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Chapter 8. The Ascendancy of Research
    • Modern era이후로 medical faculty들이 바라던 것이 하나 있다면 바로 연구에 대한 열망이었다.
      • WWII 이전의 미국 의학연구는 규모가 작았는데, 이는 돈이 부족했기 때문이지 관심이 적었기 때문은 아니다.
    • WWII동안의 연방정부와 AMC 관계는 미국 의학 연구의 규모를 되돌릴 없는 수준으로 바꾸어놓았다.
    • 미국 의학 연구의 성장은, 연방 정부의 지출을 통해서 범위의 일반 교육 고등 교육을 성장시킨 결과에 따른 부분이었다.
      • 일부 학교를 "research university" 지정하였다.
      • "multiversity" 라는 용어는 1963년의 "research university" 지칭하는 용어였다.
      • 당시 상황의 새로운 측면이라면 연방정부의 지원 유무가 아니라, 지원의 규모였다. 여기에는 대학을 국가적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주요한 기관으로 키우기 위한 목적이 있었다.
    • 가지 특징만은 20세기 초반과 동일했는데, 바로 'public good'(공공의 이익) 위해 일한다는 점이었다. AMC 사회적, 공공적 목적에 헌신하기 위한 기관으로 남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 The Age of Federal Beneficence
      • 1940년대에 미국 의학 연구의 규모에 엄청난 변화가 생긴다. WWII이후 시작된 이와 같은 성장은, 학교들이 Office of Scientific Research and Development로부터 계약 연구비를 받으면서 시작된다.
        • 1940년에서 1950 사이에 state school에서 연구비는 900% 증가했고 private school에서는 700% 증가했다.
      • 그럼에도 대중들은 많은 것을 원했다. WWII 시기의 질병과의 전쟁은 강한 인상을 남겼고, '만성질병과의 전쟁' 대한 기대감도 높아졌다.
        • 광고계 거물 Albert Lasker 부인 Mary Lasker 등은 국회에서 의학연구를 주요한 주제로 다루게 하는데 기여했다.
      • 결과는 NIH 발전이었다. NIH 1887 Staten Island 작은 보건연구소로 출발했다. 1937년에는 National Cancer Institute(NCI) independent unit으로 조직되었는데 1944 NCI NIH 통합되었다.
      • 처음에는 많은 academic leader들이 정부가 지속적으로 biomedical research 지원해야 한다는 의견에 반대했다. 가장 우려는 연구비를 지원하는 정부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하여 연구자들이 연구 주제를 그쪽으로 맞출 것이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지적인 자유(intellectual freedom) 유지되었다.
      • 연방정부의 지원 덕분에 1950년대와 1960년대는 미국 의학연구의 황금기가 되었다. 전례없던 규모의 팽창이 이뤄졌고, 연구가 전국가적인 차원의 일이 되었다는 것은 national specialty journal들이 individual institutional journal 앞서나가기 시작했다는 것으로부터도 있다.
      • NIH 생기고 이후 20년간의 연구비 지원은 엄청났다. 1947 $8.3M였던 것이 1966 $800M 되었다. 1972 전체 학생 0.5% 불과한 MS들이 전체 지출의 10% 사용하고 있었다.
      • WWII이후 의학연구에 지원을 것은 연방정부 뿐만이 아니었다. State legislature, Private donor, foundation등등도 지원을 계속 하고 있었다.
      • 연방정부 지원은 infrastructure 짓는 데도 들어왔다. 당시 건물이나 시설이 노후화되었고 공간은 부족했다. 이에 연방정부 NIH 자금을 지원했다.
      • MS faculty 연방정부 연구비로 많은 혜택을 보았다. 예를 들어 1950 NIH 규제는 연구비로 급여 주는 것을 허용했다. NIH 급여에 대해 점차 자율권을 보장했고 1950년에는 8%까지 인정하던 것을 1960년대에는 20%까지 인정했다.
      • 전쟁 이후 연구의 성장은 당시 여러 사회 정치적 환경에 크게 영향을 받지 않았다. 메카시즘이나 한국전쟁도 영향이 없었다.
      • 많은 문화적 힘이 연구에 영향을 미쳤지만, 개개인도 중요했다. 국가적 차원에서 James A Shannon 대단히 중요한 인물이었는데 1955년부터 1968년까지 NIH 확장을 주도한 사람이었다.
        • 외과의 Michael De Bakey, 신장전문의 Donald W Seldin, 내분비전문의 Robert Williams 등등.
      • 연구비 funding 증가는 개개 MS 대대적 변화를 불러왔다. 물리적인 시설 뿐만 아니라 faculty 졸업후 훈련 프로그램 등등도 크게 성장했다.
        • 1954년에는 80 MS 65개가 full-time faculty 고용하였다.
      • 물론, 시기에도 미국의 MS 여러 수준으로 갈렸다. 1963 MS 평균적으로 $5M 연구에 쓰고 있었으나, 범위는 $1.2M 에서 $16.1M까지 천차만별이었다.
        • 뛰어난 주립 학교들은 국가 기관으로서의 연구 책임을 다하면서 동시에 주를 위해서 어떻게 practitioner 키워낼 것인가를 고민하였다.
      • 이런 상황을 고려하더라도, 연방정부의 지출은 MS 상당히 균일하게 만든 사실이다. 1960년대에 가장 지원을 적게 받는 학교조차 상당한 수준의 scientific program 갖추고 있었다.
        • Harvard JH 겨룰 만한 수준의 학교는 없었지만, 가장 낮은 수준의 학교조차 연구를 촉진시키기 위해 노력하고 있었다.
      • 이처럼 확장되어가는 시기에 MS사이의 경쟁은 치열했는데, 특히 뛰어난 faculty 대한 학교간 경쟁 심했다. Job opportunity 빠르게 증가했고, 상승 장세(bull market) 같았다.
      • 출세지향적인 faculty들은 이러한 호황에 상당한 이득을 보았고, 중에서도 반유대주의의 종말과 더불어 유대인 medical scientist들이 제일이었다. 오히려 유대인들에게 많은 자리가 주어짐으로써 Mount Sinai 오려는 유대인이 점차 적어질 정도였다.
      • 자금, faculty, 자원 등에 대한 치열한 경쟁 속에서 어떤 학교도 Harvard 앞서나가지는 못했다. 전국의 full-time medical teacher 15% 어떤 형태로든 Harvard에서 training 받은 적이 있었다.
      • 연구에 대한 MS 지위는 (1)대학의 다른 학과와 미묘한 분위기 불러일으켰다. 한편으로는 이러한 MS 분위기가 'university spirit'으로 대표되어 대학과의 관계를 가깝게 해주었다.
      •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연구의 성장으로 인해 많은 MS들이 self-support 가능해짐으로써 (2)'독립성' 높아졌다. 대학의 다른 학과들의 입장에서는 비슷하게 공부하고 하는 일도 비슷한 (예컨대 생화학) 의대 교수들에 비해 적은 봉급을 받는 것이 매우 불쾌한 일이었다.
      • MS 성장하는 과정은 계획적이었던 것이 아니다. 대부분의 연구비는 개인적 흥미에 따라 연구하는 개별 연구자들에게 돌아갔고, MS 범기관적 목표가 있지 않았다.
        • "얼마만큼의 공간이 있던 결국은 채워질 것이다. 문제는 '뭘로' 채워질 것이냐는 것이다"
        • 대부분의 MS들은 돈을 주는 곳이라면 어디든 좋다고 했다.
      • 억제되지 않은 성장에 대해서 걱정하는 사람도 일부 있었지만, 대부분은 의학 연구의 성과 찬양했다.
        • Molecular biology 탄생, 즉각적 치료적 효용이 있는 연구들.
      • 시기 동안 기초 연구가 실질적인 도움이 되는 결과를 낸다는 실험 의학에 대한 확신이 정당성을 입증한 것과 같았다. Polio vaccine등등.
        • Jonas Salk Albert Sabin polio vaccine 이름이 붙었지만, vaccine John F Enders, Frederick Robbins, Thomas H Weller 개발한 조직 배양 기술에 의해 가능했던 것이었고, 이는 기초 연구의 공이었으며 노벨상을 받은 것도 이들 셋이었다.
      • 이런 성과에도 불구하고 만성 퇴행성 질환은 여전히 강력한 적군이었다. 1960년에 평균 기대수명은 70세를 넘었고, 1900 이후로 23세가 늘어난 것이지만, 45 이상 살던 사람들로 한정시키면 고작 4.5년의 수명이 늘어난 뿐이었다.
        • 암이나 심장 질환, 뇌졸중 등은 곧바로 치료되는 것이 아니었다.
      • 몇몇 소수의 앞서나가는 연구자들은 비현실적인 기대에 대한 경고를 하였다.
        • "9명이 달씩 임신한다고 아이가 나오는 것이 아니다"
      • 1960년대 대부분의 MS official들에게 연방 지원의 증가는 뜻밖에 하늘이 선물이었다. 연방 지원으로 인해서 의학 연구 성장과 MS 발전이 이뤄질 있었다.
      • 그렇지만 세대가 지난 MS ( multiversities) 전보다 그들이 취약해졌음을 깨닫게 되었다. 그들은 부유해졌고, 어떤 사람들은 이러한 지원이 지속될 것이라 보았다. 그러나 명의 지원자에게 의존하여 지원을 받는다는 것은 자율권 잃는다는 뜻과 같았다.

 

  • Changing Intellectual Directions
    • WWII이후 의학연구의 규모가 커진 만큼 intellectual direction 바꾸었다. 원자가 1940 박살났듯, 세포도 마찬가지였다. 전쟁 이후 의학연구는 점차 환원론적으로 되어왔고, subcellular, molecular level 내려갔다. 의학연구는 점차 생물학 연구의 일반적 특성이나 이론적 특성과 합해져 갔는데, 이에 따라 'Biomedical'이라는 새로운 단어가 등장했다.
    • Biomedical 연구의 변화의 밑바닥에는 생물학 전체를 변화시킨 'molecular revolution' 있었다. 모든 생물학적 현상은 기초적인 화학적, 물리학적 법칙에 의해 설명될 있다고 생각했다.
    • MS에서 이러한 변화는 scientific department에서 가장 두드러졌고, 해부학의 초점도 gross anatomy microscopic 조직학에서 subcellular element 형태와 기능으로 옮겨갔다.
      • Molecular genetics, Microbiology..
      • 전쟁 이전에, 이들 department 통틀어 'preclinical'이라고 불렸지만, 1950년대에 이르러서는 clinical medicine 구분하여 'basic science' department 불렸다.
    • NIH fund 지원을 받는 basic science department 점점 science dept 비슷해져갔다. 많은 수가 대학원과정을 확장시켰고, basic science faculty PhD 많아졌다.
    • Clinical dept에도 비슷한 과학적 성장이 있었다. 1950년대에 'observational approach' 유용성이 다했고, analytical / physiological approach 대세를 이루기 시작했다.
      • 임상 연구의 가장 핵심적 저널인 JCI(J of Clinical Investigation) 점차 응용생화학(applied biochemistry) 저널과 비슷해져갔다.
    • 전쟁 이후의 Clinical investigator들은 전에 비해서 bench research training 받았다. 일부는 medical training동안 PhD 같이 받았다.
    • 지식의 성장과 기술의 발전과 함께 clinical science 세분화되었고 subspecialty 늘어났다.
    • 1950년대와 1960년대의 clinical scientist scientifically 정교하였지만, observational era 공통점이 있었다. 환자에게 즉각적으로 관련된 문제에 집중하는 것과 임상가과 교수 모두로서 뛰어나고자 하는 욕심이다.
      • Daughaday 내분비학 연구에 뛰어났지만, 항상 임상 진료를 놓지 않았다.
    • Biomedical 연구의 성공에 문제 없지는 않았다. 기초와 임상 연구가 성숙해감에 따라 이상 기존의 것과 맞지 않게 것이 있는데, 바로 연구과학자가 physician으로서 교육받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키워질 것이라는 생각이었다.
    • 또한 기초 과학을 임상 교육과 연관시키려는 노력은 어느 때보다도 어려워졌다.
    • 이러한 문제에도 불구하고 당시는 biomedical research 이론적 결과와 임상의 결과가 가장 조화를 이룬 시기였. 때까지만 해도 연구와 교육과 진료의 조화는 온전했다. 그러나 각각의 힘이 모두 강해지고 있는 상황에서 균형은 아슬아슬한 것이었다.

 

  • The Decline of Academic Gentility
    • 연방 기금의 증가, 성공적인 Biomedical 연구들과, 대중의 칭찬 WWII이후에 뒤따른 MS '황금기' 보여주는 것들이었다. 그렇지만 시기에 academic life 질은 조금씩 바뀌고 있었는데, 이전 시대의 가족과 같은 분위기, 친밀함, 조직에 대한 충성도는 감소하고 있었다.
    • Faculty에게 있어 전쟁 이후 기간은 이전의 굴레를 벗어던질 있는 (1)기회였는데, 과와 학교에서 recruit 적극적으로 했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과들은 피라미드 구조를 이루고 있었지만 능력있는 faculty 숫자 늘어나면서 senior level faculty 숫자를 늘려나갔다. 이런 호황장(bull market)에서 수입이 증가했으며 그럼에 따라 faculty 퇴직 계획이나 보험 혜택, 대학의 자녀 학자금 지원등도 받을 있게 되었다.
    • Faculty opportunity 학교에 따라, 분야에 따라 달랐는데, 일반적으로 임명 승진은 경쟁이 (마취과 )에서 쉬웠고, 낮은 급의 학교에서 쉬웠다.
    • 비록 faculty 있는 기회의 폭은 늘어났지만, 여기에도 (2)문제 있었다. "soft" money (꾸준히 유지된다는 보장이 없는) 부터 지원을 받음에 따라서 medical scientist들은 스스로의 벌이를 해야 했으며, 마치 쳇바퀴를 구르고 있는 같은 기분을 느꼈다. 연구비 따야 하는 압박이 심했다.
    • 이러한 faculty 걱정에 더하여, application process 무척이나 복잡해져서 시간이 많이 들어갔다.
      • "보고서 준비하고 데이터 챙기느라 힘을 써서 다른 일을 수가 없다"
    • Faculty academic life 점점 정신없이 바쁘게 돌아갔다. 연구비를 따고 연구비에 대한 보고서를 내는 뿐만 아니라, 연구비를 따는 조차 점점 경쟁이 되어갔다.
    • 연구가 성장함에 따라서 조직이나 기관에 대한 충성도 떨어져만 갔다.
      • "점차 많은 faculty 외부 연구비에 의존하고 있다"
      • 대부분의 연구비는 '휴대성이 좋아서(portable)' faculty 다른 학교로 옮겨가기가 쉬웠다. "Cosmopolitan professor" (집을 떠나 지내는 시간이 faculty)라는 말도 생겼다.
    • Multiversity 시대에 dept간의 경쟁 더욱 심해졌는데, dept division들은 많은 공간, 많은 , 많은 기회를 따내기 위해서 경쟁했다. 기초의학 분야에서는 해부학이 지고 생화학이 떠오르고 있었다. 어떤 학과가 강력한지는 학교마다 달랐다.
    • 대부분의 MS에서 faculty size 빠르게 증가하고, 연구비를 쫓아다니고, biomedical research 경쟁이 심해지면서 faculty사이의 가까운 관계는 점차 소멸되어갔다.
      • 공동체의식이나 공동의 목표 따위는 거의 없었다.
    • 이런 MS에서의 'community' 사라짐에 따라 가장 피해를 것은 voluntary(part-time) clinical faculty였다. 한때는 가장 중요한 구성원 하나였던 이들이, 이제는 학교가 점차 자신들에게 신경을 쓰지 않는다고 느끼고 있었다.
    • 연구가 성장하면서 MS 학장들도 점차 자신들의 위치가 부담스러워졌다. WWII이전의 학장도 쉽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대부분 MS에서 part-time job이었다. 그러나 운영비가 커지고 새로운 조직적 행정적 일들이 많아졌다.
    • 추가적인 행정 지원을 받음에도 학장들의 의욕은 떨어졌고, 일부는 연구, 교육, 진료와 학장직을 동시에 수행하지 못하겠다고 했다.
      • "damage to my nervous and vascular system"
    • 학장직이 이렇게 부담스럽게 것은 직책 자체의 권위가 많이 떨어진 것에도 이유가 있었다. 학과들이 금전적으로 self-sufficient 해지면서 힘의 분배가 주임교수(department chairman) 중심으로 '원심성' 갖게 되었다.
    • 연구가 성장하면서 주임교수 역할도 바뀌었는데, 많은 자율권과 권력을 쥐었지만 행정 임무도 엄청나게 증가했다. 그들은 자신의 연구를 수행하기보다 다른 사람을 돕는 facilitator로서의 역할을 해야 했다.
    • 대부분 MS 많이 변했지만 가지만은 그대로였다. 바로 대부분의 faculty 공유하고 있던 "나는 university professor"라는 인식이다.
      • 다른 기관은 돈을 이용해서 faculty 유혹할 있었지만, academic medicine 하기로 사람들은 대개 돈을 보고 하는 것은 아니었다. 연봉은 오히려 가장 높은 학교에서 가장 낮은 수준이었다.
    • 오히려 faculty들에게 가장 중요했던 것은 연구 공간과 시설을 마련해주는 것이었다.
    • Faculty 이런 성향은 별개로, MS들의 commercialism 대한 경시는 다른 문제였다. MS industry 관계는 더욱 가까워졌지만, investigator 그들이 얻은 특허로 돈을 벌어서는 안된다라는 정책을 유지하고 있었다.
    • 간략히 정리하면, WWII 이후 MS 점차 그들 스스로를 공공의 이익을 위해서 일하는 공익 재단(public trust)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