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Chapter 13. Medical Education in an Era of Protest and Civil Rights
    • 의학교육자들이 믿은 하나의 환상이 있다면 그것은 '자율' 대한 환상이었다. 이러한 환상은 AMC , 규모, , 영향력이 커지면서 생겨났다. 하지만 1960년대와 1970년대 미국은 social unrest, antiwar, civil right movements 흔들리고 있었고, 이러한 움직임은 MS에도 영향을 줘서 Student rebellions, house staff unionization, clamor of women and minorities 등이 있었다. '자율' 대한 신화는 거짓이라는 것이 드러났다.
    • 서로 달라 보이는 이들 움직임은 미국 의학교육의 근본적인 특징을 나타내주고 있었다. 시대의 'protest era' 그것의 결과 자체보다 미국 의학교육의 감춰져있던 면들 드러내는 점에서 의의가 있었다.

 

  • Student Activism
    • 미국의학교육 역사 내내 학생은 교육 환경에 영향을 줬다. 그러나 MS라는 자체가 상당한 '점잖음' 공간이었기에 대학의 나머지 다른 학과 만큼은 아니었다.
    • 1960년대에 civil rights movement Vietnam War(VW) 영향에 힘입어 대학과 학생의 불화의 시기(era of student discord) 시작되었다.
      • Free Speech Movement, Students for a Democratic Society(SDS), Martin Luther King Jr.
    • 저항의 수준에 비해서 실제로 급진적인 학생은 소수에 불과했다. 그러나 많은 학생들이 공감하고 청원서에 서명을 했으며 집회에 참여했다. 반체제 문화는 사회적이라기보다는 정치적 활동을 촉진시킨 정치적인 현상이었다.
    • 대학 캠퍼스의 저항이 격렬할 동안 MS에서도 비슷한 학생운동이 일었다. 비록 일반적으로 조금 질서있는(orderly) 형태였지만 MS 제법 충격을 받았다.
    • MS에서의 학생운동은 대학 캠퍼스에서 있었던 것처럼 가지 movement 아니었기에 간단히 정의하기가 쉽지 않았다. Student organization 1960년대의 일반적인 사회적 turbulence 따르는 것이었다.
    • 의대 학생들의 activism 가지 형태 나타났는데, (1)하나는 political protest였다. 여기에는 environment, feminism, homosexual rights 등의 이슈가 있었다.
    • (2) 번째는 MS 지역사회의 건강문제에 반응하게끔 하려는, 특히 가난한 사람의 문제에 관심을 갖게끔 하려는 운동이었다.
    • 많은 경우에 지역사회 건강에 대한 문제는 학생들을 가난하거나 사회적 약자들의 health affair 관심을 갖게 했는데, 여기에 앞장선 조직이 Student Health Organization (SHO)였다.
    • (3) 번째 student activism 교육개혁에 관한 이었다. 학생들은 그들에게 영향을 있는 사실상의 모든 이슈에 대해서 의견을 냈다.
    • 때까지도 학생들은 항상 MS affair 영향을 미쳐왔다. 하지만 이번에 달랐던 것은 그들의 공격적인, 조급한, 그리고 종종 faculty에게까지 대항하는 태도였다. 학생들은 보수적이고 전통을 중시하는 faculty에게 겉으로 무언가를 보여주고자 했고, 일부 faculty 실제로 학생들의 이러한 거친 언사 등에 의해서 충격을 받았다.
    • 또한 protest era 나타난 특징은 학생들이 학교의 공식적 의사결정기구에 참여하게 것이다. 학생들에게 종종 faculty committee에서 표를 던질 있는 기회가 주어졌다.
    • 이런 저항의 학생들의 움직임에 공감을 표하는 사람들도 있었는데, VW 같이 학생들을 움직이게 했던 힘은 house officer faculty에게도 영향을 주었다.
    • 그러나 이러한 shared goal 학생과 faculty 사이의 세대차이를 좁히지는 못했다. 많은 faculty 학생들의 노골적인 표현을 싫어했고, 사이의 갈등은 전례 없던 수준으로 높아졌다.
    • 하지만 이러한 동안에도 의대 학생들이 다른 college university 학생만큼 버릇없거나 파괴적이지는 않았다. 의과대학에서 revolutionist들은 소수였다.
    • 1970 이후, 가장 강력한 학생 저항운동은 사그라졌고, 전쟁이 끝날 무렵 MS 다시 예전의 조용한 공간으로 돌아갔다.
    • 1970년대 Protest era 끝났지만, 그것이 미친 영향까지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학생들의 목소리는 여전히 남아있었고, 도전적이었고, 전에 비해서 권위에 대한 의문을 던졌다. 대부분의 MS에서 학생들은 그들이 이뤄낸 성과를 유지했고, 국가적으로는 Student American Medical Association(SAMA) - 훗날 American Medical Student Association(AMSA) 이름 변경 - 생겨났다.
    • 그렇지만 protest era 끝나고 health care delivery system 문제는 많이 약해졌다. 학생 뿐만 아니라 faculty 걱정을 하였고, 의과대학의 전통적인 보수주의는 견고해보였다.

 

  • House Staff Militancy
    • 학생의 목소리가 높아진 만큼 HO 목소리 또한 그러했다. 이상 부속병원들은 House staff 불만을 묵살하고 있을 만은 없게 되었다. HO 의견을 반영하지 않는 병원은 다음 해의 recruitment에서 경쟁률이 떨어지곤 했다.
    • 그러나 HO 목소리는 Protest era 이르러서야 처음으로 두드러졌고, 레토릭이 급진적이었으며, 방법도 직접적으로 대립하는 식이었다.
    • House staff militancy (HSM) 학생들의 것과는 조금 양상이 달랐는데 학생들의 activism 1960년대 피크를 찍었으나 HSM 1970년대에 그러했다.
    • HO 보수와 근무여건 대해서 말이 많았다. 그들은 언제나 애매한 위치에 있으면서 1960년대와 1970년대에 대형 부속병원들은 많은 인력을 고용하지 않고 아끼는 수단으로 HO 이용했다. 게다가 많은 HO들은 병원 행정직원들을 신뢰하지 않았다.
    • 보수와 근무시간에 대한 문제는 1960년대 후반 주목을 받았다. 사회적 변화를 반영하여 가족, 결혼과 같은 "personal time" 점차 중요한 권리로 인식되었다.
    • 1960년대에 월급을 올려달라는 요구는 대개 informal하게 이뤄졌다. 그러나 시기에 unionization 걸음을 떼었는데, Committee of Interns and Residents(CIR) 선구자적 움직임이었다. CIR 뉴욕의 18 municipal hospital에서 근무하는 1200명의 인턴과 레지던트를 대변하여 7개의 nonprivate hospital과도 계약 조건을 협상하였다.
    • 이제는 HO 많은 activist들로 인해서 1970년대 초반은 여전히 격정적이었고 unionization 확대되어갔다. 1972년에 이르러서 house staff association GME 하는 학교 70% 포함하였다.
      • 각각의 HSA 조금씩 달라서 어떤 Association 종종 병원이 경제적 어려움을 호소할 때면 그냥 잠잠하게 넘어가곤 했다.
    • HSA 다양한 목적을 가지고 있었다. Training social concern 대한 다양한 문제를 제기했다.
    • 비록 많은 HSA들이 health care 사회적 문제를 주장했지만, 결국에는 고용과 봉급의 문제를 가장 우선시하게 되었고 다른 것은 minor 부분이 되었다.
      • "House staff unity 원동력은 사회에 대한 것도 의료전달체계에 대한 것도 아니고 자신들의 이익일 뿐이다. "
      • House staff association 회장은 "대부분의 HO들은 벼락부자라서 병원 여건에 대해서는 별로 신경쓰지 않는다"라고 쓴소리를 했다.
    • House staff union 운동의 기저에는 "Were house officer students or employees?"라는 근본적 질문이 있었다.
    • HSM 1974 여름 보건계열 근로자들의 집단적 협상을 위한 조직 구성을 가능하게 National Labor Relations Act 따라서 새로운 국면을 맞게 되었다. 뉴욕에서 파업을 했던 CIR 이제 전국 단위의 파업을 하게 되었다.
    • CIR 파업기간동안 엄청난 세대차이가 드러났다. CIR 주당 80시간의 근로시간 제한을 요구했다. 그러나 hospital official들은 "내가 너희 때는 말이야…."라며 불만을 드러냈다.
    • 많은 교육자들은 House staff union training system 종말을 가져오지는 않을까 걱정했지만, 실제로는 근무 여건을 조금 인간적으로 만들면서 환자 안전은 충분히 보장할 있는 여유 공간이 있었다. CIR 결과로 많이 공부를 하고 생각하고 있는 시간을 확보할 있었다.
    • 그러나 여전히 house staff 요구에 대한 못마땅한 시선이 있었는데, 이유는 많은 HO들은 여유시간을 쉬거나 공부하는데 쓰지 않고 야간 아르바이트를 하러 나갔기 때문이다.
    • 걷잡을 없는 수준의 야간 아르바이트가 퍼져나갔다. 그리고 HO들은 호화로운 생활을 즐길 있었다.
    • '의학의 소명' 위협하고 있는 것은 house staff union 자체가 아니라, 아래에 깔린 affluence, consumption, self-indulgence 추구하는 문화였다.
      • House staff organizing 역사에 대한 많은 연구가 필요하지만, 매번 이러한 연구가 이뤄질 때마다 항상 시대의 문화적 영향이 빠지지 않는다.
    • 궁극적으로 HSM 잦아들었고 1976 National Labor Relations Board 인턴, 레지던트, 펠로우는 직원이기보다는 학생이며, 그들의 청원을 받아들여 집단적으로 협상에 나설 있다는 것을 인정했다. 많은 상고(appeal) 있었지만, 1980 United States Supreme Court 이상의 review 거부할 때까지 논의는 지속되었다. 대부분의 House Staff Association 사라지거나 활동이 없어졌다.
    • Academic Health Center Official들은 집단적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GME 존재 이유는 교육이지 service 아니라는 것을 법적으로 인정받았다. HO역시 그들의 employee로서의 지위는 잃었지만, 그들의 primary object higher salaries 적은 당직을 보장받는 것에 만족했다.
    • 그럼에도 education service사이의 근본적인 모호성이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았고, 의학교육은 교육이자 서비스였고 둘의 균형이 유지되어야 했다.

 

  • Minorities
    • WWII이후 의학은 점차 많은 사람들에게 개방되었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접근권한을 갖게 것은 아닌데 특히 AA 비롯한 다른 소수인종들이 그러했다.
      • 시기의 인종차별은 MS에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 1960년대 civil rights movement 빠르게 모멘텀을 확보해가면서 인종차별에 대한 저항도 Martin Luther King 의해서 강력해졌다.
    • 1960년대 후반, 차별 철폐 조례(affirmative action) 새로운 프로그램들이 MS 휩쓸었다. 이것은 medical faculty들의 전향을 의미함과 동시에 대중의 비난(public criticism) 받지 않겠다는 의지를 보여준 것이기도 했다. MS들은 community relationship 위해서라도 소수자들의 지원에 더욱 민감하게 반응했다.
    • 입학은 차별 철폐 조례가 영향을 많은 영역들 하나에 불과했다. MS들은 소수자 학생들에게 많은 지원을 해주었다 : dean of minority affairs, student support group, tutoring and counseling…
    • 소수자 학생들을 모집하기 위한 MS들간의 경쟁은 치열해서 학교들마다 온갖 수단을 동원했다. 광고를 하고 college campus를 방문하고 follow up letter를 보내고 등등…
      • 가장 근본적인 문제는 질적으로 충분한 minority 학생의 수가 충분치 않았다는 것이다. 좋은 학교들이 학생들을 데려갔기에 낮은 학교들에서 특히 불만이 심했고, "black brain drain"이라는 말도 생겨났다.
    • 소수자 학생들을 모집하기 위한 경쟁에서 대부분의 학교는 입학요건을 낮추었다.
    • 반면, 어떤 학교도 졸업 요건을 낮추진 않았는데, 차별 철폐 조례가 도입되고 나서도 학교들은 유능한 의사를 양성해야 한다는 사회적 책무를 소홀히 하지 않았다. 당연히 학교들도 일부 학생들에게는 추가적인 도움이 필요하다는 것을 인식하였다.
    • MD degree 따기 위한 기준을 높게 잡음으로써 MS들은 위치가 아주 애매해졌는데, 문제는 "disadvantaged background 가진 학생들을 위해서 얼마나 많은 remedial course 주는 것이 적절한가?" 였다.
      • 전만 해도 학교들은 훨씬 심해서, 거의 모든 곳에서 faculty 학생에게 remediation 해주기 위해 추가적으로 시간을 투자했다. 그러나 구체적으로 어느 정도의 도움을 줘야 하는지, 얼마나 시간을 추가로 투자해야 하는지에 대해 정확히 아는 학교는 거의 없었다.
    • Minority 학생들이 추가적인 도움을 필요로 했지만, 노력은 어느 정도 보상을 받는 했다. 전반적으로 그들은 백인 학생들에 비해서 기초과학 분야에서는 조금 떨어지는 했다. 하지만 clinical year 갈수록 차이는 거의 존재하지 않았다.
    • 차별 철폐 조례가 많은 초기의 성공을 가져왔지만, 문제도 있었다. Minority 학생을 돕는 과정에서 disadvantaged white student들을 망각하기 일쑤였다.
      • "color-blindness가 color-consciousness 되어버리고 있다"
    • 가장 역설적이었던 것은, 의과대학을 다니는 minority 학생이 증가했음에도 minority medical school 사라져 버린 것이다. 75%가까운 AA학생이 다녔던 학교는 1979 흑인 학생 비율이 20% 떨어졌다. 상황을 나쁘게 만든 것은 black teaching hospital 쇠퇴하는 것이었는데, 이들 병원은 적절한 지원을 받지 못한데다 AA physician들이 기회가 닿는 university teaching hospital에서 수련을 받고자 했기 때문이다.
    • Minority recruitment 번째 phase 1974년까지 이어졌다. 1960년대 후반과 1970년대 초반에 minority student 수가 급격하게 늘어났다.
    • 그러나 1974 이후, 정체기가 시작된다.
    • 1970년대와 1980년대 Minority enrollment 감소에는 가지 요인 있다. 등록금은 크게 올랐지만 Scholarship fund 줄었다. 차별 철폐 조례가 크게 패소하는 사건이 있었는데, US Supreme Court 단순히 인종만을 근거로 quota 인정할 없다고 판결했다.
    • 가장 중요한 것은, 어느 정도 이상의 수준을 갖춘 minority 지원자 자체가 그다지 빠르게 늘지 않았다는 이다.
    • 이와 같은 추세에 대한 우려로 AAMC 1990 새로운 "Project 3000 by 2000"이라는 initiative 도입하게 되는데, 목표는 2000년까지 3000명의 minority 학생을 모집하겠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전략은 초등-.고등-College 이르는 긴밀한 협조를 필요로 했다. initiative에서 주목해야 점은, MS 하여금 local school college 교육 질에 직접적으로 관여하도록 했다는 것이다. 1990년대 초반, minority 학생의 비율은 다시 오르기 시작했다.
    • 1960년대에 도입될 때부터 차별 철폐 조례는 분명한 목표가 있었다. 많은 Minority student들이 의과대학에 들어갈 있게 하겠다.
      • 하지만 그들 입장에서는 현직 의사 role model 삼을 만한 의사가 거의 없었고, 심각했던 것은 조직 차원의 인종차별이 심해서 일부 학생과 faculty minority 학생들이 유급하기를 바랐고, 백인 환자들은 minority에게 진료받는 것을 거부했다.
    • 추가로, 차별 철폐 조례의 최종 목표는 minority들을 의과대학이 아닌 "의료계" 들어오게 하는 것이었는데 조례가 도입되고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도 minority physician 매우 일부여서 faculty 2.4%만이 흑인이었다.

 

  • Women
    • 소수 인종과 마찬가지로 여성들도 의학을 업으로 삼기가 쉽지 않았다. 1960년대에는 6~7%뿐이었다. 독일은 30%, 네덜란드는 20%...
    • 여성에 대한 노골적인 차별은 인종차별보다는 덜했다. 당시 성별과 상관 없이 여성 의사에게 진료를 받는 것에 대해서 수용적이었다는 연구 결과도 있다.
    • 그러나 일반적으로 여성이 의학을 전공하는 것은 쉽지 않았다. 어린 시절부터 여자들은 힘든 직종에서 일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고 배워왔고, "여성스러워야 한다"라는 고정관념이 있었다. 특히 여자들은 '가정' '직장' 동시에 열심히 하기가 어려웠다.
    • 1960년대 후반, 여자 의과 대학생의 숫자는 증가하기 시작했는데, 주된 이유는 feminist movement였다.
    • 여자 학생의 숫자의 증가는 소수 인종 학생 숫자가 증가할 때에 비하면 trauma 크지 않았다. 여성 지원자들의 'pipeline' 남성 지원자들 만큼이나 괜찮았다.
    • 그러나 차별적인 시선이 문제였다. 완벽한 동등성(parity) 얻었다고 하기에는 사소한 하지만 심각한 비공식적인 장벽들이 있었다. 소수 인종과 마찬가지로 여자 학생을 교육시키는 것은 입학 분만 아니라 연구, 교육, 진료의 환경에서도 변화를 필요로 했다.
    • 학생 수준에서 성차별은 매우 뚜렷했는데, 입학 위원회는 빈번하게 여성에게만 결혼과 출산 계획을 매우 구체적으로 질문하였다. Counseling이나 Advising service 거의 되어있지 않았고, faculty 여학생들에게 둔감하고(insensitive) 깔보는 태도를 일삼았고, 환자들은 간호사로 오해하기도 하였다. Sexual harassment 흔했다. 여학생들은 간호사의 갱의실을 사용해야 했다.
    • 많은 문제들이 있었다는 것은 분명하지만, 구체적으로 수준을 측정하거나 정량화하는 것은 어려웠다.
      • "microinequities"
    • House staff 교육의 차원에 있어서도 성차별이 있었는데, 여자들은 남자보다 선택할 있는 범위가 좁았다. 대부분의 여자들은 내과나 소아과나 정신과나 가정의학과나 산부인과를 선택했다. 수술 파트에서는 여자들은 결단력이나 체력이나 헌신이 하다고 여겼다.
    • 마지막으로, 여성들은 academic medicine에서 성공한다는 것이 무척 어려움을 깨달았다. 임용이 되어도 거의 junior level이었고, 승진도 남자보다 느렸다.
    • Academic medicine에서 여성의 진전이 느렸다는 사실을 가지고 남자들을 비난하는 것은 옳지 못하다.
      • "has been immeasurably enriched by warn relationships with many fine men"
    • 오히려, 여성의 직업적 진보를 가로막고 있었던 것은 의과대학의 조직적인 측면이었다. 학교는 출산 휴가나 양육 휴가를 거의 주지 않아서, 여자들은 귀가 후에 ' 번째 직장'에서 일하는 것과 같은 상태였다. 그러나 진급이나 테뉴어는 주당 60~70시간 이상 근무한 사람들에게만 주어졌다. Junior women faculty들에 대한 senior mentoring 되어 있지 않았다.
    • 요약하자면 여성 faculty 진보는 얼마나 supportive 환경인가가 중요한 것이었다. "glass ceiling"이라기보다는 "sticky floor" 이었다.
    • 최근, 몇몇 MS들이 조직 수준의 딜레마를 해결하고 microinequities 해결하고자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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