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Chapter 9. The Expansion of Clinical Service
- WWII이후 미국의 성장이 점차 복잡해지는 동안, 대학도 다르지 않았다. Abraham Flexner가 이상적으로 바라본 research university는 WWII 이후 미국의 고등교육의 대명사와도 같았다.
- Multiversity의 여러 학과 중에서도 MS은 실용적 요구(practical demand)를 가장 잘 맞춰나갔다. 의료를 더 많은 사람들에게 전파한다는 면에서 이제는 가난한 사람 뿐만 아니라 middle class까지 serve하고 있었다.
- WWII이후 20년간 확장된 clinical service는 AMC내에 긴장을 조성했는데, 이는 환자를 그 정도로 보면서까지 연구와 교육을 병행하기가 어려웠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본연의 임무를 잊은 AMC는 극소수에 불과했다. 전쟁 이후 미국 의학을 이끄는 힘은 AMC가 쥐고 있었다.
- Academic Medical Centers and the Rising Demand for Medical Care
- 전쟁후 미국에서 medical care에 대한 공공의 수요는 빠르게 증가했다. 이는 국가가 경제적으로 풍요로워졌다는 것을 뜻하는 것이기도 했다.
- 사회적 분위기가 변하면서 의료는 점차 '기본권'으로 인식되기 시작했다. 이런 태도는 의료전달 및 지원체계에 대한 다양한 실험으로 이어졌다. Sickness insurance, comprehensive care program, neighborhood health center, group practice…
- 그리고 중간층 사람들은 주로 private insurance(PI)를 사용하였다.
- 환자들이 PI를 활용하면서 병원은 점차 더 바빠졌다. Renovation을 하고 확장해야 했다.
- 5684개의 acute-care general hospital 중 227개의 "major" teaching hospital이 주로 증가한 대중의 수요 따른 영향을 가장 많이 받았다.
- 전쟁 이후 연방 health policy의 철학은 각각의 지역에 적어도 하나 이상의 major teaching hospital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 부속병원에 대한 수요가 커지는 것은 우연한 것이 아니었는데, 왜냐하면 병원들 중에서도 이 병원들이 제공하는 의료 수준을 최고로 쳐주고 있었기 때문이다.
- "최상급" 병원 및 의료진의 리스트는 점차 거의 독점적으로 '부속병원'만으로 구성되었다.
- 정확히 어느 정도나 이들 부속병원이 뛰어났는지는 추측만 할 뿐이다. 많은 연구에서 이를 구체적으로 밝히고자 했으나 대개는 제대로 통제되지(controlled) 않거나, bias가 심했다. 그럼에도 확실한 것이 있었는데 MGH의 outspoken director인 John H Knowles는 부속병원을 "medical excellence의 독도(unrivaled islands of medical excellence)"라 불렀다.
- 연방 정부는 Veteran Administration(VA)를 통해서 교육과 연구가 진료를 향상시킨다는 아이디어를 승인(imprimatur)하였는데, WWII이후 VA는 수십개의 새로운 병원들을 지었고, 대부분은 MS과의 affiliation을 맺었다. VA에게 있어서 이러한 affiliation의 목적은 단순했다. "Veteran들이 가장 높은 수준의 진료를 받을 수 있게 해라"
- 평판이 높아짐에 따라 부속병원은 더 많은 환자를 유치하게 되었다.
- 대부분의 부속병원에서 일의 양은 미친듯이 늘었는데, 그다지 응급하지 않은 환자를 포함하여 응급실의 환자 수가 엄청나게 늘었다. Laboratory facility도 증가하여 혈액검사가 1930년에 비해 1968년에는 10 배가 증가하였다.
- 전쟁 이후 시기에 부속병원들은 지속적으로 많은 수의 가난한 환자들을 담당하고 있었는데 이러한 charity patient의 비율은 점차 감소하였다. 대신 semiprivate patient가 주된 고객이 되었다.
- Private patient의 수가 많아지면서 full-time faculty가 진료에 더 많이 관여하였다. 그리고 그에 따른 수입도 많이 증가했다.
- 부속병원이 paying patient를 위한 시장에 발을 담그게 된 것에는 그들의 평판과 진료에 대한 높은 기준도 큰 역할을 했는데, 이는 곧 medical staff의 quality가 중요함을 의미했다. 따라서 부속병원들이 paying patient를 통해서 경쟁력을 확보할 수 있다는 확신을 가지면서 그들은 staff를 고용하는데 있어서 점차 성별이나 종교나 인종을 따지지 않았다.
- 부속병원은 많은 문제점도 해결해야 했는데, 거기에는 종종 간호사가 부족한 문제, 근로자들의 불만, 노동조합이 만들어질 가능성, 교육에의 투자로 인한 환자들의 불편함 등등이 있었다.
- 전쟁 이전에 대부분의 부속병원은 인간미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곳이었다. 환자들은 의사들이 기술적으로는 훌륭해도 인간적으로는 차갑다고 했다.
- 부속병원이 성장하면서 행정적 문제도 등장했는데, MS과 같이 병원도 대규모의 사업이 되어버린 것이다. 그렇지만 이들은 여전히 '질'을 최우선으로 생각했다
- "any saving of money is a secondary gain"
- 한 명의 부유한 자선가가 병원의 운영비용을 댈 수 있는 시대는 지났다.
- 부속병원은 규모면에서 커졌을 뿐만 아니라 질적으로도 복잡해졌다. 섬세한 수술에는 다양한 직군의 사람들이 필요했다. 부속병원의 행정직은 그 자체로 하나의 직업이 되었다.
- 모든 문제들 중에서도 가장 큰 문제는 가난한 환자에 대한 것이었다.
- 1960년대까지 많은 부속병원들은 환자가 돈이 없다고 돌려보낸 적이 없음을 자랑스러워했다. 그러나 이들이 이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Robin Hood"가 되어 부자에게 더 많은 돈을 받아냈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 1960년대 중반, AMC는 점차 paying patient에 대한 진료를 확장해갔다. 그러나 이는 닥쳐올 불행의 징조였다. 질병은 통제했지만, 의료전달체계가 점차 병들고 있었다. Hospital care에 들어가는 높은 비용은 큰 문제였다.
- 하지만 Academic medicine을 하는 일부는 의료전달체계의 문제를 university medical center가 대중에게 무언가를 할 수 있는 또 다른 기회로 여기기도 했다.
- The Persistence of Academic Values
- 20세기 초반부터 의과대학과 부속병원의 공생적 관계가 존재했다.
- 교육과 연구를 통해서 부속병원은 의학에 있어서 독특한 창의적 기능을 하였다. 사업적 측면에서 그들의 미션은 의학 산업에 있어 연구 및 발전 부문을 담당하는 것이었다.
- 전쟁 이후 부속병원은 다양한 그룹으로 구성되어 있었는데, 1950년대와 1960년대에는 VA hospital들이 들어오면서 더욱 더 다양해진 측면이 있었다. 그러나 전체적으로는 이 당시 부속병원은 교육과 연구를 강력하게 지원하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 "지금과 같은 MGH가 되는 것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을 하나만 뽑는다면 무엇이겠습니까?" "Harvard Medical School입니다"
- 1950년대와 1960년대의 부속병원은 질적으로 끈질긴 노력을 하였다. 그들의 '성공'은 기관의 크기라든가, 환자 수라든가, 재정적인 측면으로 정의되는 것이 아니었다. Knowles는 Peter Bent Brigham에 대해서 규모가 작다고 무시했지만, 반대로 MGH가 너무 규모가 크기 때문에 환자를 보는 것에 드는 시간이 많아 교육과 연구를 할 수 없다는 주장도 합당한 것이었다.
- 물론, 이 당시 MGH가 가장 뛰어난 부속병원임을 부정할 수는 없다.
- 의과대학과 부속병원이 공통적으로 중요시하는 것들도 있었지만, 이 둘이 완전히 동일한 것은 아니었다. Harvard Medical School의 어떤 사람들은 Massachusetts General Problem 이라고 불렀다.
- 의과대학은 그들의 근원이 대학인 것으로부터 짐작할 수 있듯, 기본적으로 future-directed 였다.
- 반면 부속병원은 즉각적인 현재의 환자를 돌보는 책임을 가장 중요하게 여겼다.
- 이러한 맥락에서 AMC에서 clinical service의 확장은 중요한 딜레마를 낳았다. MS에서 교육과 연구와 진료의 균형을 잡는 것도 어려운 일이었는데, 이제는 더 어려운 문제가 되었다.
- AMC가 그들의 진료 역할을 확장시키면서 의과대학의 갈등이 심심찮게 터져 나왔고 private practice의 양을 제한하자는 의견도 나왔다.
- 그러나 의과대학과 부속병원의 학문적 헌신도 여전히 강력했다. "Staff들은 이곳이 교육기관이면서 연구의 보금자리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 해답은 private practice를 교육이나 연구의 하위로 두는 것밖에 없어 보였다.
- 이러한 결과로 private practice가 증가하는 가운데에서도 1950년대~1960년대의 AMC는 university principle을 지키게 되었다.
- Faculty practice가 증가하였지만 Washington Univ.는 임용을 임상 실적보다 연구 능력 기준으로 하였다.
- 이러한 현상을 보여주는 또 다른 지표는 community hospital의 affiliation 요청을 지속적으로 거절했다는 사실이다. WWII이후 뛰어난 학교에 대해서만 affiliation을 맺었다.
- AMC가 학문적 가치를 지키기 위해 노력했다는 사실에 대한 의심이 남아있다면, 아마도 그 지역의 private practitioner와 긴밀한 관계를 유지했다는 사실 때문일 것이다. "Town-gown" 관계는 대체로 잘 유지되고 있었다.
- 이러한 상황은 AMC의 교육과 연구에의 강력한 헌신 덕이라고 할 수 있다. 전쟁 이후, 20세기의 첫 50년 동안 medical faculty는 community와 private patient를 두고 과도하게 경쟁을 하는 대신 진료의 일정 수준을 유지하기 위하여 노력하였다.
- The Preservation of the Learning Environment
- Progressive medical education은 학습자가 스스로의 학습에 대한 책임을 가져야 했다. 그러나 학생이나 인턴은 아직은 어느 정도의 도움을 필요로 했기 때문에, 다양한 환자를 볼 수 있게 한다거나, 능숙한 교수자 집단을 양성하는 것 등이 필요했다.
- 전쟁 이후, 풍요로운 학습 환경이 위기에 놓였다. 가장 즉각적인 위협은 많은 수의 charity bed가 semiprivate bed로 전환된 것이다. Private patient보다 더 많은 책임을 가지고 볼 수 있었던 ward patient는, 병원비가 치솟는 것에 따른 병원측의 부담이 커지면서 점점 그 수가 줄었다.
- 병원 administrator는 paying patient가 늘어난 것을 즐거워 했는지 몰라도, Faculty에게 있어서 ward patient가 감소한다는 것은 학생과 house officer 교육이 심각하게 침해당하는 것을 의미했다.
- "가장 심각한 문제는 ward population의 감소이다"
- 학생과 HO가 private patient를 통해 배울 수 있는 것이 적다는 것은 누구나 동의하는 것이었다.
- "저소득 계층은 대화가 잘 통하지는 않지만 신체검진(P/E)에는 훨씬 적합하다. 그리고 중산층 이상에서는 그 반대이다"
- 그렇지만 private patient를 활용하는 것에는 많은 제약사항이 있었는데, private patient는 - self-paying이든 insured든 - 학생이나 House Officer의 교육에 쓰이는 것에 대한 압박이 거의 없었다.
- "not to intrude into the area of the private physicians"
- 항상 가까이 관리를 받고 혼자 무얼 하는 것이 허락되지 않는 학생들에게 있어서는 Private patient의 활용이 그다지 중요하지 않았다. PP든 WP든 학생에게는 별 다른 차이가 없었다. 그러나 인턴이나 레지던트에게 있어서는 이것이 무척 중요한 일이었다.
- 특히 surgical field의 레지던트들에게 큰 일이었다.
- 이러한 분위기에 따라서 많은 MS들은 trainee들이 충분한 수의 WP를 경험할 수 있도록 보장하겠다는 약속을 하였다.
- 한 가지 흔한 방법은 WP로 분류되는 기준을 바꾸는 것이었다. Blue Cross나 다른 semiprivate pt를 교육에 활용할 수 있게 함.
- 다른 방법은 교육 장소를 municipal hospital, veterans hospital까지 확대하는 것이다.
- 마지막으로 1960년대에 이르러서는 HO들로 하여금 PP에 대해서 더 많은 책임을 가지도록 했다.
- 책임감을 가지게 하는 것(assume responsibility)는 부속병원의 교육환경 중 하나에 불과한 것이었다. 이 뿐만 아니라 지도를 하고 감독을 하고 비판적 사고를 키워줄 수 있는 좋은 선생님이 필요했다. 그러나 이미 많은 faculty는 연구에 시간을 쓰기에도 바빴다.
- 이런 면에 대해서도 MS은 임상 교육 환경을 보존할 수 있었는데, instructor가 부족하지 않도록 clinical faculty의 숫자는 7배로 늘렸다. Instructor의 수가 부족한 부속병원은 존재하지 않았다.
- 전통적인 ward service가 교육적 측면에서 훌륭할 수 있었던 것은 '시간'의 존재였다. 질병의 변화를 시켜보고 진단을 내리고 치료에 대한 반응을 볼 수 있는 시간이 충분했다.
- 그러나 전반적인 추세는 재원일수를 줄이는 방향으로 가고 있었다.
- 이에 더하여 의학 기술이 복잡해지면서 병동에서의 생활도 정신없이 바빠졌다. 새로운 수술법은 이 전의 수술법보다 훨씬 복잡했다.
- Mechanical ventilator, extracorporeal circulatory pumps…
- 재원일수가 줄었지만 여전히 inpatient ward의 교육적 수준을 유지할 만큼의 시간은 되었다.
- 또한 Blue Cross를 비롯한 다른 insurer들 중 어느 곳도 의사가 환자에게 하는 진료나, 환자가 병원에 얼마나 오래 머무는지에 대해 제한을 걸지 않았다.
- 이와 같은 융통성이 있었지만, 학습 환경이 완벽한 것은 아니었다. 가장 큰 문제는 clinical material로서의 inpatient ward였는데, 더 이상 이들 환자군이 심각한 질병의 스펙트럼을 대변해주지 못했기 때문이다. 건강 증진에 대한 조언은 병원보다 office에서 잘 이뤄졌고 많은 수의 만성질환은 대개 ambulatory setting에서 잘 치료되고 있었다.
- 그렇지만 대부분의 의학교육자들은 inpatient ward를 학생과 HO 교육에 있어서 가장 적합한 곳이라고 생각했다. 학습자가 문제에 대해 자세히 공부하고 병태생리를 배우며 질병의 자연사를 익힐 수 있는 곳은 병동이라고 생각했다.
- 1965년에 이르러 미국의 부속병원들은 한 세대 이전과 비교할 때 전혀 다른 곳이 되어 있었다. 더 많은 환자가 있었고 환자의 turnover는 빨랐다. 그러나 많은 것이 바뀌는 와중에도 최고의 교육을 위한 의학교육자들의 의지만은 바뀌지 않았다.
'Books (Medical Education)' 카테고리의 다른 글
Time to Heal: Chapter 11. 잊혀진 의대생(The Forgotten Medical Student) (0) | 2017.06.08 |
---|---|
Time to Heal: Chapter 10. 졸업후 의학교육의 성숙(The Maturation of Graduate Medical Education) (0) | 2017.06.08 |
Time to Heal: Chapter 8. 떠오르는 연구(The Ascendancy of Research) (0) | 2017.06.08 |
Time to Heal: Chapter 7. 2차 세계대전과 의학교육 (0) | 2017.06.08 |
Time to Heal: Chapter 6. 대중과 Academic Medical Centers (0) | 2017.06.0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