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Chapter 6. Academic Medical Centers and the Public
    • 의과대학과 부속병원은 서로 분리된 개체였지만, 둘의 운영은 거의 하나처럼 이루어졌고, 각각의 성공은 둘이 얼마나 협조를 이루고 있느냐에 달려 있었다. WWII이후 이것은 "academic medical centers"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된다.
    • 완전히 동일한 center 없었지만, 일반적으로 의과대학(medical school) 부속병원과(university-owned or controlled hospital), 협력병원(affiliated specialty hospitals or institute)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이들은 무척 가까웠기에 대중들은 종종 의과대학과 부속병원의 구분을 하지 못했고, academic medical center라는 명칭이 medical school이나 teaching hospital보다 자주 사용되게 되었다.
    • AMC 구성은, 대학이 그러했듯, 그곳에서 배우고 공부한 사람들 뿐만 아니라 다른 여러 사람들이 있었다. 거대한 사회의 일부로서 교육이나 연구 외에 항상 넓은 측면의 역할이 기대되었다. Medical faculty 상당한 양의 charity care 하였고, AMC medical care 질을 높이거나 일반 대중(people) 건강을 증진하는 역할도 하였다.
      • 요약하자면, AMC parent university처럼 공리주의적 의무(duty of utility) 받아들이고 사회에 대한 봉사(service to the society) 하게 것이다.
    • Town and Gown
      • WWI이후, medical faculty 진료중인 의사의 전문가적 성장(professional growth of physicians in practice) 높은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의학교육의 정신(ethos) self-learning 강조되었다.
      • Practitioner 대한 교육 필요성에 대한 논의는 학부 졸업생, 그리고 GME 문제가 거셌기 때문이다.
        • 1920 전에는 부적절한 훈련을 받은 의사들에 대한 remedy 주된 문제였다.
        • 1920 이후에는 continuing medical education graduate medical education 종종 혼란을 일으켰다.
        • 1930년대에는 교육받은 physician들에게 최신의 지식을 가르쳐 주는 것이 중요해졌다.
      • Continuing medical education(CME) 학생에 대한 교육이나 house officer 대한 교육만큼 우선순위에 있지 않았는데, 왜냐하면 많은 (state) county medical society에서 그러한 프로그램을 지원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 대부분의 CME 정해진 형식이 없었다.
      • 바쁜 practitioner들이 medical center 오기가 힘든 사정을 고려해서, 일부 학교들은 community hospital 등으로 교육을 나가기도 하였다.
      • Medical faculty 어려운 케이스의 환자를 도와줌으로써 practitioner 지원하기도 하였다. (전화 또는 편지로)
      • 환자의 Referral AMC 역할에 있어서 크진 않았지만 중요한 부분이었다.
        • 교수들은 가장 어려운 케이스들을 보기 위하여 항상 mentally sharp하게 유지될 있었고, community practitioner 혼자 감당하기 어려운 환자를 의뢰함으로써 도움을 받았다.
      • 이러한 관계는 community practitioner(town) full-time faculty(gown) 서로간에 이익이었다.
        • Private practitioner Medical faculty 연구를 직접 보여질 있는 것으로 만들어줌으로써 대중들이 꾸준히 의학교육과 연구에 대한 지원을 하는 동기를 유발해주었다.
      • 그럼에도 practitioner들은 혹여나 AMC 그들의 환자를 뺏어갈 것을 두려워했기 때문에 town gown 관계는 항상 부드러웠던 만은 아니다.
      • 하지만 WWII이전의 AMC practitioner들에게 전혀 위협이 되지 않았다. 부속병원의 수도 작았고 full time faculty 수도 많지 않았다.
      • 의과대학과 부속병원의 기록을 살펴보면 종종 그렇지 않은 경우도 발견되진 하지만 이런 것들은 예외적인 경우였고, private practitioner 업신여기는 faculty 오히려 자기 분야 지식이 일천한 경우가 많았다.
        • 많은 환자를 보는 것은 AMC 교육적 자선적(charitable) mission 과는 거리가 멀었다.
      • 따라서 town gown 관계는 일반적으로 매우 좋았고, 이러한 끈끈한 관계의 힘은 CME medical consultation 제공함으로써, 그리고 환자에 대한 경쟁을 피함으로써 유지될 있었다.
      • 이러한 협동으로 인해 의료전달체계는 어떤 형식적인 coordination이나 planning없이도 매우 효율적으로 돌아갔다. AMC referral source 역할을 함으로써 의료전달체계의 매우 일부분을 담당하면서도 전체적으로 원활하게 작동할 있는 엔진이 되었다.
    • The Care of the Poor
      • WWI이후 부속병원이 의과대학과 협업하기 시작하면서, 그들의 오래된 자선 임무(charitable mission) 앞으로 등장하였다. AMC medical public 뿐만 아니라 general public까지 포함한 모두를 위한 것이었다.
      • Charity care 양은 AMC 따라 달랐다.
      • 국가적 medical care system 측면에서 AMC 담당하는 charity care 상당한 부분이었다. 금전적으로 환산해도 상당한 양이었으며, 점차 AMC들은 국내의 philanthropic institution 가장 부분이 되었다.
      • 그러나 이렇게 많은 양의 charity care 제공하는 것은 쉽지 않았다. 부속병원은 대개 local government로부터 reimburse 받았으나, 양은 원가에도 미치지 못했다. AMC service-maximizer이지, profit-maximizer 아니었다.
      • 병원마다 어떤 병동 환자(ward patient, 무료 진료 환자) 받을 것인가에 대한 세세한 기준은 달랐지만 원칙은 같았다. 부속병원들은 가능한 지역 주민들에게 무료 진료를 제공하였다. 이를 위해 환자에게 수입이 얼마인지, 수입의 출처가 어디인지를 확인하였다. 또한 질병의 종류와 심각성도 반영하였다.
      • Ward patient 괜찮은 수준의 medical care 받았는데, 시기의 AMC 의사 입장의 'quality' 추구하였으며, 그것은 소비자 입장에서의 quality와는 달랐다.
      • 모든 환자들은 약간의 불편함 수치(indignity) 감수해야 했는데, 대부분은 치료되는데 있어서 크게 관련이 있는 것들은 아니었다. 그러나 문제는 Ward patient 감당해야 하는 indignity private patient 그것보다 훨씬 컸다는 것이다.
        • 예컨대 ward patient 시끄럽고 복잡한 곳에서 대기해야 한다던가, 프라이버시 보장이 안되거나, 소란스럽거나, 냄새가 나는 곳에 둔다거나, 가끔은 무례하게 대하는 직원들도 있었다.
        • 심지어 Charity private patient 공간에 섞어 놓는 것조차 부적절하다고 판단했다.
      • 노골적인 인종차별도 드물지 않았는데, 특히 남쪽, 국경 지방에서 African-American이나 흑인에 대한 차별이 심했다.
      • Charity care 제공은 많은 교육 리더에게 대학에서 medical school 역할이 무엇인지 다시 한번 생각해 있는 기회가 되었다. 가지(교육-연구-공익사업(Utility)) 역할 항상 가장 논쟁이 것은 공익사업이었다.
      • Abraham Flexner 문제에 대해서 가장 많이 고민한 사람 하나였다. Flexner 공익사업의 딜레마에 대해서 "대학은, 적어도 조금은, 사람들의 삶이나 생각의 변화에 영향을 주기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다" 라고 하였으며 medical professor 환자를 보는 것은 그러한 일이 교육과 연구에 도움이 되는 범위 내에서 이뤄져야 하며, 환자를 보기 위해 환자를 보는 professor들은 대학의 책임을 다하는 것이 아니라고 하였다.
      • 이러한 맥락에서 charity care 제공은 AMC 복잡한 문제를 던져주었다. 교육과 연구에 도움이 되는 만큼만 환자를 본다...라는 이러한 말은 말은 쉬워도 실행하기는 어려웠다. Charity care 대한 요구는 상당했고, private patient 수도 지속적으로 증가하고 있엇다.
      • 그렇지만 대부분의 AMC 대학의 역할을 수행하고 있었다. 하나는 경제적인 것이었고(의과대학은 이상 진료에서 얻는 수입에 의존하지 않았다), 다른 하나는 학문적 이상을 추구하는 가치였고, 마지막으로 service 비젼은 전체 인구가 아니라 개개인에 맞춰져 있었다.
    • Medical Education and the Nation's Health
      • 미국인들이 WWI이전에 가졌던 불안감 적어도 하나만은 WWII 발발 당시에는 없었다. 바로 '의사의 ' 문제이다. 미국 의과대학들은 이미 세계 최고 수준이었다.
      • Medical science 지속적으로 진보를 이루고 있었다. 감염병의 원인과 관리법을 알게 것이다.
      • 미국 의사들은 새로운 의학지식을 환자 관리에 적용시키기 시작했고, 의사들은 공공의 이익을 위하여 일하는 것으로 인식되었다.
      • Medical care 국가의 재정적 건강(fiscal health) 위해서도 중요하다는 공감대가 생겼고, 질병의 경제적 영향에 대한 연구가 많이 이뤄졌다.
      • 이러한 국가의 medical care 중심에는 AMC 있었다. "ultimately determines the standards of medical care"
      • Medical care 질은 그것을 수행하는 사람의 능력을 넘을 없다는 것도 사실로 받아들여졌다. medical practice 있어서 의학교육의 질의 중요성이 강조된 것이다. 그러나 당시 미국 문화의 technocratic ideal 측면으로서, medical practice 국가의 건강을 지키는 핵심으로 간주되었다.
        • 질병의 발생률이 높았지만, 이것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많은 의사와 많은 진료가 필요하다고 생각했지 영양이나, 주거시설이나, 위생 등의 수준을 높여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앗다.
      • 이러한 생각의 전형적인 모습이 Final Report of the Commission on Medical Education(1932) 나오는데,
        "The greatest health problem of the country is that of making modern medical services available to the entire population"
        이라고 하였다. 미국은 많은 medicine 필요로 했고, 거기에 드는 재정적 부담은 당연히 부담해야 비용이라 여겼다.
      • 건강 뿐만 아니라 경제적 생산성에도 필수적인 것으로 여겨짐에 따라 의학교육에 대한 기대는 높아져갔다(heady).
        • 그러나 이러한 기대는 실현 가능성이 있는 것일까? 정말로 Medical care 질이 높아지면 국가의 경제적 경쟁력이 높아질까? 당시에는 이러한 질문을 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고, 대다수가 많은 medicine 원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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