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Chapter 5. Teaching Hospitals
- Modern hospital이 성장하면서, 모든 종류의 교육이 거의 모든 기관에서 이뤄졌다. 심지어는 가장 작은 병원에서도 컨퍼런스, 회진, staff meeting 등등이 다 이뤄졌다. 많은 작은 병원들도 internship을 제공하였지만, "부속병원(teaching hospital)이라는 명칭은 일부 선택된 기관에만 주어지는 것이었다.
- 부속 병원이 다 균일하진 않았다. 다수는 private(voluntary)였고, 또 일부는 publicly owned였다. 일부 MS(주로 state school)은 그들이 따로 부속병원을 소유하고 있었다. 일부 leading medical educator들은 medical school은 각각 하나의 병원을 가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 WWI이후, 부속병원은 그들의 의과대학과 동일한 학문적 이상을 공유했으며, 이 두 기관이 교육, 연구, 진료에서 협동적으로 일했다. MS에서 병원의 ward는 반드시 필요한 것이었고, 부속병원은 그들이 21세기에 이룬 진료의 성과는 의학교육에의 참여로부터 나온 것이라는 것을 이해했다.
- 이 시기의 부속병원은 거의 이상적인 laboratory를 갖추고 있었지만, 이에 따르는 비용도 있었다. 곧 부속병원이 nonteaching hospital만큼 효율적이지 않다는 것이 드러났고, 가난한 환자들이 주로 교육에 활용된다는 사실은 의학교육이 곧 더 나은 진료에 다다르게 한다는 일반적인 믿음에 반하는 것이었다. 사회적 필요는 가장 경험 많은 의사에게 진료받고자 하는 개개 환자의 필요와 상반되었다.
- Joining the University
- 전쟁 사이의 기간에 미국 의학교육을 구성하고 있던 여러 힘들이 합해지고 있었다. MS이 medical care delivery system 속으로 들어간 것처럼, 부속병원은 대학 속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 WWI이후, 부속병원은 전쟁 전에는 강력히 거부했던 교육과 연구를 오히려 강력히 받아들이고 있었다. 부속병원이 되면 학생과 house staff 교육에 더 많은 기회를 얻을 수 있었던 것이다. 말뿐이 아니라 실제로 부속병원은 그들의 학문적 역할을 진지하게 수용했다.
- 교육과 연구의 이러한 노력을 통해 부속병원은 큰 이득을 보았다. 우선 인턴과 레지던트 모집이 수월했다.
- WWI동안 부속병원과 의과대학간의 연합을 지원해준 많은 세력들이 있었는데, WWI이후에는 임상연구의 특징 - patient-centered nature - 이 가장 강력한 힘이었다.
- 대학의 확장된 부분으로서 부속병원은 affiliated medical school의 모습에도 영향을 주었다. 가장 중요한 역할은 faculty의 recruitment와 retention이었다.
- 부속병원은 MS를 포함한 대학의 다른 부분에서는 경험하지 못했던 문제에 마주쳣다. 부속병원은 medical professor와 student이외에도 무수한 다른 구성원들이 있었다. Patient, private physician, nurses, administrators, trustees…
- 이러한 도전에도 불구하고 부속병원의 운영은 상대적으로 간단했다. 부속병원은 19세기보다는 크고 복잡한 조직이었지만 여전히 소수의 행정직원과 관료로 운영가능했다.
- 후원자에게 얼마나 모금할 수 있느냐에 따라 부속병원의 확장 여부가 결정되었다.
- 이 시기동안 많은 부속병원과 의대는 사실상 하나의 몸으로 운영되었다.
- 1938년 병원이 상당한 빚을 지게 되었을 때 MS가 병원의 일부 비용을 지불했으며, 반대로 병원도 학교의 교육 및 연구 비용을 지원했다.
- MS와 부속병원이 동일한 교육, 연구, 진료의 목적으로 움직이면서 점차 지리적으로 가까이 위치하도록 설립되었고 하나의 통합된 조직이 되어갔다.
- 그러나 의과대학과 부속병원의 완벽한 통합은 결코 이뤄지지 않았다. 두 조직 사이의 긴장은 지속되었다. 의과대학은 환자 관리보다는 교육이나 연구를 더 지향했다.
- 그렇지만 이 시기의 부속병원이 교육 했던 헌신을 과소평가할 수는 없다.
- Prebyterian Hospital은 "진료는 academic activity와 같이 가야 하며, 결코 그 단독으로서 목적일 수 없다" 라고 하였다.
- 그럼에도 부속병원이 과연 학문적 가치를 추구한 것인가에 대한 의구심이 여전히 남는다면, 그들이 '성공'을 어떻게 정의했는가를 보면 그 의심을 씻을 수 있을 것이다. 그들이 말하는 성공은 많은 환자를 보는 것도 아니고, 많은 돈을 버는 것은 더더욱 아니고 clinical service의 질을 높이고 연구와 교육에 크게 기여하는 것이었다.
- The Presence of Time
- 일견 임상 교육이 병동에서 이뤄지는 것은 당연해 보인다. 의학교육은 환자를 따라야 하고, 병원은 acute care의 중심이었다.
- 입원환자에 대한 교육은 부속병원이 제공할 수 있는 '규모의 효율성' 에 기인한 면도 있다. 중요한 임상 소견을 가진 환자가 있을 때 많은 학생과 house officer들이 볼 수 있었다.
- 입원 환자만이 의학교육이 추구하는 목적에 맞는 충분한 시간을 제공할 수 있다는 것 역시 가장 중요한 사실이다. 문제를 해결하는 능력이나 불확실성 속에서 사려깊게 사고하는 능력은 환자를 자세히 볼 수 있는 충분한 시간이 있을 때만 가능한 것이었다.
- 의학교육자들은 teaching ward의 교육적 환경을 조성하기 위하여 노력했다. 일부 병원은 입원환자의 수를 제한하여 학생, house officer, faculty가 환자를 볼 수 있는 충분한 시간을 제공하고자 했다.
- 재원 기간이 길었던 것은 입원 병동에서 교육적 환경의 풍요로움(richness)을 뜻했고, WWI에서 WWII로 가면서 평균 재원기간이 감소하긴 하였지만 여전히 충분히 긴 시간이었다.
- 입원한 환자들의 상태는 종종 무척 심각했고, 일부는 거의 생명의 위태로울 정도였지만 의학교육자들은 오히려 이것을 좋은 교육적 이점으로 보았다.
- 예컨대 ketoacidosis를 보지 못했다면 그 사람은 diabetes를 제대로 배운 것이 아니라고 여겼다.
- 입원은 대개 무계획적으로 이뤄졌기 때문에, 학생이나 house officer가 어떤 환자를 보게 될 것인지는 순전히 운에 맡겨진 것이었다.
- 학생과 house officer가 상당히 바쁘긴 했지만, 보통 생각하는 것처럼 그 정도로 바쁘진 않았다. 실제로, 그 후와 비교했을 때 이 당시의 생활은 상당히 여유롭다고 볼 수도 있었다.
- 8시에 일어나 9시에 밥을 먹는다거나, 첫 수술이 8시30분~9시 정도에 잡힌다거나. 일부 house officer들은 6시 땡 하면 집에 가기 바쁘다거나.
- 부속병원의 입원 병동이 훌륭한 educational laboratory임은 분명했지만, 의학교육의 모든 목적을 여기서 달성할 수는 없었다. 입원 환자는 office practice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외래 환자와는 달랐다.
- 입원 환자를 이용한 교육은 또 하나의 제한점이 있었는데, 한 환자의 모든 측면에 대한 관리를 배우기에 부족했던 것이다. 병원에서 환자는 집이나 가족, 친구와 떨어져서 상당히 무기력한 상태였고 이는 매우 특이한 상태라고 볼 수도 있다.
- 환자를 어떠한 사물(object)로 봄으로서 'depersonalizing'에 대한 우려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 교육적 한계점을 깨달으면서 의학교육자들은 다른 임상 상황에서의 교육을 시도했다.
- Preceptorship program, Ambulatory clinics of the teaching hospital..
- 외래환자 기반 교육의 가능성은 많이 인정되었지만, 실제로 행해진 경우는 거의 없었다. 외래에는 너무 환자가 많았고, facility는 너무 붐볐다.
- "thoroughly unsatisfactory"
- 하지만 이 당시 의과대학들은 inpatient service가 확고한 한 ambulatory work이 부실하다고 해서 그다지 걱정하지 않았다.
- 외래는 입원 환자가 지속적으로 채워질 수 있도록 공급해주는 것이 주된 목적이었다.
- 외래 진료 상황에서 교육이 불만을 없애는 것이 불가능한 것 만은 아니었다. 일부 실험적 연구에서 clinic teaching도 잘만 이뤄지면 상당한 가치를 가질 수 있음이 밝혀졌다.
- 예를 들면 appointment system을 갖춰서 학생이나 house officer가 한 환자에 대해 충분한 시간을 가지고 볼 수 있게 만든다든가.
- 이와 같은 실험이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충분한 시간'이 제공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은 대부분의 외래 상황에 맞지 않는 것이었다. 항상 북새통이었던 외래는 관리감독이 거의 불가능했고, 교육도 거의 불가능했다.
- 따라서 좋은 교육을 위해서는 외래 환자 뿐만 아니라 입원 환자의 수도 줄여야 했다.
- 성공의 기준이 '양'보다 '질'이었던 이 당시에는 더 적은 숫자의 환자를 보는 것은 병원이나 의과대학에게 감당할 만한 tradeoff 였다. 의학교육은 그 특성상 병원이 최다 환자를 최소 시간에 보는 식의 효율성을 갖출 것을 기대하지 않았다.
- The Ward Service
- Clinical learning에 있어서 충분한 시간이 필수적인 만큼, 다양한 환자를 보는 것도 중요했다. 그러나 모든 환자가 교육에 활용되었던 것은 아니다.
- WWI이후 부속병원은 가난하지 않은 환자, private(스스로 비용을 지불하는) 환자, semiprivate(보험에 가입된, insured) 환자들도 치료하게 되었다. Private pt는 private physician만 전적으로 보는(belonging) 것으로 간주되었고, 학생이나 house officer가 끼어들 수 없엇다.
- 의학교육을 위해서는 병동이 필수적이었다.
- "The MGH's soul lies in its teaching wards"
- 교육 프로그램으로서 활용되는 것은 병동 환자에 대한 관리 측면에 있어서도 도움이 되는 일이었다.
- 그렇지만 선택권을 가진 private pt는 부속병원의 교육 목적으로 활용되기를 거부하였다. 환자 개인의 이익과 사회적 이익이 충돌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