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Chapter 4. The Rise of Graduate Medical Education
    • 20세기 초반에, 대부분의 MS 의학교육의 질을 높이는 것에 있었다. 당시에는 MS의 4년 과정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으며 심지어 AF 1910 보고서에도 인턴이나 이를 비롯한 다른 hospital training 대한 내용은 없었다.
    • 이러한 관점은 WWI이후 빠르게 변했는데, 의학지식, 기술, 진료가 급격히 변하였기 때문이다.
      • "internship" "residency"
      • "미국의 의료는 졸업 후에 의사로서 길러진 mental habit 의해 영향을 받는다"
    • Graduate medical education(GME) 시스템이 만들어질 당시 JHMS 다시 핵심적 역할을 하게 된다.
      • GME 병원 중심, 그리고 professionally regulated(전문직에 의하여 관리되는) 되었고 GME에서 MS 그들의 독점적 지위를 잃게 된다.
    • The Creation of Internship and Residency
      • 1870 이후로, 미국 MS들은 의학지식의 증가에 맞춘 수업시간의 증가라는 압박을 받게 된다.
      • WWI 무렵의 지식은 4 과정으로도 가르치지 못할 만큼의 양이었다.
      • 그렇다면 의사로서의 교육을 완성하기 위한 최선의 방법은 무엇일까? 일부 의학교육자들은 MS 5학년이 도입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대부분은 병원에서의 졸업후교육(graduate training) 필요하다는 것에 의견을 모았다.
      • 졸업후교육의 기회는 여태껏 오래간 있어왔다. 그러나 position 많지 않았고, 서로 다른 기관에서 서로 다른 이름으로 불렸다(intern, extern, house pupil, house physician, resident, resident physician..)
      • WWI이전 병원은 교육적 관점에서 부족한 점이 많았다. House officer 하는 일은 교육적인 가치는 거의 없는 것들 뿐이었다.
      • WWI동인 병원의 이러한 시스템은 인턴제로 바뀌었는데, 당시 인턴십은 MS에서 졸업한 이후 의사로서의 general education 마무리 짓기 위한 병원 기반의 과정으로서 표준화되었다.
      • 인턴십은 병원과 대학의 전통을 모두 반영하였다. 병원 기반의 프로그램으로서 19세기의 것과 닮아있긴 했지만, 결과적으로는 기존의 교육 프로그램 안에 들어간 것이다.
      • 가지 19세기와 달라진 점이 있었는데 다음과 같아.
        • 첫째로, conference, seminar, 회진, 강의 등의 교육적 시간들이 있었다.
        • 둘째로, 병원이 학교와 연계(affiliate)됨에 따라 배울 기회 뿐만 아니라 가르칠 기회가 생겼다.
        • 셋째로, 대학부속병원(teaching hospital) 인턴십은 임상 연구에 참여할 있는 기회이기도 했다.
        • 넷째로, 일부 우수한 프로그램에서는 인턴들이 환자를 자세히 있었다.
      • 의과대학(Medical school) 병원은 함께 인턴십을 발전시켰다.
        • 인턴십 자리도 빠르게 늘어났으며, 부속병원의 프로그램이 가장 좋긴 했지만, community hospital까지 퍼졌기 때문에 모두가 인턴십의 기회를 가질 있었다.
      • 당시 인턴십은 가지 종류가 있었다.
        • "rotating" "straight" "mixed"
      • 인턴십 프로그램은 길이가 다양해서 대부분은 1년이었지만 3년까지 하는 곳도 있었다.
      • WWI이후 수년간 의학교육자들은 인턴십이 학부교육의 마지막 단계인지, 졸업후교육의 단계인지를 놓고 논쟁을 벌였다.
      • 인턴십의 교육적 이상은 실현되지 않았는데, 부속병원에서도 환자에 대한 service 기능이 교육기능을 압도하고는 했다. 뉴욕의 Mount Sinai Hospital에서는 인턴들이 적절한 교육을 받고 있지 못하다며 불평했다. 인턴십 중에서도 최악은 100 병상도 되지 않는 small community hospital이었다.
      • 비록 인턴십이 질적으로 차이는 컸지만, GP 키워내는데 있어서는 제법 효과적이었다. 그러나 specialty 하기 위해서는 다른 과정이 필요했고 1920 이에 대한 표준화된 시스템이 존재하지 않았다.
      • 일부는 부속병원의 전공과 외래 진료실에서 일하면서 specialist 되기도 했고, 일부는 이미 specialist 사람 밑에서 일하기도 하였다. 외국으로 유학을 가는 경우도 있었고, formal course work specialist 되는흔한 방법이었다.
      • 이렇게 온갖 것이 혼합된 상황에서 혼란이 있었던 것은 당연했다. 수많은 pathway 서로 구분짓는 것도 어려웠고 Graduate medical education, Continuing medical education, Postgraduate medical education 사이에도 혼란이 많았다.
      • WWI이후 의학교육자들이 맞닥뜨린 도전과제는 specialty training 있어서 균일성이 없고, 기준도 낮다는 것이었다. 많은 specialist '자칭' specialist였다.
      • Graduate MS 무척 여러 종류였다. 일부는 매우 뛰어난 academic institution이었으나 대부분의 graduate MS 상당히 상업적이고, 돈을 벌기 위한 목적으로 설립된 기관이었다. 1920년대의 GME 20세기 시작 무렵의 학부교육과 비슷한 상태였다.
      • 의학교육자들이 specialization 관심을 갖기 시작하며, 단기간의 상업적 코스를 없애고 specialty training 진정한 교육 프로그램으로 만들기 위해 노력했다. 그러나 이것을 이루기 위한 방법에 대해 의견이 갈렸는데 , 일부는 MS 구성된 프로그램을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 그러나 1900년대에 다른 모델이 등장했는데, 바로 residency이다.
      • JHMS 1889 문을 열면서 Modern residency 미국에 처음 등장했다. Resident라는 이름은 인턴십을 마치고 병원에서 특정 분야 training 받기 위한 의사를 칭하는 말이었다.
      • 독일식 모델터럼, JHMS Residency mature scholar 위한 학문적 경험을 위해 만들어진 것이었다. "who wishes to do scientific hospital work"
      • WWI동안, JHMS 학부 교육이 그랬던 것처럼, Hopkins R 시스템은 다른 학교에도 퍼지기 시작했다.
      • R 시스템이 퍼지면서, JH scholarship(학문) inquiry(연구) 대한 원래의 명성을 되찾게 되었다.
      • 임상을 연구의 결합이 강조되면서, WWII이전의 R 가지 역할을 해야 했다. 우선 임상 specialty 대한 훈련을 받아야 했지만, 더불어서 clinical investigator로서의 커리어를 쌓아가는 과정이기도 했다.
        • Clinical science clinical full time system residency 서로서로 hand-in-hand 발전해나갔다.
      • 금방 대부분의 의대 졸업생들이 있게 인턴십과 다르게, R 일부 elite들만 있었다. Pyramid 같았고, 연차가 올라가면서 유급하는 비율도 늘어났다.
      • 1920년대에 R 프로그램은 점차 널리 퍼졌다. 1925 Council on Medical Education and Hospitals (of AMA) R 프로그램이 있는 29 학교의 리스트를 발표했다.
      • 1930년대에 R specialization 위한 코스로서 점점 선호되기 시작했다. 또한 대학과 부속병원에게도 이익이 있었는데 우선 병원은 양질의 medical worker 구할 있었고 의대는 적은 비용으로 advanced clinical training 관여할 있었다.
      • R 점차 늘어나며 기존의 clinical specialty 지원하던 사람은 줄어갔다.
      • 1930년대에 미국의 specialty training 표준화되었고 체계화되었다. 대부분의 일이 Council on Medical Education and Hospitals specialty board 의해서 이뤄졌으며 여러 specialty society 생겼다.
      • 1930년대에 specialty board 법령(decree) 의해서, 허가받은 병원의 "long residency" specialization 유일한 합법적 루트가 되었다. R 기간은 분야에 따라 달랐지만, 3 이하는 허용되지 않았다.
      • 학문적 직업적 리더들이 높아진 기준을 찾으면서, 가장 중요한 목표는 specialization 되는 짧은 과정들을 없애는 것이 되었다.
        • GME 개혁은 많은 분야의 도덕개혁운동(moral crusade) 동반했다.
      • MS에게 GME 등장은 변화였다. WWII 무렵 MS 교육 명성은 학부교육만큼이나 GME 교육에 달려 있었다.
      • MS GME intellectual guidance 하였지만, GME 통제(control)했던 것은 아니다. 일부 R 대부분의 인턴십은 부속병원이 아닌 병원에서 이뤄졌다. 게다가 가르치는 장소도 학교가 아니라 병원이었다.
      • WWII 무렵 GME control regulation profession 의해서, 복잡한 regulatory agency 통하여 이뤄졌고 대학이나 AAMC 같은 대리 조직(MS faculty 엄청난 영향력을 가지고 있는) 의해서 이뤄지지 않았다.
      • GME 권한이 대학에서 profession으로 옮겨간 것은 억지로 그렇게 것이라기보다는 자연스럽게 이뤄진 것이다. WWI이후 profession 대부분은(CME American Hospital Association 포함) 인턴십을 대학이 관리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 비슷하게, 많은 조직에서 R 대학의 책임이라고 생각했다.
      • 그러나 대부분의 Medical school leader 이의를 제기했다. 그들은 부속병원을 위해 양질의 I 또는 R 프로그램을 만들고자 했지만, 나중에 다루기 까다로워질 것을 걱정하여 그들의 프로그램을 모든 MS graduate에게까지 확장시킬 것은 반대했다. 또한 community hospital 프로그램을 책임지기도 꺼려했다. 자연스럽게 GME 권한은 병원에서 profession으로 옮겨갔다.
    • From Supervision to Responsibility
      • Clinical clerkship동안 겪게 되는 대부분의 임상 경험동안 의대 학생들은 가까이에서 감독을 받게 된다.
        • 기간은 "opportunity to develop independence"이며 책임이 간주(assumption of responsibility)된다.
      • 환자 관리에 대한 책임의식은 자동으로 축적되는 것이 아니다. 힘든 과정을 거치는 동안 길러지고 얻어지는 것이다.
      • 인턴(house officer)에게 책임감이 간주된다고 하여 관리 감독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주치의와 주기적으로 만나야 했고, 책임의 정도는 점차 커진다.
        • 레지던트-인턴, 시니어R-주니어R, 치프R-시니어R 등과 같이 항상 자신을 봐주는 자기보다 단계 사람이 있었다.
      • 인턴이 관리감독을 받은 것은 맞지만, 학생에 비하면 책임감은 훨씬 것이었다.
      • 설명할 있는 근거는 단편적이지만, 이러한 시스템은 physician education 측면에서나 patient safety 측면에서나 어쨌거나 돌아가는 하였다.
        • 종종 실수가 있긴 했지만, 교육을 받고 마친 physician 하는 실수 정도였다.
      • 책임감(assumption of responsibility) internship residency 교육의 가장 중요한 측면이었다.
        • 책임감이 없다는 것은 훈련받지 못했다는 것과 같았다.
      • 부속병원에서 야망이 있는 I R patient care 대한 기회를 마음껏 즐길 있었다.
      • 책임감은 그러나 GME 관한 의학교육의 근본적인 딜레마가 있었다. '환자에 대한 책임감 있는 인턴' '값싼 노동력으로서의 인턴' 경계는 어디인가?' 하는 것이다.
        • 배우는 과정이기도 하면서 service 하는 입장이기도 하다는 사실, 그리고 인턴은 학생이면서 동시에 병원에 고용된 직원이라는 사실 등에 GME 근본적인 모호성이 있다.
    • Selecting House Officers
      • GME 의학교육에서 중요하게 되면서, 의대생들이 그들의 미래에 대한 고민을 하게 것은 당연하다. 좋은 인턴십은 모든 의사에게 필수적이 되었고 좋은 Residency specialist clinical scientist 꿈꾼다면 필수적인 것이었다
      • 1930년대에 인턴십 자리를 찾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그러나 부속병원에서 인턴십 자리를 차지하는 것은 쉽지 않았다. 8 선발에 145명이 지원하곤 했다.
      • 병원은 어떻게 가장 좋은 인턴을 선발할 것인가를 고민했다.
        • 많은 학교들은 자기 대학 출신 학생들에게 일부 자리를 할당해두었다.
      • 학생들에게 어려웠던 것은 합격 날짜에 대한 병원간 조정이 전혀 없었다는 것인데, 그래서 합격 가능성이 높은 조금 낮은 병원에 지원할 것인지, 합격가능성은 낮더라도 좋은 병원이 지원할 것인가가 가장 고민이었다.
      • 인턴십과 비교했을 residency 선발 방식이나 숫자도 적었고, informal했다.
        • '개인적으로 아는 사람' 또는 '아는 사람의 추천을 받아서' 선발하는 경우도 많았다.
      • Residency 선발되었다고 해서 프로그램을 마칠 것을 보장하는 것은 아니었다. 피라미드 구조였고, 층에 도달하는 사람은 매우 소수의 사람이었다. 그래서 피라미드의 윗자리까지 가지 않더라도 웬만큼 상층에 도달한 사람은 전문성을 인정받을 있었다.
      • 학부교육과같이 GME에서도 AA, 여성, 인종/종교적 소수자들은 차별받고 있었다.
        • 흑인을 위한 residency 자리는 극소수였다.
      • 비슷하게, 여성 또한 의대에 입학하는 보다 인턴이나 R 들어가는 것이 어려웠다.
      • 유대인들도 심한 반유대주의 때문에 I R 되는 것이 어려웠다.
        • 그렇지만 유대인들은 'excellent Jewish hospital' 있었기에 흑인이나 여성보다는 조금 나은 상황에 있었다. 대표적으로 NY Mount Sinai 병원.
      • I R 학생에게 상당한 스트레스였던 것처럼, 병원에도 엄청난 스트레스였는데 왜냐하면 다른 병원과 학생 모집을 놓고 경쟁해야 했기 때문이다. 학생들은 월급이 아니라 교육이 갖춰진 곳을 찾아갔다.
      • 부속병원들은 community hospital보다는 걱정이 했지만, 서로서로 상당한 경쟁을 했다.
      • 이러한 상황은 병원이 다른 병원과 비교하여 다른 종류의 교육이나 서비스를 하는 것에 대한 근본적인 제한점이었다. 서비스나 교육의 질이 나쁘면 학생들은 곧바로 다른 병원이 지원했다.
    • Stresses and Support
      • I R에게 24시간 내내 책임을 져야 한다는 것은, 24시간 내내 일을 해야 한다는 것과 같은 뜻이었다.
      • 인턴이 하는 일의 대부분은 교육적 목적이 있었다. 인턴은 배우기 위해서 (컨퍼런스, 회진, 세미나, 강의 등등) 있는 것이었다. 하지만 routine work 양은 어마어마했다.
      • GME 위해서는 '병원 문화' 완전히 익숙해져야 했다. 인턴은 병원에서 살아야 했고, 대부분의 시간을 그곳에서 보냈으며, 병원은 적극적으로 결혼을 하지 못하게 했다.
      • I R 병원 밖에서 살며 출퇴근하는 학생보다 수도승적인 삶을 살고 있었다.
        • Nights off call, 방학도 없다.
      • 대부분의 부속병원에서 부실한 음식과 노후한 주거시설, 부족한 복지 시설에 대한 불만이 있었다.
      • House staff 임상경험이란 상당부분 운에 의존할 밖에 없는 것이었다. 학생의 열정이나 돕고자 하는 의지, 기술적, 행정적 지원, 배정받은 층의 간호 지원 정도, 날씨(날씨에 따라 환자가 달라짐) 같은 것들이 중요했다.
      • 또한 인턴이 어떤 주치의와 일을 하게 되느냐도 중요한 요소였다.
      • 녹초가 되어버리는 업무시간과 열악한 근무조건을 생각하면  인턴의 삶을 WWI이후의 노동자의 삶과 비교하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 하지만 그들은 자신을 '전문직'으로 보았으며, 저항을 하더라도 공손했고, 무엇보다 노동자들과는 다르게 그들은 그들의 선택에 의해 그곳에 있는 것이었다.
      • 이렇게 일이 고되긴 했지만, 다양한 지원도 있었다. 우선 의식주가 해결되었다.
      • 또한 faculty 개인적인 친분을 쌓을 있는 것도 장점이었다.
      • 종합적으로 이와 같은 house staff 경험은 인턴으로 하여금 힘든 일을 버텨내고 책임의식을 기를 있는 무수한 메커니즘을 가지고 있었다.
    • Graduate Medical Education and the Public Interest
      • 20세기 초반, specialization 진료에서 중요한 부분이 되었다.
      • WWI동안 의학교육자들은 GP specialist 의해서 사라지지 않을까 걱정했다. 훈련받은 전문의가 필요하다는 것에 대해 반대하는 이는 없었다. 다만, 구체적으로 명이나 필요한가를 몰랐던 것이다.
      • Specialization 관한 논의는 미국에서의 오래 논쟁거리 하나인 '개인의 자유 vs 사회적 필요' 논쟁에 따라 점점 복잡해져갔다.
        • 시스템의 통제 없이는 많은 의사들이 postgraduate course 밟고 specialist 것이었다.
      • Specialization되는 하나의 route로서의 Residency system 만들어진 것의 가장 중요한 의의는 GME 국가적 specialist 필요와 균형을 맞추게 것이다.
      • Specialist 제한은 일부분 market force와도 관계가 있다. 'position' 수가 적었던 것이다.
      • 또한 specialist 제한은 사회적 목표를 위한 개인적 열망과도 관련이 있다. Residency 권한이 아니라 특권으로 간주되었다. Residency specialization 엘리트나 일부 좋은 계층을 위한 것이었다.
      • Specialization 의대 졸업생들 사이에서 유명세를 얻는 길이긴 했지만 WWII 이전 MS에서는 generalism 명예롭게 여겼다. (general specialty practice 사이의 균형을 설명하는데 도움이 되는 사실이다.)
        • 저명한 specialist academic leader 그들을 일차적으로는 Generalist, Specialist 다음(generalists first, specialists second) 이라고 생각했다.
      • Medical faculty 이러한 상황을 진지하게 받아들였다.
        • Peter Bent Brigham Hospital : 최선의 임상교육의 기반을 위해 specialty ward 대신 general medical ward 만들겠다.
      • 따라서 국가적 차원에서 보았을 WWII이전의 GME generalist specialist 사이의 적절한 균형을 잡아가고 있었다.
        • 그러나 가장 문제는 검사를 의뢰하는 것에 있어서의 신중함(discretion) 거의 교육되고 있지 않다는 것이었다.
      • 부속병원에서의 과도한 검사 의뢰는 불가피하면서 또한 허용되는 것이었다.
        • "환자 care보다 의사의 교육을 위해서 검사가 이뤄진다"
      • 이러한 것을 고려해도, 교육, 연구, 진료에 필요한 것보다도 많은 검사가 이뤄지고 있었다.
        • 이것은 주로 주치의가 인턴을 가르치는 방식과 관련이 있다. 인턴에게 ' 검사를 해야 하는가' 가르치기보다는 단순히 잘못했다고 꾸짖는 일이 많았다.
      • 이와 같은 Faculty 실수는 진료가 이뤄지고 있었던 환경의 풍요로움(environment of abundance)에서 기인한 것이기도 했다.
        • 예를 들어 가끔 resource 부족한 상황에서는 인턴들은 적은 , 하지만 적절한 검사를 의뢰하였다.
      • 대공황의 시기에도 인턴들은 거의 무제한의 자원을 활용할 있었다. GME 이미 당시부터 - 후에 엄청난 경제적 영향을 불러오게 - 낭비가 심한 진료 스타일을 촉진시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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