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간 커뮤니케이션 능력의 중요성
(KOREAPR.review 44호<2008년 4/5월 호>에 게재된 최윤희 교수(수원대 언론정보학과)의 문화 간 커뮤니케이션 능력의 중요성에 관한 글을 소개합니다. 최 교수는 이글에서 세계화 시대에 한국인들이 갖쳐야 할 능력 중 하나는 문화 간 커뮤니케이션이라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많은 참조 바랍니다.)


“세계화 시대에 한국인들이 갖춰야 하고 필요한 능력 중 하나는 문화 간 커뮤니케이션이다.”

문화의 속성 중에서도 누구나 감지할 수 있고, 쉽게 식별할 수 있는 것이 문화의 차이이다. 문화의 차이는 상대적이긴 하지만, 한 문화권 안에서도 문화의 차이를 경험 할 수 있다. 만일 온 세상의 문화가 동일하다면 문화의 차이 때문에 오는 실수도 없을 것이고, 문화의 충격도 걱정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하지만 세계의 각 나라들은 아직도 각기 독특한 언어, 제도, 생활관습을 유지하고 있다. 이러한 문화의 차이는 국제커뮤니케이션은 물론 개개인들 간 커뮤니케이션에 심원한 영향을 미친다.

우리가 우리와 다른 이들을 관찰할 수 있으며 그들을 있는 그대로 대할 수 있음은 아름다운 일이다. 이러한 능력은 저절로 생기는 것이 아니며 학습을 통해서 얻게 된다. 문화 간 커뮤니케이션(intercultural communication)이 이러한 학습과 연구의 주제가 된다.

사람은 누구나 타문화권의 관습을 자기 자신의 문화권의 개념과 가치를 적용하여 보는 관행을 보인다. 학자들은 이러한 자세를 자민족 중심주의(ethnocentrism)라고 부른다. 이것은 다른 사람의 생활 방식을 우리 자신의 색안경으로 보는 자세이다. 자민족 중심주의의 위험성은 자존심과 우월한 태도에 있다. 우리들은 자민족 중심주의에 관련된 문제와 씨름해야 한다. 인간은 누구나 자신을 중심으로 나 이외의 모든 것을 판단하기 때문에 자민족 중심적이 되는 것이다.

문화 인류학에서 가치 있는 관점으로 여기는 것 중 하나는 문화적 상대주의(cultural relativism) 이다. 일찍이 인류학자들은 문화적 상대주의의 관점에서 ‘모든 문화는 동등한 것(equally valid)’으로 간주했다. 하지만 이 가치 판단은 과학적인 연구에서 입증되지 않았다. 따라서 문화적 동등성의 가정은 거부되었다. 그러나 문화적 상대주의에는 문화 간 이해를 도모하기 위한 도구로 쓰일 수 있는 또 다른 면이 있다. 즉 한 문화권의 요소나 관점을 그 문화권 맥락에 연관시켜 인식하고 이해하는 접근법이 그것이다. 일부학자들은 이 개념을 문화적 통합(cultural integrity)으로 부른다. 만일 우리가 문화적 상대주의의 두 가지 의미 중 후자의 의미를 알지 못하면 자민족 중심주의적 태도를 보이게 될 것이다. 이에 비하여 문화적 상대주의는 적절히 적용되면 남이 하는 방식을 좀 더 정확하게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

사회 현실은 객관적 문화와 주관적 문화로 구성된다. 각종 사회, 정치, 경제 제도를 비롯해서 미술, 음악 연극 등을 일컫는 객관적 문화에 비하여 주관적 문화(subjective culture)는 사람들의 집단을 규정짓는 심리적 특성을 일컫는다. 다시 말해서 사람들이 만든 제도 보다는 매일 매일의 사고와 행위를 일컫는다. 따라서 주관적 문화란 상호 작용하는 사람들이 공유하는 신념의 양태, 행위와 가치로 규정할 수 있겠다. 주관적 문화를 이해하게 되면- 자신의 것과 다른 사람들의 것-문화 간 커뮤니케이션 능력을 높일 수 있게 된다.

학자들은 이러한 주관적 문화를 이해하여 문화 간 커뮤니케이션을 진작하기위한 여러 가지 접근법을 제시했다. 이중 맥락(contexts)이 타문화를 이해하는데 가장 유용한 요인 중 하나라고 말한다. 맥락은 커뮤니케이션의 상호 작용이 이루어지는 상황 또는 환경으로 이해할 수 있다. 맥락을 이해함으로써 커뮤니케이션 참여자들은 대인적 상호작용에서 어떻게 행동하고 반응할지를 안내하는 의미와 단서(cues)를 얻을 수 있다. 

문화인류학자 에드워드 홀은 두 가지 유형의 맥락을 제시했다. 아시아와 남미와 같은 고맥락 문화권은 상황과 사람들 간 관계의 단서에 의해 영향을 받는 커뮤니케이션이다. 고맥락 상황에서 사람들은 처한 환경을 평가하고 말을 많이 나누지 않고도 상황의 의미를 파악한다. 이러한 고맥락 문화권에서 개인적 관계에는 절충의 여지가 별로 없다. 직위가 높은 사람, 직위가 낮은 사람, 동료, 구성원 등의 역할이 커뮤니케이션의 성격과 내용을 결정짓는다. 사람들이 서로 잘 모를 때 이들은 정중하고 격식 있는 커뮤니케이션을 한다. 

미국과 독일과 같은 저맥락 문화권에서 커뮤니케이션의 성격과 내용은 문자 그대로 말로 한 것이나 써놓은 것과 같다. 저맥락 문화권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말, 문서 및 공식적 합의서에 의존하며 상황을 파악하려고 한다. 저맥락 문화권에서 상황에 관한 사람들의 이해를 안내하는 의미는 상황에 있는 것이 아니라 주로 단어에 있다.

문화 간 커뮤니케이션의 역동성을 이해하기 위한 두 번째 요인은 문화적 차원이다. 호프스테드(G. Hofstede)는 (1)권력 차이, (2)불확실성 회피, (3)개인주의-집단주의, (4)남성성-여성성, 그리고 (5)유교의 역동성으로 구성된 문화의 다섯 가지 차원을 제시했다. 

권력 차이(power distance)는 상향 커뮤니케이션의 개방성을 일컫는다. 두 번째 차원인 불확실성 회피(uncertainty avoidance)는 모호함에 대한 사람들의 관용을 일컫는다. 불확실성 회피는 불확실성을 다루는 인간의 능력을 측정한다. 불확실성 회피가 높은 사회에서는 명문화된 규칙, 법규 및 스트레스가 더 많게 마련이다. 세 번째 차원인 남성성(masculinity)은 한 문화권에서 업무가 어떻게 분산되어 있는가를 설명하고 이런 업무가 남자와 여자 사이에 골고루 분산되어 있는지의 여부를 알려준다. 그 예로 스웨덴 같은 여성성이 높은 문화권에서는 남녀가 구분 없이 유치원 교사, 비서 및 간호사로 일한다. 남성성이 높은 문화권에서 여성과 남성은 하는 일이 각기 구분되어 있다. 네 번째 개인주의-집단주의는 사람들이 큰 집단이나 지역 사회와 관련하여 자신들을 어떻게 생각 하는가에 관한 차원이다. 개인주의-집단주의는 개인과 집단 사이의 관계를 설명한다. 미국과 호주처럼 개인주의 문화권에서 사람들은 자아실현과 경쟁력 향상을 중히 여긴다. 집단주의 문화권에서 사람들은 개인의 이익과 권리보다 자신이 속한 조직 또는 집단의 이익을 우선시하는 경향을 보인다. 새로운 차원인 유교적 역동성은 검소, 인내와 남과 질서 있는 관계의 정신을 바탕으로 문화를 설명한다. 

언어와 비언어 요소 또한 문화 간 상호작용의 도구이자 장애로 작용한다. 타문화권과의 커뮤니케이션에서 언어의 중요성은 말할 필요도 없거니와 비언어 커뮤니케이션도 언어 못지않게 중요하다. 각종 몸짓, 시간과 장소 이용행위가 다양한 의미를 제공한다. 그 예로 복합시간(polychronic) 문화권은 시간을 융통성 있게 사용하고 한 번에 여러 가지 일을 처리하는 경향을 보인다. 복합시간 문화권에서 어떤 일에 관여하고 마치는 것은 미리 준비된 계획을 따르는 것보다 더 중요하다. 하지만 단일시간(monochronic) 문화권에서는 일에 대한 계획을 세우고 그 계획대로 시간에 맞춰 일을 처리하는 것에 높은 가치를 둔다. 이러한 문화권 사람들은 한 번에 한 가지 일을 처리하는 데 익숙하다. 시간 지향성(time orientation) 즉 현재, 미래 및 과거 지향성은 비즈니스, 커뮤니케이션과 사람들과의 관계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 우리는 자기 자신의 시간지향성을 확인할 필요가 있으며 타 문화권 사람들의 시간 지향성을 이해하고 수용할 준비가 되어있어야 한다.

우리가 문화 간 커뮤니케이션의 중요한 도전적 특징을 관리하는 내적 능력을 갖기 위해서는 위에서 언급한 타문화를 이해하기 위한 접근법들 외에도 자신의 문화를 아는 일, 감정이입의 개발, 상대방의 말을 경청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세계화 시대에 한국인들이 갖춰야 할 필요한 능력 중 하나는 문화 간 커뮤니케이션 능력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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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은 돈 vs 시간은 시간일 뿐 

커피 한 잔에 4분, 점심 식사비 30분, 버스비 2시간, 최신 스포츠카 구입비는 59년…. 2011년 말 개봉한 할리우드 SF액션 스릴러 영화 ‘인 타임’은 ‘시간은 곧 돈’이라는 벤자민 프랭클린의 격언이 현실화된 미래가 배경이다. 사람들은 모두 팔목에 형광생체시계가 내장된 채로 태어난다. 

이 시계는 유전자 조작으로 노화가 정지되는 25세가 되는 순간 작동을 시작한다. 남은 시간은 1년. 시간이 곧 돈인 세상에서 빈부의 격차는 수명과 직결된다. 수백 년의 시간을 저축해 놓은 부자는 꽃다운 외모로 영원히 젊음을 누릴 수 있지만 가난한 사람은 부지런히 일을 해서 시간을 벌거나 빌려야 하루하루 연명할 수 있다.

지폐와 동전이 모두 사라진 세상, 모든 거래는 시간으로 결재된다. 사람들은 생산 활동의 대가를 시간으로 받으며, 그 시간으로 물건을 사고 식사도 한다. 걸인은 “5분만 달라”며 시간을 구걸하고 잔여 시간이 부족한 사람들은 귀금속을 전당포에 맡기고 시간을 빌리기도 한다. 거리엔 ‘무조건 99초 상점(현실 세계의 1000원숍)’이 즐비하다. 

여유가 있는 사람들은 보유 시간의 일정분을 떼어내 은행에 예금하고 이자 시간을 받기도 한다. 주의할 점은 한 가지. 주어진 시간을 모두 다 쓰고 잔여 시간이 0이 되는 순간 그 자리에서 심장마비로 사망한다. 남은 시간이 별로 없는 사람은 노동을 해서 하루를 버틸 시간을 벌거나, 은행에서 빌리고 그도 안 되면 훔쳐야 한다.

주인공 윌 살라스(저스틴 팀버레이크 분)는 하루 노동으로 하루씩 수명을 연장하는 날품팔이 노동자로 수명이 얼마 남지 않은 어머니와 함께 빈민가에 산다. 뭔가를 소비하지 않아도 시간은 쉼없이 흐르기에 윌은 남은 수명을 확인하기 위해 하루에도 몇 십번씩 손목에 새겨진 생체시계를 들여다 본다. 어느 날 일을 나갔다 귀가 길에 버스삯이 기습 인상되는 바람에 버스를 포기하고 전력질주를 하던 월의 어머니가 시간이 다해 윌의 코앞에서 죽는 장면은 충격적이다.

시간은 문화에 지배되는 관념

시간에 관한 우리의 관념은 문화의 영향을 크게 받는다. 시간이란 객관적 실재라기보다 일종의 개념이기 때문이다. 시간을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어떤 계획과 전략을 세우고 나의 활동을 다른 사람과 어떻게 일치시키느냐와 밀접하게 관련돼 있다.

미국의 문화인류학자 에드워드 홀(Edward Hall)은 문화권에 따라 시간관이 다르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시간관을 ‘단일 시간(monochronic time)’과 ‘복합 시간(Polychronic time)’ 으로 구분한다. ‘단일 시간’ 문화권은 시간을 선형적이고 관리가능하며 세분된 대상으로 본다. 영국·미국·캐나다 등 앵글로 색슨, 독일·오스트리아·네덜란드 등의 게르만·스칸디나비아 국가들이 단일시간 문화권에 속한다. 

이들은 한 번에 한 가지 일을 처리하는 것을 선호한다. 일에 집중하며 어떤 시간적 순서에 따라 각 단계를 진행시켜야 할지 미리 규정한다. 이들은 이런 식으로 더 많은 일을 더욱 효율적으로 처리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들은 돌발적인일로 일정표를 던져버리게 되는 상황을 몹시 싫어한다. 영화 ‘인타임’은 극단적인 예이지만 단일 시간 문화권에서 시간은 돈, 다시 말하면 부족한 재화이다.

이른바 ‘복합 시간’ 문화권의 사람들은 시간을 총체적으로 취급하며 정한 시간 없이 수시로 하는 활동을 중요하게 여긴다. 최후의 목표는 있지만 목표에 다다르는 데에는 서로 교환할 수 있는 수많은 징검돌이 존재한다. 사람은 최종 목표로 가는 도중에 몇 개의 돌을 뛰어넘을 수도 있다. 

복합 시간 문화권에서 시간은 실체가 있는 것으로 인식되지 않으며 따라서 단일 시간 문화권에서처럼 관리의 대상으로 여기지 않는다. 이러한 시간관은 자연발생적이며 비구조화된 특성을 지닌 라이프 스타일을 만든다. 아랍·아프리카·스페인·중남미 등 복합 시간 문화권에 속하는 사람들은 주어진 시간 내에 일을 끝내려 애쓰기보다는 사람 관계를 더 중요하게 여긴다.

홀은 저서 『침묵의 언어』에서 시간관이 다른 사람들이 비즈니스 협상을 할 때 어떤 일이 벌어지게 되는지를 사례로 들었다. 홀은 ‘복합 시간’ 문화권의 일본인 협상자들이 상대방 미국인들의 귀국 비행기편이 언제인지 확인하고 출발 예정일 직전에 중대한 양보를 요구한다는 사실을 지적했다. ‘단일 시간’ 문화권의 미국인들은 일정이 어그러지기보다는 차라리 상대방의 요구를 받아들이는 편을 택할 것이라고 보고 일본 협상자들이 시간을 끈 뒤, 승부수를 둔다는 것이다.

네덜란드의 비교문화경영학자 폰스 트롬페나스는 시간을, 사건들이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순차적인 것’으로 보느냐, 아니면 미래에 대한 예측과 과거 경험에 대한 기억이 결합돼 현재의 활동을 형성하는 ‘동시적인 것’으로 보느냐에 따라 시간관을 분류했다.

트롬페나스의 ‘순차적 시간관’은 홀의 ‘단일 시간관’과, 그의 ‘동시적 시간관’은 ‘복합 시간관’과 비슷한 개념이라고 볼 수 있다. ‘순차적 시간’ 문화권에 속하는 사람들은 시간을 소모되는 상품으로 보며 시간과 시간 사이를 엄격하게 구분해 꽉 짜인 일정을 잡는 경향이 있다고 트롬페나스는 지적한다. 따라서 모임에 지각하는 것은 ‘시간이 곧 돈’인 세계에서 다른 참석자들의 귀중한 시간을 빼앗는 행위이다.

이와 대조적으로 ‘동시적 시간’ 문화는 시간 엄수를 고집하지 않으며 모임 시간은 정확한 것이 아니라 앞뒤로 15~30분에 걸쳐 있는 경우가 많다. 그 범위는 지역에 따라 달라 이탈리아·스페인·프랑스 등 유럽 라틴문화권은 15분 내외, 중남미는 몇 시간, 중동·아프리카는 하루 온종일이 될 수도 있다. 

‘동시적’ 또는 ‘복합 시간’ 문화권에서는 다양한 행동을 동시에 하는 것이 자연스럽다. 예를 들면 여행사 발매 창구에서 일하는 여성이 비행기표 발권에 필요한 서류를 작성하면서 계산기를 두드리고 친구와 통화하는 식이다.

유럽의 15분이 아프리카에서는 하루 종일

한 번에 한 가지 일만 할 수 있는 ‘순차적 시간’ 문화권의 사람은 본의 아니게 동시에 여러 가지 일을 할 수 있는 ‘동시적 시간’ 문화권의 사람을 모욕하는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 트롬페나스는 그의 책 『문화와 세계경영(Riding the wave of culture)』에서 네덜란드 회사에서 일하는 한 한국인 관리자가 네덜란드 본사에서 네덜란드인 상사를 처음 만났을 때 느낀 충격과 실망을 사례로 들었다. 

한국인 관리자가 상사의 사무실로 들어갔을 때 그의 네덜란드인 상사는 전화 통화 중이었는데 자신을 보고 왼손을 잠깐 들어 보이고는 자신이 방에 없는 것처럼 계속 전화를 하더니 이야기가 끝난 뒤에야 자리에서 일어나 자신을 맞아주었다는 것이다.

비록 전화를 하고 있었다고는 하지만 마음에서 우러나 당장 환영하지 않은 것, 용건이 끝날 때까지 자신의 반가운 감정을 억누르고 상대방을 기다리게 하는 것은 ‘동시적 시간’ 문화권의 사람에게는 일종의 무시나 모욕으로 느껴질 것이 분명하다. ‘순차적 시간’ 문화권의 사람이 일정을 핑계로 뜻하지 않은 시간에 불쑥 나타난 ‘동시적 시간’ 문화권의 사업 파트너에게 시간을 내어주지 않는다면 사업은 위기를 맞을 수도 있다.

인류학자들은 오랫동안 한 문화가 시간을 규정하고 관리하는 방식이 그 문화의 구성원들이 인생에서 어떤 의미를 찾는지, 인간의 본성을 어떻게 인식하고 있는지를 가늠할 수 있는 실마리라고 주장한다. ‘순차적 시간관’과 ‘단일 시간관’이 극단적으로 구현된 현실을 묘사한 영화 ‘인 타임’이 미국에서 제작된 것은 나름의 이유가 있다. ‘인 타임’이 ‘동시적 시간관’과 ‘복합 시간관’을 가진 유럽의 라틴문화권이나 아랍·중남미 국가에서 흥행에 성공하기는 어려웠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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