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초 미국 의학교육의 개혁과 <플렉스너 보고서>*

황 상 익**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 미국은 전세계의 의학을 주도해 오고 있으며 우리나라의 의학도 대체로 그 영향권 안에 들어 있다. 미국이 이 시대에 의학의 중심지로 떠오르게 된 요인으로 경이적인경제 발전과 그에 동반된 막대한 개발연구비의 투입, 유럽 등지의 유능한 과학 및 의학 연구 인력의 유입 등을 든다.


그러나 우리는 그러한 사회경제적 작용인(作用因)이 작동할 수 있었던 내재적(內在的)이며 전제적(前提的)인 요인을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다. 다시 말해 20세기 후반 들어 의학 활동이 만개할 수 있었던 배경이 된 그 이전 시기의 미국 의학계 내부의 변화에 대해 관심을 기울여야만미국이 오늘날 전세계 의학을 선도하게 된 연유와 그 특성을 온전하게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19세기말과 20세기 전반(前半)에 이루어진 미국 의학계의 변모를 여러 분야와 각도에서 다룰수 있겠지만, 본 논문에서는 이후 의학 활동의 중심이 된 의과대학 특히 그 교육 과정의 변화와발전을 중심으로 고찰하기로 한다. 그것은 20세기초를 전후로 한 시기 동안 이루어진, 실험실교육을 중심으로 한 기초의학 교육과 병원 내 임상실습의 강화 그리고 의학 연구와 교육의 결합이 당대와 그 이후 미국 의학의 특성을 이루고 번성을 가져 온 밑거름이 된 것으로 판단되기 때문이다. 달리 표현하자면 유럽에서와는 달리 그 이전 시기 동안 거의 독립적으로 발전해 온 의과대학(medical college), 병원(hospital), 대학교(university)가1) 이 시기를 거치면서 제도적및 실제적 측면에서 한 울타리로 모이게 됨으로써 과학적 의학(scientific medicine) 발전의 기지가 되었으며 그러한 현상은 의학교육의 개혁이라는 모습을 띠고 나타났다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위에서 언급한 의과대학의 개편과 의학교육의 개혁에 관련하여 그 동안 <플렉스너 보고서>에대해서 적지 않은 논의가 있었으며, <보고서>가 결과적으로 그러한 방향의 변화를 가속화하였다는 점은 저자도 동의한다. 그러나 마치 그 <보고서>에 의해서 그러한 변화가 일어나게 되었다든지 하는 과장된관점에 대해서는 동의할 수 없는 것이 저자의 견해이다. 오히려 이 시기 의과대학과 의학교육의 개편과 개혁은 그 이전 오랜 기간 동안 내외부적 요인에 의해 진행되어 온 흐름의 소산물로 파악하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저자는 그러한 관점 위에서, 미국 초기 시대부터의 의학교육의 전개 과정을 더듬는 한편, 비정규 의료인(sectarian, irregular practitioners)을 의료시장(medical market place)에서 축출하여 의료를 독점하고 비슷한 배경을 가진 의사의 수를 줄임으로써 사회적 지위를 공고히 하려는미국의사협회(American Medical Association, AMA)의 노력, 그리고 <플렉스너 보고서>의 작성 배경과 과정 및 그 이후에 나타난 변화 등을 검토함으로써, 이 시기 미국 의학교육의 개혁에 대한전체상과 사회적 함의, 그리고 이후 미국 및 20세기 현대의학 전반의 특성에 미친 영향 등을 이해하려 한다.



미국 의학교육의 전개 과정 - 식민지 시대부터 19세기말까지


식민지 시기의 미국 의료는 경험적인 것이 주류를 이루었으며, 그에 따라 공식적의학교육도종래의 도제 교육(apprentice training) 위주였다. 그러던 것이 18세기 후반에 이르면 의학의 이론적 부분을 담당하기 위해 의과대학이 생겨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실제 환자를 진료하는실기 부분은 여전히 도제 교육에 의해 이루어졌다.2)


식민지 초기인 17세기와 달리 18세기에 이르면 식민지 미국과 유럽 본국 사이에 여러가지 교역과 문화적 교류가 활발히 이루어지면서 의학교육에도 새로운 모습이 나타나게 되었다. 즉 유럽의 명문 의과대학이나 병원으로 유학을 가는 학생과 의사들이 생겨나게 된 것이다. 미국이 정치적으로 독립하기 전까지 수백명이 당시 유럽 최고의 명문으로 떠오르던 스코틀런드의 에딘버러의과대학과 런던의 병원들 그리고 파리의 몇몇 병원 등에서 의학 수업을 받고 귀국하였다.3)


그러나 유럽 유학파는 아직 소수에 불과했으며 따라서 사회적 영향력도 크지 않았다. 그보다많은 수의 의사 지망생들은 대개 자신이 사는 지역사회의 명망있는 의사4)의 조수(도제)로 들어가 의술을 배웠다. 한 연구에 의하면 1630년부터 1800년 사이에 매사추세츠에서 진료를 행하던의료인 약 1600명 중 1/3 가량이 1년 이상의 도제 교육을 받은 것으로 나타났다.5) 그리고 그가운데 44%가 의사의 아들이었다. 매사추세츠와 다른 지역의 사정이 똑같지는 않았겠지만, 우리는 여기에서 대체로 유럽의 의과대학에 유학한 의사들보다는 주로 자신이 생장한 지역에서 도제교육을 통해 의료인이 된 사람들이 많았음을 짐작할 수 있으며, 의업(醫業)은 가업으로 전수되는경우가 매우 흔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4) 명망있는 의사라 하여 반드시 의술이 뛰어나고 의학 지식이 높은 것은 아니었다. 명망이라는 것은 오히려 지역사회 내에서의 사회적 위치를 나타내는 의미가 더 강했다. 도제를 거느리고 어떤 의미에서든 의학교육을 담당하여 후배 의사를 양성하던 그러한 의사들을 식민지 초기 시대부터 preceptor라고 하였으며, 오늘날에는 그 단어는 주로 의과대학에서의 지도교수를 뜻한다. 그렇듯 시대에 따라 그 의미가 달라지고 있어 우리말로 옮기기가 쉽지 않지만, 이 논문에서는 장인의사(匠人醫師)라는 용어를 사용할 것이다.


유럽 유학이나 도제 교육 등의 공식적 과정을 통해 의사가 되는 사람들보다 훨씬 더 많은 수는 비공식적인 과정을 통해 의술을 습득하여 의료 활동과 의료시장에 뛰어들었다. 그리고 그러한사람들은 직업적 유동성이 매우 강했다.6)


어떤 점에서 미국 의학교육의 역사적 전개 과정은 비공식적 부문을 공식적 부문이 대치해 나가는 과정이었으며, 공식 부문 내에서도 도제 교육적 측면이 대학 교육의 모습으로 치환되어 가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7)


도제 교육은 그 전 시대에 비해 식민지 말기인 1750년 이후 좀더 보편화되었다. 이는 도제를가르칠 만한 의사가 많아지고 있었다는 사실과 직업 상의 분화가 나타나기 시작하였다는 점을 의미하며, 또 한편으로는 식민지 미국 사회의 전반적인 생활 수준이 향상되고 있었던 현상을 반영하는 것이다.


도제 교육이 보편화됨에 따라 그 형식과 내용도 전 시기에 비해 표준화되기 시작하였다. 교육기간도 일정치 않았던 데에서 대체로 3년 과정이 통용되기 시작하였으며, 수업료도 연간 100 달러의 현금 지불이 상식이 되었다. 당시 그들이 받은 교육 내용은 대체로 다음과 같았다. 의학의 이론적 측면은 상대적으로 부실하였는데 몇 권 안되는 낡아빠진 의학 책을 장인의사의 지도아래 또는 혼자서 독서하는 정도이었다. 육안해부학 지식과 외과술을 습득하기 위한 목적으로인체나 동물을 해부하는 경우도 종종 있었지만 체계적인 것은 아니었다. 환자를 진료하는 실제적인 면은 장인의사를 따라 다니며 익혔다. 그리고 그러한 과정에서 지역사회에서의 의사의 역할도 배우곤 하였다.


당시 도제 교육 제도의 단점에 대응하여 생겨난 두 가지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 

  • 첫째로 18세기 후반, 몇몇 의사들은 도제를 교육하는 데 특별한 관심을 가져 정규 과정 비슷하게 교육을체계화하기 시작하였다. 이들은 해부학과 병리학을 가르치는 데 골격, 모형, 그림 등 여러 교육매체를 활용하였으며 최신의 의학 문헌도 수집하고 교육에 사용하는 모습을 보였다. 이에 따라도제-장인의 상대적으로 비공식적이던 관계는 학생-교사의 보다 공식적인 관계로 전환되기 시작하였다.8)
  • 이보다 더 중요하고 본질적인 변화는 해부학을 가르치기 위한 사설 강습소가 생겨났다는 점이다. 해부학 강좌가 따로 마련되기 시작한 것은 보통의 장인의사들이 그 내용을 제대로 가르치기어려웠기 때문이며 그것은 도제들이 보다 나은 내용의 교육을 요구하기 시작하였다는 점을 뜻한다. 이 사설 강습소 과정이야말로 미국의 공식적 의학교육의 진정한 효시라 할 수 있으며 이것은 18세기말과 19세기초에 생겨나기 시작한 의과대학의 모체가 되었다.9) 이로써 미국의 공식적의학교육은 강습소가 담당하는 이론 부분도제 교육을 통한 실제 진료 기술 습득 과정으로 2원화되기 시작하였다.

9) 유럽의 명문 의과대학들은 대부분 중세 시대 혹은 그 뒤에 대학(university)의 한 학부로 탄생하였지만 미국의 의과대학은 대체로 대학과 직접적인 관련이 없이 세워진 특성을 가지고 있다.



사설 강습소가 의과대학의 토대와 모체가 되기는 하였지만 그것은 의과대학과는 엄연히 달랐다. 의과대학은 강습소와는 달리 학생들에게 그리고 교수진에게도 학위를 수여할 수 있는 특전을 가지고 있으며, 또한 교수진에게 직업적 명망을 부여하는 장점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이유로 유럽에서 의학교육을 받은 젊고 야심만만한 의사들은 18세기 후반에 접어들면서 의과대학을 세우려는 움직임을 보이기 시작하였다. 한편 당시 식민지의 대학들은 대학의 명성을 높이기 위해 의과대학을 세우려는 노력을 기울이고 있었다. 의사들은 무보수로 강의하는 대신 대학의 학위를 받으려는 목적으로 그러한 제의에 동의하게 되었다. 이것은 형태적으로는 대학의산하에 의과대학이 생기는 모습이지만 그 상호관계는 거의 구속력이 없는 등, 완전히 독립된 별개의 기구로 보아도 무방할 정도이었다.


이러한 과정 속에서 1767년 컬럼비아대학교의 전신이 되는 의과대학이 뉴욕에, 1769년에는 필라델피아에 펜실베이니아대학교 의과대학이 세워졌으며 1783년에는 하바드대학교에 의과대학이설립되었다. 1797년에는 한 의사가 독자적으로 다트머스 의과대학을 설립하기도 하였다. 그 뒤 기성 대학과 무관한 의과대학이 설립되기도 하고 대학의 이름을 빌린 의과대학도 세워졌지만 앞에서 언급하였듯이 대체로 대학 본부와 의과대학은 별다른 관계없이 병존하는 모습을 보였다.10)


의과대학은 도제 교육이나 사설 강습소에 비해 몇가지 유리한 점을 가지고 있었다. 우선 학생들은 교육의 내용보다는 학위를 받을 수 있다는 사실 때문에 의과대학을 선호했다. 의과대학은 처음에는 의학사(Bachelor of Medicine) 학위를, 독립 후에는 의학박사(Doctor of Medicine) 학위를 수여했다. 그리고 환자들도 장인의사의 인정증서보다는 대학의 학위에 대한 신뢰가 더 컸다. 의과대학과 어떤 측면에서 경쟁 관계에 있는 장인의사들도 골치 아프고 시간만 많이 드는이론 과목을 자신들 대신 가르쳐 줄 의과대학을 지지했다. 또한 의과대학의 교수직(물론 전임[full-time]이 아님)은 환자들 사이에서 제법 신용을 얻을 수 있었으며, 대학의 선전 덕에 교수진의 이름이 널리 알려지는 이점도 있어서 의사들 스스로 교수직을 선호했다. 또한 많은 학생들이 의과대학 재학 시에 교수를 임상 지도를 해 줄 장인의사로 선택하고 졸업 뒤에도 그러한 인연을 매개로 환자에 대한 자문이나 의뢰를 하였기 때문에 교수직은 자연히 선망 대상이 될 수밖에없었다.


이러한 이유들로 의과대학의 수는 급증하였다. 1780년에 컬럼비아와 펜실베이니아의 두 개밖에 없던 의과대학이 1800년까지 4개로 늘어났고, 1820년까지는 13개로 급증하였다. 1800년 이전졸업생 총 수가 221명으로 추산되는 데에 비해 1810년대에는 한 해 평균 138명으로 증가하였으며, 1820년대에는 한 해에 400명이 넘는 의과대학 출신의 의사가 사회로 배출되었다.11) 그리고졸업은 하지 않더라도 강의에 참석하는 학생도 상당히 많았다.12) 요컨대 당시 의과대학이 의학교육의 주된 장소는 아니었지만 그 사회적 비중과 중요성은 점차 커지고 있었다.


11) 그러나 그 수는 도제 교육 과정만을 밟은 의사 수에 비해 여전히 소수이었으며, 그밖에 비공식 부분에서 활동하던 치유자(irregular practitioner, healer)에 비해서는 빙산의 일각에 지나지 않을 정도이었다.


남북전쟁 이전, 대부분의 의과대학은 4명 내지 7명의 교수진이 대개 영리 목적으로 공동소유하고 공동운영하는 상태이었다. 당시 의과대학의 전형적인 교수진은 몇 명의 교수(professor), 한명의 해부학 시범교수(demonstrator), 그리고 한두 명의 임상교수(clinical professor)로 구성되었다. 그리고 의과대학의 입학 기준은 매우 낮았다. 수입을 거의 전적으로 학생 등록금에 의존해야 했고 의과대학 교육에 관해 아무런 사회적 감시감독 체계가 없었으며 학생 수가 늘어야 수입이 늘어났기 때문에 모든 의과대학이 학생들의 입학 요건을 낮게 잡았던 것은 자연스런 일이었다. 졸업 요건 또한 매우 허술했다. 그것은 국가나 주 정부가 관장하고 인정하는 의사면허제도가 없었기 때문이기도 하였다.


19세기 중엽까지도 여전히 진료 능력은 도제 교육을 통해 습득했다. 의과대학을 졸업하기 위해서는 3년 동안의 도제 생활과 두 과정의13) 의과대학 강의 출석이 요구되었다. 교과 과정은 대개 해부학, 생리학, 화학, 약전(藥典), 내과, 외과, 산과의 7개 과목으로 이루어졌으며 19세기전반기를 거치면서 부인과와 소아과가 추가되는 경우가 많았다. 간혹 병원 교육이 있는 경우에도 강의 위주였지 환자와의 직접적인 접촉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또한 당시 병원에 입원해 있는환자는 대개 의학적 흥미 대상이 되지 못하는 회복기의 환자가 대부분이었다. 따라서 병원에서의 임상 교육이래야 전통적인 도제 교육보다 훨씬 못했다.


19세기가 진행되면서 의과대학 교육이 점점더 대중화, 보편화되며 각급 의사회들이 조직되고 의학잡지가 간행됨에 따라 의사직은 점점 전문화되고 치료도 표준화되어 갔다. 지역 의사회가조직되어 수가(酬價) 협정을 마련하고 의료인 윤리 내규 등을 제정하는 등 서로 간의 경쟁을 줄이고 비정규 의료인들로부터 의료시장을 안정적으로 확보하려는 노력의 모습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여러 곳에서 주(洲) 의사회가 조직되었으며 전국적 조직인 미국의사협회가 1847년에 결성되었다.


19세기 내내 의과대학과 그 학생 수는 계속 늘어났다(표 1). 의과대학의 수는 100년 동안 40배가 되었으며 매해 졸업하는 학생 수는 150배 이상이 되었다.14) <표 1>에는 포함되지 않는, 정식으로 등록을 않거나 졸업을 하지 않고 수강만을 한 학생들까지 감안하면 19세기말 무렵 사회로배출되는 의사의 대부분은 적어도 부분적으로나마 의과대학 교육을 받게 된 것이다. 그러나 대학 출신자 전체를 놓고 볼 때에 의사직은 아직 별로 인기가 없었다. 1850년의 한 조사를 보면동북부 명문 대학 출신 가운데 절반은 법률가나 성직자가 되었으며 단지 8%만이 의사가 되었다.


13) 당시는 학년에 따라 과목이 달라지는 요즈음과 같은 학년제(graded course)가 아니라 똑같은 과목을 되풀이 학습하는 반복과정(repetitive course)이었다. 즉 첫 해와 둘째 해에 수강하는 과목이 똑같았으며 학교에 따라 사정이 약간씩 달랐지만 대체로 내용도 대동소이하였다.


14) 이 의과대학 수에는 동종요법의사(homeopath)와 약초요법의사(botanist) 등을 양성하는 의과대학(sectarian medical college)도 포함되어 있다.



표 1. 의과대학과 졸업생 수, 1800-1880 15)





전체적으로 보아, 그리고 역사의 진행 방향을 보건대 비공식적인 의술 전승과 도제 교육의 시대는 이제 끝나가고 있었다. 그러나 지리적, 사회경제적 변방에서는 여전히 의과대학을 다녀보지 않았거나 졸업을 하지 못한 의료인들이 다수를 차지하고 있었다. 그리고 동종요법가나 약초요법가 등 비정규 의료인의 활동도 만만치 않았다.


19세기 중엽을 넘어서며 도제 교육이 쇠퇴함에 따라 의과대학의 비중은 점점더 커져갔다. 의과대학은 도제 제도 대신 이제 더 실제적이며 최신의 지견을 교육하는 새로 생겨난 사설 학원과학생들을 놓고 경쟁을 벌이게 되었다. 사설 학원이 인기를 끌었던 것은 한편으로는 의과대학의교육 방침을 결정하는 힘의 중심이 이 무렵 교수진에서 학생들에게로 넘어가고 있었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했다. 결국 의과대학은 학생들의 요구에 따라 의학교육 내용과 형태에 대한 방침을 바꿀 수밖에 없는 처지에 놓이게 되었으며 그것은 남북전쟁 이후에 뚜렷이 나타나게 되었다.


의과대학과 학생들 서로 간에 이해가 엇갈리는 가운데 의과대학의 학기는 점점 길어져 가고 있었다. 그리고 교과 내용에도 변화가 생겨났다. 의과대학은 미국의 고등교육 기관 가운데 가장먼저 그리고 활발하게 자연과학의 방법과 내용을 교과과정에 도입하였다. 해부학 실습은 의과대학 초창기부터, 그리고 화학 실습도 19세기 중엽을 지나면서 대부분의 의과대학에 정규 교과목으로 채택되었다. 또한 당시 성장해 가던 병원에서의 병상 회진과 병원강의실(amphitheater)에서의 수술 및 시범 진료는 병원을 임상교육의 한 중심지가 되도록 하였다.


19세기 중엽부터 이미 의과대학 교수진은 졸업생 수를 놓고 지역 의사회와 갈등을 겪고 있었다. 미국의사협회는 비정규 의료인들을 의료시장에서 축출하고 독점권을 확보하려는 목적 이외에, 정규 의과대학을 졸업하는 의사의 수도 억제하려는 목표를 가지고 조직되었다.16) 미국의사협회와 여러 의사회들은 의과대학 졸업생 수를 줄일 것을 원하였으나 의과대학 쪽은 적절한 의학교육을 받은 사람 누구에게나 의사직은 개방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의사회는 희망과는 달리자신들의 이해와 주장을 의과대학 정책에 반영할 방법을 당시에는 갖지 못했다.


19세기 후반 내내 의과대학의 수가 늘어나고 등록학생도 증가하였다. 이러한 현상은 다른 고등교육 기관에서도 마찬가지로 나타났다(표 2). 모든 대학에 등록한 학생 수는 1860년의 3만2천명에서 1900년의 25만6천명으로 8배로 증가하였다.17) 인구 증가, 생활 수준의 향상, 그리고 교육기관이 급격하게 증설된 것이 그 주요한 배경이었다. 그 기간 동안 의과대학 학생 수의 증가는 3배 남짓으로 전체 학생 수의 증가율에 비해서 상대적으로 낮았다.



표 2. 미국의 전문직 교육 상황, 1878-1900 18)


학교 수                                     등록 학생 수                             학교당 등록 학생 수






많은 의과대학이 사설 학원과 경쟁하기 위해 계절학기를 늘리고, 새로운 교과 과정을 추가하였다. 임상의 전문과를 담당하는 의사들이 교수진에 추가됨으로써 전문과목이 교과 과정에 끼게되었고, 반복 과정이 학년제(graded course)로 바뀌게 되었다.


전체적으로 보아 학생들의 사회적 위치와 나이, 그리고 학력, 경력, 포부 등은 매우 다양하였다. 의과대학의 입학 자격은 지원하는 학생들의 수준과 요구에 맞추는 것이 상례였다. 대학교육 학력은 요구되지 않았다. 의사가 되기 위해서 입학 전에 대학교육이 필요하다는 인식이 거의없었을 뿐만 아니라 일반대학 과정과 의과대학 과정을 다니고 마칠 만큼의 여유있는 학생이 아직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졸업생들의 나이가 많은 것으로 미루어 보아 의과대학 지망생들의 다수가 경제적인 문제를 안고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1880년대에 입학 지원 자격으로 고등학교 졸업이나 그와 동등한 학력을 요구하는 의과대학이나타나기 시작했다. 그것은 몇몇 주의 의사면허법이 그러한 것을 요구하기 시작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많은 의과대학, 특히 여러가지로 사정이 좋지 않은 대학에서는 그것을 거의 요구하지 않았다.19) 충분한 수의 학생을 모집하는 일은 의과대학, 특히 수입의 거의 전부를 학생 등록금에 의존하는 학교에서는 여전히 가장 중요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면서도 변화와 발전의 모습은 여러 부분에서 나타났다. 거의 구술시험으로 이루어졌던 졸업시험이 1870년대와 80년대를 거치면서 서서히 필기시험으로 대치되었다. 컬럼비아 의과대학의경우 첫번째 필기시험이 치루어진 것은 1879년이었으며 1888년에는 전문과목에 대한 필기시험도추가되었다.20) 장인의사에게서 임상 훈련을 받는 도제식 교육의 모습은 19세기 후반으로 접어들면서 서서히 사라지거나 개원의사들로부터 의과대학이나 병원과 관계가 있는 의사에게로 그 임무가 옮겨지기 시작하였다.21)


19세기말로 가면서 의과대학들은 임상 교육에 대한 필요와 책임을 더 많이 느끼게 되었다. 사설 학원이나 진료소와 병원 등에서 이루어지는 훈련과 교육을 의과대학 교육 과정에 많이 포함시켜야만 더많은 학생을 유치할 수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새로운 교육 내용을 의과대학 과정에 포함시키면 그만큼 학기가 길어지고 따라서 수업료도 올라가게 되어 경제적능력이 부족한 학생들을 끌어들일 수 없다는 문제가 생긴다. 그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등장한 것이 계절학기와 선택 과정 등이었다. 선택 과정에 포함된 과목은 기초의학 분야와 외과수술, 소아과, 정형외과 등 새로이 분화되어가는 전문과목들이 많았다.22) 임상의 전문 과목에 대해 의과대학에서 교육하는 문제에 대해 반대하는 견해도 많았지만 의과대학은 우선 선택 과정에,그리고 나중에는 정규 과정에 전문 과목 교육을 포함시키게 되었다. 그것은 앞으로 더 나은 수입을 얻기 위한 포석으로 대학에서 경력을 쌓기 원하는 그들 전문가(specialist)를 헐값에 또는공짜로 교육에 참여시킬 수 있다는 점과 전문 과목 교육을 바라는 학생들을 유인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23)


22) 전문 과목에 대한 동경은 유럽에 유학했던 미국인 의사들의 경험에 기인하는 바가 많았다. 당시 독일과 오스트리아를 중심으로 한 독일어권의 중부 유럽은 세계의학의 중심지이었으며 그곳에서는 새로운 임상 전문 과목들이 활발히 분화 발전하고 있었다. 그 가운데에서도 비엔나는 미국인 유학생들에게 메카이었다. 그곳에는 3천 병상의 거대한 병원이 있었고 각종 전문 분과가 한 지역 내에 다 모여 있었다. 전 세대에 비해 엄청나게 많은 미국인 의사들이 주로 전문과목에 대한 교육과 훈련을 받기 위해 유럽으로 갔다. 1870년과 1914년 사이에 만명 가량이 비엔나로 그리고 3천여명이 베를린으로 갔다.(Bonner TN. American Doctors and German Universities. Lincoln: University of Nebraska Press, 1963, 39) 대부분의 미국인 의사들은 그곳에서 전문 과목에 대한 훈련을 대개 4-8주 과정으로 이수했다. 그곳에서 연수한 미국인 의사들 가운데 많은 수는 일반 과목보다 전문 과목이 훨씬 수지맞는 일이라는 사실을 확인하고 스스로 전문 과목 의사(specialist)가 되기를 원했다.


1870년 무렵부터 주요한 의과대학들은 새로운 과학 지식과 임상 내용에 대한 시간을 늘려가기시작하였다. 그러면서 3년 과정의 학년제가 나타났다. 처음에는 강제성을 띠지 않던 3년제가점차 의무화되기 시작했다. 효시는 하바드 의과대학이었다. 1871년 하바드 의대는 처음으로 9개월씩 3년, 그리고 반복 강의가 아니라 학년제를 실시한 것이다. 그리고 1880년까지 10개 대학이, 1890년까지는 26개 대학이 3년 연한의 학년제 과정을 채택했다.24) 그리고 20세기초에는 사실상 모든 의과대학이 4학년제를 채택하게 되었다. 학년제를 실시함에 따라 가장 큰 혜택을 누리게 된 것은 임상 전문가들이었다. 하바드 의과대학은 4학년에 14개의 선택 과목을 배정하였는데 거의 모두 임상 전문 과목이었다.


유럽, 특히 독일어권 의학의 영향은 임상 전문 과목에 대해서만 아니라 기초의학 분야에도 미쳤다. 당시 173개에 달하는 독일의 의학연구소들은 의학 연구의 중심지로 전세계의 많은 학생들과 학자들을 끌어모으고 있었다. 그러나 독일의 연구소는 이때 이미 상당한 문제점을 안고 있었다. 독일의 의학 연구자들은 임상적 활용에 대해서는 거의 관심을 두지 않아 연구와 진료 사이에 커다란 괴리가 있었던 것이다.25)


미국인 유학파 기초의학자 제1세대들은 미국으로 돌아왔을 때, 과학과 과학적 의학에 열광하기 시작한 일반 사회와는 달리, 의과대학은 기초의학자들을 교수로 채용하는 데 거의 관심을두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았다. 의과대학은 기초의학을 부차적인 것으로 여겨 관심이 별로 없었으며, 단지 그 자리를 교수직으로의 승진을 위한 디딤돌로 생각하는 젊은 의사들에게 강의를 맡기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머지않아 변화가 일어나, 세기말에 가까와지면서 전임 기초의학 교수가 학생들의 실험실습을 지도하는 모습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가장 뚜렷하였던 것은 당시가장 각광받던 세균학이었다. 1888년 28개의 주요 대학을 조사한 연구에 따르면 그 가운데 11학교가 상당한 시간을 세균학에 할애하고 있었으며 또한 전임 교원과 실험실을 갖추고 있었다.26)비록 저항이 적지 않았지만 학년제가 실시되고 수학 연한이 길어짐에 따라, 그리고 주 면허위원회 등이 교육 내용 개선을 권장함에 따라 세균학에 이어 생리학, 병리학, 화학 등의 실험실습 교육이 강화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교육을 위해 의과대학들은 유럽에서 훈련받은 의학자들을 채용하기 시작하였다. 얼마 안되는 자격있는 기초의학자들을 유치하기 위해서는 전임 교수직이 제의되었고 교육뿐만 아니라 연구도 할 수 있는 시설이 제공되기도 하였다.


기초의학의 전임 교수 자리가 마련되기 시작하였지만 19세기말에도 대부분의 의과대학 교수들은 의과대학에서의 교육, 병원 진료 그리고 개인 진료를 병행하였다. 대개 무보수로 병원이나진료소에서 빈민 환자를 진료하며 명성을 쌓고 대신 부자나 중산층을 대상으로 개인 진료를 함으로써 수입을 올리는 그런 식이었다. 그리고 비전임(part-time)인 대학 교수 자리도 수입보다는 선전과 명성을 위한 것이었다.27)




20세기초 미국 의과대학의 개편과 미국의사협회


20세기 전반을 통해 미국의 의학계와 보건의료 분야에는 새로운 모습이 뚜렷하게 나타난다.우선 국민들의 의료 이용 실태에 변화가 있게 되었다. 도시 빈민들은 공공병원과 사립병원의 외래에서 대부분의 진료를 받는 등 큰 변화가 없었으나, 그 수가 점점 늘어나고 있는 중산층은 그전 세기보다 사립병원에 입원하여 진료를 받게 되는 경향이 훨씬 강화되었다. 진료 활동에 참여하는 의료인의 수와 구성에도 커다란 변화가 일어났다. 19세기 동안 의료시장에서 무시못할 부분을 차지하던 동종요법사와 약초요법사 등 비정규 의료인들은 20세기초를 거치면서 그 수와 사회적 영향력이 급격히 감소하게 되었다. 정규 의과대학을 졸업한 의사도 절대 수에서는 약간 늘어났지만 인구 당 의사 수는 1900년부터 30년 사이에 대폭 감소하였으며 1950년까지는 대체로 그러한 상태를 유지하였다(표 3). 이제 19세기에 비해 의료인 사이의 경쟁은 크게 감소하게 되었다.28) 이러한 의사 수 감소의 효과는 농촌에서 더욱 뚜렷하였다. 1906년부터 23년 사이에 인구5천 이하의 마을에서는 의사-환자 비율이 25%나 감소한 반면 5만 이상의 도시에서는 8% 감소에그쳤던 것이다.29)



표 3. 의사 수, 1900-1950 30)




그러한 변화의 모습은 다른 전문 직종과 비교하면 더욱 뚜렷해진다. 1900년부터 1940년 사이에 미국의 인구가 74% 증가하는 동안 변호사는 69%, 치과의사는 137%, 약사는 533%, 엔지니어는682%, 경리직은 935%, 대학교수직은 1000% 증가했던 반면, 의사는 26% 증가한 데 불과했던 것이다.31) 모든 전문직이 이 시기 동안 인구에 비해 약간 내지는 대폭 늘어난 데에 비해 의사 수는오히려 줄어든 것이다.


의료계에 나타난 또 한가지 특성은 의사들의 전문화 경향이 뚜렷해졌다는 것이다. 1923년 전체 의사 가운데 10.6%가 스스로를 full-time 전문의라 하고 12.7%가 part-time 전문의라고 응답한 데에 비해 1938년의 조사에서는 그 수가 각각 19.8%와 14.5%로 늘어났다.


그리고 또 의사를 고용하는 기구도 증가하였다. 철도회사와 그밖의 기업체들은 부상한 피고용인의 치료를 위해, 생명보험 회사는 고객의 검진을 위해, 점점 성장해 가는 병원은 외래진료부에서의 진료를 위해, 그리고 지방정부의 보건담당부서는 공공의료를 위해 많은 수의 의사를 채용했다.32) 이제 의사의 상대적 수는 줄어든 반면 일할 자리는 늘어나는 호황의 시절을 맞게 된 것이다.


위에서 언급한 대로 병원 시설과 병원 진료가 급격히 증가하였다. 1920년과 50년 사이에 종합병원의 수는 17%, 병원 당 병상 수는 61%, 인구 당 병상 수는 35% 증가하였다. 그리고 실제병원 이용의 지표라 할 인구 천명 당 입원환자의 수는 1931년과 50년 사이에 두 배로 급증하였다. 이렇듯 이 시기에 병원이 대규모화하였으며 인구 증가를 넘어서는 병원의 성장을 보인 것이다.33)


이러한 변화에 동반하여, 더 정확하게는 그것에 선행하여 많은 변화가 의과대학에 나타났으며그것은 대체로 의학교육의 개혁이라는 모습으로 나타났다. 1900년대와 10년대의 몇년 사이에 많은 의과대학이 문을 닫거나 합병을 하든지 대학(university)의 울타리 속으로 들어갔다. 이 시기에 살아남은 의과대학들은 입학 자격과 졸업 기준을 높이게 되었다. 물론 그러한 변화의 과정을 주도적으로 이끈 것은 몇몇 의학계의 지도급 인사와 미국의사협회 등 의사단체 그리고 산업자본가들이 새로이 구성한 비영리의 모습을 띤 재단과 그 대표자 및 대변인들이었으며, 그러한 변화에 대한 당시 사회의 인준이었지만 그 이전 시기의 변화와 발전의 귀결이기도 하였다. 그렇다고 그 변모가 필연적이었다거나 변화의 손익이 모두에게 골고루 분배된 것은 결코 아니었다. 다른 역사 과정에서와 마찬가지로 이 경우에도 여러가지 대립된 경향과 세력 사이의 각축과 상호작용의 결과 우세한 쪽이 살아남게 되었으며 그 귀결의 혜택도 많은 부분 그쪽으로 쏠리게 된 것이다.


20세기초의 대개편의 결과 의과대학의 수는 대폭 줄어들었으며, 그 교육 내용과 수준은 전반적으로 향상되었다. 1920년대 후반이 되면 의과대학에 입학하는 거의 모든 학생은 입학 전에 어떤종류이든 대학교육을 받아야만 하였으며 실제로도 그러하였다. 그리고 실험실 교육을 강조하는의학교육 개혁의 경향을 반영하여 대학에서 입학 전에 자연과학 분야의 과목(학점)을 이수하는것이 당연시되었다. 그러한 변화는 미국 사회의 전반적인 교육 수준이 향상되었기 때문에 가능하였으며 한편으로는 의과대학의 문호가 좁아졌기 때문이기도 하였다. 1910년부터 40년 사이에대학의 학부 학생 수는 세배로 늘었는 데 비해 의과대학의 정원은 거의 늘지 않았기 때문에 입학조건의 향상이 가능했던 것이다.




표 4. 의과대학과 재학생 및 졸업생 수, 1880-1940 34)





이제부터 20세기초를 전후한 시기 동안 의과대학에 일어난 변화를 살펴 보자(표 4). 1880년부터 1900년 사이에 의과대학은 60개가 증가하여 한 해 평균 세 개가 늘어난 셈이다. 그리고 1880년부터 1904년까지 전국 의과대학의 재학생 수는 11,826명에서 28,142명으로 138%, 전국 의과대학의 졸업생 수는 77% 증가하였으며, 의과대학 당 학생 수는 118명에서 176명으로 49% 증가하였다. 졸업생 수의 증가가 의과대학 등록 학생 수의 증가보다 적은 것은 이 시기 동안 많은 의과대학이 2년제에서 4년제로 바뀌었기 때문이다. 특기할 것은 전체 대학생 가운데 의과대학생이차지하는 비율이나 전체 인구 당 의대 졸업생의 비율은 이 시기 동안 거의 늘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러던 것이 1905년 무렵을 고비로 하여 형세가 완전히 뒤바뀌게 되었다. 즉 그때부터 1920년까지 의과대학과 의과대학생의 수가 급격히 감소하여 1904년에 비해 각각 53%와 49%를 나타내었다. 그리하여 1920년에는 전체 대학생 가운데에서 차지하는 비율이 2%로 1904년에 비해 1/5 이하로 떨어졌다. 그리고 인구 당 의과대학 졸업생 수는 1904년의 40% 수준에 불과하였다. 그 뒤1940년까지 의과대학은 8개 더 감소하였지만 재학생 수, 졸업생 수, 인구당 졸업생 수는 각각54%, 67%, 34%씩 증가하는 양상을 보였다.


사실은 의과대학과 졸업생 수가 급격히 팽창하던 1880년부터 20세기초엽 사이에도 의사/인구비율은 오히려 약간 줄었다. 유럽 등지에서의 이민 등으로 인구는 급증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새로 의업에 참여하는 의과대학 졸업생 수가 늘어남에 따라 기성 의사들은 점점불만을 갖게 되었다. 각 지역의 의사회에서는 의과대학들에게 입학 기준을 높이고 등록 학생 수를 줄임으로써 새로이 배출되는 의사의 수를 억제해 달라고 요구하였다. 그러나 이것은 등록금이 주 수입원인 의과대학들의 이익에 배치되는 것이었고 따라서 실패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일반 국민들에 대해서도 호소력을 거의 갖지 못했다. 일부 의사들에 의한 의료의 독점을 당시미국 사회와 국민들은 납득할 수 없었던 것이다. 다음으로 각급 의사회는 각 주에서 의사면허를관장하는 기구에 로비를 벌여 어느 정도 성공을 거두었다. 1900년까지 48개 주에서 의사면허법을 제정하였으며, 그 법의 대부분은 면허를 얻기 위한 전제 조건으로 인가받은 의과대학을 졸업할 것을 요구하였다. 그리고 1910년까지는 44개 주에서 면허자격시험으로 필기시험을 실시하였다. 그러나 그러한 것도 미국의사협회의 입장에서는 만족스럽지 않았다. 그 법은 대개 강제력이 없었고 요구 조건이 주마다 달라서 한 주에서 면허를 얻지 못한 학생이 다른 주에 가서 면허를 얻는 사례가 빈발하였던 것이다35)


의과대학을 규제할 더 효과적인 방법을 찾던 미국의사협회는 각 주에서 의사면허를 관장하는기구에는 의과대학을 제대로 평가할 인력도 자원도 없다는 사실을 발견하고는, 1904년 의학교육심의회(Council on Medical Education)를 구성하였다. 심의회는 1905년 의과대학들을 평가하기위한 기준을 마련하였다. 그 기준에는 의과대학 입학 자격으로 최소 4년제 고등학교 졸업의 학력 제한을 둘 것, 의과대학 수업 연한을 4년으로 할 것, 주 의사면허 시험에서 졸업생들이 일정수준 이상의 합격율을 보여야 할 것 등이 포함되어 있었다.


그리고 심의회는 1906년과 7년에 걸쳐 위의 요건과 교과 내용, 학교 건물 및 시설설비 등을 기준으로 당시 160개의 모든 의과대학을 실사하여 A(acceptable), B(doubtful),C(nonacceptable)의 세 가지 등급을 매겼는바 A급이 82개교, B급이 46개교, C급은 32개교였다.심의회는 각 의과대학에는 그 결과를 통보하였지만 대외적인 발표는 하지 않았다.36) 일반 국민들로부터 별로 신뢰를 받지 못하던 미국의사협회로서는 그러한 조사보고서의 공개가 불러올 파장을 감당할 자신이 없었던 것이다.


한편 1905년부터 미국의사협회는 기관지인 <미국의사협회지>(Journal of the American Medical Association)에 의학교육 실태에 관련된 연례 보고서를 게재하기 시작하였다. 특히 각 주에서시행하는 의사시험의 결과를 의과대학 별로 발표하였다. 그 잡지에 게재된 바에 의하면 1905년에는 주 면허 시험에 응시한 7173명 중 21%인 1492명이, 1910년에는 7004명 중 18%인 1289명이낙방하였다.37)


수적으로는 의과대학의 전성기인 이때 많은 영리 목적 의과대학(proprietary medical college)이 전면적인 재정난을 경험하고 있었다. 학생들은 대학에 대해 과학적인 내용과 형태를 갖춘 의학교육을 요구하고 있었다. 시간제로 기초의학 교육을 담당하던 개원 의사들은 새로이 팽창하고발전하던 교과 내용을 감당할 수 없게 되었고, 많은 의과대학들은 따로 봉급을 지급하면서 기초의학 교육을 전담할 사람을 구할 수도 필요한 설비와 시설을 갖출 수도 없었다. 또 한가지 문제점은 의학 분야가 점차 세분화 전문화됨에 따라 기존의 교수진은 그러한 새로운 영역을 감당할수 없게 되었으며, 또한 병원 시설도 더 필요하게 된 것이다. 그러한 상태인 데다가 주 의사면허법에서 의과대학의 입학 기준을 높이자 학교를 운영할 만큼의 충분한 학생을 유치할 수가 없게되었던 것이다.38)


이러한 위기에 직면하여 취약한 의과대학들은 다른 의과대학과 합병을 하거나 재정적 지원을기대하여 종합대학의 속으로 들어가거나 그도 안되면 문을 닫을 수밖에 없었다. 그리하여 1900년부터 <플렉스너 보고서>가 나오는 1910년까지의 10년 동안 이합집산이 심해 43개 학교가 다른의과대학이나 종합대학과 합병을 하고 27개 학교는 아예 문을 닫게 되었으며 1906년부터 4년 동안 전체적으로 31개 의과대학이 감소하였다. 이 시기 동안 학생 수의 감소는 더욱 뚜렷하여1910년은 1904년에 비해 그 24%인 6616명이나 이미 줄어들었다.




<플렉스너 보고서>와 의학교육의 개혁


많은 의과대학이 기준 미달이라는 사실을 객관적으로 입증하기 위해, 1908년 미국의사협회 의학교육심의회는 카네기 교육진흥재단(Carnegie Foundation for the Advancement of Teaching)에대해 의과대학의 실태에 대한 독자적인 조사 사업을 벌여 줄 것을 요망하였다. 그리고 이 조사연구 사업은 의학이나 의학교육과는 인연이 없던, 중등교육자인 플렉스너(Abraham Flexner,1866-1959)에게 맡겨졌다.39) 플렉스너는 조사를 시작하기 전에 존스홉킨스 의과대학40)의 교수진과 몇 차례 회합을 가지고 의학교육에 관한 그들의 생각을 받아들였다. 미국의사협회는 표면적으로는 독자적인 조사 사업을 해 줄 것을 요청했지만 의학교육심의회의 간사가 1909과 10년에걸친 대부분의 의과대학에 대한 현장 조사에서 플렉스너를 보좌하는 등 서로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였다. 그리고 1910년 카네기 교육진흥재단은 <미국과 캐나다의 의학교육>(Medical Educationin the United States and Canada)41)이라는 제목의 이른바 <플렉스너 보고서>(Flexner Report)를펴내었다.


<플렉스너 보고서>에서는 각 의과대학이 입학 자격, 등록학생 수, 교수 수, 재원, 실험실 시설, 임상실습 시설 등의 기준에 따라 기술, 평가되었다. 교수진의 자질, 교육 방법, 학생과 교수진과의 관계 등에 관해서는 언급이 없었다. 플렉스너는 좋은 시설, 높은 입학 기준, 그리고충분한 수의 교수만 갖추어지면 제대로 된 의학교육이 이루어질 것이라고 확신하고 있었다. 이점에서 플렉스너는 미국의사협회 의학교육심의회가 설정한 기준을 거의 고스란히 따르고 있었다.42)


대부분의 의과대학이 이 <보고서>에 대해 매우 비판적이었다. 알바니 의과대학의 한 교수는플렉스너가 전화로 방문을 통보하고는 대학의 서무주임만 한 차례 만나는 일로 자기 대학에 대한평가를 끝냈다며 <보고서>에 대한 불신을 토로했다. <플렉스너 보고서>에 대한 의료계 내의 반응은 복합적이었다. 당시의 가장 대표적이며 지도적인 의학잡지인 New York Medical Journal과Medical Record는 종합대학과 연관이 적은 의과대학들에 대해 플렉스너가 심한 혐오감을 가지고있다고 비판하였으며 그의 평가 방식 전반에 대해서도 신뢰하지 못하겠다는 투였다. 각 지역의의사들 역시 자기 지역의 의과대학에 대한 플렉스너의 비판에 대해 학교를 옹호하는 경우가 많았다. 반면 Journal of the American Medical Association은 <보고서>에 대해 열렬한 지지를 보냈다.43) 미국의사협회의 기관지라는 성격상 그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지난 수십년 동안 <플렉스너 보고서>가 이 시기 의학교육 개혁의 매우 주요한 동인이었다는 평가가 있어 왔다. 즉 <보고서>는 첫째, 능력없는 의사들을 양산하여 의사직의 가치를 낮추고 있었던 기준 미달 의과대학들의 실태를 폭로함으로써 많은 부실 의과대학의 문을 닫는 성과를 거두었다고 여겨져 왔다. 둘째로는 의과대학의 기초의학 교육 과정에서 실험실 교육을 중시하는 데크게 기여하였으며 임상 실습에서는 병원의 비중을 높이는 데 커다란 기여를 하였다는 것이다.


확실히 그 <보고서>에는 다 부서져 가는 건물, 악취 투성이의 해부실습실, 보잘 것 없는 설비,경악할 정도로 형편없는 진료소, 실험실에 대한 투자보다는 선전광고비가 더 많은 경우 등 부실한 의과대학의 실상이 잘 그려져 있다. 하지만 앞에서도 보았듯이 1900년부터 <보고서>가 나온1910년까지의 10년 동안 이미 많은 의과대학이 문을 닫거나 통합을 하였다. 그리고 <보고서>가나올 무렵의 의과대학 실태를 보면 자격 미달 의과대학이 수는 상당히 많았지만 그 졸업생 수는그리 많지 않았으며 더욱이 실제 진료 활동을 하는 의사의 수는 더욱 적었다(표 5).



표 5. 등급에 따른 의과대학의 특성, 1909년 44)





C급 의과대학은 전체의 1/4에 달하지만 대개 규모가 매우 작아 재학생 수와 졸업생 수는 약10%에 지나지 않았다. 의사면허시험에 합격한 수를 보면 등급에 따른 차이는 더욱 분명하여 C급의과대학 출신자는 불과 8%뿐이었다. 이 자료들을 볼 때 C급 의과대학은 <플렉스너 보고서>가발표될 당시에는 의사 양성에서 이미 미미한 위치를 차지할 뿐이었다. C급 대학 출신으로 진료활동을 하는 의사 수는 적었기 때문에 그들이 진료 수준에 미치는 영향이 크지 않았으며, 대개 일급 의과대학 출신자들이 꺼려 하던 지역에서 개원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경쟁에도 큰 영향을미치지 못하고 있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플렉스너 보고서>에 의해 이 시기의 의학교육 개혁이 비롯된 것은 아니었지만, 그러한 변화에대해 촉매제로서 작용을 한 점은 틀림없을 것이다. 플렉스너의 전략이며 표어라 할 수 있는 실험과 과학에 기반한 의학 연구와 교육은 과학주의(scientism)가 만연하던 당시 사회에 커다란반향을 일으켰다. 과학이라는 이름 앞에서 동종요법사 의과대학과 약초요법사 의과대학 등은 맥없이 스러져 갔다. 역시 과학이라는 기준에 비추어 볼 때 함량 미달인 대부분의 흑인의과대학과 여자의과대학 들도 문을 닫을 수밖에 없었다. 그것은 또한 과학이라는 상표로 비정규 의료인(sectarian practitioner)에 대해 우위를 주장하던, 미국의사협회 쪽 의사들의 입지를 확고히 하는 결과를 가져 왔다. 그리고 앞으로의 의학 교육은 더욱더 과학에 기반한 것이 되어야 했으며의학 연구와 긴밀한 관련을 갖도록 추동되었다.


플렉스너의 의학교육관은 실제 진료를 겨냥한 것이라기보다는 연구와 그것에 기반한 교육이었다. 그에게는 의과대학이 적절한 수의 의사를 사회에 배출해야 한다는 필요성은 부차적인 것일뿐이었다. 또한 그는 저소득층 의과대학생이 직면하는 경제적 어려움 등에 대해서는 거의 언급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플렉스너는 자신의 <보고서>에서 1910년 현재 전국적으로 각각 300명 가량의 재학생을 갖는 30개나 31개의 4년제 의과대학만이 필요하다고 하였다. 그의 주장대로라면당시 의과대학의 3/4은 도태되어야 하고 학생은 절반 이하로 줄어들어야만 한다.45) 이러한 플렉스너를 퍼킨(Harold Perkin)은 이 나라가 그 동안 성취한 가장 커다란 학문적 업적, 곧 고등교육의 민주화를 한없이 왜소화시키려 했던 제잘난 속물 학자라고 야유하였다.46)


45) 앞에서도 언급하였듯이 플렉스너는 의학에 관련해 철저하게 엘리트주의를 신봉하고 있었다. 여기에는 직접적이든 간접적이든 그러한 견해를 표명하던 당시 의학계의 지도자이던 웰치(William H Welch), 보우디치(Henry P Bowditch), 새턱(Frederick C Shattuck), 바커(Lewellys Barker), 미놋(Charles S Minot) 등의 견해가 반영되어 있다.(King LS. The Flexner Report of 1910. 1086)


미국의사협회 의학교육심의회와 미국 의과대학협의회(Association of American Medical Colleges)는 1916년 A급 의과대학의 최저 입학 자격 요건으로 대학 2년 과정의 수료를 요구하는데 합의하였다. 그리고 곧 이어 1918년에는 주 의료위원회 연합(Federation of State Medical Boards)이 미국의사협회 기준의 A급 대학이며 따라서 미국 의과대학협의회의 회원교들을 모두 면허시험을 치를 유자격 학교로 승인하였다. 이렇듯 미국의사협회의 기준이 대부분의 주에서 공식적인 정책으로 인정됨으로써 미국의사협회는 의사 수를 억제하는 데 성공하였을 뿐만 아니라 마침내 비정규 의료인(sectarian, irregular practitioners)들을 의료시장에서 합법적으로 추방하는 개가를 올렸다. 그 뒤로 1930년대초까지 의학교육심의회는 의과대학에 대한 집단적 조사를통해 의학교육을 조절 규제하려는 시도는 벌이지 않았다. 대신 여러가지 점으로 어려움에 처한특정 의과대학들에 대해 개별적인 조사와 평가에 나서 개선 방안을 제시하였다.


<플렉스너 보고서> 이후 1916년 전국 의사면허시험 평의회(National Board of Medical Examiners)가 구성되면서 전국적 규모의 의사면허 시험을 추진하는 노력이 가시화되었다. 평의회는 각 주의 의사면허위원회와 직접적인 관계를 갖는 기구는 아니었지만, 면허시험 문제를 마련하여 각 주에 제공하는 역할을 자임하였다. 1922년 이후 그 시험은 기초의학 분야 시험, 임상과목에 대한 필기시험, 그리고 실제의 진료능력과 수기를 다루는 시험의 세 가지 부분으로 나뉘었다. 1936년 5개 주를 제외한 나머지 모든 주가 평의회 주관의 시험을 공식적으로 인정하였다.


플렉스너는 기초의학의 과학적 방법이 의학 연구뿐만 아니라 환자 진료에도 진정한 밑거름이된다고 확신하였다. 그리고 강의식 교육의 필요성을 완전히 무시한 것은 아니었지만 과학적 방법은 실험실에서의 훈련을 통해 가장 잘 습득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기초의학은 임상적응용이나 학생들의 진로와는 무관하게 철저히 교육해야 한다고 하였다. 또한 그는 당장 임상에활용해야 한다는 따위의 생각으로 방해받지 않는연구가 의과대학에서 주된 자리를 차지해야 한다고도 하였다. 임상교육도 거의 전적으로 진료소와 특히 병원에서의 임상 실습이라는 방식으로이루어져야 한다고 하였는바, 그에게는 병원이 기초의학의 실험실에 대응되는 임상 실험실로 여겨졌다. 플렉스너는 대학교에 소속된 병원만이 제대로 된 교육과 연구를 수행할 수 있다고 굳게믿었다. 그는 자신의 <보고서> 이전에 이미 자신의 이상에 부응하는 방향으로 상당한 개선과 진보가 이루어졌으며 또 이루어져 가고 있다는 사실을 분명히 인식하고 있었다. 앞에서 살펴 보았지만, 많은 의과대학이 이미 4년제로 수업 연한을 확장하였고 실험실 교육을 도입하기 시작하였으며 또한 임상 실습에서도 새로운 변화가 나타나고 있었다. 의학교육의 그러한 개혁은 <플렉스너 보고서>로 더욱 촉진되기는 하였지만 <보고서>의 결과물은 아니었다.47)


20세기초에 기초의학 분야의 중요성은 점점더 커졌다. 새로운 실험실이 많이 지어졌으며 실험장비도 확충되었다. 기초의학 교육에서 실험 기법에 대한 강조는 계속해서 논란의 대상이었다.존스홉킨스 의과대학의 웰치(William H Welch, 1850-1934)는 일찍이 1893년, 후대의 기초의학 전임교수들의 견해를 다음과 같이 나타내었다. "실험 기법에 정통함으로써 최근의 새로운 대발견을 이루었을 뿐 아니라, 그것은 학생들에게 온전한 정신, 과학적이며 논리적인 사고방식, 의학문제 해결 능력을 심어 주는바 이 모든 것이 의사에게 필요하다.48)" 그러나 많은 임상가들은 그러한 견해에 강하게 반발하였다. 그들은 임상의학과 관련되는 기초의학의 원리적인 측면을 주로교육할 것을 주장했다.49) 기초의학자와 임상의학자들 사이의 이러한 불일치는, 양쪽 모두를 만족시키지는 못했지만 이후의 의학 발전에 커다란 영향을 미치게 되는 일종의 타협을 가져 왔다.이에 따라 미국에서는 유럽보다 훨씬 임상 응용을 중시하는 기초의학 교육이 이루어졌으며 이는그 뒤의 미국 의학의 성격을 규정하는 중요한 요소로 작용하게 되었다.


또한가지 중요한 문제는 의과대학에서의 기초의학 연구 문제이었다. 웰치는 이미 1893년 기초의학 교육자의 가장 필수적인 요소는 스스로 훌륭한 연구자이어야 하며 학생들에게 연구의 정신을 불어 넣어 주어야 하고, 그리고 의과대학은 의학 연구의 발전을 위한 소임을 다하여야 하므로교수는 연구 능력에 따라 선발하여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리고 의과대학의 기초의학 교수는종합대학의 과학 분야의 교수진과 긴밀한 관계를 가져야 하며 그것은 의과대학이 종합대학에 편입됨으로써 가능하다고 생각하였다. 또한 실험실습실을 종합대학의 과학 분야 학과와 의과대학이 함께 활용함으로써 운영 비용을 줄일 수 있다고도 하였다.50) 그러나 그러한 주장과 추진에도불구하고 종합대학과 의과대학의 진정한 통합은 기대만큼 빠른 시간 안에 이루어지지는 않았다.


기초의학 연구에 대한 투자는 주로 대재벌이 출연한 재단에 의해 이루어졌으며 그 액수는 점점더 많아져 갔다. 19세기 동안 부유한 기부자들은 대개 자신이 거주하는 지역에 병원이나 진료소를 짓는 데에 많은 돈을 기부하였다. 단지 반더빌트(Vanderbilt) 가문에서 1880년대에 컬럼비아의과대학에 기증한 것이 의학교육의 발전을 위한 대규모 기부의 유일한 것이었다.51) 그러나 20세기에 접어들면서 변화가 일어났다. 부유한 사람들이 의학교육과 연구에 많은 재산을 기부하기시작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단순한 개인적 기증이 아니라 자신들이 재단을 만들어 그 기구를 통해 기부하는 모습이 나타났다. 따라서 점점더 기부는 체계적이고 조직적인 성격을 띠게되었고 출연자는 기부금의 쓰임새에 대해 개입하게 되었으며, 직접적인 영리 목적을 가진 것은아니었지만 어떤 면에서는 투자의 측면을 가지게 되었다. 모건(J Pierpont Morgan)과 록펠러(John D Rockefeller)가 하바드 의과대학의 새 캠퍼스 건설에 각각 100만달러씩을 기증했다. 또한 록펠러는 1903년 뉴욕에 록펠러 연구소(Rockefeller Institute)를 세워 1910년까지 600만달러를 지원하였다. 카네기(Andrew Carnegie)는 1902년 워싱턴에 1천만달러를 들여 카네기 연구소(Carnegie Institution)를 세웠다. 록펠러 연구소의 주된 관심은 의학 연구이었으며, 카네기 연구소는 생물학 연구에 치중하였다. 그밖에 필라델피아에 핍스 연구소(Phipps Institute), 샌프란시스코에 후퍼 연구소(Hooper Institute) 등 여러 연구소들이 생겨났다. 그러나 대부분의 연구소들은 일급 연구원을 포함하여 연구 인력의 부족이라는 문제에 봉착하게 되었다. 기부자들은머지않아 자신들의 기금 출연이 의과대학에서 더 유용하게 쓰일 수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기 시작하였다.52)


그리고 추가로 연구지원 재단이 설립됨에 따라 의과대학에 대한 지원이 급격히 늘어나게 되었다.53) 이러한 지원은 주로 의학 연구 분야에 집중되었다. 재단들은 자신의 이름을 날리기 위해서도 첨단 연구를 하는 일부 일류 의과대학에 지원하기를 즐겨하였다.54) 그 가운데에서도 가장영향력이 있는 재단은 록펠러가 1902년에 설립한 교육재단(General Education Board)이었다. 그재단은 1928년까지 24개 의과대학에 6천백만달러를 지원하였다. 그 중 절반 이상이 코넬, 시카고, 존스홉킨스, 반더빌트, 워싱턴 의과대학에 집중되었다. 19세기 중반부터 주로 정부의 지원으로 성장해 온 독일의 의학 연구와는 달리 미국의 경우는 대재벌이 출연한 비영리 자선재단(philanthropic foundation)의 투자가 주요한 자금원이 되었다.55)


Ben-David는 19세기 후반 50년 동안 이루어진 의학 상의 새로운 발견은 독일인에 의해 46%, 프랑스인에 의해 14%, 미국인에 의해 13%, 영국인에 의해 10%가 이루어진 반면 20세기 1/4분기 동안에는 미국인에 의해 33%, 독일인에 의해 30%, 영국과 프랑스인에 의해 각각 12%와 8%가 이루어졌다고 지적하였다.56) 그 구체적 수치는 받아들이지 않는다고 하여도 의학 연구의 후진국이던미국이 이 시기를 거치며 어느새 선두 그룹에 끼이게 된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당시까지도 의학 연구의 세계적 중심이던 독일에서는 연구는 의과대학이 아니라 정부 투자 연구소에서 수행되고 있었다. 연구소의 책임자들은 의과대학 교수이었지만 나머지 대부분의 연구자들은 교직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리고 거의 모든 연구자들은 기초의학 전공자로 그들의 관심은 기초 분야 연구이었지 임상적 문제는 거들떠 보지 않았다. 쓸만한 실험실과 병원 시설은대개 연구소 소속으로 의과대학과는 직접적인 관련이 없어서, 학생들의 교육과는 인연이 없었다.연구소의 책임자직을 맡고 있는 일부 교수 이외에 나머지 교수들은 연구소에 자리를 가지고 있지않았으며 따라서 연구는 거의 또는 전혀 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들의 봉급 일부는 정부에서, 나머지는 학생 등록금으로부터 나왔다. 교수들은 수입을 더 올리기 위해 많은 학생들을 끌어 모아대형 강의를 하기를 즐겼다. 따라서 교수와 학생간에 긴밀한 관계란 생각하기 어려운 조건이 마련되었다. 이러한 연유로 과학적 의학이 가장 먼저 발달했던 독일의 의과대학에서는 아이러니컬하게도 학생들에게 새로운 연구 결과를 소개하는 일도 연구 방법이나 정신을 심어주는 데에도 인색할 수밖에 없었다.57) 이러한 독일에 비해 미국은 의학 연구와 교육이 어렵지 않게 연결되는구조와 조건을 이 무렵부터 갖추기 시작하였으며, 의학 연구의 내용 또한 임상의학과 기초의학이연결되는 방향으로 이루어져 가고 있었다.


20세기초 웰치 등 몇몇 지도적인 기초의학 교수들은 임상의학 영역에도 전임 교수 요원이 필요하다고 강조하기 시작하였다. 그들은 기초의학의 전임 교수들이 이미 유럽에서 많은 과학적 발견을 하였으며 미국에서도 그들이 기초의학 수준을 끌어올렸다고 주장했다. 1907년 웰치는 임상의 몇몇 주요 과의 과장은 자신들의 정력과 시간을 대학 바깥에서 진료 수입을 올리는 데 쓸 것이 아니라 병원 진료와 연구 및 교육에 바쳐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그러나 거기에 동조하는 임상가는 거의 없었다.58) 이렇듯 임상가들 대부분이 별로 내켜하지 않았지만 임상의학 분야에도전임 교수가 시간제 교수를 대치하기 시작하였으며 그러한 현상은 재원이 풍부한 대학에서부터나타났다. 그리고 전문 과목에 대한 교육과 진료가 임상 과정에 두드러졌다. 그리고 임상 교육이 주로 병원에서 이루어지게 되었기 때문에 지역 사회에서 볼 수 있는 환자 대신 특이한 환자를중심으로 교육과 연구가 이루어지게 되었다.


플렉스너는 웰치의 영향을 대단히 많이 받아, <보고서>에서 임상교수들 역시 사적인 진료를 하지 않는 전임 교수가 될 것을 강력히 제안하였다. 그는 의과대학이 전임 임상교수를 채용함으로써 늘어나는 지출의 증가를 몇가지 방법으로 해결할 수 있다고 하였다. 우선 임상 교수들은 자신들의 수입이 줄어드는 것을 감수해야 한다고 하였다. 또다른 방법은 의과대학의 수를 30 내지31개로 줄여야 한다고 하였다. 세번째 방법은 사립 재단으로부터 막대한 기부를 받는 것이었다.59) 플렉스너의 마지막 방법은 앞에서 언급한 대로 기부자들의 관심이 변할 때에 맞추어 나타난 것이다. 이 분야에 특히 기여를 많이 한 것은 록펠러 교육재단이었다. 교육재단은 초기에는의학교육에 대한 특별한 목표가 없었다. 그러나 1912년 플렉스너가 그 재단의 임원이 됨으로써사정은 달라졌다. 1914년 그는 재단으로 하여금 8백만달러를 몇년에 걸쳐 임상교수 전임화 계획(Full-Time Plan)을 실현하는 데 쓰도록 하였으며, 1919년 그는 록펠러를 설득하여 자신의 <보고서>에서 제안한 내용, 특히 전임 임상 교수진의 확충을 위해 5천만달러를 투자하도록 하였다.그러한 노력은 록펠러 연구소의 연구책임자 회의(Board of Scientific Directors)의 위원이 된웰치에 의해서도 이루어졌다.60) 바커(Barker)에 따르면 플렉스너, 웰치 그리고 플렉스너의 형이며 당시 록펠러 연구소 소장이던 사이먼 플렉스너(Simon Flexner)가 임상교수 전임화 계획을 위해 록펠러 재단의 기금을 쓰도록 하였다고 한다.61)


당시 비전임 임상교수이던 리처드슨(Edward Richardson)은 임상 교수진과 동창회는 일치단결하여 반대하였던 반면 거의 모든 기초의학 교수들은 열정적으로 그 계획을 지지하였다고 한다. 사실 문제는 전임 교수를 채용하는 것이 아니라 비전임 시간제 교수를 해임하는 것이었다. 비전임교수를 전임 교수로 대체하는 것은 길고도 힘든 과정이었다. 임상교수 전임화 계획이 임상가 대신 유능한 연구자로 대치하는 목표를 충분히 성취한 것은 아니었다. 인사위원회는 임상가로서는대단하지 않으나 뛰어난 연구 능력을 가진 후보와 그 반대의 경력과 자질을 가진 후보 사이에서고심한 경우가 드물지 않았다. 그러할 때 항상 연구 능력이 중시되었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어느 나라보다도 훨씬 더 연구 능력을 갖춘 임상 교수를 많이 채용한 것은 틀림었는 사실이며 이것이 당시와 그 뒤의 미국 의학의 특성을 잘 나타내 준다.62)


이러한 개편과 개혁의 과정을 거치면서 의학교육에 들어가는 비용은 급격히 증가하였는바, 그것은 다른 전문직 교육과 비교할 때 더욱 뚜렷하였다. 학생 1명이 1학점을 취득하는 데 필요한비용이 치과 16달러, 법학과 공학 11달러, 상과와 사범계가 6달러 미만인 데 비해 의과는 27달러에 이르렀다.63) 그러한 비용의 증대는 주로 기초의학 교육의 강화에 기인하였는바, 기초의학 교육 과정에 들어가는 비용은 전체 의과대학 교육 예산의 50%를 상회하였다. 또한 임상 교수진의많은 부분이 전임제가 되면서 그들에 대한 봉급 지급액이 늘어남에 따라 임상 교육비도 함께 늘어났다. 1930년 학생 일인 당 연간 교육비는 전체 의과대학 평균 1163달러이었으며 몇몇 일류의과대학은 1920년대에 이미 2000달러 선을 넘어섰다.


이러한 지출의 증가는 물론 의과대학 수입이 늘어난 데에 기인하였다. 학생들의 등록금이 차지하는 비중은 지난 세기에 비해서는 흠뻑 떨어졌지만 1920년대에도 여전히 제일 중요한 수입원이었다. 1926년 미국의사협회 의학교육심의회가 조사한 바에 의하면 학생 등록금은 전체 수입의34%를 차지했다. 두번째로 중요한 수입원은 주 정부와 시 정부의 지원금, 그리고 여러 종류의기부금이었다. 지방정부의 지원금은 전체 수입의 22%로 일차적으로 공립학교에 주어졌으며 기부금은 23%로 주로 사립학교에 제공되었다. 또다른 주요 수입원은 무보수 임상교수들에 의한 공짜노동이었다. 무보수 임상교수들의 존재는 기초의학 교수들의 봉급과 그들의 실험실 시설에 학교예산을 쓸 수 있도록 하였다.


교육 비용과 등록금이 상승함에 따라 가난한 학생이 의학교육을 받을 가능성은 점점 축소되었다. 특히 주립이나 시립 등 공립 의과대학이 없는 지역에서는 더욱 그러하였다. 또한 대학들이제1세대 및 제2세대 이민, 여성, 유태인, 카톨릭 신자, 흑인 들을 정책적으로 배제하는 방침을택함에 따라 소수 계층의 의학교육 참여는 더욱 어려워졌다.64)


또한 이 시기를 거치면서 지금도 대개 통용되고 있는 표준화된 의학교육 과정이 나타났다. 의과대학 과정의 처음 두 해는 기초의학에 할당되었으며 그리고 나중 두 해 동안은 임상의학 교육이 행해졌다. 기초 과정은 실험실 교육이 점차 강조되었으며, 임상 과정은 강의와 더불어 병원에서의 임상 실습이 점차 중시되었고 전문 과목에 대한 강조도 해가 거듭됨에 따라 커 갔다. 그리고 대부분의 의과대학은 교육과 연구에서 질병의 심리적, 사회적, 환경적 요인은 경시하는 대신 생물학적인 측면에 치중하였다.65) 이미 어느 임상가는 1914년에 당시의 조류와 경향에 대해다음과 같이 개탄하고 있다. 이 전문화와 즉각적 진단의 시대에, 전인격으로서의 환자의 모습은 종종 무시되고 있다. 요즈음의 임상 교육에서만큼 인간이 잊혀진 적은 결코 없었다. ....의학 지식이 전반적으로 향상되고 확장됨에 따라 환자를 더욱더 인격체로 대해야만 하는 데도,임상 전문 분과에 대한 교육의 비중이 커짐에 따라 그러한 경향은 무시되고 있다.66)


이상 살펴 본 대로 20세기초 미국의 의학교육 개혁은 특히 그 결과에서 다의성(多義性)을 띠고있다. 그것은 의학교육 내용에서 실험실 교육과 병원 교육이 강화되었다는 측면을 가지고 있을뿐만 아니라 그러한 변화를 통해 앞으로의 의학 자체의 특성도 달라질 터이였다. 그리고 점차그 세력이 약화되고는 있었지만 명맥을 유지하던 비정규 의료인을 거의 완전하게 의료시장에서축출하는 등 정규 의사의 사회적 지위를 확립하는 데에 커다란 구실을 하였다. 그리고 그러한개혁의 과정은 어느 한 경향이나 세력에 의해 일방적으로 이끌려졌다기보다는 여러가지 다양한경향과 세력이 상호작용하고 각축하는 속에서 진행되었다는 측면을 놓쳐서는 안될 것이다.


색인 단어: 의학교육, 미국의사협회, <플렉스너 보고서>, 과학적 의학




*이 논문은 1994년도 大韓醫史學會춘계학술대회(1994. 5. 6) <기획 심포지움: 현대 서양의학의

변모 과정>에서 구연된 것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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