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Chapter 10. The Maturation of Graduate Medical Education
    • WWII이후 벌어진 모든 분야를 망라한 지식의 팽창은 학문에 대한 기존의 접근방식을 완전히 파괴했다. 과목들은 파편화(fragmentation)되고, 학문적 전문화 일어났다. Scientific discipline humanities 차이는 특히 크게 벌어졌다.
    • 의학에 있어서 비슷한 지식의 파편현상이 일어났는데, 전문 과목(specialization) 되는 변화가 시작된 것은 오래 되었지만, specialization sub-specialization 빨라졌다. 물론 의학은 다른 분야만큼 파편화되지는 않았는데, 왜냐하면 모든 의료는 동일한 과학적 infrastructure 기반으로 이뤄졌고, 전공자(specialist)라고 해도 다른 분야의 사람들과 협력을 해야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1950년대에 이르러서 의학은 하나의 거대한 영역에서 여러 다양한 영역의 연합체로 변해갔다.
    • WWII이후 general practice 사라지지 않았지만 직업적 측면의 매력은 상당히 떨어졌다. 이전에는 일부만 밟을 있었던 residency program 지금은 거의 원하면 누구나 받을 있게 되었고, 많은 medical center에서 I, R, subspecialty(SS) resident, clinical fellow 수는 의대생의 숫자를 훨씬 초과하였다.
    • 1960년대 중반에 이르러 GME 주요한 목적은 달성하였으나, 등장하기 시작한 새로운 변화가 있었으니 그것은 manpower 측면에서의 '개인의 선택' '국가적 필요' 사이의 조화가 깨지기 시작한 것이다. AMC Specialist(S) SS 많이 키워내고 있었다. AMC S SS 많이 키워냄에 따라서 지역의 private practitioner specialized care 두고 경쟁을 해야 하는 상태가 되었다.
    • The Democratization of Residency
      • WWII 이전에는 매우 일부의 의사만이 S 되었다. 그러나 전쟁은 S 대한 의사들의 태도를 완전히 바꾸어놓았다. General Practitioner(GP) R 마친 의사보다 적은 돈만을 벌었고, 중요한 일을 하게 되었다. S 위신이 올라갔다.
      • 이러한 분위기의 결과로 전쟁기간 복무했던 의사들 사이에 specialty residency position 대한 인기가 전례 없는 정도로 높아졌다. 의사의 2/3정도는 certified S 되기 위한 R트레이닝을 받고 싶어했다. 그리고 전쟁이 끝나갈 무렵, 부속병원들은 residency staff 숫자를 늘려나갔다.
      • R position 대한 요구는 일시적인 현상이 아니었다.'
      • 이런 것에 대한 이유를 찾기는 어렵지 않은데, 의학지식의 급속히 팽창하고 수기 시술이 복잡해지면서 의학의 많은 분야에서 S들이 필요하게 되었다. 여기에 더하여 GP S 사이의 수입이나 사회적 명망 차이가 커지기 시작했다 .
        • 전쟁 이전에는 혼자 이것저것을 하는 generalist 주치의를 하는 경우가 흔했으나, 전쟁 이후 학생들은 '혼자서 광범위한 일을 처리하는' 의사는 거의 보지 못하게 되었다.
      • 의대생들의 S 대한 열망은 부속병원들이 SR(specialty resident) 늘리고자 하는 것과 맞아떨어졌다.
      • HO 숫자가 증가하는 것에는 MS 역할도 컸다. 성숙한, 책임감 있는 R staff 있음으로써 faculty 연구나 private practice, consulting등등에 많은 시간을 있게 되었다.
        • Clinical department에서 병원측에게 HO 수를 늘려달라고 요구했다는 것이 전혀 놀라울 것이 없다.
      • Columbia-Presbyterian에서 R training 성장한 과정 clinical department에게 있어서 R 얼마나 매력적인 존재였는가를 보여준다.
        • R staff 늘어날 있게 것은 (1)하나는 clinical service 작업량이 늘리는 기여했기 때문이며 (2)R 의대생 교육에 많이 관여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 HO AMC 돌아가게 하는데 필수적인 것이 되었다.
      • AMC에게 GME 성장은 변화였다. WWII기간에 R staff 숫자는 의도적으로 제한되었고, 대부분의 position academic career 가려는 사람들에게만 주어졌다. 그러나 전쟁 이후 HO 숫자는 의대생의 그것을 초과했다.
      • 일부 새롭게 만들어진 R program 있지만, 대부분은 기존의 프로그램에서 숫자를 늘리는 방식을 취했다. R training 점차 democratize 되었다. 기존의 엄격한 피라미드 형태의 구조는 parallel system으로 대체되어갔다.
        • 피라미드 구조를 유지한 것은 GS 밖에 없었다. 대부분의 다른 과에서는 R 들어오면 R 마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 GME 성장은 AMC에게 새로운 과제를 안겨 주었는데, 대부분의 faculty member에게 ward teaching 점차 어려운 일이 되었다. 왜냐하면 이제 가르쳐야 하는 대상이 학생부터 레지던트 말년차까지 너무 다양했기 때문에 어디에 중점을 두고 것인가가 상당히 교육적으로 어려운 문제였다. 또한 시기에 MS clinical network 여러 병원으로 확장함에 따라서 Faculty 교육을 담당해야 하는 기관의 수도 크게 늘어났다.
      • GME AMC에서 가장 성장을 이루긴 했으나, AMC들이 전쟁 이전보다 I R training 독점권을 가진 것은 아니었다. 대학에 부속되지 않은 여러 community hospital "Freestanding internship" 제공하였다.(어떤 R program에도 속하지 않은 I program)
      • 그러나 병원간의 HO 모집하기 위한 치열한 경쟁 속에서도 부속병원은 독보적으로 유리한 위치를 선점하고 있었다.
      • HO 대한 수요가 많아지면서, 부족 현상이 생겼고, 특히 인턴의 부족이 심했다. 1958 12325개의 인턴 자리가 있었으나, 미국 MS 졸업생은 6861명에 불과했다. 1960년대 후반, I R 자리의 20% 여전히 채워지지 못했고, 그나마도 시기에 32% I R 외국 의과대학 졸업생이었다.
      • 치열한 GME 내의 경쟁 속에는 HO 모집하기 위한 병원간의 경쟁 뿐만 아니라 좋은 R 모집하기 위한 specialty 사이의 경쟁 있었다. 가장 지적으로 흥미로운 분야가 가장 인기가 많았다. 예를 들면 상대적으로 안과가 인기가 있었고, 이비인후과가 인기가 있었는데 이런 것이 수입이나 삶의 질이나 사회적 명망과 관련이 별로 있지 않았다. 뛰어난 학생들이 가장 많이 가던 과는 내과였는데, 1960년대의 내과는 80% Alpha Omega Alpha 선정된 학생들이었다.
      • I R 대한 통제권은 전쟁 이전과 마찬가지로 여러 조직에 나누어져 있었다. AAMC, AMA, specialty boards, residency review committees 등등.
        • 1960년대에 Millis report라는 보고서는 대학들이 의학교육의 연속체(continuum) 있어서 많은 책임을 것을 권고하였다.
        • 그러나 이러한 권고는 무시당했고, AMC내에서도 R program 과의 문제였지 병원 기관 전체로서의 문제가 아니었다.
      • Residency democratization 미국 의학교육의 윤곽(contour) 바꾸어 놓았다. R position multiplication clinical clerkship 질적 향상과 함께 internship 위와 아래 방향에서 압박해왔다. 2년짜리 internship 사라졌고, 부속병원은 rotating internship 없앴다. 그리고 1970년에 이르러서는 freestanding internship 사라졌다. 1975 7 1일을 기점으로 인턴십은 residency program 1년차에 포합되었고, 독립적인 교육으로서의 존재는 사라졌다.
        • Residency democratization MS CME 대한 역할도 감소시켰다. 많은 학교들이 여전히 CME 제공하고는 있었지만, faculty 별로 이러한 것을 달가워하지 않았다.
      • 전쟁 이후의 I R GME 대한 근본적인 질문을 던졌는데, 바로 이것이 교육이냐 서비스냐(was it education or service)? 하는 것이었다.
        • 특히 이것은 MS 부속관계에 있지 않은 병원에서 두드러졌지만, 부속병원에서도 이러한 문제에 대한 은근한 분위기가 있었다.
      • R democratization free enterprise system 성공과 개개인의 권리의 승리를 의미했다. 각각의 병원 R program 그들의 필요에 따라서 HO 뽑았고, 학생들은 그들의 흥미에 따라 S 선택했다.
      • 전체적으로 보면 1950년대와 1960년대의 '개인의 선택' 결과적으로 Specialization 향해 급속히 가고 있었고 GP 점차 줄고 있었다. 그러나 개개 의사에게 좋은 것이 국가 전체로 좋은 만은 아니었다.
      • GME 가장 당면과제는 개개 의사의 열망과 국가적 목표를 어떻게 조화시키느냐 하는 것이었다.
        • "Surgeon 의해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정부에 의해 결정될 것이다"

 

  • The Rise of Subspecialty Training
    • WWII 이전에 residency 의학 교육의 최고점(culmination) 같았다. 그러나 WWII이후 residency 기존의 목적을 달성하기 어려워졌다. 임상적으로 이상 HO에게 specialty care 대한 최신 지식을 전달하지 못했다.
      • 가장 뛰어난 clinician까지도 특정 분야를 마스터하려면 SS해야 했다.
    • 전쟁 이후 residency academic career 준비과정으로서의 가치는 대부분 상실했다. 일이 바빠져서 Reflection 하거나 임상 연구를 시간은 없었다.
      • 고등교육이 democratization 됨에 따라 residency 많은 사람에게 기회 주어졌다. 학사 학위도 liberally educated individual 나타내주는 역할을 상실했고 specialty certification academic 것보다 vocational(직업적) 보증을 해주는 것이 되었다.
    • WWII이후의 formal SS 훈련과정은 임상적 SS 대한 훈련과 연구자로서의 커리어 훈련을 받을 있는 역할을 했다.
      • SS training 받는 루트는 과에 따라 달랐고 수술과의 경우 하고자 하는 (UR, NS )에서 3~5년을 해야 했고, 내과는 2~3년의 subspecialty "fellow" 해야 했다.
    • Formal medical education으로서의 최종 단계로서 fellowship training 앞의 어느 단계보다 세분화되고 다양했다. 개개인이 하고자 하는 특정한 분야에 맞추어질 있게 유연했다.
    • SS training 임상 경험 쌓는 것이기도 했지만, 그것보다 우선되는 목표는 미래의 clinical investigator로서 준비하는 과정이었다. 이제는 R 아니라 SS training academic leader로서의 준비단계가 되었다.
    • WWII 이후 20년간 SS fellowship training 크게 확장되었다. 많은 부속병원에서 clinical fellow 수는 I R 수를 넘어서고 있었다. Case 맡으려고 하는 R F(Fellow) 사이의 싸움이 치열했다.
    • 많은 F들에게 SS training 기운이 나는 과정이었다. I R동안 환자를 보는 것을 배우느라 정신이 없었지만, 이제는 학문적 사유를 하고 연구를 있는 여유를 가질 있었다.
      • 그러나 SS training scholar만을 위한 것은 아니었고 R 같이 democratize 학문적 목적이 아니라 advance 임상경험을 쌓고자 하는 사람들도 F 했다.
    • 1970년대 초반 academic medicine 리더들은 매우 소수의 SS들만이 academic career 가고자 하는 사실을 걱정했다. 대다수의 SS들은 결국 private practice 종사하였다.
    • 많은 면에서 이렇게 많은 S SS 키워내는 것은 공공적 측면 있었다. 대학에서 훈련받은 SS들은 그들의 community hospital 필요한 시설과 인력의 지원을 받을 있게 도와주는 역할을 있었고, 또한 실제로도 그러한 역할을 했다. 당시까지만 해도 경쟁적 분위기가 덜했고, AMC 지위는 확고했고, SS training program 생긴지 얼마 안된 때였으며, AMC community physician 관계도 좋았다.

 

  • The Changing Life of the House Officer
    • 많은 면에서 전쟁 이후 HO들의 삶은 전쟁 이전과 비슷했다. 기존의 수많은 스트레스 요인(과도한 노동, 수면 부족..)들은 여전히 그대로였다. 물론 이와 마찬가지로 기존의 수많은 지원들도 그대로였다.
    • 어떤 HO 서로 완전히 동일한 경험을 하지는 못했다. 같은 residency 프로그램 내에서도 경험하는 것이 달랐다. 또한 community hospital 부속병원 R 경험도 물론 달랐다.
    • 그렇지만 HO 삶에 있어서 어떠한 뚜렷한 변화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모든 프로그램에서 GME 가족과 같은 분위기가 사라지기 시작한 이다. 이것은 한편으로는 house staff program 커지면서 나타난 것이기도 했다. 모든 사람에게 병원 숙소를 주는 것이 불가능했던 것이다. 이에 따라 faculty와의 관계도 조금 멀어졌다.
    • 다른 요인은 1950년대와 1960년대는 개인적인 유흥이나 여유를 즐기는 사회적 분위기가 확산 것이다. 전쟁 세대에게 있어서 가부장적인 규칙과 행동 규범은 이상 통하지 않았다.
    • 번째 차이는 private patient 많이 보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Private patient(PP) Semiprivate patient(SPP) 증가하기 시작하면서 WP 수는 감소했고 전쟁 이전에 가장 많은 WP 보던 병원에서는 종종 갈등 상황이 벌어졌다.
      • 많은 private physician들은 자신들에게 건방지게 대하거나 심지어 PP WP 훔쳐가버리는 R들을 매우 싫어했다.
    • PP수의 증가가 교육적인 문제를 야기했지만, I R에게 일부 좋은 점도 있었다. 처음으로 그들은 'salaries' 받았다.
    • 1965 통과된 Medicare Medicaid 원래 GME 대해서는 관대하게 reimburse 하였기 때문에, house staff 받는 보상은 빠르게 증가했다.
      • House staff(HS) 봉급은 "꾸준히 상승하며 끝을 모른다" 라고 하였다. 일부 junior faculty house staff들이 자신들보다 많은 돈을 받는 것을 우려했다.
    • PP 존재가 HS 봉급이 올라가는 것에 기여한 것은 맞지만 HO 차지하기 위한 병원간 경쟁도 여기에 했다. 병원은 급여를 무기로 HO들을 모집했다.
    • HO들에게 stipend 등장은 이상 좋을 없었다. 당시에는 봉급만 가지고는 빚을 지는 일이 흔했고, 많은 HO들은 공식적으로 금지되어있음에도 야간 알바를 뛰었다.
    • 번째 차이는 많은 일감이었다. 연구가 F에게 옮겨가면서 scholarly adventure 점점 사라져갔다. 반면 환자에 대해서 해야 일은 많았다. HO들은 학생들을 가르치는 일도 해야 했고 외래환자도 봐야 했다. 일이 너무 많아서 conference 참석률은 떨어졌고, 악필이 너무 많아서 어떤 병원에서는 서법(penmanship) 코스를 열기도 했다. 삐삐가 도입되면서 on duty 때는 도망가지도 못했다.
      • HO들은 불만을 표출(acting out)했고 환자나 간호사에게 무례하게 대하거나 다른 병원 직원에게 막대하거나 주차공간을 쓰고 환자용 음식을 가로채기도 했다.
    • HS life 바쁜 삶은 다시 한번 GME 근본적 모호성에 대한 질문을 떠올리게 했다. Was it service or education?
    • GME 여러 측면이 변했지만 하나만은 바뀌지 않았다. 바로 환자 management 대한 사려깊은 접근법을 가르치고자 하는 의학교육자들의 이상이다.
      • 그러나 faculty 의한 압력은 종종 이것과는 반대로 작용했는데, 많은 검사와 불필요한 검사까지도 하도록 했다.
      • Faculty들은 "검사의 적절한 사용은 가르치지 않으면서 하나만 빼먹으면 무지하게 혼냈다"
    • 전쟁 이후 faculty들이 딱히 전에 비해서 교육에 신경을 것은 아니지만, 결과는 엄청난 차이였다. 과학의 발전으로 많은 비싼 검사 procedure 생겨났다. 1950년대와 1960년대에 이미 medical cost 빠르게 증가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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