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Chapter 7. World War II and Medical Education
    • MS 오랫동안 일반인들에 대한 의료의 질을 담당해왔지만, WWII동안에는 군에서의 의료까지 맡게 되었다. 52개의 general hospital unit 20개의 evacuation hospital unit등에 필요한 인력은 거의 대부분 AMC에서 맡았다. 또한 당시에는 전쟁과 관련한 의학연구도 해야만 했다.
    • MS faculty만이 전쟁 시기에 필요한 인력을 지원했던 것은 아니다. 간호사나, 치과의사나, 수의사, 기술자 등등 많은 인력이 차출당했다. 하지만 중에서도 academic physician 리더십을 발휘했다.
    • WWII 의학교육에 있어서 어떤 커다란 변화를 일으킨 것은 아니다. 오히려, WWII 유산이라고 있는 것은 미국 의학교육의 질을 재확인 시켜 것이고, 의학 연구의 중요성을 증명한 것이며, 많은 의사와 medical care 대한 욕망을 돋운 것이었다.
      • 이후 맞닥뜨린 새로운 과제들을 위해서 답을 찾기 위해 점점 basic medical research 집중하게 되었다.
    • Mobilization for War
      • 진주만 폭격 이전에도 많은 MS 전쟁의 가능성을 대비하고 있었다. 전쟁 시작 이전에 이미 많은 MS들이 군병원(military hospital unit) 조직했다.
      • 전쟁 발발 직후 의학교육도 본격적으로 동원되었다. AAMC 기존의 4년제를 3년제로 전환할 것을 촉구하였다.
      • JHMS 동원이 전형적인 형태였는데, 1942 초반, Hopkins faculty 해외의 군병원을 담당하게 되었다. 학교의 연구 프로그램은 상당히 삭감되었고, 입학 요건은 낮아졌다. 여름 방학이 없어졌고, 주치의 수가 줄었으며 간호사와 paramedic 감소하였다.
      • 일반인들의 요구 역시 충족되어야 했기에, 국가적 의료 동원은 매우 복잡할 수밖에 없었다.
        • 의료의 지휘권(leadership) teaching center 양도되었고, 전쟁 동안의 병원과 medical camp 책임이 주어졌다.
      • MS faculty들에게 동원은 어려운 딜레마였다. 그들에게는 추가적인 일보다 짧아진 프로그램으로 인해 낮아져버린 교육적 수준이 문제였다.
        • 의학교육의 질은 하향세에 있었다.
      • 그러나 전쟁의 압박감은 엄청났기 때문에, 군과 정부의 압박 속에서 MS 많은 의사를 양산하라는 요구에 굴복할 밖에 없었다.
        • 결과로 전쟁시기에는 25000명의 의사(전쟁 이전 시기보다 5000 증가) 졸업시켰고 80% 곧바로 인턴에나 레지던트 후에 군으로 가게 되었다.
      • 의학교육을 하는 사람들이 치러야 하는 비용은 엄청났다. 해외를 담당하게 교수들은 2~3년간 불편하고 위험한 시설을 감내해야 했다.
      • 또한 미국에 남아 있는 교수들도 갑자기 감소한 인력으로 인한 고생을 하고 있었다.
        • 이러한 상황에서 전쟁과 관련한 연구를 제외한 나머지 분야의 의학 연구는 상당히 감소할 수밖에 없었다.
      • 학생들도 지구력을 시험받는 상황이었다. 입학 기준이 낮아지며 어리고 성숙하고 제대로 준비되지 않은 학생들이 들어왔다. 교육은 짧아졌지만, 커리큘럼의 내용은 줄지 않았고, 종종 정규수업시간을 넘어서까지 수업이 진행되었다. 학생들에게 깊게 사고를 하거나, 연구에 참여하거나 관심있는 분야를 심도있게 공부할 시간은 주어지지 않았다.
      • 미칠 듯하게 빨라진 커리큘럼은 학생들에게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는데, 전형적인 프로그램에서 1년간 방학은 대개 6월쯤에 있는 2주에 불과했다. 학교를 다니며 일을 하는 것이 사실상 힘들어져서 경제적 부담도 늘어났고, 미래에 대한 불안감도 상당했다.
      • Graduate medical education 측면의 손실도 컸는데, 우선 인턴이 9개월로 감소했다. 레지던트 기간도 절반으로 줄었고 research fellowship 끊겼으며 젊은 medical teacher / investigator 없었다.
        • "a regrettable wartime necessity"
      • 응급상황에서 벌어진 다른 조정들도 있었는데, 여성들에게 갑자기 많은 교육의 기회가 주어졌다. 또한 전쟁 시기에 인력 부족으로 인해서 "subinternship" 많아졌다.
      • 전쟁이 마무리 , 전쟁 이전의 상태로 돌아가는 것도 만만찮은 일이었는데, 다시 4년제로 돌아가야 했고, 새롭게 졸업하게 사람과 전쟁에서 돌아온 veteran들을 인턴십과 residency에서 조절하는 것도 해야 했다.
      • WWII 결과적으로 의학교육에 특별한 변화를 가져오지는 않았다. 오히려 교수들의 애국심이나 공공심(public-spiritedness) 물론이며, 기존 시스템의 효율성을 증명했다고 있었다.
        • 여성 의사를 많이 선발했던 것은 그냥 순간의 일이 되었다. 여성의 진보는 후에 civil rights feminist movement시기까지 미뤄졌다.
      • 산업과 다르게 전쟁시기 동안 MS 의한 의사의 양산은 그다지 많지 않았다.
        • MS 교과과정을 압축시키려 했던 시도는 "실패" 끝났다.
      • 의학교육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억지로 산업과의 잘못된 연관성만을 찾으려 했다는 비판이 일었다. 의학교육은 labor-intensive 뿐만 아니라, 오랜 시간을 필요로 하는 것이었다.
      • WWII동안에도 training 대한 비판이 많았다. 불만은 내부에서가 아니라 의대 교수들로부터 나왔는데, 그들이 보기에 많은 의사를 만들려고 필연적으로 교육의 질이 낮아질 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 이러한 정서는 의학교육자들 사이에 널리 퍼졌고, Executive Council of the AAMC, Council on Medical Education and Hospitals 등등에서 논의되었다.
        • "학문적 기준이 붕괴되고 있다는 위험신호가 곳곳에 있다"
          "the danger signal of a breakdown in scholastic standards is flying"
      • 이러한 맥락에서 WWII 가장 위대한 유산이라면 '기준' 낮춰보고자 하는 시도를 다시는 못하게 되었다는 사실일 것이다. 의사를 만드는 것은 폭탄을 제조하는 것과 동일할 없었다.
    • The War Against Disease
      • 역사적으로, 군인들의 가장 어려움은 질병이었다. 20세기까지만 해도 전쟁으로 죽는 사람보다 질병으로 죽는 군인이 많았다.
      • WWII 발발하면서 과학은 국가적 방어에서 중요한 요소가 되었다. 이전에도 매번 전쟁이 있을 때마다 과학에 신경을 쓰긴 했지만 이번만큼은 특별했다. 군대가 필요로 하는 가장 급한 것은 기술적인(technological nature) 것들이었다.
        • Medical science 전쟁에 기울이는 총력만큼이나 중요하다는 것이 명백해졌다.
      • Physical science 국가 안보에 중요한 만큼 medical science도 그러했다. Physiology 사례는 전형적이다. 사람의 몸이 환경의 변화에 따라 어떠한 생리적 변화를 겪는지 아는 것이 필수적이었다.
      • 생리학 뿐만 아니라 거의 모든 의학 분야가 전쟁기간의 연구에 기여했다. 많은 노력의 결과로 수많은 논문과 보고서가 나왔다.
      • 대부분의 연구는 군사적으로 가치가 있었을 뿐만 아니라 일반인들에게도 필요한 내용이었다. 인플루엔자에 대한  백신이라든가, Typhus, cholera치료, 말라리아 등등이 그랬다.
      • 질병과의 전쟁은 엄청난 수의 목숨을 살렸고, 고통을 완화해주었고, 상처가 낫게 해주었다.
      • 하지만 질병과의 전쟁에도 문제는 있었다. 즉각적인 군사적 문제들을 해결해야 한다는 부담감이 엄청났다. 기본적으로 호기심에 의한 연구는 거의 없었다. 또한 training program 줄어들면서 젊은 의과학자들이 점차 없어져 갔으므로 전쟁 부족(postwar shortage) 필연적이었다.
      • 그럼에도 WWII동안의 medical science 해야 일을 해냈다는 측면에서는 엄청난 성공이었다. 질병과의 전쟁의 승리는 전쟁 NIH 확장이 있기 전에 의학이 미성숙했다는 오해를 해소하는데 결정적이었다. 이미 미국의 의학 연구는 세계 최고 수준이었다.
    • The Apotheosis of Medical Optimism
      • 시간은 연속적이라 하지만, WWII이후의 미국은 전혀 다른 사회가 되었다.
        • 국내적으로 전쟁은 크고 활발한 연방 정부를 받아들이게 되었다.
      • 의학도 새로운 세계를 맞이하였는데, 전쟁 이후에 financing 새로운 방법, 그리고 의료전달체계에 대한 토론이 이어졌다. 의료에 대한 수요는 점점 늘어났고, Medical Care 대한 권리는 모든 시민의 기본권으로 여겨졌다.
      • 의학이 마주친 과학적 도전 역시 바뀌고 있었다. 미국의 기대수명은 1900년에 47세에서 1945년에 65세로 늘어났고, 사람들은 다른 질병(심혈관 질환, 뇌졸중, 신부전..)으로 사망하고 있었다.
      • 그러나 대중들은 이러한 문제를 그다지 느끼지 못하고 있었고 '질병과의 전쟁'에서 얻은 경험은 의학 연구를 통해 이들 질병도 점령할 있을 것이라는 믿음을 갖게 하였다.
        • 루즈벨트의 science advisor Vannevar Bush 기초 의학 연구에 정부가 많은 지원을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 Bush 이러한 의견은 정부 관료, 과학계, 일반인들 사이에서 공감을 얻었다. 당시 의학 연구의 성과는 눈부셨고, 충분한 돈만 지원되면 만성질환도 극복되지 못할 이유가 무엇인가? 라는 생각이 다수였다.
      • AMC에게는 이러한 낙관주의는 양날의 검이었다. 연방정부의 지원을 받기에는 좋았지만, 이러한 기대가 충족되지 않았을 때의 환멸, 후폭풍도 엄청날 것이었다.
        • 연구에 대해서 어떤 사람은 "2,000,000,000 달러 맨하탄 프로젝트는 그냥 돈을 가져다 버린 것이다"
        • 정책 지침(guiding policy) 필요한 것은 humility(겸손) statemanship(정치가의 능력)이었다. 겸손이란, 건강에 영향을 주는 다양한 사회적, 행동적 요소를 인정하는 것이고, statemanship이란 즉각적 실질적 이득의 가능성을 객관적으로 바라보면서도 적절한 지원을 하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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