be preserved and an attention from government and doctors are required since modern medical facilities keep disappear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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