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근대 의료 건축물에 관한 연구

한동관*, 류창욱**, 고상균†, 정재국†, 문종윤‡, 박윤형‡






1. 서론

100년이 넘는 한국 근대 의료사 속에 존재했던 병·의원 건물들은 이 땅의 근대건축의 상당수가 그러하듯 한국전쟁의 참화로 인해 대부분 파손되어 그 원형을 찾기 어려운 실정이다. 그나마 얼마 남아있지 않은 건축물들도 급격한 경제개발과 산업화 과정을 거치면서 상당수의 건물들은 철거되거나 보수과정에서 원형이 훼손되어 당시의 모습을 찾아보기 어렵게 되어가고 있다. 병·의원 등 의료관련 주요건축물들은 의료기관이란 특성상 대부분의 건물 위치가 도심이었다. 지방의 경우에도 지역 내 요지에 자리하고 있어 각종 개발정책의 정비대상에서 우선순위가 되는 곳에 있었기 때문에 대부분 근대사에서 사라졌다. 또한 드물게 아직까지 남아있는 건축물들도 몇 차례 주인과 용도가 바뀌는 동안 심하게 원형이 훼손된 경우가 대부분이며 일부 원형을 유지하고 있는 현존 건물들도 사유재산이란 점에서 언제 철거되고 변형될지 모르는 상황에 놓였다.


건축사적으로 개화기 의료관련 건축물들은 외국공관 및 학교와 더불어 우리나라 근대건축의 효시로 보고 있음에도(서치상, 2006: 76-9) 의료관련 건축물은 사적 4개소를 비롯하여 몇 점의 문화재급 건축물과 2001년 7월부터 시행한 문화재등록제도에 의해 명맥을 유지하고 있는 등록문화재가 10여 점 정도 남아 있을 정도이다.


지금까지 근·현대의료가 도입된 후 근대 의료관련 건축물에 대해 종합적으로 정리된 기록은 찾아보기 어렵다. 다만 문화재청이 발간한 의료기관 관련 단독보고서는 대한의원과 관련하여 『대한의원 본관 근대문화유산기록화조사보고서』(2002)와 『대한의원본관 실측조사보고서』가 있고(그림 2) 『애양교회 및 애양병원 근대문화유산기록화 조사보고서』(2004), 그리고 『대구동산병원 구관 근대문화유산기록화 조사보고서』(2005) 등 세 기관의 보고서가 있을 뿐이다. 문화재청은 2008년 의료분야 유물 유적을 중심으로 『근대문화유산 의료분야 목록화 조사보고서』를 발간하고, 2009년 10월 이중 유물 6건에대해 등록문화재로 지정하였다. 근대 의료건축물에 대해서는 지난 2004년 전국 시도가 실시한 관내 근대건축에 대한 실태조사와 2008년 문화재청이 실시한 ‘비지정 근대건축물에 관한 실태조사’ 및 부산발전연구원 부산학 연구센터등이 보고한 「부산건축의 역사와 미래」(2006) 등에서 일제강점기 부산의 근대건축물 조사 내용에 일부가 포함되어 있는 정도이다.


우리나라 문화재보호법에서는 지난 2001년 7월에 등록문화재제도를 도입하였다. ‘등록문화재’의 등록기준은 건설된 후 50년 이상 경과되고 우리나라근대사에 기념이 되거나 상징적 가치가 큰 것과 그 이후 형성된 것이라도 멸실, 훼손의 위험이 크고 보존할 가치가 있는 건축물 등이다(문화재보호법 시행규칙 제35조의 2). 문화재청의 문화재 분류기준에 의하면 ‘사적(史蹟)’은기념물 중 유적·제사·신앙·정치·국방·산업·교통·토목·교육·사회사업·분묘·비 등으로서 중요한 것으로 수원화성, 경주포석정지 등이 이에 속하는데, 근대 병·의원 관련 건축물 중 구 서울대학교병원본관(대한의원본관, 사적 제248호), 구 경성제국대학 의학부 본관(사적 제278호), 구 대구의학전문학교 본관(사적 제442호), 구 도립 대구병원(사적 제443호) 등 모두4개 건축물이 있다. 의료기관 관련 건축물 중 가장 많은 수를 점하는 ‘등록문화재’에 대해 문화재청은 ‘지정문화재’가 아니면서 근·현대시기에 형성된 건조물 또는 기념물이 될 만한 시설물 형태의 문화재 중에서 보존가치가 큰 것’이라고 밝히면서 예시로 태평로 구 국회의사당 등을 적시하고 있다.


이외에도 문화재청은 ‘근대문화유산’의 개념과 범위에 대해 ‘개화기’를 기점으로 하여 ‘해방 전후’까지의 기간에 축조된 건조물 및 시설물 형태의 문화재가 중심이 되며, 그 이후 형성된 것일지라도 멸실 훼손의 위험이 크고 보존할 가치가 있을 경우 포함될 수 있다고 밝히고 있는데 ‘사적’을 제외한 대부분의 근대 병의원이 이에 해당된다.


근대건축의 시기구분 중에 후반부로 보는, 근대 3기에 지어진 건축물인 서울 중구에 소재한 ‘구 서산부인과’ 건물과 같은 경우는 건축학계의 거목 김중업의 작품이라는 점에서 근대사나 건축학적으로 주목받고 있었는데 이러한건축물도 의료계에서는 아직 논의되지 않고 있다(정인하, 2003: 119-22). 따라서 의료사적으로 중요한 건축물을 사라지기 전에 기록으로 남기는 것이 필요한 시점이라고 생각한다.


2. 연구내용 및 방법


연구대상 건축물은 2003년 이후 지방자치단체와 문화재청이 실시한 전국주요문화재 및 비지정문화재 중에서 현존하는 의료관련건축물을 대상으로하였다. 사적, 시도문화재 또는 등록문화재로 지정된 건축물 중 의료기관 관련 건축물과, 미등재 근대건축물 중 의료관련 시설로 확인된 경우, 학회지에게재된 의료기관 건물과 의사(醫史) 관련 주거 및 부속건물과 기념물 등을 조사대상으로 하였다. 아울러 지방문화재 등으로 지정된 의사출신 인사의 생가및 가옥 등도 본 조사에 포함시키고 기타 기념물 및 의료사적으로 주요한 건축물들은 건축 관련 학술잡지를 기초자료로 하였고 각종 언론매체의 기사 중의료관련 사적지를 포함하였다.


자료로는 전국 시도지방자치단체가 조사한 『근대문화유산자료목록화보고서』(2004) 중 국가와 시도가 지정한 문화재와 등록문화재 그리고 비지정문화재 중 시도가 의료시설로 분류한 건축물(표 1)과 2008년 문화재청이 실시한『비지정 근대건축물 조사보고서』 I·II·III권, ‘의료시설’로 명기한 기관과 기타 건축학회지 및 대학의 건축 관련학과의 논문(석·박사 학위논문 포함)등전문가에 의해 검증된 근대의료관련 시설물을 연구대상으로 하였다.


연구대상 건축물에 대하여 현지조사를 실시하였다. 건축물에 대한 건축학적 조사와 인문학적 조사를 병행하여 해당 의료관련 건축물의 당시 지역사회내에서 역할과 위상에 대한 조사를 포함시키는 것을 원칙으로 하였다(주남철, 2000: 113-5). 의료기관의 명칭은 당시 대부분의 기록이 의원과 병원을 구분하지 않고 혼용하였으므로 이번 조사에서도 당시의 표기에 따라 정리하였고, ‘의료기관’은 의료 및 그와 관련된 사물(부속건물 등)을 포괄하는 의미로,‘병·의원’은 병원이나 의원을 의미하는 용어로 사용하였다.


3. 근대 병·의원의 의료사 및 건축사적 의미


1876년 조선은 개항을 통해 외부세계와 소통을 꾀하게 된다. 그러나 이 소통은 주체적인 것과 거리가 있다. 비록 모양새를 갖추기는 하였지만 주체성을상실한 소통이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개항은 하나의 획기적인 사건임에 틀림없다. 그래서 이 시기를 근대의 출발점으로 보기도 하는 것이다.


건축사에 있어서도 개항은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이 시기에 들어와 소위근대적인 건축물이 들어서기 때문이다. 유럽을 중심으로 유행하던 건축양식이 우리의 땅을 차지하기 시작한 것도 이 때이다. 그러나 서구의 건축양식은전적으로 우리가 동경하여 들여오거나 본받기 위해 수용한 것이 아니다. 건축사는 외세에 의해 불가피하게 진행된 서구화의 영향을 받게 된 것이다. 이같은 사실은 우리나라 근대사에서도 인정하고 있는 것으로 1880년대 이 땅에지어지기 시작한 서양식 건축은 사실상 일본인들의 영사관 건물로 시작되었다고 밝히고 있는데(국사편찬위원회, 2001: 296-302), 이 일본영사관 건물들도 정통적인 서구건축이 아니라 일본인들에 의한 절충적 형태인 의양풍(擬洋風)의 건축물들이다.


하지만, 조선정부를 포함한 민간에서 시대의 새로운 요구를 수용하고자하는 적극적인 노력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근대식 무기를 만들기 위한 번사창(飜沙廠, 1884년), 서양식 주화를 제조하기 위한 전환국(典圜局, 1885년),1897년 대한제국 선포 이후 경운궁 안에 건설한 정관헌, 돈덕전, 구성헌, 중명전, 석조전 등의 서양식 건물, 한성 중심부의 도로 및 하천의 정비, 전차의 운행, 수도시설을 설치하는 등 근대도시로서의 면모를 갖추고자 정부차원의 노력이 있었다. 또한 민간에서도 단체 혹은 개인적으로 서양식 혹은 한양절충적인 건축물들을 상당수 건설하였다.


1905년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제는 강제로 을사보호조약을 체결하여 외교권을 박탈하면서 우리의 역사는 식민화의 길로 접어들게 되고 건축물의 식민화도 진행된다. 1906년 통감부가 설치되면서, 대한제국정부 산하의 건설조직으로서 탁지부 건축소를 신설하여 1910년 한일합방까지 대한제국정부가주도하는 근대건축의 건설을 담당하게 된다. 따라서 우리나라 근대건축사의시기구분에서 근대1기 후반기가 된다. 그러나 건축소의 업무는 일본인에게장악되고 소속기사들도 대부분 일본인으로서 일본식건축에 경험이 없는 조선인들에게 권한이 있을 수 없었다. 일본식건축은 서양식 건물외관에 일본식목조기법을 절충하거나 혼용한 의양풍으로서 정통적인 서구양식은 아니다.


건축은 설립주체(건축주)의 성격(기술력, 경제력, 이념, 시대정신 등)에 따라, 양식이나 형식 등이 달라지는 것이 일반적 양상이다. 하지만, 의료시설과같이 특수한 기능을 수용하는 건축의 경우에는 본연의 기능에 충실할 수밖에없게 된다. 일제의 식민지 침략적 욕심을 드러내는 시기의 대한의원도 소위‘제국의료(帝國醫療)’1)를 펼쳐 제국주의를 정당화하기 위한 시설이라 할 수있지만, 건축적으로는 의료시설로서의 기능에 충실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렇듯, 건축물의 용도 중에서 병원이란 특정한 기능을 수행하는 목적을가진 건축물임에 틀림없으나, 근대초기의 병원건축은 병원기능의 특수성을나타내는 외형적인 특징은 특별히 보이지 않는다. 그렇기에, 서구의 선교사들이 병원을 설립할 때에 일반 민가에서 시작하는 것이 가능했다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해, 일반적인 건축물의 형식에 의료라는 특정기능을 대입시킨 건축물이라는 것이다.



1) 조선의 민가를 이용한 초기 병·의원


광혜원(제중원)은 갑신정변 때 살해된 재동의 홍영식의 폐가를 개조하여개원한 것으로 당시 금액으로 약 1,000불이 들었다. 이 비용은 전액 조선정부에서 제공하였으며 1년 운영경비 300불도 정부에서 지원하기로 하였다. 건물은 건평 약 43평에 40명의 환자를 수용할 수 있는 규모였다. 병원 종사자중 하급관리들이 행정적인 업무를 맡았고 선교의사들은 무보수였다. 극빈자들을무료로 진료하였고 상류층 환자들이 많았다. 재동 제중원의 내부구조와 의료기관으로서의 기능은 각 건물의 용도를 통하여 구체적으로 이해할 수 있다.


알렌이 직접 그린 평면도를 보면, 전면에 진료실과 약국 등이 배치되며, 이와 별도로 후면에 병실들이 배치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배치방식은 이후의 세브란스병원이나 대한의원의 배치방식과 유사한 것으로서, 진료시설과 입원시설을 구분하는 형식이다. 즉, 집의 구조는 8개의 마당을 중심으로‘역ㄴ’자 형태로 한옥이 배열되어 있어 독립적인 공간을 형성하면서도 중앙의건물들이 서로 연결되어 있는 전형적인 고관대작의 저택이다. 행랑채에 전염병실, 바깥채에 대기실, 진찰실, 수술실, 약국, 안과병실과 암실, 사랑채에 일반 병실, 예방접종(종두)실, 안채에 여자병실, 별채에 독방들을 두었으며 규모는 작아도 종합병원 형태를 갖추었다. 1886년 제중원 의학당을 개설하고의학생 16명을 교육시켰다. 1887년에는 환자가 많아져서 구리개(銅峴, 을지로입구 외환은행자리)로 이전하였다(박형우, 2008: 60-6)


.선교의사들에 의해 문을 연 초기 근대 의료기관들은 대부분 선교사가 거주하면서 주택의 일부를 개조하여 시약소, 또는 진료소의 형태로 의술을 펴기시작하였으므로 처음부터 근대 의료기관 건축물의 형태를 갖춘 것은 아니었다(이덕주, 2009: 85-9). 의료선교사들은 처음 내한하여 선교를 위한 의료활동을 펼칠 장소로 당시 조선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초가 등 민가를 개조하여의료기관으로 사용하였는데 그것은 도시와 지방을 막론하고 크게 다를 바 없었다(이규식, 2008: 111-19).





예를 들어 경북지역의 선교를 위해 대구에 온 선교의사 존슨은 1899년 7월8일자 편지에서 진료소로 사용할 초가(흙벽방 두개의 초가집 크기는 7×7피트의 작은 방이지만 도배를 해서 깨끗함)를 준비해 두었다고 썼다. 또 평안도순안에서 의료선교사업의 일환으로 설립되어 현재의 서울위생병원의 전신이된 진료소는 초대원장 노설(Riley Russel)이 1909년 초가 한 채를 40원(20불)에 구입하여 개설한 것이었다(이만열, 2003: 228-31). 메타 하워드의 후임으로 보구여관을 맡은 로제타 셔우드는 1890년 한옥의 구조를 약간 고쳐 병원으로 만든 보구여관을 보고 자신의 예상보다 시설이 좋다고 기록하였다. 전라북도에서 의료선교를 시작한 의사 드류는 1895년 군산에 도착하여 선착장 인근수덕산 기슭 밑 군산진영 터에 조그만 초가집을 매입하여 병원을 개설했다.이러한 예에서 볼 수 있는 바와 같이 초기의 선교병원은 사실상 병원이라기보다는 진료소에 가까웠고, 따라서 일반 주택을 매입하여 활용할 수 있었다.






2) 세브란스 병원


우리나라 근대건축 변천과정에서 커다란 영향을 끼친 일본식 의양풍 건물이 근대건축사에서 양적인 주류를 이루었다. 하지만 구미(歐美) 미션계통의건축 역시 서양건축·근대건축의 본 고장인 구미인이 직접 소개하였다는 점에서 우리나라 근대건축사에 순수 서양식 건축으로 한 계통을 이룬다. 건축사적으로 서양식 건축물의 원형을 비교적 제대로 간직한 프로테스탄트계통의 건축물로 배재학당, 이화학당, 정동교회와 옛 세브란스병원 등이 꼽힌다(99건축문화의 해 조직위원회, 1999: 28).


1900년대 서양식 건축양식을 따라 설립된 의료기관 건물 중 전형은 1904년서울역 건너편에 세워진 옛 세브란스병원을 들 수 있다. 중앙에 페디먼트(박공)의 파빌리온, 좌우양단에 8각형 탑(turret)을 둔 지하 1층 지상 2층의 붉은벽돌건물(윤일주, 1966: 72-3)로 길이가 약 24미터, 폭이 약 12미터였다. 그런데 지하층은 천정이 높고 채광이 좋았기 때문에 실질적으로는 3층 건물이라고 할 수 있다. 40병상 규모로서, 설계는 캐나다인 고든(H. B. Gordon)이, 시공은 중국인 장해리(Harry Chang)가 맡았으나 난방시설, 배기시설과 상하수도시설은 모두 경험이 없어, 설계사 겸 건축감독인 고든과 선교의사들이 직접 하였다. 지하층은 일반외래로 사용되었고, 1층은 의사사무실을 비롯한 각종 공조시설 및 치료시설, 그리고 여자병실이 있었다. 2층에는 수술실이 있었다. 이 건물이 완공된 직후 지하층을 가진 길이 12미터, 폭 10미터의 별도의단층 건물이 완공되었다(박형우, 2006: 123-5).


서양식 건축물은 이밖에도 민족자본이나 기독교계통의 교육시설과 의료시설 등이었는데 이들은 공통적으로 벽돌을 주재료로 사용하고 일부 석재를 정삭재로 사용하면서 비교적 안정되고 소박한 외관을 갖추어서 일본 총독부가주관하여 건축한 관청 및 공공단체 등의 건물이 갖고 있던 권위적 외관과 대조를 이루었다.




3) 대한의원


1905년 을사보호조약으로 대한제국의 실질적인 주권이 상실되고 이듬해 2월 일제가 통감부업무를 개시하면서 관청건물들을 신축할 전문기구로 「건축소관제(建築所官制)」를 공포하고 탁지부 건축소(1906년 9월~1910년 8월)를설치하였다. 이후 우리나라에 건립된 관립의료기관들은 거의 모두가 탁지부건축소의 주도로 건축되었고, 이 업무는 한일합방이 되면서 그대로 총독부 산하 소관기관으로 이관되었다.


탁지부 건축소가 1907년 3월부터 1909년 6월까지 생산한 약 8,000건의 기록물중 건축공사에 관한 기록물은 3,200여 건에 이르렀다. 이는 일제가 식민지 통치를 위한 인프라를 구축하기 위한 건축이 활발하게 전개되었기 때문인데, 이 시기에 대부분의 관영 의료기관 건축도 이루어졌다(행정자치부 국가기록원 수집관리과, 2004; 2010). 이 시기 탁지부 건축소 주관으로 조성된 건물들은 벽돌과 석재, 또는 목재를 건물규모에 따라 적절히 혼용하여 지어졌으며 대개 2층 정도의 작은 규모였으나 그 후 관청건물들은 권위적 외관을 강조하는데 손색이 없었다. 대체로 건물외관은 좌우 대칭을 살리고 창호의 형태나 위치가 건물전체와 조화를 이루도록 하여 안정된 비례를 살린 모습이었다.전반적으로 서양의 르네상스나 바로크 풍의 외관을 모방하는 경향이었다. 그가운데 현존하는 건물은 서울대학교병원 의학박물관(구 대한의원본관, 1907년), 방통대 역사박물관(구 공업전습소, 1909년), 광통관(구 천일은행, 1909년)이다(한국건축역사학회, 2006: 44-8).


통감부시절 탁지부건축소에 의해 건설된 대한의원은 대한제국정부가 건립하고 운영하였지만, 실질적으로는 일본인에 의해 건축되고 운영된 시설이다. 이 시설은 총독부의원, 경성제대의대부속병원 등으로 변화하면서 일본의대학병원 운영 및 병원계획을 가장 먼저 도입 적용하였다. 즉, 본관과 병동을구분하는 평면배치방식이며, 이후에 외래진료부가 별동으로 떨어져 나오는배치방식을 채택하는 등, 일본국내의 변화양상과 맥을 같이 한다. 이후 일제에 의한 공공병원이나 대학부속병원 등을 계획할 때는 일본국내의 유사시설을 견학하여 그것을 바탕으로 계획하였다. 특히, 각 지역별로 도립병원을 식민지 통치수단의 하나로 건립하였는데, 이 병원들은 유사한 건물형태와 내부평면을 갖고 있게 된다. 이러한 의료시설은 일제의 의료시설의 본보기로서민간의료시설에도 영향을 미치며, 해방 후 60년대까지 한국의 의료시설로 계속 사용되었다.


대한의원은 1907년 3월 대한제국칙령 제9호에 따라 종래의 내부소관의 광제원, 학부소관의 관립의학교, 궁내부의 적십자병원을 흡수 통합한 병·의원으로, 본관(사적 248호)은 연건평 1,355.3 m2(410평)의 2층 벽돌구조로 1908년 11월 준공되었다. 일본에서 얻은 차관 중 10만원을 건설비로 우선 지불하였고 총 293,566원이 책정되었다(박형우, 2008: 317-20). 대표적인 관립 병·의원으로 당시에 규모가 가장 컸으며 연차적으로 일반병동 6개와 전염병 격리병동 1개 그리고 조선인의 치료실로 구성된 온돌식 병동까지 모두 8개 병동을 갖추게 되었다.


평면은 현관을 중심으로 좌우 대칭이며 또한 건물의 정면과 후면도 각각대칭을 이루었다. 현관에 아치형 출입구의 포치(porch)를 설치하고 남쪽 정면에 계단을 두어 현관문에 오르게 하였으며 동서 양쪽으로 경사를 두어 자동차가 현관문 앞에 닿게 하였다. 현관 안으로 들어서면 넓은 현관 홀을 중심으로 좌우에 방들을 배치하였는데 동서로 길게 난 중 복도를 중심으로 전면양쪽으로 두개의 방과 끝부분에 돌출된 큰방을 두었다. 현관 계단실에서 2층에 오르면 기본 골격은 1층과 같다. 입면은 중앙에 시계탑을 우뚝 세우고 좌우 대칭되는 2층 벽돌 건물이다. 지붕은 우진각 형에 왕대공 지붕틀로 함석마감 했으나 현재는 동판을 덮었다. 건물 정면 양쪽의 돌출된 방 전면에 박공면(pediment)을 형성하고 2층 창틀은 르네상스말기 이탈리아 동북지방의 파라조(Palazzo)궁에 널리 쓰이던 베니스식이다. 화강암을 곁들인 튜더(Tudor)왕가의 1층 아치창틀, 수평아치의 2층 창문과 화강암 하인방 그리고 벽체의 화강암 돌림띠로 모양을 살렸다. 시계탑 꼭대기는 벌버스 돔(bulbous dome)으로 장식하고 그 아래 네모서리에 쌍원주의 드럼(drum)부 등 화려한 장식으로처리하여 바로크(baroque)풍의 건물로 전체적인 형태는 기념성이 강조되는고전주의적인 특성을 갖고 있다. 탁지부건축소에서 설계와 감독을 맡았고 일인(日人) 기사 야하시(矢橋賢吉), 구니에다(國枝博) 등이 설계하였다(국사편찬위원회, 2000: 302-8).


그 후 경술국치 100년이 되는 2010년 ‘건축답사모임’에서 한국역사문화정책연구원 대표는 여러 건축 양식이 혼합된 잡종교배 건물로서 중간에 세운 시계탑과 우측 부속건물 천장의 돔 형태, 아치형 출입구 등은 일본 제국주의의권위적 지배를 상징하고 있고, 건물 전체적으로 네오바로크 양식이지만 시계탑부분은 비잔틴 풍, 벽면과 장식은 르네상스 풍, 아치형 출입문은 노르만 풍으로 볼 수 있다고 하였다(김란기, 2010. 3. 29).





4) 일제가 세운 근대병원


우리나라 국기기록원에 소장 중인 병·의원 본관건축 계획안을 도면 작성시기를 기준으로 살펴보면 대략 1, 2, 3기로 구분할 수 있다. 

      • 제1기는 자혜의원 설치의 근간이 되는 「자혜의원관제(慈惠醫院官制)」가 공포되는 1909년부터 1910년대 중반까지로, 전국적으로 단층 목조의 자혜의원이 근대의료시설의 초기적 형태로서 설계되었다.
      • 제2기는 외래부와 부속진료부가 체계화되면서 중층 이상의 본관 계획안이 등장하는 1930년대 초까지의 시기이며 
      • 제3기는 진료과의 설계가 세분화되고 철근콘크리트 구조가 사용되면서 4층 건물설계 등이 등장하는 1930~40년대의 시기이다. 이를 건축도면을 중심으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국가기록원이 소장하고 있는 도면을 통해 우리나라 관립의료기관의 규모와 건축사적 의의를 살펴보면, 

    • 제1기에는 자혜의원이 본격적으로 등장한1910년을 전후한 시기로서 대체로 규모가 작은 건축 계획안을 사용하였다.초기에 설립한 청주자혜의원을 비롯하여 공주자혜의원과 제주자혜의원의 본관건축 계획안은 모두 단층 목조건축물로 설계되었고 입면은 비늘판벽으로마감되었으며 내부에는 한두 개의 진찰실만 설계되어 있다. 현관을 중심으로진찰실과 대합실의 진료부를 함께 두었고 사무실, 원장실, 약국 등의 관리시설을 반대쪽에 두었다. 수술실과 병리시험실, 화장실, 소사실(小使室)을 별동으로 구성하여 복도로 연결한 것이 특징이다. 즉, 목조건물로 설계하고 수술실, 화장실 등이 본관과 분리된 것인데, 이는 1910년대 조선총독부의 다른 시설 계획에서도 확인되는 공통적인 현상이라 할 수 있다. 이는 일본의 의료용건물을 한국에 거의 그대로 이식한 것으로 우월하다고 생각하는 일본의료를가져온 것과 같은 의미이다. 1910년에 개원한 평양자혜의원은 대한제국의 궁궐시설인 풍경궁(豐慶宮)을 점용하였기 때문에 전통목조의 전각(殿閣)을 병원시설로 이용하였다.
    • 제2기에는 이전 시기의 본관계획과 달리 구조재료로 벽돌이 주로 사용되었으며, 형태상으로도 2개 층 이상의 계획안들이 설계되기 시작하였다. 입면에서는 벽돌의 미려한 외관을 표현하였고, 내부의 실구성에서도 진료과목별공간들이 세분화하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대구자혜의원, 나남자혜의원, 함흥자혜의원의 본관과 같이 전체의 일부분에만 2층을 구성하는(부분 2층) 과도기적 형태에서, 광주자혜의원, 수원자혜의원, 해주자혜의원의 본관과 같이1층과 동일한 규모를 갖는 2층(동일 2층) 계획안으로 발전해 나갔다. 다만,1930년대 초반에 계획된 원산부립병원 본관과, 강원도립 철원의원 본관은 각각 부분 2층과 동일 2층의 본관으로 계획되었는데, 이러한 점을 볼 때 각 병원에서 필요한 공간에 따라 계획안은 유동적으로 적용되었음을 유추할 수 있다. 층별 구성을 살펴보면, 부분 2층 본관과 동일 2층 본관에서 모두 동일하게 1층에는 각 과별로 구분된 진료실, 수납부 및 대합실이 계획되고, 2층에는원장실, 의관실 등의 관리부가 계획되어 수직적으로 기능을 구분하려는 의도를 확인할 수 있다.
    • 또한, 이 시기에는 군산자혜의원, 진주자혜의원, 춘천자혜의원의 본관과같이 지하층을 갖는 2층 본관 계획안이 나타났다. 1층 진료부에는 각 진료과별로 진찰실과 부속실을 계획하고, 지하층에는 취사장과 식당, X-선실, 세탁장, 창고, 기관실 등의 부속실이 배치되었다. 즉, 지하층이 계획되면서 기존에본관에 설치되지 못했던 식당, 기관실, 세탁장 등의 공간이 추가되게 된 것이다. 반면, 2층에는 병실과 간호사실이 계획되고 있는데, 기존에 본관과 병동을 건물로서 완전하게 구분하던 것과 달리, 병실 일부를 본관 최상층에도 배치한 것이다. 이러한 경향은 의사, 간호사, 환자를 통합적으로 관리하기 위한기능적 계획안이라고 볼 수 있다. 순천자혜의원의 경우에는 본관을 3층으로계획하였는데, 실질적인 구조는 2층이다. 그렇지만 지붕을 높게 들어 올리고지붕 속 공간을 간호사실과 창고로 활용하고 있다. 그러나 성진자혜의원과 혜산진자혜의원은 순천자혜의원과 동일한 본관계획안을 적용하면서도 옥탑공간은 반영하지 않은 2층 본관을 계획하기도 하였다.
    • 이밖에도 이 무렵 진료부 건물의 내부계획은 이전 시기와 명확한 차이를보이고 있는데 기본적으로 진료과목별로 진찰실을 세분화하고 부속실을 첨가하여 전문적인 의료행위가 전개되도록 하였다. 부인과에는 여성환자 전용진료실과 치과에는 기공실(技工室), 내과와 이비인후과에는 암실(暗室), 약국에는 제련실(製鍊室) 등이 조합을 이루도록 하였다. 또한, 수술실을 본관건물 내부로 통합하고 이학 요법실(理學療法室)과 X선실을 덧붙여 당시 의학기술을 진료에 적용하기 위한 흔적을 볼 수 있다. 이 시기 관립 병·의원 본관 계획의 큰 특징으로는 본관의 전체적인 공간이 크게 두 부분으로 나뉘어졌는데 그것은 구료대상 환자 무료시료공간과 유료 환자를 위한 진료공간을원천적으로 분리한 것이다. 시료병실을 별도로 조성하는 사례는 1910년의 함흥자혜의원에서도 나타나는 기본적인 구성법이었지만, 1920년대의 본관설계에서는 출입구, 진찰실, 병실 심지어 변소까지 벽과 동선으로 구분하고 있다.
    • 이 시기의 특징은 진료과별로 분류되기 시작하였고 수술실, 약제실 등이분류되기 시작하여 의료기술의 발전을 반영하였고, 의료를 중요한 강점에 따른 조선사회의 반발을 무마하는 중요한 수단으로 생각하는 일제의 의도가 반영되어 관공서 학교와 함께 그 지역에서 가장 규모가 큰 건물로 건축하였다.건축 기술발달에 따라 벽돌을 사용하고 가장 최신 건축기법을 사용하였다.
    • 제3기에 이르면 본관의 규모가 대형화 · 복합화 현상을 보이고 건축재료로 철근콘크리트를 적극적으로 사용하면서 준방호실(準防護室)과 같은 재해대비책이 나타났다. 이 시기의 대표적인 사례는 경성의학전문학교 부속의원외래진료소(1932~33년), 일본적십자사조선본부병원(1936년 개원)과 일본적십자사 조선본부청진병원(1943년 개원)을 들 수 있다.
    • 경성의학전문학교 부속의원 외래진료소는 3층으로 계획되었는데, 철근콘크리트 기둥을 적극 활용하여 공간의 구성에 따라 유동적으로 구조를 설계하였다. 계단실의 경우 외부 입면을 원호형으로 설계하고, 전체 입면의 창호를 수평방향으로 넓게 설치하는 등 1920년대의 병·의원 계획과는 다른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다. 
    • 일본 적십자사 조선본부병원은 4개 층의 본관을 계획하면서 철근콘크리트를 적극 적용하여 기둥을 균일하게 배치하고 보와 슬라브로 수평구조체를 계획하였다. 관동대지진 이후 내진설계에 대한 관심이 반영된 결과였다. 4개 층의 수직이동 편리성을 고려하여 대형 엘리베이터, 식사운반용 엘리베이터를 설치함으로써 당대의 최신건축기술을 적극 반영하고자 한 의도를 확인할 수 있다. 이와 같은 본관 규모의 확대는 이전 시기보다좀 더 세분화된 진료실 구성을 가능하게 하였다. 진료과목별로 진찰실과 치료실이 조합되도록 하였다. 또한 3개의 수술실이 동시에 운영될 수 있도록 하였으며, 부대진료실로 X선실도 독립적으로 배치되었다. 
    • 일제강점기 병원계획안 중에서 가장 늦은 사례인 일본적십자사 조선본부 청진병원(1943)의 본관은 좌우로 긴 2층의 형태의 중앙에 사각의 시계탑을 높이 세우는 혁신적인외관을 보여주고 있다. 내부에 진료과마다 환자 대합실을 별개의 실로 인접하도록 구성한 점과 과별로 수술실을 별도로 운영하도록 계획한 점은 진료실의 세분화, 계열화 경향이 지속적으로 발전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러한 내부계획은 당시 일본에서 외래부, 진료부 및 병동부까지도 과별로 계열화되는경향이 반영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준방호실을 각 층마다 계획하여 전쟁에 돌입한 일본의 건축 관련 규정을 반영하고 있는 점은 다른 본관 사례와는 다른 점이다.


5) 조선인 의사의 병·의원


1920년대부터 근대 의학교육을 받은 우수하고 진취적인 조선 학생들이 의료일선에 투신하면서 입원실과 수술실 등을 갖춘 오늘날 중소병원 규모의 의료기관의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당시 의사는 교육을 통해 상류계층으로 편입한 계층이었다. 이들이 개설한 병원은 당시에 최고급 건축물로 평가된다. 우리나라에서 1980년대까지 있었던 의원과 원장 살림집이 동일 건물,또는 동일 부지 안에 있는 것은 이때 시작된 것이다. 당시 의사가 모자라던현실을 볼 때 출 퇴근 시간에 구애받지 아니하고 응급환자는 즉시 진료할 수있는 체계를 갖추고 있었다. 건물은 대부분 일본식과 양풍을 따라 건축했다.이는 그 당시 설계자, 건축기술자 등이 모두 일본의 기술을 받았기 때문이라생각된다. 이들 건물은 당시 일본의 의료기관과도 거의 같은 구조라고 할 수있다. 이중 현재까지 의료기관건물이 남아있는 의원급 의료기관들 중 몇 곳을 살펴본다.



(1) 백제병원 (현 부산 천도원, 부산시 동구 초량2동 467, 미지정 문화재)


1922년 일본 오까야마 의전 출신의 최용해가 부산에서 우리나라 민간인 최초로 종합병원인 백제병원을 열었다. 5층 건물로 당시 부산 초량동에서는 가장 규모가 큰 고층건물로 부산 부립병원, 철도병원과 함께 3대 병원으로 불렸다. 이후 최 원장이 일본으로 도피하자 동양척식주식회사가 중국인 양모민에게 팔아 봉래각이란 중국음식점으로 사용하다가 중일전쟁으로 양씨가 중국으로 돌아가고, 1945년 광복직후 부산에 주둔하고 있던 일본군 아까쯔끼 부대와 총격전을 벌여 일본장교들을 쫓아낸 한국 치안대가 그들의 근거지로 삼았다가 민간에 불하되어 예식장으로 사용하기도 했다. 1972년 불이 나서 3,4, 5층 내부가 불탔으나 워낙 견고하여 5층만 철거하고 3, 4층은 개조하여 사용하고 1, 2층은 옛 구조 그대로 벽과 문과 목조 계단도 완전하여 여러 업체가 사용하고 있다. 당시 건물은 일본에서 수입해온 벽돌(연와조)로 지어져 구경 오는 사람이 줄을 이었다고 하며 원래 병원용도로 지어진 건물이라 중 복도에 입원실로 추정되는 방들이 있고, 현재 88년이 되었지만 워낙 견고하여근린시설로 허용되고 있는 것으로 보아 당시의 규모가 상당했을 것으로 추정된다(정이순, 2005: 21-2).


(2) 삼산의원 (전북 익산시 중앙동 3가 114-2 등록문화재 제 180호) (그림 3)


‘삼산의원’은 1922년 의사출신 독립운동가 김병수(1898~1951)원장이 지은건물로 일제 강점기에는 번화가였던 익산시 중앙동에 지어진 큰 규모의 의원건물이다. 1930~31년에 조사된 익산군지에 의하면 당시 익산면 이리에는 6개의 의원이 있었는데 이중 4개가 일본인이 운영한 의원이었으며 두 곳이 조선인 의사가 운영하는 의원이었다. 해방 후 한국무진회사와 국민은행으로 사용되기도 했는데 지금도 지역주민의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건물이다.


일부 변형이 있긴 하였지만 아치형 입구의 포치ㆍ코니스장식 등은 근대 초기건축의 흔적을 엿볼 수 있는 건물이다. 지상 2층, 건축면적 158.02 m2, 연면적 289.26 m2 규모의 이 건물은 벽돌벽체의 외관으로 전체적으로 르네상스팔라죠 양식을 따르고 있으며 세부적인 디테일이 매우 섬세하다. 정면 대칭인 출입구 상부는 바로크 양식의 곡선을 수용하였다.


중앙부의 2층은 3개의 작은 창을 합쳐 중앙상부에 위치시키고 양측에 큰창 1개씩을 낮게 두었다. 1층 중앙에 아치로 된 출입구는 포치형으로 돌출되어 있고 정면 좌측과 우측은 각각 3개의 트레이 서리창을 두었으며 측면에는 각각 4개의 트레이 서리창이 있고 높게 올린 굴뚝이 남아있다. 현관 좌측의 계단을 통해 2층으로 출입하도록 되어 있고 2층은 중 복도형식이다. 지붕은 우진각 지붕이며 슬레이트로 마감하였고 처마 밑 코니스(cornice)는 3단의 몰딩으로 처리하였으며 몰딩 상하부에는 꽃문양이 조각되어 있고 처마에함석으로 된 물받이와 낙수통이 있다. 해방 후 국민은행이 건물을 인수하여33.45 m2의 금고를 중축, 사용하다가 이전하였다. 그 후 ‘오죽헌ʼ이란 음식점이 내부를 개조하고 이용하고 있다(익산시청문화관광과, 2001: 250). 김병수선생은 1990년 독립유공자로 애족장을 추서 받았다(김희곤 등, 2008: 18-21).



(3) 대동의원(충남 예산군 예산읍 예산리 137, 미지정문화재) (그림 4)


1920년대 일본인 의사가 건립하여 운영하던 의원을 1939년 최익열 원장(1914년생·경성제국대학 의학부 14회)이 인수하여 운영하던 의원이다. 이건물은 지상 1층, 목조 일식 건물로, 대지 1,262 m2, 건축면적 167.42 m2 규모이다. 의원과 살림집이 넓은 부지 내에 분리되어 있는 전형적인 옛 의원급의료기관의 형태를 갖추고 있다. 대지 좌측 도로에 접하여 의원건물이 있고넓은 앞뜰을 지나 살림집이 있다. 의원건물의 경우 전면에 대기실, 진료실과수술실을 두고 대기실에서 안쪽으로 통하는 여닫이문에 이어 편 복도를 따라 입원실이 있다. 의원건물의 주 출입구는 원형기둥과 캐노피로 구성되어있으며 원형기둥 상부에 보가 걸쳐있고, 지붕은 스페니쉬 기와로 덮었다. 살림집은 그 구성과 구조가 일본식으로 앞뜰에 면하여 길게 편 복도를 두고 방들과 거실이 있으며 후원과도 쉽게 연결되도록 미서기문(미닫이문)을 달았다. 2000년 최원장이 작고한 후 병원은 닫았지만 대동의원 간판은 그대로여서 지금도 예산 주민들이 예산초등학교 정문 맞은편에 형성된 주택가의 위치를 설명할 때 가장 쉽게 기준점으로 잡는 건물이다. 고령으로 옛 대동의원을 지키고 있는 부인의 뜻에 따라 그 보존여부가 결정될 운명에 처해있다(조



(4) 십자의원 (전남 장흥군 장흥읍 기양리 48, 등록문화재 제131호, 민가)(그림 4)


일제강점기에 신축된 일본식 주택이다. 일본에서 의학공부를 마치고 의사가 되어 귀국한 박예진씨가 향리인 전남 장흥에 개원하면서 건축했다. 이 집은 일반적인 주택의 경우와 달리 의원으로 사용되었던 부속 채가 주택과 결합된 형식이다. 특히 건물을 지은 주인이 조선인이면서 의사였던 관계로 일본식 주택 형식과 우리나라 상류층 주택의 배치가 한데 어울려 있다는 점 등에서 독특한 특성을 보여주고 있다.


처음 개원한 박 원장 다음으로 둘째 아들인 박재이(전남의대 졸) 원장과 둘째 자부 주소희(고려의대 졸) 선생이 2대에 걸쳐 함께 의원을 운영하였으나박 원장이 별세한 후 둘째 자부는 서울로 이사 가고 의원은 폐업했다. 안채에는 큰 자부 이정자 씨와 그의 아들 내외가 살고 있으며 의원 진찰실은 비어 있고 입원실은 주택으로 세를 놓고 있었다. 등록문화재 지정 후 수리비용을 관계당국에서 보조하여 준다고 해서 세입자를 내보냈으나 아직까지 지원을 받지 못해 비어둔 상태이다.



(5) CP제화유통(舊 의원, 의원 名 미상, 대구시 중구 종로 1가 83-2)


1936년 대구시내 중심지에 의원용도로 지어져 한동안 사용되던 이 건물은지상 2층, 연면적 118.8m2, 건축면적 59.4m2 규모의 벽돌벽체에 슬라브 지붕으로 남향 배치되어 있다. 대구지역 근대건축물조사에서도 의원의 이름이 기재되지 않고 일제강점기에 의원으로 사용되었다고만 적혀 있었으며 조사 당시에도 인근주민들 중 이 건물의 내력을 아는 사람을 만나 볼 수 없었다. 건물의 평면은 동서로 긴 장방형이고 외관은 남측 정면에 출입구를 두고 수직창을 비대칭으로 배열하였는데 창문 위에는 수평 돌림띠를 돌렸으며 파라펫(parapet, 胸壁)부에는 치형(齒形)장식을 하였다. 2004년 대구시가 조사한 근대문화 유산현황 조사서에는 유통업체가 창고로 사용하기 위해 창문을 벽돌로 막아 벽면으로 구성된 건물이라고 기재되어 있으나 2009년 1월 현재 철거와 함께 다른 용도로 사용하기 위한 공사가 한창이었다.2)




6) 주택 등 다른 용도의 근대건축물을 현재 병·의원으로 사용하는 사례


일제 강점기 건축당시에는 주거용 주택 및 공공건축물로 지어진 건물 중에 후일 일부를 용도를 변경하여 의료기관으로 전용한 건축물들이 있다. 이러한건축물들은 대부분 당대에 상당히 공 들여 축성한 건물이며 건축당시에도 유명세를 떨친 건물들이란 점에서 우리 근대사가 기억해야 할 건축물들이다.이 중에는 문화재로 지정된 경우와 본인들의 뜻에 따라 비지정 건축물로 남아 있는 경우가 있는데, 비지정의 경우 사유재산으로 언제라도 철거 또는 원형을 변형할 수 있다는 점에서 기록이 시급하다.


(1) 강북삼성병원 (구 서울 경교장, 서울시 종로구 평동 108-1, 사적465호)


신문로 평동 중턱에 자리 잡고 있는 이 건물은 1936년 원래 금광왕 최창학의 사저로 착공되었다. 대지 1,584평, 건축면적 117평, 연면적 264.4평의 철근 콘크리트벽체 지하 1층 지상2층 규모의 이 대저택은 근대건축사에 이름을 올린 김세연이 설계하고 일본의 대림조(大林組)가 시공했다. 해방 후 김구선생이 상해 임시정부에서 귀국하여 이곳에 거처하면서 경교장(京橋莊)으로유명해진 건물이다. 1949년 6월 26일 정오 저격자 안두희에 의해 김구선생이 피살당한 역사적인 장소이기도 하다. 그 후 후손에게 상속되었던 이 건물은 한 때 세들어 있던 미국인에 의해 무허가 모텔로 사용되기도 했는데 이후고려병원이 이 건물을 사들여 김구선생이 최후를 맞은 거실을 보존하며 다른시설은 병원용으로 전용하였다. 현재 이 건물은 강북삼성의료원에서 본관으로 사용하고 있으며 내부는 개조하여 원형을 잃었다. 외부의 캔틸레버 부분이 수리 변형되었지만 그 외 외부벽체는 원형에 가깝다(김정동, 1989: 41-2).


(2) 정 소아과의원 (구 서병직주택, 대구시 중구 남일동 141, 미지정문화재)


일제시대 대구 서부자로 알려진 서병직이 1937년에 건립한 벽돌벽체의일·양 절충식 2층 주택으로 지상 2층, 대지면적 634.7 m2, 연면적 251.6 m2,건축면적 181.98 m2 규모이다. 일제시대 일·양절충식 주거유입 과정과 상류층의 주거문화 이해를 위한 자료적 가치가 인정된다. 정필수 원장(1947년 경북의대 졸)이 인수하여 소아과의원 겸 주택으로 리모델링한 건물이다. 평면은 장방형에 가까운 부정형으로 1층에는 서쪽의 현관 홀을 중심으로 공적 공간을, 2층에는 침실, 서재 등의 사적 공간을 배치하였는데 대체로 공적 공간의 바닥에는 다다미를 깔고 생활공간에는 온돌을 시설한 것으로 보아 공간의성격에 따라 바닥 마감이 달랐던 것으로 보인다. 동측 대문에서 현관에 이르는 진입로는 종석 씻어내기로 시공하여 아름답다. 외관은 벽돌 벽에 시멘트몰탈 뿜칠로 마감하고 창은 목재 미닫이창을 달았으며 지붕은 모임지붕위에슬레이트를 이었다. 일제시대 일·양 절충식 가옥으로 특히 정 원장이 원형보존에 힘을 기울여 원형이 잘 보존되어 있는 집으로 평가되고 있다.


(3) 이해영 정형외과의원 (구 교남YMCA, 대구시 중구 남성로 117, 미지정문화재)


일제강점기인 1917년 미국인 선교사들이 지은 교남YMCA회관으로 지상 3층, 연면적 366.79 m2, 건축면적 180.71 m2의 붉은 벽돌벽체의 한·양 절충식 건물이다. 1965년 경북의대 출신의 이해영 원장이 인수, 내부를 개조하여이해영 정형외과로 사용하고 있다. 건물은 북측은 남성로(일명 약전골목)에면하여 북향 배치되었고 2층 건물로 모임지붕에 함석을 이었다. 평면은 동서로 약간 긴 장방형으로 정면 우측의 출입구와 연결되는 중복도의 양측에 여러 개의 방이 있는데, 현재 그 방들은 입원실로 사용되고 있다. 외관은 콘크리트 줄 기초 위에 붉은 벽돌을 쌓아 벽체를 구성하고 벽면은 궁형 아치창과층간 치형 돌림띠, 기둥처럼 꾸민 버팀벽 등으로 장식하였는데 현재도 상태는 양호하다.


4. 결어


근대의학의 도입이후 한국의학은 이제 세계 어디에 내놓아도 손색이 없을정도로 괄목할만한 발전을 이룩했다. 그러나 우리나라 근대 병·의원의 역사에 대한 기록과 연구는 빈약하기 그지없는 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다행히 문화재청이 지난 2008년 12월 알렌의 청진기 등 근대 의료기기를 중심으로 ‘근대 문화유산 의료분야 목록화 보고서’를 펴내어 우리의 근대의료유산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한 것은 고무적인 현상이다.


근대 병·의원 건축물은 우리나라 근대의료의 역사를 담는 그릇임에도 이를 문화재로 인식하는 시각은 아직 미흡하다. 건축사에서는 근대의 병원을 외국 공관 및 학교와 더불어 우리나라 근대건축의 효시로 보고 있을 정도로 근대병원건물의 역사적 의미는 적지 않다(서치상, 2006: 76-9). 그러나 근대 의료건축물 대부분 주민이 많이 거주하는 도심이나 지역사회 중심부에 위치해있었기 때문에 한국전쟁과 1960년대 이후 한국사회의 급격한 도시화, 산업화과정에서 철거 또는 변형대상 최우선순위에 놓임으로써 다른 건물들에 비해단명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 이유로 문화재로 지정된 근대의료기관 건물은 부속건축물과 의사들의 주택을 포함해도 30여 점을 넘지 못한다.


따라서 이번 연구에서는 지금까지 보고된 각종 공신력 있는 보고서와 연구자료를 근거로 의료기관 관련 근대건축물을 정리해보고 그 의료사 및 건축사적 의미를 살펴보았다. 이러한 종류의 연구로는 처음이라 미흡한 점이 적지않지만 추후 보다 심화된 연구의 계기가 되기를 희망한다.



색인어 : 근대 병의원, 제생의원, 동인의원, 자혜의원, 목조 건축물, 벽돌조 건축물




의사학 제20권 제2호(통권 제39호) 2011년 12월 Korean J Med Hist 20 ː395-424 Dec. 2011

ⓒ대한의사학회 pISSN 1225-505X, eISSN 2093-5609


Research on the Hospital Construction and Structure in Daehan Empire and Colonial Modern Period

HAN Dong Gwan*·RYU Chang Ug**·KO Sang Kyun† JUNG Jae Kook†·MOON Jong Youn‡·PARK Yoon Hyung‡3)


It was the late Chosun Dynasty and Daehan Empire era that Western Medicine has firstly been introduced to Korea, previously operating on a basis of Korean traditional medicine. Western Medicine has been introduced by American missionary and Japanese Imperialism. An introduction of Western Medicine made it feasible to proceed new type medical care including operation, leading to require a new form of medical facilities. In the beginning, new facilities were constructed by Japanese Imperialism. Other hand many of facilities including Severance Hospital were established by missionaries.


First of all, Daehan Empire established and managed a modern type of medical facility named "Jejoongwon" in 1885 as a government institution hospital. The Red Cross Hospital built in 1889. Afterwards, Jejoongwon and the Red Cross Hospital were taken over to missionary hospital and Japanese Imperialism, respectively. Japanese Imperialists firstly have protected their nationals residing in Chosun but have proceeded care a few Chosun people to exploit medical treatment as a mean to advertise superiority of the Empire of Japan. The facility that has firstly been established and managed was Jeseang Hospital in Busan in 1877, leading to establish in Wonju, Wonsan, and Mokpo. Afterwards, Japan has organized "Donginhoi" as a civil invasion organization, leading for "Donginhoi" to established "Dongin Hospital" in Pyeongyang, Daegu, and Seoul. Since 1909, governmental leading medical facility named Jahye Hospital was established according to an imperial order, leading to establish 32 hospitals all over the nation.


American missionaries have established and managed 28 hospitals started from Severance Hospital built in 1904. However, Chosun doctors started to having educated and opening up their own hospital since 1920, leading for many of medical facilities to be established, but most of them have taken different roles followed by 6.25 War and economic development period. However, some of them are currently under protection as cultural assets, and some of them are now preserved.


Buildings have originally been structured of wood as a single story in the beginning, but bricks started to be steadily used, leading to build two story building. Each of clinic department started to be separated since 1920, establishing operation room and treatment room.


Now, a change of perception as to buildings that need to be preserved and an attention from government and doctors are required since modern medical facilities keep disappearing.


근거중심 의학의 사상 -의학철학의 입장에서-

권상옥*





1 서론


근거중심 의학(evidence-based medicine)은 임상 의학의 새로운 방법론으로 1992년 캐나다맥마스터 대학의 임상 역학자인 고든 기얏(Gordon Guyatt) 등에 의해 처음으로 이름이 지어졌 1) 지금까지 진단이나 치료가 단편적인임상 경험이나 질병 메커니즘에 근거한 추론에 따라 결정되었다면 근거중심 의학은 이런점을 반성하고 모든 임상적 판단은 최신 임상연구 결과를 바탕으로 과학적 근거 위에서 결정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근거중심의학은 질병 메커니즘에 대한 연구 결과보다임상에 직접 이용될 수 있는 연구 결과 특히무작위 대조 시험(randomized controlled trial)이나 메타 분석(meta-analysis)의 결과를 중요시한다 2)


근거중심 의학은 체계적이지 않은 단편적임상 경험에 근거한 임상적 판단에 대하여 반성적 태도를 강조한다 그리고 질병 메커니즘이나 병태생리학적 추론에 근거한 임상 판단에 대해서 그다지 비중을 두지 않는다 대신최신의 임상 연구 결과에 근거한 임상적 결정을 가장 신뢰한다 결국 근거 중심 의학이란 환자에게 필요한 의학적 결정을 내릴 때 통용되고 있는 가장 좋은 근거들을 의도적으로 명백하고 현명하게 이용하자는 것(conscientiousexplicit and judicious use of current best evidencein making decision about care of individualpatients)이다 3)


근거(Evidence)는 결론이나 판단의 기초가되는 자료나 정보를 의미한다 근거중심 의학은 근거의 의미를 엄격히 제한하여 과학적 근거(scientific evidence)만 유일하게 근거로 인정한다 그 동안 의료에서 오랫동안 판단 근거로이용되어 온 것들 예를 들어 병태생리학적 지식에 기반을 둔 이론적 근거 의사의 임상 경험에 근거를 둔 경험적 근거 그리고 전문가의주관적 평가에 기반을 둔 전문가적 근거 등은근거중심 의학에서 그 가치를 인정받지 못한다 기존 임상 의학이 질병 메커니즘에 근거한추론을 임상 판단의 근거로 상당 부분 의존하였다면 근거중심 의학은 임상 경험 특히 체계화된 임상 경험이라고 할 수 있는 무작위 대조 시험의 임상 연구나 메타 분석의 결과에 기반을 둔다 4)


근거중심 의학의 패러다임(paradigm)은 기존임상 의학의 패러다임과 비교할 때 많은 점에서 대조를 이룬다 이런 이유로 근거중심 의학을 옹호하는 일부 학자는 근거중심 의학의 패러다임이 기존 임상 의학의 패러다임을 대신할 것이라는 패러다임의 전환(paradigm shift)을주장하기5)도 하였지만 그 가능성에 대해서는논란이 많다 6)


임상 경험과 질병에 대한 지식은 임상 판단을 내리는데 가장 중요하고 기본적인 요소라고 할 수 있다 의학의 역사를 돌이켜 볼 때진단이나 치료 방법에 대한 결정은 그 시대 의학의 패러다임에 따라 크게 달랐다 임상적 판단이 질병 메커니즘에 근거하여 결정된다면 합리론적 경향이라 할 수 있지만 임상적 판단이 치료 경험에 바탕을 두고 결정된다면 경험론적 경향이라고 할 수 있다 의학에 나타난이런 사상은 철학적 의미의 근대 합리론이나경험론과 다른 점이 있으나 소박한 의미에서볼 때는 공분모의 요인이 많다고 할 수 있다 철학과 마찬가지로 의학의 역사에서도 질병개념과 치료를 둘러싼 경험론적 입장과 합리론적 입장은 줄곧 갈등과 경쟁을 보여 왔다 7)


하레는 과학 철학 의 머리말에서 과학에있어서 독특한 것으로 보이는 문제들이 실제로는 폭넓은 철학적 문제의 일종임을 보여줌으로서 과학철학을 철학적 맥락에서 소개하려고 하였다 과학을 합리적인 기반 위에 세우려는 여러 가지 방식들을 분명히 밝히는 한편 이 방식들이 결국 두개의 상반된 입장 즉 경험론적 태도를 견지하는 실증주의와합리론적 태도를 견지하는 실재론으로 요약될수 있다는 것을 보여 주려고 했다 고 썼다 8)저자는 이러한 입장이 의학에도 적용될 수 있다고 생각하여 근거 중심 의학의 사상을 의학철학의 관점에서 다루어 보고자 하였다 이를위하여 (1)의학에 나타난 경험론과 합리론의전통을 검토하면서 (2)근거중심 의학의 역사와 (3)근거중심 의학의 사상을 살펴보고 과연근거중심 의학이 의학 패러다임의 전환에 해당하는지 알아보고자 하였다


2 본론


  • 합리론자들은 관찰이나 경험의 배후에 존재하는 실재 개념을 추론으로 파악할 수 있다고믿으며 이성과 논리를 통한 추론의 내용이나이론을 지식으로 받아들인다 원인은 특정 메커니즘에 따라 결과를 낳기 때문에 원인이 주어지면 자연의 필연성에 따라 결과가 있기 마련이라는 결정론을 주장한다 또한 원인과 결과 인과 메커니즘이 모두 실제로 존재한다고믿는다 
  • 경험론자들은 관찰하거나 경험한 내용만이 지식이 된다고 주장하면서 원인과 결과가 상호 관계가 있더라도 각각은 독립된 사건이라고 주장한다 따라서 원인이 같더라도결과는 다양하게 나타날 수 있다는 확률론을믿는다 그리고 인과 메커니즘은 경험적으로알 수 없기 때문에 과학의 역할은 오로지 현상을 확인하거나 분류하고 그 사이의 관계를발견하는 일에 국한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근대 합리론과 경험론은 인식론에서 극단적인 차이를 보이는 만큼 존재론에서도 견해가대립되었다 합리론자들이 실재론(realism) 혹은 본질론(essentialism)을 옹호한 반면 경험론자들은 유명론(nominalism)을 지지한다 실재론에서는 보편적인 개념이 실재한다고 믿는다 모든 대상과 개념의 뒤에는 이상적인 형상(ideal form)이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 실재론을 신봉하는 의사들은 질병이 증상의 원인으로 존재하고 질병의 배후에는 진행 과정에 대한 인과 관계를 보여주는 메커니즘(mechanism)이 실재하며 메커니즘은 물리 법칙이나 화학법칙으로 환원시켜 설명할 수 있다고 믿는다
  • 이에 비하여 유명론자들은 보편적인 것이란존재하지 않으며 이름이란 단지 일련의 대상이나 사건의 특징을 묶은 개념에 지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의학의 경우에서도 질병은 진단 과정에서 발견된 일련의 특징에 갖다 붙인단순한 이름에 불과하다고 믿는다 

이 때 특징이란 전형적으로 나타나는 증상 형태나 기능의 이상 혹은 특정 원인 등을 말한다 유명론자에게 있어서 질병은 구체적인 환자와 떼어놓을 수 없기 때문에 치료는 항상 질병을 앓는 환자 를 대상으로 하게 된다 그러나 질병을 실체로 생각하는 실재론자들은 질병을 환자로부터 분리하여 질병 자체 를 치료하려는경향이 있어 질병의 치료 과정에서 환자를 소외시킬 수 있다 9)


의학이 질병 이해에 있어서 얼마나 실재론적인 입장을 고집하는지를 보여주는 단적인예는 역학 연구를 통하여 두 가지 사건의 통계적인 연관성이 밝혀진 경우라도 의학자는 이사실만으로 인과 관계가 증명되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이런 역학 연구 결과는 단지 두 가지 사건 사이에 인과 메커니즘이 존재한다는 가설의 근거로만이용될 뿐이다 그 대표적인 예가 흡연과 폐암사이의 관련성이라고 할 수 있다 질병이 의학적으로 규명되는 과정은 사건들 사이에 통계적인 관련성이 발견되고 거기에 작용하는 인과 메커니즘이 해명되는 이중 구조를 취하고있다


과학의 역사에서 합리론과 경험론의 대립이가장 심하던 시기는 17세기이다 

    • 데카르트와라이프니츠가 수학의 논리 세계에 매료되어추상적이고 형식적인 측면의 과학을 정당화하는 합리론적 과학을 발전시켰다면 
    • 베이컨과로크는 관찰과 실험으로 지각적이고 경험적인측면의 과학을 강조하는 경험론적 과학을 발전시켰다 

근대 경험론과 합리론은 극단적인대립으로 과학의 한 면만을 주목하고 나머지다른 면은 간과하게 되었다


뉴턴(Isaac Newton)은 이런 단점을 극복하여독특한 실험적 방법을 개발하였다 뉴튼의 실험적 방법은 실험과 관찰을 통해 결론을 이끌어내는 분석의 절차와 발견된 원인으로 다시현상을 설명하는 종합의 절차로 이루어져 있다 뉴튼은 실험적 방법과 귀납적 방법을 통합하여 독특한 경험론을 구축하였고 근대 과학혁명의 완성에 기여하였다 뉴튼의 자연 철학은 실험적 방법에 있어서 데카르트의 사변적인 자연 철학과 근본적으로 다르기 때문에 한때 실험 철학으로 불리다가 19세기 중엽부터자연 과학으로 이름이 지어졌다 10)


자연 과학은 방법론(인식론)의 측면에서는사변을 중시하는 합리론 철학을 포기하고 관찰을 중시하는 경험론 철학을 수용하였으나세계관(존재론)의 측면에서는 전통적으로 인정되었던 합리론 철학 즉 실재론을 그대로 유지하였다 결국 전통적인 사변적 실재론은 사라지고 경험론의 통제를 받는 실재론(realismcontrolled by empiricism) 11)이 등장하게 된 것이다 이러한 입장은 자연 속에서 질서를 발견하는 인간의 능력을 인정하면서 동시에 보이지 않는 실재도 받아드려야 한다는 점을 인정한 것이다 12)



1) 의학사에 나타난 합리론과 경험론적 경향


히포크라테스가 사망한 후 그리스 의학은 경험론(empiricism) 연역론(dogmatism) 방법론(methodism)이라는 세 가지 주요한 분파로 나누어 졌다 13) 이 가운데 카리스터스(Carystus)의 디오클레스(Diocles)에 의해 시작된 연역론학파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용어나 체계를 히포크라테스 의학에 접목시켜 체질의 종류와 질병의 원인을 찾고자 하였다 이들은 관찰보다사변적인 추론을 중요시하였기 때문에 합리론의 시조라고 할 수 있다 두 번째는 경험론 학파의 계보가 있다 이들은 기원전 2세기에 코스(Cos)의 필리노스(Phillinos)와 알렉산드리아(Alexandria)의 세라피온(Serapion)을 중심으로나타났으며 연역론 학파와 달리 질병의 궁극적인 원인을 찾는 것은 헛수고일 뿐이라고 주장하면서 질병의 직접적인 원인을 찾는데 관심을 쏟았다 이들은 환자의 증상이 예후와 치료법의 결정에 도움이 된다고 믿어 임상적 관찰을 중요시하였다 이들이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 것은 질병의 원인이 아니라 바로 치료 효과였다 14)


히포크라테스 의학의 체액설 전통을 이어받은 중세의 갈렌 의학은 체액의 조화 여부로건강과 질병을 설명하고자 하였다 체액 병리설과 기능적 질병관을 주장한 이들은 관찰보다 추론이나 사변을 통하여 질병 연구를 하였기 때문에 사변적 합리론자라고 할 수 있다이들은 건강과 질병을 특징짓는 보편적 원리혹은 기전이 있다고 믿고 이를 밝히려고 노력하였다 15)


17세기에 일어난 과학 혁명은 근대 과학의시작을 알리는 획기적인 사건이다 과학 혁명으로 아리스토텔레스의 자연관과 스콜라 철학의 자연관은 붕괴되었다 중세의 목적론적이고 생기론적인 자연관데카르트의 기계론적인 자연관으로 대체되었다 데카르트는 인간을 영혼과 육체로 나누고 육체는 기계와 다를바 없이 역학적인 원리를 따른다는 기계론을주장하였다 그 결과 육체는 물체에 불과하게되고 관찰이나 과학적인 방법이 적용될 수 있는 대상으로 바뀌었다 16)


과학의 눈부신 발전에도 불구하고 과학은18세기까지 의료에 별로 영향을 미치지 못하였다 이 때까지도 연역론과 스콜라 의학의 맥을 잇는 계보학자(systematist)들은 보편적이고일원론적인 병리설을 신봉하고 있었다 그들은모든 질병의 유일하고 근본적인 원인 즉 전체질병을 관통하는 한 가지 병리학적 조건을 찾고자 노력하였다 예를 들어 모든 질병의 원인을 러시는 혈관의 수축이완 병리로 브루세는위장염으로 그리고 하네만은 건선이나 옴으로설명하고자 하였다 사변적 계보학자들의 약점은 자신들의 주장을 검증할 필요성을 전혀 느끼지 못하였다는 점으로 이는 사변적 합리론자의 공통점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시대까지만해도 사람들은 질병이 여러 가지가 아니라 한가지이지만 질병의 표현 양상이 다양하여 여러 가지로 보일 뿐이라고 믿었다 17)


영국의 시든햄(sydenham)은 마치 동식물의종류가 많은 것처럼 질병에도 여러 종류가 있다고 생각하였다 관찰과 경험을 통하여 질병의 자연 경과를 연구한 시든햄은 생물학자가동식물의 종류를 분류하듯이 의사도 증상의 특이성과 유사성에 따라 질병을 감별할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시든햄은 여러 환자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증상을 근거로 새로운 질병개념을 제시하였고 처음으로 환자 와 질병이 구분되기 시작하였다 히포크라테스 이후로증상은 질병의 상태를 나타내는 지표일 뿐 질병을 분류하는 근거로 간주되지 않아 많은 의사가 환자의 증상을 관찰하였음에도 불구하고질병을 관찰한 의사는 없었다 시든햄의 업적은 질병을 처음으로 객관화시키고 질병의 존재론적 개념을 주장하였다는 점이다 증상을기준하여 만든 시든햄의 질병 분류학(nosology)은 유용한 임상적 방법(clinical method)으로 치료와 예후 판단에 기여를 많이 하였다 그러나후계자들은 연관이 없는 질병을 마구 추가함으로서 질병 분류는 임상적 유용성을 상실하게 되었다 18)


이런 상황에서 의학자들이 절실하게 추구하였던 것은 질병을 구체적으로 구별할 수 있는방법이나 원리였다 

    • 18세기 중반 모르가니(Giovanni Battista Morgani)는 해부학적 관찰로연구한 질병의 위치와 원인(The seats andcauses of disease investigated by anatomy) 이라는 책에서 임상 증상과 사체 해부의 소견사이에 상관성이 있음을 제시하였다 이 연구 결과로 그 동안 체액의 이상으로 설명되었던 질병이 기관(organ)의 변화로 설명할 수 있게 되었다 
    • 18세기 말에 시작된 파리 임상학파(Parisclinical school)는 로크의 경험론을 신봉하여임상적 관찰과 사체 해부를 중요시한 반면 사변적인 추론은 극도로 자제하였다 임상적 관찰과 병태 해부학에 근거한 질병 분류는 18세기의 질병 분류보다 진일보하게 되었다 많은의사들이 체액 병리학을 거부하고 국소 병리학을 신봉하게 되었으며 증상에 기초한 18세기의 질병분류학은 폐기되기에 이르렀다 
    • 이와동시에 진찰을 통한 임상 연구에도 진전이 많이 있었다 특히 아우엔브루거(Leopold Auebrugger)가 개발한 타진법과 레넥(Rene TheophileHyacinthe Laennec)이 개발한 청진기는 임상 연구에 새로운 방향을 제공하였다 의료 도구가사용되면서 진찰은 히포크라테스 시대의 문진처럼 수동적인 것이 아니라 능동적이고 체계적인 관찰의 면모를 보이기 시작하였다 19)


진찰과 부검으로 나타난 변화는 이전과 달리 질병을 바라보는 의사의 시선(gaze)이 본질적으로 변하고 있음을 보여 주었다 이는 근대의학의 시작을 의미하기도 한다 근대 의학이점점 객관성을 지향하면서 의학의 관심도환자의 이해 에서 질병의 진단 으로 바뀌어갔다 의학에서 이렇게 객관성을 강조하기 시작한 것은 당시 과학계의 일반적 풍조에 영향을 받은 것으로 19세기 계몽주의의 결과라고할 수 있다


진찰과 사체 부검에 충실하였던 파리 임상학파의 의학이 관찰 의학 이라고 한다면 19세기 후반 마장디(Francis Magendie)와 베르나르(Claude Bernard)를 중심으로 실험과 검사를강조하는 의학은 실험 의학(experimental medicine)이라고 할 수 있다 파리 임상학파는 경험론적인 임상 전통을 고집한 나머지 1850년대 이후로 의학계에서 주도력을 상실하기 시작하였고 뒤를 이어 독일의 실험 의학이 득세하게 되었다 파리 임상학파가 질병 존재에 관심을 기울였다면 실험의학자들은 질병에 따른 기능 변화를 집중적으로 연구하였다 이들은 사체 부검이 병리 과정의 최종 상태를 보여줄 뿐 질병 과정 자체 즉 질병 메커니즘을보여 주지 못한다고 주장하였다 따라서 질병을 정확히 인식하려면 시간 경과에 따른 기능장애의 연구 즉 병태 생리학(pathophysiology)이 필요하다는 점을 강조하였다


베르나르는 실험 의학 방법론 20)에서 관찰 의학이란 병의 경과를 관찰하고 예측하지만 질병의 진행에 간섭하지 않는 경험주의 의학이라고 하였다 이에 비하여 실험 의학은 물리학이나 화학처럼 자연 현상을 예측할 뿐만아니라 이를 조정하고 제어하려는 목적에서질병 메커니즘을 발견하고자 하는 학문 이라고 설명하였다 

    • 이어서 실험 방법에 대해서는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타인이 수집한 관찰에 대하여 가설을 발표하는 사람도 실험으로이 가설을 실증하려고 노력을 해야 비로소 유익하다 그렇지 않다면 실험으로 실증하지못한 가설 혹은 실증할 수 없는 가설은 체계를 낳는데 그쳐 다시 스콜라 철학의 방향으로우리들을 되돌려 놓을 것이다 
    • 실험 의학의주장은 근대 과학의 입장을 그대로 반영한 것으로 근대 의학의 방법론인 생의학(biomedicine)의 완성에 결정적인 기여를 하였다


파리 임상 학파가 질병 존재를 확인하는데 결정적 역할을 하였다면 실험 의학은 질병 메커니즘과 질병 원인을 규명하는데 크게 기여하였다 실험 의학자들은 관찰된 사실에 관심이 많아 혹시 경험론자로 보일 수도 있지만파리 임상학파처럼 질병의 존재와 기술(description)이 아니라 궁극적으로 질병 메커니즘의 해명에 관심을 두었기 때문에 이들은경험론의 통제를 받는 실재론자 로 보아야한다 21)


2) 근거중심 의학의 역사적 개요


파리 임상 학파에 속하는 피에르 루이(PierreLouis)는 발열 질환에 많이 쓰고 있던 사혈(bloodletting)의 치료 효과에 의문을 품고 객관적인 통계 기법으로 치료 결과를 연구하여 사혈이 발열 질환에 효과가 없다는 점을 밝혀냈다 22) 이 연구는 사변적 추론에 근거한 치료법의 효과에 의심을 품고 객관적 통계 기법을이용하여 치료 효과를 연구한 것으로 계량적연구의 선구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이유로 임상 역학23)뿐만 아니라 근거중심 의학의 지지자들24)은 루이를 각각 자신이 속한 학문 분야의선구자라고 부르고 있다 이는 임상 역학과 근거중심 의학의 학문 정신이 같은 뿌리에서 시작하였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루이가 보인계몽주의적 회의론(enlightened scepticism) 25)의 태도는 사변적인 논리로 개발된 치료법에대하여 치료 효과의 근거를 요구하는 경험론적 태도라고 할 수 있으며 이는 바로 근거중심 의학의 정신이기도 하다


1938년 죤 폴(John Paul)이 처음 소개한 임상역학은 예방 의학에 대한 기초 의학으로 시작되었다 고전 역학이 집단을 대상으로 질병의원인과 분포를 평가하고 질병의 위험성을 통계적인 측면에서 연구하는 분야라면 임상 역학은 이러한 원리를 임상에 적용한 것이다 26)1946년 라스트(John Last)는 임상 역학이 임상문제의 해결에 구체적으로 적용되어야 한다고처음으로 주장하였지만 적용되기 시작한 것은 1960년대와 70년대 들어서였다 그 이유는이 무렵부터 임상 연구가 가치를 인정받기 시작하였고 연구 논문의 완성도를 평가하는 임상 역학적인 평가 방법도 개발되었기 때문이다 최근에는 임상 역학이 바로 임상 의학의기초 학문이 되어야 한다는 주장도 제기되고있다


기초 의학의 주요 관심 분야가 질병 메커니즘이라면 임상 역학은 질병의 자연 경과에 관심이 많다 실제로 질병의 자연사를 연구하는과정에서 만성 질환의 발병이나 진행에 관여하는 위험 인자(risk factor)들이 여러 가지 발견되었다 위험 인자의 조절은 만성 질환의 예방이나 질병 진행의 저지에 효과가 크기 때문에임상에서는 아주 중요하게 취급되고 있다 실제로 질병 메커니즘을 제대로 알지 못한다고하더라도 위험 인자만 파악되면 질병 통제가어느 정도 가능한 경우를 임상에서는 많이 볼수 있다 27)


    • 1948년 무작위 할당(randomization allocation)한 환자를 대상으로 연구한 임상 시험 결과가처음 논문에 게재되었다 이 연구 결과에 근거하여 스트렙토마이신 항생제는 결핵 치료에 본격적으로 사용되기 시작하였다 28) 
    • 그 이후로 잊혀졌던 무작위 대조 시험 방법론(randomizationcontrolled trial methodology)은 1960년경 임상 역학자들이 더욱 발전시켜 오늘날 임상 연구의가장 중요한 방법론으로 인정받게 되었다 
    • 또한 80년대에 확립된 체계적 분석(systematicreview)이나 메타분석(meta-analysis)의 방법론으로 임상 연구 결과의 평가 방법은 더욱 세련되어졌다 
    • 1981년부터 임상 연구논문의 타당성에 대한 평가 원칙을 제시한 논문들이 여러 편발표되었다 29) 임상 의사들도 임상 논문의 완성도나 재현성을 스스로 평가할 수 있게 되었고 논문 결과를 자신의 환자에게 적용할 수있는지 여부를 자신이 검토할 수 있게 되었다


20세기 후반 의료비는 엄청나게 상승하였지만 건강 증진 효과는 그다지 크지 않자 근대의학이 생활습관 병이나 퇴행성 질환 같은 만성 질환의 치료에 한계가 있다고 느끼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이러한 의료의 위기 는 근대의학의 가치를 크게 위협하게 되었다 이를 극복하기 위하여 1980년대에는 한정된 의료 재원 안에서 진단이나 치료의 효율성(effectiveness)을 극대화시키려는 결과평가운동(outcomesmovement)이 시작되었다 이 운동의 지지자들은 검증된 의학 지식에 근거하여 진료할 경우의료의 효율성이 높아지기 때문에 단편적인임상 경험이나 의과학적 지식에 근거한 판단보다 통계적으로 입증된 임상 정보를 진료에이용하여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 운동 역시근거중심 의학의 탄생에 큰 영향을 미쳤다 30)


임상 테크놀로지가 발전하면서 진단과 치료에서 병태생리학적 추론의 중요성은 점차 감소하고 있다 치료는 물론이고 진단도 질병 메커니즘에 근거하기보다 영상학적 방법이나 표식자(marker) 혹은 혈청학적 검사를 이용한 통계적 확률로 판단하는 일이 많아졌다 이런 현상은 진단이나 치료 결정이 병태생리학적인근거보다 통계적 임상 연구 결과에 더 많이 의지하고 있음을 보여 준다 31) 임상 테크놀로지의 발달로 초기 단계나 무증상의 질병이 많아져 임상 소견과 병태생리학적 소견의 상호 관계를 통하여 정립된 근대의 질병 개념은 보완이 필요하게 되었다



3) 근거 중심 의학의 사상


1992년 근거중심 의학의 연구 집단은 기존임상 의학과 근거중심 의학의 패러다임의 차이를 다음과 같이 비교하였다 32) 

    • 기존 임상 의학에 필요한 지식은 체계적이지 않더라도 축적된 임상 경험 질병 메커니즘이나 병태생리에 대한 지식 그리고 전통적인 수련 과정에서얻는 것이 보통이다 이 패러다임에서는 과학적 권위의 전통을 인정하고 표준적인 접근 방식을 선호한다
    •  이에 비하여 근거중심 의학의패러다임은 체계적인 경험과 직관의 개발(특히진단 능력에 있어서)을 중요시한다 질병 메커니즘에 대한 이해는 필요하지만 절대적이라고생각하지는 않는다 동시에 문헌 비평을 포함한 근거중심 의학에 대한 지식을 기본적으로갖추도록 요구한다 의학적인 권위에 대한 믿음은 약한 편으로 의사는 독자적으로 진단이나 치료의 근거를 평가할 수 있어야 할뿐만 아니라 전문가 의견도 스스로 검토할 수 있어야한다고 주장한다


근거중심 의학은 다음과 같이 여러 가지 전제에 바탕을 두고 형성되었다고 할 수 있다 33)

    • 첫째 임상 결정은 가장 과학적이고 적용 가능성이 높은 최근 연구 결과에 근거하여야 한다 
    • 둘째 임상 의사는 직면한 문제에 대하여다양하고 새로운 해결 근거를 찾을 수 있어야한다 
    • 셋째 역학적이고 통계학적인 사고를 통하여 최선의 근거를 찾을 수 있어야 한다 
    • 넷째 이런 근거에서 내린 결론은 임상에 적용되어 유용성을 확인하여야 한다 
    • 다섯째 이런과정은 끊임없이 재평가되어야 한다


근거중심 의학은 임상 의학을 더욱 과학적의학으로 만들어 의료의 효율성을 높이고 나아가 양질의 의료 시행을 목표로 한다고 할 수있다 근거중심 의학은 임상 역학 분야에서 임상 연구 방법론과 논문의 평가 방법이 개발되고 의료 정보의 저장이나 검색에 유용한 인터넷이 출현하면서 비로소 임상 의학의 방법론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근거중심 의학의 기본정신은 최선의 임상 연구 결과(best clinicalresearch evidence)를 신속하게 검색하여 임상에유효적절하게 적용하려는 자세에 있다


    • 기존 임상 의학의 패러다임은 질병 메커니즘의 이해를 매우 중요하게 생각한다 치료란 질병 메커니즘에 개입하여 질병 진행을 저지하거나 지연시키는 과정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이런 사고방식은 모든 질병에 원인이 존재하며원인과 결과는 질병 메커니즘에 따라 필연적인 관계가 있다는 실재론적 사고를 전제로 한다
    • 이에 비하여 근거 중심 의학은 인과 관계는 알 수 없고 원인과 결과 사이에는 통계적인 연관성만 있을 뿐이라는 역학적 사고 혹은확률적 사고에 근거를 두고 있다 이들은 질병메커니즘에 대한 지식보다 체계화된 임상 경험에 근거한 치료 판단을 선호한다 체계화된임상 경험이란 무작위 대조 임상 시험이나 체계 분석 혹은 메타 분석을 통하여 과학적으로효과가 입증된 경험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사고는 임상 경험이나 지식을 중요시하는 경험론에 부합한다 34)


근거중심 의학은 경험론의 입장을 취하고실재론적인 결과론보다는 유명론적인 확률론을 지지하기 때문에 기존 의학의 경험론의통제를 받는 실재론 적 경향과 대립되는 것은사실이다 그래서 근거중심 의학의 옹호자들은 근거중심 의학이 임상 의학의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기존 의학의 패러다임을 대신하여패러다임의 전환 을 가져올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패러다임의 전환이 있기 위해서는 기존 패러다임과 이에 맞선 대안 패러다임이 존재하여야 하고 궁극적으로 두 패러다임은 대립 관계에 있어야 한다 35) 근거중심 의학은 경험론적 방법론을 강조하기는 하였지만기존 의학의 실재론적 세계관을 인정하기 때문에 근거 중심 의학의 패러다임과 기존 의학의 패러다임을 대립 관계로 보기는 어렵다고생각한다 근대 의학에 이르기까지 합리론적사고와 경험론적 사고는 질병 개념이나 치료법을 둘러싸고 서로 긴장과 갈등 관계를 보였다 그러나 근대에 이르러 경험론과 합리론의철학이 과학 의 방법론과 세계관에 있어서 서로 보완적인 관계를 이루게 되면서 자연 과학과 의학은 경험론의 통제를 받는 실재론의 입장을 취하게 되었다 근거중심 의학이 기존의학의 실재론적 배경을 극복하지 못하고 확률론에 근거한 경험론적인 연구 방법론을 강조하였다는 점은 근거중심 의학의 패러다임이기존 의학의 패러다임을 대신하는 것이 아니라 기존 의학에 방법론적 기여를 한 것으로해석될 수 있다


질병 메커니즘을 이용하여 의학적 추론을전개하는 것이 기존 의학이라면 체계적 임상경험을 판단 근거로 삼는 것이 근거중심 의학이다 그러나 체계적 임상 경험은 모든 임상상황에 맞추어 구축되어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체계적인 임상 경험이 마련되어 있지 않은 임상 문제에 부딪히면 부득이 질병 메커니즘에 근거한 추론으로 진료할 수밖에 없는 것이 현실이다 판단 과정에서 경험과 추론이 모두 중요하듯이 임상적 판단을 내리는데 있어서도 임상 경험과 의학적 추론은 필수 요소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점들을 고려할 때 근거중심 의학의 패러다임은 기존 임상 의학의 패러다임을 대체하는 것이 아니라 보완하는 역할을 한다고 생각한다


3 결론


의학의 역사에서 합리론적 사고와 경험론적사고는 질병 개념과 치료 방법을 두고 서로 대립하여 왔으며 주로 합리론의 관점이 역사를주도하여 왔다 전통적인 사변적 합리론의 경향은 19세기 초 파리 임상학파를 통하여 경험론의 경향으로 19세기 후반 실험실 의학을 통하여 경험론의 통제를 받는 실재론 의 경향으로 변화하였다 의학이 근대 과학의 방법론인 경험론을 받아들이고 질병 메커니즘의 규명을 목적으로 하는 의학의 전통을 유지하면서 의학의 패러다임은 과학과 마찬가지로경험론의 통제를 받는 실재론 의 입장을 취하게 된 것이다


근거중심 의학이란 임상 의학의 새로운 방법론이다 지금까지 진단이나 치료가 단편적인 임상 경험이나 질병 메커니즘에 근거한 추론에 따라 결정되었다면 근거중심 의학은 이런 점을 반성하고 모든 임상적 판단은 최신 임상 연구 결과에 근거한 과학적이고 체계적인임상 경험 위에서 결정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파리 임상 학파의 정신을 이어 받은 근거중심 의학은 확률론에 근거한 경험론의 경향이 강해 경험론의 통제를 받는 실재론 의 입장을 취하는 기존 의학과 대조를 이루고 있다이런 이유로 근거중심 의학의 옹호자들은 근거중심 의학의 패러다임이 임상 의학에 패러다임 전환을 가져올 것이라는 주장을 하였다그러나 체계적 임상 경험은 모든 임상 상황에맞추어 구축되어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체계적인 임상 경험이 마련되어 있지 않은 임상문제에 부딪히면 부득이 질병 메커니즘에 근거한 추론으로 진료할 수밖에 없는 것이 현실이다 결국 적절한 임상적 판단을 위해서는 경험과 추론이 모두 필요하다고 할 수 있다 또한 의학 철학의 관점에서 볼 때 근거 중심 의학의 패러다임은 기존 의학의 실재론적 세계관을 극복하지 못하고 방법론적 기여만 한 것으로 해석된다 이런 점들을 고려할 때 근거중심 의학은 의학에 패러다임의 전환을 가져오지는 못하고 기존 의학을 보완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醫史學제13권 제2호(통권 제25호) 2004년 12월 Korean J Med Hist 13∶335–346 Dec 2004

大韓醫史學會ISSN 1225–505X


= ABSTRACT =

Philos ophical backg round of Ev idenc e - bas ed me dic ine 

KWON Sang-Ok*


Through the whole history of medicine there runs a long struggle between two principal tendencies-empiricism and rationalism The empirical trend lays its emphasis on experience for the cure of the sick The rationalistic trend lays its main emphasis on mechanism for the causes of diseases


The term evidence-based medicine(EBM) defined as the conscious explicit and judicious use of the best current evidence in making decisions about the individual patients was introduced about ten years ago The proponents has been described EBM as a paradigm shift that will change medical practice in the years ahead But there has been considerable debate about the value of EBM The modern medicine following philosophy of modern science such as the realism controlled by empiricism has developed biomedical model But the EBM wrapped with clinical epidemiology and statistics represents response of empiricism to the rationalism(realism) The roots of EBM extend back at least as far as the Paris clinical school and the work of Pierre Louis in Paris in the early 19th century


Is EBM a paradigm shift? To answer this question We have to specify the alternative with which we are comparing EBM The alternative to EBM is the basic science approach studying the pathophysiolological mechanism of the body But EBM is so clearly intertwined with and complementary to the basic science that it would make little sense to see EBM as a paradigm shift away from basic science In a sense evidence-based medicine shows only methodological contribution aimed at improving the gathering and sorting of the best information published by biomedical scientists and clinical epidemiologists for use in clinical practice Although EBM and the traditional medicine embody different approaches this does not mean that they are competitors In fact the two approach need each; neither can stand alone for the development of clinical practice 


Key Words ∶evidence-based medicine empiricism realism controlled by empiricism paradigm shift



대한의사협회 휘장의 소사 : 아스클레피오스의 지팡이와 헤르메스의 지팡이

신영전*






1. 연구 배경과 목적


융(Jung)은 “하나의 상징(symbol)은 일상생활에서 친근하게 접할 수 있는 하나의 용어, 이름, 그림일 수 있지만 그것은 고식적인 의미 이상의 특별한 함의를 가진다”라고하였다.1)


한 집단의 휘장은 그 집단의 정체성을 함축하고 있는 상징물이다. 집단은 휘장을 통해 다른 이들과 자신들을 구분하며, 회원간의 동질성, 자부심을 강화한다. 아울러 그집단이 지향하고 있는 가치들을 대중에게공식적으로 표방하는 수단이기도 하다.


대한의사협회의 전신인 조선의학협회는1947년 10월 31일 공식휘장을 확정하여 사용해 오고 있으며 그간 세 차례의 교체를거쳐 현재 네 번째 휘장을 사용하고 있다.현재의 휘장은 첫 번째 휘장의 디자인을 기본으로 하고 있는데, 첫 번째 휘장의 기본상징물은 두 마리의 뱀이 지팡이를 휘감고있는 지팡이(Caduceus)다. 이 두 마리의 뱀과 지팡이는 그리스 로마 신화에 나오는 헤르메스(Hermes)2)의 상징물로, 일반적으로의학의 신으로 알려져 있는 아스클레피오스(Asklepios)의 지팡이가 아니다.


2) 헤르메스(Hermes)는 상인, 도적, 연금술사, 여행자의 신이기도 하고, 죽은 자를 지하로 이끄는 안내자의 상징이기도 하다.


헤르메스의 지팡이를 의학의 상징으로 잘못 사용하고 있는 경우는 대한의사협회만이 아니며, 국내외 여러 의학, 약학, 보건 관련기관이나 단체에서도 아스클레피오스가 아닌 헤르메스의 지팡이를 그들의 휘장 또는상징으로 사용하고 있다. 이러한 오용과 교정의 필요성을 지적하는 연구들이 있어 왔다.3)4) 국내에서도 헤르메스의 지팡이가 의사협회의 상징으로 부적절하다는 지적이 있어 왔다.5)6)


왜 한국의 의사협회는 아스클레피오스의지팡이가 아닌 헤르메스의 지팡이를 협회의상징으로 삼게 되었을까? 이 연구는 대한의사협회 휘장의 제정과정의 역사적 기록과역사적 맥락을 살펴보고 이것이 가지는 한국 근현대 의학사적 함의를 고찰하고자 한다.



2. 아스클레피오스의 지팡이와 헤르메스의지팡이


2.1 아스클레피오스의 지팡이와 의학의 상징


아스클레피오스는 그리스 로마 신화에 등장하는 의술의 신이다. 그는 고대 그리스로마시대 의학의 상징적 존재이다. 아폴론의 아들로 그려지기도 하고 키론(Chiron)밑에서 자라면서 의술을 배워 죽은 사람도되살릴 만큼 훌륭한 의술을 가지고 있었다고 전해진다. 아스클레피오스는 기원전 800년경에 살았던 호메로스(Homer)의 서사시 <일리아드(Iliad)>에도 이상적인 그리스의의사로 언급되고 있으며,7) 플라톤(Plato) 역시 히포크라테스를 아스클레피오스의 자손이라는 의미의 ‘아스클레피아드(Asklepiade)’라 불렀다.8) 히포크라테스의 선서문에서도 두 번째로 등장하는 신의 이름이기도 하다.9) 이렇듯 아스클레피오스는 기원전부터유능한 의사의 대명사였다.


9) 히포크라테스의 선서는 “나는 의술의 신 아폴론과 아스클레피오스(Asklepios), 히게아(Hygeia), 파나키아(Pankeia), 그리고 모든 남신과 여신의 이름으로 나의 능력과 판단에 따라 이 선서와 계약을 이행할 것을 맹세합니다”로 시작된다.


아스클레피오스를 의미하는 대표적인 상징(emblem)은 지팡이를 둘둘 말며 올라가는 ‘한 마리 뱀’이다. 지팡이와 한 마리 뱀이 아스클레피오스의 상징이 된 이유를 설명하는 대표적인 신화는 다음과 같다.


“아스클레피오스가 제우스의 번개를 맞아 죽은 글라우코스(Glaukos)를 치료하던 중 뱀 한 마리가 방안으로 들어왔는데 이에 깜짝 놀란 아스클레피오스가 자신의 지팡이를 휘둘러 그 뱀을 죽였다.잠시 후 또 한 마리의 뱀이 입에 약초를물고 들어와 죽은 뱀의 입 위에 올려놓았는데, 그러자 죽었던 뱀이 다시 살아나고, 이것을 본 아스클레피오스는 뱀이했던 대로 그 약초를 글라우코스의 입에갖다 대어 그를 살려내었다. 그리고 그는 존경의 의미로 자신의 지팡이를 휘감고 있는 한 마리의 뱀을 자신의 상징으로 삼았다.”10)


아스클레피오스의 지팡이는 고대시대 동안 의학의 상징으로 널리 사용되었으나 중세에 들어서는 로마 가톨릭 교회에 의해 사용이 억압되었다. 당시 요검사(uroscopy)를진단의 수단으로 널리 사용하면서11) 6세기부터 르네상스 시기까지 의학의 상징은 소변을 받아두는 유리병(Flask)으로 대치되었다.12) 종교개혁 이후 아스클레피오스의 상징이 다시 사용되기 시작하였다.13)



2.2 아스클레피오스의 지팡이와 헤르메스의지팡이 논쟁


시작 시점이 분명하지 않지만 언제부터인가 헤르메스의 지팡이가 의학 분야의 상징으로 사용되기 시작하였다. 그 대표적인 예가 미 군의부대(U. S. Army Medical Corp,USAMC)의 배지(badge)다. 이 배지는 1902년부터 채택되어 사용하고 있다.14)15)


왜 헤르메스의 지팡이가 19세기부터 북미의사들의 상징으로 잘못 채택되어 사용되기시작했는가에 대해 여러 가지 가설이 존재한다. 그 중 가장 널리 인용하고 있는 것이 프리드랜더(Friedlander)의 연구인데, 그는미국에 많은 의학서적을 제공하던 런던 처칠 출판사(Churchill of London)의 상징이 헤르메스의 지팡이였고, 19세기에 미국 출판사들이 이 상징을 의학의 상징이라고 착각하여 의학 관련 서적에 이를 사용하였기때문이라고 하였다.16)


의학의 상징으로서의 헤르메스 지팡이의오용을 이야기할 때 미국 군의부대 심볼의역할은 절대적이다.17) 프리드랜더의 연구에따르면 미국 군의무부(U.S. Army Department,USAMEDD)는 1818년 이미 아스클레피오스의 지팡이를 견장의 핵심 상징물로사용하고 있었으나, 1902년 7월 17일 헤르메스의 지팡이를 또 하나의 휘장으로 선택하였다고 한다. 당시 이미 헤르메스의 지팡이가 적절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군의감(Surgeon General)이 채택을 거부했음에도불구하고 이를 제안한 레이놀즈(Raynolds)대위의 집요한 고집으로 인해 마침내 승인이 이루어졌다고 밝히고 있다.18)19) 결론적으로 미국 군의부대가 헤르메스의 지팡이를휘장으로 선택한 것은 고대신화 상징에 대한 잘못된 이해의 결과였다. 미국의사회(1910)와 네덜란드 의사회(1956)는 각각 문장을 제정함과 동시에, 의학 관련 상징으로‘아스클레피오스의 지팡이’를 사용하고 ‘헤르메스의 지팡이’를 사용하지 말 것을 주장하기도 하였으나 이것은 철저히 지켜지지않고 있다.20)


3. 대한의사협회 휘장의 역사





왜 한국의 의사협회는 아스클레피오스의지팡이가 아닌 헤르메스의 지팡이를 협회의상징으로 삼게 되었을까? 국내에서도 이미헤르메스의 지팡이가 의사협회의 상징으로적절하지 않다는 지적이 있어 왔으며, 이것이 미군의무부대와 연관이 있을 것이라는추측이 있어 왔다. 실제로 박지욱은 대한의사협회와 국방부에 공식 질의를 하기도 하였는데, 대한의사협회로부터 현재 사용 중인 휘장이 1947년에 제정된 것을 1972년에변경하여 사용하는 것이라는 답변을 들었으며,21) 현재의 상징이 미 육군 의무부대가사용하던 휘장을 사용한 것일 것이라는 추측의 이야기를 들었다고 한다. 또한 국방부로부터는 “처음에는 미군에서 사용하던 카두세우스를 했다가, 1971년에 날개를 아래로 당겨 전체적으로 둥근 원모양의 디자인으로 바꾸어 사용한다”라는 답변을 들었다고 한다.22) 그는 “결론적으로 현재 사용 중인 육군 의무병과와 대한의사협회의 표장은모두 한국전쟁을 통해 이 땅에 상륙한 미군의무부대의 표장에서 기원한 것이 맞는 것같다”23)라고 말하고 있다. 하지만 현재 대한의사협회의 휘장은 1995년에 다시 만들어진 것이며, 최초 휘장의 채택이 의사협회의답변대로 1947년이라면 이 시기는 한국전쟁이전인 미군정기에 해당한다. 이러한 혼돈을 정리하고 왜 한국의 의사협회가 아스클레피오스의 지팡이가 아닌 헤르메스의 지팡이를 협회의 상징으로 삼게 되었는지 알아보기 위해 대한의사협회 휘장 제정의 역사를 추적하였다.


3.1 첫 번째 휘장(1947.10.21-1964.4)


현재 대한의사협회가 사용하고 있는 휘장은 1947년 조선의학협회가 최초로 공식휘장을 제정한 후 네 번째 휘장이다.


조선의학협회는 1947년 3월 남한지역을총망라한 중앙의사회로 창립되었다. 조선의학협회는 출범과 함께 조선의학협회회보를발간, 전국의학학술대회 개최 등 적극적인활동을 개시하였는데, 협회 휘장의 제정은이러한 적극적인 활동의 일환이었던 것으로보인다.24) 1947년 9월 조선의학협회는 임원회에서 휘장을 제정하기로 결정하였는데,1993년 발간한 <대한의학협회 85년사>에는최초 의사협회 휘장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메디칼 배지는 그 나라 의사회를 상징하는 휘장이기 때문에 의신(뱀머리 모형)을 그려 넣은 다른 나라 것을 그대로모방할 수 없어 1947년 9월 20일 의협임원회(이사회)에서 휘장 제정을 위한 특별위원회를 구성하여 공모키로 했다.”25)


또한 휘장 공모 작품의 조건을 구체적으로 제시하였는데, 공모 작품의 조건은 "1)조선의학협회의 정신을 살리고 의료의 존엄성을 표현할 것, 2) 도안의 의장이 미술적이며 의협의 목적이나 사업을 충분히 상징할것, 3) 모조나 도용을 방지할 특색을 구비할것"이었다.26)


<대한의학협회 85년사>의 기록에 따르면10여명이 응모하였고 최종적으로 조병덕(趙炳悳)의 작품이 당선되었는데, 그 휘장에 대해 “박애와 구료봉사를 상징하는 적십자를밑바탕으로 삼고 그 중앙에 구호와 평화의심벌인 의신(Caduceus)27)을 배치했으며 그장두(杖頭)에는 태극마크를 그려 넣고 그하부에는 의학협회의 영문 약자인 KMA를백색(준회원은 청색)으로 조각케 하였다”라고 밝히고 있다.28) 새로 제정된 의협 마크(휘장)는 이사회의 결의를 거쳐 같은 해 10월 31일 임시대의원 총회의 결의로 확정되어 1964년 휘장으로 바뀔 때까지 약 17년간사용했다.


조선의학협회의 휘장을 디자인한 조병덕은 1916년 서울 출생으로, 다이쇼실업친목회(大正實業親睦會)29)의 일원으로 조선일보발기인이기도 했던 조진태(趙鎭泰)의 손자이자, 경성의학전문학교를 졸업한 조병학(趙炳學)의 남동생이며,30) 일본 태평양미술학교를 졸업한 서양화가로 1938년 조선미술전람회(선전)에 참여한 이래 18, 19, 20, 21회 등 연 4회에 걸쳐 특선을 따냈고, 1940년 선전에서는 최고상을 받기도 하였다.31)또한 경성일보사와 조선군 보도부가 주최하고 조선총독부 정보과, 국민총력조선연맹,조선미술가협회가 후원한 대표적 친일미술전이었던 결전미술전람회(決戰美術展覽會)서양화 부문에 ‘가호반(歌護班)’이란 제목의작품으로 특선을 수상하기도 하였다.32)1944년 해방 직후에는 조선문화건설중앙협의회 결성에 참여하기도 하였고,33)34) 조선공예도안기술협회 결성에도 참여하였다.35)또한 1950년대 말부터 동아일보 등에 삽화를 그리기도 하였다. 국전초대작가로 1965년 목우회 회원이 되었고, 1977년 한국 신미술회 회원으로 활동하였다. 이화여자대학교 미술대학 서양화과 교수를 역임하였다.1981년에는 대한민국문화예술상을, 1995년에는 옥관문화훈장을 수상하기도 하였다.


3.2 두 번째 휘장(1964.5-1973.4.3)


휘장의 개정이 논의되기 시작한 것은1963년 12월이다. 대한의사협회 상임이사회의록에 나타나 있는 당시 정황은 다음과 같다.


“박이사장으로부터 지난 12월 1일 본회강당에서 서울지부 주최로 한성의사회창립기념식(48주년)이 있었는데, 그 석상에서 회기(會旗) 제정을 위한 현상모집운운의 말이 있었다 하므로 한격부(韓格富) 서울지부장에게 그 연유를 물어본결과 협회기 및 지부 사용 회기의 재검토를 느끼게 되었다는 제안 설명이 있었음.


이우주(李宇柱) 학술이사 : 협회의 K.M.A.영자만 기입되어 있고 우리나라 문자가전혀 표식되어 있지 않아 독립국가로서의 느낌이 감살(減殺)된 감이 있다.


박건원(朴乾源) 이사장 : K.M.A.의 약자는 육군사관학교에서도 약자표식으로 사용하고 있어 우리 협회와 혼돈할 수 있다.”36)


이러한 논의가 있은 후 1963년 12월 21일대한의학협회는 ‘협회기 및 지부 사용 회기재검토에 관한 건’이라는 제목으로 각 지부와 학회에 의견 요청 공문을 발송하였다.이후 1964년 3월 10일에 있었던 제2차 정기이사회에서 개정안을 일차적으로 추인하면서 다음과 같이 결정하고 있다.


“제8차 임사이사회에서 손기획이사37)에게 위임한 바 있는 협회기 수정 건에 대하여 손기획이사로부터 부분적 개조를시안한 도안을 제시하여 다각적으로 이를 검토한 결과 뱀(蛇)은 하나로 하고기타 색깔 등은 대체적으로 좋다는 결론으로 손기획이사에게 일임하여 다음 회기에 최종 결정짓도록 하다.”38)


1964년 4월 15일 제3차 정기이사회에서손영수 이사가 임원들에게 설명하고 “대체로 의견의 합치를 보고 손이사에게 일임하여 다소의 수정을 가하여 정기총회에 내어최종 결정을 보기로” 결정하였다.39) 그리고마침내 ‘하나의 뱀’으로 대치한 가로 및 세로 각 1.4cm인 휘장이 공지되기에 이른다.40)


첫 번째 휘장의 교체가 가지는 의미는 이시기 두 마리 뱀이 의학의 상징으로 적절하지 않다는 것을 판단하게 되었으며, 영문표현이 “독립국가로서의 느낌이 감살하는감이 있다”41)는 의견을 내고 이러한 의견이받아들여졌다는 점이다. 그러나 뱀이 두 마리에서 한 마리로 줄고 영문이 사라지기는하였으나 여전히 ‘날개’를 포함한 헤르메스지팡이의 잔재가 남아 있고 십자가가 남아있는 지극히 부분적인 개정이었다. 이 두번째 휘장은 이후 두 차례 더 개정되었으나, 현재 대한의사협회 산하 분과학회협의회인 대한의학회(Korean Academy ofMedical Science)는 이 두 번째 휘장을 기본으로 한 휘장을 대한의학회의 휘장으로계속 사용하고 있다.42)


42) 대한의학회(Korean Academy of Medical Science)의 휘장도 뱀의 수가 두 마리에서 한 마리로 줄기는 하였으나, 헤르메스의 지팡이의 상징인 날개가 그대로 남아있는 등 완전 한 아스클레피오스의 지팡이라 보기 어렵다.


3.3 세 번째 휘장(1973.4.4-1995.5.25)


세 번째 휘장은 1973년 4월 4일부터 사용되었다. 이와 관련하여 의협신보는 다음과같은 기사를 내보냈다.


“1973년 4월 4일 의협 상임이사회는 의협 마크를 새로 제정, 앞으로 의협 뺏지,휘장, 심볼로 사용키로 했다. 의협의 심볼인 마크의 제정은 지난 제7차 시마오총회43) 때부터 추진되어 오던 수임사항으로 이번 집행부가 여경구(呂卿九) 의무이사에게 그 도안을 일임, 여이사가시내 각 미대교수들과 광범위한 의견교환 끝에 최종도안을 마련 이날 상임이사회에서 확정된 것이다. 27차 정기 대의원총회 때부터 사용하게 될 협회 심볼의도안은 세계를 향한 의협의 상을 추구,웅대한 <비전>을 제시하고 있으며 또한대한민국의 지도적인 위치에 있는 의협의 <이미지>를 부각시키고 있다.”44)


이상의 기사에 따르면 새로운 휘장의 제정이 1971년 서울에서 열렸던 제7차 아시아대양주 의학협회연맹총회(CMAAO)에서 제기되었으며, 20대 한격부(韓格富) 회장(1970.4.29-1972.4.29) 체제와 제21대 회장조동수(趙東秀)(1972.4.29-1974.4.27) 체제 양대에 걸쳐 의무이사를 맡았던 여경구가 휘장 교체를 진행한 것으로 보인다. 왜 갑자기 휘장을 교체했는지에 대해서는 관련 자료를 확인할 수 없으나, 그 계기가 아시아대양주의학협회연맹총회이었던 것은 세계각국의 의학협회 관계자들과의 교류가 본격화되면서 대한의학협회 휘장이 적절하지 못하다는 지적을 받게 되었을 가능성이 있다.디자인의 변화를 중심으로 보면, 휘장의 디자인에서 헤르메스 지팡이의 잔재가 남아있는 아스클레피오스의 지팡이와 십자가가사라지고, 태극을 바탕으로 한 세계지도가등장한 것이 변화한 디자인의 핵심이라는점에서 ‘그리스 로마 신화’와 ‘십자가’ 등이개정의 이유가 되었을 가능성이 커 보인다.


3.4 네 번째 휘장(1996.4-현재)


1973년 제정 이후 22년 넘게 사용하였던휘장을 1996년 4월부터 네 번째 휘장으로바꾸어 사용하고 있다. 휘장을 바꾸게 된직접적인 계기는 기존의 ‘대한의학협회’가1995년 5월 26일부터 ‘대한의사협회’로 명칭이 개정되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이와 관련하여 의협신보는 다음과 같이 보도하고 있다.


“의협은 의협의 명칭 개정을 계기로 의협의 휘장(심볼마크)을 개정키로 하고이를 현상모집하기로 했다. 의협의 휘장은 1947년 10월 임시대의원총회 의결에의해 최초로 마련된 후 1973년 4월 1차개정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는데, 현재사용하고 있는 휘장은 빌리 그라함의 마크와 비슷하여 의사단체의 심볼이라고쉽게 알아볼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세계대다수 국가의 의사회 마크는 의신으로구성되어 있는데 현재의 의협 심볼은 의신이 빠져 있어 의협의 심볼로 적당치않다는 여론에 따라 이를 새로 개정하기로 한 것이다. 의협은 이번 휘장 공모와함께 모든 문건에 사용할 표어도 함께공모하여 이를 사용하기로 했다.”45)


대한의사협회는 1995년 6월 의협휘장 및표어를 공모하였는데, 공모 시 밝히고 있는휘장 디자인의 조건과 상금은 다음과 같다.


“대한의사협회는 협회 휘장(심볼마크)과표어를 오는 8월까지 공모한다. 휘장은의사 또는 의사단체임을 상징하는 내용과 의신이 가미된 도안으로 하되 바탕색은 3도 이하로 공모하고 표어는 의사가국민의 건강을 기키는 파수꾼임을 강조하고 국민으로부터 친근감을 줄 수 있는내용으로 16자 이하로 공모하고 있다.상금은 휘장의 경우 당선작 1명은 2백만원, 가작 1명 50만원, 표어는 당선작 1명50만원, 가작 1명 20만원이다.”46)


1996년 4월 8일자 의협신보에는 의협 새휘장과 표어가 탄생했다는 소식을 다음과같이 싣고 있다.


“대한의사협회의 새 휘장<사진>이 결정되었다. 또한 의협의 새 표어도 결정되었다. 의협은 지난 1995년 6월 의협의휘장을 새로 결정하고 표어도 새로 정하기로 결정한 후 이를 공모, 휘장은 16명이 27점을 응모하고 표어 모집에는 37명이 74점을 제출하였는데, 휘장의 결정은5차의 전시와 공람을 통해 심사하여 휘장에는 이원재(포디텔 광고회사 근무)씨작품을 당선작으로 김병로(서울녹십자의원 원장)씨의 작품을 가작으로 선정하고,표어에서는 <국민건강 수호하는 대한의사협회>를 당선작으로, <환자를 내 몸같이 국민을 가족같이>를 가작으로 선정했다. 휘장 당선작에는 2백만원의 상금이 그리고 표어 당선작에는 50만원의상금이 수여된다."47)


네 번째 휘장은 헤르메스의 지팡이가 기본적인 상징이다. 이것은 초기 공모가 논의될 때부터 “세계 대다수 국가의 의사회 마크는 의신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현재의 의협 심볼은 의신이 빠져 있어 의협의 심볼로적당치 않다”48)라는 의견이 있었기 때문에휘장에 ‘의신’을 포함시켜야 했을 것으로 보인다. 첫 휘장과 비교하여 장두의 태극마크가 없어지는 대신 적십자 배경을 대신하여태극마크가 배경이 되었다. 결론적으로 이디자인은 첫 번째 휘장과 기본적인 상징과디자인을 공유하고 있다.


휘장의 조건으로 분명히 ‘의신’을 강조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헤르메스의 지팡이’가 기본 상징이 된 것은 분명한 오류로 보인다. 이러한 오류는 첫 번째 휘장의 디자인을 기본으로 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따라서 이러한 디자인의 ‘회귀’는 과거 역사에 대한 면밀한 검토의 부재, 휘장 선정 과정에서의 충분한 검토 등 관심과 신중함의부족에 기인한 것으로 보인다.


4. 미군정기 미군 의무부대(US MedicalArmy Corp)와의 관련성


현재 대한의사협회 휘장이 헤르메스의 지팡이를 사용하게 된 것이 첫 번째 휘장과관련이 있다면, 첫 번째 휘장의 헤르메스지팡이는 어떻게 채택된 것일까?


헤르메스의 지팡이를 상징물로 하는 대한의사협회의 휘장은 미군정기 미군 의무부대(US Medical Army Corp)의 상징에 영향을받은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추정의 근거는다음과 같다.


    • 첫째, 첫 휘장이 제정된 1947년은 미군정시기였으며, 이때 우리나라의 보건의료체계의 재편을 주도하고 있던 이들은 미군 의무부대였다. 이들은 헤르메스의 지팡이를 그들의 휘장으로 사용하고 있었다. 또한 바탕에 적십자를 그 배경으로 삼고, 한글이 아닌 영문 KMA를 휘장에 포함한 것도 당시미군정기의 영향을 반영하고 있다고 보인다.
    • 둘째, 조선의사협회와 미군정은 매우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구체적으로조선의사협회의 전신이라고 할 수 있는 건국의사회와 조선의학연구회의 주요사업 중하나가 ‘미군정의 보건행정시행에 관한 자문’49)이었다. 건국의사회의 위원장을 맡았던이용설(李容卨)은 미군정의 보건후생부장을역임하기도 하였으며, 임원이었던 임명재(任明宰), 김성진(金晟鎭) 등도 미8군의 자문관으로 미군정에 참여하였다.50) 조선의학연구회의 임원이었던 조동수(趙東秀)도 미군정 위생국원으로 활동하였다.
    • 최초 휘장의 제정이 이루어진 1947년 초대 대한의학협회 임원진은 심호섭(沈浩燮,회장), 김명선(金鳴善, 부회장), 최상채(崔相彩, 부회장), 최제창(崔濟昌, 상임이사), 백인제(白麟濟, 상임이사), 김성진(상임이사, 서기겸임)이었다.51) 임원 중 김명선은 1932년미국 노스웨스턴(Northwestern University)대학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으며52), 최제창은 1935년 버지니아 주립대에서 의학박사를취득하였다. 특히 최제창은 미군정 실시 직후인 1945년 10월 9일 미군정 최초로 위생국원에 임명된 9명의 조선인 중 한 사람일뿐만 아니라 미군정 보건후생부 차장(1945.8-1948)으로 적극적으로 미군정 활동에 참여하였다.53) 54) 김성진 역시 미군정보좌관으로 활동하였다.
    • 셋째, 미군의 영향을 더욱 직접적으로 받은 한국군 의무부대의 상징 역시 미군 의무부대의 상징과 동일하였고, 최근 일부 모형의 변화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헤르메스 지팡이를 기본으로 하고 있는 것도 미군정기의 영향을 보여주는 것이다. 특별히 제2차세계 대전 직후 미군에 의한 군정이 이루어졌던 한국, 일본, 대만의 의무부대들은 현재까지도 모두 미군 의무부대와 동일한 헤르메스의 지팡이를 그 기본적인 상징으로 사용하고 있다.


특별히, 일본에서의 아스클레피오스 지팡이의 수용 과정을 연구한 후루카와는 아스클레피오스가 일본에 최초로 소개된 것이1718년 독일 하이스터(Heister) 등이 쓴 외과학책의 1741년 판 네덜란드어 번역본 표지의 그림을 통해서라고 주장하였다.55) 그후 아스클레피오스의 지팡이는 1909년 <도규신보(刀圭新報)>의 표지 등에서도 발견된다. 타다(太田)에 따르면 독일 육군 군의부의 영향을 받아 메이지 19년(1886년)에 위생하사관의 견장으로 아스클레피오스의 지팡이를 사용하였고, 메이지 23년(1890년) 신제도로 발족한 군의 지원병과 견습군의의표시로 금색의 뱀 지팡이를 사용하였다고한다. 하지만 이것은 메이지 38년(1905년)복장 개정으로 폐지되었다고 한다.56) 일본의사회는 소화 36년(1961년)부터 절구와 절구공이를 한 마리 뱀으로 도안화한 것을 문장으로 사용하고 있다.57) 이렇게 이미 아스클레피오스의 지팡이를 사용하던 일본임에도 불구하고 제2차 세계대전 종전 이후 창설된 일본 자위대의 군의와 군 간호사들은미군 의무부대가 사용하고 있는 헤르메스의지팡이를 그 상징으로 사용하고 있는데, 이것 역시 미군정의 영향으로 보인다.



5. 고찰 및 결론


5.1 헤르메스의 지팡이와 아스클레피오스의지팡이 논쟁


‘두 마리 뱀과 지팡이’로 구성되어 있는상징물이 헤르메스의 지팡이이므로 의학의상징으로 적합하지 않다는 주장에 대한 반론은 크게 세 가지로 나눌 수 있다. 

    • 첫째,‘두 마리 뱀과 지팡이’는 헤르메스를 상징하지 않는다는 주장이다. 그것은 수메리아 치료의 신인 '니지쉬지다(Nigishzida, 기원전3000년경)'의 상징,58) 또는 성경에 등장하는모세의 지팡이59)를 의미한다는 주장이다.
    • 둘째, 헤르메스의 지팡이도 의학의 상징이될 수 있다는 주장이다. 왜냐하면 헤르메스는 연금술사(alchemy)의 신이기도 하기 때문이며, 또한 헤르메스의 상징을 의학의 상징으로 사용하던 시기 보건활동은 해양 교역과 산업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었기때문이라는 것이다.60) 
    • 마지막으로 헤르메스의 지팡이를 의학의 상징으로 채택한 것은오류였으나, 이미 오랜 기간 사용되었으므로 현재의 상징으로 유효하다는 것이다.61)


이러한 반론에도 불구하고, ‘두 마리 뱀과지팡이’는 헤르메스를 상징하며 헤르메스의지팡이를 의학의 상징으로 사용하는 것은오류라는 주장이 지배적인 것으로 보인다.세계보건기구, 세계의사회, 미국, 영국, 중국, 일본, 대만 등 주요 국가들의 의사협회에서도 ‘한 마리의 뱀’을 휘장으로 채택하고있다. 더욱이, 대한의사협회가 사용하고 있는 휘장은 그 제정과정을 볼 때 ‘헤르메스의 지팡이’이며 적절하지 않은 선택으로 보인다. 

    • 그 이유는 첫째, 첫 휘장의 제정 시에이미 이 상징이 의학의 상징이 아니라 “평화의 심벌인 의신(caduceus)을 배치했다”라고 밝혔다.62) ‘카두세우스(caduceus)’는 그자체가 ‘헤르메스 지팡이’를 의미한다. 
    • 둘째,의사협회는 첫 번째 개정 시 뱀의 수를 두마리에서 한 마리로 수정하였고, 두 번째개정 시에는 관련 디자인 자체를 삭제하였는데, 이는 의사협회가 헤르메스의 지팡이가 협회의 상징으로 적절하지 않다는 것을인정하였음을 의미한다.


5.2 대한의사협회 휘장과 상징


대한의사협회 휘장이 헤르메스의 지팡이든 아스클레피오스의 지팡이든 대한의사협회가 휘장을 통해 나타내려고 했던 상징은‘의료의 존엄성, 박애, 구료, 봉사, 평화(첫번째 휘장)’,63) ‘세계를 향한 의협의 상, 웅대한 비전, 지도적 위치(세 번째 휘장)’64)였던 것으로 보이며, 궁극적으로는 치료의 기술이 뛰어나고 많은 환자들의 존경의 대상이었던 ‘흠 없던 의사 (blameless physician)’,65) 아스클레피오스였던 것으로 보인다.


역사의 산물로서 대한의사협회 휘장이 가지는 상징은 무엇일까? 일부 수정에도 불구하고 미군정 군의의 휘장을 기본 디자인으로 채택하고 있는 대한의사협회의 휘장은한국 의사협회의 역사가 얼마나 과거의 역사, 특별히 미군정과 긴밀한 관계를 맺고있으며, 여전히 완전하게 그 역사를 넘어서지 못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상징(symbol)’이 되고 있다. 그 상징의 역사 속에서는 헤르메스의 지팡이를 아스클레피오스의 지팡이로 교정하려는 노력과 휘장에 태극마크를포함하고 영문을 지우려는 노력의 역사도포함되어 있다. 하지만 최초 휘장의 형태로돌아간 현재의 대한의사협회 휘장은 휘장선정의 오류와 미군정의 영향을 넘어서려했던 과거의 노력들과 단절되었고, 결정 과정에서 관계자들의 관심과 신중함이 충분하지 못했음을 보여준다. 미국의 경우에서도,맥쿨로흐(McCulloch)는 미군의무부대의 상징을 ‘헤르메스의 지팡이’로 삼는 오류를 범한 것에 대해 “우리가 이것의 역사적, 인간적 면에 너무나 무관심했다.”고 반성하고있다.66)


5.3 대한의사협회 휘장이 주는 도전적 질문


들대한의사협회 휘장의 역사는 끝나지 않고현재에도 한국 의사 사회에 도전적인 질문을 던지고 있다. 휘장과 상징은 중요한가?상징은 그저 상징일 뿐 실체가 아니므로 그것의 적절성에 대한 논의의 가치도 그만큼적은 것은 아닌가? 아니면 “우리는 상징들이며, 상징들 속에서 살아간다(We aresymbols, and inhabit symbols)”67)라는 에머슨(Emerson)의 말처럼, 이 세상은 온통상징으로 가득 차 있으며 우리가 지키고 이루려고 하는 것도 그 상징과 밀접한 관계를가지므로 그 상징을 바꿈으로써 세상 또한바뀌는 것이 아닌가? 그렇다면 대한의사협회의 휘장은 바꾸어야 하는가? 바꾼다면 어떤 상징을 선택할 것인가? ‘아스클레피오스’를 택할 것인가? ‘헤르메스’를 택할 것인가?아니면 또 다른 상징을 택할 것인가? 만약휘장을 바꾼다면, 해방 후 60년 넘게 그 휘장이 가졌던 상징은 어떻게 할 것인가? 최근 의료부문의 상업화 경향이 커지고 있고,참여정부도 의료부문을 국가 성장 동력으로서 ‘의료산업화’를 천명하고 있으며 생명공학이 의료부문의 핵심영역으로 자리잡고 있는 작금의 상황에서 ‘상인의 신’이자 ‘연금술사의 신’이기도 한 ‘헤르메스’는 오히려적합한 상징일까? 창립 100주년을 준비하고있는 시점에서 대한의사협회는 이러한 질문에 대답해야 할 것이다.


대한의사협회 휘장의 역사는 현 휘장의상징이 잘못 선택된 것이라는 사실을 지지한다. 하지만 이것의 교정 여부를 결정하는것은 전적으로 대한의사협회의 몫이다. 분명한 것은, 어떤 결정이 내려지든지 그것은대한의사협회 휘장에 또 하나의 역사를 더하고 그 역사는 또 다른 ‘상징’을 더하게 될것이다.





A History of Korean Medical Association’s Emblem : the Caduceus of Asklepios and Hermes

SHIN Young-Jeon*


An emblem represents the identity of an organization. Through the emblem of an organization, they differentiate the members from others and reinforce the membership, homogeneity, and pride. It is also a tool that an organization officially publicizes its mission and values.


The symbol designed by Cho, Byungduk was announced as the first emblem of Korean Medical Association(KMA) on October 31st 1947. His design work has the caduceus with the Taeguk sign on the top, the symbol of Korea, and the Red Cross in the background including the name, ‘KMA’.


Since then, the emblem was revised three times: in 1964, 1973, and 1995. The current symbol is based on the design of the first one. Although Asklepian, the single serpent-entwined staff of Asklepios, is the one known as the symbol of medicine, this emblem takes the caduceus of Hermes who is the patron god of merchants, thieves, and travelers.


The mistake comes from the unawareness of the distinction between the caduceus of Asklepios and Hermes. Moreover, it proves that U. S. Army Medical Corps(USAMC) heavily influenced the reconstruction of Korean health care system including KMA. The USAMC has used the symbol of caduceus since 1902. In 1947, the year that the first emblem of KMA was established, Southern part of Korea was governed by the United States Military Government(USMG, 1945-1948).


The current emblem of KMA brings up a question whether we should continue to use the symbol that was taken from USMAC in the historical period of USMG governance. Celebrating 100th anniversary year of KMA, KMA needs to re-evaluate the appropriateness of the KMA symbol.


Key Words : Korean Medical Association(KMA), History, Emblem, Symbol, Asklepios, Caduceus



의학교육의 역사적 인식

고려대학교 의과대학 성형외과학교실

안덕선







아시아의 국가별로 의학교육의 특성을 살펴보면 불행하였던 과거사가 그대로 나타난다. 동남아시아 국가의 경우 영국의 식민지였던 과거가 오늘날의 교육적 특성으로 잘 나타나고 있고, 한국과 대만 그리고 일본은 독일의 국가의료를 도입하였던 일본의 그림자가 그대로 반영되어 있다. 우리나라 의과대학의 예과와 본과 형태를 갖추고 있는 기본의학교육과정은 이제 지구상에서 찾아보기가 매우 힘들다. 일본조차도 예과교육의 어려움과 비효율성을 자각하고 예과와 본과의 2단계 교육을 포기하고 6년제 통합교육을 선택하였다. 그러나 경계선만 지워졌지 실상 교육내용이 근본적으로 잘 바뀐 것은 아니다. 아시아에서 의학교육의 강국은 홍콩, 싱가포르 등 구 영국의 교육제도에서 성장했던 나라들이다. 최근 말레이시아의 약진을 보면 이런 사실이 더욱 눈에 보인다. 영국 식민지나 영연방국가였던 아시아 국가의 특징은 세계적인 교육의 흐름에 대한 이해가 높고, 식민지의 경험을 통해 현재까지도 교육에 있어 영국문화와 계속적으로 교류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우리나라의 식민지 형태는 악성식민(malignant colonization) 정책이었던데 반하여 영국의 식민정책은 언젠가 식민주민이 스스로 독립하여 근대국가를 형성할 수 있도록 하였다는 계몽식민(enlightenment colonization)이었다는 차이점을 보인다. 아시아의 영국식민지는 독립 후에도 영국과의 관계를 잘 유지하여 현대적 민주사회와 전문직의 발달을 도모하였다. 실상 2차세계대전 이전의 아시아에 대한 영향력은 영국이 월등히 앞서보인다. 이런 전문직 성장과정은 전문직 단체의 기능을 일찍 이해하고 전문직이 갖추어야 할 기관전문직업성(organizational professionalism)의 형성을 가능하게 하였다. 동아시아 특히 한, 중, 일에서 전문직의 역사는 존재하지 않았었다. 이것은 식자층인 사층(socra-aristocrat)이 전문직 역할을 담당했었던 유교의 독특한 문화형태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유교적 사(士)층의 가족적 범위의 사고는 사회계약적 형태의 근대적 전문직 사고를 발달시키지 못하였다. 유럽의 전문직의 역사가 근대로 진입하면서 자율규제나 사회적 계약에 대한 사고가 발달한 반면 의, 법으로 대변되는 우리의 전문직은 아직도 거시적 사고의 발달장애를 보여준다



의학교육의 발달을 위하여 우리의 의학 교육계도 부단한 노력을 하여 왔다. 1990년대에는 교육방법론과 평가에 대한 신개념 도입이 활발하였고 그 결과로 의사국가시험에서 실기 시험도 실시하게 되었다. 그러나 소규모 그룹 위주의 수업은 아직 이론에 그치거나 지지부진한 상태를 면하지 못하고 있다. 2000년대에는 의학교육 방법론에서 벗어나 우리의 의학교육의 정체성에 관한 논의가 시작되었다. 1980년대 교육학자 이성호는 일제가 전수한 서양의 학문은 정통성을 상실한 변질된 것임을 간파하였다. 한영림의 분석에 의하면 일제는 고등교육에서 조선인의 이성적 진보를 이끌어낼 수 있는 인문학이나 고급과학기술은 정책적으로 삭제하였다고 밝히고 있다. 일제가 우리에게 물려준 식민지형 고등교육제도에서 의학은 자연과학으로 굳어졌다. 이런 과학 중심의 의학은 일제가 끝나고 현재에 이르기까지 계속 진행 중에 있다. 이제는 서양의학의 발전이 인문학에서 출발한다는 사실과 자연과학의 인간적 적용을 위하여 인문학이 필요하다는 것도 깨닫게 되었다. 우리의 고등교육이 식민교육에서 출발하는 것은 부인할 수 없다. 그러나 아직도 식민문화유산이 고등교육에 스며들어 있는 현재의 교육을 마치 우리의 고유한 것으로 생각하게 만드는 함정 역시 우리가 갖고 있는 정치, 사회, 문화적 배경에 대한 이해를 통해 반드시 극복하여야 한다. 식민의학교육 유산의 최대 약점은 의학에 대한 시선이 아직도 자연과학적으로 국한된다는 것이다. 의학은 정치, 사회, 경제, 문화를 총망라하는 통합적이고 종합적인 학문이다. 자연과학적 의학교육은 우리의 의료를 과학적 의학(scientific medicine)에 국한시키고 사회적 실천(social practice)으로 이행시키지 못하게끔 하는 원인이 되고 있다. 의학에 관한 종합적인 관점의 상실은 의료가 갖는 사회적, 문화적, 역사적 배경에 대한 이해부족의 현상을 초래하고 의료를 중심으로 펼쳐지는 인간, 가족, 사회와는 거리를 두고 있다. 의료계 일각에서는 1차 진료 강화와 활성화를 주장하지만 실제로 우리사회에서 1차 진료를 정확히 이해하는 것은 매우 힘들어 보인다. 1차 진료의 활성화는 의학의 과학적이고 기술적인 문제가 아닌 사회의 문화적, 제도적 그리고 역사적인 문화자산(culture capital)의 형성을 요구한다. 같은 이치로 자연과학 중심의 의학교육은 의료윤리나 전문직 단체의 기관전문직업성의 발달장애로 나타나기도 한다. 과학적 의학 자체와 의과학 위주 교육방식이 1차 진료의 본질적 의미와 사회적 실천이라는 개념의 수용을 방해하는 장애요인이기 때문이다.



의료는 곧 문화이다. 물론 의사를 양성하는 의과학의 내용은 세계 공통적이다. 그러나 의료의 양상은 사회적, 문화적, 역사적 환경에 따라 매우 다르게 표현된다. 현재 전문의 위주의 고도로 전문화된 우리의 의료문화가 어디서 기원하였는가를 곰곰이 생각해보고 성찰적인 입장에서 접근할 필요가 있다. 우리나라의 의사의 역할은 과학적 의학의 수준에서 ‘간헐적 전문 기술제공자’로 표현된다. 또한 우리나라에서 1차 진료는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타국과의 의료에 대한 비교 문화적 방법을 도입하여 보면 우리의 의료에 대한 모습을 더욱 정확히 파악할 수 있다. 임상교육의 취약점을 둘러싼 우리와 일본, 대만의 이야기는 놀랄 만큼 비슷하다. 그리고 의료의 형태와 속성도 닮은 점이 매우 많다. 대만과 일본의 의학교육에 관한 영문문헌을 검토하여 보면 마치 우리나라의 의학교육의 문제를 잘 기술하고 대변한 것 같다



우리의 의료문화를 비판적 입장에서 접근하면 의학교육의 나아갈 방향도 제시된다. 비판적 입장의 시각을 갖추기 위해 먼저 할 일은 의학교육에 대한 역사적 인식이다. 아직도 우리나라 의학교육의 많은 부분은 일제가 물려준 식민지형태의 교육을 답습하고 있다. 졸업 후 교육의 특성도 가족적 단위의 의국문화이다. 가족적 교육의 특징이 좋고 따뜻한 점도 있다. 그러나 의료가 갖는 사회성과 전문직이 갖는 보편적 가치의 창출이라는 입장에서 보면 이제 가족적 교육은 탈피할 때가 되었다. 또한 우리가 갖는 군사적 문화의 유산, 비민주적 형태의 교육을 탈피하기 위해서는 의학교육이 세계적 변화의 물결과 동시성을 추구하면서 동시에 우리의 과거를 반추하는 양방향적인 노력을 경주해야 한다. 역사의 공부는 과거의 반성과 건설적 미래의 설계에 있다. 



우리 의학교육의 미래는 최신 지견의 도입으로 해결되지 않는다. 최신 지견이 우리 토양에서 생존하기 위해서는 최신 지견이 갖고 있는 역사적, 문화적 전통에 대한 이해가 같이 되어야 하고 우리의 토양에서 정착되기 위한 우리의 역사적, 문화적 전통에 대한 이해도 동시에 이루어져야 하기 때문이다. 이런 사실은 흔히 의사소통 교육에서 환자와 의사의 공감대 형성을 강조하는 것과 동일한이치다. 우리 의학교육이 걸어온 지평과 최신 지견이 탄생된 사회문화적 배경이 같이 만나 공유점이 발견되지 않는 한 새로운 경향과 지견은 탁상공론이나 ‘의학교육학주의’로 변질될 수밖에 없고 의학교육의 변화를 이끌어내는 원동력이 되지 못한다. 의학교육자가 철없는 이상론자나 시대착오적 이론가로 인식되지 않기 위하여 의학교육 참여자 모두가 공감을 시작할 수 있는 공통관심의 원점을 필요로 한다. 우리에게 100년 정도 되는 의학교육의 역사적 인식은 의학교육의 발전을 실천으로 이끌 수 있는 가장 좋은 전략적 지점이 될 수 있을 것이다.




Korean J Med Educ > Volume 23(2); 2011 > Article

© The Korean Society of Medical Education. All rights reserved.


(출처 : http://www.urmc.rochester.edu/medical-humanities/)


“The spirit of Humanities is the greatest single gift in education.”

William Osler,The Old Humanities and the New Science, 1919.



Premedical 과정에 대한 개혁의 요구는 오래 전부터 꾸준히 있어왔다. Premed의 요건을 표준화시키려는 첫 번째 시도는 1904년 AMA의 Council on Medical Education으로부터 시작되었고, 1910년 Abraham Flexner는 현재와 같은 기초과학 요건을 중심으로 한 과정을 확립시켰다.

The most consistent and strident calls for medical education reform over the past century have focused on premedical preparation. The first attempt at standardizing requirements for medical school admission came in 1904 from the American Medical Association’s Council on Medical Education. In 1910, Abraham Flexner recommended requiring biology, chemistry, botany, and physics, and by 1930, today’s premedical science preparation — biology, chemistry, organic

chemistry, and physics — was firmly established.


그러나 최근들어서 기존의 Premed 요건을 강화, 정비, 또는 폐지하라는 요구가 늘어나고 있다.

Recent years have seen many calls for enhancing, overhauling, or abolishing the traditional premed requirements.1-3 


여러가지 비판이 있는데...

과학이 발전하고 그것이 임상에 적용되는 속도가 Premed의 요구조건을 너무 앞서나가고 있고

정보기술이 지식의 암기를 불필요하게 만들었고

Premed 요건들이 임상적 과학적 사회적 관련성이 떨어지는 것

등등...

Critics argue 

that the pace of scientific discovery and its clinical application have outstripped the requirements; 

that information technology has made memorizing vast amounts of content unnecessary; 

that the requirements lack clinical, scientific, and social relevance; 

that they’re used to cull the herd of talented aspiring physicians; 

that they disadvantage minority and female students; 

that they crowd out studies of bioethics, social justice, and health policy; 

and that rigidly structured premedical and medical school curricula hinder students from becoming self-directed lifelong learners.1-4


게다가 Premed syndrome이라는 것이 생겨서, 학생들은 의학적 프로페셔널리즘과 상충되는 과도한 점수에 대한 경쟁을 벌이고 있다.

Furthermore, the current model has perpetuated “premed syndrome,” a culture of aggressive competition for grades that conflicts with the precepts of medical professionalism: 

academic and intellectual rigor, 

creative thinking, 

collaboration, 

and social conscience.2


기존의 것들을 그대로 둔 채 인문학, 사회과학, 중개연구 등을 포함하는 Premed교육을 확장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Expanding premedical education by requiring humanities, social sciences, or translational sciences without removing current requirements is untenable


또한 MCAT은 여전히 기존의 과목에 초점을 맞추고 있기 때문에 단순히 대체시키는 것도 불가능하다.

Nor can current requirements simply be replaced with more relevant courses. 

Medical College Admission Test (MCAT) still focuses on traditional content.1,2


이미 많은 사람들이 premedical education에서 갖춰져야 할 것들을 제시하고 있다.

Others have described premedical education’s ideal elements: 

academic rigor with less gradesdriven competition; 

independent mentored scholarship; 

flexibility to pursue widely varied majors; 

self-directed educational plans that foster lifelong learning; 

more scientifically and clinically relevant coursework; 

and more courses instilling an appreciation for medicine’s social, political, and economic contexts.2,3


Mount Sinai's Icahn School of Medicine에서는 HuMed라는 preclinical track을 만들었다. 이 과정에서는 기존의 premed과정을 하지 않아도 될 뿐만 아니라, MCAT 을 볼 필요도 없다.

At Mount Sinai’s Icahn School of Medicine, we have a quartercentury’s experience with an “early assurance” alternative to the traditional premedical track: the Humanities and Medicine Program (HuMed). Since 1987, humanities majors have been entering medical school here having neither undergone traditional premed science preparation nor taken the MCAT.


후향적 분석을 해보면 많은 면에서 이들 HuMed 학생들은 기존의 학생들과 비슷한 수준의 성취를 보여준다.

According to a retrospective analysis...

these students performed as well as their peers on metrics including clerkship honors, 

selection to honor societies, 

participation in scholarly-year research, 

first-author publications, 

leadership activities, 

and community service. 


USMLE step 1 점수는 더 낮았다.

Scores on the U.S. Medical Licensing Exam Step 1 were lower for HuMeds than for traditional medical students (221 vs. 227, P = 0.0039), and more HuMeds required a nonscholarly (personal or medical) leave of absence There were no differences in the proportion who failed courses


장기적 outcome을 분석해보면 더 높은 비율로 medical school과 affiliated되어 있거나 academic position을 잡고 있다.

Analysis of long-term outcomes reveals that a higher proportion of HuMeds than other graduates are affiliated with a medical school and hold an academic position.


HuMed의 가장 큰 교훈은 기존의 premed 과정을 대체할 수 있는 방법이 있다는 것을 보여준 것이다.

The most important lesson of HuMed is that there are viable alternatives to traditional premed preparation


또한 최근의 변화에도 불구하고 MCAT은 여전히 기존의 관점을 유지할 것으로 보인다. MCAT점수가 이미 valid, reliable, predictive하지 않은 것이 증명되었음에도, 의과대학의 순위를 매기는 것과 같이 의도하지 않은 방향으로 사용되고 있다.

Finally, despite recent changes, the MCAT will maintain a focus on content (organic chemistry and physics) with little relevance to medical practice or translational science. Though the MCAT score has proved valid, reliable, and predictive, it’s being used in unintended ways: as a surrogate for individual academic excellence and a metric for medical school rankings.


Flexner의 제안은 그 당시에는 옳았을 수 있다. 하지만 우리의 시대에서는 객관성(objectivity), 헌신(commitement), 용기(courage)를 바탕으로 학생들이 더 나은 진로를 준비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Flexner’s proposals for more structured curricula were right for his era and revolutionized the teaching, investigation, and practice of medicine. But we have failed him by allowing premedical curricula to ossify despite advances in science, clinical practice, and technology. Our times, too, require the objectivity, commitment, and courage to pursue better ways of preparing students for careers in medicine and biomedical science.




 2013 Apr 25;368(17):1567-9. doi: 10.1056/NEJMp1302259. Epub 2013 Apr 10.

Reforming premedical education--out with the old, in with the new.

Source

Office of the Dean for Medical Education, Icahn School of Medicine at Mount Sinai, New York, USA.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