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Chapter 15. Academic Health Centers Under Stress : Internal Dilemmas
    • 역사를 통틀어, 미국의 의과대학은 다른 고등교육과 같이 사회, 경제, 정치적 발전의 안에서 모양을 갖춰왔다. 따라서 외부 사건으로 인한 압박을 받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이미 존재했던 challenge들이 더욱 심해졌지만, 사실 많은 문제는 외부의 적대적 환경에서보다는 주로 의학지식의 발전과 AHC라는 조직의 발전에서 기인한 것이었다.

 

  • Molecular Medicine and the Disappearance of Teachers
    • 1970년대와 1980년대에 biomedical research 바꾸어놓을 분자생물학적 혁명이 힘을 받고 있었다. 연구자들의 시선은 점차 작은 것들을 향했다.
    • 기초 과학 분야에 걸쳐서 깊이 있고, 아름다운 발견들이 이뤄졌다. 가지가 특징적이었는데, (1)우선 하나는 분자생물학과 질병에 대한 분자적 개념이었다.
      • 유전자 재조합의 방법과 기술이 발전했고, 유전자의 손상으로 인한 질병들이 발견되었다.
    • (2) 번째 분야는 세포생물학이었는데, 세포를 구성하는 단위들의 구조가 밝혀졌다. 세포막 수용체, second messenger 등이 발견되었다.
    • (3) 번째는 면역학이었고, 항체, , 이식 거부반응, multiple sclerosis, rheumatic disease 등의 연구가 발전했다.
    • (4) 번째는 신경과학이었다. 다양한 신경전달물질, lithium 같은 약들, 감정을 조절하는 신약들이 발견되었다.
    • Biomedical research 시대를 보여주는 분자생물학의 혁명을 하나 꼽으라면, 바로 "molecular language" 바탕으로 각기 분리되어 있던 preclinical science 통합이다.
      • 기초과학의 합류는 이전부터 일어나고 있었는데, 이제는 거의 완성단계에 이른 것이다.
    • 임상과에서 연구는 여전히 잡다했는데, 우선 관찰적 접근법이 여전히 유효했다. 임상 현상에 대한 Experimental study 같은 임상 연구도 하고 있었고, 역학 연구도 중요했다. Private foundation 지원에 힘입어 일부 의사들은 질병의 비생물학적 요인들을 연구하였다.
    • 그렇지만 가장 앞서나가고 있는 clinical investigation 분자생물학적인 이었고, 기초과학 분야와 동일한 reductionist approach 사용하고 있었다.
      • Inflammation 일으키는 Cell wall 대한 연구가 이뤄졌고, 고콜레스테롤의 미스터리도 분자 수준에서 밝혀졌다.
    • Clinical investigation 다룬 논문들을 살짝만 보아도 얼마나 분야의 과학 연구가 patient에서 laboratory 이동했는지를 잇다.
      • 1980년대와 1990년대에는 JCI 환자 중심의 논문들이 실렸지만, 이제는 분자세포생물학적 테크닉이 포함된 논문이 대부분이다.
    • 임상 연구가 달라졌다는 다른 신호가 있었다. 많은 AHC에서 clinical research center 대개 활용되지 않았었지만, 1980년대와 1990년대에는 임상 연구를 위한 laboratory facility 새롭게 지어졌고, 1980년대에는 "physician-scientist"라는 단어가 "clinical investigator"라는 단어를 대체하기 시작했다.
    • 아직 배워야 것이 많았지만, 분자생물학적 접근법이 신체와 질병에 대한 이해를 바꾸어 놓은 것도 사실이다.
      • Health care system 대해서 많은 것을 배운 학생들은 건강을 결정하는 중요한 요인이 환경, 사회적 조건, 그리고 예방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성인들의 가장 흔한 문젯거리인 질병들(알츠하이머병, 종양, 고혈압 ) 환경적 요인과 무관한 것이었고, 조깅이나 식습관이나 금연 등으로 모두 예방이 가능한 것도 아니었다.
    • 그럼에도 불구하고 분자생물학적 혁명은 하나의 딜레마였다. Biomedical 연구는 임상 교육과 진료에서 점점 멀어져 갔고, 의과대학의 지적인 응집성이 위협받고 있었다. "bench-bedside gap" 어느 때보다도 컸다.
    • 기초과학 분야에서 tension 매우 뚜렷했는데, 왜냐하면 대부분의 faculty들의 연구 주제들이 학생들에게 가르치는 내용과는 크게 상관이 없었기 때문이다. 기초의학 과들은 이름을 바꾸기 시작했다. (Dept of physiology => Dept of physiology and biophysics)
    • 일부 분야에서는 예전에 가르치던 내용을 지금도 가르칠 있는 faculty 찾기가 힘들어졌는데, Gross anatomy 대표적인 예였다. 일부 학교에서 official들은 기초의학 faculty들이 연구 faculty 교육 faculty 나눠질 수도 있는 가능성을 언급하기도 했다.
    • 비슷한 변화가 clinical dept에서 있었는데, 전통적인 교육-연구-진료 사이의 응집성이 소실되었다. 전통적으로 임상연구의 특징을 정의하는 것은 '환자'였는데 molecular era에서 환자는 없었다.
    • 이러한 접근법의 결과는 medical discovery 측면에서는 성공적이었지만, 처음으로 임상 연구가 진료 교육과 분리되는 결과 가져왔다.
    • 이에 따라 대부분의 성공한 clinical investigator 진료와 임상교육에 시간을 쏟았고 "실제로 학생을 가르치는 사람들은 인턴이나 레지던트이고, 교수들은 어디 데에 가있다" 라고 하기도 했다.
    • 1970년대에 시작해서, 1980년대와 1990년대를 거치면서 의과대학의 physician-scientist들은 병동에서 사라졌다. 많은 임상과들은 academic tract(physician-scientist) clinician-teacher(clinical scholar track, 교육과 진료에 관심있는 사람들을 위한 track) 구분해서 만들었다.
    • Clinician-teacher track 멤버들은 어려움에 봉착했는데, 연구만이 강조되는 과에 학교에서 '2 시민'으로 낙인이 찍히게 이다. 하지만 그들을 보통의 practitioner와는 달랐다. 그들의 관심이 환자 진료와 교육에 있었지만 그들 역시 창의적이고, 사려깊고, 연구에도 관심이 있었다. 그들은 교육과 진료를 담당하는 role model 역할을 훌륭히 수행하고 있었고, 과의 교육적 mission 많은 부분을 담당하고 있었다.
    • 그럼에도 불구하고, clinician-teacher track 만들어진 것은 molecular era 의과대학이 마주하게 근본적인 지적 도전이라고 수도 있었다. 그것은 바로 Medical science medical practice 사이에 연관을 짓는 것이다. 하지만 지금까지도 교육은 최첨단 연구 사이에는 여전히 갭이 있으며, 많은 사람들이 research faculty 어떻게 나머지 학교와 동떨어진 research institute 만들지 않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것인가를 고민했다.

 

  • Reform Without Change
    • Medicare 시작된 이후 직업으로서의 의학의 인기는 요동쳤다. 그러나 아무도 그런지는 모르고 있었다.
    • M&M 도입된 시기부터 managed care 시대까지, 학생의 구성도 크게 바뀌어서 여자 비율은 꾸준히 상승중이었고, 백인 남자 감소추세였으며, 아시안 비율도 높아졌다.
    • Medicare 도입된 이후 의학은 점차 사는 사람들만이 갖는 직업처럼 되었다. 이러한 현상은 수업료의 급격한 상승과 scholarship fund 부족과도 관련이 있다.
    • 의과대학들은 늘어만 가는 빚과 높아만 가는 수업료에 대해 우려 표했다. 때문에 점차 졸업생들이 primary care 대신 specialty field 하려고 하지 않을까? 확실한 증거는 없었다. 예컨대, 많은 사람이 빚의 양과 전공 선택의 관계를 찾고자 했으나 실패했다.
    • Medical faculty들은 국가적으로 종교나 인종이나 사회경제적 상태와 무관하게 다양한 계층에 기회를 주려고 노력하는 상황에서조차 의학이 사는 사람들의 전유물이 될까 걱정했다. 그렇지만 개인 또는 연방정부의 장학금 지원은 많지 않았는데, 왜냐하면 의과대학이 가난하다고 생각한 학생들도 Congress 대중의 눈에는 앞으로 돈을 사람들로 보였기 때문이다.
    • 그렇다면 달라진 medical student 어떤 사람들일까? 아무도 정답은 모른다. GPA 부모의 직업이나, 전공 등에 대한 자료는 있어도 질적인 측면(가치관, 태도, 열망) 대해서는 거의 알려진 것이 없다.
    • 의과대학 학생들이 누구인가에 대한 질문은 1970년대에 새로운 의과대학 학생들에 대한 개의 상반되는 시각과 관계가 있다. 하나는 community medicine, 공중보건, family medicine 등등의 socially committed 학생들이 의학에 관심이 있다는 시각이다.
    • 번째는, "새로운" medical student 극도의 경쟁 압박으로부터 "premedical syndrome" 앓고 있는 학생들이라는, 부정적인 시각이다.
      • Licensing exam 문제와 답을 사고 파는 의과대학 학생 사이에 부정직성.
    • 의과대학 학생들이 이러한 특징을 얼마나 가지고 있는지는 모를 일이다. 하지만 이런 stereotype 의학교육자들에게 태도, 가치, 생각의 중요성을 일깨워줬다.
    • 가장 좋은 학생을 선발해야 임무는 admission committee에게 있었다. 그전과 같이 admission committee GPA MCAT 점수와 추천서 등등을 보았지만, 별로 완벽한 것은 아니었다.
      • "만약 MCAT lab test였다면, sensitivity specificity, predictive value 너무 좋기 때문에 이미 버려진 검사가 되었을 것이다"
    • 입학 과정에서 가장 한계점은 낮은 학점과 MCAT점수를 가지고 오는 minority student 평가였는데, 왜냐하면 이들 학생들이 의과대학에서는 했기 때문이다.
      • "no correlation between MCAT, GPA and academic performance"
    • 입학 과정에서 개인적 친분은 영향을 주지 못하였다. Admission committess 대개 정직하고 양심적으로 일을 처리했다. 아주 가끔 그렇지 않은 일들이 있을 때면 바로 기사화되었다.
    • 입학 과정은 학생 뿐만 아니라 의과대학 입장에서도 골치 아픈 것이었는데, 단순히 학생을 고르는 단계가 아니라 학생을 모집할 있는 기회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학교들은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premedical student 종종 그들 스스로 인식하고 있는 것보다 많은 힘을 갖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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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학생의 입장에서, 의과대학에서의 삶은 지난 세기 내내 별로 달라지지 않았다. 엄청난 경쟁 대한 exhilaration thrill 있었고, 그만큼 거기서 살아나가기 위한 coping mechanism 있었다.
    • 1970 이후 학생들은 의견을 내기 위한 목소리를 높였고, protest era동안 faculty administrator 애써 그들을 무시했지만, faculty 만족도가 높은 학생들이 충성스러운( 많은 재정적/정치적 지원을 하는) alumni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 1980년대에 (harassment abuse등과 같은) 극도의 스트레스에 대한 보고서들이 나왔다. 모든 종류의 offense 있어서 HO 주된 offender였다.
    • 그러한 보고서들에도 불구하고 학부 의학교육이 전보다 특별히 스트레스를 준다거나 비인간적이라는 근거는 없었다.
      • 의과대학생들이 겪는 abuse 대한 조사는 주로 설문지를 통해서 이뤄졌기 때문에 조금이라도 무시를 당했다고 느낀 사건들이 모두 반영되었다. 실제로 문제가 심각해 것인지, 아니면 학생들의 역치가 낮아진 것인지는 아무도 없었다
    • 그나마 학생들이 걱정을 했던 것은 유급에 대한 걱정이었다. 유급률이 높고 성적이 좋은 학생들조차 직업을 찾기 힘든 다른 과들과는 달랐다.
    • 반면, 새로운 걱정이 생겼는데 바로 레지던트에 대한 걱정이었다. 최상급 학교에서의 경쟁은 항상 심했다.
    • 새로운 경쟁적 환경의 결과는 특정 분야의 레지던트를 하기 위한 학생들의 열기였고, 의과대학의 4학년는 "preresidency syndrome"이라고 불렸다. 특정 분야에 관심이 있는 senior student 4학년을 연속되는 "audition elective" 하며 보냈다. General professional education 집중하는 대신 병원과 병원을 전전해가며 동일한 elective 하고 다녔다.
    • Program director들의 이와 같은 행동은 이해할 했는데, 왜냐하면 그들의 관심사는 최고의 HO 뽑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Clinical clerkship에서의 performance 인턴/레지던트 동안의 performance 예측할 있게 해주는 가장 좋은 지표였고, 학장이나 faculty 추천서는 신뢰를 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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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M&M 통과되면서 medical faculty 수많은 교육적 이슈들과 씨름해야 했다. Molecular revolution으로 인해서 교육은 어려워졌다. Faculty 항상 교육과정 개혁에 관여했고, 가장 두드러지는 경향은 basic science 투자하는 시간을 줄이는 것이었다.
    • Harvard의 "New Pathway" program 40명으로 구성된 학생을 faculty 맡아서 생활 지도를 하며 faculty 학생간의 interaction 높이자는데 목적이 있었다.
  • 어떤 학교도 이상적인 교육과정을 달성했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그리고 mission, resource, local tradition 차이 때문에 학교에서의 성공적인 실험이 쉽게 다른 학교로 전달되지도 않았다.
  • 학교들은 material 조직하는 방법과 presentation방법 뿐만 아니라 새로운 교육과 평가 방법의 실험 학교도 있었는데, 예를 들어 일부 학교는 SP 사용한 교육을 했고, McMaster University PBL 도입했다.
    • 외에도 computer-assisted literature search, computer-based interactive learning 등등.
  • 돌봄(caring) 연민(compassion) 교육이 가능할까? 형식적인 교육이 도움이 거라는 가정은 그럴 했다. 환자를 전체적으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많은 중요한 사회적인 개념들이 중요했다.
    • Communication skill 향상되어야 했고, 행동과학의 도구들도 사용되어야 했다.
    • 가장 중요한 것은, empathy 다른 사람의 입장에서 생각할 있는 능력이 필요했다.
  • 한편, 교육을 통해서 caring doctor 키우는 것이 가능하다는 것에 대한 근거는 없었다. 1970 이후 대중들은 많은 medical humanities 가르침에도 불구하고 의사를 비인간적이고, 이기적이며, 탐욕스럽다고 생각했다. 실제로 생물을 전공한 사람들이 caring, sensitive, humanitarian하다는 연구결과도 있다. Medical humanities formal instruction으로 가르치는 것에 대한 rationale 확고했다. 그렇다고 해서 아무 학생이나 뽑아도 된다는 오해만 하지 않는다면 말이다.
  • caring 하는 physician 키워내기 위한 노력에 '과함' 있을 있을까? 문자 그대로 보면 그렇다 라고 수도 있겠지만, 실제로는 대답은 아니오 였는데 왜냐하면 그것이야말로 좋은 physicianship 가장 중요한 역량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일부 교육자들은 점차 의학의 'art' 측면을 강조하는 것이 'science'로서의 기반을 약화시킬 것을 걱정하였다.
    • Cornell 내과의사면서 감염 분야 전문가인 McDermott basic science 강조하지 않는 것은 anti-intellectualism이면서 vocationalism 반하는 것이었다.
    • "그냥 적당히 평범한 의학적 문제들을 다룰 있는 의사를 키우는 것은 쉽다"
  • Humanitarian으로서의 그의 위치를 고려하면 McDermott 그토록 걱정을 했던 것도 이해는 된다. 그는 내과 분야의 권위자이면서 clinical investigation에도 뛰어났지만 그는 의학의 사회적 책임을 강조하는 접근법으로도 유명했고 그가 이름을 붙인 [의학의 "Samaritanism"] 강조했다.
  • 아마도 모든 교육과정 개발의 문제 중에서 가장 어려운 것은 새로운 교육 방법을 평가하는 일일 것이다. 미국 교육의 역사를 통틀어서 어떤 intervention 가해졌을 그것의 효과를 평가하는 것은 사실상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다.
  • 누가 의학 교육과정을 조절하는가? 이론적으로는 의과대학들이었지만, 면허를 따기 위해서 학생들은 ( 파트로 ) 시험을 통과해야 했기 때문에 실제로는 NBME라고 생각했다.
  •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의과대학 사이에 항상 일정 정도의 차이는 있었다. 반대로 학교들은 세기 내내 포괄적인 교육의 목표에 있어서는 거의 일치했다.
    • Molecular revolution 생물학을 바꾸고 있었던 만큼이나 질병의 양상도 바뀌고 있었다. AIDS 같은 새로운 질병이 등장했다.
    • 비판적으로 사고하고, 새로운 지식을 흡수하고, 독립적으로 학습할 있는 의사를 만들려는 노력은 모든 의과대학 사이에 퍼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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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역설적으로 의학교육을 지적인 경험으로 충만하게 하려는 수많은 (talk)에도 불구하고 실제로 목적은 거의 달성되지 않았다. 교과과정은 경직되어 있었고, 과밀했고, 너무 많은 강의가 있었고, 단순 암기를 지나치게 강조했다.
  • 의학교육의 이상에서 가장 크게 벗어난 것은 basic science 교육이었다. 1970년대와 1980년대에 laboratory instruction 크게 감소했고, 이러한 변화 과정에서 "핵심(bottom line)" 암기하는 것이 우선적으로 강조되었다. 학생들은 은연중에 이러한 교육 방법의 한계를 깨닫고 있었고 수업을 빠지고 혼자 공부하는 일이 많아졌다. 많은 학교에서 "협동적 필기(note-taking cooperative)" 이러한 상황을 formalize  시켰다.
  • 임상 과목에서도 의학교육의 현실은 rhetoric 달랐다. 여기서 문제는 너무 많은 강의가 아니라 faculty teacher role model 부족이었다. HO 역할은 대학원에서의 TA 역할이 비슷해졌지만 HO 교육에 있어서 아무런 지도도 받지 못했다. 또한 학생과 HO 모두 학습을 위한 경험이 필요한 사람들이었다.
  • 변화 없는 개혁은 의과대학이 주로 학생이 중심이 변화과정이 아니라 faculty 중심이 변화과정을 거쳤다는 것에 원인 있다. Basic science 과목에서 강의가 강조되고 실험실 교육이 줄어들었지만 faculty 많은 시간을 갖게 되었다.
  • 1970년대와 1980년대에 교육에 투자되었던 faculty 시간을 주로 빼앗은 것은 연구였다. 임용, 승진, 봉급 등등은 주로 publication 연구비를 얼마나 따오느냐에 달려 있었다.
  • 연구에 집중 있도록 하는 인센티브는 엄청났고, 특히 junior faculty 그들의 career 쌓고자 했다.
  • 일부 teacher들도 승진하긴 했지만, 그들에게 오는 보상은 느렸다. 예를 들면 Clinical-teacher track 있는 faculty들은 승진을 위해서 오래 기다려야 했다.
  • 교육과 연구 사이의 tension 책에도 앞서 나왔던 것처럼 매우 오래 것이었다. 1970년대와 1980년대에 정도는 심해졌다. 우선 여기에는 경제적 이유(연구에 대한 확고한 인센티브) 있었다. 또한 지적(intellectual) 이유 있었는데 bench-bedside gap 커졌던 것이다. Faculty들은 학생보다 Ph.D. candidate 가르치면서 얻는 즐거움이 컸다.
  • 많은 의과대학들의 leader들은 좋은 교육을 정의하고 측정하는 것이 어렵다는 것을 주장하였고, 그로 인해서 연구보다 낮은 지위를 갖게 되었다고 한다.
  • 그러나 연구를 판정하는 정확한 기준이 있는지도 의심스럽다. 연구자의 업적은 publication 숫자로 평가되었다. 그러나 1981년부터 1985년까지 출판된 논문의 80% 심지어 연구자 본인을 포함해도 번도 인용되지 않았다.
    • "Dr.X에게 절대로 '출판되지 않은 생각'이란 없다"
  • WWII 종말 이후 학생 교육은 AHC 하는 활동(연구, graduate teaching, 진료) 부산물이 되었다. 이런 것들이 의학교육에 해를 끼치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모든 의과대학에서 instructor 모습을 보면 교육은 절대 우선순위에 있지 않았다. 학생들에게 반복적으로 불만이 쏟아졌다.
  • 학생을 알지 못하는 faculty 많다는 보고서도 계속 나왔다. 의대 학생들의 최고의 친구인 AAMC조차 학습자 중심의 outlook 포기했다. 1988 조직의 목적을 "the advancement of academic medicine and the nation's health"라고 바꿨다. 의학교육을 바꿔보겠다고 나선 새로운 community-based medical school들도 있었지만, 대부분 빠르게 기존의 가치 체계에 순응해갔다.
  • 줄여 말하면, 진정한 학생 중심의 교육을 하는 것에 가장 장애물은 교육을 진료보다 하위에 문화가 academic medicine 뿌리깊게 박혀 있었던 것이었다.
    • 진정한 educational reform 근본적으로 의과대학을 재구성하고 재조직해야만 가능한 것이었다.
  • 모든 official and unofficial 요구들이 핵심이 교육 시스템이지, 시스템의 결과물 자체에 있지 않다는 것은 필요가 있다. 다른 어떤 나라에서도 의학교육이 그렇게 많은 비난을 받는데, 시스템의 결과물은 좋다고 평가받는 조직이 없다.
  • 이러한 성공의 힘은 열정과 헌신만으로 학생 교육에 힘쓴 faculty에게 있다. 비록 교육에 대한 보상은 거의 없었지만, 좋은 교육은 여전히 가능하긴 했다. 다만 의도된 것이 아니었을 뿐이다(by chance rather than by design).
  • 미국 의사들의 quality 학생들이 활용할 환경이 되어있기 때문인 덕분이기도 했다.  하지만 궁극적으로 학습의 책임은 교육자 내적인 것이었다. "Self learning" 사람들이 비난하는 시스템에서 예상할 있는 것보다 좋은 결과물이 나오는가를 설명할 있는 좋은 도구였다.

 

  • The Dilemmas of Graduate Medical Education
    • 1970 이후 사회와 의학의 유행이 바뀌면서 학생들 사이에서 수많은 specialties 뜨고 졌다.
      • 훗날 내과 역사상 "Black Tuesday"라고 불리게 되는 1987년의 "match day"에는 내과의 많은 상위 프로그램들이 미달되었는데, 주된 이유는 의과대학을 다니는 동안 내과에서의 경험이 별로였기 때문인 것으로 추측된다.
      • 1990년대 중반, 한참을 비인기과에 머물고 후에야 내과는 드디어 이전의 인기를 되찾을 있었다.
    • 많은 과의 인기가 오르내리는 동안, 유독 과만은 지속적으로 미달이었는데, 바로 primary care 그러했다. 1960년대에 primary care 하나의 전공으로 만들기 위한 목적으로 family medicine이라는 새로운 분야가 도입되었다. 성대한 팡파레에도 불구하고 1989 13.7%만이 과에 지원했다.
    • 미국 의과대학 졸업생들 사이에서 primary care 인기가 떨어지는 것을 우려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당시 Generalist physician이나 primary care 대부분의 의학적 care specialist보다 저렴한 가격에 제공했다. 전문의들이 많아지는 것을 우려한 것은 대중이나 환자가 아니라 정부나 보험회사 같이 돈을 지불하는 쪽이었다.
      • 의학 inflation 심해지면서 third party payer들에게 primary care physician들은 비용을 절감할 있는 중요한 수단이었다.
    • 전문의와 일반의의 가장 적절한 비율은 얼마일까? 아무도 답은 알지 못했다. 전통적으로 대략 50% 정도의 일반의 정도가 충분하다는 생각이 있었는데, 어떤 데이터에 근거한 수치는 아니었다.
      • "너무 얼토당토아니한 정도만 아니면 된다"
    • 적절한 전문의 숫자에 대한 논의에 대해서 가지 문제가 있었다. 하나는 질병의 역학적 변화라든가 치료에 대한 논의가 빠져 있었다. 1970년대에는 전문의의 숫자가 적어도 것이라고 예상했다. 그러나 AIDS MDR TB lyme disease 등이 생겨났다.
      • 또한 specialty mix 대한 논의가 있던 시기에 미래에 telecommunication 혁명 일어날 것을 예상한 사람은 거의 없었다.
    • 이상적인 비율은 정하기 어려웠지만, GME 필요한 전문의보다 많은 수의 전문의를 양산하고 있다는 만은 분명했다. 국가적으로 미국인 다섯명 명은 전문의에 의해서 general medical care 받고 있었다.
    • 전문의와 일반의의 불균형은 전통적으로 미국 의학교육에 존재해왔던 개인주의와도 연관이 있었다. 의학교육은 개개인의 권리를 개개인의 사회에 대한 책임보다 우선시하는 경향이 있었다.
      • 이러한 경향이 낳은 결과가 바로 공익적으로 그다지 바람직하지만은 않은 전문의의 양산이다.
    • 다른 국가들과 다르게 미국에서는 전문의 training position 외부적 기관에 의해 통제되지 않았다. , 국가적으로 전문의가 많이 필요하든 필요하든 아무런 영향을 주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 결과적으로 이러한 불균형은 끊임없이 지속되었다.
    • 의과대학들이 하고자 하는 의지만 있다면 있는 것들은 많았다. 의과대학 학생들이 전공 선택 어려움을 겪었다는 것은 알려져 있다. (1)어떤 과를 선택하는 가장 주된 이유는 intellectual content였는데, 이러한 면에서 부속병원들이 크게 관심을 두지 않는 primary care 상대적으로 불리한 위치에 있었다.
    • 반대로, 진로 선택에 대한 많은 연구에 따르면 (Daniel H Funkenstein 앞서 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주된 결정 요인은 외부에 존재한다고 말한다. (2)학생들은 외부에서의 경험에 의해 자신의 가치나 진로 희망을 결정했다.
      • 의과대학내에서의 경험이 영향을 주지 않은 것은 아니었지만, specialty 것인지, primary care 것인지 정도에 머물렀다.
      • 많은 community-based 의과대학들이 기존의 medical school보다 primary care practitioner 키워내는 데에 뛰어나긴 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학생들은 기존에 primary care 강조해온 학교를 선택했다.
      • "primary care physician 키워내고자 한다면 어떤 학생을 입학시키느냐(admissions decision) 교육 프로그램보다 중요하다."
    • (3)사회가 주는 보상 학생들의 결정에 영향을 미쳤다. 1980년도 당시 보건 정책이 논의될 때에 Primary care physician "gatekeeper" 여겨졌다. , 의사라기보다는 부상자 분류(triage officer) 하는 역할로 것이다.
      • 또한 연방정부와 사보험의 reimbursement 정책도 specialist에게 많은 돈을 주는 것으로 되어있었다.
    • 줄이자면, 의과대학이 약간의 도움이 있을지는 몰라도, 외부에서 specialist 수를 통제하지 않는 학생들의 primary care 대한 관심을 높이는 데에는 한계가 있었다.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의사의 양과 종류는 단순히 미국의 의학교육이 아니라 미국 사회 전체를 보여주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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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70 이후, GME 하나의 산업이 되었다. 국가 전체 health care 지출 0.5% 차지하는 House staff cost $2 billion 달했다. 레지던트나 fellowship program 들어가는 돈은 주로 환자 진료로 버는 돈이었고, 이는 M&M private insurer GME 밀접한 관계를 갖게 됨을 뜻했다.
    • 1970 중반에, house staff salaries 전형적인 부속병원 예산의 3~4% 정도였으며, 20년간 거의 수준을 유지하게 된다.
  • 누가 GME control 것일까? 확실한 것은 절대 대학은 아니라는 것이다. 1960년대 이후 의과대학이 책임을 가져야 한다고 했지만 이미 많이 늦은 때였다. 1920년대와 1930년대의 의과대학은 거기에 대한 책임을 갖고자 하지 않았다. 1970 이후의 GME 병원-based였다.
  • Residency fellowship program 관련된 복잡한 행정 체계는 GME 대한 대학의 미미한 영향력을 더욱 약화시켰다. 상위권 부속병원에서조차 대학의 영향력은 미미했다.
    • 많은 resource들이 강력한 주임교수들에게 갔고
    • 병원 행정 조직이 환자 진료 수당을 관리하고 있었고
    • Specialty subspecialty board들에게도 간접적이지만 적지 않은 수준의 영향력을 발휘했고
    • 정부와 사보험회사도 영향력을 행사했다.
  • 1970 이후 house officer들에게도 WWII이후 지속되어온 경향성은 계속되었다. (1) 번째로, 무엇보다 academic emphasis 사라졌다. R에게 있어서 연구는 사실상 사라졌다. Clinical fellowship "scientific dilettantism"이라 불렸다.
  • (2) 번째로 'family'라는 비유적인 느낌은 완전히 사라졌다. 주된 이유는 R F 숫자가 크게 늘었기 때문이고, 또한 faculty 병동에서 사라졌기 때문이다. Faculty 아침에 회진을 한번 돌고 잠깐 도움이 필요하다고 때만 찾아왔다.
  • (3) 번째로 기술의 발달로 외래 기반으로 환자 관리가 이루어질 있음에도 불구하고 graduate education 기본적으로 병동 환자에 대한 경험을 쌓는 것이었다. Outpatient education 거의 강조되지 않았다.
  • (4)마지막으로, 병동에서 house staff 해야 일이 점차 많아졌다. 위중한 환자들이 들어왔고, 기술은 발전했고, 밤에 오는 콜도 많아졌다. '시간' 사치일 뿐이었다.
  • HO 힘들게 했던 것은 sampling이나 IV같은 자기와 관련 없는(extraneous) duty들이었다. 대부분의 부속병원에서 HO들은 전체 시간의 1/4 이러한 일을 하는데 쓰고 있었다. Phlebotomist technician 고용되었지만 다른 일이 워낙 많아서 크게 도움이 되지는 않았다.
  • 과중한 업무량과 과로로 인해 비정상적인 행태들이 나타났는데, ER 전화를 받지 않기도 했고, 누가 다음 전화를 받을 것인가 또는 업무교대 직후에 환자를 누가 것인가 등을 놓고 서로 싸우기도 했다.
  • HO 업무량이 늘어나면서 GME 오래된 논쟁은 더욱 악화되었다. Education or Service?
  • Residency training 딜레마는 1984, 18 소녀 Libby Zion New York Hospital에서 사망하는 사건을 계기로 대중들의 관심을 끌게 되었다.
    • 그녀의 부모는 딸의 죽음이 과도한 업무와 감시의 소홀 때문에 일어났다고 주장했다. 20세기 시작부터 이어져온 '의학교육이 나은 patient care 이끌고 있다' 라는 진리가 흔들리고 있었다.
  • 수년간에 걸친 많은 의학적 법적 자문 후에도 Zion 사망의 원인은 끝내 밝혀지지 않았다. HO 해야 일을 했으며, 과로한 상태도 아니었다. 대배심(grand jury) 의사를 무죄로 판결했고 state medical board 면허를 박탈하지 않았다.
  • 그렇지만 대배심은 residency training program 기소(indict)했고, 이는 GME 개혁에 있어서 주요 쟁점이 되었다. 대배심 보고서로 인해 Bell 위원장으로 하는 특별 위원회 생겼고, 위원회는 resident 근무 시간과 관리감독에 대한 제안을 했다. Resident Review Committees(RRC) 의해서 비슷한 규제 자발적으로 도입되었다.
    • 세부 규정은 조금씩 서로 달랐지만, 공통적으로 새로운 규제는 근무 시간을 주당 80시간으로 제한하고, 주에 하루 이상의 오프를 의무적으로 제공하며, 응급실 교대 근무 시간을 제한했고, 병원의 nights on call frequency에도 제한을 두었다.
  • 넓게 보았을 이러한 사건은 놀라울 것이 없었다. 사회는 항상 의학교육에 있어서 당사자들에게 자율 재량권을 왔지만, 완벽한 자유를 적은 없었다. Consumerism 시대에 대중의 요구는 HO들이 조금 휴식시간을 갖고, 조금 감시를 받는 것이었다. 대배심과 Bell commission 소비자의 의견을 대변한 뿐이었다.
  • 처음에는 많은 의학교육자들은 근무시간이나 관리감독에 대한 규제를 두는 것에 반대했다. 추가적인 비용이 생길 것이라는 걱정부터, 연속성이 떨어져서 patient care house staff education 문제가 것이라는 걱정도 있었다. 특히 patient care 있어서 graded levels of responsibility 주어져야 한다는 원칙이 깨지는 것을 크게 걱정했다.
  • GME 개혁이 필요하다는 것에 반대를 하는 사람은 없었다. 그러나 residency 환자가 안정적이면서 병원에 오래 머물던 시절에 만들어진 제도였다. 1980년대에, 입원 환자는 중증 환자들이었고, 환자의 turnover 빨랐다.
  • 반대로, 새로운 RRC 규제는 residency training 문제를 관료적(bureaucratic)으로 해결하려는 시도였다. 이로 인해 그들이 실제로 고쳐야 하는 문제를 짚어내는 데에는 실패했다. (1) 가지 문제는, 단순한 시간 제한으로 인해서 house staff 스트레스가 줄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 노동 시간을 줄인 것은 반대로 말하면 넓은 범위의 '근무 조건' 대해서는 아무런 이야기를 하지 않은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 (2) 번째로, 시간을 규제해서 house staff education이나 patient care 목표를 달성했는지가 불분명하다. 많은 사람들은 house officer 교대가 많아지면서 patient care에서 실수가 많아지지는 않을까 염려했다.
    • 예를 들어 내과에서는 근무 시간 제한으로 인해서 검사를 의뢰하는 delay 많이 생기고, complication 늘어났다는 연구가 있다.
  • (3) 번째로 여전히 야간 아르바이트의 문제가 있었다. 1980년대와 1990년대에 HO 과외 활동의 핵심인 야간 아르바이트는 해결되지 않았다.
  • (4)마지막으로, 명의 의사가 처음으로 독립적으로 진료를 보는 순간에 대한 평가를 피해갈 수는 없다. GME 가장 중요한 원리는 부속병원 setting에서 누군가 나보다 senior 사람이 언제나 도움을 있는 환경이다. Graded responsibility라는 원칙은 모든 환자의 궁극적인 안전을 표방했는데, 비록 전체적인 균형 자체는 supervision 가까이 하도록 것이 맞지만 RRC direct supervision 대해서 부드러운 입장을 취했다.
  • 궁극적으로 교육의 질과 GME에서의 patient care 확실히 책임져야 주체는 official regulation 아니었다. 책임의 일부는 medical faculty에게 있었다. Faculty 하고자 하는 뜻만 있다면 얼마든지 resident 여러가지로 도와줄 있었다(adviser program, conseling, retreat…). 이러한 것이 부담이 지는 몰라도, 어쨌거나 이런 것을 있는 사람도 그들이었다.
  • 그러나 아무리 열심히 하려고 해도 혼자서 GME 발전시킬 수는 없었다. 단순히 당직때 콜이 온다거나 faculty 관심을 갖는 수준이 아니라 HO들에게 부과된 노동 강도가 줄어야 했다.
    • 그러나 managed care era third party payments restrictive해졌고, 여러 병원에 긴축을 요구했다. AHC 대중으로부터 HO들을 너무 많이 시킨다며 비난 받아야 했고, 반면 HO 노동강도를 줄이는 것에 대한 보상은 거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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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GME 관련한 많은 딜레마는 내부적 요인과 외부적 요인의 상호작용을 보여준다. 그러나 가지 분야에 있어서 medical faculty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하는데, 바로 검사 의뢰에 대한 것이다. Faculty HO들에게 점점 많은 검사를 것을 요구했다.
  • 검사 의뢰는 사회적 경제적 개인적 요인이 복합되어 나타나는 것이었다. Malpractice suit 대한 공포가 있었고, 개개의 case 너무 복잡해서 어떤 것이 "unnecessary" test인지 구분하기 힘들었다.
  • 그렇지만 많은 연구는 분명히 과도한 검사 의뢰가 있었음을 보여준다. 25% 수입이 실험실 검사 영상 검사에서 오는데, 검사의 5%만이 진단에 실제로 사용된다.
    • 위양성은 돈이 드는 것일 뿐만 아니라 위험하기까지도 했다.
  • 과도한 검사는 새로운 모습은 아니었지만, 당시 새로운 모습이라면 진단 procedure 발달 가격의 상승이다.
    • "physician 하는 검사가 조금만 달라져도 전체 비용에는 상당한 변화가 생긴다"
  • 과도한 검사의 원인은 세기동안 이어온 의학교육의 문제 때문이었다. 의학교육이 불확실(uncertainty) 대응하는 법을 가르치지 못했던 것이다.
    • 극소수의 교육자만이 레지던트의 reasoning process 함께 했다.
  • 확실성에 대한 잘못된 탐구는 방탕한(profligacy) 진단적 검사가 있게 했다. 일부 의사들은 시간은 자기들 편이 아닌 것처럼 행동했다. 이미 진단이 내려진 뒤에 동일한 검사를 오더하는 일도 흔했다. 진단이나 환자 관리에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검사를 시행하기도 했다. 불필요한 검사는 추가적 비용이 뿐만 아니라 환자에게도 위험했다.
  • 세기 내내 medical faculty '불확실성에 대응하는 ' 가르치지 못했다. 그러나 열심히 하면 달성할 있는 목표였다. 일부 비용-효과성이 강조되는 또는 주치의가 HO reasoning process 자세히 들여다 시간이 있는 과에서는 상당 정도 달성되었다.
    • 다른 전략도 가능했는데, 예를 들면 HO에게 의뢰한 검사의 비용이나 어떻게 검사 의뢰 process 개선될 있는가에 대한 정보를 제공한 경우가 그러했다.
    • AHC 있는 잠재력을 스스로 갖추고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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