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Chapter 2. The American Medical School Between the World Wars
    • 적어도 표면적으로는 미국 교육의 다른 분야에 비해서 MS 교육은 목적이 학교마다 그다지 다르지 않았다.
      • 사실상 모든 physician 사회적 특권층이었기에, 공공 교육의 존재의 이유라 있는 심지어 사회의 진보 조차 의학교육에 있어서는 그다지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 또한 학생과 faculty 유대관계도 undergraduate branch에서보다 훨씬 끈끈했다.
      • 대부분의 college에서 대학은 그냥 놀러 오는 곳이었다.
      • 하지만 MS에서 학생들은 매우 진지했다.
    • 이러한 이유로, WWI이후의 MS들은 그들의 1 목적이 academic 것이라는 것에 반대하지 않았다. 시기에 외부의 요구(대규모 인구에 대한 clinical service 대한 요구 또는 health care system 문제를 해결하자는 요구) 매우 적었다.
      • WWII 이전 교육과 연구와 진료는 다리가 개인 의자와 같이 상호 보완적인 것이었다.
    • 미국 의학교육에서 '조용한' 시기로 여겨지는 interwar period 기간은 실제로는 상당히 역동적인 시기였다. 의학연구가 진보했고, Flexnerian revolution 관련된 가치들이 퍼져나갔다.
    • 누가 비대한 조직의 초창기 운전대를 잡았을까(drove this incipient juggernaut)? 굳이 누군가가 있다면 그것은 연구에 대한 medical scholar들의 열정이었다.
      • Investigator 당시의 긴급한 의학적 문제들(acute disease) 해결했다는 것은 대중들 뿐만 아니라 medical scientist사이에서도 공히 인정하는 사실이었다.
      • 그러나 여전히 대답하기 어려운 문제는, 분야가 아니라 intellectual and social circumstance 있어서는 도대체 언제 faculty laboratory 중심인 MS 대중들에게 기여를 했느냐는 것이다. 문제는 chronic disease medical care system으로 인한 문제들이 생겨나는 20세기의 후반 50년동안 시험대에 오르게 된다.
    • Education
      • WWI이후 MS들이 가장 중시한 가지 기능이 있다면 교육이었다. Medical student House officer들이 physician 되는 .
      • MS 의사를 키워내는 사업이었다. 19세기에는 가르치는 것에만 신경을 썼다. 그러나 이후에는 교육과 연구와 진료에 신경을 써야 했다.
      • Medical faculty 교육에 헌신하는 정도는 상당했다. Faculty 자체가 적어서 교육에 많은 시간을 써야 했고, Cornell 경우에는 전체 지출 연구의 5, 밖의 다른 모든 소비의 4 정도의 돈이 교육에 사용되었다.
      • 모든 사람들이 교육에 신경을 썼다. 가장 senior faculty student laboratory clinic 자주 방문했고 학생을 알았다.
        • George Corner 같은 premier anatomist
      • 임상학과에서도 다수 faculty 교육에 투입되었다. Departmental chairmen 매일 회진을 돌았고 과거력 문진을 했고, 신체검진을 하고, 진단과 치료 지침을 내리고, 케이스 회의를 했다.
        • Soma Weiss : Peter Bent Brigham Hospital physician in chief.
      • Corner Weiss 그들의 헌신이나, 일에 대한 태도나 가치에 대해서 여러 사람들의 귀감이 되었다.
      • 비록 이름이 전해져 내려오는 레전드로 남은 교육자들은 없지만, 전국적으로 faculty 조용히, 열심히 일했고 의학에 전념했으며 학생들에게 헌신했다.
        • 교수들과 닿지(touched) 않은 학생은 거의 없었다.
      • Educating physician에게 MS는 public trust 같았다. 그들의 임무는 훈련된 practitioner 양성하는 것이었고, 국가의 건강은 그들이 키우는 physician 질와 양에 달려 있다고 생각했다.
      • WWII이전에도 국가적 health 단순히 의사를 키워내는 것보다 중요시했던 사람들이 있다.  그렇지만 시기에는 의사를 키워내는 것이 nation's health 지키는 것의 핵심이라는 인식이 일반적이었다.
    • Research
      • Modern MS 선두주자는 교육에 대한 확실한 임무를 정했다. 그들의 즉각적인 구성요소는 학생이었고, 목적은 교육이었다.
      • 미국 의학 연구에서 "professionalization" 역사학자들이나 사회학자들의 말을 빌려 쓰자면 WWI 이전부터 이미 시작되고 있었다.
        • Biomedical 이란 단어조차 존재하지 않던 시기에 대부분의 의학 연구는 일부 엘리트 MS에서만 이뤄졌다. 그러나 질과 양은 엄청난 속도로 성장했다.
      • 특히 인상적인 것은 standard 확립해가고 있는 10~15 학교의 성과였다.
      • 전쟁 사이의 기간동안 modern 의학연구의 많은 특성들이 분명해졌다.
        • Outpouring of scholarship 임상과 기초의학 모두에서 엄청났다.
      • 기간에 있었던 다른 중요한 지표는 미국 의학연구의 성숙도가 확연해졌다는 것이다. 신호 하나는  preclinical dept faculty WWI 이전의 physician-scientist 아닌 점차 Ph.D. 연구자들로 채워지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 전쟁 사이의 기간은 medical scholarship 번영한 시기였다. Preclinical 영역에서 새로운 지식이 모든 분야에 걸쳐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생화학, 생리학, 약리학..
      • 질병의 원인과 기전에 관해서도 비슷한 진보가 이뤄졌다. 질병을 일으키는 미생물들이 새롭게 발견되었다. Clinician 의한 환자 중심의 연구가 활성화되었고, 결과로 질병의 "pathophysiology" 점차 밝혀졌다.
      • 의사들에게 가장 중요했던 것은 치료법의 현저한 발전이었다.
        • Surgery, sulfonamide drugs…(table 1)
      • 비록 이러한 발전을 나중의 high-technology 시대의 발전에 비하면 사소한 것이라 할지도 모르지만, 새로운 제약 분야의 발전이나 정교한 분자 수준의 발견은 경외심을 불러일으킬 했다.
        • Pestilential(역병을 일으키는) 질환들은 통제가 가능해졌고, 이후로는 만성, 퇴행성 질환이 주된 mortality morbidity 원인이 된다.
      • 미국이 의학연구에서 국제적 리더십을 갖춰가는 과정은 다른 모든 분야의 발전이 동반되어 일어난 것이었다. 1930년대 중반 미국은 의학연구 뿐만 아니라 유전학, 물리학, 천문학 등에서도 국제적 리더십을 갖추고 있었다. WWII 무렵에 미국은 세계에서 가장 앞서나가는 과학 연구가 이뤄지는 곳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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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Interwar period 미국 의학연구는 20세기 미국의학교육을 이해하기 위해 중요한 가지 특징을 갖추고 있었다. 번째는 preclinical department 연구이다.
        • 전임상 분야 faculty 의학의 발전이 practical science 되기 위한 문제들을 연구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연구는 나중에 training과의 연관성이 분명해 수도 있지만 우선은 그저 "relevant" 정도의 것들이었기 때문에 clinical discipline 하녀(handmaiden)이라 불렸다.
      • 과학지식은 항상 과도기(in transition) 있으며, 전쟁 사이의 기간동안 전임상 과학의 발전이 눈부셨다. (생화학 ..)
      • 그럼에도 WWII 이전 전임상 과학자들은, 특히 미국에서는, 직접적으로 의학적 중요성을 가지는 문제에 주로 집중하고 있었다.
        • 저명한 생화학자인 Otto Folin 혈액, 소변, 조직의 화학적 구성을 분석하는 방법을 만듦으로써 유명해졌다.
        • 전임상 과학자들과 clinician 사이의 공동연구는 매우 흔했다.
      • 전임상과학이 의학 중심의 연구를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으나, 중에서도 연구의 가장 작은 단위가 "세포"라는 것이 하나였다. 결과 과목간의 경계는 불가침한 것이 되었다. 생화학은 생화학이었고 생리학은 생리학이었다.
      • 번째 특징은 임상 분과의 연구 또는 임상 연구의 목적에 관한 것이다. 시기 임상연구의 중요한 특징은 환자에 대한 연구를 한다는 것이었다.
      • 당시 남겨진 철저한 진료 기록을 보면 임상 연구에서 환자를 얼마나 중요하게 여겼는지를 있다.
        • Henry A Christian 모든 환자에 대해서 기록된 병원 기록물을 "greatest single achievement"라고 하였다. 사람은 나중에 Hand-Schuler-Christian disease 발견하게 된다.
      • WWI이후 임상 연구는 성숙한 다음 단계로 들어서게 되는데, 연구의 실험적 방법이 질병이나 치료에도 도입된 것이다.
      • 그러나 냉정하게 살펴보면 physiologically oriented clinical investigator 했던 연구는 전통적인 clinical researcher 했던 것과 별반 다른 것은 없었다. 당시의 새로운 것은 "과학을 bedside 가져왔다" 것이다. 환자를 면밀히 살펴보고 질문을 떠올린 다음, 실험실로 가서 답을 찾기 위한 연구를 했고, 답을 통해 병태생리를 이해하고, 종종 진단이나 치료에까지 연결되기도 했다.
      • 번째 특징은 학생들이 일반적으로 배우는 내용과 최신 의학연구에 그다지 차이가 나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것은 학생 교육에 대한 끊임없는 열정을 설명하는 것에 도움이 된다. 이것은 faculty 매우 가까이에서 접할 있다는 점에서 학생들에게 있어서도 매우 좋은 점이었다.
      • 번째 특징은 "통계적 유의미" 없이도 행세했던 그들의 높은 권위(high authority)이다. 의학연구에서 numerical method 오래 전부터 사용되어오긴 했지만, 수학적으로 무척 단순한 수준의 것이었다.
        • Koch's postulates (미생물이 질병의 원인이라는 것의 criteria) 조차 '통제군' 개념이 없다는 사실이나, 최초의 randomized controlled trial WWII 직후에나 행해졌다는 사실이 이러한 것을 보여준다.
      • 의학 연구자들이 아닌 통계를 가지고도 권위있게 말할 있었던 것은 그들이 다뤘던 문제의 특징이 그러했기 때문이다. 바로 acute disease이다. 급성 질환에 대해서는 timeframe 상당히 압축되어 있기 때문에 결과가 단순하게 죽느냐/사느냐로 곧바로 확인되었고, 복잡한 통계는 그다지 필요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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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성공적으로 많은 급성 질환을 통제하게 이후, 대중들은 의학연구를 매우 높은 무언가로 보았다.
      • 대중의 이러한 과찬을 강화시킨 것은 researcher 자신들의 태도였다.
        • 그들은 개인적 금전적 보상에는 그다지 관심이 없었다. Academic medicine 통화(通貨) 돈이 아니라 publication이었다.
      • 환자를 대하는 태도만큼 MS commercialism 대한 태도를 보여주는 것은 없다. 그들은 의학연구의 목적은 공공의 복지를 향상시키는 것이지 개인이나 기관의 재정적 이득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 물론 모든 사람이 이렇게 생각하는 것은 아니었겠지만, 이러한 태도는 가장 중요한 학교(JHMS, Harvard) 정책이기도 했다.
    • Patient Care
      • Modern medical school 번째 임무는 patient care였다. Faculty private practitioner에게 자문을 해주었고, 인턴이나 레지던트를 관리했다.
      • Clinical teacher로서 뛰어난 사람은 누가 있었을까? 임상연구가 WWI이후 성숙하기 시작하면서 이러한 질문은 쉽게 대답할 있는 것이 아니었다. 임상연구는 다른 연구와 마찬가지로 집중할 있는 시간이 충분히 필요했고 분야 연구를 위해서 투자해야 것들은 점차 많아졌다.
      • 그렇지만 clinical investigator들은 환자를 보는 것을 줄이려 하지 않았다. "Triple threats" (교육, 연구, 진료를 모두 하는 ) 가능했고, 존재했다.
      • Nontechnological era 환자 care 주로 bedside skill  임상적 감각(acumen) 의지했다. 이들 master clinician보다 환자에 대해서 많은 정보를 얻고, 정보를 활용할 있는 사람은 없었다.
        • Authur L. Bloomfield, David P. Barr .
      • 임상적으로 뛰어난 사람들이 full-time clinical faculty 뿐만은 아니었다. 수많은 private practitioner들도 강력한 임상적 교육적 기술을 갖추고 있었고, '자발적으로' MS 귀중한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었다.
      • Clinical faculty 환자 보는 것을 진지하게 하기 했지만, 거기에 드는 시간을 특별히 늘리려고 하지도 않았다. Blalock faculty 만약 너무 많은 진료를 하면 오히려 하루 수술해서는 제대로 연구를 없다고 꾸짖었다.
      • 임상 교수들에게 있어서 university identity 우선이었다. 그들은 스스로는 students of problems, trainers of future generation 이라고 생각했다.
      • 비록 많은 faculty 보는 환자의 수는 상대적으로 적었지만, 미국 medical service에서 MS teaching hospital 하는 역할이 적었다고 보는 것은 옳지 않다.
    • Faculty Culture
      • Pre-Flexnerian period 비교할 1920년대의 MS들은 크고 복잡한 조직이었다.
      • 하지만 와중에도 MS 형식에 얽매이지 않고(informal), 마음이 맞는(congenial) 장소였다. 학교들이 faculty scholarly leisure 또는 동료와의 밀접한 관계나 토론에 개입할만큼 과도하게 크다거나 관료주의적이지는 않았다.
        • 시기는 미국 의학 역사에서 유일하게 WWII이후에 심해진 size, 경쟁, 재정의 문제로부터 자유로웠던  시기이다.
      • 이시기의 faculty life "threadbare gentility(낡아서 올이 드러난 고상함)"라고 불렸다. Threadbare 당시 박한 월급을 의미했다.
        • 상당히 좋아진 것은 맞지만 여전히 academic income 성공한 practitioner 버는 사이의 차이는 컸다.
      • 경제적인 박탈감은 낮은 rank 학교에서 심했다.
        • "소박한 수준의 편안함을 누리고 싶지만, 빚을 갚아나갈 돈도 없다"
      • Academic medicine에서 경제적인 보상이 상대적으로 적은 시기였다면, 정서적인 보상이나 삶의 질적인 측면에서는 가장 좋은 시기였다. 당시 medical researcher들은 satisfying하고 즐거웠다고 언급하고 있다.
        • 시기의 research grant 연구를 하기 때문에 그만큼 주어지는 돈이었지, faculty 시간을 담보로 주는 돈이 아니었다.
      • MS 작은 사이즈, scientific department 임상 지향, 그리고 임상연구의 학문적 확립에의 헌신은 대부분의 WWII이전 MS에서 전례없는 조화와 협동을 가능하게 했다.
        • 'MS 가족이다' 인식이 있었고, 임상 분과들은 전임상 분과를 지원해주기 위해 환자를 보아서 얻은 수입을 떼어주곤 했다.
      • WWII 이전의 MS social life scientific life 혼합되어 있었다.
        • Journal club 금요일 저녁 Harmonie club에서 했고, Cosmopolitan Club, Peripateric Club 등이 유명했다.
      • MS에서의 삶에 개인의 삶이란 없었다. '직장의 생활 끝나는 지점' '개인의 삶이 시작되는 지점' 어디인지 모호했다. Faculty wives 주기적으로 항생들을 초대해서 차를 대접했고, 그룹 토읜느 주로 저녁에 이뤄졌다. House officer(인턴) 병원에 살면서 결혼도 못하고 항상 일만 했다.
      • WWII이전의 학교를 주름잡고 있던 사람들은 senior faculty, 특히 주임교수(department chairman) 였다. 그들의 지위는 의심의 여지가 없었고, 임상 분과에서 주임교수의 힘이란 행정권 뿐만 아니라 임상가로서의 권위에서 나오는 것이기도 했다.
      • Junior faculty 능숙하게 MS 운영을 도왔으나 그들의 삶은 불안정했다. 임금은 낮고, 승진의 기회는 적었다.
      • MS라는 '가족'의 일부는 voluntary faculty였고 주로 private practitioner였던 이들은 teaching hospital에서 일한다는 title이나 특권을 위해 기꺼이 자신의 시간을 들였다.
        • 대부분의 학교에서 part-time full-time 간의 단결심은 매우 강력했다.
      • WWII 이전 MS에서 이와 같은 조화로움은 그들의 목적에 응집성이 강했기 때문이다. 연구, 교육, 진료가 서로 얽혀 있었다.
        • "자신의 관심분야가 무엇이든 의사는 꾸준히 환자를 보아야 한다"
      • 시기 MS들의 다른 특징은 intellectual honesty 대한 높은 기준이었다.
        • 당시 모든 과의 주임교수가 자기 과에서 나온 모든 논문을 읽는 것이 당연한 일이었고, 이런 분위기에서 '사기를 친다' 것은 있을 없는 일이었다.
        • Harvard 생리학자 Walter Cannon 자신의 실험실에서 일한 학생들의 논문에 (자신이 열심히 도와줬음에도 불구하고) 자기의 이름을 뺐다. 이렇게 해야 학생들의 연구 열정을 높일 있다고 믿었다.
      • WWII이전 MS 궁극적인 특징은 그들의 실수를 기꺼이 드러내고자 하는 의지였다. 가장 중요한 conference mortality conference였다. 또한 case report 내서 실수나 실패 사례를 토론하고자 했다.
      • 매년 medical faculty 연례학술대회(annual scientific meeting) 통해서 새로운 지식을 습득했다. 어느 분야나 이러한 것은 마찬가지였으나 매년 Atlantic City에서 열리는 가장 중요한 meeting clinical scientist에게 특별히 중요한 것이었다.
        • "Atlantic City"라는 이름은 도시 이름이 아니라 academic medicine 대한 개인적, 지적 끈끈함을 보여주는 단어였다.
      • '가족'이라는 은유적인 비유는 거기서 '왕따' 당하는 사람이 있다는 뜻이기도 했다. Medical faculty 대부분의 대학 faculty처럼 대부분이 기독교 백인 남자였다.
        • 아마 African-American medical scientist 가장 뛰어난 예는 Vivien Thomas 것이다. Blalock 아래에서 배운 Thomas, 비록 Blalock Taussig "blue baby" operation 이라는 수술의 이름에 영원히 세겨진건 Blalock 이름일지 몰라도 실험실에서 수술 기술을 완성하고, 번째 수술에서 Blalock guide 것은 Thomas였다.
      • 여자 faculty 비슷한 - 비록 심했지만 - 어려움이 있었다. 여자 faculty 봉급은 대개 낮았고, 20세기의 절반동안 여자 학장을 임명한 학교는 Woman's Medical College of Penn. 뿐이었다.
      • 유대인들도 academic medicine에서 조직적인 차별을 당했다. WWI이후에는 자질있는 유대인들의 professorship 대한 열망은 상당했던 반면 이민 배척주의(nativist) 분위기도 만연한 상태였다. Medical faculty 대해서 공식적이든 비공식적이든 유대인들의 쿼터가 배정되어 있었다. 하지만 '유대인'이라는 딱지는 항상 따라다니곤 했다.
      • 많은 유대인들이 academic medicine에서 뛰어난 커리어를 쌓기도 했지만, 편견은 사라지지 않았다.
        • Flexner형제는 반유대주의에 발끈했다. Yale 유대인 faculty들은 그들이 다른 사람들보다 뛰어나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 이러한 WWII이전 MS 모습은, 마치 어느 가족에서나 그렇듯이, 좋은 감정만 가지고 있었던 것은 아니라는 것을 보여준다.
        • 종종 갈등이 표면화될 때가 있었는데, 특히 새로운 주임교수니 clinical chief 임명할 그랬다.
      • 그러나 어떤 faculty 마냥 해나갈 것이라는 보장은 없었고, junior faculty 아무 이유 없이 질책을 당하곤 했다.
      • 갈등이 있었던 부분은 salary 관한 것이었다. Preclinical faculty clinical faculty 높은 salary 기분 나빠했다.
      • 심지어 같거나 비슷한 내에서도 봉급에 관한 불화는 종종 있었는데, 'salary range' 달랐기 때문에 associate professor full professor보다 높은 연봉을 받기도 했다.
      • MS governance 대한 갈등도 상당했다. 다양한 사이의 권력관계가 생겨났다.
      • 시기 MS 가장 갈등은 - 20세기 내내 MS내에 존재하는 - 연구와 교육 사이의 tension이다.
      • WWII이전의 MS 눈에 띄는 하나는 거의 모든 학교가 연구에 중점을 두었다는 것이다. 그에 따라 Academic medicine에서 대부분 학교는 얼마나 논문을 냈느냐를 승진 기준으로 삼았고, 연구에의 강조는 class size 제한시키려는 주장의 주요한 근거이기도 했다.
      • 연구에의 강조는 elite 학교 뿐만 아니라 대부분 모든 학교에서 일어나는 일이었다.
      • 아마 이를 가장 보여주는 하나는 자신의 연구를 널리 퍼뜨리고자 하는 faculty 내재적 동기(primal drive) 것이다.
        • Faculty 가진 가장 야망 하나는, 미래의 연구자로서 자기와 같은 사람을 키워내는 것이었다.
      • 하지만 이런 연구에의 강조가 교육이 소외되었음을 뜻하는 것은 아닌데, 왜냐하면 WWII이전의 MS 연구에 집중했던 것은 의도적으로 그랬다기보다는 우연히 일어난 것이기 때문이다. senior 교수는 "교육은 이제 전반적으로 좋아졌다" 라고 했다.
    • Diversity and Development
      • 미국의 MS 상당히 편차가 컸다.
      • Philadelphia보다 이러한 모습을 보여주는 곳은 없을 것이다. (Pennsylvania, Hahnemann, Temple ..)
      • MS 평가는 스펙트럼을 따라 분포한다. 12~15개의 우수한 학교가 있었고, 가장 좋은 평가를 받는 20개의 학교가 있었다.
      • 학교는 평판만큼이나 그들의 mission 다양했다.
        • 나가는 학교는 전국적인 지지기반을 가지고 있었다.
        • 일부 소수 학교는 학교의 목표가 무엇인가에 대해서 갈등이 있기도 하였는데, 예를 들어 Michigan public school로서 state 대한 책임감도 느꼈지만, 상위권 학교로서 교육과 연구에 대한 욕심도 있었다.
        • 목적은 숭고했으나, 지갑은 얇았던 학교도 있다. Woman's Medical College 또는 African-American 많이 받은 Meharry and Howard.
      • WWI이전보다 전반적으로 학교가 많이 발전했지만, 하위권 학교들은 여전히 골치거리였다.
        • 학생들은 수업 외에 읽을거리를 찾아서 공부해야 했고, 예전의 틀린 답을 기준으로 새롭게 밝혀진 (실제로 옳은) 답을 쓰면 틀렸다고 채점 받기도 했다.
      • 그럼에도 미국 MS 전체적 질은 분명히 뛰어났다.
        • 인증기관들은 weaker school 대해서 자격을 박탈하는 대신 probation기간을 있었다.
      • WW사이의 기간은 미국 MS 상당히 성장한 기간이었다. Academic profession 연봉이 상승했고 연구의 양이 늘었다. 임상 과들도 생겨났다.
      • 1930년대는 대공황으로 인해서 MS 긴축을 해야 했던 기간이었다.
        • 하지만 와중에도 1930년대의 의학은 가장 많은 지원을 받는 분야였다.
      • 중요한 것은, 많은 지원금들이 연구에 투자되었다는 점이다.
      • WWI이전과 마찬가지로 state local government, foundation, 개인 기부자 등등에서 많은 자금이 지원되었다. 제약회사나 다른 기업들이 새로운 후원자로서 등장했다.
      • MS 그들이 속한 대학으로부터 지원도 꾸준히 받고 있었다.
      • MS 성장하면서 서로서로 경쟁하기 시작했다. 다른 학교 faculty 고액의 연봉과 승진과 좋은 연구기회를 주겠다며 뺏어오는 일은 흔한 일이었다.
        • "striking offer" "to hold our men"
      • MS 커지고 복잡해짐에 따라서 행정구조도 그만큼 복잡해졌다.
      • 행정이 단순하던 WWI이전의 학장직은 part-time 직위였는데, 1939년에는 full-time dean 일반적이었다.
      • 이러한 모든 성장에도 불구하고 당시의 MS 훗날의 거대한 조직체에 비하면 자그마한 것이었다. 그러나 WW사이의 기간은 MS 그들 자신의 운명에 대해 뚜렷한 주도권을 쥐게 기간이라 있다.
    • The Rise of Harvard Medical School
      • WWI 시작되자 MS내에서는 JHMS 전국적인 주도권을 잡을 것처럼 보였다.
      • 그러나 WWI 끝날 무렵 JHMS 그다지 압도적이지 못했다. 다른 학교들이 빠르게 따라잡고 있었다.
      • 1900년대 초반, Harvard 여전히 지역에서만 유명한 학교였고, 학생의 93% New England에서 학생들이었다.
        • 그러나 Flexner report 이후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발전한다. 여기에는 총장 Lowell 학장 Edsall 역할이 컸다.
      • 둘은 서로 긴밀히 협조하며 Harvard 발전시켜나갔다.
      • Upenn MGH에서 선구가적 임상 연구자였던 Edsall 학장에 오르자마자 학교의 revitalization 착수했다. 그는 연구 분위기를 구축하는 것을 가장 중요한 학장의 임무로 정했다.
      • Edsall 1935 퇴임할 무렵, Harvard laboratory , clinical resource 뿐만 아니라 연구 성과 면에서도 미국에서 가장 뛰어난 학교로 자리잡았다.
      • Harvard 국가적인 인지도를 얻는 과정에서 가지 질문이 던져졌다. "MS mission 연구인가 교육인가?" Lowell 학교가 너무 소수의 의사만을 키워내는 것이 문제라고 생각했다. 125명으로 제한된 학생 수는 1900 이후로 그대로였다.
      • Lowell Edsall 문제에 대해 토론하는 것에 두려움이 없었다. Eliot Lowell 의견에 동의했다.
      • Edsall 비롯한 medical faculty 이러한 president 의견에 동의하지 않았다. 그들에게 이미 학생 수는 충분히 많았다.
      • Lowell 남은 총장의 임기 동안 class size mission 대해 Edsall 설득하고자 했지만, 결국 성공하지는 못했다.
      • Edsall Lowell 전쟁에서 20세기 의학교육의 주요한 흐름과 아이러니를 읽을 있다. Edsall 여기서 '승리'하였다는 것은 MS 모대학(parent university)으로부터의 자율권이 높아졌다는 것을 뜻한다. 많은 MS 여전히 경제적 지원을 받고는 있었지만, 대학 내에서만 보면 전반적으로는 가장 self-sufficient 학과였다.
      • Lowell Edsall에서 있듯 Harvard mission 무엇인가에 대한 날카로운 의견 대립이 있었다. Lowell 많은 의사를 양성해야 한다고 주장했고, Edsall 연구가 중심이 되어야 된다고 했다.
        • Harvard에서 이뤄진 것들이 후에 leading school에서 전국적으로 일어나게 된다.
      • 앞의 내용들이 연구가 질병을 설명하고, 완화하고 치료하는 측면에 있어서 공공서비스적 성격이 없다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WW사이 기간에 있었던 의학연구들이 일반 대중에게 갖는 중요성은 분명하다. 하지만 이렇게 의학연구가 공공보건에 중요한 역할을 것은 그저 우연일 수도 있다. 만일 의학연구의 결과가 그렇게 즉각적이고 드라마틱하지 않았다면 정도의 대중적 인기를 얻을 있었을까? 여기에 미국 MS 근본적인 모호성이 있다. Public trust로서 사회적 역할이 중요한가 아니면 과학적 호기심을 채우기 위한 faculty 열망이 중요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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