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의과대학과 대학병원에서의 의학전문직업성의 의미
The meaning of medical professionalism for the faculty members of medical school and university hospitals in Korea
권 복 규* | 이화여자대학교 의학전문대학원 의학교육학교실
Ivo Kwon, MD*
Department of Medical Education, Ewha Womans University School of Medicine, Seoul, Korea
*Corresponding author: Ivo Kwon, E-mail: kivo@ewha.ac.kr
서 론
의학전문직업성(professionalism)은 ‘의학’이라는 단어와 ‘전문직업’ 그리고 ‘성(性)’이 한데 합쳐진 단어이다. 그런데 ‘medicine’을 ‘의학’이라고 번역하는 것부터 논란의 소지가 있다.
- ‘의학(醫學)’은 우리나라에서는 예로부터 잡학(雜學) 학문 체계의 분류 중 하나로 사용되었다. 즉 산학(算學) 혹은 역학(譯學)과 같이 공부의 한 분야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 학과(學科)로서 배우는 것이 아닌 환자를 구료하는 행위 일반을 의미할 때는 그저 ‘의(醫)’라고 썼다.
- 醫의 실질적인 면, 즉 환자를 치료하는 기술을 의미할 때는 ‘의술(醫術)’이라고 썼다. 영어로 하면 ‘의학’은 ‘academic medicine’으로, ‘의술’은 ‘medical practice’로 옮길 수 있다.
- 醫는 또한 본질적으로 사람에게 선을 행하는 윤리적이고 철학적인 성격을 지니는데 전통적으로는 이를 ‘의도(醫道)’라고 불렀다.
오늘날 우리가 이해하는 ‘의학’은 좁은 의미의 ‘의학’과 ‘의술’, 그리고 ‘의도’를 한데 합친 개념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이 세 가지를 한데 표현하는 적절한 표현이 없으므로 이 글에서도 어쩔 수 없이 ‘medicine’을 일컫는 일반 용어로 ‘의학’을 쓰도록 하겠다.
‘의’에 대해 이렇게 장황하게 이야기하는 까닭은 의학전문직업성이 사실 ‘醫’의 본성에 깊이 뿌리내리고 있음을 강조하기 위함이다. ‘의’의 실천에서 의학과 의술, 윤리는 사실상 구분이 불가능하다. 의학의 실천에 있어 이론(theoria)만 있으면 공허하고, 어떤 지식의 밑바탕이 없이 막무가내로 행동하면 장님이나 다름없다. 전자는 우리가 ‘공리공론’이라 부르고, 후자는 ‘돌팔이’라고 부른다. 이러한 醫의 성격으로 인해 아리스토텔레스는 ‘실천적 지혜(phronesis)’의 대표적인 분야로서 의학을 들었다. 물론 근대 생물학과 화학 등 확고한 자연과학의 바탕이 없었던 아리스토텔레스 당시 의학은 경험적 지식의 일종으로 실천의 성격이 더욱 강했지만, 유전학과 분자생물학이 놀랍게 발전한 오늘날에도 이러한 실천적 지혜의 성격은 의학에서 사라지지 않고 있다. 인간의 모든 고통과 불완전함을 유전학과 분자생물학과 같은 엄밀과학으로 완전히 환원시킬 수 없으며, 이에 대한 치료 역시 이론물리학과 같은 연역적 지식이 아니라, 의료전문직 집단의 집단적 경험과 지혜를 통한 개연적인 지식에 의존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만약 의학의 도움을 희구하는 인간의 모든 불완전함과 고통이 분자생물학적으로 환원되어 설명 가능하다면 의사도 필요 없고, 당연히 의학전문직업성도 의미가 없을 것이다. 스타워즈를 비롯한 많은 공상과학영화에서처럼 컴퓨터나 로봇이 이 직무를 감당하는 편이 훨씬 더 나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모든 개별 인간이 안고 있는 수많은 ‘문제’와 ‘아픔’을 몇 가지의 이론으로 환원하기 불가능하며, 그에 대한 대응 역시 천차만별이다. 따라서 무수한 선택지 중에서 결정을 해야 하는 행위자의 존재는 불가피한데, 그가 바로 의사이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근대서양의학이 전성기를 구가하면서 의학의 이러한 본질적인 부분들은 상당부분 사상된 듯 하였지만, 의과학 지식이 놀랍게 발전한 오늘날 돌이켜보면 자연과학에 대한 존중을 넘어선 맹신은 오히려 건전한 의학의 실천에 바람직하지 못하였음이 분명해졌다. 최근 근대서양의학의 발상지인 구미에서 의학전문직업성에 대한 새로운 요구가 의료계 내부로부터 등장한 것은 바로 이러한 성찰에 기인한다.
의료전문직의 자율성과 전문직 표준
근대자연과학을 내부로부터 발전시키지 못하고 서구로부터 수입한 우리나라에서는 자연과학을 마치 순수한 이론이자 절대적 지식인 양 받아들이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의학의 실천이라는 관점에서 볼 때 자연과학은 증거에 입각한 임상의과학과 더불어 우리가 단단히 발을 딛고 서야 할 토대이지 맹목적으로 신봉해야 할 것은 아닌 것이다. 동일 질병이라도 수없이 다양한 증상과 증후를 보이는 환자들 앞에서 내과학 교과서의 처방을 동일하게 반복하는 의사는 성숙한 전문가와는 거리가 먼 사람이다. 이러한 의학의 본질적 속성으로부터 의사의 전문가적 자율성에 대한 요청이 등장한다. 즉, 기본적이고 건전한 의학교육을 받은 의사라면 자신의 재량과 판단에 의해 해당 상황에서 옳다고 여겨지는 의학적 실천을 창의적으로 할 수 있으며, 그것이 일반적으로 인정되는 전문직 표준(professional standard)의 범주 내에 들어가는 한 누구도 이를 비난할 수 없다. 이러한 전문가적 자율성을 우리나라에서는 흔히 ‘의권(醫權)’이라고 부른다. 이 권리를 인정하는 것은 의학이 자연과학에 입각해서도 아니고, 의사가 환자나 다른 일반인들에 비해 더 많은 의학지식을 가지고 있기 때문만도 아니다. 의학이 가지고 있는 불확실성이라는 본질적인 속성으로 인해 전문지식을 가지고 있는 의사에게 일정한 재량과 권리를 인정하는 것이 환자에게 궁극적으로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전문가적 자율성은 많은 지식의 숙지가 아니라 그러한 지식을 시의 적절하게 창의적으로 활용할 수 있는 능력에 달려있다. 이는 항해하는 배의 선장이나 등반대의 대장, 또는 전시의 군 지휘관들에게 모두 인정되는 종류의 자율성이다. 이들은 모두 불확실하고 시시각각으로 변화하는 환경에서 타인을 위해 중요한 결정을 내려야 하는 책임을 안고 있다. 이들이 쌓은 지식과 경험은 그 결정의 근거가 되지만, 그 관계는 어떤 매뉴얼을 그대로 따르는 단선적인 것이 아니다.
하지만 의사가 갖는 자율성, 혹은 권리는 전문직 표준, 그리고 ‘윤리’에 의해 제한을 받는다. 이러한 안전장치가 없다면 정규 의사와 돌팔이를 구별할 수 있는 방법이 없고, 자율성은 바로 권한의 남용으로 전락할 것이다. 이 지점에서 의학전문직업성의 ‘전문직업적’ 성격이 드러난다. 예로부터 ‘전문직업’이란 ‘일반적으로 쉽게 획득할 수 없는 고등 지식이나 기술을 요하는 사회적 가치가 큰 직업’으로 이해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설명은 인구 대부분이 보통교육 이상을 받지 못하고 단순 노동에 종사했던 농경사회, 혹은 근대 산업사회에 해당하는 것이며 고등지식과 기술이 가치 창출의 원천이 되는 후기산업사회에는 그다지 적합하지 못하다. 이러한 설명을 그대로 적용한다면 ‘프로’ 야구선수, ‘프로’ 미용사, ‘프로’ 학원강사들도 전문직업성이 필요할 것이다. 물론 이들은 어떤 면에서 ‘전문직’이라 할 수 있지만, 이 때 전문직은 난이도가 높은 특정 지식이나 기술을 습득하여 그 업에 종사하고 있음을 의미할 따름이다. 의학에서의 전문직이란 전문직 표준을 제시할 수 있는 조직화된 전문가집단이 있는 직업, 즉 조직화된 의료(organized medicine)의 존재를 의미한다[1]. 사회학적으로 볼 때 조직화된 의료의 등장은 의료전문직의 성장과 궤를 같이한다. 즉 19세기 이래 근대의학의 성장과 더불어 각종 돌팔이 및 유사의료직종과의 경쟁에서 정규의사(regular physician)의 가치를 분명히 하고, 이를 국가와 사회가 인정하는 ‘독점(monoploly)’의 상태로 이끌어온 것이 조직화된 의료였다. 의사협회나 각종 의학회 등의 형태를 가진 조직화된 의료는 의료전문직의 표준을 제시하고, 개별 의사의 직무능력(competence)을 통제하였으며, 직무능력이나 직업윤리 면에서 문제가 있는 회원은 솎아내어 전반적으로 의료직의 수준을 향상시켰고, 그 결과 사회로부터 면허(license)라는 형태의 독점을 얻어내었다. 이렇듯 조직화된 의료의 자율규제(self regulation)는 전문직의 핵심이며, 이것이 없이는 완전한 의미에서의 전문직이라고 하기 어렵다. 우리나라는 유럽처럼 조직화된 의료의 오랜 전통이 있지도 않고, 미국처럼 유사의료업자들과의 투쟁을 통해 새로운 전통을 만들지도 못한 상태에서 일제의 영향으로 일정한 의학지식을 습득하면 국가가 바로 면허를 허여하는 의료제도를 수용하였다. 이는 어떤 측면에서는 편리하기는 하지만, 조직화된 의료를 통한 자율규제의 발전을 저해하였으며, 의사직과 의료를 국가의 통제 하에 두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의사들에 대한 통제를 국가가 주도한다면 의료전문직의 직업적 존엄(professional dignity)은 설 자리가 없어진다. 의사의 직업적 존엄은 스스로 규제를 조직화할 수 있는 능력으로부터 기인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의학이 가진 특수성, 즉 의료행위가 가진 근원적 불확실성, 고도의 지식집약성, 시술의 난이성 등으로 인해 의사가 아닌 다른 사람이 의료 문제에 직접 개입한다면 득보다는 해가 크기 때문에 자율규제는 필연적으로 요청된다. 그러므로 의사 개개인의 직업적 자율성과 이를 통제하는 조직화된 의료의 자율규제는 의학전문직업성의 핵심이다.
의학전문직업성과 전문직 윤리
의학전문직업성(professionalism)에서 ‘ism’이 바로 性에 해당되는데, 이는 특징, 성격, 혹은 정신(spirit)을 의미한다. 그래서 프로페셔널리즘을 일각에서는 ‘전문직업정신’으로 번역하기도 한다. 특징이나 성격을 의미하는 ‘性’으로 쓰게되면 의료전문직이 가져야 할 다양한 특성들을 의미하게 되고, ‘정신’으로 쓰게 되면 지향해야 할 가치의 의미가 더 크다. 최근에 국내는 물론 구미에서도 많은 프로페셔널리즘 논의가 일어나면서 ‘특성’으로부터 ‘정신’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규정이 등장하였다. 그러나 의료윤리의 입장에서는 의료전문직이 갖추어야 할 다양한 특성보다는 가치와 ‘정신’에 더 큰 비중을 둘 수밖에 없고, 그것이 도덕적 실천으로서의 의술에 더욱 부합한다고 생각한다. 즉, 의학의 근본에는 ‘이타성’이 다른 어떤 직업보다도 강력하게 깔려 있고, 이것이 일반 서비스업과 의학을 근원적으로 구분하는 지점이며 그래서 ‘서비스’를 잘 수행할 수 있는 여러 속성들보다는 가치의 지향점이 더 중요하다[2]. 물론 최근 의학의 분화로 말미암아 일반 서비스업과의 경계가 모호해지는 영역이 많이 등장하고 있지만, 의학의 본질적 측면은 여전히 가치 지향적 특징을 가지고 있다. 즉 적정 가격에 대해 적정 서비스를 제공하면 그만인 다른 업종과 달리, 의사에게는 때로 화폐가치를 넘어서는 더 큰 도덕적 의무가 부여된다. 한편 그에 대한 반대급부로 사회는 의사에게 적정한 예우와 존경을 보여주어야만 할 것이다. 이러한 상호관계가 원활하게 작동하는 것이 건전한 사회의 모습이겠지만, 불행히도 우리는 아직 그러한 사회의 수준에 이르지 못하고 있다. 프로페셔널리즘의 가치는 의학의 근본인 ‘이타성’과 ‘책무성’의 형태로 표현된다. 이로부터 자신의 직무능력을 언제나 적정 수준 이상으로 유지해야 할 책임과, 조직화된 의료(학회 등)에 능동적으로 참여하고 동료들과 원만한 관계를 유지해야 할 책임, 그리고 의사로서 품위를 유지해야 할 책임 등이 따라 나온다.
결론적으로 의학전문직업성은 의사의 ‘의사다움’이라 할 수 있으며, 이것이 없는 의사는 의사라고 보기 어려울 것이다. 이는 우선 의사의 자율적 노력을 통해 준수되고 고양되어야 하지만, 의료계를 둘러싼 사회 환경도 대단히 중요하다. 의사를 국가의 통제와 관리의 대상으로, 혹은 타도해야 할 기득권층으로 보는 사회에서는 의료문화의 꽃이라 할 수있는 의학전문직업성이 설 자리가 없으며 그 결과는 의사와 환자 모두에게 불행일 것이다.
의과대학 교수의 특징과 의학전문직업성
의학전문직업성은 모든 의사들이 갖추어야 할 기본적인 정신이지만, 그 발현되는 형태는 직종에 따라 약간씩 차이가 날 수 있다. 특히 의과대학교수는 임상의(clinician)로서의 성격 외에도 연구자 및 학생과 전공의를 교육, 지도하는 교수로서의 성격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의학계를 이끌어가는 지도자로서 사회에 대한 책무 역시 지니고 있다. 임상의로서의 의학전문직업성은 환자를 진료하는 모든 의사에게 공통되는 것이다. 즉 적정한 직무능력의 유지, 환자의 이익을 자신의 이해보다 우선시하는 태도, 그리고 조직화된 의료의 유지, 발전에 대한 협력과 자율성의 확보 등이다. 그런데 임상가-연구자-교육자-행정가로서 각 역할은 때로 조화를 이루기도 하지만, 때로 갈등을 빚을 수 있다. 예컨대 환자에게 최선의 진료를 제공하는 것은 임상의로서 최고의 덕목이지만, 교육 목적으로 의학생이나 전공의에게 일부 시술을 허락하는 것은 최선의 진료라는 목적과는 상충될 수 있다. 또한 환자를 특정 임상시험의 피험자로 참여시키는 것은 연구자로서의 목적에는 합당하지만, 임상시험 참여가 그 환자에게 최선의 이익일지는 논란의 여지가 있다. 그리고 의학계의 지도자로서 의과대학 교수는 때로 병원과 의대의 보직을 맡아 일해야 할 때가 있고, 학회의 이사나 사회가 필요로 하는 각종 위원회의 구성원으로 일하거나, 정부와 민간의 각종 직책을 맡게 될 수도 있다. 이렇게 다양한 역할의 기회가 주어지는 것이 의과대학 교수의 의학전문직업성에 있어 독특한 점이며, 자신이 맡고 있는 여러 직무간의 갈등과 이해관계를 조정하는 것이 커다란 도전이 된다. 이 모든 잠재적인 갈등 요소를 잘 해결해 나가면서 인간적, 직업적 성숙을 성취하는 것이 의과대학 교수에게 주어진 사명이다. 이 글에서는 임상의사로서의 의학전문직업성을 제외하고, 의과대학 교수에게 독특하게 주어진 직무와 관련된 의학전문직업성의 문제를 주로 다루도록 하겠다.
교육자로서의 의학전문직업성
우선 의과대학 교수는 교육자이자 감독자이다. 교육자(교사 및 교수)는 의사와 함께 대표적인 전문직으로 알려져 있고, 그 고유의 전문직업성 역시 다른 직업에 비해 상대적으로 잘 발달되어 있다. 즉 피교육자(학생)의 이익을 우선시할 것, 적절한 직무능력을 갖출 것, 상대적인 자율성과 독립성을 누릴 것, 전문직단체-의사보다는 자율규제 능력이 약하기는 하지만-를 구성할 것, 생애에 걸쳐 직업적 성장을 추구할 것 등이다. 특히 우리나라 사회는 유교의 영향으로 인해 전통적으로 교육자(스승)를 사회적으로 우대하고 예우하는 분위기가 있고, 물질적인 보상은 상대적으로 빈약하지만 많은 의사들이 의과대학 교수직을 갖고 싶어 하는 이유도 일부는 이에 기인한다. 교육의 관점에서 의학교육은 다른 초, 중등, 혹은 고등교육과는 상당한 차이를 보이며 이는 교육자로서의 전문직업성에도 독특한 영향을 미친다. 즉 학생들의 장래 진로를 예단하기 어려운 다른 부류의 교육과는 달리, 의학교육에서는 피교육자 거의 대부분이 의료계에서 일하게 되며, 의학교육과정은 단순한 지식이나 기술의 전수 과정이 아닌 의사로서의 특유한 성격과 자질을 형성하게 되는 ‘전문화과정’이다. 그 교육 연한은 상대적으로 길며, 교육자와 피교육자가 평생 동안 상호작용할 가능성이 있고, 특히 전공의 교육이라면 도제교육에서 볼 수 있는 스승-제자 관계가 형성되어 평생 지속될 것이 거의 분명하다. 이와 같은 의학교육의 특징은 다른 분야에서는 찾아보기 어려운 정이 풍부하고 끈끈한 사제관계를 구축하여 스승과 제자 모두에게 도움이 되는 측면이 있는가 하면 자칫 스승의 권한 남용, 창의력 억제, 내부비판 억압 등 부정적인 모습으로 나타날 수 있다.
의과대학 교수는 교육자로서 학생들에게 적절한 지식을 전달할 수 있는 바람직한 교수학습방법을 습득해야 한다. 교육 내용과 교육 목적은 학생들의 수준에 적합해야 하며, 교수학습방법은 그러한 교육을 수행하기에 적절한 방법이어야 한다. 의과대학의 교수학습방법은 다른 분야와는 달리 매우 다양하다. 즉, 강의는 물론이고 세미나, 독회, 실습, 조별 학습, 그룹별 학습, 문제 중심 학습, 그리고 실험과 임상실습, 시뮬레이션 등이 모두 동원된다. 의과대학 교수는 이들의 교육적 장점과 단점, 적용 영역, 필요한 교육자원의 종류를 잘 이해하고 있어야 한다. 무엇보다 임상실습에 있어 의과대학 교수는 학생이 겪는 어려움을 이해하고, 병원과 환자가 허용하는 최대한 학생들의 학습 효과를 극대화할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해야 한다. 회진, 병상교육, 외래 관찰에 있어 학생들이 수행해야 하는 임무와 교육 목표를 분명히 해 주고, 잘못된 부분은 지적해주고 모범을 보여야 한다. 특히 임상실습에서는 학생들이 병원에서 겪는 모든 경험이 곧 교육경험임을 인식하고 학습이 일어날 수 있도록 배려해야 한다. 학생들은 종종 강의 시간을 통해 배운 것과, 병원에서 직접 보고 행해야 하는 것들 간의 차이를 보고 당황해 한다. 이러한 혼란은 어느 정도는 피할 수 없지만, 그런 경험이 부정적 효과를 내지 않도록 사전에 주의해야 한다. 또한 의과대학 교수는 자신의 교육에 대한 학생의 성취를 객관적으로 평가할 수 있어야 한다. 이를 위해 지필시험, 구두시험, 동료평가, 포트폴리오 평가 등 다양한 평가방법들을 숙지하고 상황에 걸맞게끔 이를 적용할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자신이 맡은 교육목표의 달성을 위해 교육과정을 설계하고 이를 평가, 개선해 나갈 수 있는 역량을 갖추어야 한다.
이렇게 열거하면 교육자로서의 임무가 대단히 많고 복잡한 듯 여겨지지만, 사실 의학교육이란 환자를 진료하는 활동의 응용이자 연장선상으로 관심 대상이 환자에서 학생으로 바뀐 것뿐이다. 어떤 문제를 안고 있는 동료 인간들을 대상으로 하여 긍정적인 변화를 일으키는 시도라는 측면에서 의학과 교육학은 공유하는 부분이 많다. 의료에서 환자 상태에 대한 평가, 진료계획의 수립, 개선 정도에 대한 평가 및 진료계획 수정, 환자 및 보호자에 대한 교육, 교육 효과에 대한 평가 등은 늘 이루어지고 있는 일상적인 활동이다. 환자와 의사소통을 잘 하는 의사라면 대개 강의나 설명도 잘 할 것이다. 교수학습방법이나 평가 방법은 환자 진료에 사용되는 수많은 테크닉들에 비하면 상대적으로 습득하기가 어렵지 않다. 따라서 좋은 교육자는 좋은 임상가가 될 것이며, 또한 좋은 임상가는 좋은 교육자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예들은 의과대학에서 흔하게 찾아볼 수 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임상가’뿐 아니라 ‘교육자’라는 자신의 정체성을 갖는 일이다. 이것이 의과대학 교수에게 고유하고 또 중요한 전문직업성이다. 여기서 빼놓을 수 없는 부분은 학생(제자)과의 상호작용을 통해 교수 역시 성장하고 발전한다는 사실이다. 예기(禮記)에 나오는 ‘교학상장(敎學相長)’, 즉 가르치는 사람과 배우는 사람이 함께 발전한다는 표현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한 가르침이다. 의학전문직업성의 특징 중 하나가 의료전문직은 생애를 통해 발전한다는 것이다. 즉 환자진료 경험이 많을수록 그렇지 않은 의사에 비해 일반적으로는 더 나은 능력과 지혜를 갖출 수 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이렇듯 경험에 의해 얻어진 지식을 철학자 Polanyi [3]는 ‘암묵지’라고 하여 책을 통해 배울 수 있는 ‘형식지’와 구별하였다. 물론 이러한 지식은 그냥 얻어지는 것은 아니고 의사 자신의 ‘실천’에 대한 성찰과 동료와의 논의, 그리고 더 경험이 풍부한 선배의 조언이 있어야 한다. 그래서 학생에 대한 직접적 교육 외에도 의과대학 교수는 전공의와 후배 의사에 대한 감독자, 또는 조언자의 역할을 감당해야 하며, 이는 본인의 성장에도 도움이 된다. 가르침과 배움의 상호작용은 의사의 직업적 생애를 통해 지속되어야 하며, 이렇듯 자기 분야에서 지속적으로 성장·발전할 수 있음은 의사로서 얻을 수 있는 가장 커다란 보람 중 하나이다. 공자는 ‘천하의 영재를 얻어 가르치는 것’을 군자가 누릴 수 있는 세 가지 즐거움 중 하나로 꼽았다. 학생과 전공의를 가르침을 받아들이는 수동적 대상이 아니라, 삶의 의미와 보람을 허락하는 후학으로 존중하고, 그들의 입장에서 교육을 하는 것이 의학교육자로서의 전문직업성이자 의업의 길에서 행복을 추구할 수 있는 한 가지 방식이다.
연구자로서의 의학전문직업성
의과대학 교수는 또한 지속적인 연구 활동을 통해 의학의 발전에 기여해야 할 일차적인 책임이 있다. 물론 개원의나 봉직의도 의학연구에 참여할 수 있지만, 아무래도 의과대학 교수의 책임이 가장 클 것이다. 연구자로서 의과대학 교수는 의과학을 포함한 과학계 전반에 대한 책임이 있다. 근대 계몽주의 시대 이후 발달한 과학자로서의 전문직업성(professionalism as scientist)은 과학연구에 있어 무엇보다 진실할 것, 즉 과학적 진실성(scientific integrity)을 준수할 것을 요청한다. 과학적 진실성이란 연구 과정에 있어 계획 수립으로부터 학회 보고에 이르기까지 일관되게 진실하고 기만을 하지 않으며 가능한 한 성실해야 함을 의미한다. 과학적 진실성에 대비되는 개념이 과학 부정행위(scientific misconduct)이다. 과학 부정행위는 연구 결과의 조작 또는 위조, 허위 보고, 다른 사람의 업적을 훔치는 표절, 연구비 사용에 있어서의 횡령과 전용, 그리고 특히 의생명과학에서는 피험자 혹은 실험대상에 대한 비인도적 취급 등을 포함한다[4]. 또한 자연과학의 세계에서는 종교나 인문학과는 달리 ‘권위’가 크게 대접받지 못한다. 자연과학의 진리성은 오로지 증거에 입각한 사실에 의해서만 보증되며, 그 과정에는 학계의 권위자로부터 학생에 이르기까지 모두 대등하게 민주적으로 참여할 수 있어야 한다. 증거 기반, 성실함, 민주주의, 평등은 진리를 추구하는 자연과학의 핵심이다. 어떤 권위도 과학계에서의 자유로운 토론과 발상의 전환을 억압해서는 안 된다. 또한 과학계에서 내린 대부분의 결론은 사실은 잠정적인 성격을 띠고 있고, 이는 계시에 입각한 진리의 절대성을 주장하는 종교와 근본적으로 다르다. 이 자연과학에서의 잠정적 진리는 새로운 증거나 이론이 나타나면 언제든지 파기될 수 있으며, 바로 이러한 탈권위적 성격이 자연과학의 진실성을 보여준다.
그래서 경험에 입각한 실천으로서의 임상가와, 증거와 논리에 입각한 과학자 사이에는 미묘한 긴장이 있다. 연구자로서의 의과대학 교수는 이러한 긴장을 섬세하게 감지하고, 지혜롭게 식별하여야 한다. 최신, 첨단 연구결과가 언제나 최고의 임상적 효능을 보장하는 것은 아니다. 이를 오해하면 환자 집단, 혹은 사회에 잘못된 인상을 심어줄 수 있다. 최근 몇몇 연구결과들을 과장하여 특정 질병을 진단, 치료할 수 있다고 홍보하는 경우가 종종 있는데 이와 같은 홍보를 할 때는 허위나 기만의 소지는 없는지 주의해야 한다. 역으로 어떤 의학적 권위도 사실로 드러난 증거의 가치를 무력화시킬 수 없다. 의학사는 의사집단의 권위나 통념이 새로운 사실의 발견과 증거의 해석을 어떻게 방해하였는지를 잘 보여준다.
다른 자연과학 연구와 의과학 연구의 가장 큰 차이는 인간을 피험자로 사용한다는 점이다. 피험자는 건강한 사람일수도, 환자일수도, 아니면 인체에서 유래한 조직이나 샘플이 될 수도 있다. 인간을 대상으로 하는 의과학 연구는 원칙적으로 의사가 아니면 할 수 없게끔 되어 있다. 그 이유는 피험자의 건강 및 복지의 보호, 그리고 피험자에 대한 윤리적인 취급을 할 수 있는 전문가는 의사밖에 없다는 판단 때문이다. 이는 연구자로서의 의사의 전문직업성을 신뢰하기 때문이며 이를 갖추지 못한다면 올바른 연구자라고 볼 수 없다. 연구자로서의 의사가 갖추어야 할 윤리적 자세에 대해서는 헬싱키 선언 등 여러 문서에서 잘 설명하고 있다. 즉 원칙적으로 피험자의 건강과 복지는 어떤 과학적 목적보다 우선시되어야 하며, 연구자는 피험자의 건강과 복지를 보장하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하며, 피험자로부터 충분한 정보에 의한 동의를 받는 등 피험자의 자율성을 존중해야 하며, 피험자의 프라이버시를 지켜주어야 하며, 사전에 완전한 연구계획을 세우고 동료들에 의한 검토 및 점검을 받아야 한다[5]. 연구계획서에 대한 검토 및 연구 과정에 대한 점검을 하는 기구가 Institutional Review Board이다. 연구자로서의 호기심과 학문 발전에 대한 욕구는 때로 의사로서의 직무와 상충될 때가 있지만, 의과대학 교수는 어디까지나 환자의 옹호자(patient’s advocate)로서의 자신의 직무에 충실해야 한다.
관리자로서의 의학전문직업성과 이해상충
의과대학 교수는 병원과 의과대학의 각종 보직을 맡게 되며, 학회의 임원, 그리고 때로는 공직을 맡게 될 수도 있다. 이들 각각은 나름의 전문성과 고유한 자질 및 윤리를 요구한다. 공과 사의 구분, 정실의 배제, 공적 가치에 대한 헌신, 청렴 등이 일반적으로 요구되는 직업전문성이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개인적으로는 이해상충(conflict of interest)의 적절한 관리가 꼭 필요하다. 이해상충이란 위치상 특별한 신뢰를 받고 있는 누군가가 자신의 개인적 이익을 위해 불공정하게 행동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해상충은 의과대학 교수의 삶에서 곳곳에서 드러날 수 있다. 예컨대 약품이나 의료기기의 선택에 있어서 환자의 최선의 이익이 아니라 자신이 그로부터 얻게 되는 금전적, 혹은 기타의 이익을 고려한다면 이것도 이해상충의 일종이라 볼 수 있다. 자신 또는 배우자나 지인이 제약회사나 의료기회사를 소유하고 있거나 지분을 소유하고 있을 때 그 상품을 우선적으로 사용하는 것도 이에 해당된다. 또한 제약회사나 의료기회사의 스폰서를 받아 특정한 연구를 하여 그 회사에게 도움이 되는 쪽으로 연구결과를 발표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자신의 승진이나 학계에서의 명성 확보를 위해 자신의 환자를 본인 의사와 달리 피험자로 등록하게끔 유도하는 것도 이해상충의 일종이다. 공직에 있으면서 객관적인 지표가 아니라 정실관계에 의해, 혹은 자신의 전문분야만의 발전을 위해 행정력이나 예산을 투입하는 것도 이해상충이라 볼 수 있다. 이렇듯 이해상충의 종류는 매우 다양하며 그중에는 겉으로 쉽게 드러나는 것도 있고, 본인의 양심이 아니면 알 수 없는 것도 있다.
이해상충을 제대로 관리하지 못하면 공적 신뢰가 무너지며 개인은 물론 속한 조직에도 커다란 해를 끼치게 된다. 학연, 지연, 혈연을 통해 인간관계가 끈끈하게 이어진 우리나라에서는 개인적, 집단적으로 이해상충의 관리가 매우 어렵다. 하지만 우리나라가 정의롭고 공정한 선진국이 되고 의과대학 교수 자신의 명예와 의사직의 존엄을 지키기 위해서는 이 문제는 꼭 해결되어야 할 중요한 과제이다. 이해상충을 관리하는 방법으로는 첫째, 자신이 어떤 사안과 특정한 이해관계가 있음을 선언하는 방법, 이해상충이 예상되는 의사결정 과정에는 참여하지 않는 방법, 그리고 이해상충과 무관한 제3자의 결정을 따르는 방법 등이 있다[6]. 이러한 방법은 사안에 따라 적절하게 활용되어야 하지만, 무엇보다도 당사자의 마음과 자세가 가장 중요하다.
의과대학 교수는 임상가, 교육자, 연구자, 행정가 등 다양한 직무를 가지고 있고 각각의 역할은 상호 보완을 하는 부분도 있지만, 상호간에 갈등을 일으키는 경우도 종종 있다. 이를 적절히 다루기 위해서는 우선 다양한 직무 간에 갈등이 발생할 수 있음을 인식해야 하며, 그 다음으로 주어진 상황에서 가장 중요한 자신의 직무가 무엇인지 파악해야 한다. 그리고 그 직무의 수행 과정에서 직접적으로 영향을 받을 대상은 누구인지를 고려해야 하는데 그 대상은 환자, 학생, 전공의, 동료 의사, 간호사, 행정직원 등 다양할 것이다. 이 때 가장 우선적으로 고려해야 할 대상과 그 이유를 생각해 보아야 한다. 직무의 갈등이 불가피하다면 해를 입는 대상을 최소화하는 쪽으로 결정을 내려야 하며, 이때 취약한 대상자일수록 우선적인 배려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 결정이 쉽지 않을 때는 동료나 선배의 조언을 참고하는 것이 도움이 된다.
결 론
의과대학 교수는 일반 임상의의 직무 외에 교육자, 감독자, 연구자, 행정가 등의 직무가 겹치면서 여러 직업 중 가장 격무에 시달리고 있는 직종이다. 제대로 된 임상의사의 역할 만으로도 충분히 쉽지 않은 일인데, 이 모든 직무를 완벽하게 해 내기란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그러한 격무의 대가로 의과대학 교수가 얻는 것은 무엇일까? 예전과는 달리 높은 수입이나 사회적 명성을 기대하기는 어렵게 되었음은 분명하다. 그러나 의학전문직업성의 관점에서 보면 오히려 이러한 환경이야말로 본래의 정신을 되찾을 수 있는 소중한 기회일 것이다. 즉 자신이 하는 일을 통해서 재미와 의미, 보람을 느끼는 것이 전문직업성의 요체이다. 의사, 그중에서도 의과대학 교수직은 생계유지를 위한 직업이 아니라 도전과 성취, 자아의 성장을 도모하는 ‘전문직’이다. 의과대학 교수의 격무를 뒤집어보면, 고통을 겪는 환자를 도울 수 있는 보람과, 우리나라 최고 수준의 영재인 의대생과 전공의 등 후학을 가르칠 수 있다는 재미와, 학계와 사회에 자신의 지식과 능력으로 도움이 될 수 있다는 의미와, 평생에 걸쳐 학문과 사회적 경험을 통해 자신의 자아를 확장하고 성숙시킬 수 있다는 가치를 뜻하기도 한다. 우리나라는 급속한 근대화과정 속에서 많은 직업이 그 본래의 의미보다는 부와 명예를 지나치게 추구하면서 삶의 의미와 보람을 상당 부분 상실하였다. 그러나 명예와 부가 곧 ‘행복’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특히 전문직 중에서도 전문직인 의과대학 교수들은 본능적으로 자신의 발전과 직업적 성취에서 행복을 추구하게끔 되어있다. 그 자신 의사였던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는 “설령 행복이 신들이 보내준 것이 아니라 탁월성과 어떤 종류의 배움, 혹은 훈련을 통해 생겨나는 것이라 하더라도, 그것은 여전히 가장 신적인 것들 중 하나로 보인다. 탁월성에 대한 보상과 탁월성의 목적은 최고의 것이고 신적이며 지극히 복된 어떤 것으로 보이니까...탁월성을 획득하는 데 아주 불구이지 않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어떤 종류의 배움과 노력을 통해 행복을 성취할 수 있기 때문이다[7].”라고 말했다. 어떤 종류의 배움과 노력을 통해 탁월성, 즉 행복을 성취하는 것, 그것이 의학전문직업성의 목적이다. 그리고 많은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의과대학 교수들이 궁극적으로 추구해야 할 목적이기도 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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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bstract | |
The medical professionalism for faculty members of medical schools has some different implication from other medical professions. They have to work as educator, researcher, and manager as well as clinician. The professionalism of each duties has its own uniqueness, which sometimes causes a conflict between them. Therefore, the faculty members of medical schools have to harmonize their different tasks and duties each other, looking after the professional development through the professional life.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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