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개원의사들에서 의학전문직업성의 의미
The concept of medical professionalism as for self-employed physicians in Korea
박 호 진* | 서울아동병원
Ho Jin Park, MD*
Seoul Children's Hospital, Cheongju, Korea
서 론
“의사는 단순히 의술을 제공하는 기술자가 아니다.” 이 의미는 간단하지만 의사들의 직업적 정체성에 관한 추상적 개념을 담고 있다. 서구에선 이 개념을 구체화하여 하나의 직업으로 제도화한 결과 지금의 의사직업을 완성했다. 이 과정에서 의사직업을 타 직업과 구별되는 전문직으로 완성하려는 의사들의 집단적 노력이 있었다. 이러한 관점에서 ‘의학전문직업성’은 의사들이 추구하는 목표인 동시에 일반 공중을 설득하는 하나의 수단일 것이다.
역사적으로 의사들은 대부분 개원을 통해 제각기 의술을 펼쳤다. 이런 서구의 의사들은 의사직업의 전문직업화 과정을 주도하면서 전국협회를 결성하고 의사 양성교육을 대학에 의존했다. 이것은 의학전문직업성의 구현에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즉 의사는 고등교육을 받은 엘리트이고, 협회를 통해 동질성을 갖는 직업인임을 대외적으로 천명한 것이다. 한국 의사들도 일찍이 1908년 자발적 단체인 ‘의사 연구회’를 결성했다. 벌써 백 년이 지났으나 한국 의사들의 전문직업성은 선진국에 비해 충분하지 않다.
지난 세기 후반 과학기술의 발달로 개원비용이 급상승했다. 그 결과 의사의 단독개원이 감소하고 봉직의사가 증가하는 추세다. 더구나 한국은 같은 시기에 산업화와 민주화의 급격한 사회변동을 겪었다. 최근 필자가 만난 개원의사들은 대부분 자신의 직업을 소중하게 여긴다. 하지만 직업에 대한 만족도는 그리 높지 않았고, 더구나 의사로서 자신의 정체성에 의문을 갖고 있었다. 이런 시점에서 한국의 개원의사들이 자신의 직업 자체를 이해하는 게 필요하다. 그럼으로써 그들이 자신의 직업을 발전시키고 안정된 사회제도로 만들기 위한 노력을 기울일 수 있을 것이다.
특히 한국에서 의사직업에 영향을 주는 최대 변수는 국가다. 이 글에선 국가와 의사직업의 상호작용을 중심으로 의학전문직업성의 요소인 지식, 자율성, 전국협회, 윤리 등을 설명한다. 2장에서 의학지식과 자율성의 특성을 간단히 소개한다. 제3장에서는 국가의 성격을 설명하고 한국의 현실을 비판적으로 검토한다. 그리고 국가가 의학지식을 통제하여 궁극적으로 전문직업성의 발달을 저해하는 근본 문제점을 제기한다. 제4장에선 의사의 윤리문제를 한국의 현실에 비추어 설명한다.
의학지식과 직업자율성
의사직업을 비롯한 모든 전문직에서 직업적 자율성은 가장 중요한 핵심 요소다. 다른 직업과 달리 의사들이 외부의 간섭 없이 자신의 업무를 스스로 통제한다는 것은 상당한 특권이다. 이런 전문직 종사자의 노동은 다른 분야의 노동자들과 너무 달라 자기통제가 필수적이다. 그렇지 않다면 전문직업성은 존재할 수 없다[1]. 무엇보다 지식의 특성이 다르기 때문이다. 즉 말과 글로 표현가능하다면 전산화도 가능하고 누구나 다 배울 수 있다. 하지만 전문직의 지식은 추상적이고 난해하여 형식화하기 어렵다. Larson [2]은 전문직의 지식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반드시 표준화를 허용할 만큼 충분히 형식화, 성문화되어야 하고… 즉 생산자(의사들)의 표준화를 뜻한다. …하지만 명확히 성문화되어 배제의 원리가 작용하지 않을 정도로 허용되어서는 안 된다.누구나 다 전문가라고 주장할 수 있다면 전문지식은 존재하지 않는다.”
전문직 지식의 특성은 형식적이고 암묵적이다. 전자는 대학교육을 통해 배울 수 있고 후자는 그렇지 않다. 진찰법이나 수술법을 완전히 암기해도 현장에서 체득하지 않으면 탁상공론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전공의들은 의사 신분인데도 수년간 임상수련을 받는다. 이는 도제식 장인교육과 유사하다. 엔지니어와 비교하면, 이들도 대학에서 공학의 형식적 지식을 배운다. 하지만 대학과 연계하지 않고 각기 다른 현장에서 심지어 다른 전공자의 감독아래 숙련을 익힌다. 그리고 엔지니어는 일반적 정체성이 있지만 전문화가 다양하여 이미지가 애매모호하다. 의료, 법률, 교육과 같은 명확한 동질성이 매우 부족하다[3].
전문직 지식에는 불확정성(indeterminacy)이 있어 전문지식을 행사하는 과정에 많은 판단이 요구된다[3]. 더 많은 판단이 필요할수록 그 업무는 단순반복적이 되거나 타인의 검열을 받을 가능성이 그만큼 줄어든다는 것이다. 간호사나 사회복지사의 업무도 상당한 정도의 판단이 요구되지만 판단의 기초가 되는 지식이 진정한 의미에서 불확정성의 영역에 속할 정도는 아니다. 또한 의사들의 업무에는 불확실성(uncertainty)도 있다[4]. 즉 의학지식의 광대함에 비추어 불완전한 통달, 의학지식의 현실적 한계인 모호함, 의사 개인적 역량의 한계와 의료 자체의 가변적 속성 등이다. 다시 말해 불확실성은 현대 의학과 의사의 한계에 기인한다. 역설적으로 의사들은 불확실성의 전문가인 셈이다.
의학과 의료의 특성은 직업의 자율성으로 연결된다. 그러나 그 수준은 국가를 움직이는 정치권력의 영향을 받으므로 시공간에 따라 차이가 있다. 자율성이 만개하면, 경쟁직업으로부터 자유로울 뿐 아니라 그 직업들을 규제한다. 나아가 경쟁직업들을 합법적으로 평가하고 지시를 내린다. 외부의 평가와 규제가 불가하고 스스로 자기통제가 이루어지면, 독립적인 교육이 가능해진다. 궁극적으로 개별 의사의 진료는 의뢰인의 필요를 판단하는 등 상당한 재량권을 갖게 된다[5].
의사직업은 외부의 평가에 반하여 스스로 업무를 결정할 수 있기 때문에 자율성은 하나의 권력이 될 수 있다. 전문직이 갖는 이러한 특성이 부작용을 야기하기도 한다. 예를 들면 의사들은 의학지식의 객관성과 신뢰성을 과신하며, 동료의사들의 덕성을 높게 평가한다. 지식과 덕성을 혼자만 가진 것처럼 착각하고 다른 직업의 기술과 도덕적 역량을 의심한다. 심지어 의뢰인들에게 모욕을 주거나 그들을 경멸하기도 한다. 나아가 직업자율성의 전제인 자기통제를 소홀히 하는 현상이 일어나기도 한다[5].
그러나 자연인이든 법인이든 현대 사회에서 무한대의 자유를 누리는 경우는 없다. 방종에 흐르면 국가는 제재를 가하고 자율권을 회수할 수 있다. 아니면 경쟁직업 간 노동분업의 경계선을 변경할 수 있다[1]. 의사직업을 예로 들면 국가는 약사의 약료, 장기처방약의 리필제도, 간호사나 임상기사의 단독개원 등을 고려할 수 있다. 길드와 달리, 근대이후 발달한 전문직의 자율성과 면허행위의 범위는 절대적이 아니라 국가의 허가를 받아야 한다. 근대 전문직과 중세의 길드는 피상적으로만 유사하다. 전문직 단체의 자율성과 지식에 대한 독점권은 국가와의 협상에 좌우되기 때문이다[3].
한국 개원의사와 전문직업성
1. 개원의사와 국가통제
개원의사와 봉직의사는 의사면허의 법적 지위는 같다. 그러나 의사들이 각기 처한 환경에 실제적 차이가 있다. 개원의사는 자영업과 관련하여 정부의 통제를 직접 받는다. 이들이 개원에 따른 신분보장과 사익을 위해 기댈 곳은 대한의사협회(의협)밖에 없다. 봉직의사는 정부와 직접 부딪히지 않는다. 이들의 일차적 상대는 병원장을 비롯한 경영진이다. 그들은 신분과 처우에 대해 경영진과 대화한다. 봉직의사는 개원의사에 비해 갑옷을 하나 더, 교직의사는 대학과 병원이라는 두 개를 더 갖고 있는 셈이다.
의사직업 외부에 억압적인 공적 권위가 존재한다면 개별의사들은 기능인(functionaries)으로 전락한다[6]. 유감스럽게도 한국의 지난날은 조선왕조, 강점기, 한국전쟁, 그리고 개발독재의 연속이었다. 국가는 항상 중앙집중체제로 강력한 통치권을 행사했다. 의사직업은 거의 국가에 종속했고 그 결과 지금까지 불충분한 전문직업성을 유지했다. 구체적으로, ‘기능적 특정성(functional specificity)’에 관련한 최소의 영역만을 인정받았다. 이것만 갖고 제대로 된 전문직이라고 할 수 없다. 바로 이 부분에서 개원의사들이 현실에 느끼는 불만의 원인을 찾을 수 있다. 즉 그들은 스스로 선(善)을 규정하여 실천에 옮길 수 없으며, 나아가 단순 기술자와 전문직 사이에서 고통 받고 있을 것이다.
국가의 정책지향을 피동적 혹은 능동적인 것으로, 정책수행 방식은 위계적 혹은 대등적인 것으로 구분할 수 있다. 이를 종합하면 4가지 유형의 분류가 가능하다(Table 1).
- 영국과 미국은 대등적이고 피동적이다. 국가는 전문직업성을 위해 민간협회의 권력을 보호한다.
- 그러나 위계적 국가에선 국가의 개입이 많아진다. 독일, 소비에트와 나치독일 등이 이에 속한다.
- 독일은 피동적이어서 국가는 전문직의 대리인 역할을 한다.
- 반면 소비에트와 나치독일은 능동적이다. 즉 국가는 전문직제도를 직접 만들고 역할을 부여한다.
- 영미와 독일의 공통점은 민간협회에 대해 피동적인 입장을 취한다는 점이다[1].
사회 안에서 각종 이익을 대변하는 방법에 대한 이론체계인 조합주의(corporatism), 즉 국가조합주의와 사회조합주의로 나누어 국가와 특정 집단의 관계를 파악하는 건 상당히 유용하다[5,7,8]. 현대사회에서 사익을 배제하고 개인이나 집단을 말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이것의 실제 내용은 Table 1의 4분류와 같다.
- 국가조합주의는 능동적/위계적인 소비에트, 나치독일과 멕시코다. 한국도 많은 경우 권위주의적 정책을 능동적으로 시행했다[9].
- 사회조합주의는 피동적/위계적인 독일과 스웨덴이 대표적이다(Tables 2,3).
조합주의는 현재 한국 사회를 조직하고 움직이는 기본 모델이다. 단체의 대표성은 하나만 인정한다. 일례로, 단위사업장 내에 복수노조 설립을 허용하지만 노사협상의 대표성은 단일화한다. 약 사 년 전 어느 의협회장(회장)은 취임 직후 “보건복지부를 대화의 상대로 삼지 않겠다”고 했었다. 그러나 협회를 운영하려면 조합주의에 대한 이해가 선행되어야 한다.
조합주의는 이익을 대표하는 체계로 정의될 수 있다. 이 체계의 구성단위들이 단일적, 강제적, 비경쟁적이며, 위계적으로 정돈되고 기능적으로 분화된 제한된 수의 범주 속으로 편입된다. 그러한 범주들이 국가에 의해 승인 또는 허가[내지 창설]되며 자기들의 지도자선택 및 [국가에 대한] 요구와 지지의 천명에 대한 [국가의] 일정한 통제를 준수하는 데 대한 대가로 각자의 범주 내에서 분별력 있는 독점적 대표권을 부여받는 이익대변체계다[10].
위에서 보듯이, 의협의 지위는 하나의 조합(corporation)으로 모든 회원이 강제로 가입하며 비경쟁적으로 유일한 단체다. 하지만 회장의 권위에는 국가의 묵시적 양해가 필요하다. 그렇지 않으면 정부와의 이익협상이 원활하지 않게 된다. 회원들이 선출했다고 회장이 대외적 권위를 갖는 게 아니다. 회장이 대의원들로부터 불신임당한 전례를 보아도 그의 권위는 대내적으로도 절대적이지 않다. 반면 대한의학회(의학회)에는 모든 자발적 학술단체가 강제로 가입하지는 않는다. 그렇지만 의학회가 의협의 조직 안에서 행사하는 조합주의적 운영은 탁월하다. 의협에 적절한 지지를 천명하고 의사집단 내에서 자신들의 이익을 확보한다. 또한 회원학회의 자율성을 인정하면서도 상당한 통제력을 발휘한다.
의사집단을 복수 단체로 만들어 분할통치하는 건 정부의 유력한 수단이 될 수 있다. 1960년경 국가는 전문의 제도를 도입했다. 만약 그 당시 전문의들을 병원에만 근무하도록 아예 제한했다면, 전문의와 일반의가 이익갈등을 일으켰을 것이다. 그랬다면 정부의 분할지배가 용이했을 것이라는 주장도 있다[12]. 실제로 노무현 전 대통령은 재임시절 건강정책은 의학회가, 이익협상은 의협이 맡는게 좋겠다고 공언했다. 그 후 의학회는 사단법인으로 독립했다. 그러나 의학회는 2011년 4월 24일 제 63차 대의원총회에 정관을 보고하고 승인받았다. 의협의 대표성을 인정했다는 점에서 전체 의사들은 직업이 분절화하는 위험한 고비를 넘겼다. 이에 앞서 전문과목별 개원의협의회가 이원화하여 활동하다가 몇 년전 의협의 산하단체로 통합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미국에도 의사단체가 여럿이나 설립목적에 따라 그 역할은 제한적이다. 즉 의사직업을 대표하고 국가를 상대하는 것은 조합주의와 마찬가지로 미국의사협회 하나뿐이다(Table 3). 지난날 의협이 국가와 갈등을 빚었을 때 정부는 분할통치를 신중히 고려했다. 실제로 국가는 2004년 의료법을 개정하여 대한병원협회에 대표성을 갖는 지위를 부여했다. 이 결과가 치명적이진 않았더라도 의사들은 그 의미를 심각하게 받아들여야 한다. 국가조합주의 하에서는 국가가 정책을 능동적으로 정하기 때문에 분할은 아니더라도 도전할 잠재력이 있는 세력은 억압을 받을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의사집단을 분할통치하는 대표적 예는 멕시코이다(Tables 2,3). 법에 의해 모든 의사들은 하나 이상의 협회에 가입해야 한다. 수도와 각 주에서는 의사들의 공식 단체를 다섯 개까지 둘 수 있다. 각 협회는 현역회원 관리방안 연구, 진료수가와 명예회원의 보수 제안, 대학의 교과과정 자문, 의사들의 쟁의조정, 위법회원 고발, 회원 징계, 정부의 자문 등의 업무를 나누어 담당한다. 국립학술원의 원로 의학자들은 건강정책에서 소외되고 무기력한 의사직업에 좌절했다. 의사들은 노조를 만들고 1965년 스트라이크를 일으켰다. 정부는 철저히 대응했고 의사들은 자율성이나 이익을 지키는 데 실패했다. 그 후 신분상의 불이익 때문에 어느 의사도 나서지 않았다[13].
최근 색다른 주장도 있다. 즉 의협은 의사의 전문직업성과 윤리만을 전담한다. 그리고 각종 협의회 등 소집단들이 각각 자신의 이익을 대변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제도화한다면 의사들 사이의 이익갈등은 첨예화할 것이다. 또한 갈등의 조정역할은 국가로 넘어가고, 의사직업은 궁극적으로 국가에 예속하는 결과를 초래할 가능성이 높다(Tables 2,3). 여기에는 근본적인 오류도 있다. 개인이든 단체든, 그들의 이익과 명분을 명확히 나눌 수 없다는 점이다. 현대사회에서 이익과 명분, 두 가지는 물리적이 아니라 화학적 결합이다. 명분 없는 사익은 무도한 것이고 사익을 배제한 명분은 의미가 없다.
의사집단은 아직 내부의 이익갈등을 스스로 조정하는 데 미숙하다. 의료행위에 대한 상대가치 점수의 할당이 그런 실례이다. 의사들이 행위별 노동의 가치를 스스로 정하는 좋은 제도이다. 의협에서 주관했으나 성공하지 못했다. 개원의협의회는 물론이고 개별 학회 차원에서도 합의를 이루지 못했다. 제도의 좋고 나쁨이 아니라 그것을 운영하고 이익갈등을 다루는 의사들의 지혜가 부족하다.
그러면 한국 의사들의 대안은 무엇인가? 한국은 다행히 멕시코 수준의 국가조합주의는 아니다. 그러나 위계적 입장을 계속 취할 것이다. 한국 사회는 앞으로도 영미만큼 다원주의와 개인주의가 발달한다고 보기 어렵다. 어느 학자는 한국 사회 전반을 검토하고 다원주의에 근접한 사회조합주의를 한국의 미래 지향점으로 제시했다[7]. 의료분야의 정치도 사회조합주의로 전환하여 국가와 민주적으로 협치(shared governance)하는 것이 최선일 것이다.
의사들 사이에 이익갈등이 첨예화되고 의협이 무기력해지는 것은 보험재정을 하나로 통합한 국민건강보험에서 비롯한다. 의사들은 직역과 진료과목별로 이해관심이 분할되어 있으며, 단일보험자의 재원을 놓고 갈등을 빚을 수밖에 없는 구도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단일보험자체제에서 정부는 보험과 재정의 운영에 직접 개입한다. 국가의 간섭이 많을 수밖에 없고[14], 개원의사들은 공단 하부기관의 직원 같이 생각될 것이다. 공보험의 재정을 분할하든 민간보험을 도입하든, 복수보험자체제로 전환하여 의사들의 수입원을 다변화해야 한다. 이것이 유일한 대안이다.
2. 개원의사와 직업통제
의사직업의 핵심적 특성을 두 가지만 든다면 비교적(秘敎的, esoteric) 지식에 근거한 수련과 봉사지향이다[15]. 따라서 의사들에 대한 직업적 통제는 이 두 가지에 맞춰진다. 지식에 대한 것은 연구, 대학졸업 전후의 교육, 적임자의 선발, 시술의 방법, 시술을 위한 각종 제도의 확립과 개발 등을 포괄한다. 이러한 지식의 권위와 국가나 병원자본의 권위 사이에는 필연적으로 다툼이 생긴다. 두 권위의 우열문제는 전문직업성을 평가하는 한 가지 방법이기도 하다[8].
영미에서는 지식이 관료제의 권위를 극복하고 의학전문직업성이 만개한다(Table 1). 영국은 국가 차원에서 양자(bipartite)조합주의를 구현한다. 쉽게 말하면 영국의사협회는 National Health Service를 받아들이고 그 운영은 의사들이 한다. 심지어 관료제의 일방적 결정에 비토권까지 갖는다[16]. 미국은 개인을 존중하고 국가의 개입을 최소화한다. 그렇지만 개별 조직체나 병원 단위에서 이사회의 관료제와 의사의 지식이 양립하는 이중권위체계를 유지한다.
한국에선 관료제가 지식의 권위보다 우위에 있다. 국가는 의과대학의 입학정원, 졸업 전후 교육, 진료과목 표방, 건강관리제도 등의 사항을 결정할 수 있다. 최근의 예는 2007년 제정한 ‘노인장기요양보험법’이다. 제13조 ‘장기요양인정의신청’에는 의사의 소견서를 제출하게 되어있다. 그러나 대통령령으로 예외규정을 두어 행정의 권위를 우선했다. 개별의사들의 진료에 대해서 주무 장관은 고시를 통해 진료방법, 약제선택, 진료수가 등 거의 모든 사항을 일방적으로 결정할 수 있다. 병원경영자는 봉직의사들에게 전문직업성에 반하는 요구를 할 수 있다. 의사들에 대한 관료제 통제가 강하다는 것은 그만큼 직업적 통제가 약하다는 반증이다.
관료제의 우위는 의료법시행령 제41조 ‘진료과목의 표시’에서 잘 나타난다. 이는 교직의사들의 지식 행사에 대한 자유를 제한하고 있다. 노인인구의 증가를 예로 들면, 의학자는 당연히 퇴행성질환이나 성인병 환자의 증가를 예상할 것이다. 국민의 건강을 고려하든 시장의 수요에 반응하든, 새로운 전문화 즉 전공을 신설하든가 아니면 기존의 명칭을 변경하여 새로운 진료과목 표방을 원할 수 있다. 그 분야의 전공의를 늘려 예상하는 수요를 충족시키려 할 것이다. 그런데 이것을 실현하려면 국가의 승인을 받아야 한다.
진료과목 표방을 법제화한 유래는 1944년 제정한 ‘조선의료령’이다. 그러나 “…조선총독은 허가하여야 한다.”로 규정하여 실질적 권한을 대학에 위임했다. 반면 해방 이후 한국은 “…정부의 허가를 얻어야 한다”로 바꾸었다. 군국주의 일본의 정책지향이 피동적이었던 반면 신생 한국은 의학전문직업성에 능동적 입장을 취했다. 법인으로 지위를 격상한의학회는 지식에 대한 국가의 정책지향을 피동적으로 바꾸는 데 총력을 기울일 필요가 있다.
지식의 자유나 지식재산권이 있으면, 의사들에 대한 교직의사들의 직업적 통제도 훨씬 수월할 것이다. 전문직은 학구적 직업(learned occupation)이기 때문이다. 개원의사들도 지식의 권위에 의존하여 정부의 관료제 통제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 현재의 상태에선 지식의 권위가 약하기 때문에 개원의사들이 부당한 요양급여기준에 맞서기 어렵다. 해방 이후 의료계 최대의 숙원은 ‘지식에 대한 교직의사들의 지배력 강화’가 되어야 한다.
한국 의학은 지난 100년 권위주의체제 아래에서 전문직업성이 성숙할 기회가 없었다. 의사들은 불충분한 전문직업화의 상태에 있다. 교직의사들은 의학을 지키는 데 급급했을 것이다. 하지만 성숙한 전문직을 위해 의사들은 집단적 노력을 얼마나 했는지 성찰해보아야 한다. 역사적으로 나치독일과 소비에트의 의사들을 ‘탈전문화’한 것으로 평가한다. 그 이유는 자신들의 독립을 행사할 능력이나 자발적 의지가 없었기 때문이다. 지식의 발전 방향과 그 지식의 용도를 선택하는 전문직의 독립은 전문직업성의 핵심이다[1].
지식의 관리에도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지난 세기 후반, 의학지식의 양이 급팽창하여 지식이 분화하고 세부전공으로 제도화했다. 한국에서는 지식의 분화가 ‘유기적’으로 발전한 것은 아니다[1]. 의학 내부의 분업 즉 기존의 전문화와 세부전문화의 관계 그리고 세부전문화들끼리의 관계가 명확하지 않다. 지식의 분화보다 균열이 우려된다. 과잉분화는 의사직업의 탈전문화로 이어질 수 있다[17]. 그 과잉 여부는 그 사회의 발전 수준에 따른 상대적인 문제다. 이 점이바로 의학지식의 분화에 따른 제도화에 신중을 기할 필요가 있다.
지식이 균열하고 직업이 불안정해지면 의사들은 ‘원자적’ 개인주의에 빠지기 쉽다. 의사들의 공동체적 연대는 약해지고 의협은 면허소지자들의 군집체처럼 된다. 자영업자인 개원의사들의 분열이 먼저 나타난다. 개원의협의회가 생기고 무슨 의사회로 개칭하여 자신들의 입장을 강화한다. 서로의 이익이 엇갈리면서 제각각 이익을 관철하려고 시도할 것이다. 그 결과 의협은 갈등에 휩싸이고 전체 의사들의 이익을 지키기 어려울 것이다. 봉직의사들은 분열하기보다 병원자본이나 대학의 관료제 통제에 순치되고 어느 정도 일체성을 유지할 것 같다.
근대 의사직업은 봉사지향(service orientation)을 앞세웠다. 집단지향(collectivity orientation), 봉사윤리(service ethos), 윤리성(ethicality) 등은 모두 같은 개념이다. 이 의미는 의사들의 결정이 자신의 사익이 아니라 의뢰인의 ‘필요’에 근거한다는 것이다. 봉사지향은 또한 의사들의 희생 감수를 말한다. 예를 들면 수년간의 수련에 시간을 써야하고, 돈 없는 사람을 차별하지 않고, 때에 따라서는 삶이나 평판에 손해 볼 각오 등을 말한다. 이것을 개인적 이타주의와 혼동해선 안된다. 의사도 다른 사람들처럼 삶을 꾸려 나가야 하기 때문이다[18].
봉사지향은 흔히 윤리서약이나 규약 같은 공식적인 의식(rituals)으로 구체화되는 철학의 정수로 간주하기도 한다. 특히 사회과학자들은 “사람들을 고치는 게 돈을 버는 것보다 더 중요하다”고 표현하여 윤리적인 것으로 보이려는 의사들의 일반적 경향으로 평가한다. 의식이든 개인적 태도든, 이런 접근은 실제 행위보다 선한 의도에 초점을 맞추는 듯하다. 그러나 선의가 선한 행위의 전제조건인지 모르나 선한 행위를 보증하지는 않는다[5].
의사의 업무에서 선행의 개념은 선의가 아니라 행위의 결과(beneficience)다. 복잡한 현대산업사회에서 상대방의 선의를 파악하긴 거의 불가능하다. 소개 받은 의사나 환자가 서로에게 실망하고 또 의료분쟁으로 비화하는 예가 적지않다. 공중의 신뢰를 유지하기 위해, 특히 이해 상충이 예상되는 경우 행위에 대한 ‘계약’으로 접근할 때가 되었다. 의사, 환자, 일반국민, 국가 모두는 상호간 권리와 의무를 정하고, 그 범위 안에서 서로에게 충실하는 것이 사회적 갈등을 줄이는 하나의 방법이다.
봉사지향은 의사 개인들에게만 있는 것도 아니다. 다른 직업들의 구성원들도 모두 성실히 봉사하고, 또 의사들에서 그 강도가 높다는 근거가 없다. 봉사지향은 개인들의 속성이 아니라 직업적 차원에서 주장하는 제도의 속성이다. 나아가 직업차원에서 자율성을 지키기 위한 내부 통제의 한 요소다. 봉사지향은 공중의 신뢰에 대한 시금석이고 전문직이 구성원들의 업무를 통제하는 방법으로 정의될 수 있다. 즉 의사들이 하는 일에서 전문지식의 유효성을 잘 알 수 있고, 그들의 업무를 공익 차원에서 통제하는 것에서 봉사지향의 효과성이 드러난다[5].
전문직 협회는 구성원들을 위해 당장 목전의 이익만을 도모하지 않는다. 직업윤리, 진료기준, 건강관리정책의 제언, 국민 건강을 위한 조직적 활동 등을 결정한다. 의협의 ‘지식향상위원회’ 활동은 공익을 위한 봉사지향의 좋은 예다. 의협이 사법부의 광우병 판결을 공식 논평하고, 자유판매약 정책에 큰 방향을 제시하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의료기관들이 기관생명윤리위원회를 통해 의학연구에 만전을 기하는 것도 궁극적으로 공익을 위한 활동이다.
개원의사와 직업윤리
봉사지향에 대한 주장은 자율성을 정당화하려는 집단의 속성이고, 윤리규약은 궁극적으로 공익 차원에서 개별 의사들의 업무를 통제하려는 스스로의 선언이다. 의사나 법률가처럼 자타가 공인하는 일부 전문직은 자신들이 스스로 만든 규약으로 자기통제가 가능하다고 주장했다. 그 결과 이런 전문직들은 윤리규약을 가졌고 동시에 사회는 윤리적 다툼을 심판하는 이들의 권위를 인정했다. 그러나 이 규약은 전문직의 특정한 역할에 상응하는 그들의 도덕적 의무(role - specific duties)와 분명히 구별해야 한다[19].
19세기 중반 영국의 일반 국민들은 유능하고 훌륭한 의사와 그렇지 않은 의사를 구별할 수 없었다. 이에 일부 의사들은 ‘자발적’으로 유능하고 훌륭한 의사임을 서로 보증하기 시작했다. 이것이 윤리규약 제정의 유래다[20]. 유럽대륙 국가에서 전문직업화는 왕, 제후, 귀족, 국가에 의해 ‘수직적’으로 시작되었다. 그들은 윤리규약을 만들어 주로 법률가와 성직자들에게, 그리고 정도는 약했지만 의사들에게도 영향을 주고자 시도했다[21]. 이렇게 윤리규약은 의사들이 전문직의 지위를 획득하는 데 필수적 요소는 아니었다[1].
반면 한국은 서구식 의사제도를 도입하면서 1912년 의사의 진료거부금지를 ‘법제화’했다. 그 당시 신민(subjects)들에게 서구식 의사의 권한을 준다는 것은 상당한 특혜였을 것이다. 결국 국가는 의사의 도덕적 책무를 법적 강제로 만들었다. 이것이 지금까지 이어오고 있다. 한국처럼 국가가 교직의사들의 지식재산권을 인정하지 않거나 임상의사의 진료에 간섭이 많으면 자발적인 전문직 윤리가 발달하기 어렵다. 오늘날 한국 의사의 직업윤리 인식에는 전근대적인 법률 개념과 성리학의 가치관, 개별 의사들의 종교적ㆍ정치사상적 신념, 개인적 삶의 경험 등이 뒤섞여 있다. 여기에 개인적 과욕이나 무관심이 겹쳐 직업윤리의 확립을 어렵게 만든다.
한 가지 예는 1997년 제정한 의협 의사윤리선언과 강령이다. 의사에게 환자 돌봄을 ‘삶’의 본분이라고 규정했다. 의사 개인들의 인생 목표나 가치를 직업윤리에 끌어들였다. 이를 지키려면 의사들은 모든 희생을 감수해야 한다. 자발적 희생을 칭송할 수는 있으나 요구해서는 안된다. 의사에게 의업은 삶이 아니라 ‘직업’의 본분이다.
의협은 2006년 윤리선언 강령 지침에 대한 개정특별위원회(위원장 송수식)를 결성하여, 권위적인 윤리선언을 폐지하고 나머지는 현재의 것으로 개정했다. 환자의 자율성을 최대한 존중했다. 반면 정당한 사유 즉 환자의 탈법적 요구, 개별 의사의 역량을 넘거나 시설의 부족 등이 있을 때 의사의 ‘진료거부’를 제한적으로 인정했다.
의사도 한 사람의 시민이므로 최소도덕을 갖추어야 한다. 이것은 직업윤리 이전의 기본적인 소양이다. 더구나 현대사회에서 제1의 도덕률은 ‘해악금지(harm principle)’로 반드시 지켜야 한다. 비록 소수이기는 하나 어느 교직의사는 전공의를 폭행하거나 술 상납을 받았다. 개원의사도 진찰실에서 성추행이나 성폭행을 자행한 적이 있었다. 예전엔 전공의 선발과정이나 의국(醫局)에 입문하며 금품수수가 있었다는 소문도 있다. 내부통신망에선 반지성적인 언어가 난무한다. 이러한 해악은 공중의 신뢰 문제를 떠나 개인의 잘못으로 돌리거나 외면해선 안 될 일들이다.
의사 개인에게는 시민의 최소도덕을 넘는 직업에 따른 도덕적 의무가 부과된다. 이것은 의사들의 특정한 역할에 의한 것이다[19]. 즉 어떤 전제 하에서만 의무가 발생한다. 예를 들어, 길에서 사람들이 싸우고 있고 휴가 중인 경찰관이 그 옆을 지나고 있다고 가정하자. 그에게는 시민으로서 싸움을 말릴 일반적인 의무가 있지만, 경찰의 자격으로 시비를 가릴 의무가 발생하지 않는다.
선진국 의사단체의 윤리규약은 대단히 상세하다. 서구사회는 계약문화가 발달하여 모든 걸 명문화했을 것이다. 한국사회는 아직 그 정도 수준이 아닌 것 같다. 의협 차원의 윤리규약은 전국의 모든 의사에게 적용된다. 따라서 서구에 비해 포괄적이더라도 모두에게 공통적인 것을 규정하는 게 타당하다. 다시 말해, 세세한 것 즉 직업윤리나 생명윤리의 구체적 사항은 지역, 직역, 학회, 기관별 특성에 맞게 스스로 제정하여 소속 의사들에게 적용하는 게 현실적이다. 어떤 윤리규범을 만들고 지키려는 소규모 단위의 자발적 훈련도 필요하다. 그런 노력의 성공 사례를 취합하여 의협의 그것에 반영하고, 윤리규약의 수준을 서서히 높이는 게 최선일 것이다.
개원의사도 윤리위원회의 적극적인 활동과 자율정화에 강한 의지를 보였다[22]. 물론 2000년 의료대란으로 많은 권리를 확보한 뒤의 상황이었다. 지금도 개원의사들의 마음속에는 최소도덕이나 특정 역할에 따른 의무를 이행할 각오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현재의 윤리위원회는 그런 기대를 충족하지 못하고 있다. 기본적으로 징계를 담당하는 곳인데 윤리에 대한 연구 기능이 추가되어 효율적 운영이 어렵다. 그러므로 윤리위원회를 ‘징계위원회’(가칭)로 개명하고 본연의 역할을 수행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전문직업성에서 윤리는 필수적인 구성요소이다[23]. 윤리학은 어떤 속성이나 덕을 설명할 수 있는 이론적 배경을 제공하고 비판적 추론을 통해 의사의 업무에서 생기는 갈등과 딜레마를 해소시킨다. 이미 내려진 도덕적 결정을 검증하는 수단도 제공한다. 그런데 사려 깊은 시민이라면 풀 수 있는 딜레마에도 의사들은 어려움을 느낀다. 의사들은 전문지식과 기술을 배우는데 몰두하여 도덕지식을 연마할 시간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의사들은 보통 시민들처럼 삶의 경험을 갖지 못해 도덕적 직관력이 약하다[24]. 이를 위해 어떤 교육 프로그램이 필요한지, 그 교육을 어떻게 할 것인지 윤리학자들과 공동 연구하는 것이 바람직할 것이다.
결 론
의학전문직업성의 핵심 요소는 의사직업의 자율성이다. 이 자율성은 의학지식의 특성에서 유래하지만 제도화하려면 국가의 승인을 받아야 한다. 유감스럽게도 한국 의사직업의 자율성은 선진국에 비해 불충분하다. 모든 의사들은 단순 기능인처럼 진료에 관련된 최소 영역을 할당받았다. 그 이유는 지난 백 년간 한국이 강력한 중앙집중체제를 유지해온 국가의 성격 때문이다.
국가는 의학지식을 통제하여 지식에 대한 교직의사들의 자유로운 행사를 막았다. 즉 새로운 진료과목을 신설하려면 국가의 승인이 필요하다. 의사들은 국민들의 건강문제에 능동적으로 대처할 수 없다. 결국 국가는 의학지식의 발전 방향과 그 지식의 용도를 선택하는 전문직의 독립을 저해하여 전문직업성의 발달을 막았다. 그러나 “의사를 단순 기술자 정도로 한정시킬 경우 의료의 왜곡현상이 생긴다. 따라서 정부는 의료전문주의의 신장을 통해 의사 스스로 바람직한 의료인상을 실천할 수 있게 해야 한다[25]”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이제 의사들은 의료분야의 정치를 적극적으로 주도해야 한다. 국가와 협치를 통해 의사직업의 내실을 기할 수 있을 것이다. 교직의사들은 지식재산권과 지식 행사의 자유를 찾고 지식의 관리에 만전을 기해야 한다. 개원의사들은 조합주의에 대한 이해를 높이고 자신들의 이익을 놓치지 말아야 한다. 의사들은 또한 의뢰인이나 일반 공중에게 오만하지 않았는지 되돌아보아야 한다. 의사직업의 영향력은 개별 의사들의 사회적 평판에 큰 영향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직업의 자율성은 의사들의 자기통제와 공중의 신뢰를 전제로 한다. 이것이 성공적일수록 직업자율성은 신장하고, 궁극적으로 개별 의사들의 업무 재량권은 커질 것이다. 국가는 2011년 4월 의료법을 개정하여 면허관리와 자율징계의 일부 권한을 의협중앙회에 이관했다. 이 의미는 결코 작지 않다. 국가가 민주적 혹은 사회조합주의로 전환 가능성을 보여준 사건이다. 개원의사, 봉직의사, 개별 학회와 의학회, 그리고 의협의 집단 대응이 필요하다. 바꾸어 말하면, 의사직업은 깨지기 쉬운 유리컵과 같다. 의사들은 자기 직업을 아끼고 발전시켜야 한다.
한국 사회는 경제성장과 함께 민주화를 꾸준히 발전시켜 나가고 있다. 의사들도 국가나 일반 공중에게 뭔가 변화하는 모습을 보여주어야 할 때다. 백 년을 지켜온 의사직업의 저력을 보여주어야 한다. 한국이 자유민주주의의 원칙을 포기하지 않는 한 의사직업의 성공 가능성은 열려있다. 이제부터 한국 의사들은 본격적인 전문직업화의 과정에 들어간 것이다. 21세기 한국의 의학과 의사들은 중대한 전환점을 맞고 있다.
|
Abstract | |
Medical professionalism in Korea is underdeveloped because of a strong state that has been in place for the past one hundred years. If the government actively controls policies and regulates the professional associations under state corporatism, deterioration of professionalism is inevitable. The current medical insurance in Korea is unified as a monopsony, but it is not the 'bipartite corporatism' between the government and the medical profession such as the National Health Services (NHS) in Britain. All insurance matters related to a physician's practice, including standards of treatment and the physician's reimbursement, are handled by the government. Therefore, the authority of medical expertise is subordinate to the authority of the government agency, and physicians are forced to follow the goals and policies that are set by the government. Physicians' professional ethics are the core of their occupational control. The declaration of "Codes of Ethics" by the Korean Medical Association, before it was revised in April 2006, defined a "sincere fulfillment in practicing medicine" as a full duty of the physician's life. If this declaration was intended to be interpreted literally, all physicians in Korea could be asked to pursue identical lives with the same goals as their professional life as a physician. If it was not intended to be interpreted literally, then physicians may develop their own ethical approaches according to their individual perspectives on life. The former case is an unethical form of state control while; the latter case would make legitimate occupational regulation impossible. The ideal of medical service is an institutional attribute of an occupation and not a duty of an individual's life. Therefore, it should be possible for physicians to work under an occupational control that requires specific standards for the members of the profession and embodies their professional values. |
Keywords: Professionalism, Autonomy, Corporatism, Service orientation, Ethical codes. |
'Articles (Medical Education) > 전문직업성(Professionalism)'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의학 직업전문성의 특성과 실천 원리 (KMER) (0) | 2014.11.26 |
---|---|
●한국 의학전문직업성의 사회적 시각 (JKMA) (0) | 2014.11.26 |
●전문직업성 배양을 위한 의학교육 (KMER) (0) | 2014.11.26 |
●한국 의과대학과 대학병원에서의 의학전문직업성의 의미(JKMA) (0) | 2014.11.26 |
○현대 의학전문직업성: 역사적 배경, 개념변화, 선언문 비판(JKMA) (0) | 2014.11.2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