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Chapter 12. Medicare, Medicaid, and Medical Education
- WWII이후 미국 MS의 단 하나의 특징을 꼽자면, 열정적인 학문적 분위기를 꼽을 수 있을 것이다.
- 1965년 M&M의 도입과 함께 새로운 시대가 시작된다. 바로 MS의 clinical activity가 확장되면서 다른 의무까지 밀쳐낸 것이다. 이 과정에서 대학과의 관계는 약해지고, 학문적 가치에 대한 헌신은 줄었으며, 자선의 전통도 줄었다.
- The Escalation of Faculty Practice
- WWII이후, private medical insurance가 퍼지면서 MS들은 pt care의 의무를 점차 확장시키기 시작했다.
- 1965년 이전 faculty의 practice는 academic function에 비하면 적은 수준이었다.
- 1960년대 중반에 MS의 재정은 점차 빠듯해졌는데, 주된 이유는 연방 정부의 연구비를 따기가 점점 더 어려워졌기 때문이다. 연구비 총액이 준 것이 아니라 그 증가세가 감소한 것 뿐이었는데도 낙담하는 분위기가 팽배했다.
- MS재정 측면에서는 M&M을 도입한 것이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AMC는 거의 모든 service 제공에 대한 돈을 받을 수 있었고, 새로운 수입원이 생겼다.
- M&M의 뿌리는 의학 기술의 발전, 의료에 대한 수요 증가, 연방 정부의 개입 증가, 사회적 번영, 의료를 권리로서 인식하는 분위기 등등에 있다.
- M&M의 혜택은 즉각적이면서도 널리 퍼졌는데, 수백만명의 미국인들이 private health care 의 혜택을 받게 되면서 그 전보다 훨씬 많은 의료 서비스를 이용할 수 있게 되었다.
- Medicare는 의사들에게 노다지 같은 것이었는데, private insurer도 Medicare의 결정을 따랐기 때문에 M&M이 동시에 도입되긴 하였어도 AMC에 더 영향을 준 것은 Medicare였다.
- Medicare의 통과 이후 faculty는 그들의 clinical work을 늘렸다. Faculty가 보는 많은 환자들이 교육 목적으로 활용되곤 했지만 faculty 진료에서 학생이나 House staff교육과 관계된 시간은 점점 감소하였다.
- Faculty practice에 대한 행정적 vehicle은 “faculty practice plans”라고 불리는 것이었는데, 이는 MS의 full-time과 voluntary faculty의 organized group practice였다.
- 교수들마다 특정 institution의 필요에 맞춰서 plan을 구성했기 때문에 어떤 두 faculty의 practice plan도 동일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제공하는 서비스가 무엇이든 간에 full-time faculty에게는 practice plan이 요구되었고, 모든 practice plan이 모든 clinical income을 커버하였다.
- M&M이 도입되는 이듬해부터 faculty practice의 성장은 놀라울 정도였다. 1980~1981년에 이르러서 진료수입(practice income)은 MS 수입중 가장 큰 부분을 차지하는 것이 되었다.
- Full-time faculty에게 faculty practice의 증가는, (1)MS들이 여기서 얻은 수익을 '보상'으로 사용했기에, 소위 노다지 같은 것이었다.
- 급격하게 오르기 시작한 faculty salary는 가장 뛰어난 학교들 사이에서도 예외는 아니었다.
- 또 (2)다른 진료수입의 사용처는 academic activity의 지원이었다. 남는 진료 수입을 scientific and professional development에 사용하였다. 건물을 지었고 새로운 장비를 구입했다. 진료는 MS의 핵심 사업이 된 것이다.
- 부속병원은 새로운 '번영의 시대'에 들어섰다. M&M을 청구했고, GME에 쓰이는 직접적인 비용과 house staff를 유지하는데 필요한 간접적인 비용을 받았다. 1970년에 이르러서 부속병원은 수천만 달러를 운용하는 기관이 되었다.
- 진료 수입을 사용하는 것에 대해 많은 문제가 있었는데, 얼마의 돈이 faculty salary로 쓰일지, 얼마의 돈이 연구비로 쓰일지 등을 정해야 했다. 많은 기초과학자들은 clinical faculty와 자신의 salary가 차이가 나는 데에 대해서 기분나빠했다.
- 진료 수입의 증가로 인해 MS에게도 많은 변화가 요구되었는데, 워낙 큰 돈을 다뤄야 하다 보니 더 나은 행정적 수단들이 필요했다. 또한 국가적으로 faculty practice plan을 관리하는 것 자체가 하나의 까다로운 관리직이었다.
- 여기에 추가로 M&M은 AMC들이 기존에 유지하고 있던 자선 목적(charitable mission)의 상실을 가져왔다. Charity에 대한 요구는 65세는 넘지 않았으면서(Medicare는 안되면서) 돈이 그렇게 적지는 않지만(Medicaid는 안되지만) 민간 의료보험에 가입할 여력도 안 되는 사람들이 수백만이었다. 역사적으로 AMC는 상당한 무료 진료를 제공해왔지만 이제는 service의 판매자가 되었다.
- Medicare의 발전에 따라서 medical faculty는 그 전보다 자신들의 임무가 더 많아졌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 Own nursing home facilities를 짓고, department of community medicine을 만들고, prevention과 health promotion에 앞장섰다.
- Faculty 진료가 늘어나면서 1960년대의 재정적 우려는 사라졌고, 엄청난 진료 수입 덕분에 research funding의 갑작스런 변화에도 흔들리지 않을 수 있었다.
- 어떤 사람은 "서비스에 대한 지불 권한은 서비스에 대한 통제 권한과 같다"라며 우려했지만, 그 당시에는 이러한 관점에 크게 신경쓰지 않았고, MS들은 그저 엄청난 수입을 즐기고 있었다. 그러나 언제까지 이런 시스템이 그들에게 웃어줄지는 모르는 일이었다.
- Toward a One-Class System of Care
- 대부분의 서양 국가와 같이 미국에서도 health care system에 두 개의 층위(class)가 있었다. 하나는 사적 영역(Private health care)이고, 하나는 "clinic" mode라고 불리는 charity medical service 였다.
- 그러나 WWII이후 시민권 증진 운동의 일부로서,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자세가 근본적으로 달라졌다. 그들은 이 two-class system에 대한 의문을 제기하기 시작햇다.
- 이러한 맥락에서 M&M은 health care에 대한 재정 공급 역할 뿐만 아니라 social revolution의 정점과 같은 것이었다. 분리된 시스템은 곧 불평등을 뜻했다.
- M&M의 통과는 Academic health center로 하여금 모든 환자에게 예의를 갖추고 그들의 존엄성을 존중하는 방향으로 변하게 하였다.
- 교육적 측면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Medicare pt가 private pt와 동등한 대접을 받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는 즉, senior physician까지 이들 환자를 담당해야 함을 의미하기도 했다.
- 의학교육자들은 딜레마에 빠졌다. Medicare가 공급하는 fee는 좋았지만, Medicare 환자를 Private patient로 전환하는 과정에서 ward service가 손상될 것을 우려하게 되었다.
- 변화하는 환경에 따른 Ward service에 대한 위협이 새로운 일은 아니었다. WP 숫자는 1940년대부터 줄고 있었다.
- 결국 private medical care를 받는 사람도 수혜자가 되면서, graduate training system역시 손상되지 않게 하는 식으로 M&M 당국과 협의하였다. 이렇게 될 수 있었던 것은 HO로 하여금, 기록상으로는 'private physician'인 주치의에 상당하는 수준으로 pt management에 대한 책임을 가질 수 있게 했기 때문이다.
- 일부 병원에서는 주치의가 R의 progress note에 countersign 해야 했다.
- 이러한 방법은 학부 교육과 house staff training에 손해가 없는 것이었기에 의학교육자들은 시스템에 대해 만족할 수 있었다. 특히 private physician이 없는 M&M환자들은 house officer가 이전에 ward patient를 봤던 것처럼 담당할 수 있었다. 사실상 가장 큰 변화는 주치의가 병원 chart에 그들이 같이 했다는 기록을 남기게 된 것 뿐이었다.
- 의학교육이 상대적으로 상처받지 않았다는 것은 곧 진정한 의미의 one-class system이 도입되지는 못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 One-class system을 향한 움직임은 의학교육에 있어서 근본적인 윤리적 딜레마를 야기했다. House officer를 위해서는 환자에 대한 책임을 쥐어주는 것이 옳겠으나, 개개인들은 가장 잘 훈련받은 의사에게 진료를 받고 싶어하는 것이 당연했다. 여태까지는 '가난한 사람을 진료비 대신 교육에 활용한다'라는 간단한 규칙이 있었다. 그러나 이는 평등주의를 실현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가난한 사람들을 이용한 계약에 불과했다.
- 어떻게 의학을 효과적으로 가르칠 것인가에 대한 문제는 의학교육자들 사이에서 지속되었고 다양한 시도가 이뤄졌다. 어떤 사람들은 Private patient가 교육에 활용되는 것을 '특권', '기회'로 여겨야 한다고 했고, 어떤 사람들은 PP에게는 윤리적 의무가 있다고 했으며, 일부는 PP를 설득해야 한다고 했다.
- The Inversion of University Ideals
- 20세기 첫 2/3동안 미국 의학교육에 대한 한 가지 주제가 있다면 바로 MS를 진정한 대학의 한 branch로서 만드는 것이었다.
- 잘 훈련받은 clinician이 실용적인 지도를 할 수는 있겠지만 미래의 의학 지식은 "fertile mind와 scientific preparedness를 지닌 사람"의 손에 달려있다고 생각했다.
- 또 다른 중요한 mission은 patient care를 담당하는 것이었다. 활발한 진료가 없이는 MS들은 가르치지도 연구를 하지도 못할 것이었다.
- 아무도 관리를 하지 않는다면 pt care는 faculty 들의 다른 임무에 치일 것이다. 진료는 상당한 시간과 노력을 들여야 하는 일이었다. Medical practice가 어느 정도나 academic pursuit과 연관이 되는가는 과마다 달라서 외과와 같은 경우는 손쉽게 연관이 되곤 했으나, 내과나 소아과 같은 경우는 clinical work이 academic productivity에 기여하는 것이 적었다.
- 미국 MS들에게 가장 어려운 임무 중 하나는 academic mission을 유지하면서 동시에 pt care 부담을 줄여나가는 것이었다. WWII이후, AMC에서의 치료를 받기를 원하는 보험환자들이 늘어나면서 medical faculty의 부담은 그 어느 때보다도 늘어나 있었다.
- 그러나 1965년 이 당시까지 MS들은 그들의 university duty도 놓치지 않고 있었다. 이것이 가능했던 것은 많은 학교에서 voluntary staff의 도움을 많이 받고 있었기 때문이다. 학교의 운영비용을 충당하기 위한 진료 수입의 압박을 받고 있지 않았다.
- 그러나 M&M의 통과는 academic function과 service function의 균형을 바꾸어 놓았는데, Medicare로 인해서 기존에 교육의 목적으로 활용되고 있던 많은 charity pt들이 이제는 private practitioner 및 community hospital의 관심을 끌기 시작했다. 이에 따라 faculty practice를 높일 것이 의회에 의해 강제되었다(congressionally mandated).
- 그러나 MS들이 이러한 새로운 의료전달체계에 적응하는 데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Pt care의 양이 증가했다.
- 학교에 따른 차이는 있었지만, Faculty가 private care에 신경을 쓰면서, academic mission을 동시에 추구하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님을 깨달았다.
- Clinical practice의 증가로 인한 변화는 JHMS에서도 확연히 관찰되었는데, 1956년 presidency를 했던 Milton Eisenhower는 임상 진료가 학문추구를 갉아먹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 M&M이 도입된 이후 MS의 성장은 눈부셨다. 그러나 대부분의 성장은 학문적 영역이 아닌 임상진료에 대한 것이었고, 돈을 더 벌기 위해서는 full-time faculty가 더 필요했다.
- University ideal을 제대로 추구하지 못하는 것은 faculty practice plan을 통한 수입이 faculty salary를 높여주는 것에 쓰였다는 것에서도 잘 드러난다. Faculty는 주된 수입원이 되었고, 그에 맞추어 private practitioner 만큼의 수입을 받는 것이 당연하다고 여겼다.
- MS이 health care delivery와 밀접한 관계를 맺으며 많은 전통적 관계들이 무너졌다. (1)우선 voluntary faculty와 관계가 악화되었다.
- 또한 (2)scientific branch와 clinical branch 사이의 관계가 나빠졌고, (3)MS과 대학의 다른 과들과의 관계가 나빠졌다. AMC는 점차 스스로 유지될 수 있는 조직이 되었으며, 대학의 나머지 과를 모두 합한 것보다 더 많은 예산을 운용하게 되었다.
- Faculty practice가 증가하면서 MS는 노골적으로 community doctor와 경쟁하기 시작했다.
- Faculty practice의 증가로 인한 영향을 평가할 때 AMC가 그들의 학문적 지향을 잃어버렸다고 말하는 것은 옳지 않다. Academic value는 분명히 유지되었고, 승진이나 보상 정책에서 뚜렷하게 드러난다.
- 그럼에도 MS가 health care delivery system에서 확고한 자리를 잡으면서 대학과의 유대관계는 약해졌다.
- Abraham Flexner는 faculty가 수입(earning power)를 어딘가 의존하기 시작하면 academic medicine의 자리는 사라진다. 라고 하였다.
- M&M이 도입되면서 patient care가 주인이 되었고, 교육과 연구는 그 아래 복종하는 구도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