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Chapter 16. Internal Malaise
    • 1970년대와 1980년대 의과대학에는 어떤 특정한 고질병 있었다. Patient care를 점차 더 많이 하면서, 그리고 점차 규모가 커지면서 기관적 응집성(institutional cohesiveness) 유지하는 것이 어려워졌고, academic work 집중하는 것도 어려워졌다. 게다가 때는 공익의 대변인이었던 의과대학들이 이제는 자기의 이익을 챙기기 시작했다.

 

  • Rudderless Ships
    • Medicare & Medicaid 통과 이후로 의과대학들은 엄청난 속도로 성장하기 시작했다. 대부분 학교의 캠퍼스는 사방팔방으로 커졌고, full time faculty 숫자가 많아졌고, annual budget 늘었다.
    • 이와 같은 성장의 주된 원동력은 임상 진료였다. 1965년에, 진료는 전체 수입의 6% 이하만을 차지하는 정도였는데, M&M이후로 주요한 수입원이 되었다. 1990년대에 진료는 거의 절반을 차지하였다.
    • 임상 과의 성장이 의과대학 전체의 성장세와는 전혀 다른 정도였다는 것도 놀라울 것이 없다. 기초의학 교수(faculty) 5671에서 15432 증가할 동안, 임상의학 교수(faculty) 11447에서 59189 증가하였다. 일부 과에서 clinical track 만들어져서 academic activity 전혀 하지 않는 faculty도 생겼다.
    • 의과대학이 성장하면서 WWII이후의 경상이 더 빨라졌다. 학교가 커지면서 인간미가 없어졌다. Institution 전체에 걸쳐 친분을 유지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고, 심지어 내에서도 별로 없었다. Faculty 사이의 feeling of unity 유지해보고자 하는 학교의 노력을 있었지만 그것을 즐길 수 있는 faculty 거의 없었고 각자 자기 일을 하느라 바빴다. department division 통합되지 못하고 각각의 부분으로서 역할을 했다.
    • 예전의 gentility 그저 추억일 뿐이었다. 새로운 경향의 생물 연구의 압박 컸고, personal medical care 대한 요구 커졌으며 각종 conference 참가한다고 바빴고, 특히 academic track 있는 교수들은 연구비의 압박이 심했다. Academic life에서 오는 보상은 많았지만, genteel collegiality, security 아니었다.
    • 의과대학이 성장하면서 내부의 경쟁도 심해졌는데, 각 과는 서로서로 심한 경쟁을 벌였다. 임상 과들 사이에서 physician-scientist들은 clinician 높은 봉급에 분개했고, 또한 수업 시간과 승진 기준에 대해서도 치열하게 싸웠다. collegiality 너무 없어서, 일부 과에서는 능력있는 faculty 학교를 떠나버리기도 했다.
    • Post-Medicare era에는 학문간의 분절화도 심했다. 수술 분야를 보면, 마취과나 정형외과나 이비인후과가 하나의 과로 독립해서 나왔다. cardiology 분과들도 하나의 과로서의 지위를 요구하고 나섰다.
    • 의과대학이 커지면서 학과와 faculty 사이의 갈등도 빚어졌다.
      • Funding agency 총액은 그대로 채로 연구비 지원을 늘이기 위해서는 간접비를 줄여야 했는데, faculty 이에 대해 찬성했지만, dean 반대했다.
    • 의과대학 내부의 원심력이 증가하면서, 학장의 역할은 점차 약화되었다. 학장이 의과대학의 대표이긴 했지만, 실제적으로 의과대학을 운영하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많은 학장들이 효율적으로 운영하기 위한 노력을 했지만, 직접적인 의사결정에 대한 권한보다 얼마나 설득할 있는지, 개인의 성격이 어떠한지 이런 것들에 그 성공이 달려 있었다.
    • 대부분의 행정적 권한은 자기 과의 교수들이 벌어오는 연구 및 진료 수입에 대한 권한을 가지고 있는 주임교수들에게 옮겨갔다. 하지만 megamedicine의 시대에, 주임교수들이 연구나 진료나 교육에 쓰던 시간은 practice plan 같은 행정처리 시간에 밀려났고, 주임교수들 중에서 자신이 professionally successful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거의 없었다.
    • 1970년대와 1980년대에 곳곳에서 의과대학의 운영은 점차 복잡한 일이 되어서, 재정적 행정적 문제들(예산, faculty규모, 교육, 연구, 진료 등등과 관계된)이 엄청나게 많아졌다.
      • 의과대학들은 이제 complex medical center 일부였다. 각종 정부 규제에 대응하는 일들은 짜증나는(exasperating) 일이 되었다.
    • Post-Medicare 시대에, 모든 학교들은 늘어만 가는 행정 문제를 처리하기 위해 새로운 전략을 시도했는데, 많은 학장과 주임교수들이 보건 정책, 교육 행정 등등을 공부하기 시작했다(주로 Harvard School of Public Health 또는 AAMC에서).
      • Administrative staff수가 늘었고 full-time business manager 고용되었고, 학교들은 건설 계약이나 법정 분쟁에 더 능숙하게 대응하였다.
    • 그렇지만, 운영 방식의 혁명으로 충분하지 않았다. 의과대학들은 대학의 나머지 다른 학과들과 마찬가지로 합의에 의한 통치(governance by consensus) 익숙해져 있었다. 대부분의 결정사항들은 장기적인 관점이 아니라 무계획적으로 이뤄졌고, 힘이 있는 일부 사람들이 주요한 사항에 대한 합의에 도달하는 데에는 무척 오랜 시간이 걸리기도 했다. 종종 누가 책임을 지는지(in charge)가 불확실했다.
    • 이 같은 운영 스타일은 academic matter에 한정지어 보면 쓸모가 있긴 했다. 하지만 빠르고 복잡하게 변하는 시대에 대학 차원에서 이러한 방법은 적절치 못했다.
    • 1980년대 후반까지 이러한 대학 운영 스타일은 별다른 문제를 야기하지 않았다. 임상 수입은 정말 많았고, 어려운 논의들은 그냥 무시되었다. 당시까지만 해도 주변 환경이 friendly 했다.
    • 그러나 의과대학이 거추장스러울 정도로 규모가 커지면서 academic medicine 역시 그렇게 되었다. 봄에 열리는 “clinical meetings” Atlantic City 시설에 맞지 않을 정도로 커졌다. Community based medical school 생겨나면서 의과대학간의 다양성은 그 어느 때보다도 커졌고, 의학교육에 관여하는 병원의 종류나 숫자도 다양해졌다. 다양성은 강점이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academic medicine 규모가 커지고 질적으로 다양해지면서 어느 그룹도 그것을 대표하지 못했다.
    • 규모가 커지고 복잡해지면서 academic medicine 이상 family 같은 비유는 적절하지 않게 되었다. 또한 너무도 커지고 분절화된 Academic medicine“heroes” 나타나기에는 어려운 환경이었다.
    • Faculty 진료가 늘어나는 것은 의과대학에 좋은 측면이 많았다. 특히 진료 수입을 활용하여 연방 지원이 적은 상황에서도 연구나 교육이 이뤄질 수 있었다. 시절 연방 정부의 연구에 대한 지원이 감소하는 추세에서 다른 과들이 이미 겪고 있던 운명을 조금 미뤄두었던 것이다.
    • 그렇지만 faculty 진료에 아무 문제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Faculty 진료가 중요해지면서 점차 의과대학은 여기에 의존하기 시작했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만약 임상 수입이 줄어들면 연구와 교육이 곧바로 영향을 받게 된다는 것이었다.
    • 게다가 이러한 현상은 의과대학의 대학으로서의 정체성 잃게 만들었다. Clinical faculty는 교육 시간을 줄여가며 환자 진료에 더 많은 시간을 쏟았다.
      • Senior faculty들은 진료 수입에서 오는 압박 우려했고, AAMC president진료가 의과대학을 지배하고 있다라고 했다.
    • Academic pursuit 진료 사이의 긴장은 어제오늘의 일은 아니었다. 그러나 M&M이전에는 의과대학은 이러한 긴장 상태를 진료의 총량을 제한함으로써 해결하려고 했었다. 그러나 점차 진료에 경제적으로 의존하게 되면서 의과대학들은 점차 더 많은 환자를 보아야 한다는 압박에 시달렸다.
    • WWII 이후로 엄청난 돈이 의과대학에 집중되었고, faculty들은 점차 경제적인 인센티브에 적응해갔다. multiversity 시대에 연구가 성장한 것처럼, clinical era faculty 진료가 성장했다. 유능한 academic manager들이 의과대학을 운영하는 했지만, 학문적 리더나 교육적 선구자는 없었다.
      • Clinical practice 시대에 부속병원의 모습은 nonteaching hospital 유사해져 갔고, 그나마 위안거리는 여기서 오는 보상 덕에 academic work 있었다는 사실이었다.
    • 의과대학이 지나치게 진료를 강조했다는 것을 과도하게 비난만 할 것은 아니다. M&M 이후에 그냥 진료 수입과 관련한 상황이 그랬던 뿐이다. 연구비를 따는 것이 점점 더 어려워지고 있던 당시 상황속에서 의과대학이 임상 진료를 늘리지 않는 것은 어리석은 행동일 뿐이었다.
      • Faculty practice plan 원래는 1960년대와 1970년대의 경제적 사회적 상황에 맞추어 도입된 것이었는데, 이제는 마치 만병통치약처럼 여겨졌다. 의과대학은 부자가 되었지만, 뿌리를 잃었다고 할 수 있었다.
    • 미국 의학교육 시스템이 처음 만들어졌던 때부터, 의과대학은 그들의 본질의 근원을 (1)대학 (2)의료전달체계, 가지로 보았다. 중에 대학부분이 지금까지는 강력했지만, 이제는 이것이 약해지고 있었고 의학교육의 운명은 점차 의료전달체계와 얼마나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느냐에 달려 있었다.

 

  • The Decline of Academic Health Centers as Public Trusts
    • 흔히 과거는 미화되곤 한다. 미국 의학교육의 역사도 예외는 아니다. 1950년대까지 full-time position 무척 적었다. 수십년간 의과대학과 병원들은 인종, 종교, 성별에 따른 차별을 일삼았고 charity patient에게는 차가웠다. 세기 내내 의과대학은 faculty 중심으로 발전해왔고 학생이나 house officer에 대한 교육적 의무는 소홀히 다뤄졌다.
    • 그럼에도 AHC 성취는 이러한 흠결을 덮고도 남았다. 좋은 의사를 양성하는 것을 강조하고 1960년대와 1970년대 사회적 요구에 부응하고자 하는 노력, 의학 연구의 성과 등등.
      • 무엇보다 첫 2/3동안은 공익의 대변인(Public trust)로서의 역할을 잘 해왔다.
    • 1970년대 이후로 1990년대까지 medical faculty 행태는 이상 공익을 위하는 것이 아니었다. Post-Medicare era 의과대학은 대학이라는 지적 뿌리(intellectual root) 점차 멀어졌고, 동시에 공익과도 멀어졌다.
    • Medical faculty 그들의 이익에 집착하는 모습은 salary 강조하는 것에서도 쉽게 있다. 1970년대, 80년대, 90년대에 가파르게 상승했고, 많은 faculty들이 academic life 뿐만 아니라 개인적인 또한 추구하고자 했다.
    • 적절한 academic pay 어느 정도일까? 아무도 정확히 말할 수는 없겠지만, clinical era salary 오르지 않을 것이라 기대하는 것은 비현실적인 기대임이 분명하다. Faculty salaries market force 반영한다. 특히 일부 surgery과에서는 상승이 어마어마 했다
      • “Mammoth personal incomes”
    • Salaries 상승은 의과대학 내에 새로운 분위기를 반영하는 것이었는데, 진료 수입이 교육과 연구 목적으로 많이 사용되긴 했지만 진료가 늘어난 가장 큰 이유를 딱 하나만 꼽으라면 바로 고수입에 대한 열망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 수술 과에서는 최대한 많은 수술을 하고자 했다. “수술 건으로도 돈을 많이 있다. 그리고 수술을 많이 하면, 훨씬 많이 있다
    • Faculty 같은 변화된 태도가 점차 상업화된 의과대학의 정신을 보여준다면, 특허나 새로운 산업 벤처에 대한 태도 역시 마찬가지였다.
      • Harvard Medical School 항상 특허를 공공에 풀어버림으로써 제약산업계를 화나게 해왔었는데, 1974 Monsanto Company 협약을 맺고 $23M 지원받았다.
      • 그 이듬해에 Harvard 오랫동안 지켜왔던 특허에 대한 정책을 포기하고 일정 보상을 받고 산업체에 넘기는 새로운 정책을 도입했다.
      • 대중의 눈에는 이러한 모습은 academic scientist 기업가로, 대학은 commercial institution으로 보였다.
    • 의과대학들이 기업과의 새로운 liaison을 찾아나선 데에는 이유가 있었는데, 연방 정부의 연구에 대한 지원이 줄어들면서 기업에서 스폰서를 받는 것이 점차 더 끌렸던 것이다.
      • 추가로 연방 정부는 “technology transfer” 장려했다.
      • The Patent And Trademarks Amendments Act of 1980으로 대학과 비영리기관들이 연방정부의 지원금을 받은 연구에서 만든 새로운 발명이나 특허를 직접 소유할 수 있게 되었다. 1990년에 100 이상의 의과대학이 기업으로부터 자금을 조달하고 있었다.
    • 이러한 변화에 대한 최종적 결론을 내리기에는 이르지만, 적어도 한 가지 목표는 이루었다. Technology transfer 촉진하고, 의과대학에게 추가적인 수입원을 제공하는 것이다.
    • 그렇지만 biomedical research의 상업화는 많은 딜레마를 낳았다. Faculty practice plan 마찬가지로 대부분의 수입이 faculty 손에서 머물면서 교육이나 연구를 지원하고자 하는 의과대학의 소유로 넘어오지 않게 것이다.
      • 일부는 스스로 biotechnology company 설립하여 돈을 벌었고, 일부는 기업에 자문을 해주고 자문료를 받았으며, 일부는 특허를 통해 돈을 벌었다.
    • 게다가 사익을 추구하는 이러한 유혹은 잠재적인 conflict of interest 야기했다. 거대한 재정적 보상이 investigator 하여금 연구 주제를 선택하는 것에 영향을 줄지도 모른다는 우려가 있었고, institutional responsibility 다하지 못할 것이라는 우려도 있었다. 무엇보다도 실제로 심한 대중적 비난을 받은 사건들이 터졌다.
    • COI 관련된 이러한 문제의 정도나 심각성이 어느 정도였는지 분명하게 말할 수는 없다. 정서적(emotion)으로는 엄청난데, 증거는 거의 없었다.
    • 1990년대에 biomedical research 상업화는 의과대학에 있어 가장 난감한 문제 하나였다. 딱히 만한 물건 없던 시절에는 기업과 얽히는 것을 비난하는 것이 쉬웠다. 실제로 이미 당시에 대학의 다른 과들은 이미 기업과 관계를 맺은 오래 되었다. Academic value 항상 진화하는 것이고, commercial age 상업적으로 변하는 것은 이상할 것이 없었다.
    • 그렇지만 많은 사람들은 biomedical research 상업화에 대한 우려가 컸다. 학교가 수익을 추구하면서 점차 charitable institution으로서 진리를 추구하고 학생을 serving하는 모습은 잃어가고 있다라고 했다.
    • 1970 이후 상업주의가 팽배했다면, academic integrity 낮아졌다.
      • 학생들이 cheating했다는 보고가 자주 있었고, internship matching program 규칙을 어기기도 했다.
      • 중에서 가장 대중의 비난을 것은 scientific fraud였다. (표절, 결과의 잘못된 해석, 데이터 조작)
      • 대중들은 biomedical research 부정적인 방향으로 변해가고 있는 것을 우려했다.
      • "The Science Mob"
    • Biomedical 연구에서 사기(fraud) 정도는 확실히 얼마라고 하기는 어려웠고, 과학의 역사에서 다양한 형태의 사기는 어떤 형태로든 있어왔다. 하지만 이렇게 많은 documented episode 있는 것은 지식에 대한 탐구가 학문적 성공보다는 생존의 문제가 되었다는 것을 뜻한다고 있다.
      • "publish or perish"
      • "salami slicing", redundant publication, authorship 문제(senior junior 논문에 무임승차)
    • 많은 사람들에게 authorship 남용은 biomedical research integrity 떨어지는 것에 대한 중요한 신호였다. 명백하게 드러난 사기행위는 일탈(aberration)이라고 있었다. 하지만, authorship 대한 남용은 academic medicine 문화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 "a murder gets more attention than a mugging"
      • 이제 과학은 질병이나 고통의 싸움이 아니라 과학자들끼리의 싸움이 되었다.
    • 1965 이후 사회의 health care need medical faculty사이의 차이가 커졌다. Acute disease 줄고, chronic disease 시대가 왔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질병을 걱정하는 것보다 의료 접근성에 대해 걱정했다.
    • 대중들이 의료전달체계에 관심을 갖기 시작하는 동안, faculty 관심은 생물학적인 것에 집중되어 있었다. Medical scientist들은 질병과 치료의 생물학적 이슈들을 쫓고 있었고, 상대적으로 소수의 faculty만이 사회 경제적 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 의과대학은 WWI이후 처음으로 사회의 요구에 반응하지 않는 배타적인 존재가 되었다.
    • 대부분의 Medical faculty들의 관심은 좁은 곳에 머물러 있었지만, 그렇다고 AHC 이뤄낸 것들이 격하되는 것은 아니다. Private patient들의 care 대한 요구, 의과대학의 임상 수입에의 의존, 많은 urban community AHC에의 의존과 같은 '강력한 ' 맞추어 나가며 AHC 나름의 사회적 요구에 대한 반응을 보였다.
    • 그럼에도 특정 인구집단에 대하여 clinical service 하는 것은 비효율적이고 돈이 많이 드는 사회적/정치적/경제적 health care system 문제를 해결하는 것과는 다른 일이었다.
      • 그렇다면 사회 변화의 도구로서 의과대학의 역할은 무엇인가?
    • 역사적으로 대학은 사회적 변화를 만들어나간다기 보다는, 외부적 힘에 맞춰서 대응하는 역할을 했다. 서구 대학에 영향을 주요한 사건들은 프랑스의 Revolution, 러시아의 Communist Party, 영국의 various royal commissions 등이 있다.
      • 국가의 health care system 단순히 기술적인 지식 뿐만 아니라 당시 사회의 가치나 희망, 열망 등등을 같이 보여준다.
    • 그렇지만 의과대학은 의료전달체계와 관련된 논의를 이끌어갈 의무가 있다. 의과대학이 점차 환자 진료에 경제적으로 의존해 감에 따라, 대학의 다른 어떤 과도 사회 문제에 대해서 가지지 못했던 '지분' 가지게 되었다. 사회는 의과대학이 증가하는 비용에 관한 문제를 풀어나가기 위한 리더십을 발휘하길 기대하고 있었다.
    • 일부 academic medicine 리더들은 이에 동의했다. AAMC 1968 "의과대학은 교육과 연구와 진료에 대해 책임 있는 자세를 가져야 한다"
      • 아무도 질병에 대한 연구를 그만 해야 한다고 생각하지는 않았지만, 더불어 많은 사람들이 의료전달체계에 대한 연구 역시 같이 동반되기를 바랐다.
    • 그러나 이러한 기대는 이뤄지지 않았다. 많은 학교들이 health service 연구를 했지만, 1970년대, 1980년대, 1990년대 동안 대체로 분야의 연구는 그저 '부가적인 '으로 여겨졌다.
      • 분야 연구자들은 승진이나 학문적 인정을 받는 것이 느렸고, 관련 연구를 있는 환경이 조성된 학교도 거의 없었다.
    • 물론, 의료전달체계를 다시 만들어 나가는데 의과대학이 어떠한 역할을 해야 하는가에 대한 논의의 공간은 충분했다. 그러나 의과대학은 다양한 방법 어떤 것도 택하지 않았고, 오히려 아무 일도 없다는 것처럼 행동했다.
    • 상업주의가 점차 퍼져가고 authorship 남용하고, 미국의 의료 시스템 개선에 대한 논의는 거의 없는 와중에 medical faculty 그들 자신의 안위와 이익에 집착했고, 넓은 사회라든가 그들이 serve해야 하는 사람들에 대한 관심은 갖지 않았다.
      • 1970년대와 1980년대는 "Me generation"이라 불릴 있고, community 흔히 무시되기 일쑤였다.
      • 1977년의 베스트셀러 제목은 Looking out for number One 이었고, 1980년대에 월가에는 "greed is good" 태도가 퍼져 있었다.
      • 이러한 문제는 의과대학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 전반의 분위기였던 것이다.
    • 그러나 academic medicine에는 뭔가 다른 것이 있었다. 20세기 시작부터 medical faculty 공공의 이익을 대변했고, 학부와 졸업생 교육에 신경을 썼고, public health 뿐만 아니라 progressive era 다른 많은 것들의 발전을 위해 리더십을 발휘했고, WWII동안에는 많은 사람이 희생했다.
      • 그러나 1980년대에 academic physician들은 기업 운영진, 증권 중계인 등으로 인식되기 시작했다. 당시 미국 사회에서 Academic medicine만이 개인의 이익을 공익보다 우선시했던 것은 아니지만, 다른 사람들과 달랐던 것이 있다면, academic medicine 전통적으로 다른 기준을 따라서 행동해왔다는 것이었다.
    • 수십년간 academic medicine 특권층으로 인식하게끔 했던 것은 AHC 자기 자신이 아니라 아픈 자를 위한다는 믿음 때문이었다. 아이러니하게 1970년대와 1980년대의 academic medicine 스스로의 이익을 우선하는 동안에도 자국민의 건강을 중시하는 모습은 사라지지 않았다. 의과대학 학생들을 교육하는 곳이었고, 연구가 주로 이뤄지는 곳이었으며, 진료가 이뤄지는 곳이기도 했다.
      • 평균적인 환자들은 높은 수준의 진료가 필요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그것이 가능하다는 믿음만으로도 위안을 가질 있었다.
    • 짧게 줄이면, AHC 여전히 핵심적 mission 추구하고 있었다. AHC 뛰어난 진료와 성공의 기록을 보유한 국가 기관이었다. 그러나 소유욕(acquisitive) 시대에 academic medicine 비전을 상실했다.
      • 의학교육자 그들 자신이 이러한 vision 상실했음을 상기하면, 대중들이 국가적 well-being 대한 AHC 중요성을 잠시 망각했다고 해서 이를 비난할 수는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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