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Chapter 11. The Forgotten Medical Student
    • 1960년대의 미국 MS들은 커지고 복잡한 조직이 되었다. WWII이전의 MS 유사한 점이 거의 없을 정도로 크게 달라졌다. 그러나 이렇든 저렇든 MS "school"이었다.
    • 학부 교육에 대한 관심에도 불구하고 1960년대에 일이 벌어졌는데, medical student 교육이 전쟁 이전 MS에서 central mission이었다면, 이제는 AMC 하는 여러가지 일들의 by-product 변해버린 것이다. 그저  지나가는 일일 뿐이었다. MS 다양한 일들을 하게 되면서 학생들은 잊혀진 존재가 되어갔다.
    • The Evolving Curriculum
      • 의대 교육과정의 가지 변하지 않는 것이 있었다면, '변해야만 하는 권한(mandate to change)' 이었다. 교육과정은 새로운 지식 뿐만 아니라 medical practice 영향을 주는 변화들(질병 패턴, 새로운 진단 치료법, 문화적 변화) 수용해야만 했다.
      • WWII이전부터 뚜렷했던 교육과정의 개편은 전쟁 이후에도 변하지 않았다.
        • 예를 들면 Harvard 1957, 1965, 1968 major curricular revision 했다.
        • 과는 언제나 많은 시간을 확보하기 위해서 경쟁했다.
        • 의학교육이 국가적 사업이 되면서 학교에서 일어난 major innovation 다른 학교에도 영향을 주었는데 예를 들면 USC "기본적으로 WR, Harvard, Albert Einstein등등 다른 학교들의 경험을 바탕으로 계획을 한다" 라고 했다.
      • 세부적으로 들어가면 완전히 동일한 교육과정은 없었다. 같은 학교 내에서도 학생들은 서로 다른 경험을 하곤 했다.
        • Elite school : scholar and specialist // State school : practitioner
      • 그렇지만 차이보다는 유사점이 컸다. 하나에서 다른 하나로 이어진 교육 개편은 결국 하나의 standard 이뤘는데, National Board of Medical Examiners (NBME) 이런 현상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이전에는 medical license 받기 위해서 졸업생은 internship 마치고 state medical board 시험을 통과해야 했다. 그리고 대부분의 주는 서로 상호 인정 협약(reciprocity agreement) 맺었다. (비록 나머지 모든 주와 협약을 맺은 주는 없었지만)
        • NBME 시험을 파트로 나눴는데 I 2학년 마치고 보는 기초의학 II 4학년 마치고 보는 임상과목, III internship 마치고 보는 시험이었다.
      • MS 사이의 가장 중요한 차이는 어떤 것을 가르치는가가 아니라 faculty 얼마나 가르치는 것에 대한 열정이 있었는가와 그들이 얼마나 유능했느냐의 차이, 그리고 학생들이 얼마나 배우고자 하는 동기가 있었느냐의 차이였다.
        • "Teachers are more important than courses"
      • Formal curriculum 진화 과정에서 가장 눈에 띄는 발전은 pathophysiology 대한 교육과정이었다.
        • 이것은 clinical scientist(기초의학자가 아니라) 가르쳤고, 이런 것은 학생들에게 기초와 임상을 같이 하는 role model 보여주었다.
      • Medical curriculum에서 가장 부족했던 학생, 교육자, official commissions들의 불만에서 있듯 좁고 기술적인 측면에 집중한 교육이었다. 예방의학이나 직업의학에는 거의 신경을 쓰지 않았다.
      • 과목들은 점차 발전했지만 교육적 측면의 문제들은 세기 전과 비슷했다. 의학교육자들은 지속적으로 '어떻게 단순 암기가 아니라 논리적 사고와 분석능력을 키워줄 있는가' 대한 고민을 하였다.
        • "Training for uncertainty"
      • 어떻게 공정한 평가를 있는가 매우 어려운 문제였다. NMBE ETS 의뢰하여 다지선다 형식의 객관식 문제를 만들었지만 평가하기에 충분하지도 않았고, 문제를 만드는 자체가 "expert and laborious task"였다.
        • 또한 과연 이것이 "학생의 어떤 능력을 평가하는 것인가" 대해서도 논란이 있었고, "NBME 시험과 실제 미래에 의사로서의 performance 어떤 관계에 있는가" 대한 consensus 없었다.
      • 위와 같은 교육적 문제들은 의학교육에서 매우 오래 것들이었지만 WWII이후에는 급박한 문제였다.
        • 정보가 폭발적으로 증가하면서 많은 지식들이 생겨났고, 이는 이미 차있는 교육과정에 구겨넣어져야 했다.
        • 어린 아이와 노인의 수가 증가했고 사회는 도시화되었다. 이러한 의학 내적 외적 변화들은 몇몇 주요한 학과과정에의 실험적 도전의 계기가 되었다.
      • 가지 시도는 대학과 의학교육을 발전된 방향으로 통합하려는 이었다. 당시 의학교육은 융통성 없이 길었는데, 독립적 임상가가 되기 전에 30세를 넘어가는 것이 보통이었다. 이러한 경향은 JH Northwestern 등의 대학으로 하여금 MD 학위를 받기까지의 기간을 줄이고자 하는 시도 이어졌다. 이른 시기에 의과대학에 입학 가능하게 하여 고등학교 졸업 이후 6년만에 마치도록 하는 시도 등이 있었고, 이렇게 키워진 의사들이 기존의 방법으로 키워진 의사들보다 딱히 열등하지 않다고 전해지곤 한다.
      • 다른 방법은 1959 Stanford에서 도입된 것인데, 의과대학을 4년에서 5년으로 늘린 이다. 이것의 목적은 university endeavor로서 의학교육을 실현하고자 하는 것이었다. 예로 Elective 늘렸다.
      • Stanford faculty 처음으로 "box 크기는 content 따라 달라져야 한다"라고 주장한 사람들이었다.
      • 번째 실험적 방법은 환자를 '전체'로서 이해하는 것을 돕고자 하는 시도였다. 전쟁 이후에 Specialization 되고 병원 재원기간이 줄면서 환자와 그들의 가족을 아는 것은 점점 어려워졌다.
        • "comprehensive medicine" : 4학년 학생의 참여를 확장시킴
        • 그러나 1960년대 후반 재정 지원이 중단되고, 학생의 흥미가 떨어지고, 회의적인 시각이 나타나면서 중단되었다.
      • 가장 중요한 실험적 시도라면 Western Reserve University School of Medicine에서 시도된 교육 프로그램의 재조직이었다.
        • 새로운 교육은 기존의 2년의 기초 + 2년의 임상을 버리고 부분으로 나눴다. 1st phase에서는 1년동안 normal 구조 기능 등을 배우고 2nd phase에서는 1년반동안 aberration 구조와 기능을 배우고 3rd phase에서는 1년반동안 clinical clerkship 하였다.
        • 이런 식의 교육은 interdepartmental, interdisciplinary basis 이뤄져서 "organ based teaching"이라 불렸다.
        • Grade 제도를 폐지하고 Preceptorship 등도 도입했다.
      • WR대학은 1952 이러한 교육과정을 도입하였는데, 새롭게 만들어진 200인의 General Faculty 프로그램을 만드는데 엄청난 시간과 노력을 쏟았다. 실제로 교육과정이 바뀐 정도는 크지 않았지만 학습자를 중심에 두는 방향으로 attitudinal shift 바뀌었다.
      • WR 년에 걸쳐서 교육과정을 바꾸는 동안 교육적 철학과 교육방법만은 유지되었고, 이들의 시도는 전국적인 관심을 끌었다. 비록 완전하게 WR 방법을 도입한 학교는 없었지만 이들의 'philosophy of interdisciplinary teaching'만은 널리 퍼졌다.
      • 위의 모든 프로그램들은 충분한 재정적 지원이 있었기에 가능한 이었다.
      • 시기의 교육과정 실험에 대해 몇몇 중요한 있다. 하나는 faculty 열정이 중요하다는 점이다. WR처럼 faculty 적극적일 때는 되었지만, Cornell 처럼 skeptical 때는 되지 못했다.
      • 게다가 교육과정 실험이 이뤄지면서 faculty 교육과 관련된 일들에 열정적으로 참여하면서도 연구도 해야 한다 점이 명백해졌다. WR에서는 그러하였다.
      • 마지막으로 교육과정 실험과정에서 교육과정과 교육법을 평가하는 전략을 수정해야 필요 나타났다. 1950년대에 등장하기 시작하여 1970년에는 거의 절반정도의 MS 의학교육에 대한 연구를 하는 unit 또는 division 만들어졌다.
      • 전쟁 기간의 교육과정 실험이 두드러지긴 했지만, 1960년대 중반까지 변화는 크지 않았다.
        • "의학교육은 수년간 대단히 보수적인 태도를 유지했다"
        • 학생들도 불만족했다.
      • 따라서 1960년대의 미국 의학교육은 오묘한 위치에 있었다. MS들은 분명히 뛰어났지만 무언가 있을 같은 꺼림칙한 느낌을 지울 없었다.

 

  • The Changing Medical Student
    • GME 같이 학부 의학교육 역시 WWII 무렵에는 확고히 자리를 잡았다. 20세기의 50년동안의 모습과 상당 부분 유사한 모습을 가진 것도 이상할 일이 아니었다.
      • 공부할 분량은 많았고, 이러한 시련 와중에도 하나의 위안거리가 있다면 바로 elective였다.
    • 비단 학습량 뿐만 이나리 성적에 대한 스트레스도 심했는데, 한때는 고등학교에서 높은 성적을 받았던 학생들도 자신들만큼이나 뛰어난 다른 학생들과 경쟁해야 했다. Cornell 1등부터 84등까지 성적을 메겼고, Michigan은 소수점 넷째 자리까지 점수를 냈다.
    • 성적에 대해 더 스트레스였던 측면은 그 기준이 제멋대로였기 때문이다. faculty들이 공정하기 위해서 노력했지만 한계가 있었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일부 학교들은 Pass/Fail system 도입하기도 했다.
    • 스트레스의 정도를 측정하기는 어려웠지만, 공부할 분량이 많았다는 것과 압박이 상당했던 만은 확실하다. 1966 Harvard 30%학생이 도움을 받기 위해 정신과를 찾곤 했다.
    • 교육자들은 학생들이 받는 압박이 실제로 증가한 것인지 아니면 학생들의 근성이나 정신력이 약해진 것인지 논란을 벌였다.
    •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학생들도 자신들의 의견을 내곤 했다. 어느 의과대학을 지원하고 어느 곳에서 인턴을 할 것인가를 결정하는 것 자체가 faculty 대한 피드백이었다. MS들은 학생들의 의견을 바탕으로 새로운 변화들을 도입하곤 했다.
    • 비록 학생들의 삶은 별반 달라진 것은 없었지만 한 가지 큰 차이가 있었는데, 전쟁 후의 학생들의 삶은 HO 삶과 비슷하게 되었던 이다. 이상 medical center 그들 삶의 전부가 아니었고 학교에서 떨어져 살면서 그들 나름의 취미를 즐기고 데이트를 하고 결혼을 했다.
    • Internship 찾는 것도 변했는데 전쟁 이전에는 각각의 프로그램마다 합격자 발표날이 달랐고, 학생들은 자신의 모든 합격 여부를 알기 전에 결정을 내려야 했다. 그러나 National Intern Matching Plan(“Match”) 도입되면서 학생들과 학교들은 서로의 선호하는 순위를 매긴 다음, 프로그램에 의해서 matching 되어 같은 날 발표가 이뤄졌다.
    • 학문적 background 있어서 의대생들은 전쟁 이전과 비슷했다. Premedical requirement 거의 변한 것이 없었다. 그러나 학생들의 구성은 달라졌는데, 종교적으로, Gender면에서, 인종면에서 다양해졌다.
    • Quotas 사라지며 MS 점차 민주적(democratic)으로 되었지만, 사회 계층적 측면에서는 전혀 그렇지 못했고, 어느 때보다 medicine well-to-do들의 직업이 되었다.
    • MS들은 이러한 상황에 문제를 느꼈지만, 있는 장학금이 넉넉지 못했기 때문에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은 별로 없었다.
    • 전쟁 이전과 마찬가지로 MS들은 학생 모집을 위해 치열하게 경쟁했다.
    • 뿐만 아니라 전쟁후 시기에 의학은 과학, 법학, 교육학 등등 다른 분야와도 경쟁을 해야 했다.
      • 소련의 Sputnik 발사 직후 medicine 대한 관심은 크게 떨어졌고, 1961~1962년쯤 바닥을 찍은 후에야 다시 회복하기 시작했다.
    • 의학의 인기는 MS 대한 지원 지원자의 특성에 영향을 주었다.
      • Funkenstein 다섯 era 구분한다.
        • 1940~1958 : Specialty era
        • 1959~1968 : Scientific era
        • 1969~1970 : Student activism era
        • 1971~1974 : Doldrums era
        • 1975~ : Primary care and increasing governmental control era
    • 변화하는 의대생들의 가치관과 열망을 보며, 일부 사람들은 중요한 질문을 던졌다. 학생들이란 누구인가? (Who are the students?)
      • 의학교육자들의 눈을 가리고 있었던 것은, 의학교육을 통해서 행동이나 가치관을 바꿀 있다는 믿음이었다.
    • 하지만 문화적 힘을 보지 못하고 있었던 것은 의학교육자들 뿐만이 아니었다. 교육 시스템 안의 교사들과 행정가들도 이러한 믿음을 자주 드러냈다.
      • 이민자들을 “Americanize”한다. 균일한 “Melting pot” 만들어낸다.
      • 그러나 “hidden curriculum” 힘을 보여주는 근거들이 쌓이기 시작했고, 학생들의 특성이나 문화의 영향을 무시하는 것은 의학교육에 대한 과도한 자만심을 갖는 것과 같았다.

 

  • Producing More Doctors
    • MS들은 항상 국가에 대해 가지 임무를 동시에 지녔다. 하나는 의사가 되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최고의 교육을 제공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공공 의료 수요를 충족시키기 위한 만큼의 의사를 양성하는 것이었다.
    • WWI이후 의사 수에 대한 문제는 별다른 관심 사항이 아니었다. Flexner report이후, 기준에 미치지 못하는 MS들은 문을 닫았고, 배출되는 의사의 수는 심각하게 줄어들었다. 지리적 분포도 고르지 못했고, 새로 지어지는 학교들도 이미 충분한 인구가 있었던 그러나 MS만 없었던 지역에 세워졌다.
    • 1940 이후, 대중들은 많은 의사들을 원했고, 시골을 비롯한 의사가 적은 동네에서는 특히 그랬다.
    • 의학교육자들은 진퇴양난에 빠졌다. WWII 경험을 비추어보면 교육과정을 짧게 하는 것은 도저히 받아들일 없었다.
    • 그나마 나은 방법은 class size 키우거나, 새로운 학교를 세우는 것이었는데 여기에는 돈이 필요했다.
    • 적절한 자금을 모금하기 위해 MS들은 정부만 쳐다보았는데, 정부가 지원을 통해서 중앙집권적 통제권을 가져갈 것이라는 우려 때문에 이를 반대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하지만 이 때까지 연방정부는 의학연구에 대한 특별한 간섭을 하지 않았다.
    • WWII 이후 의사 부족에 대한 걱정은 계속 있었지만, 1959 Surgeon General’s Consultant Group on Medical Education에서 보고서(Bane report) 내고 나서야 본격적으로 이슈화되기 시작했다.
      • 1975년까지 국가적으로 40,000명의 의사가 부족할 것이다.
    • Bane report 곧장 Flexner report이후 가장 영향력있는 보고서가 되었다. 결과로 1963 Health Professions Educational Assistance Act 발효되었고 기존의 학교에 대해서 연방 정부가 matching fund 지원했다.
      • 학생 선발 수를 늘리면 지원을 해 주는 것이었기 때문에 “Capitation(인두세) payment”라고도 불렸다.
    • 연방 입법은 학교의 숫자와 학생의 숫자 모두에게 엄청난 영향을 주었다.
    • 더 많은 숫자의 의사를 양성하려는 움직임은 MS Society의 협조아래 이뤄졌는데, 정부의 강한 압박이 없었다면 기존의 MS들은 학생 수를 늘리려 하지 않았을 것이고, 새로 생기는 학교들 역시 적절한 시설이 있어야 승인을 받을 수 있었다.
    • 교육의 질을 유지해야 하는 상황에서 LCME(Liaison Committee on Medical Education)이 등장했다. 1968 United States Office of Education 공식적으로 MS들에 대한 승인을 내리는 조직으로서 LCME 인정하였다.
    • 1940 이후, 연방정부는 의학연구의 중심적 후원자가 되었고, 1965 Medicare Medicaid 도입과 함께 medical care financing 역할 하게 되었다.
      • 힘의 균형이 local-state axis에서 federal axis로 옮겨간 것이다. 1968 AAMC 사무실은 Washington DC 옮겨갔다.
    • 더 많은 의사를 양성하려는 움직임은 의료를 기본권으로 인식하기 시작한 변화와 관련이 있다. “미래의 건강은 유능한 의사를 얼마나 공급할 수 있느냐에 달려있다
    • 1960년대에는 Medical care라는 것이 그것을 행하는 사람의 수준에 달려있다는 것에 대해 아무도 의심하지 않았다. , 좋은 medical care 좋은 doctor 같은 의미였다.
      • 그러나 일부는 더 많은 의사를 양성하는 것에 대한 문제가 있지는 않을까 고민하는 사람들이 생겨났지만, 국가 정책적 차원에서는 여전히 더 많은 의사를 양성하고자 하였다.

 

  • The Devaluation of Teaching
    • 이 장에서 앞서 서술된 것처럼, WWII 이후의 시기는 학부 의학교육이 마비된 시기라고 부르는 것은 적절치 않다. 하지만 MS들이 규모와 복잡성 면에서 성장하면서 학생들에 대한 교육은 점차 더 작은 부분만을 차지하게 되었다.
    • 전쟁 후 시기의 MS 많은 역할들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의학연구(biomedical research)였다.
    • 연구가 강조되는 것이 학부 학생들의 교육에 꼭 나쁜 것만은 아니었다. 연구를 함으로써 의학교육자들은 근본적인 원리보다 실제로 쓸모가 있는 내용들을 가르칠 수 있었고, 학생들도 내용을 다시 생각하고 소화시킬 필요가 있다는 것을 떠올릴 수 있었다.
    • 그렇지만 전쟁 후 MS들에서 연구와 다르게 교육은 조직에서 점차 쇠퇴하는 가치였다. 학생들을 잊혀지게 만든 것은 재정적인 측면에서 감소했다거나, 다른 AMC 역할이 중요해졌기 때문이 아니라 조직의 가치체계(institutional value system)때문이었다.
    • MS 보상 체계를 보면 누구나 교육보다 연구가 우선한다는 것을 있었다. 모든 학교에서 승진의 기준은 연구였다 “Publish or perish”. 일부 학교에서 좋은 선생님이 되는 것은 “obstacle to advancement”라고 여겨졌다.
    • 연구에 높은 가치를 부여했던 것은 elite school 뿐만 아니라 낮은 tier 학교에서도 마찬가지였다.
    • 연구는 학교의 지위를 나타내는 가장 중요한 요소였고, 학교의 평판을 좌우하는 것에 있어서 교육은 가장 중요한요소였다.
    • 여기에 curricular reform 가로막는 가장 장애물이 있었다. 연구가 priority 차지하는 상황에서 교육에 쓰는 시간과 연구에 쓰는 시간의 조화를 찾기란 어려운 일이었다. 가르친다라는 평판은 매우 국소적인 것에 불과했다.
    • 연구를 강조하는 것이 대체로 교육을 소홀하게 만드는 것은 맞지만, 이러한 상황은 MS에서 유달리 심했다. 연구에 대한 외부 지원은 많았지만 교육에 쓰일 수 있는 것은 적었다. 1910 수입의 70% 차지하던 수업료는 1948년에는 28%, 1968년에는 7% 불과했다. 많은 교육자들은 자발적으로그렇게 하기로 사람들이었다. 언제든지 하기 싫다면 수 있는 것이 된 것이다.
    • 연구 funding 많아지면서 교육에 대한 중요성은 줄어들었고, 연구는 강조되는 과정에서 이것은 다시 curricular reform 장애물이 되었다. 좋은 학습환경은 학생을 최우선으로 해야 했지만, 미국 MS 발전 방향은 faculty needs 최우선으로 하고 있었다.
    • 이런 특징들이 좋은 교육이 전혀 없었다는 것을 의미하진 않는다. 그것보다는 당시의 좋은 교육이란 것이 계획적으로 이뤄진 것이 아니라, 그저 우연히 발생한 것임을 뜻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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