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oks (Medical Education)
Learning to Heal : Chapter 1. 19세기 중반의 미국 의학교육(American Medical Education in the Mid-Nineteenth Century)
Meded.
2013. 5. 13. 20:44
- Medical Education in Mid-Century
- Civil War는 Medical Tragedy였다.
- 병으로 죽은 사람 > 전쟁으로 죽은 사람
- 하지만 physician은 도움이 되지 못했다.
- 몇 가지의 약과 amputation과 같은 수술법 뿐.
- Laudable pus(고름 짜내기), suppuration은 치유 과정이다 라는 생각으로 오히려 infection을 더 퍼뜨림(손가락으로 찔러대서)
- Civil War는 비록 고통스럽긴 했지만, 19세기 중반의 미국의학교육의 부족한 부분을 분명히 드러내주었다.
- 유럽에서는 이미 효과가 없는 것으로 밝혀진 것을 사용하거나, 효과가 있다고 증명된 것을 사용하지 않았다.
- AMA의 풋내기스러움에 대한 분노로 광적인 사이비종교집단의 의사에게 개방되었으나 더 악화될 것도 없었다.
- 확실한 것은 미국의학교육은 실패했다는 것.
- 이런 진료 상황은 그들의 교육의 결과였음
- 1860년대 : Proprietary medical school (Apprenticeship system, 견습)
- 1800년에 세 군데였던 것이 급격하게 증가.
- 코스는 두 개의 4달짜리 코스를 하는 것, 그나마도 두 번째 term은 첫 번째와 동일한 코스.
- 'scientific subject' 보다 'practical' value가 더 강조됨
- 면허를 받기도 쉽고, 어린 나이에 받게 되며, 이조차도 무시되기 일쑤였음.
- Instruction은 전적으로 didactic.
- Laboratories, Delivery, Examination 등의 경험이 전무한 상태로 졸업
- Entrance requirement는 거의 존재하지 않았다.
- Literacy도 필요하지 않음.
- Requirement는 낮은데, 종종 어떤 경우에는 범죄 수준의 방종 상태에 이르곤 함.
- Diploma의 매매도 성행했다.
- 학생 훈육도 심각한 문제
- 카데바의 일부를 창 바깥 행인에게 던지는 일도 있음.
- 그럼에도 이런 허술한 입학기준은 '백인'에게만 적용되었다.
- 여자에 대해서도 흑인에 못지 않은 높은 진입장벽이 있었다.
- 심지어 Harvard에서 높은 수준의 의학교육 혁신을 외쳤던 사람도 '그래도 여자는 안 된다'라고 했을 정도.
- 19세기 중반의 Proprietary school은 university 혹은 hospital affiliation이 없었다.
- 학교당 Faculty의 숫자는 6~8명의 교수진 정도.
- 성공의 척도는 졸업생의 숫자 & profitability
- Profit에 대한 집착이 심해져 미국의학교육 역사상 있을 수 없는 일들이 일어난다. (Rampant commercialism)
- 돈만 내면 6주만 다녀도 4개월을 인정해줌.
- 수사적인 과장을 다 인정해준다손 치더라도, 1860년대의 의학교육은 끔찍하게도 허술했다.
-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부 '권위자' 혹은 '전문가'들이 존재하긴 했다.
- 주요한 alternative 중 하나는, 특히 1800년대 초반에는 apprenticeship이었다.
- 모든 alternative educational pathway 중에서 apprenticeship은 "the least reliable"이었다.
- 두 번째 alternative는 nondegree-granting medical school에 의해서 제공되었다.
- Extramural private medical school. Hands-on clinical experience.
- 기존의 교육보다 훨씬 나은 교육 제공.
- "house pupil"로서 병원에 있는 것 또한 한가지 supplement였다.
- 1820년대, 1830년대에 시작되어 점점 더 널리 퍼짐.
- 그리고 그 임무도 더 막중해짐.
- 용어의 혼란 : House pupil, Intern, Resident.
- 어쨌거나 중요한 것은 운이 좋은 매우 소수의 학생만이 intensive clinical training을 받을 수 있었다는 점.
- 네 번째 주요한 alternative는 유럽으로의 유학.
- 유학의 메카는 프랑스, 파리.
- 이러한 것들(supplement)의 결과로 미국의학교육의 결과는 그 시스템에서 나올 수 있는 것보다 훨씬 나은 수준이었다.
- 다만 문제는 이러한 교육이 매우 소수에게만 주어졌다는 것.
- 19세기 중반의 의학교육에 대해서 가혹하게 평가하기는 쉽지만, 사실 19세기의 첫 2/3동안 proprietary school은 일반 대중을 어느 정도 만족시키고 있었다.(public satisfactorily)
- 그 시대 상황으로는 없는 것보다는 조금이라도 있는 것이 나았다.
- 또한 초기 의대 교수들의 탐욕에 시선이 집중되어있긴 하지만, 좀 더 균형잡힌 시각으로 바라보는 사람은 이러한 commercialism은 드문 것은 아니었다고 하더라도, 어느 정도는 예외적인 현상이었다.(exception rather than the rule)
- 1860년대 이후에는 더 이상 proprietary school이 현대의학교육의 필요에 부응할 수 없었다.
- (유럽의) 과학은 빠른 속도로 발전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